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겨울 서해바다 포토기행

林 山 2007. 2. 7. 19:58
일을 가진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 쉬는 황금같은 휴일을 기다리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금요일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벌써 다음날 떠날 주말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들뜬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내 인생에 있어서 오아시스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여행을 통해서 내 영혼은 그만큼 더 풍요로와지고 삶의 의욕이 샘솟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약 내 인생에 여행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삶이 될 것인가!
 
동물도 여행을 한다. 그러나 동물은 짝을 찾거나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만 여행을 할 뿐이다. 사람도 물론 짝을 찾거나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 다만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영혼의 순례를 위한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지칠 줄 모르는 탐구정신으로 충만해 있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 때문이다. 사람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처음 만날 때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 새로운 세계를 보고 이해하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지적 호기심이 충족되는 경이로운 희열을 경험한다. 지적 호기심이 충족된 사람은 또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영혼의 순례자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은 그리움을 찾아서 떠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으니..... 꿈속에서만 애틋한 사랑을 나누던 미지의 아름다운 여인이 어느 낯선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떵리쥔(鄧麗君)이 부른 '티엔미미(甛蜜蜜)'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때로는 산과 들, 강과 바다, 촌락과 도시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는 늘 그 누군가, 그 무엇이 그립다. 그리움의 대상이 확실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리움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낭만적이다. 가슴 아픈 사연이나 애달픈 추억을 잊어버리기 위한 여행을 할 수도 있다. '그리우면 떠나라'는 책의 저자처럼......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내용은 대충 짐작이 된다.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무목적이 목적인 여행..... 온세상을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자가 바로 그런 여행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여행을 할 때는 새로운 것을 보려고 하기보다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을 떠나면 수없이 많은 사람과 사물을 만나게 되고, 새롭고 낯선 풍경도 접하게 된다. 바로 우리의 눈을 통해서..... 만일 사람에게 눈이 없다면 아마 여행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눈을 통해서 우주 삼라만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물의 본질까지 궤뚫어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눈이란 바로 심안이 아니겠는가!
 
토요일 오후 진료를 마치자마자 충남 서해안 지방을 향해서 길을 나선다. 오늘은 어쩐지 서해바다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서해 제일의 해수욕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천해수욕장을 목적지로 삼아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다. 청주를 거쳐 조치원을 지날 때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캄캄한 어둠속을 달려 공주, 청양을 지나 보령시 대천에 도착하니 저녁 여덟 시가 훌쩍 넘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가까운 충북학생종합수련원 3층에 여장을 풀고 밤바다를 보러 나가기로 한다. 대천에는 지난 2003년 2월에 마지막으로 다녀갔으니 거의 4년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대천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까? 
 

*해변을 따라서 늘어선 모텔


*어둠속에 잠긴 대천해수욕장


*해변의 불꽃놀이


*대천해수욕장의 야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바람에 실려오는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대천해수욕장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텔들의 간판과 건물을 장식한 네온사인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한겨울임에도 대천해수욕장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울긋불긋한 네온사인 등불빛은 묘한 마력으로 나그네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해수욕장 여기저기에는 엄마 아빠를 따라온 어린아이들이 불꽃놀이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대천의 밤하늘에 때아닌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긴 꼬리를 그리며 하늘 높이 올라가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꽃들......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폭죽이 터질 때마다 어린아이들이 탄성을 지른다. 나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불꽃놀이 축제에 참여한다. 썰물이 빠진 바닷가 백사장을 거닐며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 해변에 깃든 어둠은 연인들의 다정한 뒷모습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사랑을 할 때는 불타는 사랑을 할지어다. 지금 나누고 있는 사랑이 일생의 마지막 사랑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니.....
 
썰물이 물러간 곳까지 백사장을 가로질러 걸어들어가 바다를 만난다. 파도는 쉴새없이 백사장 위로 밀려왔다가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물러가고..... 바닷가에 서면 나는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된다. 파도가 들려주는 태고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바다 한가운데 부표처럼 떠서 뱃길을 인도하는 무인등대의 불빛이 외로와 보인다. 등대는 밤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존재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백사장을 걸어나오는데..... 물기에 젖은 백사장에 비친 대천의 야경이 환상적이다. 대천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가고......      


