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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강화산성(江華山城) 고려궁지(高麗宮址) 기행

林 山 2013. 11. 6. 19:07

이재민 작가의 초대로 박진화미술관(강화읍 대산리 789)에서 2013년 9월 29일부터 11월 24일까지 열리고 있는 제8회 생태환경을 위한 미술전 '생명 & NLL'(The 8th Art Exhibition For The Ecological Environment 'The Life & NLL')를 보러 실로 오랜만에 강화도에 가게 되었다. 강화도에 가는 길에 강화산성, 고려궁지,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평화전망대 등을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강화산성 동문에 들렀다.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은 고려 말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무인집정 최우(崔瑀)가 고려 민중들의 안위는 도외시한 채 자신의 일족과 고려왕조를 보전할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1232년(고종 19) 6월 최우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뒤 1234년 1월부터 고려 민중들을 동원해서 13여 년에 걸쳐 도성(都城)을 축조하고 송도(松都, 개성)와 비슷하게 궁궐을 지었다.


강화산성은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다. 면적은 약 30만 7,500㎡이다. 강화산성은 현재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며, 남쪽과 북쪽 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강도동문(江都東門) 망한루(望漢樓)와 강도남문(江都南門) 안파루(晏波樓), 강도북문(江都北門) 진송루(鎭松樓), 강도서문(江都西門) 첨화루(瞻華樓) 등 4개의 성문(城門)과 문루(門樓), 남장대(南將臺)와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등 3개의 장대(將臺), 암문(暗門, 성벽에 다락 없이 만들어 놓은 문), 2개의 수문(水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강화산성은 내성(內城)과 중성(中城), 외성(外城)이 있다. 내성(읍성)은 길이가 약 1.2km로 지금의 강화읍을 둘러싼 형태이며, 북쪽으로는 북산(北山)과 남쪽으로는 남산(南山m), 동쪽으로는 견자산(見子山), 서쪽으로는 북산과 고려산(高麗山)의 산줄기가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해 축성되었다. 내성에는 개경에서 옮겨온 고려 조정의 왕궁과 관아(官衙) 등 각종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중성은 내성을 수비하기 위한 토성으로 1250년에 쌓은 것이다. 길이는 약 9㎞에 이르며, 여덟 군데의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읍 옥림리-내성의 북쪽을 에워싸는 북산-남서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연화동과 남산-찬우물고개-대문고개-창리(倉里) 뒷산에 이르는 성곽이다. 현재 남쪽~동남쪽 구간인 찬우물 고개-대문고개-창리 뒷산에 이르는 구간에서 성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중성의 동문 선인문(宣仁門), 서문 선기문(宣祺門), 남문 태안문(泰安門), 북문 북창문(北昌門), 동남문 장패문(長覇門), 서남문 광덕문(光德門), 서북문 선의문(宣義門), 동북문 창희문(彰熙門) 등 8개 성문은 모두 송도의 성문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외성은 중성과 내성을 수비하기 위한 성으로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070척에 이르는 대규모의 토성을 쌓았다. 이 외성은 39년 동안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1259년 몽고는 고려와 강화하는 조건으로 내성과 외성, 궁궐과 관아를 모두 헐게 하였다. 고려 조정이 또 다시 강화로 천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몽고의 강요에 의해 자신들의 피땀으로 쌓은 강화산성과 궁궐을 철거하는 데 동원된 고려 민중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몽고군은 강화도의 곡식과 민가를 불태우는 바람에 강화 민중들은 기아와 비바람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려 조정과 최우 무신정권의 무능으로 성을 쌓았다 다시 허물어야만 했던 고려 민중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성을 쌓지나 말던지..... 이처럼 외세의 침략에 가장 먼저 나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이름없는 민중들이었으며, 가장 먼저 희생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도 언제나 힘없는 민중들이었다.   


