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100대 명산 지리산 성제봉 포토기행

林 山 2006. 8. 11. 15:54

하동의 악양땅에 내려온 김에 지리산 성제봉을 오르기로 한다. 어제 강동오 매암차문화박물관장으로부터 성제봉은 산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전망도 매우 좋은 산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세석평전이 있는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섬진강까지 뻗어내려 오는 산맥이 남부능이다. 남부능은 서쪽으로는 화개골, 동쪽으로는 청학동과 악양골을 거느리고  영신봉에서 삼신봉, 관음봉, 성제봉을 지나 신선대, 고소성까지 치달려 와서는 섬진강 속으로 산자락을 감춘다. 남부능은 섬진강을 물밑으로 지난 다음 다시 전라남도 남광양의 백운산으로 이어진다. 관음봉과 성제봉 사이에서 남동쪽으로 갈라지는 기맥은 칠성봉과 구재봉으로 이어지면서 성제봉 능선과 함께 악양골을 포근하게 감싸는 병풍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성제봉은 지리산 남부능선의 끝자락이 섬진강에 잠기기 바로 전에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다. 

 

*성제봉 등산지도

 

지리산에 성제봉이 있다는 말은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성제봉을 형제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부능선의 끝자락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마치 다정한 형제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형제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제는 형제의 경상도 사투리다. 그렇다면 형제봉이나 성제봉이나 다 같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제봉의 한자표기를 보면 聖帝峰(성인성, 임금제, 봉우리봉)으로 되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성제봉 등산로 입구

 

악양에서 성제봉을 오르는 길은 꽤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평사리에 있는 한산사에서 고소성, 신선대를 거쳐 성제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기에 전망이 가장 좋은 등산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정서리 정서마을에서 출발하여 강선암을 지나 신선대와 강선암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는 능선에 오른 다음 성제봉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삼거리에서 신선대까지는 가까운 거리여서 신선대를 들렀다가 성제봉으로 갈 수도 있다. 또 다른 길은 정서리 상신마을에서 청학사를 지나 곧바로 성제봉에 이르는 등산로다. 오늘은 강선암으로 해서 성제봉을 오르기로 한다. 등산로 입구에는 이정표와 특산식물 군락지가 표기되어 있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소나무숲 사이로 난 길

 

장마가 끝난 후라 물이 제법 많이 불어난 계곡물을 건넌다.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는 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산을 오를수록 경사가 점점 가파라지기 시작한다. 소나무와 바위가 잘 어우러진 길이 정겹다. 산비탈에는 붉은 색을 띠는 적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산은 역시 소나무가 있어야 제 멋이 난다. 이곳의 지형과 지세를 살펴보니 송이버섯이 많이 나올 만한 산이다. 아니나 다를까! 등산로를 따라서 '송이버섯 재배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 있다.


*까치수염

 

*바위채송화

 

지리산에도 까치수염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어느 산엘 가든지 이 꽃을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까치수염은 어디서나 잘 자라는 식물임에 틀림없다. 응달진 바위틈에는 바위채송화도 활짝 피어 있다. 이 꽃도 고산지대의 바위틈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바디나물

 

길섶에는 바디나물도 보인다. 연두색을 띤 잎은 나온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햇잎이다.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바디나물은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근생엽과 밑부분의 잎은 엽병이 길며, 삼각상 넓은 난형이고 우상으로 갈라진다. 소엽은 깊게 갈라져서 잎이 흘러 날개모양이 되고, 난형 또는 피침형이며 결각상의 거치와 날카로운 거치가 있다. 엽병 밑부분은 엽초로 되어 줄기를 싸고 있다. 상부의 잎은 작지만 엽병은 길며 도란형의 엽초로 되고, 흔히 자줏빛이 돈다. 꽃은 8~9월에 긴 화경끝에 복산형화서로 발달하며 산경은 가지 안쪽과 더불어 잔돌기가 있다. 소산경은 끝에 짙은 자주색 꽃이 산형으로 달린다. 유사종으로 흰꽃바디나물, 흰바디나물, 개구릿대, 제주사약채, 참당귀, 갯강활, 궁궁이가 있다.

