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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6 - 추사고택 영당과 묘소

林 山 2019. 4. 10. 12:19

추사고택 안채 서쪽 뒤뜰에는 백송(白松) 한 그루가 서 있다. 중궈(中國)가 원산지인 백송은 600여 년 전 외교사절단에 의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회백색을 띠기에 백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무껍질의 백색과 녹색의 조화가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예로부터 절이나 정원에 기념수나 관상수로 심어 왔다. 중궈에서는 묘지 주변에 많이 심는다고 한다.


추사고택의 뒤뜰의 백송


고택 맨 서쪽 끝, 안채 바로 뒤에는 추사 영당(影堂)이 자리잡고 있다. 영당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김상무가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안채 뒤쪽 언덕 위에 세웠다. 추사의 오랜 벗 권돈인도 영당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추사 영당(影堂)


추사 영당의 '秋史影室(추사영실)' 현판


영당 출입문 위 벽에 걸려 있는 '秋史影室(추사영실)' 현판 글씨는 권돈인이 쓴 것이다. 관지에 쓴 '彛齋(이재)'는 권돈인의 호다. 권돈인은 시와 글씨에 능했다. 글씨는 특히 탕(唐)나라 초기의 서예가 우양쉰(歐陽詢)의 풍을 본받았다. 이 현판의 원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당의 추사 초상화


추사기념관의 추사 초상화


영당에는 추사의 제자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 1808~?)이 그린 대례복(大禮服)을 입은 추사의 초상화 모사본이 걸려 있다. 초상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미남자의 편안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봉안(鳳眼)에 미간을 널찍하게 그려 후덕한 인품이 느껴지며, 엷은 미색의 비단 바탕과 녹색의 옷이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19세기 초상화를 대표할 만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추사기념관에도 추사의 초상화 모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초상화 원본은 보물 제54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벗 권돈인은 1857년 초여름 이한철에게 관복을 입의 추사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추사고택의 영당이 완공되자 권돈인은 이한철이 그린 추사의 초상화를 추사영실에 봉안했다. 권돈인은 초상화에 직접 찬문(撰文)을 썼다. 추사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권돈인은 추사를 생각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하고 추모시 여덟 수를 지어 추사의 아들 김상문에게 주었다. 이 시들은 '이재시축(彛齋詩軸)'에 실려 있다. 추사가 가장 많이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은 권돈인이었다. 두 사람은 그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권돈인의 서체가 추사체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것도 그런 막역한 교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추사의 제자 허련도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과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등 스승의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허련은 추사의 지도를 받은 뒤 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허련은 스승 추사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두 점의 초상화에서 허련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추사도 격조 있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세계를 추구했던 허련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소치(小痴)라는 호를 직접 지어 주었다. 소치라는 호는 중국 10대 명화 중 하나인 '푸춘산주투(富春山居圖)'를 그린 따치(大痴) 황궁왕(黃公望)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황궁왕은 우젠(吳鎭), 니잔(倪瓚), 왕멍(王蒙)과 더불어 위안(元) 사대가(四大家) 중 한 사람이다. 추사는 허련을 조선의 황궁왕이라 보았던 것이다.  


과천 추사박물관의 허련 작 완당선생초상(개인 소장)


'완당선생초상'은 추사 말년의 모습을 그린 반신상이다. 봉황의 눈에 널찍한 미간, 반백의 풍성한 수염의 인자한 풍모에 보일 듯 말 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얼굴의 주름과 수염은 마른 붓질을 여러 번 반복하여 세밀하게 묘사하였지만, 오사모(烏紗帽)와 목 이하 의복은 몇 개의 먹선으로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이 반신상은 생전의 모습을 그린 것이기에 추사의 풍모와 성품이 잘 구현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그림은 추사의 다른 초상화들의 모본이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이라고 쓴 허련의 제서가 있고, 그 밑에 '소치허련사본(小癡許鍊寫本)'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부기가 있다. 부기 바로 왼쪽에는 '先生騎鯨後六十八年甲子夏吳世昌恭題(선생 서거 후 68년 갑자 여름에 제하다.)'라 쓰고, '世昌(세창)'과 그의 아호 '韋倉(위창)' 인장이 찍혀 있다. 


