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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가 우리나라와 형제국이라고?

林 山 2019. 11. 7. 17:38

한민족과 터키인은 형제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인과 터키인은 정말 역사적으로 가까운 관계일까? 


터키 민족의 기원은 튀르크(Turk), 즉 돌궐(突厥, 괵투르크, 튀르크)이다. 한자어 '突厥'은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다. ‘괵투르크’는 ‘하늘빛 투르크’, ‘푸른 투르크’를 뜻하지만 ‘위대한 투르크’라는 뜻도 있다. 튀르크어로 ‘괵’은 ‘하늘’이나 ‘푸른’을 의미한다.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에 따르면 고대 튀르크어로 '튀르크(Türk)'는 '강하다'라는 뜻이다.


튀르크족이 세운 첫 번째 대제국은 흉노(匈奴)이다. 흉노 제국은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 초원과 만리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골과 중앙아시아 일대에 건국한 나라다. 흉노라는 단어의 어원(語源)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일반적으로 ‘흉(匈)’은 ‘Hun’(혹은 Qun)의 음사(音寫)이며, ‘Hun’은 퉁구스어(Tungus)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한다.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Hun(匈)’으로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흉노를 계승한 튀르크(돌궐)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알타이(Altai) 인종인 아사나(阿史那) 부족이 세운 제국이다. 튀르크는 흉노의 전통과 행정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다. 튀르크의 국가는 일(il)이라 부르며, 가한(可汗, 칸, 황제) 밑에 소가한(小可汗)과 야부그(葉護), 샤드(設) 등의 제후를 두었다. 제후들은 봉건영지를 소유하면서 영지 내의 모든 부족을 통치했다. 이들은 베크(牢羽)라는 지배계층을 구성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부둔이라고 하였다. 베크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튀르크는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튀르크 비문 등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다. 튀르크 비문에는 고구려와 거란의 이름도 등장한다. 튀르크족은 샤머니즘을 믿었으나, 가한을 중심으로 한 상층계급에서는 불교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튀르크족은 처음에는 예니세이 강 상류에서 바이칼 호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던 철륵(鐵勒)의 한 부족이었다. 이들은 서 알타이 산맥 방면에서 몽골 초원의 고대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에 속해 있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에 '금산(金山)의 남쪽에 살며 여여(茹茹)을 위하여 철공 일을 하였다. 금산의 모양이 투구와 비슷하였는데, 그들이 관습적으로 투구를 돌궐(튀르크)이라고 했기 때문에 마침내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금산은 알타이 산맥, 여여는 유연(劉淵)이다. 


주서에는 튀르크의 기원이 흉노의 별종이고, 그들의 성은 아사나씨(阿史那氏)라고 기술되어 있다. 수(隋)나라 역사서인 수서(隋書)에 '돌궐(튀르크)의 선조는 평양(平凉, 平壤)에 거주한 잡호(雜胡)이며 성은 아사나씨인데 아사나의 500가(家)가 유연으로 도망가 금산에 기거하면서 철작(제철)에 종사했다'고 전한다. 주서의 아사나는 고조선(古朝鮮), 수서의 평양은 고구려(高句麗)를 뜻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도 아사나(阿史那)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서의 아사나는 고구려 멸망 후에 몽골 고원의 튀르크(突厥)로 이주해 간 고구려 유민집단의 추장인 고문간(高文簡)의 부인이다. (唐)나라 현종(玄宗)은  719년(신라 성덕왕 18) 아사나를 요서군부인(遼西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아사나 씨족과 아사나 부인도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552년 유연의 한 씨족인 아사나씨의 족장 토문(土門)은 철륵을 격파하고, 유연의 가한인 아나양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한 다음 스스로 독립하여 이리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였다. '土門'은 만인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튀르크 제국은 시베리아 동부의 야쿠트(Yakut) 튀르크족과 서부의 오구르(Ogur) 튀르크족을 제외한 모든 튀르크족을 통합했다.


튀르크 제국은 6세기 중엽 이후 약 200년 간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이리가한의 동생 디자불로스는 서역으로 진출하였고,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 대에는 유연을 완전히 멸하고 흉노에 비견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563∼567년 목간가한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Ephthalites, Hephthalites, 嚈噠)을 멸망시켰다. 그 결과 튀르크 제국은 동쪽으로는 만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다.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튀르크 제국은 북주(北周, 557~581)와 북제(北齊, 550~577)를 복속시키고 조공을 받았다. 581년 중원의 한족을 정복한 선비족(鮮卑族)의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했다. 이후 북방의 튀르크 제국과 남방의 수나라 사이에 대치 관계가 형성되었다. 선비족의 기원은 남만주와 몽골 초원의 동쪽인 북만주 지역에 살던 퉁구스족(Tungus) 또는 튀르크족이라는 설이 있다.


