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일요일. 공교롭게도 1950년 6.25 내전이 일어난 날 남한산을 오르기로 한다. 남한산은 오래전부터 한번 가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오르게 되었다. 예전에 군복무 시절 특전사령부에서 특수전 훈련을 받을 때 야간에 한 번 남한산을 넘은 적이 있다. 그 당시는 특수전 임무수행 훈련의 과정에 따라 캄캄한 한밤중에 남한산을 넘었던 까닭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걷기만 했던 기억만 어슴푸레 떠오를 뿐이다.
성남시 은행동에서 계곡을 따라서 나 있는 등산로로 올라 지화문(至和門, 일명 남문)과 수어장대(守禦將臺)를 거쳐 우익문(右翼門, 일명 서문)까지 가서 되돌아오기로 한다. 오늘은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된 진아님, 그만웃지님 그리고 그녀의 아들 지수군과 동행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산행은 언제나 즐겁다. 등산로 초입에는 야생화 단지를 조성해 놓았는데 그 종류가 상당히 많다.
*산수국
활짝 핀 산수국이 반갑게 맞아 주는 듯 하다. 백자색으로 피어난 산수국의 꽃이 청초한 느낌을 준다. 범의귀과의 산수국은 7~8월에 그 해에 자란 가지끝에 큰 산방화서가 달리며 털이 있다. 그 둘레에 있는 무성화는 꽃받침잎이 꽃잎같고 백홍벽색 또는 벽색이다. 양성의 꽃은 꽃받침잎이 작고 꽃잎과 함께 각각 5개이다. 산수국의 뿌리와 잎, 꽃은 팔선화라고 하여 생약재로 쓴다. 잘 안 쓰는 약재다. 유사종으로 둘레에 있는 꽃이 중성화가 아닌 양성화를 갖는 탐라산수국, 무성화의 꽃받침에 거치가 있는 꽃산수국, 제주도에서 자생하며 잎이 특히 두꺼운 떡잎산수국이 있다.
*바위취꽃
바위취꽃도 제철을 만난 듯 활짝 피어 있다. 범의귀과에 속하는 상록 여러해살이풀인 이 꽃은 한국이 원산이다. 그런데 바위취꽃은 그 모양이 좀 특이하게 생겼다. 꽃은 5~6월에 피는데 원추화서로서 짧은 홍자색의 선모가 있으며 정생(頂生)한다. 꽃잎도 5개로서 위의 3개는 길이 0.3cm정도이고 연한 홍색 바탕에 짙은 홍색 반점이 있으며, 아래쪽 열편은 백색이고 길이 1~2cm로서 반점이 없으며 대형으로 피침형이다. 잎은 근경에서 총생하고 신장형이며 가장자리에 치아상의 얕은 결각이 있다. 잎의 표면은 녹색이지만 연한 색의 무늬가 있으며 뒷면은 자줏빛이 도는 적색이다. 남쪽 지방에서는 습한 바위 표면에 붙어서 자라지만 정원에 심기도 한다. 반그늘 또는 그늘에서 잘 자라고 충분한 물이 있어야 하며, 추위에도 잘 견딘다.
바위취의 전초를 한방에서 호이초( 虎耳草)라고 한다. 호이초는 거풍청열(祛風淸熱), 양혈해독(凉血解毒)의 효능이 있어 풍진이나 습진, 중이염, 단독(丹毒), 해수토혈(咳嗽吐血), 폐옹(肺癰), 붕루(崩漏), 치질 등을 치료한다. 바위취를 갈아서 만든 즙을 백일해, 화상, 동상 등에 쓰기도 한다. 요즘에는 이런 용도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바위취의 어린 순을 쌈으로 먹기도 하며, 데쳐서 나물로 먹기도 한다. 유사종으로 참바위취가 있다.
