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노태조는 '훈민정음(訓民正音,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보다 앞선 1438년에 간행한 석보계(釋譜系) 최초의 한글 불서인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2014년 소설가 정찬주는 훈민정음 자체를 세종(世宗) 때의 승려 신미(信眉)가 만들었다는 내용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발표했다. 2019년에는 정찬주의 소설과 비슷한 내용의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했다가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려 조기 종영된 적이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우리는 한글 하면 세종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어릴 때부터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이론(異論)이나 이설(異說)은 철저히 경계하고 배척당한다.
그런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가 철저하게 탄압을 받던 조선시대에 세종을 도와 궁궐 안에 법당인 내원당(內願堂)을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하던 승려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미다. 문종(文宗)은 세종의 뜻을 이어 신미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고,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호를 내리고 불교의 중흥을 주관하게 하였다. 세조(世祖)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미를 몹시 존경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자 신미를 왕사(王師)로 예우하였다. 세종, 문종, 세조 등 3대 왕에 걸쳐 신미를 이토록 극진히 예우한 까닭은 무엇일까? 단지 신미의 법력(法力)이 높아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신미의 본명은 김수성(金守省)이다. 아버지는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이고,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는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이행의 막내딸이었다. 정경부인은 정종1품 문무관의 부인에게 주는 위호(位號)다. 그의 동생은 유학자이면서 숭불(崇佛)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이다.
속리산의 복천사(福泉寺, 지금의 법주사)에서 출가한 신미는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大藏經)과 율(律)을 배웠다. 세종이 말년에 두 왕자와 왕후를 잃고 불교에 마음을 두었을 때, 신미는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했다. 또 복천사를 중수하고,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봉안했다. 이 공으로 문종 때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되었다.
세종이 신미와 김수온을 신임하고 중용하자 사간원(司諫院)은 상소를 올려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같은 사실이 그대로 실려 있다. 세종 29년(1447) 6월 5일 병인 2번째 기사를 보자.
司諫院啓: "訓鍊注簿金守溫, 今以西班, 移敍東班。 其父訓曾犯不忠, 告身未可署經。" 上曰: "守溫出身文科, 已經東班, 乃言不亦晩乎? 且庭臣有如此瑕類者頗多, 若等其悉去之乎? 宜速署經。" 守溫之兄, 出家爲僧, 名曰信眉。 首陽大君 瑈、安平大君 瑢酷信好之, 坐信眉於高座, 跪拜於前, 盡禮供養。 守溫亦侫佛, 每從大君往寺, 披閱佛經, 合掌敬讀, 士林笑之。[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훈련 주부(訓鍊注簿) 김수온(金守溫)이 이제 서반(西班)에서 동반(東班)으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그 아버지 김훈이 기왕에 불충(不忠)을 범하였으므로 고신(告身, 임명장)에 서경(署經, 심사를 거쳐 동의하는 것)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수온이 문과 출신으로 이미 동반(東班)을 지냈는데, 너희 말이 늦지 아니한가? 또 조정의 신하로서 이 같은 흠절이 있는 자가 자못 많은데, 너희들이 그것을 다 쫓아낼 것인가? 속히 서경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수온의 형이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신미라고 하였는데,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고 수온도 또한 부처에게 아첨하여 매양 대군들을 따라 절에 가서 불경을 열람하며 합장하고 공경하여 읽으니 사림(士林)에서 모두 웃었다.]
