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秋史古宅) 안채는 ㅁ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안채는 6칸의 대청, 2칸통의 안방과 건넌방, 광 등을 갖춘 대가집 규모다. 중정을 중심으로 대청이 있고, 좌우로 방을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화순옹주(和順翁主)가 살았던 방은 안채에서 시야가 가장 잘 터진 곳이다. 안채의 부엌은 난방을 위한 것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고 한다.
안채 전경
안채의 대문과 안팎의 기둥 곳곳에도 주련이 걸려 있다. 어떤 방에는 방의 이름을 쓴 편액을 방문 위에 걸어놓았다. 방에 붙인 이름에서도 그 방 주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안채 대문 바깥쪽 기둥의 '万樹一莊(만수일장)' 행서 대련
안채 대문 기둥에는 '万樹一莊(만수일장)' 행서 대련이 걸려 있다. 이 대련은 추사가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던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에게 써준 것이다. 추사 만년에 쓴 이 대련 작품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만수일장' 모사본은 사랑채 가운데 방에도 전시되어 있다.
'万樹一莊(만수일장)' 행서 대련(출처 영일서단 카페)
万樹琪花千圃葯(만수기화천포약) 기이한 꽃나무 만 그루에 약초 심은 밭은 천 이랑이고
一莊修竹半牀書(일장수죽반장서) 별장 가득 쭉쭉 뻗은 대나무 책은 책상의 반을 채웠네
'만수일장' 대련의 전련은 중궈(中國) 탕(唐)나라 차오탕(曹唐)의 절구 '小遊仙詩 九十八首(샤오여우시엔싀 98수)'에 나오는 구절이다. '샤오여우시엔싀'는 신선 세계를 읊은 시다. 따라서 전련은 선계의 아름답고 화려한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葯(약)'은 구릿대의 뜻도 있다. 구릿대는 한약명으로 백지(白芷)라고 한다. 백지는 해표약(解表藥) 중 발산풍한약(發散風寒藥)에 속한다. 후련은 선비나 학자들의 일반적인 생활 공간을 묘사한 것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구절은 전련에 맞춰 추사가 창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대련은 선비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만수일장' 대련에 대해 김병기는 '만년의 원숙하면서도 여전히 진지하고 참신한 필획과 노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경(生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장법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명작이다.'라고 평했다. 이 대련의 협서에는 '書應彛齋相國方家正之(이재 상국 전문가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것에 부응하여 쓰다.)', '果山 金正喜(과산 김정희)'라고 되어 있다. '方家(방가)'는 '전문가, 대가'의 뜻이다. '相國(상국)'은 영의정이나 좌우의정 등 삼정승에 대해 사용하던 호칭이다. 권돈인은 1843년에 우의정, 1844년에 좌의정, 1849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권돈인이 상국에 있던 시기는 추사의 만년에 해당한다. 이 글씨는 추사 나이 64~66세 때 쓴 것으로 보인다. '正之(정지)'에서 벗을 대하는 추사의 겸손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果山(과산)'은 추사가 1849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1851년 7월까지 경기도 과천에 머물 때, 1851년 7월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다시 과천에 머물 때 쓰던 별호다. 추사가 가장 만년에 쓰던 별호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쓴 별호는 과산 외에 노과(老果), 과(果),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과로(果老) 등이 있다. '과(果)'는 '과천'을 가리킨다. 과천에는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의 별장이 있었다. 추사는 만년에 과천 별장을 거처로 삼았다. 과천은 참외가 많이 나던 곳이었다. 그래서 별장의 이름을 '외 과(瓜)'자를 써서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고 한 것이다.
