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터키인은 형제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인과 터키인은 정말 역사적으로 가까운 관계일까?
터키 민족의 기원은 튀르크(Turk), 즉 돌궐(突厥, 괵투르크, 튀르크)이다. 한자어 '突厥'은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다. ‘괵투르크’는 ‘하늘빛 투르크’, ‘푸른 투르크’를 뜻하지만 ‘위대한 투르크’라는 뜻도 있다. 튀르크어로 ‘괵’은 ‘하늘’이나 ‘푸른’을 의미한다.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에 따르면 고대 튀르크어로 '튀르크(Türk)'는 '강하다'라는 뜻이다.
튀르크족이 세운 첫 번째 대제국은 흉노(匈奴)이다. 흉노 제국은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 초원과 만리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골과 중앙아시아 일대에 건국한 나라다. 흉노라는 단어의 어원(語源)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일반적으로 ‘흉(匈)’은 ‘Hun’(혹은 Qun)의 음사(音寫)이며, ‘Hun’은 퉁구스어(Tungus)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한다.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Hun(匈)’으로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흉노를 계승한 튀르크(돌궐)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알타이(Altai) 인종인 아사나(阿史那) 부족이 세운 제국이다. 튀르크는 흉노의 전통과 행정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다. 튀르크의 국가는 일(il)이라 부르며, 가한(可汗, 칸, 황제) 밑에 소가한(小可汗)과 야부그(葉護), 샤드(設) 등의 제후를 두었다. 제후들은 봉건영지를 소유하면서 영지 내의 모든 부족을 통치했다. 이들은 베크(牢羽)라는 지배계층을 구성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부둔이라고 하였다. 베크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튀르크는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튀르크 비문 등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다. 튀르크 비문에는 고구려와 거란의 이름도 등장한다. 튀르크족은 샤머니즘을 믿었으나, 가한을 중심으로 한 상층계급에서는 불교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튀르크족은 처음에는 예니세이 강 상류에서 바이칼 호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던 철륵(鐵勒)의 한 부족이었다. 이들은 서 알타이 산맥 방면에서 몽골 초원의 고대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에 속해 있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에 '금산(金山)의 남쪽에 살며 여여(茹茹)을 위하여 철공 일을 하였다. 금산의 모양이 투구와 비슷하였는데, 그들이 관습적으로 투구를 돌궐(튀르크)이라고 했기 때문에 마침내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금산은 알타이 산맥, 여여는 유연(劉淵)이다.
주서에는 튀르크의 기원이 흉노의 별종이고, 그들의 성은 아사나씨(阿史那氏)라고 기술되어 있다. 수(隋)나라 역사서인 수서(隋書)에 '돌궐(튀르크)의 선조는 평양(平凉, 平壤)에 거주한 잡호(雜胡)이며 성은 아사나씨인데 아사나의 500가(家)가 유연으로 도망가 금산에 기거하면서 철작(제철)에 종사했다'고 전한다. 주서의 아사나는 고조선(古朝鮮), 수서의 평양은 고구려(高句麗)를 뜻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도 아사나(阿史那)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서의 아사나는 고구려 멸망 후에 몽골 고원의 튀르크(突厥)로 이주해 간 고구려 유민집단의 추장인 고문간(高文簡)의 부인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719년(신라 성덕왕 18) 아사나를 요서군부인(遼西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아사나 씨족과 아사나 부인도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552년 유연의 한 씨족인 아사나씨의 족장 토문(土門)은 철륵을 격파하고, 유연의 가한인 아나양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한 다음 스스로 독립하여 이리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였다. '土門'은 만인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튀르크 제국은 시베리아 동부의 야쿠트(Yakut) 튀르크족과 서부의 오구르(Ogur) 튀르크족을 제외한 모든 튀르크족을 통합했다.
튀르크 제국은 6세기 중엽 이후 약 200년 간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이리가한의 동생 디자불로스는 서역으로 진출하였고,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 대에는 유연을 완전히 멸하고 흉노에 비견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563∼567년 목간가한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Ephthalites, Hephthalites, 嚈噠)을 멸망시켰다. 그 결과 튀르크 제국은 동쪽으로는 만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다.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튀르크 제국은 북주(北周, 557~581)와 북제(北齊, 550~577)를 복속시키고 조공을 받았다. 581년 중원의 한족을 정복한 선비족(鮮卑族)의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했다. 이후 북방의 튀르크 제국과 남방의 수나라 사이에 대치 관계가 형성되었다. 선비족의 기원은 남만주와 몽골 초원의 동쪽인 북만주 지역에 살던 퉁구스족(Tungus) 또는 튀르크족이라는 설이 있다.