*대천해수욕장(남쪽)

*대천해수욕장 앞바다에 떠 있는 바위섬
 
*대천 앞바다에 떠 있는 무인도 등대

*대천해수욕장(북쪽)

다음날 아침 서해바다를 보러 대천해수욕장 나가보니 어제 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다. 썰물이 빠져나간 드넓은 백사장에는 바다를 보러온 사람들이 해변을 따라서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해수욕장 바로 앞에는 바위섬이 떠 있다. 저 바위섬은 밀물이 들어오면 바다속으로 가라앉는다. 바위섬 뒤로 보이는 섬이 다보도(多寶島)다. 무인도인 다보도는 기암괴석과 하얀 차돌해안이 빚어내는 경치가 아름답다. 대천항은 여기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져 있다. 대천항 앞바다 무인도에 세워진 붉은색 등대 옆으로 작은 배 한척이 지나가는 풍경이 한폭의 그림같다. 북쪽의 모래톱 너머로 보이는 섬은 보령시에 속하는 원산도(元山島)다. 원산도에도 황금빛 백사장이 2km에 이르는 해수욕장이 있다.
 
충남 보령시 신흑동에 있는 대천해수욕장은 한국의 3대 해수욕장의 하나로 1930년에 개설되었다. 백사장이 길고 넓을 뿐만 아니라 수심이 깊지 않고, 경사도 완만하여 해수욕장으로서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대천해수욕장은 부서진 조개껍질 가루가 모래와 섞여서 곱디 고운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겨울철에는 해변을 따라 수백 그루의 동백나무가 빠알간 꽃망울을 터뜨리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서해바다는 동해바다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동해바다는 수심이 깊고 물이 맑은 대신 해안선이 단조로와 반도와 섬이 거의 없다. 이에 비해 서해바다는 수심이 얕고 물이 약간 흐린 반면에 섬이 많고 복잡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서해안은 또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동해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갯벌이 많이 있다. 동해바다는 어둠을 가르며 떠오르는 해돋이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장관이라면, 서해바다는 하늘과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면서 장렬하게 지는 해짐이가 장관이다. 
 
서해바다를 싫도록 바라보다가 대천해수욕장을 떠나 충남 서산시 해미면으로 향한다.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과 천주교 성지,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개심사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대천 톨게이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 광천, 홍성을 지나자 곧 해미 톨게이트가 나온다. 해미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해미읍성에 이르니 돌로 쌓은 긴 성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해미읍성 남동쪽 성곽과 동문

*해미읍성 남서쪽 성곽과 진남문

*진남문
 
*해미읍성의 옥사와 호야나무(회화나무)
 
*해미읍성 관아

*해미읍성의 민가

*해미읍성 남동쪽 내부와 동문
 

*해미읍성 동북쪽의 송림과 정자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인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 제116호)은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읍성은 보통 지방 행정관청이 있는 큰 고을에 건설된다. 따라서 읍성은 행정적,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어 평상시에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고 전시에는 방어기지의 성격을 띠게 된다. 약 6만여평의 평지에 둘레 1.8㎞, 높이 4∼5m의 규모로 축성된 이 성은 옛날에는 성곽의 바깥에 탱자나무를 빙 둘러서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불렀다. 해미읍성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의 둘레에 성벽의 밑부분은 큰 돌을 사용하고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로 쌓는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축성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빈틈은 쐐기돌을 끼워넣어서 마무리하였다. 또 성곽의 앞쪽으로는 해자를 파는 대신 억센 가시를 가진 탱자나무를 심고, 성벽의 위쪽은 날카롭고 뾰족하게 해서 적군이 쉽게 접근하거나 담을 타고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벽의 안쪽은 완만한 경사로 비탈지게 흙을 쌓아 유사시 군사들이 신속하게 성벽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곽에는 남문으로 정문격인 진남문(鎭南門)과 동문인 잠양루(岑陽樓), 서문인 지성루(枳城樓), 북문 등 네 개의 성문이 있다. 북문은 문루(門樓)가 없는 암문(暗門)인데, 성곽의 북동쪽에 암거(暗渠)형태로 만들어졌다. 성안에는 동헌(東軒)과 아사(衙舍), 교련청(敎鍊廳),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 등의 건물이 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최근에는 옥사와 민가를 복원하였다. 

