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1년 백두대간을 홀로 순례할 때 댓재에서 두타산에 오른 다음 청옥산, 고적대를 넘어서 갈미봉의 전망 좋은 바위에서 바라본 무릉계(武陵溪)..... 안개가 걷히면서 신기루처럼 나타난 무릉계의 선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었다. 전망대 바위를 떠나면서 훗날 꼭 다시 무릉계를 찾으리라 다짐했었는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무릉계를 찾아서 동해시 삼화동으로 들어선다.
*동해시 삼화동에서 바라본 두타산
눈이 하얗게 쌓인 백두대간 두타산이 저만치 바라다보인다. 두타산 산마루 위에 회색구름이 넘어가고 있다. 오늘 강원도 산간지방에 폭설주의보가 내렸다는데..... 아직 눈은 내리지 않고 바람만 강하게 불어온다.
*무릉계 초입의 무릉반석과 소
*무릉반석에 있는 금란정
무릉계곡은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계곡으로 산과 물,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경치가 절경을 이루어 일명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두타산(頭陀山, 1,352.7m)과 청옥산(靑玉山, 1,403.7m), 망군대(1,247m), 고적대(高積臺, 1,353.9m), 갈미봉(1,260m) 등 고봉준령들 사이로 흘러내린 깊은 계곡이 바로 무릉계다. 무릉계 일대에는 태암(胎巖)을 비롯해서 미륵암(彌勒巖), 반학대(半鶴臺), 능암(能巖), 쌍현암(雙峴巖), 학소대(鶴巢臺), 번개바위, 여우바위, 베틀바위, 거북바위, 장군바위, 병풍바위, 사랑바위, 금강산바위 등의 기암괴석과 중대폭포, 산폭포, 관음폭포, 쌍폭, 용추폭포, 산성12폭, 박달폭포, 칠성폭포 등의 폭포, 두타산성(頭陀山城), 오십정(五十井) 등 비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두타(頭陀)와 청옥(靑玉)..... 두타란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 즉 스님을 의미하고, 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세계의 칠보 중 하나다. 무릉계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별천지이자 이상향(理想鄕)인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유래한다. 도화원기의 배경은 중국의 호남성 무릉현 동정호(洞庭湖)의 서남쪽을 병풍처럼 가로지르는 무릉산(武陵山) 기슭의 원강(元江) 강변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절경은 무릉도원과 같은 선경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또는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金孝元)이 지은 것이라고 전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무릉계는 계곡 하류의 바위절벽 아래 깊은 소를 이루고 있는 호암소(虎巖沼)로부터 시작된다. 호암소에는 전설이..... 아주 먼 옛날 도술이 뛰어난 삼화사의 고승이 어느날 깊은 밤중에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가 길을 막고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고승은 도술을 부려 폭이 10m나 되는 북쪽 절벽바위에서 남쪽 절벽바위로 훌쩍 뛰어넘었다. 호랑이도 고승을 뒤따라 뛰어넘다가 그만 바위절벽 밑의 소로 떨어져 빠져죽었다는 이야기..... 그런 일이 있은 뒤 삼척부사 김효원은 이곳에 호암소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남쪽 암벽에는 호암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반석교를 건너 무릉계 초입에서 만난 무릉반석..... 무릉계가 헛된 이름이 아님을 알겠다. 계곡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 반석은 수백 명이 앉고도 남을 만큼 널찍하다. 반석의 위로는 맑디 맑은 옥계수가 흐른다. 반석에서 물이 떨어지는 곳은 멀리서 보아도 비취색이 도는 소를 이루고 있다. 명승지에는 영웅호걸과 시인묵객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라. 반석 곳곳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의 이름이 수없이 보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이승휴는 정삼품의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객안당(客安堂)을 지은 뒤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썼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속에 묻혀 지내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매월당 김시습도 이곳에 들어와 글을 남겼다. 길가 커다란 바위에는 조선 4대 명필 가운데 한사람인 봉래 양사언의 한시가 음각되어 있다. 원래 이 글씨는 무릉반석에 있던 것인데 수해로 인해 심하게 파손되어 1995년에 이를 본뜬 석각을 금란정 옆에 세워놓은 것이다.
