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기념관과 추사고택 사이에 있는 공원에는 입구에는 추사선생학예술비(秋史先生學藝術碑)가 세워져 있다. 추사선생학예술비에는 '畵法書勢(화법서세)' 예서(隸書) 대련(對聯)과 그 아래에는 그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가 새겨져 있다.
추사선생학예술비
추사선생학예술비
'세한도'는 언제 보아도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림이다. 엄동설한을 견디면서 꿋꿋이 서 있는 소나무는 화가 자신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추사고택은 266.11m²(80.5평)으로 솟을대문의 문간채(동쪽),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서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은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세워져 있다.
추사고택 솟을대문
솟을대문은 일곱 개의 돌계단 위에 세워져 있다. 솟을대문은 좌우의 지붕보다 중앙의 지붕을 한 단 높게 꾸민 세 칸 대문이다. 돌계단을 높게 만든 것은 추사에게 바치는 존경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솟을대문 양쪽 옆으로는 각각 한칸씩의 문간채가 딸려 있다. 솟을대문에서는 추사고택의 사랑채가 언뜻 들여다보인다.
솟을대문 문간채 주련
솟을대문 안쪽의 문간채 기둥에는 내 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주련을 통헤서 조선 후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추사의 사상과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오른쪽 문간채 기둥에는 행서(行書)로 쓴 '佳士異書(가사이서)' 대련, 왼쪽 문간채 기둥에는 '句曲敬亭(구곡경정)' 대련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 오른쪽 문간채의 '佳士異書(가사이서)' 대련
'佳士異書(가사이서)' 대련, 지본묵서(紙本墨書), 32.5 x 135cm, 호암미술관 소장
遠聞佳士輒心許(원문가사첩심허) 멀리 훌륭한 선비 소문 들으면 마음을 허락하고
老見異書猶眼明(노견이서유안명) 늙어서도 진기한 책을 보면 오히려 눈 밝아지네
'가사이서' 대련은 난숭(南宋)의 시인 루여우(陸游, 1125~1210)가 지은 '先少師宣和初有贈晁公以道詩云, 奴愛才如蕭穎士, 婢知詩似鄭康成, 晁公大愛賞, 今逸全篇, 今讀晁公文集, 泣而足之'라는 긴 제목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제목을 풀이하자면 '선소사(先少師)께서 쉬엔허(宣和) 연간 초에 차오이따오(晁以道) 공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하인은 재주가 샤오잉싀(蕭穎士, 탕나라 문인) 같음이 사랑스럽고, 하녀는 쩡캉청(鄭康成, 한나라 학자)의 여종처럼 시를 안다네."라고 했는데, 차오 공이 매우 좋아하며 감상하였다. 지금 그 시 전편은 잃어버렸는데, 이제 차오 공의 문집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나머지를 채워 짓는다.'는 뜻이다. 숭나라 학자 차오수어즈(晁說之, 1059~1129)를 추모하면서 그의 학덕을 기리는 시다. 이따오(以道)는 차오수어즈의 자다.
이 주련의 원본 글씨는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원본의 협서(脇書)에는 '묵림선생(墨林先生)이 십년 전에 멀리서 괴선도(拐仙圖)를 보내 주었는데, 아직까지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졸렬한 글씨를 받들어 올린다.'고 되어 있다. 묵림선생(墨林先生)은 칭나라 서화가 양창원(楊尙文), 괴선도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팔선(八仙) 중 하나인 리티에꽈이(李鐵拐)를 그린 신선도다. 心許(심허)'는 '마음속으로 허락하다'의 뜻이다. 말로 약속하지는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 허락한 일은 꼭 지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솟을대문 왼쪽 문간채의 '句曲敬亭(구곡경정)' 행서 대련
句曲水通茶竈外(구곡수통다조외) 구곡산의 물은 차 끓이는 부엌 밖으로 통하고
敬亭山見石闌西(경정산견석란서) 중국 명산 경정산은 돌 난간 서쪽으로 보이네
'구곡경정' 대련은 칭나라 문인 싀룬장(施閏章)의 '시꽌(溪館) - 시냇가 여관에서'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객지의 여관에서 주변의 경치를 읊으며 향수를 달래는 시다.
'句曲(구곡)'은 쥐취산(句曲山)이다. 지금의 중권 장쑤셩(江蘇省) 쥐룽시엔(句容縣, 지금의 난징) 남동쪽에 있는 마오산(茅山)이다. '시엔징(仙經)'에 '쥐취산은 바로 산싀류둥티엔(三十六洞天)의 여덟 번째 골짜기이다. 화양둥(華陽洞)이라 이름하였는데 마오쥔(茅君)이 다스리던 곳이다.'라 하였다. 한(漢)나라 때 마오잉(茅盈)은 동생인 마오쭝(茅衷), 마오꾸(茅固)와 함께 모산에 들어가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을 일러 산마오쥔(三茅君)이라고 한다. 마오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량(梁)나라 타오훙징(陶弘景, 451~536)은 492년 난징 남동쪽에 있는 쥐취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도교를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는 여기서 도교 서적들을 편집하고 주석을 붙인 '젠까오(眞誥)', '떵젠인쥐에(登眞隱訣)'을 저술했다. 또한 중궈의 주요한 의약서 가운데 하나인 '셴룽뻔차오징지주(神農本草經集注)'도 썼다.
'징팅산(敬亭山)'은 지금의 안후이셩(安徽省) 남쪽에 있는 짜오팅산(昭亭山)이다. 이 산은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지는 탕나라 시인 리바이(李白)의 '뚜주어징팅산(獨坐敬亭山)'이라는 시에 나오면서 널리 알려졌다. 경정산은 차의 명산지이기도 하다.