해미는 고려시대 때인 1407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몽웅역(夢熊驛) 터에 새 관아를 마련하여 성립된 고을이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서해안 지방에 침입한 왜구들의 노략질로 백성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어서도 왜구들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기 위해 1417년(태종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까지 쌓은 성이 바로 해미읍성이다. 이후 문종을 거쳐 성의 증축이 계속되어 오다가 1491년(성종 22년)에 완공되었다. 읍성을 축성할 당시 충청도의 모든 장정들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지금도 진남문 아래 성벽에 남아 있다. 병마절도사영이 1417년 덕산에서 해미로 옮겨온 뒤, 1651년(효종 2년) 다시 청주로 옮겨갈 때까지 해미읍성은 230여 년 동안 서해안의 군사적 중심지였다. 조선 정부는 병마절도사영을 청주로 옮긴 뒤 해미영(海美營)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충청도의 5개 영 가운데 하나로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 칭하였다. 그후 1914년까지 해미읍성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충남 서북부 내포(內浦)지방의 군권을 호령하던 곳이었다.
 
해미읍성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으며, 석성은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 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雉城)이 380첩(堞), 옹성(甕城)이 두 곳, 동서남문은 3칸이며 홍예(虹霓)를 틀었고, 2층의 다락을 지었으나 북문은 없고, 우물이 여섯 군데이며, 성 밖에 호(壕)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의 병마절도사영은 해미읍성과 서로 별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병마절도사영에서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선조 12)에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해미읍성은 남한에 있는 읍성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성안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단계적으로 성곽과 유적의 보수와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1974년에는 일차로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에는 성안을 발굴하여 지금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를 찾았으며,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터)도 발견되었다. 성안으로 들어가 진남루에 올라서니 읍성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해미읍성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천여 명을 처형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도 이곳에서 옥사하였다고 한다. 해미읍성에서 그렇게도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산이 서해바다를 통해 곧바로 육지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서산에는 천주교가 일찌기 전파되었다. 서산을 비롯한 내포지방은 이존창에 의해 18세기 후반부터 천주교가 널리 퍼져 나갔다. 천주교 신도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자 조선정부의 보수파들이 이를 정치문제화하면서 순교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정부의 보수파들은 천주교 교세의 확장과 종교를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두려워하였다. 해미 최초의 순교자는 1799년 순교한 박취득이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해미에서는 천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나왔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가 많은 것과도 관련이 있는 동시에 내포의 8현을 관할하던 호서좌영과 감옥이 바로 해미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의 감옥에 갇힌 천주교인들은 교수형과 참수형, 태질, 몰매질, 생매장 등으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천주교인들을 매달아 고문하고 처형하던 호야나무는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다. 충청도 지역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을 가두었던 감옥터 입구에 묵묵히 서 있는 300년이나 묵었다는 아름드리 호야나무...... 병인사옥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죽였기에 교수목(絞首木)이라고도 하는 이 나무에는 지금도 그들을 고문할 때 머리채를 묶어 매달았던 철사줄이 박혀 있다. 이 지방 사투리인 호야나무의 학명은 원래 회화나무지만 이젠 고유명사처럼 불리워지고 있다. 병인박해 때 이 호야나무 아래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죽어갔던 것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단말마의 비명속에 사라져 간 무고한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이 나무는 묵묵히 지켜보았으리라. 그들의 원혼이 아직도 이 호야나무 주위에 떠돌고 있는 듯하다. 서문밖 도로변에는 호야나무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은 신도들을 태질로 처형했던 자리개돌이 있다. 그 옆에 세워져 있는 '이름없는 순교자들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새긴 순교현양비가 쓸쓸해 보인다. 현재 해미읍성은 천주교의 중요한 성지로 신자들이 성지순례차 많이 찾고 있다.  

진남문에서 성벽 위를 걸어서 읍성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남문인 진남문은 성의 남서쪽으로 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쪽에 가깝다. 동문인 잠양루는 남동쪽, 서문인 지성루는 북서쪽, 북문인 암문은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상 남쪽에 있는 문은 잠양루인 셈이다. 잠양루를 지나 성의 동쪽에 있는 구릉지대로 올라가니 동남쪽 성벽과 잠양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릉지대의 한가운데 잔디밭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대나무숲이,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내려오면 소나무숲이 끝나는 지점에 정자가 있고, 거기서 계단길을 따라 구릉을 내려서면 관아로 이어진다. 관아와 동문 사이에 있는 평지에는 초가로 된 민가를 복원해 놓았다. 천주교도들을 가두었던 옥사는 진남문에서 관아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해미읍성을 둘러보고 나오자 점심 때가 다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읍내리에 있는 영성각이라는 중국음식점이 짬뽕을 맛있게 한다고 해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리가 없다. 해미읍성을 보러 온 사람들이 죄다 영성각으로 몰려온 듯한 느낌이 든다.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탁자 하나를 차지한다. 잠시후 주문한 짬뽕이 나왔는데 역시 명성에 걸맞게 얼큰하고 맛이 있다. 신선한 해물이 많이 들어가 있어 맛이 깔끔하다. 오랜만에 짬뽕다운 짬뽕을 한 그릇 먹은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해미 천주교 순교지로 향한다. 진남문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북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해미중학교가 나온다. 해미중학교 바로 앞에서 죄회전을 해서 똑바로 가다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순교지가 있는 여숫골이 나타난다. 해미읍성에서 이곳까지는 차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해미 여숫골 무명순교자성당