武陵仙源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
中台泉石 너른 암반 샘솟는 바위
頭陀洞天 번뇌조차 사라진 골짝
무릉반석이 잘 보이는 곳에는 금란정(金蘭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금란정은 이 지역 유림들의 모임인 금란계(金蘭契)의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다.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제에 의해 향교가 폐교되자 삼척지방의 유림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금란계를 결성하고 슬픔과 울분을 달래며 금란정을 세우려고 했으나 일본 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2년 뒤인 1947년 금란계원들과 후손들은 마침내 성금을 모아 이원동 단봉 석경지에 금란정을 세웠다. 그후 1958년에 다시 지금의 이 자리로 옮겼다. 금란계원은 결성 당시 초대 계수 홍재문(洪在文)을 비롯하여 38명이었는데, 그 명단이 금란정에 걸려 있으며 무릉반석에도 새겨져 있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 되면 계원들은 금란정에 모여 시회를 열고 있다. 금란계는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도 하는데, 두 사람의 마음이 합쳐지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는 데서 유래하는 말로 지극히 친밀한 사귐을 이른다. 나에게도 금란지교의 벗이 있던가?
*삼화사 일주문
삼화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에는 '두타산삼화사(頭陀山三和寺)'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씨는 오대산에 주석하였던 근세의 선승 탄허(呑虛, 1913~1983) 대선사의 친필이다. 오로지 일심으로 번뇌를 씻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마음으로 일주문을 지난다.
삼화사는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옛날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 하였다. 읍지(邑誌)에는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년)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고 적혀 있다. 다른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 중(仲), 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였다. 조선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 이곳은 지금의 삼화사, 지상사, 영은사다. 또,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왔는데 그 용이 변하여 바위로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약사삼불의 손은 외적(外賊)이 잘라 땅 속에 묻었다.'고 전한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문에는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있었는데 거느린 무리가 매우 많았다. 여기에 모여서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옛날 제후가 회맹하던 것과 같았다. 오랜 뒤에 헤어져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삼공 (三公)이라 하였다. 뒷날 사굴산의 범일국사가 이곳에 와서 절을 세우고 삼공이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부처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 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1393년 조선 태조는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한 것은 고려를 세운지 20년(937)만의 일이다.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가족과 재산을 잃은 후삼국 유민들의 슬픔과 불만을 달래기 위해 왕건은 개태사를 비롯한 전국의 사찰에서 천도제를 여는 등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삼화사도 왕건의 민심위무를 위한 근거사찰 중 하나였다. 당시 삼화사는 영동지방 최대의 사찰이었다. 그후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어 전소되고 약사전만 남아 있던 곳에 현종 1년(1660년) 삼화사를 중건하였고, 순조 23년(1823년)과 고종 43년(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재난으로 소실된 것을 중건했다. 그러다가 삼화사가 쌍용양회 채광권내에 편입됨으로써 1979년 8월 옛날 중대사가 있던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화사 천왕문
해탈교(일명 삼화교)를 건너 맨 처음 만나는 당우는 삼화사 담장 밖에 세워진 무문전(無聞殿)이다. 무문전은 동해불교대학과 도서관이다. 무문이나 무설(無說)이란 법이나 경전을 설하거나 듣고 배운다는 뜻이지만, 곧 설해지는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삼화사 앞에는 수령이 천살이 넘는다는 엄청나게 큰 느티나무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 안으로 적광전과 삼층석탑이 들여다 보인다. 사천왕님이 사바세계의 중생인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빌면서 천왕문으로 들어간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상 대신 사천왕 탱화를 안치하고 있다.