獨坐敬亭山(독좌경정산) 경정산에 홀로 앉아(리바이)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뭇새들은 높이 날아 다 사라지고
孤雲獨去閒(고운독거한) 외로운 구름만 한가로이 떠 가네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서로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것은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다만 거기 경정산 있기 때문이지
조선 영조(英祖) 때 김천택(金天澤)과 김수장(金壽長)이 중심이 된 가인(歌人)들의 모임인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도 리바이의 이 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장복소(張福紹)는 리바이의 싯구 '相看兩不厭'을 인용해서 김천택과 김수장의 사이를 가리켜 '相對敬亭山(상대경정산)'이라고 하였다.
추사고택 전경
사랑채는 추사가 머물던 곳이다. 남향으로 앉아 있는 ㄱ자형 건물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 공간이다. 남쪽에 한칸과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각방의 앞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사랑채에는 수만 권의 책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1910년의 화재로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사랑채 전경
사랑채 거실 앞 마당에 세워진 '石年(석년)' 돌기둥
사랑채 댓돌 앞에는 추사체(秋史體)로 '石年(석년)'이라고 새긴 육각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추사가 해시계 받침대로 썼다는 돌기둥이다. 과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했던 실학자답다. 돌기둥의 아래쪽에는 추사의 서자인 김상우(金商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글씨는 추사가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김상우가 썼을 가능성도 있다. 돌기둥은 김상우가 세웠을 가능성이 많다.
사랑채 각 방의 방문 위에는 '세한도' 모사본을 비롯해서 '有福量壽(유복량수)', 新安舊家(신안구가)', '竹爐之室(죽로지실)' 현판과 액자가 걸려 있다. 사랑채의 전후좌우면 기둥에는 추사의 글씨를 모사한 주련이 걸려 있다.
사랑채 거실의 '세한도' 모사본
'세한도'에는 추사의 문인화(文人畵)에 대한 사상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그림은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으로 추사 내면세계의 농축된 문기(文氣)와 문인화가 지향하는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한 추사의 예술세계가 이 그림 한 장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세한도'는 추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제자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이 변함없는 의리를 지킨 데 대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원래의 그림은 옆으로 긴 화면 오른쪽에 '歲寒圖(세한도)'라는 제목과 '藕船是賞(우선시상)', '阮堂(완당)'이라는 관서를 쓰고, '正喜(정희)'와 '완당'이라고 새긴 인장을 찍었다.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다. 끝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를 담은 추사의 발문과 짱위에쩬(章岳鎭), 짜오쩬쭈어(趙振祚) 등 16명의 칭나라 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추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함께 붙어 10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증조부가 영조의 부마였기 때문에 추사는 어린 시절부터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24살이던 1809년부터 매년 칭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부사(副使)가 된 아버지를 따라 옌징을 오가면서 칭나라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조선 최고의 학자로 성장했다. 특히 금석학과 서화는 칭나라 학자들 사이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추사가 45세 때인 1830년 정치 투쟁의 여파로 아버지가 전라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고, 그 자신도 1840년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고난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자란 사람에게 귀양살이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반대파들의 공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가장 절친했던 벗 김유근(金逌根, 1785∼1840)마저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도 등을 돌리고, 친구들의 소식도 점차 끊어지면서 추사는 오로지 책을 읽는 것으로 유배 생활을 견뎠다. 제자 이상적은 그 누구보다 스승의 처지와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칭나라에 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 보내주었다. 1843년에는 옌징에서 어렵사리 구한 꾸이푸(桂馥)의 '완쉬에지(晩學集)'와 윈징(惲敬)의'따윈산팡원까오(大雲山房文槀)'를 보내주었고, 이듬해에는 허장링(賀長齡)과 웨이위안(魏源)이 엮은 총 120권, 79책의 방대한 '황차오징싀원삐엔(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었다. 모두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서적들이었다.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빠진 뒤에도 제자의 변치 않는 의리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은 추사는 이상적이야말로 '룬위(論語)' <즈한(子罕)>편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에 나오는 송백(松柏) 같은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는 후이저우(惠州)로 귀양 갔던 쑤둥포(蘇東坡, 1037 ~ 1101)가 자신을 찾아온 아들을 보고 기쁜 나머지 그려준 '이엔숭투(偃松圖)'를 떠올렸다. 추사는 소동파와 자신의 처지가 같다고 생각했다. 추사의 마음 속에 불현듯 벼락을 맞은 듯 줄기가 굽은 채 이파리도 거의 다 떨어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엄동설한에도 꼿꼿이 서 있는 세 그루의 잣나무가 떠올랐다. 추사는 능숙한 갈필(渴筆)과 건묵(乾墨)으로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주제와 격조 높은 문기를 소나무와 잣나무 그림에 쏟아부었다. 노송은 바로 정치적 박해를 받아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추사 자신, 노송 곁을 지키는 세 그루의 잣나무는 추사가 불우한 처지에 빠졌음에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지란지우(芝蘭之友)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비의 지조(志操)와 의리(義理)를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한 그림은 일찌기 없었다.
그림을 다 그린 추사는 '藕船是賞(우선은 이것을 감상하게)'라고 쓴 다음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고 새긴 인장을 찍었다. '길이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이 말은 중궈 산시셩(陕西省) 순화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에 새겨진 것이었다. 추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었다.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전달되었다. 이상적은 1844년 10월 칭나라 옌징에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가지고 갔다. 이듬해 정월 22일 이상적은 그의 벗 오찬(吳贊)이 주최한 연회에 초대를 받아 참석한 자리에서 '세한도'를 내보이자 짱위에쩬(章岳鎭), 짜오쩬주어(趙振祚), 야오푸쩡(姚福增) 등 옌징의 명사 17명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다투어 제(題)와 찬(讚)을 붙였다. 이것이 이른바 '세한도'에 붙어 있는 '청유십육가(淸儒 十六家) 제찬(題讚)'이다.