*여숫골 진둠벙 순교지

*여숫골 무명 순교자 묘역과 순교탑
 
여숫골 순교지 안으로 들어가자 엄숙하고 무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생매장으로 죽어간 천주교도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순교지에는 무명순교자성당과 노천성당, 천주교도를을 수장시켰던 진둠벙, 무명 순교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놓은 유해안치소, 순교탑,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 등이 자리잡고 있다. 여숫골은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생매장을 당한 곳이다. 이곳에는 큰 구덩이에 수십 명씩 산채로 밀어 넣고 파묻어버린 생매장터가 여러 군데 있다. 천주교도들은 생매장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죽어갔는데, 그들의 모습이 마치 '여수(여우)에 홀려 죽은 것 같다'는 사형집행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곳의 지명이 여숫골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천주교도들이 부르짖는 '예수 마리아'라는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은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 '여숫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진둠벙은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 중의 하나이다. 1868년 박해시에는 많은 사람을 한 구덩이에 몰아 넣고 생매장을 하기도 하였다.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 해미천변과 진둠벙에서 사형집행인들은 천여 명 이상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 생매장시켰다. 둠벙은 웅덩이를 뜻하는 충청도 사투리인데, 천주교인들을 묶고 돌을 달아 물에 거꾸로 빠뜨려서 죽였다. 그래서 그들이 빠져 죽은 둠벙을 '죄인둠벙'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나중에 '진둠벙'이 된 것이다. 순교자들의 유해는 홍수로 대부분 떠내려가버리고, 1935년에 들어와서야 순교지 일부가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유해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무명 순교자들의 뼈와 치아 등이 다량 발견되었는데, 어떤 유골은 수직으로 선 채 출토되어 산사람이 생매장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유해안치소에는 발굴된 무명 순교자들의 유골들이 안치되어 있으며, 내부 벽에는 그들의 순교과정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순교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 벽화를 바라보면서 인간에게 종교와 신앙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1975년에는 진둠벙 맞은 편에 생매장으로 처형당한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묘역을 조성하고 그 뒤에 높이 16미터의 순교탑을 세웠다. 순교탑 바로 옆에는 야외 미사장도 있다. 2003년에서는 무명순교자성당을 새로 지어서 순례자들이 순교지 현장에서 미사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진둠벙의 주위와 순교탑 잔디밭에는 죄수에게 씌우던 족쇄형 큰칼 모형의 석판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그린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림은 수인의 목을 채우던 큰칼의 구멍에 해당하는 석판의 원에 그려져 있는데 한쪽에는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십자가의 길이, 다른 한쪽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죽음의 행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명 순교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여숫골 순교지를 나선다. 무명 순교자들이시여, 부디 좋은 세상에 다시 나시기를.......  
 