조선시대 사회와 정치를 주도했던 유학자(儒學者)와 선비 세력도 세종과 수미, 김수온 형제에 대해 불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비호가 없었다면 수미, 김수온 형제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자 사림의 반발로 제주도로 유배됐던 봉은사(奉恩寺) 주지 허응당 보우(虛應堂普雨)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장살(杖殺)을 당했듯이 말이다. 세종 30년(1448) 9월 8일 신묘 1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辛卯/以?爲順城君, 任從善爲慶州府尹。 六承旨皆兼詹事院詹事。 金守溫守承文院校理。 守溫, 素佞佛者也。 其兄僧信眉造飾僧道, 得幸於上, 守溫夤緣左右, 交結首陽、安平兩大君, 反譯佛書。 若有內佛事, 則與司僕少尹鄭孝康瞑目兀坐, 竟日徹夜, 合掌念經, 唱佛說法, 略無愧色。 又常誘大君曰: "'大學'、'中庸'不及 '法華'、'華嚴'微妙。" 諸大君以爲忠於上, 上特命除政曹, 會無窠闕, 姑授是職。[이개(李?)로 순성군(順城君), 임종선(任從善)으로 경주부 윤(慶州府尹)을 삼았으며, 여섯 승지(承旨)로 모두 첨사원(詹事院) 첨사(詹事)를 겸하고, 김수온으로 승문원 교리(守承文院校理, 종5품)를 삼았는데, 수온은 본래 부처에 아첨하는 자이다. 그의 형 중 신미가 승도(僧道)를 만들어 꾸며 임금께 총애를 얻었는데, 수온이 좌우를 인연(夤緣, 뇌물을 주거나 연줄을 타고 출세하려 함)하여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결탁해서 불경을 번역하고, 만일 궁내에서 불사(佛事)가 있으면 사복 소윤(司僕少尹) 정효강(鄭孝康)과 더불어 눈을 감고 정좌하고 앉아서 종일 밤새 합장하고 불경을 외고 염불을 하며 설법하여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또 항상 대군을 꾀이기를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의 미묘한 이치에 미치지 못한다 하므로, 여러 대군들이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라 여기어 임금이 특별히 정조(政曹, 권력의 핵심인 이조와 병조)를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마침 빈자리가 없기 때문에 우선 이 벼슬을 준 것이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신미의 동생 김수온이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함께 불서를 번역했다는 기록이다. 실록은 신미, 김수온 형제가 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의 두터운 신임과 비호를 받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사관들은 이에 대한 불만에 가득차서 붓을 휘갈겼음을 알 수 있다. 사관들은 당시 사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1456년(세조 2) 신미는 도갑사(道岬寺)를 중수하여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3구(軀)를 봉안했다. 1458년에는 세조의 요청으로 해인사(海印寺) 대장경을 인출할 때 이를 감독했고, 1461년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된 불경이 '법화경(法華經)', '반야심경(般若心經)', '영가집(永嘉集)' 등이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를 방문했을 때 신미는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1464년 평창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로 옮겨간 신미는 세조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했다. '상원사 중창권선문(上院寺重創勸善文)'에도 한글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신미는 불경 언해본을 만드는 데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각존자 신미 진영(출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미가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는 기록과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된 불경이 법화경, 반야심경, 영가집 등이다.'라는 기록,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와 인도어, 티베트어에 정통해 여러 승려의 법어를 번역, 해석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그는 언어학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신미는 왜 한자(漢字) 외에 티베트어, 인도어, 범어까지 열심히 공부했을까? 그것은 불경이 범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미는 불자들을 위해 범어 원전을 원음대로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한자는 뜻글자라 범어 원전을 원음대로 옮기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신미는 범어 원전을 원음대로 옮길 수 있는 소리글자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한글의 글자꼴은 어디서 영감을 얻었을까? 대제학 정인지(鄭麟趾)는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에서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면서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꼴을 본뜨되 글자가 옛날의 전자(篆字)와 비슷하다'고 밝혔다. 전자(篆字)는 고전(古篆)을 말한다. 신미와 동시대인인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齊叢話)'에서 '한글 은 범자(梵字)에 의지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이수광(李晬光)도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언서(諺書, 한글)는 글자 모양이 범자를 본떴다'고 했다.
'진언집(眞言集)' 결수문(結手文)의 범자와 한글(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글 기원설에는 범어 및 티베트어 기원설, 몽골 파스파 문자 기원설, 태극사상 기원설 등 여러 설이 있다. 이 가운데 범자 기원설이 가장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또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범자와 한글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글자도 발견된다.
파스파 문자
한글을 창제할 때 세종은 소리글자를 연구했던 언어학의 천재 신미에게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종이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들을 멀리하고 신미에게 도움을 청한 까닭은 한자로 출세한 기득권자들인 이들이 한글 창제에 노골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였다. 뼛속까지 사대주의에 물든 성리학자들도 한글 창제에 극력 반대하였다.