조선 초 고려의 내성이던 강화성을 축소시켜 다시 축조한 강화산성은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1677년(숙종 3)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강화산성을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넓혀 대폭 개축하고,1709년(숙종 35) 강화유수 박권(朴權)의 중수를 거쳐,  1711년(숙종 37) 강화유수 민진원이 34년만에 완성하였다. 이때 체성(體城)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 위에 여장(女墻)도 설치하였다. 이후에도 보수공사는 계속되어 1966년에는 서문을 해체하여 복원했고, 1974년에는 남문 문루를 복원했다. 1975년에는 성곽을 보수했고, 1977년에는 북문을 복원했다.


강화산성은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학살하고 탄압하자 프랑스 함대가 침범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고종 8) 미국이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강화도에 침략한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이다. 또, 1876년(고종 13년) 2월 일본이 고의로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에 불법 침입케 한 사건을 일으켜 조선과 강압적으로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처럼 강화산성은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 현장이다.


강도동문(江都東門) 망한루(望漢樓)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강도동문은 신미양오 때 소실되었고, 현재의 동문은 2003년에 복원한 것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망한루 앞쪽에는 '강도동문(江都東門)', 뒷쪽에는 '망한루(望漢樓)'라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돌로 견고하게 쌓은 체성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망한루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홍예문 천정에 그려진 용은 좌청룡(左靑龍)으로 동쪽을 표현한 것이다. 


강도남문(江都南門) 안파루(晏波樓)


강도남문 안파루 현판 


강화읍 남산리에 있는 강도남문은 강화산성의 남쪽 문으로 1711년 세워진 것이다. 1955년 폭우로 허물어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안파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창호는 판문으로 되어 있다. 홍예문 천정에는 두 마리의 봉황새가 그려져 있다. 붉은 봉황은 남주작(南朱雀)으로 남쪽을 상징한다. 


강도북문(江都北門) 진송루(鎭松樓)


강도북문


강도북문은 강화산성의 북쪽 문으로 1975년에 복원하였으며, 다른 성문들에 비해 규모가 작다. 진송루는 다른 성문의 문루들과는 달리 지붕이 우진각지붕으로 지어졌다. 1711년(숙종 37) 숙종비(肅宗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남동생으로 노론(老論)의 영수이자 강화유수였던 민진원이 강화산성을 완성할 당시에는 북문의 누각이 없었으나,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웠다. 그뒤 누각이 헐려서 석축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강도서문 첨화루는 시간상 찾아보지 못했다. 강도서문은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웠으며, 침화루 편액도 그가 썼다고 한다. 홍예문 천정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호랑이 그림은 우백호(右白虎)로 이 성문이 서쪽에 있음을 알려 준다.  


다음에는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궁지(高麗宮址)에 들렀다. 고려궁지는 최우가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부터 1270년 다시 환도(還都)하기까지 39년 동안 고려의 궁궐터였다. 최우가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해서 지은 강화도의 고려궁궐은 규모는 작았지만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으며, 궁궐 뒷산의 이름도 송악(松岳)이라고 했다.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과 이궁(離宮), 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고려궁지는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궁궐로는 정궁인 연경궁(延慶宮)을 비롯해서 경령궁(景靈宮), 수창궁(壽昌宮), 용암궁(龍嵒宮), 장봉궁(長峰宮), 관서궁(關西宮), 강안전(康安殿), 건덕전(乾德殿), 장녕전(長寧殿), 만녕전(萬寧殿), 태묘 전각인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 등이 있었다. 고려 고종은 말년에 허황된 풍수설에 현혹되어 이궁이나 가궐을 짓기 시작했는데, 마니산에는 당시의 이궁지(離宮)가 남아 있다. 또, 전등사 뒤에는 삼랑성 가궐지(假闕), 선원면 도문고개 남쪽 언덕 송림 속에는 신니동 가궐지 초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1631년(인조 9) 고려궁지에 행궁(行宮)을 건립하고, 유사시 강화도를 피란지로 정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다. 궁궐로는 육상궁(毓祥宮), 어의궁(於義宮), 용동궁(龍洞宮), 명례궁(明禮宮), 수진궁(壽進宮)이 있었고,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들과 규장외각(奎章外閣)을 건립해 많은 장서와 문서가 보관되었다. 그러나 규장외각의 장서와 문서들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탈취해서 가져가 버리고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조선시대 관아(官衙)로서는 이아(貳衙, 이방청), 삼아향청(三衙鄕廳), 형옥(形獄),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연무당(練武堂), 중영(中營), 만하헌(挽河軒), 별효사청(別驍士廳), 명위헌(明威軒) 등이 있었다. 지금은 강화유수부의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만이 남아 있다. 