절마당에는 세월의 흔적이 두텁게 내려앉은 삼층석탑(보물 제 1277호)이 이끼가 낀 채 앉아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석탑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로 일컬어질 만큼 탑이 많다. 이렇게 탑이 많은 것은 조탑공덕의 신앙에 의한 것이다. '조탑공덕경'에 '탑을 조성하면 무한한 공덕을 쌓는다.'고 하였다. 적광전(寂光殿) 오른쪽에는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하늘세상)중생을 구원한다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인 지장보살(地藏菩薩)상이 서 있다. 적광전 처마에는 '동해불교대학 제3회 졸업식'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삼화사 적광전과 지장보살상, 삼층석탑
적광전은 삼화사의 본전(本殿)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이 화려하다. 적광전 안에는 철조노사나불(鐵造盧舍那佛, 보물 제1292호)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 위로는 화려한 닫집이 조성되어 있고 밖의 네군데 추녀모서리는 공포를 돌출시켜 연꽃이 환하게 피어난 듯한 느낌이 든다. 삼신불(三身佛) 중 노사나불은 원만보신보사나불로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이 갖추어진 이상적인 부처다. 또 영원불변의 진리를 몸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화신불(化身佛)을 이르는 말이다. 노사나불은 고타마 싯다르타 생존시에는 없던 것으로로 대승불교 특히 선종사찰로 화엄을 중시하는 종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으로, 진리의 빛이 가득한 적정의 세계라는 뜻이다.
적광전의 옆벽과 뒷벽에는 도를 깨우쳐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적광전 현판과 자장율사의 불탑게인 주련(柱聯)의 글씨 네 줄도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南無大方廣佛華嚴經 나무대방광불화엄경
南無實相妙法蓮華經 나무실상묘법연화경
萬代輪王三界主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여.................
雙林示滅幾千秋 사라쌍수 열반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眞身舍利今猶在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普使群生禮不休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지 않게 하리..
지장보살상 오른쪽에 있는 당우는 약사전(藥師殿)이다. 주존(主尊)인 약사여래는 동방의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교주로 머물고 있는 부처로 모든 중생을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를 말한다. 경전에서는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약사불은 과거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을 세웠다. 삼화사에는 오래 전부터 약사삼불(藥師三佛)의 개창설화가 전해온다. 약사불은 중생의 병고를 위하여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 협시보살로 삼고 있다. 약사전은 약사불의 화불(化佛)인 천불을 안치해 천불전(千佛殿)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적광전과 천왕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육화료(六和寮)와 범종각(梵鐘閣), 왼쪽에는 심검당(尋劍堂)과 극락전(極樂殿), 칠성당(七星堂), 무향각(無香閣)이 자리잡고 있다. 육화료는 삼화사의 요사채이자 종무소이다. 육화(六和)라는 말은 불교의 공동체 생활인 육화경법(六和敬法)에서 온 말로 송나라 고승 목암(睦庵)의 조정사원(祖庭事苑)에 의하면, '身和共住(혼자만 편히 살지 말고 함께 머물 것), 口和無諍(입씨름이나 언쟁을 삼갈 것), 意和同事(뜻의 화합을 위해 남의 의견을 존중할 것), 戒和同修(계로써 화합하여 함께 규율을 지킬 것), 見和同解(모든 대중이 견해를 같이 할 것), 利和同均(이익이 있으면 모두 함께 고루 나눌 것)' 등 여섯 가지로 되어 있다.
범종각은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1980년 주조한 무게 5백관의 범종이 있다. 범종은 불전사물(범종, 운판, 목어, 홍고) 중의 하나이다. 타종은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 한다.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뜻에서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 타종하는데 그것은 각각 28계(界)와 33천(天)을 의미한다. '청정한 불사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란 뜻을 가진 범종은 지옥의 중생과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서도 울린다. 종각의 주련은 종을 칠 때 외우는 종송(鐘頌)이다.
願此鐘聲遍法界 원컨데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산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다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 여의고 도산지옥도 허물어
一切衆生成正覺 모든 중생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소서..........
