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秋史古宅) 안채 대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건물로 가로막혀 다소 답답한 공간이 나타난다. 폐쇄적인 ㅁ자형으로 건물을 지은 것은 화순옹주(和順翁主)를 비롯한 부녀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채의 안쪽 기둥에도 주련들이 걸려 있다.
안채 내부 전경
안채 대문 안쪽 좌우 기둥에는 '松風吹解帶(송풍취해대)', '山月照彈琴(산월조탄금)' 대련이 걸려 있다. '松風山月(송풍산월)' 행서 대련 글씨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병기는 이 대련에 대해 '추사의 어느 글씨와도 다른 낯선 풍격인데다 필획 또한 유약하기 그지없다.'고 주장했다. 위작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안채 대문 안쪽 기둥의 '松風山月(송풍산월)' 행서 대련
松風吹解帶(송풍취해대) 솔바람이 불어와 허리띠를 풀고
山月照彈琴(산월조탄금) 거문고를 타자 산달이 비춰주네
'송풍산월' 행서 대련은 '시불(詩佛)'로 일컬어지는 탕(唐)나라 왕웨이(王維, 699~759)의 오언율시 '酬張少府(짱샤오푸에게 답하다)'의 경련(頸聯)을 인용한 것이다. 세상만사 '창랑거(滄浪歌)'에 모든 답이 들어있다는 것을 담담한 어조로 노래한 시다.
'松風山月(송풍산월)' 행서 대련
酬張少府(처우짱샤오푸) - 짱샤오푸에게 답하다(왕웨이)
晩年惟好靜(만년유호정) 나이 드니 그저 조용함이 좋고
萬事不關心(만사불관심) 세상 모든 일에도 관심이 없네
自顧無長策(자고무장책) 방책을 생각해도 별 수가 없어
空知返舊林(공지반구림) 그저 옛 고향에 돌아갈 수밖에
松風吹解帶(송풍취해대) 솔바람 부니 허리띠 풀어 놓고
山月照彈琴(산월조탄금) 거문고 타자 산달이 비춰 주네
君問窮通理(군문궁통리) 그대 궁통의 이치 묻고 있는가
漁歌入浦深(어가입포심) 듣게나 포구 멀리 어부의 노래
'窮通(궁통)'은 '성질이 침착하여 깊이 생각함, 가난함과 부귀함, 빈궁과 영달'의 뜻이다. '漁歌(어가)'는 추(楚)나라 취위안(屈原)의 '위푸츠(漁父辭)'를 말한다. '위푸츠'에 창랑수이(滄浪水)의 어부가 취위안에게 들려주었다는 저 유명한 '창랑거(滄浪歌)'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가 들어 있다. 청탁자적(淸鐸自適)의 철학을 제시한 노래가 바로 '창랑거'이다.
안채 안방에 딸린 부엌의 기둥에는 '秋水纔添四五尺(추수재첨사오척)', '綠陰相間兩三家(녹음상간양삼가)' 행서 대련이 걸려 있다. 사랑채 가운데 방에도 '秋水綠陰(추수녹음)' 행서 대련 모사본 액자가 전시되어 있다.
안채 안방 부엌 기둥의 '秋水綠陰(추수녹음)' 행서 대련
'추수녹음' 대련의 전련은 탕나라의 시성(詩聖) 뚜푸(杜甫, 712~770)의 '南隣(난린)'의 경련(頸聯) 첫구, 후련은 당나라 시인 스쿵투(司空圖, 837~908)의 '楊柳枝壽杯詞十八首(양리우즈셔우베이츠 18수)' 중 다섯 번째 시 미구(尾句)를 인용한 것이다.
秋水纔添四五尺(추수재첨사오척) 가을비에 강물은 너댓 자 불어났을 뿐
綠陰相間兩三家(녹음상간양삼가)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두세 집 보이네
뚜푸의 '난린'이란 시와 스쿵투의 '양리우즈셔우베이츠' 다섯 번째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하자. 먼저 뚜푸의 '난린'이란 제목의 시다.
