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 사랑채 거실 아랫목에는 보료가 깔려 있고, 그 뒤로 10폭짜리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북쪽 벽에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약장(藥欌)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다기(茶器) 진열장도 보였다.
사랑채 거실
병풍에는 '鸞驚之藝旣聞之於索靖, 雁歭之巧又顯之於蔡邕. 是以遊霧重雲傳敬禮之法, 鶬頡魚亢表揚宗之賦. 尙方大篆天其牢落, 柱下方書 何曾彷弗.'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풀이하면 '난새가 놀라는 듯한 기예는 수어징(索靖)에게서 이미 소문이 났고, 기러기가 옹크린 듯한 교묘함은 차이융(蔡邕)에게서 드러났다. 그러므로 날리는 안개와 층층 구름 모양은 징리(敬禮)의 법에 전하고, 새가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모양은 양쭝(揚宗)의 부(賦)에 나타났다. 샹팡(尙方)의 대전(大篆)은 자연처럼 거대하나, 쭈샤(柱下)의 방서(方書)는 어찌 비슷한 적이 있었던가!'의 뜻이다.
수어징(索靖, 239~303)은 중궈(中國) 산궈싀다이(三國時代) 웨이(魏)~시진(西晉) 때의 인물로 자는 여우안(幼安)이다.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시진 시대 때 무장으로 활동하였다. 팔왕의 난(八王之亂) 때 크게 활약하였으나 303년에 쓰마융(司馬顒)의 군대를 제압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서예에 뛰어나 웨이꽌(衛瓘)과 함께 일대이묘(一臺二妙)라 불릴 정도였다. 또 그는 장초(章草)로 유명했고, 짱즈(張芝)가 쓰는 초서(草書)의 법을 배워 형태를 다르게 했다. 그의 초서는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고, 솔개가 살짝 날아가는 것 같다는 평을 받았다. 난숭(南宋)의 양신(羊欣)은 그의 글씨에 대해 '수어징은 짱즈의 살을 얻었다'는 평가를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린수위안파티에(隣蔬圓法帖)', '위에이티에(月儀帖)', '시훙탕파티에(戲鴻堂法帖)', '추스뱌오(出師表)'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그의 초서 이론을 담은 '차오수좡(草書狀)이 있다.
차이융(蔡邕, 133~192)은 허우한(後漢) 말기의 학자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그는 서예의 기법인 영자팔법(永字八法)의 고안자라고 알려져 있다. 영자팔법은 붓글씨로 한자를 쓸 때 자주 나오는 획의 종류 여덟 가지를 길 영(永) 자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영자팔법의 필순은 측(側) - 점, 늑(勒) - 가로획, 노(努) - 세로획, 적(趯) - 갈고리, 책(策) - 오른쪽 치킴, 약(掠) - 긴 왼삐침, 탁(啄) - 짧은 왼삐침, 책(磔) - 파임 순으로 되어 있다. 175년 3월 허우한의 링띠(霊帝)는 유학자들에게 5경(五經)의 문자를 바로잡게 하고, 그 내용을 당시 이랑(議郞)이었던 차이융에게 고문(古文), 전서(篆書), 예서(隸書) 등 세 가지 글씨로 옮겨 쓰게 한 다음 석공에게 그 글씨를 새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석이 세워지자 차이융의 글씨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고 한다. 차이융이 천자문(千字文)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
이 글의 앞에는 '師宜八分之巧 元常三體之妙 史籀李斯之篆 梁鵠曺喜之書 莫不摠華桂宮盈滿甲觀.', 뒤에는 '書爲元藝疋政, 阮堂'이라는 글이 더 붙어 있다. '싀이관(師宜官)의 팔분서(八分書)의 교묘함, 위안창(元常)의 삼체(三體)의 오묘함, 싀저우(史籀)와 리쓰(李斯)의 전서(篆書), 량후(梁鵠)과 차오시(曺喜)의 글씨는 모두 아름다운 궁전에 온통 화려함으로 가득찬 것 같은 으뜸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원예(元藝)에게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며 쓰다.'로 풀이할 수 있다. 내용은 추사의 글인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싀이관(?~?)은 중궈 허우한 말의 서예가다. 그는 길이가 한 장(약 2m 30cm)이나 되는 대형 글씨를 쓸 수 있었으며, 사방으로 한 치(약 2.3cm) 밖에 안 되는 공간에 1천 자를 쓸 수도 있었다고 한다. 