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는 백제(百濟)에 대한 향수 비슷한 그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제는 백제인의 문화와 숨결을 찾아서 백제의 옛 서울 사비성(泗?城)이 자리잡았던 충남 부여(扶餘)로 여행길을 떠나왔다. 백제인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어제 저녁부터 밤까지 사비성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관북리의 거리, 백마강(白馬江)변의 구드래 조각공원, 구드래 나루터, 궁남지(宮南池) 등을 헤매고 다녔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백제문화의 흔적과 백제인의 혼을 찾아서 부소산 고란사 일대를 돌아보기로 한다.
*부여관광지도
먼저 부소산(扶蘇山) 기슭의 백마강변에 있는 고란사(皐蘭寺)부터 찾기로 한다. 구드래 나루터로 가기 위해 부여읍 관북리로 들어선다. 관북리는 백제 사비도읍기의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사비(부여)는 한성(漢城, 서울)과 웅진(熊津, 공주)에 이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다. 백제 제26대 왕인 성왕(聖王, ?~554)은 538년에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고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으나 아직까지 그 왕궁터는 별견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익산 왕궁리와 공주 공산성 내 쌍수전 앞 건물터, 부여 박물관 앞 궁궐터 등이 왕궁터로 거론되고 있지만 어느 곳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관북리가 유력한 왕궁터로 추정되는 이유는 지난 20여년간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무려 천여 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궁이나 관아의 물품을 저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창고시설 유적지의 발견은 이곳이 사비성의 왕궁터였음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자료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왕부터 위덕왕(威德王, 554~598), 혜왕(惠王, ?~599), 법왕(法王, ?~600), 무왕(武王, ?~641), 의자왕(?~?, 재위 641~660)에 이르기까지 여섯 명의 왕이 이곳의 사비궁에 머무르면서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지금 내가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머물렀을 왕궁의 옛터를 거닐면서 백제의 그 시절로 돌아가 새로운 감회에 젖어 본다.
부소산 서쪽 끝자락의 구교리 백마강변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구드래 나루터를 비롯한 구드래 일원은 1983년에는 국민관광지, 1984년에는 충남사적 및 명승 제6호로 지정되어 공원화되었다. 1996~1997년에는 이곳에 조각예술품을 설치한 뒤 조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백제 문화권 출신 조각가들이 기증한 작품 30점과 1999년도 국제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 29점 등 총 59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백마강변에 조각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원이 있다는 것은 부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백마강변의 유채꽃과 벚꽃
조각공원에서 구드래 나루터까지는 지척의 거리다. 백마강변을 따라서 끝없이 이어진 유채밭에는 활짝 피어난 유채꽃이 노오란 물감을 쏟아부은 듯하다. 부소산까지 이어지는 강둑길가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부소산 자락의 강변에는 만신을 중심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굿을 하고 있다. 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진혼굿이라도 하는 것일까? 구드래 나루터는 삼국시대에 외국의 사신들이 사비성이나 부소산성을 드나들던 유서깊은 포구였으나 지금은 유람선만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다. 나루터 건너편의 울성산에는 법왕이 창건을 시작해서 무왕이 완성한 왕흥사(王興寺)터가 있고, 백마강 양쪽 기슭에는 낙화암(落花岩), 고란사(皐蘭寺), 천정대(天政臺), 호암사지(虎岩寺址), 청룡사지(靑龍寺址),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나성(扶餘羅城) 등이 있으며, 부여읍내에는 국립부여박물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 등이 있다.