*여숫골에서 바라본 가야산
 
무거운 마음을 안고 순교지 정문을 나와 동쪽을 바라보니 해미면 읍내리 너머로 가야산맥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가야산맥에 솟아 있는 가야산(伽倻山)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678m에 이른다. 가야산맥은 북서쪽의 일락산(日樂山, 521m), 상왕산(象王山, 307m) 능선과 북동쪽의 수정봉(453m), 옥양봉(621.4m) 능선이 석문봉(653m)에서 만나 남쪽으로 가야산을 지나 삼준산(三峻山, 490m)과 결봉산(202m)에 이어진다. 가야산맥의 남동쪽 지능선은 원효봉(677m)으로 뻗어간다. 이 산맥은 충남의 서북부를 남북으로 달리면서 동쪽의 예당평야(禮唐平野)를 포함한 내포(內浦)와 서쪽의 태안반도(泰安半島)를 가르는 경계를 이룬다. 가야산맥의 동사면의 계곡들은 삽교천(揷橋川)으로 합류하여 아산호로 흘러들고, 서사면의 계곡들은 곧바로 천수만(淺水灣)으로 흘러 들어간다. 가야산은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3월에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 정상에 서면 서해바다가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올 것 같다. 특전사에 근무할 때 추운 한겨울에 천리행군 도중 눈이 많이 쌓인 가야산 중턱에서 땅굴을 파고 일주일 동안 지낸 적이 있다. 그때는 얼마나 추웠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침낭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신라 때는 가야산에 서진(西鎭)을 두어 중사(中祀, 나라에서 지내던 제사의 하나)를 지내고, 조선시대에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상왕산 남서쪽 계곡에는 백제시대 사찰인 보원사지(普願寺址)의 주춧돌 등 유적이 남아 있었으나, 1970년대 이루어진 개발로 지금은 대규모의 목장으로 변하였다.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과 서원산(書院山, 473m) 사이에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가 있다.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백제시대 마애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국보 제84호)이 있다.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보살입상, 왼쪽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이 마애석불은 암벽을 조금 파내어 불상을 조각한 뒤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만들어 달았다. 그밖에도 가야산에는 보물 6점, 문화재 4점 등 많은 문화재들이 흩어져 있다. 또 개심사, 일락사, 보덕사, 원효암 등 사찰들이 가야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서산에 왔으니 가야산 기슭에 있는 충남의 4대 사찰 중 하나인 개심사(開心寺)를 보고 가기로 한다. 개심사는 유서깊은 사찰로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가야산맥의 한 봉우리인 상왕산 자락의 품에 안겨 있다. 해미읍성 서문 앞으로 난 647번 국도를 따라서 운산면쪽으로 가다가  GS칼텍스 주유소를 지나자마자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신창저수지가 나온다. 신창저수지 오른쪽 산기슭에는 방대한 규모의 목장이 있다. 목장길을 따라서 가다가 신창저수지 상류에서 계곡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개심사 입구에 이른다.

*개심사 일주문

*범종각과 안양루

*개심사 대웅보전

*심검당(정면)

*심검당(측면)

*무량수전


*안양루
 
*명부전
 
*영산회괘불탱(출처:문화재청)
 
개심사 첫 관문인 일주문을 지난다. '象王山開心寺'라고 쓴 편액이 걸린 일주문(一柱門)에는 어쩐 일인지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다. 아직 완성이 덜 된 것일까? 포장도로가 끝나면서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계단길과 오솔길이 정겹다. 오솔길을 다 오르면 한가운데 외나무다리가 놓여진 장방형의 길다란 연못을 만난다. 물에 빠지지 않고 연못을 건너려면 마음이 흐트러져서는 안 될 터...... 오로지 일심으로 건너야 한다. 연못을 파고 외나무다리를 걸쳐 놓은 까닭을 알 듯도 하다. 이 연못은 여름에 연꽃이 필 때면 장관을 이룬다고 하는데...... 언제 연꽃이 필 때쯤 개심사를 다시 찾아오리라. 다리를 건너 바깥 절마당으로 올라가 범종각(梵鐘閣)과 그 뒤의 안양루(安養樓)를 바라본다. 안양루 뒤에도 '象王山開心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범종각 지붕 너머로 파아란 하늘이 열려 있다. 내 마음도 따라서 활짝 열린다. 아, 그래서 마음을 열어주는 절 개심사로구나!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인 개심사는 상왕산 남쪽 깊은 골짜기 안의 구릉지대에 닦은 터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개심사 사적기(事蹟記)에 654년(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할 당시에는 개원사(開元寺)라 했다가, 1350년(고려 충숙왕 2년) 처능대사(處能大師)가 중창한 뒤 개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개심사는 1475년(조선 성종 6년)과 1484년(성종 15년)의 두 번에 걸친 중창, 1613년(광해군 5년)의 인정(仁定)과 부익(富益), 현오(玄悟) 등 세 대사에 의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과 요사채의 중수, 1740년(영조 16년)의 중수, 1955년의 전면 보수를 거친 뒤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41년 대웅보전을 해체하고 중수 공사를 할 때, 중앙 마룻도리(종량, 宗梁)를 받친 장여에서 '成化二十年甲辰六月二十日瑞山地象山開心重創.....'이라고 쓴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는데, 성화 20년은 바로 1484년(성종 15년)에 해당한다. 이로 보아 개심사는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양루 오른쪽에 쪽문처럼 달려 있는 해탈문(解脫門)을 통해서 개심사 안마당(중정, 中庭)으로 들어가서 경내를 한바퀴 둘러보니 개심사는 그 명성에 비해 규모가 비교적 작고 아담한 편이다. 이것은 아마도 경사가 가파른 구릉지대에 터를 잡느라 넓은 대지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개심사의 주불전으로 조선 초기의 목조건물인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143호) 앞에는 오층석탑(보물 제53호)이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수덕사 대웅전을 축소해 놓은 듯한 대웅보전은 창건 당시의 기단 위에 다포계(多包系)와 주심포계(柱心包系)를 혼합한 절충형식으로 건축된 겹처마 맞배지붕의 미려한 건물이다. 대웅보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의 전남 강진의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3호)과 대비되는 중요한 건물인 동시에 주심포계에서 다포계로 건축양식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대웅보전의 규모는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으로 지대석(地臺石)과 판석(板石)을 놓고 장대석의 갑석(甲石)으로 마무리한 기단의 중앙에 두 개의 고주(高柱)를 세워 마룻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건물의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는데, 옥내주를 세우지 않고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에 걸쳤으며, 그 위로 지붕 밑의 가구재(架構材)가 모두 노출되어 있다. 마룻도리를 받친 대공(臺工)과 마루대공 좌우에 덧붙인 소슬은 모두 주심포계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기둥의 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걸치고, 각 칸에 두 조씩의 공포를 짜 올렸다. 종보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세워 종도리를 올렸고, 종도리와 중도리 사이에는 솟을합장재를 두었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짜 올렸으며, 내삼출목과 외이출목의 외부로 뻗은 제공은 쇠서형으로, 내부는 운공형으로 만들었다. 초제공과 이제공의 외부살미가 아래로 뻗어내린 모습이 강직하면서도 시원하다. 종보의 앞뒤로는 작은 우미량(牛尾樑)을 걸고, 내목도리를 올렸다. 우미량의 완벽한 구조미는 수덕사 대웅전에서 볼 수가 있는데, 우미량은 고려 때 발달한 건축양식이다. 우미량이 부분적으로 사용된 개심사 대웅보전은 고려시대의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어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 
 