할 수 없이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멀리하고 언어학의 대가 신미를 중심으로 수양, 안평 두 대군과 학조, 학열 등 승려들에게 따로 한글 창제를 명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자암(大慈庵)과 현등사(懸燈寺), 진관사(津寬寺), 흥천사(興天寺), 회암사(檜巖寺) 등을 옮겨다니며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상은 불가(佛家)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기록이나 정황으로 볼 때 신미는 한글 창제에 매우 깊숙이 관여했음이 분명하다. 신미 같은 언어학과 문자학의 천재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럼에도 신미의 한글 창제 업적은 어째서 정사(正史)에는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는 아마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이 기세등등한 시대였기에 승려들이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한자 기득권층 성리학자 선비들의 반발 때문에 이를 널리 반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신미 등 승려들의 한글 창제 공적을 정사에서 숨겨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자 기득권층 유림(儒林)들로부터 신미와 한글을 보호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조선은 유교(儒敎)를 국교로 선포한 나라다.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했던 나라가 조선이다. 그럼에도 왜 한글 최초의 번역서들은 유교 경전이 아니라 불교 경전이었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한글 창제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신미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종은 가장 먼저 유교 경전이 아니라 왜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샤카무니(釋迦牟尼)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 1446)'을 한글로 편역하게 하고,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諺解, 능엄경언해, 1461)'를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하게 했을까? 또 세종은 수양대군이 엮은 '석보상절'을 보고 왜 몸소 한글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7)'을 지었을까? 신미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재 학계에서는 한글 불서의 상한선을 일반적으로 '석보상절'이 완성된 1446년(세종 28년)으로 본다.
세종은 왜 세자인 문종에게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祐國利世圓融無礙慧覺尊者)'라는 법호를 신미에게 내리라고 유언했을까? '우국이세(祐國利世)'는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면 문자가 없어서 고통을 받던 백성들을 위해 쉽게 깨칠 수 있는 한글을 안겨준 것보다 더 큰 일이 있을까? '원융무애(圓融無礙)'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은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 서로 융화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혜각존자(慧覺尊者)'는 지혜를 깨달은 지극히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왕조차도 존경해야 할 지존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왕이 승려에게 법호를 내리는 것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왕실 차원에서 신미의 한글 창제 공적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신미에게 법호를 내릴 때도 박팽년(朴彭年)을 비롯한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대신들도 받지 못하는 존호를 승려에게 내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왜 내로라하는 명찰들을 놔두고 신미가 주석하고 있던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의 작은 절 복천사(법주사)를 찾아간 것일까? 왕이 궁을 벗어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일국의 왕이 신미를 궁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몸소 속리산 심심 두메산골에 있는 절까지 찾아간 것은 그가 왕사 이상의 존재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미의 도움이 없었다면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한글로 편역하고 '능엄경언해'를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할 수 있었을까? 세조에게 신미는 대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언어학과 문자학의 대가에다가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은 고승이었으니 말이다.
신미는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를 교정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1책을 만들고, '선문영가집(禪門永嘉集)'의 여러 본을 모아 교정했으며, '증도가(證道歌)'의 주를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그의 사후, 1450년(문종 1) 선왕인 세종의 유언에 따라 문종은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宗都摠攝密傳正法悲智雙運祐國利世圓融無礙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원각선종석보'가 세종 20년(1438년) 천불사(天弗寺)에서 간행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1443년에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정사의 기록보다 한글 창제 시기가 최소한 5년 앞당겨지게 된다. 조선 세종태학원 총재 강상원 박사는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 학술강연회’에서 훈민정음 창제 시기(1443)보다 8년 앞선 정통(正統) 3년(1435)에 한글과 한자로 된 ‘원각선종석보'가 신미에 의해 출간됐다고 주장했다.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은 '원각선종석보 복사본은 같은 서체의 월인석보에 비해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크기가 균일하지 않음은 물론, 전체적으로 조악하다. 진본도 없이 복사본만 있다는 원각선종석보는 현대인에 의한 위작임이 분명하다. 신미대사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언해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이대로 회장도 '훈민정음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저 복사본이란 것이 1446년 한글 창제 뒤에 만든 것이란 것을 알 수 있고 가짜란 것을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원각선종석보'가 간행되었다는 천불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세종 당시 궁중에 설치했던 내원당이 천불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천주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도 내원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원불당(內願佛堂)을 줄여서 내원당 혹은 내불당이라고 불렀다. 왕실의 소원을 부처에게 비는 곳이라는 뜻의 집이었다. 세종은 내불당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창덕궁에 있던 내불당을 경복궁 뒤쪽으로 옮긴 불사도 세종 때의 일이었다. 태조의 첫째부인이었던 신의왕후의 위패를 봉안한 금소전을 옮기면서 함께 불사했던 것이다.