권돈인은 과천에서 가까운 경기도 광주(廣州))의 퇴촌(退村)에 은거하였다. 퇴촌에도 참외가 많이 났던지 권돈인도 만년에 과지초당노인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호를 쓸 정도로 두 사람은 절친했다. 추사는 절친한 벗 권돈인이 선경과도 같은 아름다운 곳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대련을 써준 것이다. 두 사람의 진한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안채 대문 바깥 왼쪽에는 추사가 35세 때 쓴 '直聲秀句(직성수구)' 대련이 걸려 있다. 추사는 1820년 칭(淸)나라 학자 꾸춘(顧蒓, 1765~1835)에게 협서와 함께 이 대련을 써서 보냈다. 그가 칭나라 학자들과 깊이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직성수구' 대련 글씨는 일제시대 박석윤이 베이징(北京)의 수장가에게 구입해서 들여왔는데,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채 대문 바깥 왼쪽의 '直聲秀句(직성수구)' 행서 대련
直聲留闕下(직성유궐하) 곧은 말씀으로 대궐 아래 머무르게 되었지만
秀句滿天東(수구만천동) 빼어난 싯구는 하늘 동쪽 나라에 가득합니다
칭나라 관리였던 꾸춘은 서법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성품이 곧고 정직했던 그는 정치에도 밝아 직언을 잘하였다. 꾸춘에 대해서는 '칭싀리에쫜(淸士列傳)' <숭쥔탸오(松筠條)>에 그 일화가 나온다. 숭쥔(松筠, 1744~1835)은 청렴하고 정직하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방관에 임명되자 꾸춘은 '숭쥔 같은 사람은 마땅히 곁에 두고 중용해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황띠(皇帝)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추사는 이 대련을 통해서 꾸춘의 충직함과 빼어난 글씨를 칭송하고 있다.
'直聲秀句(직성수구)' 행서 대련(출처 교수신문 김병기)
추사는 꾸춘에게 보낸 대련 협서에 '顧南雅先生文章風裁, 天下皆知之, 向爲湘浦一言, 尤爲東人所傳誦而盛道之. 萬里海外, 無緣梯接, 近閱復初齋集, 多有南疋唱酬之什, 因是而敢託於墨緣之末, 集句寄呈, 以伸夙昔憬慕之微私. 海東秋史金正喜具草'라고 썼다. 풀이하자면 '난야(南雅, 고순의 호) 선생의 문장과 풍채는 천하가 모두 다 압니다. 저번에 샹푸(湘浦, 숭쥔의 자)를 위한 한 말씀은 더욱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해 듣고 외우는 바 되어 크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만리 해외에 서로 만날 길이 없더니 요즈음 <푸추짜이지(復初齋集)>를 보는데, 꾸춘 선생과 주고받은 싯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학문과 예술로 맺은 인연의 끝에 부탁하여 글귀를 모아 보내드림으로써 일찍부터 동경하고 사모하던 작은 뜻을 폅니다. 해동의 추사 김정희가 갖추어 씁니다.'라는 뜻이다.
전련 '直聲留闕下'는 탕나라 주칭위(朱慶餘)의 오언율시 '孔尙書致仕, 因而有寄贈(콩 상서가 벼슬에서 물러났기에 부쳐주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후련 '秀句滿天東'은 출처를 알 수 없다. 추사가 전련에 맞춰서 창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탄생한 이 대련의 명구는 추사의 30대 후반 글씨체의 기준작이 된다. 웅장한 필치에서 중년 시절 대가의 기개가 엿보이는 글씨다. 박규수(朴珪壽)는 이런 글씨를 보고 추사의 중년 글씨가 기름졌다고 말한 것이리라.