구드래란 말의 유래가 자못 궁금해진다.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다. 구드래는 처음에 '구ㄷ으래'였을 것이다. 왕칭어인 어라하에 '구(大)'가 접두사로 붙고, 두 말 사이에 촉음 'ㄷ'이 첨가되어 '구ㄷ어라하' 가 되었으며, 이것이 다시 축약되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구드래'는 '대왕(大王)'의 뜻을 가지고 있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일본 천황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쓰여진 일본서기(720년)에도 백제를 '구다라(くだら)'로 칭한 문장을 자주 볼 수 있다. 여기서 '구다라'는 '큰 나라', 곧 '섬기는 나라, 본국, 대국(大國), 대왕국(大王國)'의 뜻인 동시에 백제를 뜻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구드래 나루터
구드래 나루터에서 고란사로 태워다 줄 유람선에 몸을 싣는다. 백제의 법왕이나 무왕, 의자왕도 어쩌면 규암면 신리에 있던 왕실의 원찰인 왕흥사로 가기 위해 여기서 나룻배를 탔을지도 모른다. 나그네를 태운 유람선은 고란사를 향해 백마강을 거슬러 오른다. 불현듯 '꿈꾸는 백마강'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꿈꾸는 백마강'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슬픔과 한을 나그네의 애달픈 설움에 실어서 노래했기에 더욱 애절한 느낌을 준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오로리 찢어지는데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꿈꾸는 백마강'은 부여와 백마강을 무대로 활동했던 백제의 비극적인 멸망에 대한 나그네의 애달픈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조명암(趙鳴岩, 본명 조영출, 1913~1993)이 작사하고 임근식이 작곡한 이 노래는 일본강점기인 1940년에 이인권이 오케이레코드사에서 취입하여 백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꿈꾸는 백마강'은 이후 고복수와 남인수, 최무룡, 배호, 나훈아, 레이디스 토크, 주현미 등 많은 가수들이 끊임없이 취입하여 불후의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백제의 멸망을 이처럼 나그네의 애절한 심정에 담은 노래는 일찌기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노랫말 중의 '잃어버린 옛날'이 일본에 빼앗긴 조선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며, '백마강 탄식'은 나라를 잃은 슬픔일 수도 있었다. 조선의 국권상실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백제의 멸망에 대입하여 노래한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라는 구절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고뇌가 엿보인다. 백제의 멸망과 향수를 노래했지만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듯한 노랫말로 인해 조선민중들은 더욱더 이 노래를 사랑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이 노래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발매를 금지시켰다.
'꿈꾸는 백마강'의 실제 작사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밝혀지지 않았었다. 작사자 조명암이 바로 월북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역대 반공정권하에서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되었다. 충남 아산출신의 조명암은 모더니즘 시인이자 연극인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시들을 창작함과 동시에 해방 전에 이미 5백여편이 넘는 노래가사를 씀으로써 남한의 현대시사와 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꿈꾸는 백마강' 외에도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고향초', '바다의 교향시'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월북해서 숙청당한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북한에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평양가무단 단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희곡과 작사활동을 하면서 1993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상 계관인(최고훈장에 해당)이란 칭호를 받았다.
백제의 멸망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백마강은 고요하게 흘러만 간다. 궁녀들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의자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일명 사자하(泗?河), 백강(白江), 마강(馬江)이라고도 하는 백마강은 충남 부여의 부소산을 감돌아 흐르는 금강의 이름이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神舞山,897m)에서 발원한 이후 금강은 서쪽으로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유구천(維鳩川)과 합류한 뒤 남류하여 부여군으로 들어와 백마강이 된다. 부여 부근에서 다시 은산천(恩山川)과 금천(金川), 강경 부근에서 논산천(論山川)과 합류한 금강은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들어간다.
백마강 양안에 퇴적된 토사로 인해 광활한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는 부여는 백제의 수도로서 아주 적합한 곳이었던 반면에 험준한 산맥이나 깊은 협곡이 별로 없어 외적이 침입했을 때 방어에 지극히 불리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외적이 배를 타고 유속이 느린 금강을 거슬러 부여까지 곧바로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660년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군사들은 백마강을 통해서 부여에 쉽게 상륙하여 신라군과 함께 사비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663년 백제의 부흥을 위하여 백일(백제와 일본)연합의 수군과 나당연합의 수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백촌강(白村江)도 바로 백마강이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백일연합군이 나당연합군을 몰아내고 백제를 부흥시켰다면 훗날의 한반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랬다면 오늘날까지 외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굴욕의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낙화암과 고란사
