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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독립 운동의 배경과 역사

林 山 2019. 11. 2. 00:26

스페인 대법원은 2019년 10월 14일 지난 2017년 카탈루냐 분리독립 주민투표를 주도하고 독립을 선포했던 정치인과 활동가 12명 중 9명에게 선동과 공공자금 남용 등 혐의로 9년에서 13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나머지 3명에게는 불복종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했다. 


지난 2017년 10월 1일 스페인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강행했다. 주민투표 결과 유권자의 43%가 참여해서 90%가 독립에 찬성했다. 이를 근거로 카탈루냐 의회는 같은달 27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카탈루냐공화국 수립을 공식 선언했다. 이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자치정부 지도부를 체포하고 투표 결과를 불법화했다. 또 카탈루냐의 자치권도 박탈했다.


스페인 대법원으로부터 중형을 선고받은 카탈루냐 분리독립운동 지도자들


스페인 북동부에 위치한 카탈루냐 지역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그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진해 왔다. 이날 대법원 선고가 나오자 카탈루냐 분리독립 지지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10월 14일부터 시작된 시위가 18일에도 이어지면서 더욱 격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바르셀로나 도심에는 5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카탈루냐 전 지도부 석방과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밤사이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곳곳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 총 42명이 다치고 11명이 연행됐다. 경찰은 14일 대법원 판결 이후 카탈루냐에서 100명 이상을 연행했다. 바르셀로나 곳곳에서는 차량과 거리의 쓰레기통 방화, 상점 약탈도 일어났다.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카탈루냐 시위대


10월 25일에는 35만 명의 시위대가 바르셀로나 도심의 대로와 외곽의 철로를 점거하고, 스페인 제2의 국제공항인 바르셀로나 엘 프라트 공항 근처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여 경찰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시위대가 화염병과 돌을 던지자 경찰은 진압봉과 고무탄을 사용하며 진압에 나서면서 양측에서 모두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 스페인 정부에 따르면 경찰은 시위대 총 200여 명을 연행했고, 이 중 31명이 구속 수감됐다.


최근 바르셀로나 등 카탈루냐 일원에서 이어진 시위는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을 요구해 온 목소리가 최근 수년 사이 가장 격렬하게 터져 나온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카탈루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주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카탈루냐인들과 헌법 규정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스페인 정부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 근본적인 배경은 사실 경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카탈루냐는 스페인 경제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의 17개 자치주의 하나로 스페인 북동부에 위치해 있다. 주도(州都)는 바르셀로나이다. 카탈루냐는 스페인 영토의 6%, 수출의 25.6%, 인구의 16%(약 750만 명), 국내총생산(GDP)의 19%, 외국인 투자의 20.7%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산업은 관광업과 제조업이다. 통계에서 보듯이 카탈루냐는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경제적인 문제 외에 정체성 문제도 있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어(카스티아어)와 매우 다른 카탈루냐어를 사용해 민족과 언어, 문화 정체성도 스페인과 상당히 다르다. 세계적인 명문 축구팀 FC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다. 


2008년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는 2010년대 유로존 위기까지 이어졌고 스페인도 큰 타격을 받았다. 카탈루냐 지역에서 징수된 세금이 스페인 중앙정부를 통해서 경제력이 낙후된 지역을 지원하는 데 쓰이면서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2012년 기준으로 카탈루냐가 스페인 정부에 납부한 세금은 스페인 정부로부터 받은 분배금보다 훨씬 많았다. 그 차이는 연평균 120억~160억 유로(약 16조~22조 원)에 달했다. 