대웅전보다 격이 높은 대웅보전은 사바세계의 교주인 고타마 싯다르타불(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한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의 좌우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며, 각 여래상의 좌우에는 또 제각기 협시보살(脇侍菩薩)을 안치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두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로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웅이란 인도의 자이나교를 일으킨 24명의 티르탕카라(Trthakara, 완전히 깨달은 스승) 가운데 마지막 인물이자 자이나교 승가의 개혁자였던 마하비라(Mahavira, BC 599~527)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불을 '위대한 영웅(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한다.
 
마하비라의 본명은 Vardhamna인데,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이나교의 양대 종파인 백의파(白衣派)와 공의파(空衣派)의 전승에 의하면, 마하비라는 출가하여 극도의 금욕적인 삶을 실천함으로써 최상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비폭력과 채식의 준수와 불살생(不殺生)과 불망어(不妄語),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무소유(無所有) 등 출가 5계를 엄격하게 지키라고 가르쳤다. 티르탕카라는 지나(Jina, 승리자)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나루를 만드는 자'라는 뜻으로 자이나교에서 윤회라는 삶의 흐름을 건너는 데 성공하고 다른 사람들이 따를 길을 만든 구원자를 말한다. 사실 자이나교의 티르탕카와 불교의 부처는 거의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이나교가 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정을 중심으로 서쪽 전면에는 안양루와 범종각, 동쪽 후면에는 대웅전, 북쪽에는 심검당(尋劍堂, 충남 문화재자료 358호), 남쪽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무량수각의 남쪽에는 요사채로 인해 또 하나의 작은 안마당이 만들어져 있다. 안양루와 무량수각 사이에는 작은 가설문인 해탈문(解脫門)이 있어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진입방식을 우각진입(隅角進入) 방식이라고 하는데, 충남 일대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해탈문에서 대웅보전을 바라보니 맞배지붕의 측면인 박공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요사채와 연결되어 있는 심검당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맞배지붕의 고생창연한 건물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범종각과 심검당을 지탱하고 있는 제멋대로 휘어진 아름드리 배흘림 소나무 기둥이다. 심검당의 대들보도 크게 휘어져 있다. 기둥과 대들보 뿐만 아니라 문지방이나 문틀, 문까지도 다 그렇다. 휘어진 나무의 생김새를 그대로 살려서 지은 심검당을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져 온다. 어린 시절 고향에 있던 옛 초가집을 떠올릴 때처럼..... 아, 이게 바로 자연미의 아름다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개심사의 보물은 단연 이 심검당이다.  
 