잔잔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며 유람선은 부소산 북쪽의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인 낙화암(落花岩, 문화재자료 제110호)을 지난다. 바위절벽 중간쯤에는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썼다는 '落花岩'이란 글씨가 붉은색으로 오목새김(음각)되어 있다. 낙화암에는 사비성을 향하여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오는 나당연합군에게 능욕을 면치 못하리는 것을 안 삼천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장렬하게 백마강으로 떨어지는 삼천궁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삼천궁녀는 의자왕이 정사를 올바로 펴지 않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은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날조라고 생각된다. 당시 사비궁의 규모로 볼 때 궁녀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나 '백제고기'에 따르면 원래 이 낭떠러지의 이름은 타사암(墮死岩)이었다고 하는데, 훗날 삼천궁녀들을 꽃에 비유해서 낙화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저 앞 백마강 가운데 조룡대(釣龍臺)라는 바위섬이 떠 있다. 조룡대는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크기의 바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바위에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뒤, 어느 날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닥쳐 규암진(窺巖津)에서 낙화암까지 늘어서 있던 수백 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뒤집혀 침몰하고 말았다. 소정방이 괴변이 일어난 까닭을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것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소정방이 다시 강룡을 잡을 방법을 물으니 일관은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낚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강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쇠로 만든 낚시에 굵은 철사를 낚싯줄로 하여 백마 한 마리를 미끼로 달아서 던져 놓았다. 그러자 용이 백마를 삼켜서 소정방에게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하는 이 바위를 조룡대, 용을 낚을 때 백마를 미끼로 썼다고 하여 이 일대의 강을 백마강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큰 물고기’를 한자로 ‘어룡(魚龍)’이라고 한다. 소정방이 어룡을 낚은 것이 와전되어 용을 낚았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잔잔한 수면을 가르며 유람선이 고란사 선착장으로 들어선다. 선착장에서 잠시 걸어서 올라가면 고란사에 닿는다. '꿈꾸는 백마강'에서 나그네가 들었던 고란사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무심한 사람들만 오고간다. 백제탑의 낙조, 부소산의 해맞이, 백마강의 봄빛, 낙화암의 소쩍새 우는 소리, 궁남지의 버드나무숲, 규암나루의 돛단배, 만광지의 추련(秋蓮) 등과 함께 고란사 새벽 종소리는 부여팔경 중의 하나인데,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못내 아쉽다.
*고란사
*고란사 편액
*고란사 법당의 삼존불
*진공묘유 편액
*회고루 편액
*십일면천수천안관세음보살탱화
고란사(문화재자료 98호)는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고란사 창건에 대한 설은 두 가지가 있다. 백제 때 왕들을 위해서 세운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고란사는 백제가 멸망할 때 불에 타버렸는데, 고려시대에 삼천궁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백제의 후예들이 중창한 것이다. 절 뒤편의 바위벼랑에 자생하는 희귀한 고란초(皐蘭草)로 인해 고란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란사는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으며,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의 두 번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1900년에는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와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에 다시 보수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최근에 새로 지었다. 고란사는 매우 작은 규모의 사찰이지만 백마강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바위벼랑에 자리잡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그런데 법당의 처마에 걸린 '皐蘭寺' 편액 글씨와 그림이 낯이 많이 익다. 그럼 그렇지! 편액 글씨는 대필서(大筆書)로 유명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썼고, 글씨 양쪽의 운치있는 난초는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이 쳤다. 해강과 죽농이 이곳에도 다녀갔구나! 일제시대 해강과 죽농은 서로 동무가 되어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면서 사찰의 편액을 만들어 주었다. 조계산 송광사 우화각에도 해강이 글씨를 쓰고 죽농이 대나무와 난초를 운치있게 친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슬픔을 고란사 편액 글씨와 그림으로 남겼던 것일까? 법당 안에는 본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삼존불좌상 앞에서 합장삼배를 올리고, 나당연합군에 의해 죽어간 백제인과 삼천궁녀의 명복을 빈다.
고란사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현판이 있다. 18세의 승려 신동호(申東浩)가 쓴 '眞空妙有(진공묘유)'라는 편액 글씨이다. 18세의 나이로 어떻게 저런 필치를 구사할 수 있었을까! 그는 저 '진공묘유'의 의미를 이해했을까? 진공묘유란 반야심경의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색불이공공불이색 색즉시공공즉시색)'의 오묘한 이치를 표현한 말이다. 색(色)은 물질적 현상, 공(空)은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곧 물질적 세계와 평등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유(假有)의 존재인 색에서 우주의 실상을 발견하는 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그것이 곧 공임을 깨달을 때만이 완전한 해탈에 이르러 진정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 진공묘유란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핵심인 것이다.
만송(晩松)이란 사람이 쓴 '懷古樓(회고루)' 편액도 재미있다. 나뭇잎을 두인(頭印)으로 찍었다. 나뭇잎이 허공을 타고 나풀나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 얼마나 멋들어진 파격인가! 고란사 편액 글씨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옛 선인들의 고아한 멋과 풍류에 빠져든다.