583년 튀르크 제국은 건국 30년만에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동튀르크 제국을 건국하였다. 튀르크 제국은 서튀르크 제국과 동튀르크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동튀르크는 몽골 고원과 만주, 연해주를 아우르는 지역을 세력권으로 삼았고 서튀르크는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수나라는 서튀르크를 부추겨 동튀르크를 공격하게 했고, 수나라와 서튀르크 사이에는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다. 튀르크의 위협이 사라지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패망하고 말았다. 수나라가 멸망하자 한족들을 정복한 무천진(武川鎭) 8주국(八柱國) 관롱집단(關隴集團)의 선비족 이연(李淵)이 618년 당나라를 건국했다. 


수말당초隋末唐初) 동튀르크는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졌다. 강력한 국력을 갖춘 동튀르크는 당나라와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고, 당나라의 공격을 받은 동맹국 고구려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 제부족의 독립 등으로 동튀르크는 630년에 멸망하고 당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랍군에 의해 멸망했다. 682년 동튀르크는 다시 몽골 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默綴可汗), 빌케가한(毗伽可汗) 등이 등장하여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동튀르크가 당나라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고 독립하였을 때, 고구려 유민들은 이들을 돕기도 했다. 그 뒤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은 698년 말갈족(靺鞨族, 여진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기슭,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 둔화(敦化)에 진국(振國, 震國, 발해)을 세우고 동튀르크와 우호 관계로 지냈다.  


동튀르크는 동족 간의 내분과 철륵(鐵勒)의 유력 부족 중 하나인 설연타(薛延陀)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동튀르크는 다시 튀르크족들을 통합하여 제2 카간국을 건국했다. 제2 카간국은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 카간국에 멸망당했다. 위구르 카간국은 또 키르기스인에게 멸망되었다. 고구려와의 동맹에 이어 진국(발해)과도 우방국이었던 동튀르크는 당시 한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튀르크 제국은 가한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실크로드를 통치하면서 막강한 세력을 사방에 떨쳤다. 토문가한(土門可汗)의 동생 실점밀(室点密)은 중앙아시아 철륵의 각 부족들과 카를룩(葛逻禄), 바스밀(拔悉密) 등 여러 부족을 통합시켰다. 실점밀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서튀르크는 내분으로 둘로 분열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당나라는 톈산(天山) 산맥 동단부(東端部) 남쪽 기슭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에 이주(伊州, 하미), 그 서쪽에 서주(西州, 투르판) 등의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 그 후 서튀르크는 한때 통일을 이룩하기도 했지만, 당나라는 657년 이를 토벌하고 2명의 가한을 두어 통제하였다. 7세기 말 투르기스(突騎施)가 일어나 이 두 가한을 추방함으로써 서튀르크는 멸망하고 말았다.


서튀르크 제국은 튀르크족을 통합하여 제2 가한국(可汗國)을 건국하였다. 이후 튀르크족의 일족인 오구즈 부족(Oghuz)은 오구즈 압구 가한국을 건국하였다. 오구즈 압구 가한국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동과 동유럽, 소아시아를 제패하고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건국하였다. 셀주크 튀르크는 12세기 몽골 제국에 멸망당하고, 1299년 튀르크족의 족장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 반도(소아시아)에 오스만 제국을 건국했다.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튀르크, 터키 제국, 또는 단순히 터키라고도 부른다. 


오스만 제국은 현재 터키 최대의 도시 이스탄불에 도읍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아나톨리아 반도 외의 영토들은 다른 나라에 점령되거나 독립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등의 동맹국 편에서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되어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일부만 영토로 남았다. 케말 파샤는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6세를 폐위시키고, 1923년 10월 29일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터키는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르콘 강 유역을 본거지로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동튀르크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었고, 진국(발해)과도 우방국이었다. 하지만, 서튀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소아시아와 중동아시아으로 진출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거쳐 지금의 터키가 되었다. 서튀르크와 고구려는 친하게 지낸 적도 없고, 교역조차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튀르크의 후예들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중동으로 넘어가 세운 터키는 고구려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라였다. 