 

바디나물의 어린 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바디나물의 뿌리를 한방에서 전호(前胡)라고 하는데 청화열담약(淸化熱痰藥)으로 쓴다. 강기거담(降氣祛痰), 거풍청열(祛風淸熱)의 효능이 있어 풍열해수담다(風熱咳嗽痰多), 풍열두통(風熱頭痛), 담열천식(痰熱喘息), 흉격만민(胸膈滿悶) 등 증을 치료한다. 임상에서 종종 사용되는 한약재다. 

 

*은대난초

 

꽃이 진 은대난초에는 씨앗 꼬투리가 달려 있다.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은대난초는 댓잎은난초라고도 한다. 유사종인 은난초와는 잎의 뒷면과 가장자리, 화서와 자방에 털같은 백색 돌기가 있는 점이 다르다. 꽃은 5~6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완전히 펴지지 않는다. 포는 선형으로 밑에 달려 있는 것은 잎같고 원줄기보다 길다. 꽃받침잎은 피침형이며 끝이 다소 뾰족하다. 꽃잎은 짧으며 나비가 넓고 순판은 밑부분이 짧은 거(距)로 되어 튀어 나온다. 중앙열편은 심장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안쪽에 연한 황갈색의 주름이 있다. 꽃술대와 순판은 길이가 같으며, 끝에 꽃밥이 달린다.



*하늘말나리

 

올해 하늘말나리의 꽃이 활짝 핀 모습은 지리산에 와서 처음 본다. 황적색 바탕에 고동색 반점이 찍혀 있는 꽃이 아름답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식물인 하늘말나리는 우산말나리라고도 한다. 말나리와 비슷하지만 꽃이 하늘을 향해서 피는 점이 다르다. 잎은 윤생엽과 호생엽 두 가지가 있다. 꽃은 7~8월에 원줄기끝과 바로 그 곁가지끝에 하늘을 향해 곧추 피어난다. 화피열편은 피침형이고 황적색 바탕에 고동색 또는 자주색 반점이 밀포하며 갈고리모양으로 약간 뒤로 젖혀진다. 어린 순과 비늘줄기는 식용할 수 있다. 잎이 특이하고 꽃이 아름다워서 관상가치가 매우 높다. 유사종으로 짙은 황색꽃이 피는 누른하늘말나리, 화피에 자주색 반점이 없는 지리산하늘말나리가 있다. 


*샘터

 

중간쯤 올랐을까 샘터가 나타난다. 누군가 목마름에 지친 산길 나그네를 위해서 스테인레스 그릇을 갖다 놓았다. 샘터 바위에 촛농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속인이 기도를 하는 기도처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신선대와 성제봉 삼거리

 

한동안 땀을 흘린 끝에 신선대에서 성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여기가 바로 신선대와 고소성으로 내려가는 길과 성제봉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강선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로 전망도 상당히 좋다. 능선의 여기저기에는 활짝 핀 야생화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듯 하다.  

 

*도깨비엉겅퀴꽃


*돌양지꽃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주인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무덤가에 피어 있던 도깨비엉겅퀴꽃은 이제 막 지는 중이다. 대암산에서 보았던 도깨비엉겅퀴꽃은 한창 피는 중이었는데..... 바위틈에는 샛노란 돌양지꽃도 피었다. 지리산의 끝자락 바위틈에서 만난 돌양지꽃..... 이 얼마나 기막힌 인연이랴! 내가 아니면 그 누가 너의 고고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으리오!


*닭의장풀꽃

 

돌양지꽃 바로 옆에는 깊고 푸른 하늘색을 닮은 닭의장풀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다. 뒤로 살짝 제껴진 진청색 꽃잎과 하얀 수술대 끝에 달린 황금색 수술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닭의장풀과의 한해살이풀인 닭의장풀은 7~8월에 엽액에서 나온 화경(花莖) 끝의 포로 싸여 하늘색 꽃이 핀다. 포는 넓은 심장형인데 안으로 접히고 끝이 갑자기 뾰족해진다. 유사종으로 큰닭의장풀과 흰닭의장풀이 있다. 옛 선비들은 대나무를 닮은 흰닭의장풀을 수반의 맑은 물에 키우며 여름을 시원하게 보냈다.