南隣(난린) - 남쪽의 이웃(뚜푸)
錦里先生烏角巾(금리선생오각건) 촉땅의 금리에 은거하신 선생님은 검은 망건 쓰고
園收芋栗未全貧(원수우율미전빈) 동산에서 토란과 밤 주우니 가난한 것도 아니라네
慣看賓客兒童喜(관간빈객아동희) 귀한 손님들 자주 보아서 어린애들은 좋아라 하고
得食階除鳥雀馴(득식계제조작순) 섬돌에 뿌려준 먹이 쪼아먹는 새들도 놀라지 않네
秋水纔添四五尺(추수재첨사오척) 가을비에 강물 겨우 너댓 자밖에 불어나지 않아도
野航恰受兩三人(야항흡수양삼인) 농사 짓는 나룻배 두세 명 올라타기에 적당하다네
白沙翠竹江村暮(백사취죽강촌모) 강마을 하얀 모래 푸른 대나무숲에 석양이 지는데
相送扉門月色新(상송비문월색신) 길손 보내는 사립문에 내려앉은 달빛 새롭기만 해
아름다운 선경에서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삶을 살아가는 선비의 모습이 그려지는 시다. '南隣(난린)'은 수도의 남쪽 마을을 일컫는데, 뚜푸가 존경하는 스승이 살고 있었다. 760년 어느 가을날 뚜푸는 스승을 찾아갔다가 청빈하면서도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스승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돌아오다가 이 시를 지었다. 뚜푸의 나이 49살이었다.
'錦里(진리)'는 쓰촨셩(四川省) 청두(成都)의 별칭이다. 청두는 진꽌청(錦官城)이라고도 한다. 2004년 우후스(武侯祠) 옆에 수(蜀)나라 당시의 옛 모습 그대로 저잣거리를 새로 조성했다. 평생을 떠돌아다녔던 뚜푸는 진리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꽌화시(莞花溪)에 꽌화차오탕(莞花草堂)을 짓고, 진리시엔성(錦里先生)이라 자호하였다. 그는 동생 가족까지 불러 여기서 단란하고 평온한 시절을 보냈다. '烏角巾(오각건)'은 은자(隱者)나 거사(居士)가 쓰던 관(冠)의 한 종류다. '野航(야항)'은 농사에 쓰는 작은 배다.
성재후의 '월하담소도', 선문대박물관 소장
성재후(成載厚)는 뚜푸의 시 '난린'의 미련(尾聯)을 화제(畵題)로 하여 '월하담소도(月下談笑圖)'를 남겼다.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강변의 초가집 사립문 앞에서 두 선비가 이별하는 장면을 그렸다. 뚜푸의 시 한 수가 그대로 '월하담소도'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하다. 큰 산을 배경으로 울창한 대숲에 자리잡은 외딴집은 은자의 집을 연상케 한다. 주인을 향해 돌아보는 손님의 모습에서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니혼(日本)의 국보 '사이몬신세츠주(柴門新月圖)'도 뚜푸의 시 '난린'의 미련을 화제로 그린 그림이다. 140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후지타(藤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楊柳枝壽杯詞 十八首(양리우즈셔우베이츠 18수) 其五 - 스쿵투
桃源仙子不須誇(도원선자불수과) 선계에 사는 사람은 결코 자랑하지 않나니
聞道惟栽一片花(문도유재일편화) 깨닫고 심은 나무에는 한송이 꽃이 피었네
何似浣紗溪畔住(하사완사계반주) 완사계 물가에서 사는 난 누구와 닮았던가
綠陰相間兩三家(녹음상간양삼가)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두세 집이 보인다네
스쿵투는 탕나라 때 고결한 시풍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시론가이다. '楊柳枝壽杯詞 十八首(양리우즈셔우베이츠 18수)'는 그의 시문집인 '司空表聖先生詩文集(一鳴集)'에 실려 있다. '楊柳枝(양류지)'는 버드나무의 가지, '壽杯詞(수배사)'는 장수를 축하하는 술잔과 축하하는 말이다. 저장셩(浙江省) 샤오싱(紹興)의 뤄예산(若耶山)에서 나온 뤄예시(若耶溪)는 미인 시쉬(西施)가 여기서 깁을 빨았다 하여 일명 후안샤시(浣紗溪)라고도 한다.