글을 좋아한 링띠는 전국의 서예가들을 불러들였다. 홍도문(鴻都門)에 모인 수백 명의 서예가들의 글을 본 링띠는 싀이관의 서체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했다. 호주가였던 싀이관은 어느 날 무일푼으로 술집에 가서 술을 실컷 마시고, 벽에 글자를 써 매물로 내놓았다. 구경꾼들은 하나같이 그의 서체에 감탄하며 돈을 주었고, 술값을 챙긴 싀이관은 벽의 글자를 깎아서 지우고 돌아갔다. 자신의 재능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싀이관은 자신의 서체를 도둑맞을 것을 염려하여 글자를 쓴 뒤 반드시 목판을 깎아내거나 불태웠다. 이를 알고 있던 서예가 량후는 어느 날 목판을 여러 개 준비하고 싀이관에게 술을 먹였다. 싀이관이 취하자 량후는 그의 글씨가 적힌 목판을 몰래 가지고 돌아왔다. 량후는 이렇게 하여 싀이관의 서체를 확보하였고, 이후 차오차오(曹操)로부터 '싀이관을 뛰어 넘는 실력이다'라는 평을 들었다. 훗날 싀이관은 위안수(袁術)의 부장이 되었고, 위안수가 쥐루(鉅鹿)에 껑치우베이(耿球碑)를 세울 때 비문을 적었다.
위안창은 쭝야오(鍾繇, 151~230)의 자다. 쭝야오는 허우한의 창수푸싀(尙書僕射) 벼슬을 하다가 차오차오와 제휴해서 웨이나라 건국 후에는 3대를 섬기면서 팅웨이(廷尉), 샹궈(相國), 타이웨이(太尉), 타이푸(太傅) 등의 최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쭝야오는 서예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서체 중 예서와 해서(楷書)에 뛰어나 숭대의 서예가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명석(銘石), 장정(章程), 행압(行押) 3체에 두루 뛰어났던 쭝야오는 차오시(曹喜)와 차이융, 류더셩(劉德昇) 등을 본받으며 여러 사람의 장점을 폭넓게 수용했다. 서법사상 예서에서 해서로 발전해가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쭝야오는 왕시즈(王羲之)와 더불어 쭝왕(鐘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시진(西晉) 난베이차오(南北朝)를 거쳐 탕숭대에 이르기까지 서예계의 최고봉으로 추앙받았다. 쭝야오는 지금 우리가 정자체로 알고 있는 해서체(楷書體)를 확립한 사람이다. 서예계에서는 그를 해서체의 시조로 본다. 쭝야오의 저서로는 수파싀얼이(書法十二意)'가 있으며, 훗날 량(梁)나라 우띠(武帝)와 짱쉬(張旭), 옌쩐칭(顔眞卿) 등은 이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쭝야오가 쓴 '쉬안싀뱌오(宣示表)'는 해서체의 정본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를 보면 지금의 해서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표문은 황실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8왕의 난때 행방이 묘연해졌지만 이후 둥진(東晉)이 건국되면서 보관하고 있던 관리가 진상하면서 행방이 밝혀졌다. 해서첩 중에 가장 오래된 본으로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복각한 부본들만 남아 있다. 왕시즈는 탕대에 실물을 보고 해행(楷行)을 비롯한 자신의 서체를 완성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왕시즈는 해서와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함으로써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 왕시즈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 바로 쭝야오였다.
싀저우는 쩌우(周)나라 쉬안왕(宣王) 때의 타이싀(太史) 저우(籀)를 말한다. 그가 만든 글자체가 소전(小篆)의 전신인 대전(大篆)이다. 대전을 주문(籀文), 주서(籀書)라고도 한다. 리쓰(BC 280~BC 208)는 짠궈싀다이(戰國時代) 추(楚)나라 출신으로 친왕(秦王) 쩡(政)에게 등용되어 친나라가 천하 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여했고, 통일 후에는 군현제 등을 실시하여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도량형, 화폐, 문자 통일 등 중앙집권책을 폈으나, 한편으로 분서갱유 사건 등을 주도하여 친싀황(秦始皇)이 악명을 떨치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천하의 모든 문자를 전서체(篆書體)로 통일시키도록 했는데, 한자는 그후 큰 변화없이 지금까지 존속되어 왔다.