 

닭의장풀의 어린 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 맛이 자못 궁금하다. 이 풀의 전초를 말린 것을 한방에서 압척초라고 하는데, 청열사화약(淸熱瀉火)으로 쓴다. 청열해독(淸熱解毒), 양혈행수(凉血行水)의 효능이 있어 수종각기(水腫(脚氣), 소변불리, 감기, 단독(丹毒), 이하선염, 황달성간염, 열리(熱痢), 말라리아, 각종 출혈증, 백대(白帶), 인후종통, 각종 종기 등 증을 치료한다. 임상에서는 거의 안 쓰는 한약재로 나도 아직 한번도 처방해 본 적이 없는 약초다.

 

*타래난초

 

우거진 풀섶에 숨은 듯이 피어 있는 타래난초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꽃이 핀 상태의 타래난초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분홍색 작은 꽃들이 긴 꽃대를 따라 나선형으로 돌아가면서 피어 올라간 모습이 특이하다. 난초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타래난초의 학명은 Spiranthes sinensis (Pers.) Ames다. 속명인 Spiranthes는 희랍어의 'speira(나선상으로 꼬인)'와 'anthos(꽃)'의 합성어로 작은 꽃들이 나선형으로 화경을 감아 올라가며 피는 모양을 뜻한다. 유사종으로 흰꽃이 피는 흰타래난초가 있다. 5~8월에 분홍색으로 피는 꽃은 나선상으로 꼬인 수상화서에 작은 꽃이 다수 옆을 향해 달린다. 포는 난상 피침형이고 끝이 뾰족하다. 꽃받침잎은 피침형으로 점점 좁아지고, 꽃잎은 꽃받침보다 다소 짧으며 위꽃받침잎과 더불어 투구처럼 된다. 윗꽃받침은 선상피침형으로 끝이 둔하고, 옆꽃받침잎도 길이는 같으나 폭이 좁으며 꽃잎의 끝이 둔하다. 순판은 색이 연하고 도란형으로서 꽃받침보다 다소 긴데 끝부분이 다소 뒤집어지고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타래난초의 뿌리를 포함한 전초를 한방에서 반룡삼(盤龍蔘)이라고 한다.  익음청열(益陰淸熱), 윤폐지해(潤肺止咳)의 효능이 있어 병후허약, 음허내열(陰虛內熱), 해수토혈(咳嗽吐血), 어지러움증, 요통, 유정(遺精), 임탁대하(淋濁帶下), 창양옹종(瘡瘍癰腫), 허갈(虛渴), 폐결핵에 의한 각혈 등 증을 치료한다. 민간에서 쓰는지는 모르지만 임상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약재다.


*신선대

 

신선대로 오르는 깎아지른 듯이 험하고 가파른 암릉길에는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쪽 봉우리에서 신선대로 가려면 로프가 매어져 있는 수직암벽길을 타고 내려가서 다시 저 철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신선대 뒤로 억불봉에서 백운산에 이르는 능선이 마치 병풍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신선대 또는 신선봉은 어느 산에서나 흔하게 발견되는 산이름이다. 그만큼 신선사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선사상은 불로장생한다는 신선의 존재를 믿고 그 경지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사상이다. 한국인의 원시 고유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무속과 더불어 신선사상이다. 또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신화와 전설에서 신선사상이 발견된다. 

 

신선사상은 크게 한국 고유의 선도(仙道)와 신라시대 당나라 유학생들이 도입한 수련도교로 나눌 수 있다. 한국 고유의 선도는 산악숭배사상을 바탕으로 국조신앙(國祖信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선(神仙) 또는 선인(仙人)의 선(仙)이란 산에 사는 사람을 뜻하는데, 이는 바로 산악숭배사상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동방을 선인들이 사는 곳으로 생각하고 동경하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한국 고유의 선도는 이미 중국의 도교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중심사상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천제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삼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다든지, 단군이 수도를 신시(神市)에서 아사달로 옮긴 뒤 천구백팔세까지 살다가 신선이 되었다는 기록 등에서 산악숭배사상과 신선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선대를 지나 약 4km 정도 더 내려가면 고소성(姑蘇城)이 나온다. 고소성은 지리산 남부능선이 성제봉을 거쳐 신선대까지 치달려 와서는 섬진강 물속으로 산꼬리를 감추기 직전 해발 300m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성벽의 길이 약 800m, 높이 3.5~4.5m의 규모로 축조되어 있다. 이곳은 남쪽으로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천혜의 요충지로 부산, 진주 등지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지난 1966년 사적 제151호로 지정된 고소성은 660년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원군인 위병의 섬진강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신라가 백제와 왜의 협력을 차단할 목적으로 이 성을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고소성은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거나 침공할 목적으로 쌓았던 것이 분명하다. 