그림 왼쪽에는 '阮翁小照爲許小癡筆 先生從孫幸堂公 屬族人承烈藏之 先生風骨在海內千秋雖無丹靑可也藏者一辨香豈止爲七分之貌而已 海平尹喜求拜觀(추사 선생의 초상화는 허소치(허련)의 그림이다. 선생의 종손 행당공이 친척 승렬이 소장하도록 위촉했다. 선생의 풍골은 우리나라에서 천 년 동안 그리지 않아도 된다. 소장자가 한 번 그 향기를 분별한다면 어찌 잘 그린 그림에 머물 뿐이겠는가? 해평 윤희구는 절하고 보았다.'라고 쓴 제발(題跋)이 있다. '騎鯨(기경)'은 숭(宋)나라 때 시인 메이셩위(梅聖兪)의 '采石江贈郭公甫(차이싀쟝쩡궈꿍푸)'라는 시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는 탕나라 리바이(李白)의 죽음을 두고 '不應暴落飢蛟涎 便當騎鯨上靑天(응당 굶주린 교룡의 입에 떨어지지 않고, 고래를 타고 푸른 하늘로 올라갔으리.'라고 읊었다.


우당(于堂) 윤희구(尹喜求, 1867∼1926)는 구한말의 학자이다. 그는 1917년부터 2년 동안 발행된 '반도시론(半島時論)'의 집필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반도시론'은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총독의 정치와 식민지 지배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친일반민족 색채가 짙은 잡지였다. 윤희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명단 중 유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과천 추사박물관의 허련 작 완당선생해천일립상(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추사입극도)’은 허련이 추사의 '둥포리지투(東坡笠屐圖)'를 모방해서 그린 초상화다. 오른쪽 관지에는 '阮堂先生海天一笠像(완당 선생이 하늘이 닿은 바다에서 삿갓을 쓴 모습)', 왼쪽 관지에는 '許小痴筆(허소치가 그리다)’로 되어 있다.


추사의 스승 칭(淸)나라 웡팡깡(翁方綱)은 '치비푸(赤壁賦)'로 유명한 탕숭 팔대가의 한 사람인 둥포(東坡) 수싀(蘇軾, 1036~1101)을 스승으로 받들고 흠모했다. 그는 둥포상 3폭을 보소재(寶蘇齋, 소동파를 보배처럼 받드는 서재)에 봉안하고, 스승의 생일에는 '둥포수티에(東坡書帖)' 등을 진설하고 제를 지냈다. 3폭의 둥포상은 숭대 리룽옌(李龍眼)이 그린 '둥포진산샹(東坡金山像)'과 짜오즈구(趙子固)가 그린 '둥포옌베이리지샤오샹(東坡研背笠屐小像)', 밍(明)대의 탕인(唐寅)이 그린 '수원쭝궁리지투(蘇文忠公笠屐圖)'이다. '수원쭝궁리지투'에는 웡팡깡의 찬문이 적혀 있다.  


추사도 스승 웡팡깡처럼 수둥포를 매우 흠모했다. 스승의 보소재에서 둥포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추사는 칭나라의 남화(南畵) 화가로 유명한 우리(吳歷, 1632~1718)가 그린 '둥포리지투'를 얻어 직접 모사하였다. 추사가 그린 '둥포리지투(개인 소장)'는 수둥포가 정치적인 이유로 후이저우(惠州)에 유배되었을 때, 지인의 집을 방문한 뒤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평복 차림에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수둥포가 양손으로 옷자락을 걷어올린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길을 가다가 폭우를 만나 삿갓과 나막신을 빌린 수둥포가 옷자락을 쥐고 진창에서 뒤뚱거리자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고 한다. 얼굴에는 낭패한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후이저우로 유배된 지 3년만에 수둥포는 다시 베트남과 가까운 하이난따오(海南島)로 이배되었다. 추사는 수둥포 말년의 처지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동병상련이었을 것이다. 추사는 수제자 허련을 비롯한 제자들에게도 '둥포리지투'를 그리게 했다. 


청나라 여집(余集)의 '소문충공입극도(蘇文忠公笠屐圖, 출처 청경우독 블로그)


허련은 추사가 가장 아낀 제자였다. 허련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매우 위험한 제주도 바닷길을 세 번이나 다녀갔다. 바다 건너 제주도로 험한 풍랑을 무릅쓰고 찾아간 대정 마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스승의 모습을 본 허련은 가슴이 아팠다. 그 모습은 머나먼 중궈의 남방섬 하이난따오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수둥포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했다. 허련은 '둥포리지투'의 두상을 스승의 얼굴로 바꿔서 그렸다. 둥포를 향한 스승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려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은 바로 스승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을 담은 제자의 헌화(獻畵)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추사의 제주도 유배 시절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의 가장 큰 특징은 '둥포리지투'의 수둥포처럼 추사도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모습이다. 손철주(미술평론가)는 이를 동파와 같은 반열에 스승을 올려 놓고 싶었던 허련의 '둥포 코스프레'라고 했다. '둥포리지투'와 '추사입극도'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표정이다. 둥포의 얼굴이 폭우를 만나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낭패한 표정이라면, 추사의 얼굴은 세상일에 달관한 듯 온화하고 담담한 표정이다. 허련은 바로 유배지에서 궁핍한 귀양살이를 꿋꿋이 견디면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스승의 모습, 둥포를 넘어선 스승의 모습을 세상에 널리 전하고자 했다. 스승이 빛나려면 제자를 잘 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추사가 그랬다. 허련 같은 제자를 둔 추사는 제자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웡팡깡은 둥포를 흠모했고, 그의 서재 보소재는 그가 둥포를 추앙하는 공간이었다. 추사는 둥포와 웡팡깡을 흠모했고, 그의 제주도 적거지 귤중옥(橘中屋)은 그가 둥포와 웡팡깡을 추앙하는 공간이었다. 허련은 둥포와 웡팡깡을 흠모하고 추앙하는 그런 추사의 마음을 '추사입극도'에 담고자 했던 것이다.           