량후(?~?)는 허우한 말의 서예가로 자는 멍황(孟皇)이다. 어려서 글씨를 잘 써 효렴으로 천거되면서 랑관(郎官)이 되었다가 쉬안부창수(選部尙書)가 되었다. 링띠는 천하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을 홍도문으로 모이도록 했다. 량후도 싀이관, 르숭(樂松), 렌즈(任芝), 쟈후(賈護), 시지엔(郤儉) 등과 함께 홍도문에 모였다. 당시 그는 싀이관에게 글씨를 배우고자 했지만 그의 성품이 오만해서 가까워지기 힘들어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싀이관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한바탕 글씨를 쓰는 것을 알게 된 량후는 그가 술집에 있는 것을 보고 나무판을 가져와 벽에 걸어뒀다. 싀이관이 술에 취해 나무판에 글씨를 쓰자 그대로 가져가 서체를 습득했다. 웨이수우(魏蜀吳) 산궈싀다이에 량후는 전란을 피해 징저우(荊州)로 달아났는데, 차오차오가 징저우를 점령했다. 차오차오는 젊은 시절에 뤄양(洛阳) 시엔링(縣令) 자리를 원했지만 량후는 차오차오가 출신이 나쁘고 품행이 좋지 않다고 반대해 베이부뚜웨이(北部都尉)가 되었다. 그 일로 량후는 차오차오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차오차오는 그의 글씨를 아꼈기 때문에 그를 쥔쟈쓰마(軍假司馬)로 임명하여 삐수링(秘書令)에서 글씨를 쓰게 했다. 차오차오는 량후의 글씨를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면서 싀이관보다 낫다고 여겼으며, 궁전의 글씨들은 대부분 량후의 글씨였다고 한다.
차오시는 둥한(東漢) 시대의 서예가로 전서(篆書)를 잘 썼으며, 현침(懸針)과 수로(垂露)의 서법을 창시했다. 그는 차이융, 웨이꽌, 단춘(邯鄲淳), 취위안(崔瑗)과 더불어 소전(小篆)을 잘 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서위원예(書爲元藝)'라는 제목의 이 글은 원예라는 사람의 부탁으로 쓴 중국 역대 서예가의 글씨를 품평한 것이다. 원예는 형조 판서를 지낸 서승보(徐承輔, 1814~1877)의 호다. 서승보는 추사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방완당서(倣阮堂書)'를 보면 그가 얼마나 추사체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채 가운대 방
'유복량수(有福量壽)' 판액과 '신안구가(新安舊家)' 액자가 걸려 있는 사랑채 가운데 방에는 '唯愛圖書兼古器(유애도서겸고기)', '且將文字入菩提(차장문자입보리)' 행서 대련과 '万樹琪花千圃葯(만수기화천포약)', '一莊修竹半牀書(일장수죽반상서)' 행서 대련, '淺碧新瓷烹玉茗(천벽신자팽옥명)', '硬黃佳帖寫銀鉤(경황가첩사은구)' 행서 대련을 비롯해서 '秋水纔添四五尺(추수재첨사오척)', '綠陰相間兩三家(녹음상간양삼가)' 행서 대련을 쓴 액자들이 걸려 있다.
사랑채 건넌방 '죽로지실(竹爐之室)'에는 '지란병분(芝蘭竝芬)'과 '불이선란(不二禪蘭)', '선게비불(禪偈非佛). '해저니우(海底泥牛)' 모사본이 있다. '지란병분(芝蘭竝芬)' 모사본만 벽에 걸려 있고, 나머지 두 점은 방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다.