아르투르 마스 전 카탈루냐 주지사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분리독립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는 2014년 11월에도 실시됐었다. 당시 유권자 540만 명 중 220만 명이 투표했고, 그중 80%가 독립에 찬성했다.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듬해 주민투표를 주도한 카탈루냐 정치인들은 재판을 받았고, 당시 아르투르 마스 전 카탈루냐 주지사는 2년 동안 공무담임권을 박탈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스페인 지도


카탈루냐가 독립하려면 주변국들의 동의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엇보다 유럽연합(EU)의 지지와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EU는 공개적으로 카탈루냐의 독립을 반대하고 있다. 특히 EU의 중심국인 독일과 프랑스도 스페인 중앙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카탈루냐가 독립하면 당장 스페인의 바스크 주도 독립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영국의 스코틀랜드(GDP 10% 차지)와 북아일랜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등 2개 주(GDP 30% 차지), 벨기에의 네덜란드어권(플랑드르)과 프랑스어권(왈롱), 프랑스의 코르시카 등도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카탈루냐 지방에 처음 들어온 이민족은 페니키아인들이었다. BC 6세기 카르타고의 식민도시로 시작한 카탈루냐는 포에니 전쟁 후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포에니는 로마인들이 페니키아를 부르는 말이다. 5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에 점령당한 이후 카탈루냐는 서고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샤를마뉴 대제


711년 무어족의 우마이야 이슬람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했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전역을 정복한 후 카탈루냐는 알안달루스의 일부가 되었다. 8세기 말 게르만족 일파가 세운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카를로스 마그누스 카를 대제)는 이베리아 반도의 알안달루스를 몰아냈다. 최초의 신성로마 제국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는 카탈루냐를 스페인 구역(Spanish March)으로서 자신의 지배 영역에 편입시켜 백작령으로 삼았다. 이를 카탈루냐 변경백이라고 한다. 카탈루냐 변경백을 세운 것은 피레네 산맥의 험난한 지형을 방패삼아 이슬람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은 이름뿐이었고, 그것도 보렐 백작의 재위기간 중 완전히 청산되었다. 샤를마뉴 대제의 백작령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카탈루냐 정체성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도 변경백들은 711년부터 약 800년 동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이를 레콩키스타(Reconquista) 또는 재정복운동(再征服運動)이라고 한다. 변경백들은 공동의 적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혼인을 통한 동맹을 맺었으며, 이는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까지 발전했다.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아라곤의 페트로닐라 여왕이 약혼함에 따라 카탈루냐와 아라곤은 한 통치권 하에 통합되어 아라곤 연합왕국이 성립되었다. 현재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는 카스티야 왕국, 북동부에는 아라곤, 카탈루냐, 바로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곤 연합왕국이 자리잡았다. 두 왕국은 언어와 인종, 문화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13~14세기에 카탈루냐는 지중해 서부 지역의 무역권을 독점했다. 1410년 바르셀로나 백작 가문의 대가 끊기자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바르셀로나 가문의 외손이란 명분으로 왕위를 차지했다. 이때까지 카탈루냐 세력은 아라곤을 압도했다. 1412년 이후 아라곤 왕국의 새 왕조 트라스타마라에 대한 카탈루냐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어 후안 2세 재위기간 동안 극도에 달했다. 엔리케 4세 때인 1462년 카탈루냐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사벨 1세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이사벨 1세)는 6촌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페르난도 2세)가 결혼했다. 이사벨 공주는 1474년 카스티야 왕국, 페르난도 왕자는 1479년에 아라곤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두 왕이 양국의 공동왕이 되면서 이질적인 두 왕국 간 동군연합이 이루어졌다. 1492년 마침내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스페인 최초의 통일왕국이 성립되었다. 


카스티야 왕국은 아라곤 왕국보다 4배나 많은 영토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사벨 1세의 정치적 영향력도 더 컸다. 그럼에도 합병 초기 아라곤 왕국은 거의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1474년 이사벨 1세가 죽자 후아나 공주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후아나 공주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펠리페 1세와 결혼해서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을 낳았다. 페르난도 2세가 죽자 카를로스 1세가 통합 스페인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에서 강탈한 막대한 금과 은으로 엄청난 부를 누렸으며, 카스티야도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다. 