 

*회남재

 

동쪽을 바라보니 시루봉에서 칠성봉을 지나 구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우렁찬 기세로 뻗어간다. 시루봉과 칠성봉 사이로 산허리를 감고 넘어가는 회남재가 눈에 들어온다. 영신봉에서 시작해서 삼신봉, 내삼신봉, 쇠통바위, 상불재, 관음봉에 이르는 남부능은 내원재에서 조금 더 내려온 지점에서 악양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갈라진다. 남쪽을 바라보면서 왼쪽으로 갈라져 나가는 능선은 시루봉, 회남재, 칠성봉, 동점재를 지나 구재봉으로 이어진다. 회남재는 시루봉에서 2.6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악양면 등촌에서 청암면 묵계로 넘어가는 도로가 나 있다. 조선시대 남명 조식이 돌아서 넘었다는 회남재..... 그는 무슨 까닭으로 저 회남재를 넘었던 것일까?


*칠성봉

 

바로 앞에는 칠성봉(七星峰, 880m)이 듬직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칠성봉은 회남재와 동점재 사이에 있는 봉우리다. 동점재는 칠성봉 오른쪽 안부에 있는데, 악양면 정동리와 적량면 동점을 잇는 재다. 칠성봉은 이곳 뿐만 아니라 설악산, 묘향산을 비롯해서 꽤 여러 군데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칠성신앙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은 인간의 수명과 재복(財福), 강우(降雨)를 관장하는 신이다. 칠성에 대한 신앙은 중국의 도교에서 발달한 이후 불교와 민간신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라의 김유신이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나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거나 고려시대에 태일제(太日祭)를 지낼 때 칠성에도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칠성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간에서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추앙된 칠성신은 불교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 초기부터 사찰에 등장하는 칠성각의 기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불교에서 칠성은 원래 호법선신(護法善神)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초기부터 민간에서 성행하던 칠성신앙의 영향을 받아 그 성격이 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찰에 세워진 칠성각에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에 두고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그리고 위아래는 칠여래(七如來)와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하는 칠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칠성의 내력이나 기능을 중심으로 가신(家神)의 하나로서 신앙되고 있다. 칠성신은 집안의 장독대에 위치하며 제일(祭日)은 칠석날 밤이다. 제주(祭主)는 주로 집안의 부녀자로 돗자리를 깔고 촛불을 밝힌 다음 백설기와 정화수를 떠놓는다. 그리고 동서남북 네 방향을 향해서 절을 하고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축원을 한다. 축원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소지(燒紙)를 올린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어머니께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었다. 당시는 집집마다 칠성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통 볼 수가 없다. 칠성신앙은 불교나 기독교 등 거대종교의 영향으로 인해 거의 사라졌다.  


*구재봉

 

칠성봉과 동점재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가 구재봉(鳩在峰, 768m)이다. 구재봉 앞으로 펼쳐져 있는 푸르른 무딤이들판이 싱그럽다. 구재봉 왼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은 하동의 금남면과 진교면 경계지점에 있는 금오산(金烏山, 849m)이고, 오른쪽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분지봉(528m)이다. 금오산은 남한만 해도 다섯 군데나 있다. 저 앞에 보이는 금오산을 비롯해서 구미의 금오산(976m), 밀양 삼랑진의 금오산(730m), 전남 여수의 금오산(323m), 경주 남산의 금오산(468m) 등이 그것이다. 금오(金熬)는 경주의 옛 별호다. 또 금오(金烏)는 해를 달리 이르는 말로 태양을 뜻한다. 고대신화에 나오는 삼족오(三足烏)는 태양 안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를 말하는데 금오라고도 한다. 삼족오는 용이나 봉황보다 상위 문화로 고구려 왕실의 상징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오가 이처럼 상서로운 새였다. 금오가 산이름에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바로 한민족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말해 준다. 