사랑채 건넌방 '죽로지실'
죽로지실의 '지란병분(芝蘭竝芬)', '불이선란(不二禪蘭)', '선게비불(禪偈非佛). '해저니우(海底泥牛)' 모사본
'지란병분(芝蘭竝芬)'은 '영지(靈芝)와 난초(蘭草)가 함께 향기를 발하다.' 또는 '영지와 난초가 함께 활짝 피었다.'는 뜻이다. 추사가 1844년에 그린 이 그림의 원화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화면에는 두 대의 영지와 꽃이 활짝 핀 난초가 동격으로 그려져 있다. 난초와 지초는 지란지우(芝蘭之友)를 상징한다. 또, 난초는 향기, 영지는 지조와 영원성을 상징한다. 부채에는 추사의 화제(畵題)를 비롯해서 그의 벗 권돈인의 찬사(贊辭), 제자인 애사(靄士) 홍우길(洪祐吉, 1809∼1890)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제발(題跋)이 적혀 있다.
추사기념관의 '지란병분(芝蘭竝芬)'
추사는 화제를 '芝蘭竝芬 戱以餘墨. 石敢(지초와 난초가 함께 향기를 뿜어내다. 남은 먹으로 장난삼아 그리다. 석감'이라고 썼다. 석감(石敢)은 추사의 343개 별호(別號) 가운데 하나다. 석감은 석감당(石敢當)에서 따온 별호다. 석감당은 중궈 우다이(五代) 진(晋) 때의 역사(力士)의 이름이다. 옛날에는 석감당을 돌에 새겨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삼았다. 별호에서 세상을 평정하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석감(石敢)을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조희룡의 호는 석감(石憨)이다. 권돈인은 추사의 화제에 '百歲在前 道不可絶, 萬卉俱嶊 香不可滅. 又髥(백년이 지난다 해도 도는 끊어지지 않고, 만가지 풀이 꺾인다 해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염)'이라고 화답했다. 대단한 결기가 느껴지는 문장이다. 우염(又髥)은 권돈인의 별호다. '지란병분'은 추사와 권돈인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난초와 지초 그림을 통해서 석감과 우염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림으로 목숨을 함께 할 수 있는 영원한 우정의 향기를 기원한 것이다.
훗날 '지란병분' 부채를 손에 넣게 된 대원군은 '紉珮芝蘭. 坡生(지초와 난초를 꿰어차다. 파생)'이라고 썼다. 파생(坡生)은 '바위언덕(石坡)에서 나다(生)'라는 뜻이다. 대원군은 별호를 통해서 거친 환경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대원군이 늘 지니고 다니던 이 부채를 홍우길에게 보여주자 그는 '丁丑重陽恭琓. 藹士生(정축년 중양절에 공손한 마음으로 감상하다. 애사생)'이라고 썼다. 정축년은 1877년,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이다. 자신의 별호에 '生'을 쓴 것은 '양기가 왕성한 날에 다시 태어나다'란 뜻이다. 즉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그림에는 당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코드에 숨겨져 있다.
추사와 권돈인, 대원군, 홍우길은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다. 당시 사회의 화두는 영정조(英正朝) 이래의 탕평책(蕩平策)과 안동 김씨 세도정치였다. 역사가들은 조선을 패망으로 이끈 주범으로 풍양 조씨(豊壤趙氏), 여흥 민씨(驪興閔氏)와 함께 안동 김씨(安東閔氏) 세도정치를 꼽고 있다. 추사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희생자였음을 생각할 때 이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란병분'에는 세도정치를 뒤집어엎는 혁명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불이선란(不二禪蘭)'은 선란불이(禪蘭不二) 나아가 선란일체(禪蘭一體)와 같은 말이다. 선(禪)과 난(蘭)을 동격으로 본 것이다. 추사의 벗 초의선사(艸衣禪師)가 다법(茶法)과 선법(禪法)이 하나라는 다선일체(茶禪一體), 다선불이(茶禪不二)를 부르짖은 맥락과도 같다. 원래의 제목은 '不作蘭畵.....'로 시작되는 화제에 따라 '부작란(不作蘭)'이라고 불렀지만 최근 화제의 내용에 따라 '불이선란'으로 바꼈다.