추사고택 남쪽 담장 바로 곁에는 우물이 있다. 추사의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다. 이 우물과 관현해서 예산 지방에는 추사의 탄생에 얽인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온다.   


우물


추사가 태어나던 날, 고택의 우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고, 뒷산인 용산(龍山)과 그 조산이 되는 팔봉산(八峰山)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는 것이다. 추사가 태어난 뒤에는 우물이 다시 샘솟고, 용산과 팔봉산의 초목이 생기를 회복하였다는 전설이다. 이후 인근 사람들은 추사가 팔봉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큰 인물이 태어날 때 주변 산천의 정기를 모두 끌어당겨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용산의 동남쪽 기슭 양지바른 곳에는 추사의 묘소가 있다. 우물에서는 바로 남쪽으로 바라다보인다. 낮으막한 언덕을 2단으로 만들어서 그 위쪽에 묘역을 조성하였다.  


추사 묘소


추사의 묘는 원래 그가 만년에 거주했던 경기도 과천에 있었다. 1937년 첫 부인 한산 이씨 묘에 추사묘와 두 번째 부인인 예안 이씨 묘를 이장하여 3위를 합장하였다고 한다. 봉분 앞에는 석상이 있고, 그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 한쌍이 있다. 석상과 북쪽의 망주석 사이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은 대좌(臺座) 위에 오석의 비신(碑身)이 올려져 있는데, 비신의 앞면에는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라고 새겨져 있다. 나머지 3면에는 비문이 적혀 있다. 대좌 앞면에는 '昭和十二年九月 日立(쇼와 12년 9월 일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쇼와(昭和) 연호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官裕仁) 덴노(天皇)가 쓴 연호다. 쇼와 원년은 1926년, 쇼와 12년은 1937년에 해당한다. 1937년 9월에 이 묘소를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 비석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正祖在宥, 右文崇儒, 冠絶百王. 於是, 碩學之士, 蔚然中興, 磊落相望. 若燕巖・淵泉・雅亭・貞蕤・茶山・杞園, 其尤也, 先生有大焉, 承諸賢之後, 恢弘展拓, 爲振古之通儒. 嗚呼, 何其盛也. 先生諱正喜, 字元春, 號阮堂, 又號秋史. 我慶州之金, 冑于新羅, 卿相于高麗. 麗季有諱自粹, 號桑村, 魁科仕至都觀察使, 逮鼎革, 自盡以樹大節. 八傳而諱弘郁, 號鶴洲, 以文章政事稱, 孝宗時以黃海道觀察使, 抗疏訟姜嬪寃, 忤旨遘禍. 後因兩宋文正言, 復其官, 肅宗朝褒贈吏曹判書, 諡文正, 於先生 爲七世祖. 高祖諱興慶, 領議政, 諡靖獻, 忠厚公正, 有古大臣風. 曾祖諱漢藎, 尙英祖女和順翁主, 封月城尉, 諡貞孝. 淸愼文雅, 貴不離士. 貞孝公喪, 主絶水漿而殉. 英祖書揭靈筵, 曰: “誠淺莫回, 嘉爾隨貞.” 正祖特命旌之, 曰: “烈女.” 祖諱頤柱, 右參贊, 贈左贊成. 諡靖憲. 德學俱優, 朝野倚望. 考諱魯永, 禮曹參判, 妣貞夫人南陽洪氏縣令諱大顯女. 先生實參判公季弟 吏曹判書 酉堂諱魯敬長子, 而入爲嗣. 本生妣贈貞敬夫人杞溪兪氏郡守諱駿柱女. 妊二十四月而生先生, 正祖丙午六月三日也. 六歲, 書春書帖于門, 貞蕤朴公, 見而異之, 訪於酉堂公而見先生, 大加稱歎, 曰: “當以學藝名世, 吾將敎而成之.” 純祖己巳成進士, 冬從酉堂公使于燕. 時, 翁覃溪方綱・阮芸臺元, 以間世鴻博名位俱隆, 一見先生, 莫逆也. 辨論經旨, 旗鼓當不肯相下, 乃以石墨書樓百架秘籍餉之. 於是, 昔之深資於父師者, 又左右逢原矣. 