안채 대문 북쪽 문간채 방문 위에는 '農祥室(농상실)'이라고 쓴 판액이 걸려 있다. 이 판액은 추사 유물 '혼서지(婚書紙)', 생원시권(生員試卷)'과 함께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농상실'은 '농사 짓는 집'이란 뜻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헛간이나 창고로 쓴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이 판액은 경기도 과천의 농막(農幕) 과지초당에 걸어 놓았던 것을 추사고택 정화사업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 관지(款識)의 '主人翁(주인옹)'은 추사의 별호다.
안채 대문 북쪽 문간채 방문 위의 '農祥室(농상실)' 판액
'농상(農祥)'의 기원은 중궈 고대 쩌우(周)나라 때 하늘의 별들에게 한해의 농사가 잘 된 것을 감사하며 지내는 링싱지(靈星祭)에서 유래한다. 링싱지는 농사를 주관하는 별 천전성(天田星)에게 지내는 제사다. 천전성을 농사를 주관하는 신(神)이라 믿어 '농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추사가 과지초당을 '농상실'이라 한 것은 천전성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는 '입추 뒤 진일(辰日)에 본피촌(本彼村)에서 영성(靈星)을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다. 영성은 곧 천전성이다.
안채 안방 마루 기둥에는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예서(隷書) 대련이 걸려 있다. '大烹高會(대팽고회)' 대련 글씨 모사본은 추사고택 안채 가운데 방과 추사기념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안채 안방 마루 기둥의 '大烹高會(대팽고회)' 예서 대련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세상에 으뜸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이며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세상에 으뜸 모임은 부부와 자녀 손자들 모임
천지사방 다니면서 산해진미를 다 맛보았던 추사다. 제주도 유배지에서도 육지의 본가에서 음식을 가져다 먹을 정도로 입맛도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집에 돌아와서 보니 소박한 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이 최고의 반찬이라는 것이다. 또, 세상에 수많은 모임을 가져 보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 손자 등 내 가족이 최고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추사가 만년에 깨달은 지극히 평범한 깨달음이었다.
'대팽고회' 예서 대련은 1856년 추사가 71세 때 쓴 글씨다. 추사는 원본의 관지에 '칠십일과(七十一果)'라고 썼다. 71세 때 과천에서 썼다는 말이다. 원본의 협서에는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能享有此味者畿人爲.(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한 큰 황금 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고 되어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추사의 소박한 성품을 읽을 수 있다. 대현약우(大賢若愚)라는 말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는 뜻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통하는 말이다. 추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大烹(대팽)은 '진수성찬, 성대한 연회'란 뜻이다. '高會(고회)'는 성대한 모임이다.
추사기념관의 '大烹高會(대팽고회)' 예서 대련 모사본
'대팽고회' 대련 작품에 대한 일화가 있다. 일제시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추사의 작품을 모으고 있었다. 1940년대 전형필은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을 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다. 예정가는 100원이었는데, 한 일본인이 300원으로 올리자 전형필은 세 배 이상인 1000원을 불러 낙찰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쌀 한 가마의 가격이 3원, 한양의 집 한 채 가격이 대략 100원이었다. 전형필은 한눈에 명작을 알아본 것이다. 원래 이 작품은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瓜地草堂)의 기둥에 걸려 있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2018년 보물 제1978호로 지정되었다.