고려궁지(高麗宮址) 승평문(昇平門)


매표소에서 얼마를 더 주고 고려궁지와 초지진, 갑곶돈대 등 몇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입장권을 끊었다. 고려궁지만 보고 나머지는 들르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낭비가 되고 말았지만...... 


고려궁지 정문에는 승평문(昇平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궁궐의 정남쪽에 자리잡은 승평문은 양쪽에 삼층루(三層樓)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는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문의 네 모서리는 동화주(銅火珠)로 장식했다. 문안의 좌우에는 동락정(同樂亭)이 있었고, 작은 담장을 이어 신봉문(神鳳門)까지 연결되었다.


고려궁지


고려궁지는 1977년 보수공사를 하면서 담을 설치하고, 진입로 옆에 있던 강화동종을 옮겼으며, 경내에 보도를 깔았다. 당시 고려궁지의 발굴 작업을 했으나 건물터는 모두 인멸되어 초석도 없고, 고려시대 청자와 기와 조각들만 출토되었다.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동헌(東軒) 명위헌(明威軒)


승평문을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건물이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동헌(東軒)인 명위헌(明威軒)이다. 인조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종2품 관청인 강화유수부를 설치했다. 1638년(인조 16) 강화유수 김신국(金藎國)의 개수를 거쳐, 1769년(영조 45) 강화유수 황경원(黃景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때 동헌을 크게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달았다. '明威軒' 현판 글씨는 송나라 미남궁체(米南宮體)의 명필 윤순(尹淳)이 썼다. 


명위헌 강화유수 집무 모습


명위헌은 2중 장대석(長臺石)을 쌓은 기단(基壇) 위에 네모꼴의 주초석(柱礎石)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뒤, 겹처마 익공식(翼工式) 팔작지붕에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을 올렸다. 공포(栱包)는 화반(花盤)이 없는 간단한 형태의 초익공식(初翼工式)이며, 내부 가구(架構)는 2고주(高柱) 7량(樑)으로 되어 있다.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에 1칸은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정면 문짝은 모두 사분합(四分閤)의 세살문을 달았다. 대청마루에는 강화유수의 집무 모습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명위헌은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國防遺蹟) 복원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를 했다. 이후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위헌은 여러 차례의 개보수로 그 원형이 남아 있지 않다.


외규장각(外奎章閣)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조선 정조(正祖)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도서관인 외규장각에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한 왕실 관련 서적 1천여 종, 6천 권 가량을 보관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로즈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극동함대는 강화도에 침범해서 왕실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 191종(유일본 30종 포함) 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했다. 프랑스군이 지른 불로 외규장각과 함께 5천여 권의 책이 소실되었다.  