'柏(백)'은 측백나무란 뜻도 있고, 잣나무란 뜻도 있다. '세한도'의 '柏(백)'을 측백나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림의 나무 형태를 보면 전형적인 잣나무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로 시작되는 발문(跋文)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로 적혀 있다. 예서의 기미가 살짝 풍기는 이 글씨는 추사의 대표적인 해서체(楷書體) 작품이다. 반듯한 글씨에서 심금을 울리는 비장미가 느껴진다. 발문에서 추사의 그런 화의(畵意)를 읽을 수 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畊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万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䟽.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無可稱 由後之君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지난해에 그대가 '완쉬에지'와 '따위산팡원까오' 두 책을 부쳐 주고, 올해 또 어우껑(藕畊)의 '황차오징싀원삐엔)'을 보내 주었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라 천만 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세태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과 힘 쓰기를 이같이 하고서도 그대를 돌봐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권세도 힘도 없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 잇속을 좇듯이 하였다. 타이싀궁(司马迁)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교류하는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소원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잇속을 좇는 세태를 초연히 벗어났다.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타이싀궁의 말이 잘못되었는가? 공자 왈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소나무와 잣나무)이 더디 시듦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송백은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송백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송백이다. 그런데도 성인(孔子)은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에 그것을 가리켜 말했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송백을 말한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지조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헤 따로 마음에 느낀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시한(西漢)시대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지안(汲黯)과 쩡당싀(鄭當時)처럼 어진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들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샤피시엔(下邳縣, 지금의 장쑤셩 피시엔)의 짜이궁(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절박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샤피방먼(下邳榜門)'은 '먼치엔취에루어싀(門前雀羅設)'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나라 짜이궁(翟公, ?~?)이 팅웨이(廷尉)가 되었을 때 찾아오는 빈객이 많았으나, 벼슬에서 물러나자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발길이 끊어졌다. 이후 다시 팅웨이가 되었는데, 빈객이 다시 몰려들자 짜이궁은 문 앞에 '一生一死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能, 一貴一賤 交情乃見(한 번 죽고 사니 사귐의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난하고 부유하니 사귐의 모양새를 알겠으며, 한 번 존귀하고 비천해지니 사귐의 정이 보이는구나.)'라는 글을 방문에 써붙였다고 한다.
칭나라에서 돌아온 이상적은 '세한도'를 추사의 벗 권돈인에게 보여 주었다. 감동을 받은 권돈인은 추사의 그림을 본받아 '세한도(歲寒圖)' 한 폭을 그려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가 '모질도'를 그려 보내 준 데 대한 답례였다. 화제 '歲寒圖' 글씨는 추사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歲寒圖' 제목 왼쪽 맨 위에에는 '長毋相忘(장무상망)' 인장이 찍혀 있다. '서로 오래 잊지 말자'는 뜻이다. 추사와 권돈인의 깊은 우정을 짐작할 수 있다.
권돈인의 '세한도', 22.1㎝×101.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권돈인의 '세한도' 제발과 추사의 발문
권돈인은 바위에 기댄 초가집 곁에 송죽매(松竹梅)가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그린 다음 발문을 '因以歲寒三双圖 一幅以實詩言 又閬(세한삼우도 한 폭에 시의를 담았다. 우랑)'이라 적었다. 권돈인은 발문에서 '歲寒三双圖(세한삼쌍도)'라고 밝혔듯이 추사의 '세한도'를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화의(畵意)를 좇아서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松竹梅)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송죽매는 바로 학문, 예술의 동반자였던 추사와 권돈인, 김유근을 가리킨다. 권돈인의 뜻을 간파한 추사는 '畵意如此而後 爲形似之外 此意雖 古名家得之者絶少 公之詩不拘於閬工畵亦然 阮堂[그림의 뜻이 이 정도는 되어야 겉모양 너머에 있는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은 옛날의 명가라 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공의 시는 숭나라 시인 판랑(潘閬)보다 뛰어나며, 그림 또한 그렇다. 완당]'이라는 발문을 썼다.
추사의 '세한도'가 외롭고 허전하면서도 추운 느낌을 주는 것에 비해 권돈인의 '세한도'는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세한도'는 모두 친구 사이의 우정을 영원히 변치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허련의 '방완당산수도(倣阮堂山水圖)', 31.0㎝×37.0㎝, 대림화랑 구장(舊藏)
허련도 스승 추사의 '세한도'를 모방해서 '방완당산수도(倣阮堂山水圖)'를 그렸다. 위안나라 니짠(倪瓚, 1301~1374)은 여백미(餘白美)를 가장 뛰어나게 구현한 화가였다. 그는 텅 빈 화면에 강과 산을 원경으로 나무 몇 그루와 정자를 통해서 안빈낙도와 정신적 자유를 표현해냈다. 니짠의 회화정신을 중궈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고 구현한 사람이 바로 조선의 추사였다. 그 대표적인 그림이 '세한도'였다. 기울어진 작은 초가집과 송백 몇 그루에 오랜 제주도 유배생활의 고독과 고뇌, 그리고 이를 이겨내려는 치열한 극복의지와 예술혼을 담아냈던 것이다. 사실 구도상으로 볼 때 예찬의 구도에 더 가까운 그림은 추사의 '세한도'보다도 허련의 '방완당산수도'다. 그럼에도 허련은 화제를 '倣阮堂意(추사의 필의를 본받았다'라고 씀으로써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명했다.
