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寒溪嶺)! 이가 시리도록 물이 차다는 한계의 고개마루에 올라 동해를 바라본다. 백두대간이 치달려 오다가 대청과 점봉산의 가운데 쯤에서 바람도 쉬어가는 곳! 언제나 이곳에 서면 설악을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번에는 서북능선의 귀때기청에서 대승령까지 마룻금을 밟아볼 생각이다. 서북능선의 끝청에서 대청까지는 여러 번 다녀 보았지만 귀때기에서 대승령까지의 구간은 오늘이 처음이다.
한계령을 떠나 설악루에 올라선다.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설악의 숲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저토록 푸르른 숲! 태고의 원시가 살아 숨쉬는 곳! 언제나 꿈속에서 목메이게 그리웁던 그 곳! 오늘 나는 그 설악의 넉넉한 품에 안겨 설악과 하나가 되고 싶다. 설악은 그런 나를 따뜻한 품으로 안아줄까?
설악은 사람을 거부하는 산이다. 설악에 오를 때마다 설악의 추상같은 바위품에 안겨보려 하지만 언제나 지독한 외로움을 안고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도 그토록 무정한 설악의 품속에 안기려 하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노력이 소용없는 일인 줄 알지만 설악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찌하랴!
한참 땀을 흘린 끝에 끝청과 귀때기청으로 가는 갈림길에 올라선다. 자욱한 안개가 설악을 뒤덮고 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설악은 쉽사리 자신의 모습을 나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나 보다. 안개속을 헤치며 귀때기청으로 향한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안개가 어지러이 흩날린다.
바위 너덜지대를 몇 군데 지나서 귀때기청에 올라선다. 빛바랜 판자로 만들어진 이정표가 이 곳이 귀때기청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산봉우리 이름을 귀때기청이라고 했을까? 사람의 귀처럼 대청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귀때기라고 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말 그대로 생김새가 귀처럼 생겨서 귀때기라고 했을까?
▲ 여기가 귀때기청봉 정상이다.
대승령을 향해 귀때기청을 떠난다. 곳곳에 바위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바위에 붙어서 군락을 이룬 바위채송화들이 한창 샛노란 꽃들을 피워 올리고 있다. 너덜지대에는 등산로를 따라서 하얀 색의 줄을 매어 놓았다. 겨울에 눈이 왔을 때는 상당히 위험한 구간이라 등산객들을 위해서 매어놓은 것이다. 줄을 매어놓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새겨본다.
▲ 서북능선에는 곳곳에 이런 바위너덜지대가 있다.
▲ 바위너덜지대에서 필자. 뒤로 보이는 줄이 바로 겨울에 눈이 많이 쌓였을 때 등반객들로 하여금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안내해 주는 줄이다. 일종의 생명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너덜지대를 벗어나니 주황색 동자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꽃이다.
멀고도 아주 먼 옛날 어느 깊은 산중 암자에 노스님이 어린 동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스님은 산아래로 탁발공양을 나갔다. 스님이 산을 내려가자 눈이 엄청나게 내리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이고 눈이 계속 내렸다. 온 산과 계곡은 눈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스님이 걱정이 된 동자는 암자 앞에 있는 바위에 올라 스님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스님은 돌아올 줄 몰랐다. 동자는 스님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다가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 눈이 녹은 뒤 스님이 암자로 돌아왔을 때 동자는 이미 차디찬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스님은 극락왕생을 빌면서 동자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그 자리에는 주황색의 꽃이 한 송이 피어났다. 스님은 그 꽃이 동자의 환생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스님은 그 꽃에 동자꽃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동자의 명복을 빌었다.
이름을 알고 산들꽃을 대하면 그 꽃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도 하나의 인연인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어느 것 하나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있으랴! 하물며 사람사이의 인연에 있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이승에서 나와 만나는 모든 인연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산기슭에는 하얀 참나물꽃, 개삼지구엽초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참나물은 향과 맛이 뛰어나 산나물 중에서도 으뜸이다. 개삼지구엽초는 삼지구엽초(음양곽)와 아주 흡사해서 꽃이 피지않았을 때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가끔 우산모양으로 하얀 꽃을 피워올린 산당귀도 눈에 띈다. 작은 종모양의 연한 자주색 꽃을 여러 송이 달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싯대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다.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고본도 흔하게 눈에 띈다. 고본(藁本)은 감기와 두통, 그리고 어혈을 치료하는 데 쓰는 한약재이다. 또 고본으로 담근 고본주는 향이 아주 좋아 애주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술이다. 그래서 고본은 요즈음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서 멸종위기에 처한 산약초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바위 너덜지대를 벗어나 이름모를 암봉에 올라서자 갑자기 안개가 걷힌다. 안개가 사라지는 순간 웅장한 설악의 장관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아! 설악이다! 한계령 건너 삼형제봉과 가리봉이 병풍처럼 다가선다. 가리봉 정상은 구름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공룡능선이 백두를 향해 뻗어가고 그 앞에는 용아장능선의 바위봉우리들이 마치 공룡의 이빨처럼 우뚝우뚝 솟아 있다. 귀때기청은 대청봉의 앞을 막아선 채 서북능선을 뒤로 감추고 있다.