 

북한은 지난 1996년 국가과학원 지리연구소 학자들을 내세워 한반도의 산줄기를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이를 체계화하였다. 북한에서는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로 부르고 있다. 북한에서 체계화한 개념을 따르자면 백두대산줄기는 백두산으로부터 함경남도 단천에 있는 두류산과 강원도 태백의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 줄기 끝점인 하동의 구재봉까지를 잇는 1천470㎞를 일컫는다. 바로 저 앞에 보이는 구재봉이 백두대간의 종점이라니..... 북한의 백두대산줄기 개념은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지리산 제일봉인 천왕봉이 백두대간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백두대간이 지리산 천왕봉을 지나 진주시 지수면에서 끝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2001년 내가 남한쪽 백두대간을 순례할 때도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평사리 무딤이들과 섬진강

 

산아래로 눈을 돌리자 드넓은 평사리 무딤이들판의 앞으로 섬진강(蟾津江)이 유유히 흘러간다. 지리산의 산줄기들과 백운산, 그리고 섬진강이 어우러진 경관이 그야말로 절경이다. 악양이라는 지명도 그 옛날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을 지날 때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과 같다고 한 전설에서 유래한다. 무딤이들판은 예로부터 만석지기를 서너 명 낼 수 있다고 일컬어지던 들판이다.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평사리에는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이 건립되어 2001년부터 매년 토지문학제가 개최되고 있다. 

 

섬진강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동부지역을 남쪽으로 흘러 경상남도 하동군과 전라남도 광양시 경계에서 남해 광양만에 이르는 길이 225㎞의 강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팔공산(1,151m)의 북쪽 1,080m 지점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정읍시와 임실군의 경계에 이르러 갈담저수지(일명 옥정호)를 이룬다. 그런 다음 순창군과 곡성군, 구례군을 남동쪽으로 흐르며 하동군 금성면과 광양시 진월면 경계에서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섬진강이라는 강이름은 고려 우왕 때(1385년)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蟾, 두꺼비 섬)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성제봉으로 가기 전에 있는 산봉우리

 

악양들판과 섬진강, 그리고 지리산의 산줄기들과 백운산이 연출하는 절경에 넋을 잃고 구경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꽤나 흘렀다. 성제봉을 향해서 발길을 돌린다. 성제봉으로 가려면 저 앞에 있는 이름없는 산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이 무명봉의 남쪽 사면은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큰 나무들은 거의 없고 관목과 풀숲만이 우거져 있다. 


*긴산꼬리풀꽃

 

무명봉으로 오르는 능선길에는 여러 가지 야생화들이 피어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연보라색을 띤 긴산꼬리풀꽃은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중이다.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긴산꼬리풀은 전국의 산지에서 자란다. 7~8월에 하늘색 꽃이 핀다. 꽃은 원줄기 끝에 총상화서로 달린다. 큰꼬리풀과 긴산꼬리풀, 산꼬리풀의 전초를 한방에서 일지향(一枝香)이라고 하는데 화담지해평천(化痰止咳平喘)의 효능이 있어 만성기관지염을 치료한다. 임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약재다.


*마타리꽃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꽃 가운데 하나인 황금색 마타리꽃이 피어나고 있다. 이제 가을도 머지 않았나 보다. 마타리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마타리는 가얌취, 미역취라고도 한다. 유사종으로 돌마타리, 금마타리, 뚝갈이 있다. 꽃은 7~8월에 황금색으로 피는데 가지 끝과 원줄기 끝에 산방상으로 달리고 화서분지의 한쪽에 돌기 같은 흰털이 있다. 마타리는 겉보기와는 달리 뿌리에서 된장 썩는 냄새가 난다. 그래서 마타리를 패장(敗醬)이라고도 부른다.  

 

마타리는 꽃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심어도 좋다. 봄에 돋아나는 어린 순은 가얌취라고 해서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뚝갈과 마타리의 뿌리가 달린 전초를 한방에서 패장초(敗醬草)라고 한다. 더 세분하면 흰꽃이 피는 뚝갈을 백화(白花)패장, 노란꽃이 피는 마타리를 황화(黃花)패장이라고 한다. 패장초는 청열해독, 소종배농(消腫排膿), 거어지통(祛瘀止痛)의 효능이 있어 장옹(腸癰, 충수염), 하리(下痢), 적백대하, 산후어혈복통, 목적종통(目赤腫痛), 옹종개선(癰腫疥癬) 등 증을 치료한다. 아주 좋은 천연 소염제다. 임상에서 종종 쓰는 한약재이기도 하다. 