반면에 경제적으로 지중해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카탈루냐는 15~16세기에 걸쳐 급부상한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까지 침공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카탈루냐는 지중해 무역이 마비될 정도로 위축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카를로스 1세


카를로스 1세는 유럽 전역에서 많은 전쟁을 치뤄야 했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그는 카스티야를 집중적으로수탈해서 전비를 충당했다. 카를로스 1세는 아라곤 왕국의 자치권을 상당한 수준까지 보장했다. 그로 인해 카탈루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조세 부담을 졌고, 전비도 거의 부담하지 않았다. 


카를로스 1세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기고 절대주의 왕정을 펼쳤다. 마드리드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면서 카탈루냐는 스페인 왕국의 한 행정지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유지한 상태였다. 펠리페 2세 이후에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 왕국의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두 왕국의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펠리페 2세


1618년에 일어난 30년 전쟁은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중앙정부는 프랑스 국경지대인 카탈루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현지에서 물자를 징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탈루냐 농민들은 중앙정부에 불만을 품고 164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카탈루냐 반란, 또는 수확전쟁이라고 한다.


카탈루냐 자치정부를 이끌던 귀족 지도자들은 농민 반란을 계기로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국으로의 편입을 결의하고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군이 카탈루냐로 진주했고, 곧 스페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카탈루냐 귀족들은 프랑스에 자치권과 봉건적 특권의 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카탈루냐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정을 구축한 프랑스의 통치 시스템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민들의 원성은 카탈루냐를 프랑스에 갖다바친 귀족들에게로 향했다. 


카탈루냐인들의 비협조로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카탈루냐에서 철수하자 스페인군은 바르셀로나를 포위하여 공성전에 들어갔다. 카탈루냐는 결국 스페인군에 항복했다. 하지만 아직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카탈루냐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어느 정도의 자치권도 계속 보장받았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이 끝나고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피레네 산맥 이북의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이때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는 카탈루냐도 프랑스로 넘어갔다. 프랑스 피레네조리앙탈(Pyrénées-Orientales) 지역이 이때 할양된 카탈루냐의 땅이다. 

카를로스 2세


1700년 11월 1일 펠리페 4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2세는 후세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써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이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필리프 대공(펠리페 5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카를 대공(카를 6세)은 서로 자신이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루이 14세는 재빨리 손자인 필리프를 스페인에 보내 펠리페 5세에 즉위시켰다. 하지만 영국과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제국이 이에 반발하여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을 옹립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스페인과 카탈루냐 관계의 분수령이 됐다. 카탈루냐와 발렌시아는 1640년 카탈루냐 반란 때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뜨거운 맛을 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카를 6세)을 지지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1711년 카를 대공이 갑자기 신성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하면서 순식간에 전황이 뒤바꼈다. 카를 6세 일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열강들이 태도를 바꾸어 부르봉 가문의 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승인하면서 전쟁은 수습단계에 들어갔다.


펠리페 5세


선택의 여지가 없던 카탈루냐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끝까지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맞섰다. 하지만 군사력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애시당초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다. 1714년 9월 11일 바르셀로나가 함락되면서 카탈루냐의 저항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는 순간이었다. 스페인에 새로 들어선 부르봉 왕조는 예상대로 강력한 절대주의 왕정을 실시했다. 1716년 새로 제정된 국가기본법으로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다른 주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19세기에 들어서 스페인 왕권이 실추하고 카스티야 왕국과의 갈등이 커지면서 처음으로 카탈루냐 분리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왕당파 중 카를로스 데 몰리나 백작(카를로스 4세의 차남)의 혈통을 옹립하려 한 정통주의 세력 운동인 카를로스주의가 지지를 얻자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요구가 다시 일어났으며, 특히 1850년대에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기 위한 움직임이 커지면서 분리독립 운동도 활발해졌다. 이때부터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 초기에는 카탈루냐어 공용어 채택 운동 등 문화운동의 형태로 시작됐다. 오랫동안 몰락의 길을 걸어온 카탈루냐어를 되살리고, 카탈루냐 문화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알폰소 12세