법당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불당으로 들어가니..... 아, 십일면천수천안관세음보살(十一面千手千眼觀世音菩薩)님이 봉안되어 있는것이 아닌가! 천수관세음보살도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삼배의 예를 올린다. 천안으로 온세상을 굽어 살피시고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의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시어 천수로써 거두어 주시기를..... 관세음보살은 구원겁(久遠劫) 전에 관세음부처에게 발원해서 여약삼매(如約三昧)를 증득하고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성취한 존재로, 세상의 모든 소리(世音)를 듣는(觀) 보살이다. 이 보살은 고통받는 중생들이 애원하는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 근기에 따라 나타나는 보문시현(普門示顯)을 통해서 그들을 구제해주고 소원도 이루어준다. 그러니 중생들에게 관세음보살처럼 소중하고 친근한 보살이 어디 있을까!
십일면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는 보문시현의 의미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보살도는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로 열하나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십일면은 8방 하리에 정면을 더한 것으로, 4면 범천을 자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천이란 숫자는 여기서 '무한(無限)'을 뜻한다. 따라서 천수천안은 무한히 많은 눈으로 온 세상의 구석구석을 두루 살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손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눈이 많으면 그만큼 여러 곳을 살펴볼 수 있고, 손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손에 눈이 그려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고통받는 중생들을 살피자마자 동시에 구제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의 법력이 그만큼 신속하게 미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 게다.
십일면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는 곧 온 우주에 가득차 있는 만물생성의 관음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 삼라만상은 모두 다 보문시현의 관음력에 의해서 생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 한편, 십일면 가운데 십면의 얼굴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십지를 나타내고, 맨 위의 얼굴은 불과를 나타낸 것으로 십일품류의 무명을 끊고 불과를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렇듯 십일면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광대무변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으, 관세음보살이시여!
*낙화암에서 몸을 날리는 삼천궁녀들의 벽화
*고란정
고란사 법당 뒤에는 나당연합군에게 쫓긴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줄을 지어 백마강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백제의 장병들이 전멸을 당하고 적국의 군사들이 시시각각으로 몰려오는 것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삼천궁녀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당시의 급박하면서도 처절한 상황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 나면 어린이와 여성들의 희생이 가장 많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백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란사 뒤편에는 바위절벽 밑에서 약수가 솟아나는 고란정(皐蘭井)이 있다. 이 바위절벽에서 자생하던 천연기념물인 고란초는 최근 거의 멸종되고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고란정 한쪽에는 플라스틱 상자안에 고란초를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천연기념물이라는 명성만큼 그리 볼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아, 저게 고란초구나.' 할 정도다. 세종대에 나온 향방약성대전(鄕方藥性大典)에는 '옛날 원효대사가 사자강(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시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진란(眞蘭)과 고란이 있음을 알고 물맛을 따라 올라 이곳 부소산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은 진란은 없어지고 고란만 남아 있으나 아깝게도 고란마저 멸종에 가까울 정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란초는 벌써 세종대에 멸종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고란초(Crypsinus hastatus)는 고란초과(皐蘭草科 Polypodiaceae)에 속하는 상록다년초로 산의 그늘진 바위틈이나 낭떠러지에 붙어서 자란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길게 뻗으면서 마디마디에서 고사리잎처럼 생긴 잎이 달리는데, 가죽처럼 약간 두껍고 광택이 나는 홑잎이지만 가끔 2~3갈래로 갈라진다.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은 가운데 열편이 가장 큰데, 길이 5∼15㎝, 너비 2∼3㎝ 정도까지 자란다. 잎의 윗면은 진한 녹색이며 아랫면은 약간 하얀색을 띤다. 포자낭은 잎 뒤쪽에 동그랗게 무리져 달리고 포막(苞膜)은 없다. 유사종으로 큰고란초(C. engleri)와 층층고란초(C. veitschii)가 제주도에서 자란다. 약이 귀하던 시절 중국에서는 고란초의 전초(全草)를 진해(鎭咳)와 해독(解毒), 이뇨(利尿)제로, 한국에서는 석위(石葦)와 함께 임질약으로 썼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약재다.