如, 吳蘭雪・朱伯韓・葉東卿・翁星原・李心葊・曺玉水・朱野雲・李墨莊・洪介亭・金宜園・近園諸名士, 皆慕與之交, 推以通儒. 厥後, 碑帖・畵軸・詩筩・文卷, 相屬無虛歲. 芸臺撰經解爲卷千四百, 十三經校勘記・經籍籑詁等書, 皆巨帙也, 當世諸大家, 莫之見, 特先寄先生草本. 覃溪卒時, 寄筆記一部, 精審四部書及詩義書法者. 又嘗摹寄歐陽文忠黃文節公像, 爲先生生日壽, 以二公生日亦在六月也. 諸名士, 亦於六月三日, 瀝酒作節, 爲圖而寄之. 申紫霞見覃溪燕室, 不留一物, 惟挂先生書數聯而已. 其見重如此. 己卯, 擢第, 歷 注書・翰林 奎章閣待制・議政府檢詳・經筵・春坊・玉堂・諫院・憲府, 常帶知製敎. 間爲御使湖西. 丁亥, 通政拜承旨, 遷輔德大司成, 吏・ 禮・ 兵三曹參議. 憲宗丙申, 嘉善除兵曹參判, 己亥, 參判刑曹. 庚子, 獄起, 辭連先生, 先是, 權戚, 害酉堂公, 讜論竄于島, 四載始宥還, 猶不饜, 且疾先生剛正, 滋欲置之死. 至是誣以浸異學犯不軌, 駭機蒼黃, 禍在不測. 先生擧止如他日, 從容對簿, 辨析峻整, 雖捃摭無所執, 卒追奪酉堂公官爵, 投謫先生濟州. 濟絶島也. 海鉅又常多風, 人涉恒旬月. 先生方解舟, 忽大風濤以霹歷, 舟中人皆喪魄, 先生凝然坐柁頭, 有詩高詠聲, 與風濤相上下, 因擧手指點, 曰: “篙師力挽柁向此.” 舟乃疾, 朝發夕至濟亦異矣. 居濟九年, 盖閒適溫書, 訓迪州人, 人文大開. 哲宗辛亥, 權相國敦仁, 駁議宗禰之禮, 忤權戚, 竄連山. 先生坐主使, 遷北靑, 先生談笑, 手整書簏而行. 壬子宥還, 居果川酉堂公墓下, 五年而卒. 先生胚胎異稟, 天分過絶人, 甫弱冠, 貫徹百氏若山海之崇深, 及麗澤于中土學士大夫之間, 探涉淸代文化之源流, 則其磅薄汪洋, 非常人所崖略也. 晩年反約在十三經, 又邃易禮而攷古訂今, 實事求是. 持漢宋之平, 而務歸於義理之精. 盖先生之爲經, 其諸異乎人之爲經矣. 其與世寡諧, 至遭竄逐, 亦與由焉. 先生嘗題戴笠小照 云: “覃溪云嗜古經, 芸臺云不肯人云亦云, 兩公之言盡吾平生. 胡爲海天一笠, 忽似元祐罪人.” 古歡姜瑋, 以閔杞園遺囑, 過海謁先生, 而請學焉. 先生喟然, 曰: “子不見我乎! 治經之效如此. 學此, 究何用?” 噫! 其自道也. 于天地之文, 律曆之數, 字之聲均, 以至道釋典藏金石譜錄, 皆抉摘窈微, 書法又極古今之變矣. 嘗謂濟人, 曰: “某日當大風, 且拔屋 宜防之.” 至時, 果然. 象胥, 䝴時憲曆來, 先生暫閱恠之, 曰: “中氣其錯序乎.” 雲觀請正欽天監, 燕人覺之. 人有得一小刀以獻, 先生以錢七千賞之, 曰: “古切玉刀也.” 後托門人金奭準, 售諸燕,購書數萬卷. 大內有硯, 滴水自給無庸注, 命先生審之. 先生, 曰: “是蛇也.” 烹之, 如其言, 人咸詫之. 先生笑, 曰: “坐諸君少讀書爾.” 先生不欲以著述, 命至焚稿者再. 今刊行于世者, 卽吉光片羽也. 先生以哲宗丙辰十月十日甲午卒, 葬于禮山龍山先塋枕庚之原, 二夫人坿焉. 韓山李氏學生羲民女, 文敬公台重曾孫. 禮安李氏學生秉鉉女, 文正公柬玄孫. 俱賢而無育. 子族兄泰喜子商懋, 生員司果. 側室男, 商佑, 學官司果. 二女, 適李敏夏, 趙瓊熙. 以再從兄商黙子翰濟爲嗣, 文科承旨學官. 一男悳濟, 三女, 適申肅朝, 李義道, 宋淳一. 承旨, 以本生兄有濟子, 沂元爲嗣, 進士. 進士六男, 石煥 歸嗣本生, 台煥・同煥・容煥・絅煥・國煥. 先生孝友天出, 事父母諸父母, 至誠無少間. 酉堂公之竄也, 先生慟不欲生. 夜必泣祝天不寐, 寒暑一衣不易, 至宥還乃已. 晩亦戴笠執燭而跣, 夜伏闕門外, 籲還官爵者屢矣. 丁巳始得其請, 而先生已前卒矣. 方彌留時, 仲氏亦病, 先生扶將, 朝夕其所而診之, 疾旣革, 猶問仲氏試藥否. 單心君國, 不以禍福少撓其精忠, 明白之氣, 可以薄日星而貫之金石. 在濟時, 憲廟命書進, 扁帖中有紅豆詩帖. 先生以爲紅豆之義, 終涉華藻, 附以小題, 寓箴諷之意而曰: “旣以書進, 有可以言進者, 知而不言, 亦所不敢.” 其不變所守, 類此. 好獎掖後進, 多祓擢而振起者. 風儀邁爽, 氣度安和, 與人言, 藹然各得其歡, 及夫義利之際, 議論如雷霆劍戟, 人無敢格者. 仲氏, 諱命喜, 字性元, 號山泉, 亦賢而博, 先生時籍咨箚. 噫! 世途故險窄, 先生之不見容, 固宜. 然其不容於世, 卽脫羈馽而專于學也天於先生厚矣. 身否而道亨, 詘於一時而信於千秋, 亦可以無憾矣. 先生之沒, 今八十有二年矣, 墓石尙未具, 道人士醵金助之. 進士訪得司果公所斲埋碑版, 屬承烈, 記其陰. 顧不能任則惟述門人閔相國奎鎬所爲傳及聞於宗黨長老者, 謹而書之如此. 噫! 是何足爲先生之槩也. 後學宗人承烈撰幷書.