1874년 이사벨 여왕의 아들인 알폰소 12세가 왕정을 복고하자 카를로스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스주의자들의 패배로 교회가 자치운동을 지지하게 되면서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876년부터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일정한 정치 세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13년에 이르러 카탈루냐는 미약하나마 어느 정도 자치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1925년 스페인의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법을 폐지했다. 그는 또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모든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이러한 강경 탄압정책의 결과 카탈루냐에서는 좌파연합정당인 에스케라 레푸블리카나 데 카탈루냐(카탈루냐 공화좌파, ERC)가 결성되었다. 


지방정부 청사 발코니에서 카탈루냐 공화국 성립을 선포하는 ERC 당수 프란세스크 마시아


1931년 4월 12일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는 공화주의파가 선거에서 승리했고, 카탈루냐 지방선거에서는 ERC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선거에서 승리한 ERC는 2일 후 카탈루냐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ERC 당수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이베리아 연방 내에서 카탈루냐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 선언에 놀란 스페인 제2 공화국 임시정부는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과 타협안을 모색하여 독립을 철회시키는 대신 자치정부 제네랄리타드를 구성하도록 했다. 스페인 공화주의자 중앙정부는 1932년 9월 카탈루냐의 자치를 보장하는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투옥된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 류이스 쿰파니스와 각료들


1934년 10월 6일 제네랄리타드 데 카탈루냐의 수반인 ERC의 류이스 쿰파니스가 또 스페인 연방공화국 내에서 카탈루냐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 사태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군대를 투입해서 류이 쿰파니스 등 자치정부 각료를 해임하고 체포했다. 쿰파니스는 3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들어선 좌파 인민전선 정부는 쿰파니스를 비롯한 카탈루냐 자치정부 각료들을 석방했다. 이처럼 20세기 초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두 차례나 카탈루냐 공화국 건국을 발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카탈루냐 국기


1936년 2월 총선에서 공화파인 인민전선 정부가 성립되자 이를 반대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카탈루냐는 인민전선에 가담해서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사반란 세력에 맞서 싸웠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은 인민전선에 대한 반파시스트 자유주의자들의 국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독일 파시스트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났다. 


독재자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은 카탈루냐 제네랄리타드를 폐지하고 민족주의 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했다. 탄압 과정에서 수많은 카탈루냐인이 처형됐고,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됐다.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에 망명했던 류이스 쿰파니스는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0년 10월 15일 바르셀로나로 압송되어 총살당했다.


나치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가운데 안경 쓴 이)와 프란시스코 프랑코(히믈러 우측)


프랑코 독재정권은 카탈루냐의 자치권도 박탈됐다. 카탈루냐어, 카탈루냐 국기, 민속춤 등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은 전면 금지됐다. 카탈루냐의 민족주의는 탄압을 피해 지하로 잠복했다. 프랑코 독재 말기에 이르자 레임덕 현상과 함께 억압이 느슨해지면서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은 진보적 성격을 띠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72년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을 밟았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다시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1977년 9월 카탈루냐에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했다. 1979년 카탈루냐는 행정구역상 스페인의 한 지방으로 설정됨과 동시에 완전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79년에 구성된 카탈루냐 정부는 자치정부(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행정위원회)와 단원제 의회로 이루어졌다. 


20세기 말까지 더 많은 자치를 요구하던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은 21세기에 들어서자 분리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003년 11월16일 카탈루냐 선거에서 자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정부가 들어서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 카탈루냐 자치정부 의회는 세수를 카탈루냐에 더 많이 배정하는 등 1979년 자치법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카탈루냐 정부는 2006년 카탈루냐를 지방정부 단위를 넘어 독자적인 국가(nation)로 규정한 새로운 자치법령을 선포했다. 2008년 스페인의 경제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카탈루냐에도 경제 불황이 닥치자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탈루냐 자치법령은 보수 우파 국민당이 지배하는 스페인 중앙정부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쐐기를 박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카탈루냐 자치법 개정안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다. 2010년 헌법재판소는 카탈루냐 자치법 개정안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카탈루냐인들의 시위