웡팡깡의 '松柏忠信(송백충신)' 행서 대련(출처 교수신문 김병기)
한편, 김병기는 '직성수구' 대련의 글씨가 웡팡깡(翁方綱)이 추사에게 보내준 '如松柏之有心, 而忠信以爲寶(송백이 심지가 있듯이 정성과 믿음으로 보배를 삼는다)' 행서 대련과 매우 흡사하다면서 '웡팡깡의 글씨는 장인(匠人)처럼 정교한 점은 있으나 개성미가 부족하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웡팡깡의 글씨를 모방한 시기의 추사 글씨는 특히 大字(대자)에서 억지스러운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추사의 명성이 칭나라에까지 알려지면서 그의 글을 받으려는 학자들도 점차 늘어갔다. 따오광(道光) 연간(1820~1850)에 네이거싀두관(內閣試讀官)을 지낸 판청셔우(潘曾綬) 같은 시인은 자신의 시집 '까이란수우(陔蘭書屋)' 2집을 내면서 표제에 붙일 글을 추사에게 부탁해왔다. 이에 추사는 시집의 표지 머리에 '集刊成幸以此爲題有附名之榮秋史(시집을 간행함에 표제 글씨를 쓰는 영광을 입었다.)'란 글을 붙인 다음 '陔蘭書屋二集(까이란수우 2집)'란 표제를 쓰고, '鷄林金秋史題(경주 김씨 추사 제하다)'라는 서명으로 마무리했다. 계림은 경주이며, 추사가 경주 김씨임을 밝히고 있다. 또 계림은 조선을 가리키는 의미도 있다. 추사가 써준 글씨는 목판으로 새겨 시집 표지에 인쇄되었고, 시집이 간행되자 판청셔우는 추사에게 보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안채의 남쪽 부엌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의 양쪽 기둥에는 '書已過三千券(서이과삼천권)', '畵可壽五百年(화가수오백년)' 대련이 걸려 있다.
안채 남쪽 부엌문 양쪽 기둥의 '書已畵可(서이화가)' 대련
書已過三千券(서이과삼천권) 책은 이미 삼천 권이 넘었고
畵可壽五百年(화가수오백년) 그림 또한 오백 년쯤 묵었네
추사의 집안에 수많은 서책과 오래된 그림을 소장하고 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처럼 추사는 좋은 서적과 서화를 수집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채 건넌방 남쪽 외벽 기둥에는 '淺碧新瓷烹玉茗(천벽신자팽옥명)', '硬黃佳帖寫銀鉤(경황가첩사은구)' 행서 대련이 걸려 있다. '玉茗銀鉤(옥명은구)' 대련 모사본은 사랑채 가운데 방에도 전시되어 있다.
안채 건넌방 남쪽 외벽 기둥의 '玉茗銀鉤(옥명은구)' 행서 대련
사랑채 가운데 방의 '玉茗銀鉤(옥명은구)' 행서 대련 모사본 액자
淺碧新瓷烹玉茗(천벽신자팽옥명) 옅푸른 새 자기에 옥명을 달이고
硬黃佳帖寫銀鉤(경황가첩사은구) 경황지 좋은 서첩에 은구를 쓰네
자기에 향그러운 꽃차를 달이고, 귀한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은 모든 선비들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玉茗(옥명)'은 꽃이 노랗고, 꽃받침은 녹색인 것을 말한다. 백산차(白山茶), 옥명차라고도 한다. 백산은 백두산(장백산)을 말한다. '銀鉤(은구)'는 초서를 멋지게 쓴 것을 말한다. '硬黃(경황)'은 중궈 탕나라 때 나온 경황지(硬黃紙)를 가리킨다. 좀이 먹는 것을 막기 위해 황벽(黃蘗)나무 껍질의 물을 들여서 만든 최고급의 노란색 종이로 부드럽고 광택이 있으며 매끄럽다.
김병기는 '옥명은구' 등 5점의 대련에 대해 '단 한줄의 협서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중국 청나라 때 유행한 대련에는 협서가 필수적이었고, 추사가 이를 자랑스레 보급하였는데도 협서를 빠뜨린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면서 가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또 '협서가 들어가야할 자리에는 앞에서 언급한 도장만 찍혀 있을 뿐이다. 또 503개의 호를 가진 추사는 작품을 할 때마다 당시의 심경과 처지에 맞는 호를 골라 썼는데도 앞의 대련에 전혀 사용하지 않은 점' 등의 이유를 들었다.
안채 가운데 방 서쪽 외벽 기둥에는 '凡物皆有可取(범물개유가취)', '於人何所不容(어인하소불용)' 행서 대련이 걸려 있다. 안채 뒤로 돌아나가 추사영실(秋史影室) 쪽문 바로 직전에 있다.