심검당은 스님들과 대중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다. 심검(尋劍)이란 검을 찾는다는 뜻으로 검은 무명(無明)을 자르는 지혜의 검을 의미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지혜의 검으로 무명을 자르고 해탈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심검당이란 이름을 붙였으리라. 칠성당은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민속신앙을 수용한 것이다. 이를 습합(習合)이라고 하며 칠성이나 산신 등은 그에 해당한다. 칠성탱화의 본존은 치성광여래이고,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협시보살이다. 오른쪽 독성탱화는 나반존자, 왼쪽의 산신은 복건을 쓴 모습으로 유교적이지만 도교의 파초선과 불교의 경전을 함께 들고 있다.
극락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 정토종(淨土宗)의 중심을 이루는 부처로 수행 중에 중생제도의 대원을 세웠고, 스스로 성불할 수 없는 사람도 성심으로 염불을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아(阿)'란 '없다(無)', '미타'는 '수명'의 뜻으로 '아미타불'은 곧 '수명의 다함이 없는 부처'란 뜻이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에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서방정토의 극락이 있는 서쪽을 향해서 예배할 수 있도록 동향으로 지어진 당우이다. 아미타불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져 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南無)'란 '귀의한다'는 뜻이니 곧 중생들이 성불(成佛)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삼화사 무향각
삼화사 경내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나면 천왕문 옆에 있는 무향각을 만난다. 무향각에서는 불교서적과 불구(佛具), 그리고 전통차를 판매하고 있다. 이름과는 달리 무향각에는 차의 향기가 가득 배어 있다. 나의 냄새가 없어야(無香) 남의 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음인가! 법구경에 '향기는 역풍을 이기지 못하고 부용도 백단향의 내음도 그러하다. 가르침에 따라가는 사람의 향기는 순풍이나 역풍을 넘어서 언제나 향기롭다.'라고 했다. 향이 없는 듯 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향을 가진 존재..... 무향각 지붕 너머로 흰눈을 머리에 인 두타산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무향각을 나와 서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두타선원((頭陀禪院)과 비로전(毘盧殿),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두타선원은 천왕문을 지나 두타산 등산로 오른쪽에 있는 전각으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 'Dhuta(버리다, 씻다, 닦다)의 음역(音譯)으로 집착과 번뇌를 끊어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삼화사는 그런 두타의 품에 안겨 있으니..... 두타선원은 선종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문 소속이었다. 선원 앞에 서자 문득 천년 세월을 지나온 선(禪)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선원은 통일신라 말 선종(禪宗)의 전래로 설치되기 시작해서 승려양성과 수행기관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는데, 고타마 싯다르타 당시의 비구(比丘)들이 탁발(托鉢)을 다니다가 우기가 되면 작은 벌레나 초목들을 밟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외출을 금하고 한 곳에 머물며 안거(安居)한 것에서 연유한다.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의 하안거(夏安居), 10월 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의 동안거(冬安居)에는 스님들이 선원에 모여 좌선(坐禪)을 하거나 경론(經論)과 교리(敎理)를 연구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하안거만을 정법(正法)이라 하여 법랍(法臘, 승려의 나이)은 하안거를 지낸 횟수로써만 인정하고 있다.
조사전은 창건 공덕주(功德主)나 고승, 역대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는 전각이다. 비로전 왼쪽의 동향 당우로 현판 없이 아담한 모습으로 천년고찰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으며, 노스님들이 거처하고 있다. 비로전(毘盧殿)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신 전각이다. 비로자나(毘盧遮那)는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하는 부처다. 화엄종 사찰에서 본전에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경우 적광전이라고 하며 주불전(主佛殿)이 아닐 경우 비로전이라 한다.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연화장 세계는 장엄하고 진리의 빛이 가득한 곳이라고 하는데...... 비로전은 삼화사 경내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학소대
삼화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울창한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절벽의 절경이 숨을 막히게 한다. 학소대는 삼화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바위절벽 아래로 맑은 물이 폭포수로 떨어진다.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바위벼랑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마치 한폭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그야말로 바위와 물, 소나무 그리고 세월이 빚어낸 위대한 자연의 예술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소대에는 옛날 한 도인이 자신의 도력을 시험해 보려고 종이학을 접어서 날렸더니, 그 종이학이 살아서 청옥산까지 날아갔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관음폭포
학소대를 지나 옥류동(玉流洞)과 관음암(觀音庵) 삼거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관음폭포가 있다. 폭포를 보려면 길에서 오른쪽으로 오십 미터쯤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언뜻 보아도 6단은 됨직한 관음폭포는 층을 이룬 기암절벽 위로 옥구슬같은 물이 떨어진다. 여름철에는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겠다. 관음암은 바로 이 폭포의 상류 계곡에 있다.