한국전쟁 당시 터키는 미국 주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군과 영국군 다음으로 많은 15,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래서 한국인들 중에는 한국이 어려울 때 도와준 나라라고 해서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전쟁 참전 터키군의 60% 이상이 쿠르드족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케말 압데의 증언이다. 어릴 때부터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쿠르드족 병사들은 터키어도 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쿠르드족 청년들은 18세가 되자 터키법에 따라 터키군에 징집되었다. 이들은 3개월의 군사훈련만 받은 뒤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다.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였다. 

케말 압데와 그의 쿠르드 동료들은 1953년 초 한국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무렵 파병되었다. 당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인민군과 남한의 국군 간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케말 압데의 증언에 의하면 그 중대원 100명 중 90명이 쿠르드족이었고, 터키 병사는 10명뿐이었다고 한다. 

터키가 대다수 쿠르족으로 구성된 부대를 한국전에 파병한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 청년들을 총알받이 전쟁터로 보내 쿠르드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국전쟁은 터키인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눈엣가시인 쿠르드족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 터키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함으로써 대외적인 이미지 향상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한국전에 파병된 터키인 지휘관들은 쿠르드족 병사들을 학대하고 인간 이하로 대우했다. 케말 압데 중대의 터키인 중대장도 쿠르드 병사들을 차별하고 모질게 구박했다. 견디다 못한 쿠르드족 병사들은 은밀하게 터키인 중대장을 죽이려고 모의했다. 이를 눈치챈 터키인 중대장은 부대를 이탈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계 미국 정치인 신호범은 한국전쟁 당시 터키군 부대 안에서 집단적으로 강간당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한국 해병대가 탱크를 동원해서 구출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터키군 참전 노병들도 한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강간 범죄들을 증언하고 있다. 강간 범죄가 부대단위로 조직적으로 자행됐다는 증언도 있었다. 터키군은 또, 한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살인, 약탈 범죄도 많이 저질렀다. 한국전쟁 참전 25개국 가운데 터키군을 제외한 나머지 24개국 군인들이 저지른 강간보다 터키군이 저지른 강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 편에 붙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터키는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재빨리 연합국 편에 붙었다. 미국의 요구로 터키는 한국전쟁에 참전을 했다. 터키는 그 댓가로 NATO 가입, 그리스를 견제할 미군 주둔, 막대한 군수무기 지원과 경제원조를 받았다. 터키가 순수한 목적으로 한국에 파병을 한 것이 아니다. 한국이 미국의 요구로 월남전에 파병했듯이 터키도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과 국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전쟁에 파병한 것뿐이다.

지난 2013년 터키는 한국에 원자력발전소를 수주할 것처럼 하다가 결국 사업비 전체를 지원해달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린 뒤 일본한테 사업권을 내준 적이 있다. 일본과의 수주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가기 위해 한국을 이용한 것이다. 터키는 한국을 버리고 일본기업 미쓰비시중공업과 프랑스 기업 아레바 컨소시엄이 터키에 원전을 짓고 현지에서 전력판매까지 하도록 했다.  

한국이 터키에 K-9 자주포를 수출한 적이 있다. 터키는 K-9 자주포를 수출하는 조건으로 기술 이전을 해달라고 한국에 요구했다. 한국은 어쩔 수 없이 기술 이전을 거의 100%에 가깝에 해주는 조건으로 K-9 자주포를 터키에 수출했다. K-9 자주포는 최대 사거리가 40㎞이며, 15초 내에 3발을 발사할 수 있는 세계 자주포 중 최고 수준의 성능으로 평가받고 있다. 

터키는 K-9 기반에다가 한국에서 기술과 부품을 수입해서 포탑을 새로 만들고 T-155 Fırtına(폭풍)라는 이름을 붙였다. 터키는 T-155 Fırtına 자주포를 파키스탄 등 이슬람 형제국에 수출하고 있다. 한국은 K-9 자주포를 일정량 이상 판매하는 조건으로 기술 이전을 해줬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라이센스 무기의 수출 권한을 준 사례가 거의 없다. 기술 이전은 최소한 한 세대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 해주는 것이 상식이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미국의 기술 협력을 받는 것이 더 까다로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K-9 자주포 같은 살상무기 수출은 인도주의 측면에서도 고려해야 한다. 독일은 터키의 소수민족 탄압을 이유로 터키에 대한 무기 수출을 대단히 꺼리고 있다. 독일은 K-9  자주포를 터키에 수출할 때 한국에 디젤 엔진의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영국제 엔진 수입을 타진했다. 그제서야 독일은 디젤 엔진 수출 허가를 내주었다. 