▲ 왼쪽의 능선들은 서북능선에서 한계쪽으로 뻗어내려간 능선들이고, 오른쪽 맨 뒤의 능선은 망대암봉에서 한계령쪽으로 뻗은 백두대간이다.
화엄경(華嚴景)이 그대로 지상에 펼쳐진 듯 한 장엄화려한 설악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존재를 잊는다. 천하 제일경이라는 금강산, 중국의 5악을 다 합쳐도 못 미친다는 황산, 세계 최고봉인 히말라야가 다 무슨 소용이랴! 지금 이 순간 여기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 설악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있어야 비로소 우주는 의미가 있고, 우주가 있어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우주는 나의 인력(引力)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나서 외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도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 서북능선의 한계쪽 암릉과 암봉들
큰감투봉을 오른쪽에 두고 있는 바위봉우리에 올라 잠시 땀을 식힌다. 한계의 계곡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한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가리봉 정상에는 아직도 구름이 걸려 있다. 한계쪽 산기슭은 소나무와 기암절벽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한 느낌이다. 신선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에 살리라.
▲ 서북능선의 한계쪽 암릉과 계곡.
나는 왜 오늘도 산을 오르는 것일까? 땀을 흘리면서 오른 산꼭대기에서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심신단련을 위해서 산을 오른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 뿐일까? 그렇다. 산을 닮으려는 것이다. 산은 늘 변화하면서도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고, 또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면서도 늘 변화하는 묘한 변증법을 가진 존재다. 산은 결코 체력단련을 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더군다나 놀러가는 곳이 아니다. 산은 바로 마음자리 공부하러 가는 곳이다.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산을 배우러 가는 곳이다.
가파른 바윗길을 오르내린 끝에 대승령에 이른다. 여기서 흑선동 계곡과 십이선녀탕 계곡, 장수대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장수대를 향해 하산길을 서두른다. 아름드리 소나무숲을 만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곧게 뻗어 올라간 낙낙장송들에는 씩씩한 기상과 근엄한 기품이 서려 있는 듯 하다. 나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을 붉은 빛이 감도는 금강송을 바라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된다. 오랜 세월 온갖 풍상을 겪었을 늙은 소나무, 그럼에도 저토록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깨달음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물을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씻는다. 내친 김에 머리도 감는다. 시원하기 그지없다.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를 맞으면서 산길을 걷는 것도 싫지는 않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소나기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비를 맞으며 한참을 내려온 끝에 대승폭포 앞에 선다. 하얀 폭포수가 수직선을 그으며 끝없이 쏟아져 내린다. 수십길 낭떠러지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장관이다. 대승폭포의 가느다란 물줄기는 팔등신 미인의 가늘디 가는 허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는 넓고도 깊은 확이 패여 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오랜 세월 바위에 부딪쳐 저렇게 커다란 확을 파놓은 것이다. 비가 잠시 긋는다.
▲ 높이가 88m에 이르는 대승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국내 3대 폭포로 한국에서 가장 높은 폭포 가운데 하나다.
대승폭포를 떠나 장수대로 향한다. 천둥 번개가 치더니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산중이라 비를 피할 곳도 없다. 장수대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속옷까지 다 젖어 버렸다. 오늘은 무중산행(霧中山行)으로 시작해서 우중산행(雨中山行)으로 끝이 났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설악을 가슴에 담은 채 귀로에 오르다.
2004. 8.8
'명산 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대 명산 대암산 야생화 포토기행 (0) | 2006.07.26 |
---|---|
100대 명산 용문산 포토기행 (0) | 2006.07.17 |
100대 명산 남한산 포토기행 (0) | 2006.07.08 |
금봉산 포토기행 2 (0) | 2006.06.27 |
100대 명산 천마산 포토기행 (0) | 2006.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