안양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무량수각은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자연석 초석 위에 원주기둥을 사용하였고, 포작(包作)은 익공계이며, 처마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명부전(冥府殿, 충남 문화재자료 제194호)과 팔상전(八相殿)은 대웅전과 안양루를 잇는 자오선(子午線)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당우를 건축하는 일반적인 가람배치형식에서 벗어나 따로 떨어져 있다. 무량수각의 남쪽으로 사찰의 중심영역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명부전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맞배지붕의 양쪽 측면에 풍판(風板)이 달려 있는 형식이다. 명부전에는 철불지장보살좌상(鐵佛地藏菩薩坐像)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명부전 북쪽에 있는 팔상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로 문수보살상을 안치하고 있다.
 
개심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 1264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탱 (靈山會掛佛幀)과 청동향로가 있다. 영산회괘불탱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탱화다. 괘불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할 때 법당 앞 마당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커다란 불교그림을 말한다.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으로 그려진 싯다르타의 머리 주변에는 일곱 구의 화불이 둥글게 앉아 있고, 그 옆으로는 두 구의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이 협시하고 앉아 있다. 또 싯다르타의 몸통 좌우에는 여덟 구의 화불이 앉아 있으며, 맨 아랫부분에는 두 손을 모은 자세로 싯다르타를 향해 서 있는 두 구의 제석천과 범천이 그려져 있다. 이 탱화는 1772년(조선 영조 48년)에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붉은색과 녹색, 황금색을 주로 사용하여 아름답고 화려하게 그려진 이 그림은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 탱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개심사에서는 장경을 개판하기도 하였는데, 1580년(선조 13년)에는 '도가논변모자리혹론(道家論辨牟子理惑論)', 1584년에는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과 '법화경'을 개판하였다. 

개심사는 벚꽃 중에서도 희귀종으로 알려져 있는 난벚꽃이 유명하다. 난벚꽃은 전국에서 가장 늦게 핀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 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난벚꽃이 활짝 핀다는 4월 초파일 무렵에 개심사를 찾으면 좋을 듯 하다. 개심사 안마당에서 대웅보전과 5층석탑, 심검당, 안양루, 무량수각을 차례로 다시 한번 둘러본다. 무량수각 남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명부전에는 듣던 대로 지장보살에게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지라, 몸과 마음에 든 병으로 고통받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낫게 해달라고 지장보살님께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명부전 한쪽으로 가지를 많이 벋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아무래도 이 나무가 난벚꽃이 아닌가 생각된다. 휘어진 소나무 기둥이 종루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범종각을 돌아서 바깥마당으로 내려와 연못에서 마음에 찌든 때를 한꺼풀 벗겨내고 개심사를 떠난다. 떠날 때는 말없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다. 목장길을 따라서 신창저수지를 도로 내려와 해미인터체인지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서산IC와 당진IC, 당진 합덕IC를 거쳐 송악IC를 지나자 충남 당진과 경기 평택을 연결하는 길고도 긴 서해대교가 나타난다. 서해대교를 달리다가 행담도휴게소라는 팻말을 보고 들러서 가기로 한다.   
 
*행담도휴게소
 
서해대교에서 행담도로 내려와 휴게소로 들어가니 주차장이 굉장히 넓다. 서해대교는 바로 행담도 위를 지나가도록 건설되어 있다. 행담도(行淡島)는 충남 당진군 신평면(新平面) 매산리(梅山里)에 딸린 0.16㎢ 넓이의 섬으로 1999년 당시 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 섬은 아산만(牙山灣) 깊숙한 지점에 들어와 있는데, 당진의 송악면(松嶽面) 복운리(伏雲里) 해안까지는 1㎞, 평택의 포승면(浦升面) 해안까지는 3.6km 떨어져 있다. 아산만은 조수간만의 차가 9.2m나 되고 연안에는 드넓은 간석지(干潟地)가 펼쳐져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계획에 따라 서해대교가 이곳을 지나가게 되자 행담도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대통령 측근에 의한 권력형 비리의혹 사건이 터져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다. 개발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행담도에는 17만 4천 평 규모의 휴게소와 호텔, 해양생태공원, 휴양시설, 체육시설 등 종합휴양시설이 들어서거나 들어설 예정으로 있어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 섬을 떠나야만 했다. 또 행담도 주변의 갯벌이 개발되면서 당진군민 갯벌살리기 대책위원회와 한국도로공사 사이에 갯벌 복원 소송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행담도에 전해오는 유래가 있으니..... 옛날 어떤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중 이 섬에 닿았다. 그는 목이 말라서 한참동안 마실 물을 찾아 섬안을 헤매던 끝에 샘 하나를 찾았다. 그 물을 마시자 어찌나 맛이 좋던지 금방 기운을 차리고 다시 한양으로 길을 떠나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선비가 이 섬에서 물을 마시고 장원급제하였다고 해서 행담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에서 행담도에 이르는 서해대교