*거제사 옛터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옥류동이다. 두타산성을 거쳐서 두타산으로 오르려면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두타산의 북쪽 중턱에 위치한 두타산성은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태종14년(1414)에 부사 김맹균이 허물어진 성을 보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몽고 침략 때 그의 외향인 삼척의 두타산성으로 피신했다고 전한다. 둘레 약 4.2km의 타원형으로 축성된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나 현재는 석축만이 남아 있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바위벼랑 위로 난 옛길로 가면 거제사(巨濟寺, 일명 거지터)터를 만난다. 옥류동 물가 산기슭에 들어앉은 거제사 옛터에는 암자는 간 곳 없고 참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몇 기의 돌탑만이 세워져 있다. 거제사 옛터를 바라보면서 우주 삼라만상에 결코 상주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우주라는 시공간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해가는 존재다. 언젠가는 태양도 지구도 달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장구한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사람의 일생은 눈 한번 깜짝거리는 순간보다도 짧은 시간을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서 저 거제사 옛터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인생의 덧없음이여.....
*옥류동
거제사 옛터에서 몇 걸음 내려서면 옥류동이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 아래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계곡 바닥의 기암괴석들 사이로 흐른다. 절벽에 붙어서 자라는 소나무들은 운치를 더해주고..... 소나무의 그림자를 담은 소의 물이 서늘한 비취색을 띠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더러움도 깨끗이 빨아줄 것만 같은 옥류에 내 마음에 덕지덕지 내려앉은 때를 씻는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바위들을 징검다리삼아 옥류동을 건넌다.
*문간재 삼거리 이정표
문간재(門間峙) 삼거리는 피마름골과 박달골이 옥류동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여기서 왼쪽 길로 곧장 가면 장군바위와 병풍바위, 선녀탕, 쌍폭, 용추폭포가 나온다. 또 박달골을 타고 백두대간의 박달령에 올라선 다음 두타산이나 청옥산으로 오를 수 있다. 오른쪽으로 계곡에 가로놓인 다리를 건너면 문간재를 넘어서 학등을 타고 청옥산으로 바로 오르거나, 바른골을 따라 사원터를 경유해서 백두대간 연칠성령에 올라선 다음 청옥산으로 갈 수도 있고 망군대를 거쳐 고적대에 오를 수 있다. 문간재 입구에서 피마름골 건너 하늘문을 올라 하늘재를 넘으면 관음암으로 해서 삼화사로 내려갈 수 있다.
*장군바위
*장군바위 폭포와 소
*병풍바위
먼저 쌍폭과 용추폭포를 보기로 한다. 왼쪽길로 오르는 초입에 장군바위가 위압적으로 솟아 있다. 수십 길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장군바위 밑에는 3단 폭포가 있고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깊은 소가 있다. 장군바위 바로 위로 보이는 수직암벽은 병풍바위다. 계곡을 오를수록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 점점 더 황홀한 선경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선녀탕과 쌍폭, 용추폭포로 가는 구름다리
*선녀탕
병풍바위를 지나 박달령과 용추폭포 삼거리에 이른다. 쌍폭과 용추폭포를 보려면 선녀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한다. 바위절벽 아래로 깊은 소를 이루고 있는 선녀탕의 맑고 푸르른 물이 가슴까지 서늘하게 한다. 명경지수란 바로 이런 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선녀탕.....