사랑채 거실 남쪽 기둥의 '明月梅花(명월매화)' 대련
'세한도' 모사본을 걸어놓은 방의 앞 기둥에는 수(蜀)나라 때의 예서(촉예법)로 쓴 '明月梅花(명월매화)' 대련이 걸려 있다. 이 대련에는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의 유유자적한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단정하고 예스러운 필치와 빠른 붓질로 속도감을 낸 운필이 특징이다.
추사기념관의 '明月梅花(명월매화)' 예서 대련
且呼明月成三友(차호명월성삼우) 또한 밝은 달을 부르니 세 벗을 이루었고
好共梅花住一山(호공매화주일산) 좋아서 매화와 함께 같은 산에 와 머무네
'三友(삼우)'는 청풍(淸風)과 명월, 그리고 작자를 가리킨다. 전련은 탕나라 시인 리바이의 '月下獨酌(위에샤두주어)' 3, 4구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잔 들고 밝은 달을 맞으니,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을 빌려서 표현한 것이다. 후련은 숭나라 때 린부(林逋)라는 사람이 항저우(杭州) 시후(西湖)의 꾸산(孤山) 은거하면서 매화로 아내를 삼고 학으로 자식을 삼았다는 '메이치허즈(梅妻鶴子)' 고사를 빌어서 지은 구절로 보인다. 중궈의 사서(辭書)인 '치하이(辭海)'에는 린부에 대해 '宋代林逋隱居杭州西湖孤山, 無妻無子, 種梅養鶴以自娛, 人稱其梅妻鶴子.(숭나라 때의 린부는 항저우 시후의 꾸산에 은거하였는데 부인도 없고 아들도 없었다.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스스로 즐겼는데,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매화로 아내를 삼고 학으로 자식을 삼았다고 말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明月梅花(명월매화)' 대련의 전련 오른쪽에는 '桐人仁兄印定(동인 인형께서 바라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후련 왼쪽에는 '阮堂作蜀隸法(완당이 중궈 수(蜀)나라 예서의 필법으로 쓰다.)'이라는 관지가 적혀 있다. '동인(桐人)'은 '桐(동)'이 들어간 호를 쓰는 사람일 것이다. '완당평전(阮堂評傳)'에서 유홍준(兪弘濬)은 '동인'을 추사의 제자인 동암(桐庵) 심희순(沈熙淳, 1819~?)으로 보고 있다. 심희순은 노론(老論) 시파(時派)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 1766~1838)의 손자다. 정약용과 함께 벼슬길에 들어선 심상규는 우의정과 영의정, 원상(院相)을 지냈다. 그는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 김구주(金龜柱) 당여와는 평생 반대 입장을 취했다. 김구주의 본관은 경주 김씨로 추사와는 먼 친척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오흥부원군 김한구, 여동생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였다. 김한구는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과 10촌 형제간이었다.
심희순은 1846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고,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칭나라에 다녀왔다. 삼사의 여러 요직을 거쳐 1856년 이조 참의, 1857년 대사성을 지낸 심희순은 글씨에 뛰어나 추사의 찬탄을 받은 바 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온 1848년과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1851년 사이에 심희순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북청 유배 시절 추사는 심희순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므로 '明月梅花(명월매화)' 대련은 심희순에게 써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추사와 교유한 인물에는 동려(桐廬) 이신(李藎)도 있다. '蜀隸法(촉예법)'은 글씨체나 필법을 가리키는 말임은 분명하지만,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정설이 없다. 추사체의 독특한 멋을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2018년 보물 제1979호로 지정되었다.
'세한도(歲寒圖)' 모사본을 걸어놓은 추사고택 사랑채 안방의 왼쪽 방문 위에는 '有福量壽(유복양수)'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추사가 회갑 때 썼다는 글씨다. 많은 복과 수명이라는 뜻이다. 유복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은 무릇 모든 인간의 소망이다.
사랑채 가운데 방의 '有福量壽(유복양수)' 현판
원래의 글씨는 '有大福無量壽(유대복무량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大(대)'자와 '無(무)'자가 마멸되어 없어진 것을 1976년 고택 정화사업 때 떼어서 새로 각자(刻字)하여 걸었다. 관지에 적혀 있는 승련노인(勝蓮老人)은 김정희의 또 다른 호다. 이 작품은 1985년 8월 절도범에 의해 분실된 바 있다.
'유복양수' 현판이 걸린 방의 앞 기둥에는 예서로 쓴 '忠孝耕讀(충효경독)' 대련이 걸려 있다. 예서로 쓴 이 대련은 추사의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작품이다. 추사가 원숙기에 이르렀을 때 쓴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사랑채 가운데 방 동쪽 기둥의 '忠孝耕讀(충효경독)' 대련
天下一等人忠孝(천하일등인충효) 천하 으뜸인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
世間兩件事耕讀(세간양건사경독) 세상에서 가장 큰 두 가지 일은 밭갈고 독서하는 일일세
전련의 '충효(忠孝)'는 유교의 도덕 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다. 충(忠)은 원래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을 다하는 정신자세를 의미하는 개념이었는데, 봉건제 사회에서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꼈다. 효(孝)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충효는 봉건제나 전제왕조 사회에서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후련의 '경독(耕讀)'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말한다. '경독'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제시한 학문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유복량수' 현판 왼쪽에는 예서(隷書)로 쓴 '新安舊家(신안구가)' 액자가 걸려 있다. 이 글씨는 '주즈쉬에(朱子學)의 전통을 오랫동안 이어온 집'이라는 뜻이다. 주즈(朱子)의 본명은 주시(朱熹)다. 그는 아버지 주숭(朱松)의 부임지였던 푸젠셩(福建省) 여우시시엔(尤溪縣)에서 태어났다. 주시의 집안은 원래 후이저우(徽州) 우위안(婺源)의 호족이었다. 이런 연유로 주시는 우위안의 옛 이름인 신안(新安)을 관향으로 썼다.