[정조가 보위에 있을 때 문(文)을 높이고 유학을 숭상하여 여러 임금의 으뜸이 되었다. 이에 훌륭한 선비들이 일제히 일어나 무리를 이루어 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정유(貞蕤) 박제가(朴齊家),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기원(杞園) 민노행(閔魯行)이 뛰어났다. 선생은 더욱 뛰어나 여러 현인들의 뒤를 이어 널리 뜻을 펴서 고금에 떨치는 통유가 되었다. 아, 그 얼마나 성대한가! 


생의 휘는 정희(正喜),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 또는 추사(秋史)라 한다. 우리 경주 김씨는 신라에서 일어나 고려조에 정승을 지냈다. 고려 말 휘 자수(自粹), 호 상촌(桑村)이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도관찰사에 이르렀는데, 역성혁명(易姓革命)이 닥치자 자결함으로써 큰 절개를 세웠다. 8대를 전하여 휘 홍욱(弘郁), 호 학주(鶴洲)는 문장과 정사로 이름이 높았는데, 효종 때에 황해도 관찰사로서 강빈(姜嬪)의 원통함에 항거하여 상소하였다가 거슬려 화를 당했다. 후에 두 분의 송문정(宋文正, 송시열과 송준길)의 상소로 그 관직을 회복하고, 숙종조에 이조 판서를 더하였으며,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으니 선생에게 칠대조가 된다. 


고조부는 휘 흥경(興慶)으로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정헌(靖獻)이다. 충후하고 공정하여 옛 대신의 풍모가 있었다. 증조부 휘 한신(漢藎)은 영조의 따님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가 되었으며,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청신하고 문아하여 존귀하면서도 선비를 멀리하지 않았다. 정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옹주는 미음을 끊고 순절하였다. 영조는 영전에 글을 써 걸었는데, '정성이 부족하여 되돌이킬 수는 없었으나 너의 따라간 정절을 아름답게 여긴다'고 하였다. 정조는 특별히 정려문을 세우도록 명하고 ‘열녀’라 하였다. 조부의 휘는 이주(頤柱)로 우참찬을 지냈으며, 좌찬성을 제수받았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덕과 학문이 모두 뛰어나 조야에서 의지하고 존경했다. 