*쌍폭
선녀탕 구름다리를 건너서 몇 발자욱만 가면 쌍폭(雙瀑)이다. 검으스름한 바위벽돌로 계단을 쌓아놓은 듯한 쌍폭포에서 두 물줄기가 마주 보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떨어진다. 쌍폭은 무릉반석, 용추폭포와 더불어 무릉계 3대 명승지로 꼽힌다. 발밑의 절벽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시퍼런 물을 담고 있다. 두타산에서 발원한 박달골에 통수골과 소등골, 작은박달골이 합류하여 왼쪽의 폭포로 떨어진다. 오른쪽의 폭포는 바로 위에 있는 용추폭포에서 물이 흘러온다. 쌍폭의 폭포수는 바로 밑에 있는 선녀탕으로 흘러내린다. 청옥산에서 뻗어내린 학등을 중심으로 왼쪽의 박달골과 오른쪽의 바른골이 여기서 만나 비로소 무릉계가 된다. 두 물줄기가 쌍폭에서 만나 한몸을 이루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음양의 조화인가!
*용추 하단폭포
쌍폭의 청아한 물소리를 뒤로 하고 용추폭포로 향한다. 쌍폭에서 백여 미터 정도 오르면 무릉계의 백미 용추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청옥산 학등 끝자락의 까마득한 바위절벽과 신선봉 절벽이 삼단으로 된 용추폭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화강암 절벽 사이에 자리잡은 삼단폭포에서 담(潭)으로 연달아 수직암벽을 타고 옥류가 쏟아져 내리는 용추폭포의 장관에 넋을 잃는다. 무릉도원의 선경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쌍폭이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폭포라면 용추폭포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폭포다. 청옥산에서 발원하는 바른골에 빈당골, 물방아골 등 작은 골이 합류하여 흐르는 옥류는 그 끝에서 용추폭포로 떨어진 뒤, 이어서 바로 아래에 있는 쌍폭으로 흘러내린다.
용추폭포의 상중하 삼담은 항아리 모양으로 깊게 패여 있다. 오랜 세월 떨어진 물이 바위를 뚫어서 파놓은 확.......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을까? 상담과 중담은 물빛이 비취색을 띠고 있는 반면 하담의 수심은 상당히 깊어서 검푸르게 보인다. 하담 바위절벽에는 조선 정조 때의 삼척부사 유한전이 썼다는 용추(龍湫)라는 글씨가 그의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다. 폭포 앞 바위에도 '별유천지(別有天地)'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동석(動石)이라는 움직이는 돌이 있다.
용추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과연 듣던 대로 천하의 절경이다. 용이 꿈틀거리면서 날아오르는 듯하다고 해서 용추라는 이름이 붙은 폭포..... 용추를 보지 않고 어찌 무릉계를 보았다고 하리오! 내 전국각지의 여러 폭포를 보았지만 무릉계 용추만큼 아름다운 폭포는 아직 보지 못했다.
*용추폭포 바위절벽
*용추폭포에서 바라본 무릉계 건너편의 기암절벽
머리 위로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이 아찔한 느낌을 주고..... 무릉계 건너편으로 기암절벽의 바위봉우리가 마치 한폭의 동양화처럼 선경으로 다가온다. 마치 금강산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무릉계는 복사꽃이 필 무렵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우리라. 이 다음에 복사꽃이 피어나는 봄철에 다시 무릉계를 찾아오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용추폭포를 내려간다.
*문간재
문간재 삼거리로 도로 내려와 옥류동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산기슭에 올라서면 문간재와 하늘문 삼거리가 나온다. 신선봉으로 오르려면 문간재로 가야 한다. 철계단길을 오르면서 무릉계와 기암절벽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신선봉 안부 문간재에 올라서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반겨준다. 문간재를 넘어서 학등을 타고 백두대간 청옥산으로 오르거나, 바른골을 따라 백두대간 연칠성령에 올라선 다음 청옥산으로 갈 수도 있고, 망군대를 거쳐 고적대에 오를 수도 있다.