*실폭포
야생화 단지를 지나자 작은 폭포들이 연달아 나타난다. 계곡을 이루는 산등성이에는 참나무와 밤나무같은 활엽수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활엽수들이 우거진 계곡은 숲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한결 시원하다.
*은행동 등산로 계곡
조금 더 올라가자 계곡이 바짝 말라 버렸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남한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엄청나게 많다. 남한산은 서울을 비롯해서 성남, 광주, 하남에서 가까운 산이라 그런가 보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산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복받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남한산에서 검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계곡으로 난 등산로를 다 오르자 남한산에서 검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나타난다. 남한산의 주위에 있는 검단산은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하남에 있는 산이고, 다른 하나는 성남과 광주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산이다. 산성으로 가는 길과 반대쪽으로 가면 성남과 광주의 경계를 이루는 검단산으로 갈 수 있다.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남한산성 성곽
능선길을 따라서 남문쪽으로 가다가 보면 남한산성 좌익문(左翼門, 일명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만난다. 남문으로 가는 길은 성곽의 바깥쪽으로 나 있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中部面) 산성리(山城里)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3년(673)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중요한 산성으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에다가 1624년(인조 2년)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들이 맡아서 하였다. 승려 각성(覺性)은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공사를 지휘하였다. 공사에 동원된 승려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井寺) 외에 개원사(開元寺)와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동단사(東壇寺) 등 일곱 군데의 사찰을 세웠는데 다 없어지고 현재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성의 규모를 보면 성가퀴가 1,700첩(堞)이고,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을 지어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인조 때부터 만들어진 성내의 시설은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간(間) 반, 하궐(下闕) 154간이었다. 재덕당(在德堂)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위한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옮길 우실(右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客館: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관아로는 좌승당(坐勝堂)을 비롯해서 일장각(日長閣), 수어청(守禦廳), 제승헌(制勝軒) 등을 설치했다.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과 교련관청(敎練官廳), 기패관청(旗牌官廳) 등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鐘閣), 마랑(馬廊), 뇌옥(牢獄),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溫祚王廟), 서낭당, 여단(잿단)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남한산성
산성 외곽으로 난 길을 따라서 걷다 보니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 나타난다. 남한산의 정상부를 따라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의 아래쪽으로는 산세가 몹시 가파르다. 남한산성이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겠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점점 심해지다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부터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도가 함락되고 양식마저 부족하게 되자 할 수 없이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부끄러운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지화문(至和門, 일명 남문)
평화에 이르는 문이라는 뜻을 가진 지화문(일명 남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간다. 남문의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單層) 문루(門樓)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이 문은 남한산성 네 개의 문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 성의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남문이라고 한다.
산성의 안은 남한산의 정상부에 해당한다. 남한산의 정상부는 분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남한산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와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및 하남시 학암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60m다. 해가 일찍 떠서 늦게 진다고 해서 일장산(日長山) 또는 주장산(晝長山)이라고도 부른다. 광주산맥에 해당하며 주위에 청량산과 검단산이 있다. 남한산은 천연의 요새지로 삼국시대부터 성을 쌓아 왕조를 세운 바 있다. 이곳에는 특히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한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울창한 숲과 성곽이 어우러진 멋진 산이다. 산성의 유적을 중심으로 1971년 3월 남한산성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안쪽 길
마침 점심 때도 되고 시장기도 돌아서 남문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바지락 칼국수로 점심을 먹는다. 칼국수의 맛이 시원하고 구수하다. 양도 엄청나게 많이 주어서 결국 남기고야 말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남문에서 성곽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서 수어장대로 향한다.
*남한산 중계소
한동안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한참을 오르다가 뒤돌아 보니 저 앞 봉우리에 남한산 중계소 송신탑이 보인다. 중계소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갈지(之)자의 형태로 부드럽게 뻗어 간다. 남한산의 울창한 숲은 푸른 빛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수해(樹海)다.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이어지는 성곽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성곽을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나무 그늘이 진 곳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도시생활에 찌들린 현대인들에게 남한산처럼 좋은 휴식처가 어디 있으랴. 숲이 우거지고 계곡이 깊으며 거기다 산성을 비롯한 문화유적까지 많이 있으니.