1975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촉탁 직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에 조선시대의 외규장각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그 목록을 정리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1991년 서울대학교는 정부에 도서 191종 279권의 반환 추진을 요청하였고, 1992년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목록을 프랑스에 전하여 도서 반환을 요청했다. 1993년 9월 한국과 프랑스의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경부고속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의 테제베(TGV)가 따 내기 위한 의도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 1권을 가지고 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프랑스는 반환 협상을 연기하거나 협상을 계속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 왔다. 이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서라도 약탈도서를 무조건 반환시켜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이 확산되었다. 2000년 10월 다시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을 '대등한 문화재 교환 전시' 형식으로 2001년까지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2010년 3월 한국 정부는 약탈도서에 대한 영구대여 방식을 프랑스 정부에 공식 요청했으며, 11월 12일 G20 정상회의에서 양국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를 5년 단위 갱신의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11년 4월부터 두둑질해간 지 145년만에 조선왕실 의궤 294권을 포함한 전체 297권의 외규장각 약탈도서가 4차례에 걸쳐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도둑질해 간 남의 나라 도서들을 돌려주지 않는 프랑스가 문화대국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프랑스는 더 이상 꼼수를 부리지 말고 외규장각 약탈도서들을 지체없이 반환해야 한다. 


강화유수부이방청(江華留守府吏房廳)


강화유수부이방청 (江華留守府吏房廳,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은 팔작지붕에 민도리 홑처마 건물로 니형 단층기와집이다. 온돌방이 8칸, 우물마루로 된 청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 모두 21칸이다. 건평은 220㎡쯤 된다. 


이방은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육방의 하나로, 이방청은 법전(法典)과 군무를 제외한 모든 사무를 전관한 곳이다. 이방청은 1654년(효종 5) 강화유수 정세규(鄭世規)가 세웠고,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수리하여 괘홀당(掛忽堂)이라고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1977년에도 크게 보수하였다. 이방청은 많은 개보수로 지금은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으나, 조선시대 지방관아를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


강화동종(江回鍾, 보물 제 11-8호)은 1711년(숙종 37) 강화유수 윤지완(尹趾完)의 주도로 사인(思印) 비구가 전통적인 종의 제조기법에 중국 종의 특징을 가미해서 만든 것을 그 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현재와 똑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종을 쳐서 강화성문(江華城門)의 여닫는 시간을 알렸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이 이 종을 약탈해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한다. 


강화동종은 원래 고려궁터 진입로 옆의 김상용 선생 비각 자리에 있던 것인데, 1977년 고려궁터를 보수하면서 궁터 안의 강화부종각으로 옮겼다가 균열이 심해 타종할 수 없게 되자, 1999년 12월 강화역사관으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강화부 종각에 있는 종은 강화동종의 모조품이다. 


회화나무(槐花) 보호수


강화부종각 바로 위쪽에는 나이가 400살이나 된다는 회화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서 있다. 높이는 20m, 둘레는 4m이다. 이 나무는 강화군 보호수 4-9-63호로 지정되었다. 나무의 밑둥치가 세 아름드리는 되어 보였다.


회화나무는 콩과의 잎이 지는 넓은잎큰키나무(落葉闊葉喬木)로 학명은 Sophora japonica L.이며, 영문명으로는 차이니즈 스칼라 트리(Chinese scholar tree)라고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한국과 일본 등지에도 분포한다. 키는 30m까지 자라며, 줄기의 둘레가 10m가 넘는 나무도 있다.  


회화나무는 가지를 넓게 펼치면서 크게 자란다. 잔가지는 초록색이며 자르면 냄새가 나는데, 자라면서 차츰 갈색으로 변한다. 잎은 어긋나고 1회 깃꼴겹잎이다. 잔잎은 7∼17개씩이고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며, 뒷면에는 잔잎자루와 더불어 누운털이 있다. 꽃은 8월에 흰색 또는 우윳빛으로 앙증맞게 피고 원추꽃차례로 달린다. 열매는 협과(莢果)로 염주 모양이다. 