*뚝갈꽃

 

마타리와 함께 하얀 뚝갈꽃도 피어나고 있다. 뚝갈과 마타리는 전혀 다른 꽃 같지만 사실은 사촌간이다. 마타리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뚝갈은 흰미역취라고도 한다. 꽃은 7~8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가지 끝과 원줄기 끝에 산방상으로 달리고, 화서분지에는 원줄기의 하반부와 더불어 퍼진 또는 밑을 향한 백색 털이 있다. 어린 순은 식용할 수 있다. 한방에서는 마타리와 똑같이 패장초로 쓰인다.  



*꽃창포

 

지리산에서 꽃창포를 보게 될 줄이야.....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피어 있는 모습이 청초하다. 우아하면서도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닮았다. 흔히 꽃을 여인에 비유하는 것은 둘 다 생명을 잉태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들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꽃창포는 잎이 크고 창포와 비슷하게 생겨서 '꽃이 피는 창포'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창포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꽃창포는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특산식물이다. 적자색의 꽃이 6~7월에 원줄기나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데 꽃잎의 안쪽에 황색 줄이 있다. 외화피와 내화피는 각각 세 장씩이다. 제비붓꽃, 환경부가 희귀종으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있는 대청부채과 부채붓꽃은 꽃창포의 유사종들이다.


*닭의난초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활짝 핀 닭의난초꽃을 만나다니..... 활짝 핀 꽃의 모양이 닭의 벼슬을 닮아서 닭의난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남부지방에서 발견되는 종은 노란색에 가깝고 중부지방에서 발견되는 종은 붉은색에 가깝다. 병아리난초꽃보다 꽃의 크기가 더 크다. 난초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초본인 닭의난초는 중부이남 지역에서 자란다. 6~7월에 황갈색 꽃이 핀다. 포는 꽃보다 짧고 꽃받침잎은 긴 난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녹갈색이 돈다. 꽃잎은 난형으로 끝이 둔하고 꽃받침과 길이가 같으며 등황색이다. 순판은 백색으로서 꽃잎과 길이가 같고 안쪽에 홍자색 반점이 있다. 


*흰씀바귀꽃

 

능선길 한가운데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하얀 흰씀바귀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꽃의 크기가 이렇게 작은 흰씀바귀는 처음 본다. 꽃은 5~7월에 가지 끝과 원줄기끝에 산방상으로 달린다. 유사종으로 기본종인 씀바귀와 노란 꽃이 피는 꽃씀바귀가 있다. 이른 봄에 어린 순과 뿌리를 나물로 먹는다. 흰씀바귀의 전초는 진정의 효능이 있다. 


*흰여로꽃


*흰여로꽃

 

무명봉 바로 아래 풀이 무성하게 자란 평전에는 흰여로꽃이 한창이다. 꽃대가 내 키만한 것도 있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흰여로는 유독성 식물이다. 유사종으로 갈색꽃이 피는 붉은여로와 녹색꽃이 피는 푸른여로가 있다. 흰색 꽃이 7~8월에 피는데, 원줄기끝에 성긴 총상 원추화서에 달린다. 꽃의 포는 피침형으로 뒷면과 가장자리에 털이 있다. 흰여로의 뿌리와 뿌리줄기를 한방에서 여로(藜蘆)라고 하는데, 용토약(涌吐藥)으로 쓴다. 용토풍담(涌吐風痰), 살충의 효능이 있어 중풍담용(中風痰湧), 풍간전질(風癎癲疾), 황달, 오랜 학질, 설사, 이질, 두통, 후두염, 편도선염, 비식, 개선(疥癬), 악창 등 증을 치료한다. 그러나 독성이 있으므로 전문가의 처방이 없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임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약재다. 
  