583년 튀르크 제국은 건국 30년만에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동튀르크 제국을 건국하였다. 튀르크 제국은 서튀르크 제국과 동튀르크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동튀르크는 몽골 고원과 만주, 연해주를 아우르는 지역을 세력권으로 삼았고 서튀르크는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수나라는 서튀르크를 부추겨 동튀르크를 공격하게 했고, 수나라와 서튀르크 사이에는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다. 튀르크의 위협이 사라지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패망하고 말았다. 수나라가 멸망하자 한족들을 정복한 무천진(武川鎭) 8주국(八柱國) 관롱집단(關隴集團)의 선비족 이연(李淵)이 618년 당나라를 건국했다.
수말당초隋末唐初) 동튀르크는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졌다. 강력한 국력을 갖춘 동튀르크는 당나라와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고, 당나라의 공격을 받은 동맹국 고구려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 제부족의 독립 등으로 동튀르크는 630년에 멸망하고 당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랍군에 의해 멸망했다. 682년 동튀르크는 다시 몽골 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默綴可汗), 빌케가한(毗伽可汗) 등이 등장하여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동튀르크가 당나라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고 독립하였을 때, 고구려 유민들은 이들을 돕기도 했다. 그 뒤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은 698년 말갈족(靺鞨族, 여진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기슭,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 둔화(敦化)에 진국(振國, 震國, 발해)을 세우고 동튀르크와 우호 관계로 지냈다.
동튀르크는 동족 간의 내분과 철륵(鐵勒)의 유력 부족 중 하나인 설연타(薛延陀)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동튀르크는 다시 튀르크족들을 통합하여 제2 카간국을 건국했다. 제2 카간국은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 카간국에 멸망당했다. 위구르 카간국은 또 키르기스인에게 멸망되었다. 고구려와의 동맹에 이어 진국(발해)과도 우방국이었던 동튀르크는 당시 한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튀르크 제국은 가한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실크로드를 통치하면서 막강한 세력을 사방에 떨쳤다. 토문가한(土門可汗)의 동생 실점밀(室点密)은 중앙아시아 철륵의 각 부족들과 카를룩(葛逻禄), 바스밀(拔悉密) 등 여러 부족을 통합시켰다. 실점밀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서튀르크는 내분으로 둘로 분열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당나라는 톈산(天山) 산맥 동단부(東端部) 남쪽 기슭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에 이주(伊州, 하미), 그 서쪽에 서주(西州, 투르판) 등의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 그 후 서튀르크는 한때 통일을 이룩하기도 했지만, 당나라는 657년 이를 토벌하고 2명의 가한을 두어 통제하였다. 7세기 말 투르기스(突騎施)가 일어나 이 두 가한을 추방함으로써 서튀르크는 멸망하고 말았다.
서튀르크 제국은 튀르크족을 통합하여 제2 가한국(可汗國)을 건국하였다. 이후 튀르크족의 일족인 오구즈 부족(Oghuz)은 오구즈 압구 가한국을 건국하였다. 오구즈 압구 가한국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동과 동유럽, 소아시아를 제패하고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건국하였다. 셀주크 튀르크는 12세기 몽골 제국에 멸망당하고, 1299년 튀르크족의 족장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 반도(소아시아)에 오스만 제국을 건국했다.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튀르크, 터키 제국, 또는 단순히 터키라고도 부른다.
오스만 제국은 현재 터키 최대의 도시 이스탄불에 도읍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아나톨리아 반도 외의 영토들은 다른 나라에 점령되거나 독립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등의 동맹국 편에서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되어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일부만 영토로 남았다. 케말 파샤는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6세를 폐위시키고, 1923년 10월 29일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터키는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르콘 강 유역을 본거지로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동튀르크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었고, 진국(발해)과도 우방국이었다. 하지만, 서튀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소아시아와 중동아시아으로 진출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거쳐 지금의 터키가 되었다. 서튀르크와 고구려는 친하게 지낸 적도 없고, 교역조차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튀르크의 후예들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중동으로 넘어가 세운 터키는 고구려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라였다.
한국전쟁 당시 터키는 미국 주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군과 영국군 다음으로 많은 15,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래서 한국인들 중에는 한국이 어려울 때 도와준 나라라고 해서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전쟁 참전 터키군의 60% 이상이 쿠르드족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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