사랑채 가운데 방의 '新安舊家(신안구가)' 모사본 액자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후이저우의 신안, 지금의 안후이셩(安徽省) 우위안은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본관이다. 신안 주씨는 숭(宋)나라 신안시엔(新安縣) 사람인 주치엔(朱潛)이 고려 고종 때 한반도에 건너와 나주(羅州)에 정착하면서부터 그를 시조로 한 성씨다. 주치엔은 주자학의 창시자 주시의 증손으로 숭나라가 망하게 되자 아들 주위칭(朱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고려로 망명해 와서 나주에 자리 잡고 살았다.
'신안구가'에 나타난 글씨체에서 추사가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준 웡팡강체(翁方綱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의 스승 웡팡강(翁方綱, 1733~1818)은 칭대(淸代)의 서예가이자 문학가, 금석학자이다. 우양쉰(歐陽詢), 위싀난(虞世南)의 글씨체를 사숙한 웡팡강은 운필(運筆)의 법도를 엄격하게 지켰으며, 한대(漢代)의 예서체(隸書體)에도 뛰어났다. 칭대 고증학을 집대성하고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능했던 롼위안(阮元, 1764~1849)은 추사의 또 다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웡팡강은 첩파(帖派), 롼위안은 비파(碑派)로서 글씨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두 스승의 상반된 견해를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든 추사는 예서를 기본으로 하여 추사체를 창안했다.
'新安舊家(신안구가)', 지본묵서(紙本墨書), 164.2 x 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안구가'에 대해서 '추사 코드'의 저자 이성현은 색다른 설을 주장하고 있다. 추사는 효명세자(孝明世子) 이영(李旲, 1809~1830)의 스승이다. 효명세자는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공(李玜, 1790∼1834)의 명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면서 어진 인재의 고른 등용과 형옥(刑獄)의 신중한 시행,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 등을 통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효명세자는 불행하게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만에 죽고 말았다. 효명세자가 죽자 추사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 하에서 제주도에 9년 동안이나 유배된 뒤, 다시 북청에 2년 간 유배되는 등 혹독한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성현은 이처럼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추사의 삶을 끈질기에 지배해왔다고 본다.
신웅순(중부대 교수, 시조시인)은 '추사가 과거시험까지 미루며 고증학(考證學)에 매진했던 이유가 조선 성리학의 폐해를 바로 잡기 위한 잣대와 도끼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추사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實學)과 숭밍이학(宋明理學)의 형이상학적 지향성에 반대하여 생겨난 고증학에 매진한 것은 주자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담(空理空談)의 사변철학으로 전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사는 주시의 죽은 권위를 타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현('추사코드' 저자)은 '신안구가'를 당시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도구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신(新)’자는 ‘설 립(立)’, ‘나무 목(木)’, ‘도끼 근(斤)’의 합자이다. 그런데 ‘나무 목(木)’ 대신 ‘아닐 미(未)’를 썼다. ‘신(新)’자의 ‘아닐 미(未)’는 ‘아니다’의 뜻이 아니라 ‘아직’의 뜻을 갖고 있는, ‘아직은 새로움을 추구할 때가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하는 말로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견 견강부회(牽强附會) 같으면서도 상당히 그럴 듯한 풀이다.
그는 이어 "‘옛구(舊)’는 ‘풀초(艹)’, ‘새 추(隹)’, ‘절구 구(臼)’의 합자인데 ‘풀초(艹)’ 대신 ‘또 역(亦)’자를, ‘새 추(隹)’ 대신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의 모습’, ‘절구 구(臼)’ 대신 ‘밑빠진 절구의 모습’을 그렸다. ‘옛 구(舊)’자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는(거북) 쓸모없는 학문(밑빠진 절구)이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옛 구(舊)’자의 ‘풀초(艹)’ 부분이 ‘또 역(亦)’으로 바뀌게 된 것은 ‘亦’은 원래 ‘어린아이가 부모의 행동을 따라하며 배우는' 모방의 의미를 갖고 있는 글자로 추사가 ‘艹’부분을 ‘亦’으로 바꾼 것은 무언가를 모방했더니 주자학의 폐단이 결국 이런 지경에 이르게 했다는 얘기다."라고 했다. 당시는 주자학의 폐단을 논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는 시대였다. 추사는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글자에 코드를 심었다는 이야기다.
이성현은 또 "‘편안할 안(安)’은 ‘움집 면(宀)’과 ‘여자 녀(女)’의 합자이다. ‘여자가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보니 편안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추사의 ‘安’자의 모습은 집안을 돌봐야 할 여자가 집의 지붕을 세차게 걷어차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대가 세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위세 등등한 대비의 행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대비는 순조의 정비이자 효명세자의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 대비 김씨(大妃金氏)를 말한다. 그녀는 60여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金祖淳)의 딸이었다. 추사는 주자학이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여 살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학문이 아닌 공리공론을 일삼으며 정치적 명분만을 내세우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신안구가'라는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1830년 효명세자가 22세에 요절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살에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憲宗, 재위 1834∼1849) 이환(李奐, 1827∼1849)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헌종의 나이가 어려 할머니 순원왕후 김씨가 대왕대비(大王大妃)로써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은 헌종이 죽고 철종(哲宗, 1849~1863) 이변(李昪, 1831~1863)이 즉위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는 곧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안구가' 액자가 걸려 있는 방문 앞 기둥에는 '畵法書勢(화법서세)' 대련이 걸려 있다. 이 대련은 '추사선생학예술비'에도 새겨져 있다. 추사의 서화론(書畵論) 나아가 예술론(藝術論)이 담겨 있는 대련이다. '화법서세' 대련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대련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로서의 기개와 포부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랑채 건넌방 동쪽 기둥의 '畵法書勢(화법서세)' 예서 대련
추사기념관의 '畵法書勢(화법서세)' 예서 대련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그림을 그리는 법에는 양자강 일만리가 다 들어가 있어야 하고
書勢如孤松一枝(서세여고송일지) 글씨의 기세는 홀로 자란 소나무가지 같은 뻗침이 있어야 한다
전련은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만리나 멀리 흐르는 강물이라도 그것을 한 화폭에 다 담도록 구도와 원근법, 채색법, 명암법 등을 터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후련은 글씨의 기세는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획(筆劃)과 결자(結字), 장법(章法) 등 서예 3요소 중 가장 기본적인 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 구절이다. 글씨의 기세는 바로 필획에서 나오는 것이니 붓을 소나무 가지처럼 힘차고 질박하게 긋고 뻗치라는 말이다.