*무명봉에서 바라본 신선대와 백운산

 

무명봉에 올라 잠시 뒤를 돌아본다. 신선대는 이제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이고, 섬진강 건너편으로 백운산(1218m)에서 억불봉(1000m)을 향해서 뻗어가는 산맥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른쪽 가장 높은 봉우리가 전남 광양의 백운산이고, 백운산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뻗어가는 산맥의 끝에 솟아 있는 봉우리가 억불봉이다. 섬진강에서 일어난 산줄기가 남쪽으로 진행하다가 매봉(865.3m)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백운산으로 이어진다. 언제 백운산을 오르게 될 날이 오리라. 백운산에 오르면 광양만 남해바다가 훤하게 보일 것이다. 백운산에 올라 지리산맥을 바라보면 그 또한 장관이리라.

 

*숙은노루오줌꽃


*산수국꽃

 

무명봉을 떠나 성제봉으로 가는 길에 오른다. 무명봉에서부터는 평탄한 능선길이라 힘이 별로 들지 않는다. 얼마쯤 가자 헬기장이 나타난다. 주위에 있는 산들의 위치와 이름을 표기한 표지판이 헬기장 한쪽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키가 작은 숙은노루오줌 군락지를 발견했다. 분홍색 꽃이 피어 있는 숙은노루오줌은 키는 비록 작지만 강인한 생명력이 있어 보인다. 고산지대의 열악한 환경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헬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능선길이다. 응달진 곳에 산수국꽃이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 있다. 숙은노루오줌이나 산수국은 전국의 산속 어디서나 흔하게 발견되는 야생화다.

 

*산짚신나물

 

길가에서 발견한 산짚신나물꽃은 짚신나물꽃에 비해 가녀린 모습이다.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어린 줄기와 잎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7~8월에 원줄기끝과 가지끝에서 총상화서가 발달하여 노란색 꽃이 드문드문 달리며 소포가 잘게 갈라진다. 꽃받침통은 도원추형이고 끝이 다섯 개로 갈라지며, 열편은 난형으로서 끝이 날카롭고 밑부분에 갈고리 같은 털이 있어 옷에 잘 붙는다. 산짚신나물, 짚신나물의 전초를 말린 것을 한방에서 선학초(仙鶴草)라고 하는데, 지혈약 중에서 수렴지혈약(收斂止血藥)에 속한다. 수렴지혈, 해독지리(解毒止痢), 건위(健胃)의 효능이 있어 각종 출혈증, 적백리(赤白痢), 간농양(肝膿瘍), 대하, 옹종, 타박상 등 증을 치료한다. 


*성제봉으로 가는 능선길

 

울창한 숲 사이로 난 평탄한 능선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발바닥을 통해서 흙길의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져 온다. 푸르디 푸른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 푸르름 속에 내 몸을 맡긴다. 넓고 깊고 큰 지리산이라는 대자연의 품에 포근하게 안기자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찾아든다. 문득 물아일체, 자타불이라는 진리가 저절로 깨달아진다. 즉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저 풀과 나무들이 내뿜는 산소를 내 호흡을 통해서 몸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저들은 곧 내 생명의 은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풀과 나무들의 생명기운이 내게로 와서 나의 생명기운이 되는 것이니 저들과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물레나물꽃

 

성제봉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길가 풀섶에서 노란색 물레나물꽃이 반갑게 맞아 준다. 물레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모양이 마치 물레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유사종으로 큰물레나물이 있다. 꽃은 6~8월에 피고 황색 바탕에 붉은빛이 돌며 가지 끝에 큰 꽃이 달린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꽃이 아름다워서 관상용으로 심어도 좋다. 물레나물의 전초를 말린 것을 한방에서 홍한련(紅旱蓮)이라고 하는데, 평간해독(平肝解毒), 지혈소종(止血消腫)의 효능이 있어 두통, 토혈, 타박상, 창절(瘡癤) 등 증을 치료한다.


*지나온 무명봉

 

성제봉을 바로 몇 발자국 남겨 두고 지나온 능선을 돌아보니 조금 전에 넘었던 무명봉이 바로 앞에 보인다. 드넓은 악양들판은 그야말로 녹색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구재봉과 분지봉, 백운산에서 위아래로 굽이쳐 내려오는 산줄기들이 섬진강으로 치달려 와서는 강물속으로  끝자락을 감추어 버린다. 