*수어장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지나 수어장대에 이른다. 수어장대는 남한산 서쪽 주봉인 일장산(일명 청량산, 해발 453m) 정상에 세워진 성곽시설물로 조선 인조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이다. 이 곳에서는 성내와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서울은 물론 멀리는 부천,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확인은 못 해봤다. 수어장대는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조된 2층 누각이다. 축조당시에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불렸으나 영조27년(1751) 2층으로 증축하고 나서 외부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 좌, 중, 우, 후의 5영(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수어장대) 하나만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八作)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板門)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겨우 47일간 버티다가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하고 말았다.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지만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 셈이다. 무망루라는 이름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굴욕과, 인조의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뒤 북벌을 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은 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영조와 정조는 효종능인 여주 영능을 다녀오는 길에 이 곳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과 한을 되새겼다고 전한다.
*매바위
수어장대 왼쪽 모서리에는 응암(鷹巖, 일명 매바위)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이회(李晦) 장군은 남한산성 동남쪽 축조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지형과 지세가 험악해서 공사를 기일 안에 마치지 못 한데다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모함을 받고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회는 참수형에 처해지기 전 형장에서 구차스러운 변명을 하지 않고 다만 '모든 일은 사필귀정이니 내가 죽는 순간 매 한마리가 날아오리라. 매가 날아오지 않으면 내 죄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내 죄 없느니라.'는 예언을 하였다. 그런데 정말 그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하늘에서 매 한 마리가 내려와 이회를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매가 앉았던 자리에 가보니 바위 위에 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회가 참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 송씨와 소실은 한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위 위를 살펴보니 매의 발자국처럼 생긴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이지수 군
초등학교 3학년인 지수가 매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른다. 활짝 웃는 지수의 표정이 귀엽기만 하다. 이회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바위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지수는 호기심이 아주 많은 아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야생화와 약초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물어와서 애를 먹어야만 했다.
*청량당(淸凉堂)
수어장대 서쪽 바로 옆에는 청량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한식 목조 단층 기와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인데 좌우측 칸은 각각 격자 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았으며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하였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부분을 책임지고 공사하다가 공사 경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참수형을 당한 이회와, 그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소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이회가 사형을 당한 뒤 공사비 횡령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조사 결과 그가 한 공사는 모두 충실하게 축조되었고 공사비를 황령한 사실도 없음이 밝혀지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라도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청량당에는 이 성을 쌓을 때 팔도 도청섭으로 서북쪽 축성의 책임을 맡았던 벽암 각성대사도 합사하고 있다.
*우익문(右翼門, 일명 서문)
수어장대를 나와 북문쪽으로 성곽을 따라가다가 보면 서문이 나온다. 서문은 산성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는데, 정조 3년(1799)에 개축한 뒤부터 우익문이라 이름하였다. 서문 밖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를 수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의 연주봉옹성은 저녁 노을과 서울 강남의 야경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서문은 그 규모면에서 남문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실제로 서문은 4대문 중 제일 작은 문이다. 성문의 크기도 폭 1.46m, 높이 2.1m로 협소하다. 청나라 군사가 송파의 진터벌에 진을 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서문의 크기를 큰 암문 수준의 작은 문으로 만든 것이다.