터키는 2019년 10월 10일 시리아 북동부 국경지대의 쿠르드족을 공격하면서 K-9  자주포의 자매품인 T-155 Fırtına 자주포를 동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의 기술과 부품으로 만들어진 T-155 Fırtına 자주포가 쿠르드족의 학살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민주연대, 전쟁없는세상, 참여연대 등 29개 시민단체는 10월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터키의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 침공을 규탄하면서 한국 정부의 대 터키 무기 수출 중단을 요구했다. 이들은 한국이 지난 10년 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터키에 무기를 많이 수출한 국가라라면서 한국 정부의 무기 수출이 쿠르드인이 겪는 고통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전쟁없는세상의 한 활동가는 '2018년 산업연구원이 방산수출유망국가로 뽑은 10개국을 보면, 한국은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와 전쟁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는 국가에 무기를 수출하려 하고 있다'면서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이란 이름으로 방위산업의 정당성을 포장해 우리 국민의 세금을 또 다른 전쟁에 가담하고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데 쓸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경계를넘어의 한 활동가는 '터키가 침공한 시리아 북동부 지역은 민주주의와 자치, 다원주의 실험이 막 시작되고 있던 지역'이라며 '이번 침공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재산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중동에 새로운 공존모델을 마련하려 한 지역민들의 노력을 짓밟는 행위라는 점에서 규탄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대량 인종학살로 악명이 높은 나라다. 터키는 30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역사에 기록된 것만 해도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 폰투스인 50만 명, 아시리아인 30만 명을 학살했다. 쿠르드족 학살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터키가 전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도 의문이다. 터키는 국민성 자체가 외국인들에게 겉으로는 아주 호의적이다. 하지만 터키인들의 외국인 대상 범죄율 역시 아주 높다. 특히 터키를 여행하는 여성들은 납치, 성폭행 범죄에 주의해야 한다. 

2019년 5월 10일 주이스탄불 총영사관 이보은 영사는 '민박집 주인이 혼자 묵고 있는 여성 여행객에게 술을 마시자고 한 뒤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친분이 있던 여성 여행객을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한 호텔 직원도 있었다. 관광 가이드가 숙소로 데려다주겠다며 차에 태운 뒤 주유를 핑계로 으슥한 곳으로 유도한 뒤 성범죄를 시도한 일도 있었다. 택시 기사가 앞자리에 탄 여행객을 성추행하기도 했다. 홀로 여행할 때는 한순간도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특히 숙박 시설과 숙박객을 온라인으로 연결해주는 서비스 에어비앤비(Airbed and Breakfast, Airbnb)를 이용하는 나홀로 여성 여행객들에 대한 성폭력 범죄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범죄 유형을 보면 터키인 에어비앤비 업주가 수면 중이거나 술에 취해 복귀한 투숙객을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는 경우, 함께 술을 마신 터키인 남성이 호텔에서 피해자를 성폭행하는 경우, 술에 취한 상태로 호텔로 복귀한 투숙객을 터키인 직원이 성폭행하는 경우 등이다. 범죄 요인에 있어 가해자는 에어비앤비 주인, 피해자는 음주 요인이 가장 높았다. 에어비앤비는 세계적으로 주택 공급 제한과 주거비 상승 등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가운데, 터키에서는 나홀로 여성 여행객 대상 우범지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외교통상부 김원집 사무관에 따르면 터키에서 성폭행과 성추행을 포함해 해외 여행객이 입은 성범죄 피해는 지난해 110건이었다. 혼자 여행하는 경우가 급증하면서 성범죄 피해 규모도 급증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김 사무관은 '민박집 주인도, 관광 가이드도 믿으면 안된다. 단둘이 있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낯선 사람이 권하는 술이나 음료, 식사는 조심해야 한다. 음료나 먹을 것에 약물을 타 성범죄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저렴한 숙소도 피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 후미진 곳에 있어 우범지대일 확률이 높다. 택시 탈 때는 앞좌석에 타지 말고 뒷좌석에 타라. 혼자 여행할 때는 스스로 신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주이스탄불 한국총영사관에 따르면 지난 2014년 이스탄불 지역에서 한국 남성이 친근하게 접근한 터키인과 함께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고, 그 후 다른 술집에서 깨어나 보니 100만 원 상당의 술값 사기를 당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애초에 낯선 사람의 동행 제안에 응하지 않았으면 이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여성 혼자 관광하는 경우 과도한 친절이라고 생각되면 단호하게 거부하는 등 불필요하게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변 안전에 유의해달라'고 당부했다.

터키는 과연 우리나라와 형제국일까? 형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던지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2019.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