'孤松一枝'은 중국 남조(南朝) 량(梁)나라 위안앙(袁昂)의 '구진슈핑(古今書評)'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위안앙은 한나라 말 서예가 취위안(崔瑗)의 글씨를 평하여 '如危峰阻日, 孤松一枝, 有絕望之意(마치 가파른 봉우리가 해를 가리고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에 절망하는 뜻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랑채 ㄱ자 건물의 머리에 해당하는 방 여닫이문 위에는 '竹爐之室(죽로지실)'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죽로지실'은 추사가 그의 절친한 벗이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애제자인 황상(黃裳, 1788~?)에게 써준 다실(茶室)의 이름이다. 추사의 또 다른 벗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에게 써준 글씨라는 설도 있다.
사랑채 건넌방 남쪽의 '죽로지실(竹爐之室)' 액자와 '好古硏經(호고연경)' 대련
예서(隸書)와 전서(篆書)의 형태를 살려 지나치게 교(巧)를 부린 작품이다. 죽로(竹爐)는 겉을 대나무로 싸서 뜨겁지 않게 한 화로를 말한다. '죽로지실'은 대나무 같은 곧은 지조와 화로 같은 따뜻함이 있는 사랑방, 늘 차를 달여 마셔서 차향이 그윽한 문사(文士)의 서재를 가리킨다. 이 작품의 원본은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랑채 '竹爐之室(죽로지실)' 액자
죽로지실 남쪽 기둥에는 예서로 쓴 '好古硏經(호고연경)' 대련이 걸려 있다. '호고연경' 대련은 보물 1685-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협서(脇書)를 통해서 추사가 지향했던 예서관(隸書觀)을 엿볼 수 있다.
'好古硏經(호고연경)' 예서 대련
好古有時搜斷碣(호고유시수단갈) 옛것 좋아해 깨진 비석을 찾으러 다닐 때도 있고
硏經屢日罷吟詩(연경루일파음시) 여러 날 시 읊는 일도 제쳐놓고 경전을 연구하네
고증학, 금석학(金石學)에서 있어서 당대 최고의 석학다운 글이다. 고증학은 형이상학에 매몰된 숭밍이학(宋明理學)에 반대하여 생겨난 칭나라 때의 대표적 학풍이다. 밍나라의 멸망과 양명학의 폐단에 자극을 받은 칭나라 초기의 학자들은 경세(經世)를 위해 실사(實事)에 기초해서 옳은 것을 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 즉 실학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이들은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서 숭밍 이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버리고, 한탕(漢唐)의 훈고학(訓詁學)을 계승하여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칭대의 고증학이 되었다. 금석학은 원래 고고학의 한 분야이지만, 동양에서는 고증학의 한 분야, 나아가 유학의 한 분야였다. 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가 된 추사는 전국의 유명한 금석문을 조사하고 깊이 있는 연구도 내놓았다. 추사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인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북한산비(北漢山碑) 등 두 비문을 판독해서 고증한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저술했다. 이처럼 조선의 실학은 청나라의 실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랑채 동쪽 벽 첫번째 기둥에는 '天池石壁圖(티엔치싀비투)', 동벽을 돌아가자마자 북쪽 벽 맨 왼쪽 기둥에는 '靑李來禽帖(징리라이친티에)' 주련이 걸려 있다. 이 대련은 행서(行書)로 쓴 글씨다.
사랑채 동쪽의 '天池石壁圖(티엔치싀비투)' 주련
사랑채 북쪽의 '靑李來禽帖(징리라이친티에)' 주련
'티엔치싀비투'는 위안(元)나라 말기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추사가 존경했던 따치(大痴) 황궁왕(黃公望, 1269~1354)의 그림이다. '티엔치(天池)'는 쑤저우(蘇州) 서쪽 화산(華山)에 있는 신선도(神仙道)의 영지(靈地)다. 예로부터 이 못에 자생하는 벽련화(碧蓮花)의 잎 천개를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했다. '싀비(石壁)'는 그 절벽을 말한다. '티엔치싀비투'는 화산 영지의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을 그린 것이다. 위안나라 태정년간(1324~1328)에 황궁왕이 화산에 와서 수십 년 간 많은 '티엔치싀비투'를 그렸다.
황공망(黃公望)의 '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
'징리라이친티에'는 추사가 누이의 사위이자 제자인 이당(怡堂) 조면호(趙冕鎬, 1803~1887)에게 써준 글씨다. '징리라이친티에'는 추사가 뛰어넘고 싶었던 서성(書聖) 딴지(澹齎) 왕시즈(王羲之, 321~379)의 글씨본 '라이친티에(來禽帖)'를 말한다. '라이친티에'의 첫머리에 '징리(靑李)' 두 글자가 있기 때문에 '징리라이친티에'라고 부른다. '징리티에(靑李帖)'라고도 한다.