*서문 입구에서
서문을 통해서 성밖으로 나온다. 성안으로 들어갈 때 냈던 입장료는 성밖으로 나올 때 되돌려 받게 되어 있다. 서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는다. 그리고나서 전망이 가장 좋다는 연주봉옹성으로 향한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의 강남과 강북, 그리고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주봉 옹성에서 내려다 본 송파구 거여동
연주봉옹성에서 송파구 거여동은 바로 아래 빤히 내려다 보인다. 거여동은 내가 청년장교 시절에 공수 훈련과 특수전 훈련을 받았던 특전사령부가 있던 곳인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있다면 연병장이 있는 건물들 중 하나일 것이다. 특수전 훈련과정 중에 '도피 및 탈출'이라는 것이 있다. 야간에 실시되는 훈련이었는데, 훈련목적은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장거리 도보이동을 통해서 부대로 귀환하는 것이다. 그 훈련을 받을 당시 내가 속한 부대는 한밤중에 특전사령부를 출발해서 바로 아래 보이는 계곡이나 능선길을 타고 서문쪽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리고 남문을 거쳐 검단산으로 해서 광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수 훈련 4주, 특수전 훈련 8주 도합 12주일 동안 내가 훈련받았던 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감회가 새롭다. 아, 옛날이여.....
*연주봉 옹성에 바라본 한강과 서울의 강남, 강북. 멀리 희미하게 타워가 보이는 산이 남산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 강남북의 시가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남산 타워도 희미하게 보인다. 서울의 하늘은 흡사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다. 매연으로 인한 대기오염이 심각한 고층건물들의 밀림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참 용하게 느껴진다. 나라면 단 며칠도 견디지 못 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소나무가 문득 떠오른다. 송충이가 바글바글 달라 붙어서 솔잎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갉아 먹어버려 결국은 말라죽고 만 소나무..... 서울 시가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왜 엉뚱하게도 송충이를 떠올리는 것일까?
*연주봉옹성에서 바라본 북한산
한강수 건너 북한산도 희미하게 보인다. 백운대와 인수봉도 어렴풋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는 전에 북한산과 도봉산을 각각 한번씩 올라 본 적이 있다. 바위경치와 계곡미가 뛰어난 두 산 모두 가히 명산이라고 일컬을 만한 산들이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 있는 산들은 거의 다 명산인 것 같다.
*연주봉옹성에서 바라본 관악산
이번에는 서쪽으로 눈을 돌려 관악산을 바라본다. 전에 한 번 과천에서 육봉능선을 타고 관악산을 오른 적이 있다. 관악산도 매우 넓고 큰 산으로 명산이라고 할 수 있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바위능선과 그 사이사이에 있는 계곡이 아름다운 산이다. 연주봉옹성은 말 그대로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아마도 남한산 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연주봉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겠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한가로이 흘러가고...... 문득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남한산성 성밖으로 난 길
올라야 할 때가 있으면 내려가야 할 때가 있는 법. 이제는 남한산을 떠나야 할 때다. 서문에서 남문까지 남한산성 성곽 밖으로 난 길을 따라서 가기로 한다. 성밖길은 수많은 풀들과 야생화들이 자라고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성안길과는 또 다른 멋이 있는 길이다.
*까치수염꽃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까치수염이다. 꽃대의 밑에서부터 차례로 작고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까치수영, 꽃꼬리풀이라고도 하는 까치수염은 앵초과의 여러해살이 초본으로 한국이 원산지다. 6~8월에 지름 0.7~1.2cm의 흰꽃이 줄기 꼭대기에서 꼬리처럼 옆으로 굽은 총상화서에 촘촘히 모여서 핀다. 꽃잎은 좁고 긴 타원형이다. 어린 순을 생으로 먹거나 나물로 먹을 수 있다. 까치수영과 큰까치수영의 전초를 한방에서 낭미파화(狼尾巴花)라고 하는데, 산어조경(散瘀調經), 청열소종(淸熱消腫)의 효능이 있어 월경불순, 월경통, 열감기, 인후종통, 화농성 유선염, 타박상, 염좌 등을 치료한다. 한의사들은 거의 쓰지 않는 약재다.