세종이 내불당을 소중히 여기고 외호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태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를 향한 효성의 발로인 셈이었다. 금소전을 조성할 때였다. 태조는 첫째왕비였던 신의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내불당을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원경왕후는 나이 50이 넘어서부터는 몸이 부쩍 쇠약해져서 동대문 밖에 있는 비구니사찰 정업원(淨業院)까지도 움직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 태종이 혁파했던 내불당을 다시 궁내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 때 유명무실하게 방치했던 내불당을 다시 살려 원경왕후에게 바친 셈이었다. 내불당을 살리고 보니 세종 자신도 더 없이 좋았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가끔 내불당을 들르곤 했는데 대부분은 내시 김용기(金龍奇)만을 데리고 갔다. 신하 중에서도 사헌부나 사간원 관원들의 간섭을 받기 귀찮아서였다.]
세종(출처 다음백과)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서울대학교 박갑수 교수는 한글 창제의 배경에 대해 '한글 창제의 두드러진 동기의 하나는 민족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민족적 자주정신(自主精神)이다. 이는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자주정신이 발로된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몇몇 민족은 이미 이 문화권에서 벗어나고자 민족문자를 만든 바 있다. 요(遼) 나라를 세운 거란(契丹)은 한자에 대항하여 920년 대소(大小) 거란문자(契丹文字)를 만들었고,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女眞)은 1119년 대소 여진문자(女眞文字)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元)나라를 세운 몽골(蒙古)은 1269년 파스파문자(八思巴文字)를 제정,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전제하에 '한글 창제도 이러한 일련의 탈 한문화(脫漢文化)의 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박갑수 교수는 한글 창제의 동기가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적 자주정신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박 교수는 기득권층인 사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족적 자주정신의 발로에 따라 세종이 주도적으로 한글을 창제했으며, 집현전 학사들은 단지 보조적 역할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왕조 중심의 설명 그대로다.
백건우 작가는 박갑수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박갑수의 글에서 핵심은 기득권층인 사대부의 보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 그 시기의 기득권 세력은 당연히 반대를 했던 것이고, 세종대왕은 그런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쌍한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전제다.'라면서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왕조 중심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즉, 권력을 가진 자가 기록한 문서의 내용만을 가지고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쉽고 편리한 방법이고, 또한 자료도 풍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크게 의심하지 않고 따르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백 작가는 이어 '하지만, 지배자 또는 기득권 세력이 백성이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말이 중국(한자)과 달라서 가여운 백성들이 글자를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언뜻보면 백성들을 위한 말일 수 있지만, 지배자의 논리, 지배자의 언어로 포장된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샘학원 정해랑 강사는 박갑수 교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중 중심적 시각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한글 창제의 취지를 애민 사상의 구현에서 찾으면서 백성의 불편함 때문에 한글을 만들었다고만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해랑 강사는 고려시대 이후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은 소멸한 향찰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한글은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세종의 필요가 맞물리면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글은 본래부터 양반과 민중 모두가 쓰는 전국민의 문자가 아니라 상민과 천민들의 글이었고, 상민과 천민들을 지배 세력이 사상적으로 가르치고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통치 수단의 하나로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주장이다.
한글을 누가 창제했으냐 하는 문제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글을 현재 가지고 있고, 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여부를 가리고 진실을 규명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권장되어야 한다. 합리적 근거에 의해 사실이 가려지고 진실이 규명되면 이를 받아들을 줄 아는 것도 지성인의 올바른 태도이다. 한글날 573주년을 맞아 혜각존자 신미대사를 생각하다.
2019. 10. 9.
'시사 이슈 화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탈루냐 독립 운동의 배경과 역사 (0) | 2019.11.02 |
---|---|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바라보며 (0) | 2019.10.15 |
박지훈 변호사의 조국 사태 정리 (0) | 2019.10.05 |
단기 4352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을 맞아 (0) | 2019.10.03 |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종훈, 김낙년, 이우연에게 준 정부 지원금 12억 원 회수하라! (0) | 2019.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