아버지는 휘 노영(魯永)이고,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어머니 정부인은 남양 홍씨로 현령을 지낸 휘 대현(大顯)의 따님이다. 선생은 사실 참판공 막내아우인 이조 판서 유당(酉堂) 휘 노경(魯敬)의 장자인데 출계한 것이다. 친어머니인 정경부인은 기계 유씨(杞溪兪氏)로 군수 휘 준주(駿柱)의 따님이다. 24개월을 회임하여 선생을 낳으니 1786년(정조 10) 6월 3일이다. 여섯 살 때 입춘(立春)에 주련(柱聯)을 써서 문에 붙였는데, 정유(貞蕤) 박공(박제가)이 보고 남다르게 여겼다. 박공이 유당공(酉堂公)을 찾아가 선생을 보고는 크게 칭찬하면서 '마땅히 학예로써 세상에 이름을 낼 것이니 내가 가르쳐 성취시키겠다'고 하였다. 


1809년(순조 9)에 진사가 되어 겨울에 유당공이 연경에 사신으로 갈 때 따라갔다. 당시 탄시(覃溪) 웡팡깡(翁方綱), 윈타이(芸臺) 롼위안(阮元)이 당대 최고의 명사로 그 명성과 지위가 모두 높았는데 선생을 한번 보자 막역해졌다. 경문의 뜻을 변론할 때 서로 뒤지려 하지 않았고, 이에 싀모수러우(石墨書樓, 웡팡깡의 서재) 서가 위의 비장 서적을 내주었으니, 이때에 예전에 아버지와 스승에게 깊이 배운 것이 또한 좌우로 근원을 만나게 되었다. 란쉬에(蘭雪) 우숭량(嵩梁), 뽀한(伯韓) 주치(琦), 둥칭(東卿) 예즈셴(志詵), 싱위안(星原) 웡수쿤(樹崑), 신안(心葊) 리린숭(林松), 위수이(玉水) 차오쟝(曹江), 예윈(野雲) 주허니엔(鶴年), 무좡(墨莊) 리딩위안(鼎元), 지에팅(介亭) 홍짠취안(占銓), 이위안(宜園) 진웨이샹(未詳), 진위안(近園) 진융(勇) 같은 여러 명사들이 모두 사모하여 교류하였으며, 통유(通儒)라고 추대하였다. 그 후 비첩, 화축, 시통, 문권 등이 서로 이어져 한 해도 빌 때가 없었다. 


윈타이(芸臺)가 '징지에(經解)'를 지은 것이 1400권이고, '싀산징쟈오칸지(十三經校勘記)', '징지좐꾸(經籍篹詁)' 등의 책들이 모두 큰 전서인데, 당시의 여러 대가들이 보지 못한 것을 특별히 먼저 선생에게 초본을 부쳤다. 탄시가 돌아갈 무렵 글씨 한 부를 보냈는데, 사부서(四部書)와 시의(詩義), 서법을 정밀하게 살핀 것이었다. 또 우양슈(歐陽修)와 황팅졘(黃庭堅)의 상을 모사하여 부쳐서 선생의 생일을 축하하였는데, 두 공의 생일이 6월이기 때문이었다. 여러 명사들이 또한 6월 3일에 술을 마시며 기념하고 그림을 만들어 기증하였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가 탄시의 옌징 집에 가봤는데,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오직 선생이 쓴 여러 구절만을 걸어놓았을 뿐이었다. 선생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기묘년(1819)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 관직, 고위직으로 진출하는데 필요한 자리), 한림, 규장각 대제학, 의정부 검상, 경연, 춘방(세자시강원), 옥당(홍문관), 사간원, 사헌부를 거쳤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는 직무) 등을 차례로 지냈다. 그 사이에 호서지방의 어사가 되었다. 1827년(순조 27) 통정대부 승지가 되었다가 시강원 보덕, 대사성, 이조와 예조, 병조 참의로 전직하였다. 1836년(헌종 2) 가선대부 병조 참판을 제수 받았고, 1839년(헌종 5)에는 형조 참판을 지냈다.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이보다 앞서 권척(權戚)들이 유당공을 해하여 당론으로 섬으로 내쳤다. 4년만에 겨우 돌아왔으나 오히려 만족치 않고 또 선생의 강직함을 미워하여 기어코 죽이고자 하였다. 이단에 빠지고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모함하는데 이르니 어지러운 기미가 창황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선생은 행동거지가 다른 날과 같이 침착하게 취조에 대응하고 변석함이 준정하여 거짓 증거를 주워 모아도 잡힐 바가 없었으나, 마침내 유당공의 관작을 추탈하고 선생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제주는 외딴 섬이다. 바다가 거칠고 또 늘 바람이 많아 사람이 건너가는데 항상 열흘에서 한 달이 걸렸다. 선생이 배에 오르자 홀연히 천둥 번개와 더불어 큰 바람과 파도가 일어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었는데, 선생은 의연히 뱃머리에 앉아 높은 소리로 시를 읊으며 풍랑과 오르내리기를 같이 하면서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키며 '뱃사공은 이쪽으로 힘껏 키를 잡으라'하였다. 배가 질주하여 아침에 출발한 것이 저녁에 제주에 도착하니 또한 기이하였다. 제주에 거처한 9년 동안 조용히 지내며 책을 읽고 제주 사람들을 가르치니, 인문이 크게 열렸다. 