추사는 '징리라이친티에' 대련을 비롯해서 많은 작품을 조면호에게 주었으며, 조면호의 백부 조기복(趙基復)의 묘표를 예서로 써주기도 했다. 추사가 조면호에게 준 작품에는 예서로 쓴 '半潭秋水一房山(반담추수일방산)', '百葉蓮花十里香(백엽연화십리향)' 대련도 있다. 이 '秋水蓮花(추수연화)' 대련은 추사의 작품 중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秋水蓮花(추수연화)' 대련(출처 노재준)
‘반담추수일방산’은 '절반의 못에는 가을이 있고, 한 칸 방에는 산뿐이네'라는 뜻이다. 나를 찾아온 친구에게 보여줄 것이 이것밖에 없다는 뜻이다. ‘반담추수일방산’은 중궈(中國) 장쑤셩(江蘇省) 쑤저우(蘇州)에 있는 명원(名园) 환시우산좡(环秀山庄)의 가산(假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가산 뒤에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산자락에서 물에 면해 있으면서 측면에는 작은 절벽과 돌에 고인 웅덩이가 있어 '素湍绿潭 四清倒影(수퇀루탄 시칭다오잉)'의 뜻을 따서 '반담추수일방산'이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백엽연화십리향’은 추사가 지은 구절이다. '백잎 연꽃은 향기가 십 리를 가네'라는 뜻이다. 전련의 협서는 '이당(조면호)은 예서를 잘 썼다. 지묵 밖으로도 어떤 기이한 기운이 있어 전한과 후한의 법도 속으로 힘써 들어가는 것 같다. 헤아릴 길 없이 정진하는데, 법 없는 가운데 법이 있어 삼매의 경지를 뚫고 들어가는 것 같다'로 풀이된다. 추사가 조면호의 예서 글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련의 관지는 노완(老阮)’이란 호를 쓰고, ‘김정희인(金正喜印)'과 '완당(阮堂)'을 찍었다.
'티엔치싀비투', '징리라이친티에' 대련을 통해서 추사는 화가로서 황궁왕, 서예가로서 왕시즈를 가장 존경하였으며, 또 본받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티엔치싀비투', '징리라이친티에' 대련과 관련된 작품에는 '閒撫靑李來禽字(한무청리내금자) - 한가로이 청리내금첩의 글자들을 매만지고 있노라니', '宛在天地石壁圖(완재천지석벽도) - 진정 천지석벽도로다' 대련도 있다.
추사고택 뒤뜰
사랑채 북쪽 벽의 '圖書文字(도서문자)' 행서 대련
사랑채 북쪽 벽 가운데 기둥에는 '唯愛圖書兼古器(유애도서겸고기)', '且將文字入菩提(차장문자입보리)' 대련이 걸려 있다. 이 '圖書文字(도서문자)' 대련은 행서로 쓴 글씨다.
'圖書文字(도서문자)' 행서 대련
唯愛圖書兼古器(유애도서겸고기) 오직 도서와 더불어 옛것을 사랑하고
且將文字入菩提(차장문자입보리) 또한 문자를 통하여 진리를 찾으리라
'古器(고기)'는 옛 그릇이다. 옛 선비들은 그림과 책, 차를 사랑했다. 여기서 옛 그릇이라 함은 차를 달이는 그릇으로 보인다. '菩提(보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文字(문자)'는 불교 경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북쪽 맨 오른쪽 기둥에는 '夏鼎商彛周石敲(하정상이주석고)', '秦碑漢隸晋銀鉤(진비한예진은구)' 대련이 걸려 있다. '夏鼎秦碑(하정진비)' 대련은 중궈 고대 역사를 알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랑채 북쪽 벽의 '夏鼎秦碑(하정진비)' 예서 대련
'夏鼎秦碑(하정진비)' 예서 대련
夏鼎商彛周石敲(하정상이주석고) 하나라의 종정, 상나라의 이기, 주나라의 석고
秦碑漢隸晋銀鉤(진비한예진은구) 진나라의 비갈, 한나라의 예서, 진나라의 은구
문자에 대한 추사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 있는 대련이다. '鼎(정)'은 '鐘鼎(종정)', '종정'은 종정문(鐘鼎文)의 준말이다. 종정문을 이기문(彛器文)이라고도 한다. '彛(이)'는 고대 나라의 의식에 사용했던 제기(祭器)인 '彛器(이기)'의 준말이다. 종정문(이기문)은 샤(夏), 인(殷), 저우(周) 시대 종정의 명(銘)에 쓰인 대전(大篆) 등의 글씨체를 말한다. '종(鐘)'은 받침대 위에 걸어 놓고 나무망치로 쳐서 소리를 냈던 일종의 악기였다. '정(鼎)'은 제기로 세 발과 두 귀가 있고 향로와 비슷하게 생겼다. 샤나라에는 구정(九鼎)이 있었다. 위왕(禹王) 때 전국의 아홉 주(州)에서 쇠붙이를 거두어서 만들었다는 아홉 개의 솥인데, 저우나라 때까지 대대로 천자에게 전해진 보물이었다. 종정문(이기문)은 청동기 위에 글자가 주조(鑄造)되거나 새겨져 있어 금문(金文)이라고도 한다.