*신선봉 정상
신선봉에 오르자 전망이 탁 트이면서 무릉계의 환상적인 비경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눈덮힌 백두대간이 두타산에서 청옥산을 지나 망군대를 향해서 장엄하게 뻗어간다. 선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경치다. 달 밝은 밤이면 신선들이 내려와 놀다 갈 것만 같은 신선봉..... 신선봉이란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니다. 무릉반석과 쌍폭, 용추폭포를 무릉계 3대 명승지라 했지만 신선봉의 빼어난 전망도 빼놓을 수 없다.
신선봉 정상에는 무덤이 하나 있다. 신선봉에 묻혔으니 고인은 신선이 되었을까? 고인이 신선이 되었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어주고.....
*신선봉에서 바라본 박달골
*신선봉에서 바라본 무릉계 건너편의 기암절벽
*신선봉에서 바라본 박달골과 백두대간 두타산, 박달령
*신선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두타산
신선봉 맞은편 기암절벽과 학등 사이로 박달골의 깊은 계곡이 내려다 보인다. 박달골을 따라 박달령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계곡의 산기슭에 붙어서 가물가물 이어진다. 문득 머리를 들어 남쪽을 바라보니 백두대간 두타산(1352.7m)이 나를 부르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백두대간의 마룻금을 걷고 있던 2001년 6월 23일 오전 10시 10분에 나는 저 두타산 산마루에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나는 지금 무릉계 신선봉에서 두타산을 바라보고 있다. 백두대간에는 지금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저 멀리 가장 높은 봉우리가 두타산이고, 박달골 정면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정상이 박달령이다.
*신선봉 사랑바위에서 바라본 바른골과 백두대간 청옥산, 연칠성령, 망군대
*신선봉 사랑바위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연칠성령과 망군대
신선봉 사랑바위에서 바른골 깊은 계곡을 내려다본다. 사랑바위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로 이곳에 오른 연인들은 무서워서 서로 끌어안거나 손을 잡게 마련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사랑도 깊어질 것이니..... 그래서 사랑바위라 했나보다. 학등과 연칠성령으로 가는 길이 바른골 오른쪽 기슭에 붙어서 이어지다가 시나브로 사라진다. 청옥산(1403.7m)은 아쉽게도 학등에 가려 정상 일부만 보인다. 바른골 정면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정상이 연칠성령이고, 그 오른쪽으로 망군대(1247m)가 솟아 있다. 마음은 학등을 타고 청옥에 올라 백두대간으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눈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백두대간을 넘어와 하늘을 뒤덮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하늘문
*하늘문에서 내려다본 피마름골
*관음암으로 가는 하늘재 바위벼랑길
신선봉을 내려와 백두대간 갈미봉에서 발원하는 피마름골을 건넌다. 이 계곡 역시 옥계수와 같은 맑은 물과 폭포,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이 어우러져 절경을 보여준다. 피마름골은 옛날 삼척사람들이 정선의 임계장터에 소금을 팔기 위하여 이 험준한 계곡을 지날 때 잠시 땀을 식히며 쉬어가던 곳이라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또 옛날에는 이 골에 피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임진왜란때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의병들의 피가 내를 이룰 정도로 많이 흐른데서 유래한다고도 한다. 그 당시 이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져 만명도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한편 지금처럼 철계단이 없던 시절 사람들이 험준한 벼랑길을 오르내릴 때 말 그대로 피를 말리는 긴장감으로 인해 그런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관음암으로 가기 위해 피마름골을 건너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놓인 높이 80m의 철계단길 일명 하늘문을 오른다. 계단을 점점 더 높이 오르자 온몸에 짜릿한 긴장감이 찾아든다. 담이 약한 사람은 피가 마르는 긴장감으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금이 저리기 십상이다. 하늘문을 지나면 산중턱에 있는 관음암에 이르는 바위벼랑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하늘재라고 한다. 하늘재는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잘 어우러져 있어 경치와 전망이 모두 뛰어나다. 하늘재에서는 계곡 건너편으로 두타산성이 바라보일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무릉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눈은 이제 함박눈으로 변하여 펑펑 쏟아진다. 무릉계의 선경은 마술처럼 눈속으로 사라지고..... 이 얼마만에 산중에서 맞는 눈인가! 두타산 산신령님의 은덕이심인가! 눈을 맞으며 걷는 산길은 포근하면서도 낭만적이다. 온산과 계곡이 하얗게 변해버려 동화의 세계로 들어온 듯하다. 눈을 뒤집어 쓴 숲에서는 금방이라도 요정이 나올 것만 같다. 오랜만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유년의 추억에 젖어본다. 불현듯 찾아오는 이 행복감.....