*지느러미엉겅퀴
어디서나 잘 자라는 지느러미엉겅퀴도 꽃을 피우고 있다. 줄기의 양쪽에 화살의 날개처럼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지느러미가 달려 있다. 그래서 지느러미엉겅퀴라고 부른다. 조뱅이, 엉겅퀴와 마찬가지로 이 꽃도 국화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이다. 어린 순은 나물로 식용하기도 하며, 연한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고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다. 지느러미엉겅퀴 전초를 말린 것도 대계다. 효능도 엉겅퀴와 거의 비슷하다. 관절염 치료에 쓰기도 한다.
*큰뱀무꽃과 열매
노란색의 큰뱀무꽃은 남문과 서문에 이르는 길가에서도 많이 보았는데, 성밖에도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큰뱀무는 6~7월에 황색꽃이 줄기나 가지끝에서 취산화서로 피어난다. 열매는 타원형으로 생긴 수과로 황갈색털이 밀생하고 꼭대기에 갈고리모양의 암술대가 달려 7~8월에 익는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기도 한다. 큰뱀무는 뱀무와 비슷하지만 소화경에 퍼진 털이 있고 과탁의 털이 짧은 것이 다르다. 뿌리를 포함한 전초를 한방에서 오기조양초(五氣朝陽草)라고 하는데 거풍제습(祛風除濕), 활혈소종(活血消腫)의 효능이 있어 민간에서 요퇴비통(腰腿痺痛), 이질, 붕루(崩漏), 백대(白帶), 타박상, 옹종창양(癰腫瘡瘍), 인통(咽痛), 나력, 소아경풍(小兒驚風), 급성유선염(急性乳腺炎)을 치료하는데 쓰기도 한다. 한의사들은 거의 쓰지 않는 한약재다.
*꿩의다리꽃
꿩의다리 한 포기도 하얀꽃을 활짝 피웠다. 하얀색의 실이 방사상으로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꽃이 특이하다. 꿩의다리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이른 봄에 어린 순과 줄기를 데쳐 나물로 먹기도 한다.
*산사
꽃이 진 산사나무에는 열매들이 조발조발 달려 있다. 아가위나무 또는 아그배나무라고도 하는 산사나무는 장미과의 낙엽활엽소교목이다. 한국이 원산지로 꽃과 열매가 아름다워 정원수나 공원수로 적합하다. 신맛이 나는 열매를 이용하여 떡이나 술, 정과 등 별미의 음식을 만들기도 한다. 산사의 꽃은 잎이 나고 나서 4~5월에 백색 또는 담홍색으로 핀다. 꽃은 산방화서로 털이 있고 꽃잎은 둥글며 꽃밥은 홍색이다. 배꽃같은 작은 꽃이 몇 송이씩 뭉쳐서 핀다. 열매는 이과(梨果)로 둥글고 백색 반점이 있는데, 9~10월에 빨간색이나 노란색으로 익는다. 조발조발 달린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꽃 못지 않게 아름답다. 근연종으로 잎이 크고 얕게 갈라지는 넓은잎산사, 잎과 화경 및 화서에 털이 있고 잎의 열편이 좁은 좁은잎산사, 잎이 깊게 갈라져 거의 완전한 우상복엽인 가새잎산사, 잎 뒷면과 소화경에 밀모가 있는 털산사, 잎이 갈라지지 않는 자작잎산사, 그리고 이노리나무가 있다.
산사나무나 산리홍(山里紅), 야산사의 과실을 한방에서 산사라고 하는데 소화를 도와주고 어혈을 풀어주는 효능이 있어 고기먹고 체한 증, 징가, 담음(痰飮), 신물이 넘어오는 증, 장풍하리(腸風下痢), 요통, 산기(疝氣), 산후어혈, 오로(惡露), 어린아이가 젖이나 음식을 먹고 체한 증 등을 치료한다. 피를 잘 돌게 하고 음식을 잘 내려가게 해 주는 장기가 있어 임상에서 매우 많이 활용되는 한약재다. 나도 산사를 많이 쓰고 있다.