1851년(철종 2)에 상국 권돈인이 왕실의 제례(眞宗祧遷禮, 진종의 조천례 사건은 헌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추존왕인 진종의 신주를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조천하는 문제를 놓고 벌였던 논쟁이다. 안동 김씨 측은 조천론을 지지하고, 권돈인과 풍양 조씨 측은 조천론에 반대하였다.)를 논박하였다가 권척들을 거슬려 연산으로 내쳐졌다. 선생은 배후 주모자로 몰려 북청으로 유배되었는데, 선생은 담소하면서 손수 책 상자를 정리하여 떠났다. 1852년(철종 3)에 사면을 받고 돌아와 과천 유당공 묘소 아래 거처하다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배태함이 특이하였고, 타고난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 약관의 나이에 백가(百家)를 꿰뚫어 산같이 놓고 바다처럼 깊었다. 중궈의 학사, 대부들과 학문을 닦음에 미쳐서는 칭대 문화의 원류를 탐구하여 그 넓기가 보통사람이 대략 아는 것과 같지 않았다. 만년에 돌이켜 지킨 것은 13경에 있었는데, 역(易)과 예(禮)에 통달하였고, 옛것을 정밀히 탐구하여 오늘날의 것을 바로잡아 실사구시하였다. 한대와 숭대의 균형을 잡아 의리가 정밀한데로 돌아가기에 힘썼다. 선생의 경학은 다른 이들의 경학과 달랐다. 그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여 내쳐진 것도 역시 이러한 까닭이다. 선생은 일찌기 '따이리샤오자오(戴笠小照)'에 제를 붙여 '탄시는 옛 경전을 즐긴다고 하였고, 윈타이는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또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또한 두 분의 말씀이 내 평생을 다하였다. 어찌 바닷가에 삿갓 쓰고 홀연히 위안여우[元祐, 위안여우는 숭나라 쯔중(哲宗)의 연호다. 이때 왕안싀(王安石)의 신법당과 쓰마광(司馬光)의 구법당의 대립 속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시절의 죄인같이 되었는가?'라고 하였다. 


고환(古歡) 강위(姜瑋, 1820~1884)가 기원(杞園) 민노행(閔魯行, 1782~?)의 유언으로 바다를 건너 선생을 뵙고 배우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탄식하며, '자네는 나를 보지 못하였는가! 경(經)을 공부한 결과가 이와 같다. 이를 배워서 결국 무엇에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아! 그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천지의 이치, 율력의 수, 글자의 성운에서 도가와 불가의 전적, 금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미하였으며, 서법 또한 고금의 변화를 다하였다. 한번은 제주 사람들에게, '아무 날에 대풍이 와서 집이 날아갈 것이니 방비하여야겠다'고 하였다. 그 때가 되자 과연 그러하였다. 


역관이 시헌력[時憲曆, 총젠리파(崇禎曆法)를 교정하여 1645년부터 시행된 것으로 조선에서는 1653년부터 시행]을 가져오자 선생이 잠깐 보고는 괴이히 여겨, '중기(中氣, 시헌력에서는 정기법을 썼는데, 황도를 15도씩 분할하여 태양의 각 분점을 통과할 때를 취한 것이다. 여기서 월초를 절기라 하고, 월의 중앙을 중기라 한다. 중기는 윤달과 관계가 깊으며, 태음태양력에서는 중기라 하여 반드시 월의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니라 월말, 월초에 들기도 하고 중기가 들지 않는 달도 있다.)의 순서가 틀렸구나' 하였다. 서운관에서 흠천감(欽天監)에 바로 잡기를 청하니, 칭나라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어떤 이가 작은 칼을 얻어 드렸더니, 선생은 돈 7,000냥으로 갚고는, '옛 절옥도(切玉刀)이다'라 하였다. 후에 문인 김석준(金奭準)에게 부탁하여 옌징에서 팔아 수만 권의 책을 구매하였다. 궁궐에 벼루가 있었는데 물방울이 저절로 나와 물을 댈 필요가 없었다. 선생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였더니, 선생이 '이는 뱀 입니다.' 하였다. 삶아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시끄럽게 떠드니, 선생이 웃으며 '여러분이 독서를 적게 하였을 따름이다.'라 하였다. 선생은 저술을 하고자 하지 않아 원고를 태우도록 명한 것이 두 번이었다. 지금 세상에 간행된 것은 그 일부분이다. 