*성제봉 정상 표지석

 

*성제봉 정상에서

 

드디어 성제봉(1115m) 정상에 올라서다. 정상에는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옆면을 보니 1992년 5월 3일에 이 표지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음각되어 있다. 성제봉은 전망이 기가 막히게 좋다. 북쪽으로는 동서로 가로질러 가는 웅장한 백두대간 지리산맥이, 남쪽으로는 마이산에서 시작해서 무등산을 거쳐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장쾌하게 뻗어가는 산줄기들..... 그리고 그 산줄기들의 산발치를 돌고 돌아서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 나는 이 대자연의 비경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성제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성제봉 바로 앞에 있는 봉우리 너머로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1915m)이 아스라이 바라다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지리산이 내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자리잡으면서 해마다 한두 차례 백두대간 지리산맥에 올라 종주 겸 순례를 했었다. 어느 때는 지리산이 너무나도 그리운 나머지 보름동안이나 지리산의 능선들과 계곡을 헤매고 다니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천왕봉에 몇 번이나 올랐던가! 오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던 천왕봉..... 천왕봉의 왼쪽으로 제석봉(1806m), 연하봉(1667m), 촛대봉(1704m), 영신봉(1602m), 칠선봉(1576m을 거쳐 덕평봉(1522m)으로 굽이쳐 뻗어가는 지리산맥이 장엄하다.

 

저토록 의연하고 웅장한 지리산맥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깨달음이다. 언제나 많은 깨우침을 주는 지리산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스승이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설산 근처에 있는 인도나 네팔, 티벳에서 이름난 고승들이 많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시간조차 정지한 듯한 설산을 대면하는 순간 장엄화려한 연화장 세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티벳인들의 눈을 보라. 그들의 눈빛이 설산을 닮지 않았는가! 나도 언젠가 세속의 인연을 정리하고 나면 히말라야 설산으로 영혼의 순례를 떠나고자 한다.  

 

예로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智者樂水 仁者樂山). 유교의 인(仁)이나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는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셋은 궁극에서 하나로 통한다. 산을 오르는 서로 다른 길이 정상에서는 하나로 만나듯이.....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중생을 제도해서 이 땅에 자유와 평등,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서방정토나 천국, 극락세계를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자리에서 실현하려는 사람이 진정한 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제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과 왕시루봉 능선

 

북동쪽으로 왕시루봉(1243m)에서 노고단(1507m)을 거쳐 반야봉(1734m)에 이르는 능선을 바라본다. 맨 뒤에 보이는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반야봉이고, 왼쪽 끝 봉우리는 왕시루봉, 반야봉 바로 오른쪽 봉우리는 삼도봉(1499m)이다. 반야봉과 왕시루봉 중간쯤에 솟은 봉우리가 노고단이다. 반야봉 오른쪽으로 백두대간 지리산맥이 노루목, 삼도봉, 화개재를 지나 토끼봉으로 이어진다. 반야봉 왼쪽으로는 백두대간 지리산맥이 임걸령, 돼지평전을 거쳐 노고단을 향해서 달려간다. 왕시루봉 능선은 노고단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남쪽으로 질등, 문바우등, 느진목재를 지나 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왕시루봉 능선 바로 앞에 있는 능선은 백두대간 지리산맥의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불무장등(1446m), 통곡봉, 황장산을 거쳐서 촛대봉에 이르는 불무장등(1446m) 능선이다. 왕시루봉 능선과 불무장등능은 지금 내가 서 있는 남부능과 함께 지리산 남쪽에 있는 능선들을 대표하는 3대 능선이다. 왕시루봉능과 불무장등능 사이에 있는 계곡이 피아골이고, 불무장등능과 남부능 사이에 있는 계곡이 화개골이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지리산 주능선과 산줄기들을 바라본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떠 있고 바람은 잠잠하다. 지리산은 오늘도 변함없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런 지리산이 나는 언제나 고맙다. 지리산의 고봉준령들을 사진을 찍듯이 가슴에 담는다. 어느덧 내 가슴은 지리산으로 가득찬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는 지리산을 떠날 때가 되었다. 지리산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산을 내려간다. 지리산의 말없는 배웅을 받으면서 악양땅을 떠나다.

 

2006년 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