'불이선란(不二禪蘭)' 개인소장
그림은 꽃대 하나에 꽃 한 송이, 장엽 하나에 중엽 여섯, 단엽 예닐곱 장이 전부다. 오른쪽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뻗었다가 수직으로 올라간 다음 직각으로 목을 꺾은 꽃대 끝에 화심(花心)만 농묵(濃墨)으로 강조한 꽃 한 송이를 그렸다. 장엽은 장타원형을 이루면서 뻗어올라가다가 꽃대가 꺾인 지점에서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져 휘었다. 화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담묵(淡墨)으로 처리했다. 매우 단출하고 조야한 듯하지만, 탁 터진 꽃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희열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꽃은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이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개와 지조라고나 할까!
추사는 이 그림에 아주 만족했던 듯 낙관(落款)을 무려 열다섯 개나 찍었다. 자신이 추구했던 난초 그림의 이상(理想)을 이 그림에서 실현했다고 본 것이다. 추사의 그런 고조된 감정이 제시(題詩) 칠언절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판교식(鄭板橋式) 역행법(逆行法)으로 쓴 제시도 파격적이고, 글씨체도 매우 특이하다.
不作蘭畵二十年(부작란화이십년) 난초를 그리지 않고 스무해나 지났는데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 드러났네
閉門覓覓尋尋處(폐문멱멱심심처) 문을 닫아걸고 찾아헤매고 또 찾았는데
此是維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 아니던가
추사의 희열은 파격적인 제시 바로 오른쪽의 화제 '若有人强要 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만약 누가 강요한다면 구실을 만들고 또 응당 비야리성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겠다. 만향)'으로 다시 이어진다. '毘耶(비야)'는 비야리성(毘耶離城)을 말한다. 비야리성은 인도의 고대 도시 바이샬리(Vaisali), 팔리어로 베살리(Vesali, 毗舍離)를 가리킨다. 비야리성에 살았던 유마힐(維摩詰) 거사(居士)는 샤카무니(釋迦牟尼)의 교화를 도왔다. 비야리성의 장자(長者)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자신도 병이 들었다고 자리에 누운 뒤 병문안하러 온 여러 보살들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였다고 한다. '유마경(維摩經)'의 핵심인 '불이법문'은 분별과 대립. 차별, 언어를 떠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曼香(만향)'은 추사의 별호다.
난초 장엽이 꺾인 그 아래 여백에 화제를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又題.(초서와 예서의 기이한 글씨를 쓰는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제하다.)'라고 썼다. 자긍심이 가득한 화제다. '漚竟(구경)'은 추사의 별호다.
난초 꽃대 왼쪽 여백의 화제는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선객노인.)'이라고 적혀 있다. '불이선란'은 본래 추사가 쑥대머리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어느 날 우연히 손이 가는 대로 그려주었던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달준은 추사가 함경도 북청 귀양 시절에 만난 시동이다. 추사는 먹을 갈아 주는 시동이라고 해서 그를 '먹동이'라고도 불렀다. 달준은 추사가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 은거할 때도 따라와 모셨다. '仙客老人(선객노인)'은 추사의 별호다.
'선객노인' 명의로 쓴 화제와 난초 꽃대 사이에는 '吳小山見而豪奪. 可笑.(오소산이 보고 얼른 빼앗아가니 가소롭다.)'는 화제를 달았다. 이 화제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쓴 것으로 보인다. '吳小山(오소산)'은 추사의 제자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다. 오규일은 추사의 낙관과 도인(圖印)을 도맡아 새겼던 전문 전각가였다.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姜友邦,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불이선란'에 대해 '글자를 변형해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 그림이건 글씨건 법도를 지키지 않은 획이 없다. 괴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기세(氣勢)가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자유의 세계요, 무애의 세계다.'라면서 '유마경'에 나오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유마거사의 '불이문답(不二問答)'처럼 '이런 고도의 추상적 세계를 다룬 작품이 "불이선란도"다.'라고 극찬했다.