안채 가운데 방 서쪽 외벽 기둥의 '凡物於人(범물어인)' 행서 대련
凡物皆有可取(범물개유가취) 무릇 사물에서 모두 취할 바가 있는데
於人何所不容(어인하소불용) 사람에 대해 용납하지 못할 게 있으랴
모든 사물에는 다 취할 바가 있는데, 사람에 대해 용서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추사의 후덕한 인품과 넓은 도량을 알 수 있는 대련이다.
안채 안방 북쪽 외벽 기둥에는 '碧玉盤中弄水晶(벽옥반중농수정)', '黃金合裏盛紅雪(황금합리성홍설)' 대련이 걸려 있다. 뒤뜰에서 추사영실로 오르다 보면 '碧玉黃金(벽옥황금)' 대련을 만나게 된다.
안채 안방 북쪽 외벽 기둥의 '碧玉黃金(벽옥황금)' 대련
碧玉盤中弄水晶(벽옥반중농수정) 푸른 옥쟁반 안에서 수정이 구르는 듯하고
黃金合裏盛紅雪(황금합리성홍설) 황금반합 속에 홍설차를 담아 놓은 듯하네
전련은 탕나라의 장군이자 시인 꿔젠(郭震)의 칠언절구'리엔화(蓮花)'에 나오는 싯구다. 비가 오고 나서 연꽃 이파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또르르 굴러다니는 광경을 표현한 것이다. 꿔젠은 그의 자 위안젠(元振)이 더 유명하다.
蓮花(리엔화) - 꿔젠
臉膩香薰似有情(검이향훈사유정) 미끈한 뺨에 향 내음이 정겨운 듯하니
世間何物比輕盈(세간하물비경영) 세상 어느 물건과 가볍고 고움 비길까
湘妃雨後來池看(상비우후래지간) 상비의 눈물비 내린 뒤 연못에 와보니
碧玉盤中弄水晶(벽옥반중롱수정) 벽옥 쟁반 위 수정을 희롱하는 듯하네
후련은 탕나라 왕지엔(王建)의 '화루이푸렌꿍츠(花蕊夫人宫词)' 연작시에 나오는 싯구다. 황금으로 만든 합 속에 붉은색의 홍설차가 가득 담겨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과 한자가 같다.
花蕊夫人宫词(화루이푸렌꿍츠) 67 - 왕지엔
黃金合裏盛紅雪(황금합리성홍설) 황금 그릇 속에다 홍설차를 가득 담으니
重結香羅四出花(중결향라사출화) 비단 끈으로 묶어도 사방으로 꽃이 삐죽
一一傍邊書敕字(일일방변서칙자) 하나하나 그릇 겉면에 칙서를 써 붙여서
中官送與大臣家(중관송여대신가) 내관이 손수 대신들의 집으로 보내 주네
'紅雪(홍설)'은 '화산의 연기나 황사가 섞인 눈, 가지 끝에 핀 붉은 꽃, 화장품 이름, 홍설차(紅雪茶) 일명 금사차(金絲茶), 홍설화(紅雪花)' 등의 뜻이 있다. 홍설차는 중궈 윈난셩(云南省) 리장(丽江) 위룽쉬에산(玉龍雪山)에 자생하는 이끼의 일종으로 만든 명차다. 해발 4천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채취하는 야생차다. 홍설화는 '팥'을 나타내는 홍두(紅荳)와 '눈꽃'을 나타내는 설화(雪花)의 합성어다. 황금반합 속에 과연 무엇을 넣을까? 귀하디 귀한 명차일까, 화장품일까? 꽃으로 풀이한다면 한겨울 눈 속에서 피는 홍매화가 가장 적절하다.
화루이푸렌(花蕊夫人)은 중궈 우다이싀궈(五代十國) 허우수(後蜀) 황띠 멍창(孟昶)의 후이페이 쉬싀(慧妃徐氏)를 말한다. 후이페이 쉬싀는 시와 글짓기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재주와 미모까지 겸비하여 화루이푸렌이라 불렸다. 허우수를 멸하고 숭(宋)나라를 세운 자오쾅인(趙匡胤)은 멍창을 죽인 뒤 화루이푸렌을 후궁으로 삼았다. 화루이푸렌은 자오쾅인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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