*행담도에서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에 이르는 서해대교
 
휴게소 뒤쪽에서는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와 행담도간 서해대교가 아주 잘 보인다. 서쪽 하늘과 아산만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다. 행담도 남쪽 서해대교를 보고 난 뒤 휴게소 앞 주차장으로 가서 행담도와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간 서해대교를 바라보니 하도 길어서 끝이 가물가물하다. 서해대교는 서해안시대를 맞이하여 공단지역 물동량의 원활한 수송을 가능하게 해주어 서해교역의 관문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경제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수도권과 남부지방간의 교통량을 분산시켜 경부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 인근 지방도로 등의 교통체증 해소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바다 위에 저런 규모의 다리를 건설한 인간의 능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저렇게 높고 긴 다리가 지진이나 태풍에 의해 무너진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한강의 성수대교 붕괴 때처럼.....
 
서해대교는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와 충남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를 연결한 다리로 1993년 11월 4일 공사를 시작해서 총사업비 6,777억 원과 연인원 220만 명, 장비 45만 대, 철근 12만 톤, 시멘트 32만 톤을 투입한 끝에 2000년 12월 15일 드디어 개통되었다. 길이 7,310m, 너비 31.41m인 왕복 6차선 도로교인 서해대교는 남한에서 가장 긴 다리이며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길다. 이 다리는 풍속 65m/sec의 강한 바람과 리히터 규모 6의 강력한 지진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내염 시멘트와 에폭시 코팅철근을 사용하여 해수에 의한 부식도 방지하고 있다. 또한 서해대교에는 각종 첨단 계측기가 설치되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유지 관리되고 있다.
 
서해대교에는 주탑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사장교(斜張橋)와 콘크리트 교량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FCM교(장경간 콘크리트 상자형교),  미리 만들어진 콘크리트 상판을 차례로 얹어 잇는 PSM교(연속 콘크리트 상자형교) 등 세 가지 다리 형식이 복합적으로 사용되었다. 다리의 총길이 중 사장교 구간은 990m이고, PSM교 구간이 5,820m, FCM교 구간이 500m이다. 사장교는 주탑과 연결된 케이블로 다리 상판의 하중을 지탱하도록 설계된 다리로 항로의 확보를 위해 교각 사이의 간격을 크게 해야 할 때 주로 사용된다. 사장교는 케이블로 되어 있어 현수교에 비해 장력의 조정이나 교체가 쉬운 장점이 있다. 서해대교의 사장교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 주탑 높이가 182m, 주탑간 거리가 470m나 되어 다리 밑으로 5만 톤급의 선박이 통과할 수 있다.
 
사장교는 국내 최초로 가물막이 공법이 도입되었다. 이 공법은 교각을 세울 자리에 대형 원통을 설치하고 그 안의 바닷물을 퍼낸 다음 암반층까지 굴착하여 주탑의 기초 콘크리트를 부어 성형하는 방식이다. 사장교 주탑은 지역적 상징성을 고려하여 충남 아산시 읍내리에 있는 보물 제537호인 당간지주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조형미가 매우 뛰어나다. PSM교는 경간(徑間, 다리의 지주간 거리) 길이가 60m인데, 다리의 시점인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에서부터 2,340m, 중앙해상부분(축도부) 780m, FCM교가 끝나는 지점부터 종점인 당진군 송암면 복운리까지 2,700m 구간에서 이 공법을 채택하였다. 서해대교 가운데 가장 긴 구간을 이 공법으로 만든 것은 교량의 미관과 경제성을 동시에 고려한 것이다. 이처럼 서해대교는 여러 가지 첨단공법이 도입되어 건설된 다리로 국내 교량의 건설기술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해대교의 일몰
 
행담도를 떠나려고 하는데 서해대교 너머로 일몰이 시작되고 있다. 황혼빛에 물든 서녘하늘이 아름답다. 저물어 가는 행담도를 뒤로 하고 귀로에 오른다. 여행은 어쩌면 무엇을 보려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찾았을까......
 
2007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