죽로지실의 '선게비불(禪偈非佛)'과 '해저니우(海底泥牛)' 모사본
사언절구를 쓴 '禪偈非佛(선게비불)'은 추사의 행서 글씨 중 추사체다운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禪偈非佛(선게비불) 선가의 게송은 불법이 아니고
理障非儒(이장비유) 이학에 막히면 유학이 아니네
心之孔嘉(심지공가) 마음이 매우 아름답고 착해야
其言蔼如(기언애여) 그 말씨도 온후하고 부드럽네
참선이나 게송을 외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고, 고루한 성리학(性理學)에 얽매이면 참다운 유학(儒學)이 될 수 없다. 정도(正道)는 지말(枝末)에 있지 않고 근본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근본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추사가 불교에도 조예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理(리)'는 곧 성리학을 말한다. '孔嘉(공가)'를 '툭 터지다'로 풀이한 사람도 있다. 마음이 탁 트인 사람은 아름답고 착한 마음씨를 가질 수 밖에 없다. '蔼(애)'는 '나긋나긋하다'로 풀이할 수도 있다. 탕나라 한위(韩愈)의 '答李翊书(따리이수)'란 글에 '仁义之人,其言蔼如也.(인의로운 사람의 말은 온후하고 부드럽다.)'는 구절이 있다.
'해저니우(海底泥牛)'는 중궈의 까오펑위안먀오(高峰原妙, 1238~1295) 선사가 지은 '찬야오(禪要)'에 실려 있는 선시(禪詩)에서 인용한 것이다. 칠언절구로 된 선시 원문에서 수구와 미구를 옮겨 썼다.
海底泥牛含月珠(해저니우함월주) 바다 밑 진흙소 둥근 달을 물고 달아나고
巖前石虎抱兒眠(암전석호포아면) 바위 앞 돌호랑이 새끼를 안고 졸고 있네
鐵蛇鑽入金剛眼(철사찬입금강안) 쇠로 된 뱀 금강의 눈을 뚫고 들어가는데
崑崙騎象鷺鷥牽(곤륜기상로사견) 곤륜 탄 코끼리를 백로와 학이 끌고 가네
까오펑위안먀오 선사는 이 공안에 대해 '이 네 구절 안에 능히 죽이고 능히 살리는 한 구절이 있다. 능히 죽이고 능히 살리며, 능히 놓아주고 능히 빼앗으니, 만약 이것을 점검해 낼 수만 있다면 한평생 수행한 일을 마쳤다고 허락하겠다. 만약에 이 일을 논의한다면 비유하건대 사람 집 처마 끝에 한 무더기 거름과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어느 한 곳에 한량없는 보배가 쌓여 있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이를 얻어 가지게 되면 백겁천생(百劫天生)의 영원한 세월 동안 가져도 다함이 없고 써도 모자람이 없다. 이 보배 창고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 그대들 하나의 믿음이라는 글자 위에서 나온다. 만약에 믿음이 온전하면 결코 서로 속이지 않지만 만약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면 비록 진겁(塵劫)의 긴 세월을 지내더라도 또한 옳은 곳이 없게 된다. 널리 여러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청하니 곧 이렇게 믿어서 가난한 거지 아이(貧窮乞兒)를 면하라. 또 말하라! 이 보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는가?'라고 일갈했다.
진흙소, 돌호랑이, 무쇠뱀은 어리석은 중생을 가리킨 듯하고, 마지막 구절 곤륜산을 등에 진 코끼리를 끌고 가는 백로와 학은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리를 깨달은 자가 아닐까 한다. 바다에 비친 달을 진짜 달인 줄 착각하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내 안에 부처가 있는 줄 모르고 한갓 바위 앞에서 빌고, 내 눈을 찌르듯이 내 안의 부처를 죽이는 어리석은 중생들이다. 그러니 중생들이여 허상을 버리고 진공묘유의 곤륜산을 증득하자는 것이다.
'象(상)'을 코끼리 형상으로 그린 글씨가 상당히 특이하다. 추사가 실제로 코끼리를 본 것 같지는 않다. '象'이라는 상형문자를 보고 코끼리 형상을 유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역시 대가다운 솜씨라고 하지 않을 없다.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5 - 추사고택 안채 (0) | 2019.04.08 |
---|---|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4 - 추사고택 안채 (0) | 2019.04.06 |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2 - 추사고택 솟을대문과 사랑채 (0) | 2019.04.03 |
나무 젓가락 만들기 체험장 니치요 코우보(日曜工房)를 찾아서 (0) | 2019.04.02 |
요나고시(米子市) 해산물 요리 전문식당 '카이오(海王)'를 찾아서 (0) | 2019.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