*관음암
*관음암 부조 보살상
눈을 맞으며 하늘재를 내려가니 계곡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관음암(觀音庵)이 나타난다. 신라시대 창건된 관음암은 의상대사가 머물렀다고 하며, 조선조 정조 때 삼척부사 윤숙이 1780년에 중수한 뒤 지조암(指祖庵)이라 하였다. 그후 해룡스님이 중수하고 다시 관음암으로 이름을 고쳤다. 관음암 뒤 정상에는 부처바위가 있는데, 옛날 스님들이 수도하던 바위로 부정을 탄 사람이 오면 맑은 물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삼성각 옆에는 바위에 부조한 보살상이 앉아 있다. 관음암 처마 아래서 눈 내리는 무릉계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관음암을 뒤로 하고 삼화사로 내려가다가 만난 두꺼비바위..... 두꺼비바위 곁을 지키던 아름드리 소나무는 수명을 다하고 등걸만이 남아 있다. 눈을 이기지 못해 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는 산기슭의 낙락장송들..... 그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삼화사 적광전
*삼화사 심검당
삼화사에 다시 들른다. 절마당에는 눈이 발목까지 찰 만큼 쌓여 있다. 삼화사 경내는 눈속에 파묻힌 듯 고요하고..... 사람의 발길도 끊어진 채 정적만이 감돈다. 무향각 처마 밑에서 삼화사에 내리는 눈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소리없이 눈은 계속 내리고.....
*무릉반석
무릉반석도 눈세상으로 변했다. 반석에 새겨져 있던 시인인묵객들의 이름과 글씨는 눈속으로 사라지고..... 무릉계 옥계수만 무심히 흐르고 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운 사람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처럼 나도 그대가 그립다.
*일주문에서 바라본 삼화사
일주문에 이르러 삼화사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길에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발자욱만 어지러이 찍혀 있다. 속세를 드나드는 경계 일주문에 서서 나는 무엇을 망설이는 것일까! 그것은 승과 속의 세계에 각각 한 발씩 들여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업보에서 오는 것이리라.
일주문을 나서면 속세로 돌아가는 길....... 속세가 바로 한치 앞이다.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낙락장송의 가지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눈가루들...... 속세로 돌아가는 나의 발길을 막는 것만 같다. 그래도 돌아가야만 하는 길...... 일주문을 떠나면서 부르는 노래..... 나의 귀속세사(歸俗世辭)라.
무릉계 옥류동에 들어 신선이 되렸더니
흰눈 덮힌 만학천봉 내 등을 떠밀고
일주문 나서며 차마 돌아가지 못하네
*금란정
*금란정에서 반석교로 내려가는 길
무릉계는 온통 환상적인 눈꽃세상으로 변했다. 금란정, 반석교도 눈천지다. 무릉계는 눈속에 파묻혀 새들조차도 사라진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반석교는 인간세상과 선계의 경계..... 반석교를 건너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무릉계를 찾아 이름과 글씨를 남겼지만..... 나는 무릉일기 하나만을 남기고 무릉계를 떠난다.
2006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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