*기린초꽃
성곽의 돌틈바구니에는 노오란 기린초꽃이 피어 있다. 기린초도 어디서나 잘 자라는 식물이다. 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기린초는 6~7월에 원줄기 끝에서 산방상 취산화서로 노란색 꽃이 핀다. 근연종으로 섬기린초와 가는기린초, 속리기린초가 있다. 관상가치가 높아 바위틈이나 화단에 많이 심는다. 기린초의 어린 순을 살짝 데치면 담백한 나물이 된다. 기린초와 속리기린초 전초를 말린 것을 한방에서 백삼칠(白三七) 또는 비채(費菜)라고 하는데 활혈해독(活血解毒), 이습소종(利濕消腫), 지혈(止血), 영심(寧心)의 효능이 있어 타박상이나 각종 출혈증, 심계(心悸), 옹종(癰腫) 등을 치료한다. 한방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가는장대꽃
무성한 풀숲 사이에 십자화과의 두해살이풀인 가는장대꽃이 연한 홍자색으로 활짝 피어 있다. 가는장대는 한국이 원산지로 산기슭의 햇볕이 잘 비치는 경사면이나 해안에서 자란다. 어린 순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배추과의 꽃은 보통 흰색 또는 황색이지만 가는장대는 홍자색이므로 구별하기가 비교적 쉬운 편이다.
*개망초꽃
남문에서 가까운 곳에 작고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꽃 군락지가 나타난다. 개망초는 봄부터 피기 시작해서 여름, 가을까지 피는 꽃이다. 한번 터를 잡으면 그 일대가 온통 개망초밭으로 변해버려 농민들에게는 환영을 못 받는 식물이다. 국화과에 속하는 개망초는 어린 순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생나물은 냄새가 역하므로 살짝 데쳐서 갖은 양념을 하면 의외로 맛이 좋다.
*개망초 꽃밭에서.
왼쪽부터 진아님과 그만웃지님
진아, 그만웃지 두 여인이 개망초꽃밭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다.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있는 두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순간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이 장면..... 영원한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생길은 일회성 편도다.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성밖길에서 내려다 본 남문
남문을 바로 앞에 두고 경사가 꽤 가파른 비탈길이 나타난다. 금새 비탈길을 내려가 남문에 이른다. 남문에는 늦게 합류한 초롱이님이 기다리고 있다. 남문에서 돌탑공원으로 내려가는 길로 하산하기로 한다. 해는 어느덧 서산에 기울고 있다. 남한산을 찾았던 사람들도 줄을 지어 산을 내려간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아늑한 보금자리를 찾아서.....
*성남시 전경
숲이 우거진 능선길을 내려오다가 성남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성남시는 남한산의 넉넉한 품에 자리잡은 도시다. 남한산에서 뻗어내려간 산줄기들이 성남시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돌탑공원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돌탑공원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흙길이어서 좋다. 흙을 밟을 때마다 신발바닥을 통해서 폭신한 느낌이 전해진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도 좋겠다. 등산로 양쪽으로는 나무로 말뚝을 치고 줄을 매어놓아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 하도록 하였다.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작은 암자를 지나면서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시작된다. 돌탑공원에 이르러 산행을 끝마친다. 탑을 쌓는 것은 마음속에 원을 세우는 것이다.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나하나 돌을 쌓는 과정은 그 자체가 기도의 과정이다. 얼마나 절실한 소망이 있었기에 저렇게 많은 돌탑을 쌓았던 것일까? 돌탑을 쌓은 이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나는 평화로운 세계와 만인의 행복을 기원한다. 지구상에서 전쟁이 사라졌으면 좋겠고, 모든 인류가 온갖 종류의 결핍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왔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나는 산에 오르면 정상에 서서 천지신명에게 '세계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비나이다.' 하고 기도를 하곤 한다. 나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바라는 것이 없기에.....
세계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귀로에 오르다.
2006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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