안채 가운데 방 마루 기둥에는 '靜坐處茶半香初(정좌처다반향초)', '妙用時水流花開(묘용시수류화개)' 행서(行書) 대련이 걸려 있다. 이 글씨를 추사체(秋史體)라고도 한다. '靜坐妙用(정좌묘용)' 대련의 원본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안채 가운데 방 마루 기둥의 '靜坐妙用(정좌묘용)' 대련
靜坐處茶半香初(정좌처다반향초) 고요히 앉아 차를 반쯤 마셨는데도 향은 처음과 같고
妙用時水流花開(묘용시수류화개)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에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정좌묘용' 대련은 추사가 다도(茶道)를 정립한 초의선사(艸衣禪師)에게 써주면서 유명해진 문장이다. 초의선사는 추사의 유배지로 편지 대신 좋은 차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추사는 차를 보내준 초의선사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이 대련을 써준 것이다. '정좌묘용' 대련에서 다도인들에게 회자되는 '茶半香初(다반향초)'란 말이 나왔다.
'靜坐妙用(정좌묘용)' 대련
'다반향초'의 출처는 알 수 없다. '水流花開(수류화개)'는 중궈 숭(宋)나라 때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산구(山谷) 황팅지엔(黃庭堅, 1045~1105)이 스승 쑤둥포(蘇東坡)의 싯구를 따서 지은 '萬里靑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가없는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 내리니 빈 산에 사람 자취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에서 인용한 것이다.
안채 건넌방 부엌 기둥에는 '五畝種竹五畝藝蔬(오무종죽오무예소)', '半日靜坐半日讀書(반일정좌반일독서)' 예서 대련이 걸려 있다. '五畝半日(오무반일)' 예서 대련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안채 건넌방 부엌 기둥의 '五畝半日(오무반일)' 예서 대련
五畝種竹五畝藝蔬(오무종죽오무예소) 다섯 이랑은 대를 심고 다섯 이랑은 채소 갈고
半日靜坐半日讀書(반일정좌반일독서) 하루 중 반은 고요히 좌선하고 반은 글을 읽네
'오무반일' 대련에는 뜰에 대나무를 심는 풍류와 채소를 기르는 소박함,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하는 구도자로서의 수양, 책을 읽으면서 옛 성현을 만나는 선비로서의 자세 등이 나타나 있다. 추사는 오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안빈낙도의 철학과 풍류를 체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 안방의 문 위에는 '無量壽(무량수)'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무량수'는 불경의 극락왕생론(極樂往生論)에 나오는 말이다. '무량수'는 한없이 오랜 수명을 뜻하는 무량상수(無量上壽)의 준말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서방정토(西方淨土) 중생들의 수명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뜻한다. 건강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추사도 불교의 윤회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 안방 방문 위에 걸려 있는 '無量壽(무량수)' 예서 모사본 액자
'무량수'의 관지는 승련노인(勝蓮老人)으로 되어 있다. '승련노인'은 추사의 별호 가운데 하나다. 연꽃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른 수행자, 부처의 상징이다. 불교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별호다. 추사는 글씨를 쓸 때 그 내용에 어울리는 별호를 사용했다. '무량수'라는 말이 불교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별호를 쓴 것이다.
화순옹주가 거처하던 안채 안방
화순옹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처하던 안채 안방에는 보료가 깔려 있고, 그 앞에 서탁이 놓여져 있다. 한쪽 벽에는 장농과 백자 진열장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지체가 높은 사람이 사용하던 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안채 안방에 벽에 걸려 있는 '萬壽無疆(만수무강)' 예서 모사본 액자
안방 벽에는 '萬壽無疆(만수무강)' 예서 모사본 액자가 걸려 있다.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만수무강'은 건강한 장수를 기원하는 말이다. '무량수'와 마찬가지로 건강한 장수는 모든 인류의 소망일 것이다. 오른쪽 협서에는 '小訥正之(소눌정지)'라는 관지를 적고, 왼쪽에는 인장 두 개가 찍혀 있다. '소눌정지'는 '소눌이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눌(小訥)'이란 호를 쓰던 인물은 누구일까? 노재준(서예가, 예산고 교사)은 추사와도 막역한 사이였던 평양 출신의 명필 조광진(曺匡振, 1772~1840)의 아들 조석신(曺錫臣)이라고 주장했다. 조석신의 호가 바로 소눌(小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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