대전은 고문(古文)과 주문(籒文)을 포함하는 서체라고 하지만 전서(篆書)를 세분하면 고문과 대전(籒文), 소전(小篆)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문은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이기문)을 가리키고, 고문이 정리되면서 대전이 나왔으며, 친싀황(秦始皇)이 중궈를 통일하면서 자국의 문자를 기준으로 문자도 통일했으니 이것이 바로 소전이다. 전서는 넓은 뜻으로는 예서(隷書)가 나오기 이전의 서체로 갑골문, 금문, 석고문(石鼓文), 육국고문(六國古文), 소전, 무전(繆篆), 첩전(疊篆) 등을 모두 포함한다. 전서의 변체(變體)는 지극히 많아 수서(殳書), 각복(刻符) 등 통칭하여 잡체전(雜體篆)이라 한다. 전서의 주축은 대전과 소전이다.
'石鼓(석고)'는 석고문을 말한다. 석고문은 저우나라 쉬안왕(宣王)의 업적을 칭송하여 돌에 새긴 것이다. 중궈의 각석 가운데 제일 오래된 것이다. 모양이 북처럼 생겨 석고라고 부른다. 탕대(唐代) 초기 산시셩(陝西省) 천싱시엔(天興縣, 지금의 펑샹시엔, 鳳翔縣)에서 발견되었다. 석고는 모두 10개였는데, 각 돌마다 사냥에 관한 4언시 1수씩 새겨져 있었다. 석고는 2천여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마멸되어 글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베이숭(北宋) 때의 탁본(拓本)이 매우 진귀하게 남아 있다. 석고는 현재 베이징(北京) 꾸궁(故宮)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碑(비)'는 친(秦)나라 각석(刻石)을 비롯해서 비문(碑文), 묘지명(墓誌銘), 조상비(造像碑) 등에 새겨진 석문(石文)을 말한다. 친대 비석 중 중궈 시안(西安)의 베이린보우관(碑林博物館)에 있는 전서로 된 '이산크싀(嶧山刻石)'가 유명하다. 친싀황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비석은 원래 친나라 승상 리스(李斯)가 쓴 것인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숭나라 때의 모사본이다.
'隸(예)'는 예서를 말한다. 전서를 간략화한 것으로 좌서(左書)라고도 한다. 일설에 친싀황 때 서예가였던 청먀오(程邈)가 옥리들의 문서가 번잡한 것을 줄이기 위해 대전을 개선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예서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예서는 한대에 전서를 대신해 공식문자로 통용되었다.
예로부터 예서는 팔분(八分), 고예(古隸), 해서(楷書) 등의 명칭이 혼용되어 왔다. 하지만 예서는 고예와 분예(分隸)가 중심이다. 고예는 진예(秦隸)라고도 하며, 전서를 빠르게 쓴 것이다. 친대에 시작되어 전한 때 통용된 고예는 파책(波磔, 삐침)이 없는 소박한 서체가 특징이다. 한대의 관지자체(款識字體)와 유사하다. 분예는 한예(漢隸)라고도 하는데, 고예와 거의 같으나 파책이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후한(後漢)시대에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져 널리 통용된 예서는 특히 비각에 많이 사용되었다. 웨이진(魏晉)시대 이후에는 파책이 점차 약해지고, 여기에 점(點), 탁(啄), 도(挑), 적(趯)을 더하여 더욱 유연하고 매끄러운 서체로 변형되었다. 이 서체가 바로 해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와 추사의 예서가 유명하다.
'銀鉤(은구)'는 초서(草書)의 자획이 힘차고 강건한 글씨를 말한다. '수위안(書苑)'에 '진(晉)나라 수어징(索靖)이 초서에 뛰어나 그 글씨를 은갈고리(銀鉤)요, 전갈의 꼬리(蠆尾)라 명명했다.'고 하였다. '鐵劃銀鉤王羲之之書法(쇠의 획과 은의 갈고리는 왕시즈의 서법이다.)'이라는 말도 있고, 뚜푸(杜甫)의 시 '첸싀이구짜이(陳拾遺古宅)'에 '到今素壁滑(지금 흰 벽이 매끄러운데), 灑翰銀鉤連(글씨가 은구를 이어 놓은 듯하네.)'이라는 구절도 있다.
사랑채 서쪽 벽의 '春風秋水(춘풍추수)' 대련
사랑채 남쪽 벽 기둥에는 '春風大雅能容物(춘풍대아능용물)', '秋水文章不染塵(추수문장불염진)' 대련이 걸려 있다. '春風秋水(춘풍추수)' 대련은 칭나라의 유명한 서예가인 덩싀루(鄧石如, 1743~1805)가 이미 쓴 바 있다.
추사기념관의 '春風秋水(춘풍추수)' 행서 대련
春風大雅能容物(춘풍대아능용물) 봄바람처럼 온화한 아량은 만물을 다 받아들이고
秋水文章不染塵(추수문장불염진) 가을물처럼 맑은 문장은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다
덩싀루의 원작에는 '春塘大兄雅鑑(춘당 대형께서 고아하게 감상하시기를 바라며)'라는 쌍낙관이 있다. 덩싀루는 '春(봄 춘)'자가 들어간 '春塘(춘탕)'이라는 호를 쓰는 벗에게 '春'자로 시작하는 대련을 써줌으로써 '봄바람처럼 온화한 그대의 아량(인품)은 만물을 다 포용할 수 있을 것이고, 가을물처럼 맑은 그대의 문장은 결코 티끌(세속)에 물들지 않을 것'이라고 칭송을 한 것이다. 추사는 덩싀루의 대련을 인용해서 이 작품을 쓴 것으로 보인다.
'춘풍추수' 대련이 추사의 친필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김병기는 '춘풍추수' 등 2점의 대련에 대해 '도장을 지운 자국이 있다.'면서 '본래의 도장은 과연 누구의 것이며, 추사의 낙관이었다면 왜 지우고 김정희인과 완당 도장을 찍었을까?'라고 위작 가능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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