스페인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은 카탈루냐 주민들의 자치권 확보를 위한 분리독립 시위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10년 7월 10일에는 카탈루냐 인구의 20%에 이르는 150만 명이 바르셀로나에 운집해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2014년부터는 카탈루냐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2017년 10월 27일 카탈루냐는 주민투표를 근거로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한때 카탈루냐는 미승인국 목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 중앙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하자 카탈루냐는 이에 굴복하고 10월 30일 카탈루냐 의회 조기 해산을 받아들였다. 스페인 정부는 11월 8일 카탈루냐의 독립선언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어 스페인 검찰은 카탈루냐 독립을 주도한 정치인과 활동가 12명을 선동과 공공자금 남용 혐의로 기소했다. 스페인 대법원은 2019년 10월 14일 카탈루냐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카탈루냐 지방정부의 카를레스 푸지데몬 수반은 반역 혐의로 인한 체포를 피해 벨기에로 사실상 망명을 떠났다.  

벨기에로 망명한 카를레스 푸지데몬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반


카탈루냐가 자치권 나아가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법적 근거는 이해관계가 다른 다수 정파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결과물인 1978년 헌법에 있다. 1978년 헌법은 스페인과 지역들 간의 관계에 대한 주요 법적 근거다. 헌법 제2조는 '헌법은 스페인 국가의 해체할 수 없는 통일성, 공통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모든 스페인인들의 조국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더불어 그것을 구성하는 내셔널리티들과 지역들의 자치권, 그리고 그들 모두 간의 결속을 인정하고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국가의 통일성이 지켜져야 한다면서 동시에 지역 자치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으로 다소 모호한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카탈루냐 자치권의 또 하나의 중요한 법적 근거는 1979년 제정된 카탈루냐 자치법이다. 이 법은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권한이 '헌법과 자치법, 그리고 카탈루냐 주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돼 있다. 카탈루냐 자치정부 권한의 근거가 헌법과 카탈루냐 자치법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요구는 스페인의 재정정책에 대한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카탈루냐가 중앙정부에 기여하는 세수 비율은 약 20%이지만 카탈루냐가 중앙정부로부터 돌려받는 교부금 비율은 14%이다. 그 차이는 약 6%에 이른다. 카탈루냐인들은 이로 인해 카탈루냐의 경제위기가 심화됐다고 인식하고 있다. 


카탈루냐인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인 돈이 카탈루냐를 위해 쓰여지지 않고, 자신들보다 가난한 지역의 복지를 위해 쓰여진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독립을 하게 되면 카탈루냐인들이 벌어들인 돈을 다른 지역이 아닌 자신들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만들이 누적돼 분리독립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카탈루냐 분리독립 운동은 스페인은 물론 유럽연합(EU) 국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카탈루냐인들이 번 돈을 가난한 지역 복지를 위해 쓸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은 경제 정의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정신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카탈루냐인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주장이 어떻게 인류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카탈루냐 분리독립 운동이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를 추진하는 영국이 EU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로 유럽의 재정 위기가 닥치자 EU의 재정 악화가 심화되었다. EU 분담금 부담이 커진 영국은 보수당을 중심으로 EU 잔류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여기에 영국으로 들어오는 취업 목적의 이민자가 크게 증가하고, 2015년 말부터 시리아 등으로부터 난민 유입이 계속되자 보수당은 EU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영국의 브렉시트는 2019년 12월 12일 조기 총선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 영국인끼리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주장은 카탈루냐인들의 주장과 그 맥락이 같다. 


카탈루냐인들이 '우리는 스페인과 민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면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대의명분도 있고 본질적인 차이점에 근거를 둔 이런 주장을 감히 그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스페인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지방정부는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바란다. 


2019.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