회화나무는 한자로 '괴화(槐花)'로 표기한다. 홰나무란 뜻의 '槐'(괴)자를 파자하면 '귀신(鬼)'과 '나무(木)'다. 글자에서 보듯이 회화나무는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에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하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또 그 주위에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를 심는 제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궁궐이나 관청에 회화나무를 많이 심었다. 서원과 향교에도 벽사(辟邪)를 염원하면서 회화나무를 심었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를 집에 심으면 가문에 큰 인재나 대학자가 나온다고 하여 길상목(吉祥木)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임금은 때때로 관리에게 회화나무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 '선비목'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회화나무를 심은 뜻을 아는 사람들은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으리라. 


회화나무는 늠름하고 기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활엽수종 가운데 공해에 가장 강한 편이어서 조경수나 가로수, 기념수로 많이 심는다. 회화나무의 목재는 가구재로 이용한다. 물에 담그면 진노랑 색이 우러나오는 회화나무의 꽃봉오리는 천연염색의 재료로 쓰인다. 맥주와 종이를 황색으로 만드는 데도 쓴다.


회화나무의 꽃과 꽃봉오리를 한약명으로 각각 괴화(槐花)와 괴미(槐米), 열매를 괴각(槐角) 또는 괴실(槐實)이라고 한다. 괴화와 괴미는 지혈약(止血藥) 중 양혈지혈약(凉血止血藥)에 속한다. 성미(性味)는 약간 차고 독이 없으며(微寒無毒), 쓰다(苦). 양혈지혈, 청간사화(淸肝瀉火), 살충료창(殺蟲療瘡), 항암(抗癌)의 효능이 있어 변혈(便血, 장출혈), 치출혈(痔出血), 혈리(血痢), 토혈(吐血), 붕루(崩漏, 자궁출혈), 대하(帶下), 임파선염淋巴腺炎), 코피, 간열목적(肝熱目赤), 두통, 현훈(眩暈, 어지럼증) 등을 치료한다. 혈림(血淋), 하감복독(下疳伏毒), 치루(痔漏), 직장암(直腸癌), 음창습양(陰瘡濕痒), 옹저창독(癰疽瘡毒), 양매악창(楊梅惡瘡, 매독), 뇨혈(尿血), 각혈(喀血), 간화상염증(肝火上炎證)에도 응용할 수 있다. 비위허한자(脾胃虛寒者)와 임신부는 복용해서는 안된다.


괴화와 괴미의 약리작용으로 지혈작용, 모세혈관 투과성 감소, 혈압강하, 콜레스테롤강하, 항경련, 항궤양, 항방사능작용, 동상치료, 완만한 사하작용이 보고되었다. 이런 약리작용으로 동맥경화증, 고혈압, 두통, 어지럼증, 중풍, 뇌일혈, 가슴이 답답한 증세에 효과가 있다.  


괴각은 청열약(淸熱藥) 중 청열사화약(淸熱瀉火藥)에 속한다. 성미는 차고 쓰며 독이 없다. 청열사화, 양혈지혈의 효능이 있어 장열변혈(腸熱便血), 치종출혈(痔腫出血), 간열두통(肝熱頭痛), 현훈목적(眩暈目赤) 등을 치료한다. 괴각도 비위허한자와 임신부에게는 금기다. 회화나무의 가지와 나무껍질도 치질 치료에 쓴다. 


남산(南山)과 노적산(露積山)


송악(松嶽) 기슭에 서서 고려궁지와 남산(南山), 남산 너머 노적산(露積山)을 바라보았다. 남산의 능선을 따라 고려궁지를 방호했던 강화산성을 바라보면서 고려의 역사를 생각했다. 고려 왕조전제정권과 무신정권의 압제와 수탈, 요나라와 금나라에 이은 몽고군의 약탈과 살륙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했던 고려 민중들의 혼은 오늘날 그 누군가의 뜨거운 가슴속에 횃불로 되살아나 활활 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려 고종과 최우도 여기 이 자리에 서서 저 남산을 바라보았을까? 당시에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을 고종도 최우도 지금은 한줌 흙으로 변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사람들은 그래도 고종이나 최우를 부러워 할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인 것을.....


2013.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