선생은 1856년(철종 7) 10월 10일 갑오에 세상을 떠나 예산의 용산 선영 서쪽 자리(庚坐)에 장사지냈고, 두 부인을 합장하였다. 한산 이씨는 학생 희민(羲民)의 따님이고, 문경공 태중(台重)의 증손이다. 예안 이씨는 학생 병현(秉鉉)의 따님으로, 문정공 간(柬)의 현손이다. 모두 어질었으나 자손이 없었다. 아들로는 족형 태희의 아들 상무(商懋)가 있는데, 생원사과(生員司果)가 되었다. 측실의 아들 상우(商佑)는 학관사과(學官司果)가 되었다. 두 딸은 이민하(李敏夏)와 조경희(趙瓊熙)에게 출가했다. 재종형 상묵(商黙)의 아들 한제(翰濟)로 후사를 이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학관(承旨學官)이 되었다. 상우의 아들은 덕제(悳濟)이고, 세 딸은 각각 신숙조(申肅朝), 이의도(李義道), 송순일(宋淳一)에게 출가했다. 승지 한제는 친가의 형 유제(有濟)의 아들 기원(沂元)으로 후사를 이었는데 진사가 되었다. 진사 기원은 아들이 여섯이었는데, 석환(石煥)은 친가로 돌아가 후사를 이었고, 태환(台煥), 동환(同煥), 용환(容煥), 경환(絅煥), 국환(國煥)이 있다. 


선생의 효심과 우애는 하늘이 내셔서 부모와 백숙부모를 모실 때 지극히 정성스러워 조금의 틈도 없었다. 유당공이 귀양 갈 때 선생은 애통한 나머지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밤이면 반드시 울면서 하늘에 빌며 잠을 자지 않고, 추위나 더위 때에도 한 옷만을 입고 갈아입지 않다가 풀려나 돌아오고서야 그만두었다. 만년에도 삿갓을 쓰고 등불을 들고서 한밤중에 맨발로 궐문 밖에 엎드려 관작(官爵)의 회복을 호소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1857년(철종 8)에 비로소 요청대로 되었으나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난 뒤였다. 선생이 생전에 병을 앓고 있을 때에 가운데 동생(命喜)이 병을 앓자 선생이 직접 챙기며 아침 저녁으로 찾아가 병세를 살폈고, 당신의 병이 극심함에도 오히려 동생의 복약 여부를 물었다. 국가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은 화복에 따라 그 충정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니 뚜렷한 그 기상은 해와 별도 빛을 잃고, 쇠와 돌도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헌종이 글씨를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 중에 홍두시첩(紅豆詩帖)이 있었다. 선생은 홍두(紅豆)의 뜻이 결국 화려한 문사(華藻)로 흐른다고 여겨 짧은 글을 덧붙여 경계와 풍자의 뜻을 담고서 말씀하기를, '기왕에 글씨를 써 올리는데 진언드릴 만한 것이 있으니,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 또한 감히 할 수 없는 바이다.'고 하였으니 평소의 절의를 변하지 않는 것이 이러했다. 


후진의 장려를 좋아하여 발탁해서 뜻을 펼친 사람들이 많기도 했다. 기풍이 훤칠하고 기상이 온화하여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모두를 즐겁게 했으나, 의리를 분변함에 이르러서는 번개와 칼끝으로 가르듯 의논이 분명하여 감히 막아선 자가 없었다. 가운데 동생 명희(命喜)의 자는 성원(性元), 호는 산천(山泉)이며, 역시 현명하고 식견이 넓어 선생이 때때로 자문을 구했다. 


아, 세상이 험난하고 비좁으니 선생이 몸 둘 곳 없음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속박을 벗어버리고 학문에 전념한 것은 하늘이 선생을 후하게 대한 것이다. 몸은 막혀도 도(道)가 트이고, 한 시대에 굽혀도 긴 역사 속에 펼친다면 유감이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82년(1937 또는 1938)이 되는데, 묘비석이 아직도 마련되지 않아 도내의 인사들이 자금을 갹출해 이 일을 도왔다. 진사 기원이 사과공(상무, 상우)이 새겨 묻은 비판(碑版)을 얻어와 나에게 음기(陰記, 비갈의 뒷면에 새긴 글)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음을 안 나는 오직 문인인 상국 민규호(閔奎鎬)가 전(傳)을 지은 것과 종친과 주변 원로들로부터 들은 것을 기술하며 삼가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아! 이것이 어찌 선생의 대개가 될 수 있겠는가. 후학 종인(宗人) 승열(承烈)이 짓고 쓰다.]


민규호(閔奎鎬, 1836~1875)가 지은 전(傳)은 '완당김공소전(阮堂金公小傳)'을 말한다. 이 책에는 추사의 전설같은 일화들이 실려 있다. 비문은 추사의 후손 김승열(金承烈)이 '완당김공소전'과 종친, 주변 원로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 발췌하여 지었다고 명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