고란정의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니 물맛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고란정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으니...... 백제의 의자왕은 늘 고란사 약수를 늘 즐겨 마셨다. 이 물 한 모금을 마시면 일년을 더 살 수 있다는 전설의 명약수를 마시고 의자왕은 원기가 왕성해지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궁녀들이 왕에게 바칠 물을 고란정에서 받아갈 때는 고란초 잎을 한두 개씩 띄웠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옛날 소부리에는 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늙도록 자식이 없어 늘 근심으로 날을 지새웠다.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山)의 한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고란사 바위틈에서 신효한 약수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는 이튿날 할아버지를 보내 그 약수를 마시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약수를 마시러 간 할아버지가 다음날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걱정이 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찾으러 약수터로 갔다. 그런데 왠 갓난아이가 할아버지의 옷속에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는 아차 싶었다. 약수 한 모금을 마실 때마다 삼년씩 젊어진다고 한 도사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할머니는 간난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와 고이 길렀다. 이 아이는 자라서 훗날 큰 공을 세워 백제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고란사 삼성각
*고란사 삼성각 칠성탱화
*고란사 삼성각 독성탱화와 산신탱화
삼성각(三聖閣)은 백마강이 발밑으로 보이는 절벽에 가까스로 붙어 있듯이 세워져 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백마강 물속으로 떨어질 판이다. 삼성각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탱화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삼성님께도 합장삼배를 올린다. 삼성은 원래 재물과 수명, 그리고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이 불교에 수용된 것이다. 즉 불교가 들어와 정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과 융합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 등 삼신을 함께 모시는 전각을 말하는데, 산신 대신에 고려 말의 삼대성승(三大聖僧)인 지공(指空),나옹(懶翁), 무학(無學) 등 삼성(三聖)을 봉안하기도 한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신과 칠성, 용왕을 모시는 곳도 있다.
삼신을 각각 따로 모실 때는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독성각(獨聖閣)이라고 한다. 산신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인 산신각은 국조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산신을 모신다. 산신은 불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가 나중에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다. 산신의 모습은 대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 불교에서 산신은 산중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外護神)과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산신각은 지금 전국의 거의 모든 사찰에 갖추어져 있다.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사람들은 대개 산신각을 찾아와 기도를 올린다.
칠성각은 수명장수(壽命長壽)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七星神)을 모시는 전각이다. 그래서 칠성각에는 칠여래(七如來)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그린 탱화를 봉안한다. 애초에 중국의 도교에서 신앙하던 칠성은 한국에 유입되어 기우(祈雨)와 장수, 재물을 비는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았는데, 이 신앙이 조선시대로 들어와 불교에 수용된 것이다. 칠성은 단순한 수호신으로 불교에 수용되었다가 산신과 마찬가지로 후에 다시 수명신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다. 칠성각도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칠성각은 특이하게도 한국의 사찰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다.
독성각은 독성 즉 독각(獨覺)의 성자를 모시는 전각이다. 독성각에는 일반적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봉안한다. 독성은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깨달아서 성인의 반열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독성신앙에 단군신앙이 스며들어 있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독성각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찰에 널리 건립되기 시작한 전각이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거센 탄압을 받으면서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도래하자 말법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신도들이 독성각에서 불공을 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성각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雲門寺)의 부속암자인 사리암(舍利庵)과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삼성암 등이 유명하다.
*복사꽃 낙화
*백화정
*석정 안종원의 백화정 편액 글씨
*삼천궁녀가 몸을 날린 낙화암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고란사에서 오솔길을 따라서 백화정(百花亭)으로 오른다. 봄바람에 복사꽃잎이 어지러이 흩날린다. 바람에 날려 땅위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세월의 강을 건너 낙화암에서 몸을 날리는 삼천궁녀들의 모습과 처연하게 오우버랩된다. 한때는 아름다웠을 복사꽃...... 지는 꽃은 슬프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백화정 입구에는 춘원 이광수의 '낙화암'이란 시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광수에게도 삼천궁녀는 애절한 느낌으로 다가왔던가 보다. 시에 그 애절함이 구구절절 묻어난다. 아, 이광수가 친일활동만 하지 않았어도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서 손색이 없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다.
사자수 내인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낙화암-이광수)
낙화암 바위봉우리 꼭대기에 자리잡은 백화정(문화재자료 제108호)은 백제가 멸망할 때 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지은 육각지붕의 정자이다. 2층의 바닥 주위로는 난간을 두르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이 정자는 1929년에 당시 부여군수의 발의로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우회(詩友會)에서 세웠다고 한다. '百花亭' 편액 글씨는 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 1874~1951)이 썼다. 백화정 누각에 오르면 백마강과 그 주변의 경치가 한눈에 펼쳐진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북송(北宋)의 동파 소식(東坡 蘇軾)의 시에서 유래한다. 소동파는 광둥성(廣東省)의 후이저우(惠州)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둥쟝(東江)과 연결된 호수인 시후(西湖)를 바라보면서 읊은 강금수수백화주(江錦水樹百花州)라는 시를 썼다. '백화'는 바로 여기서 따온 것이다. 북송 제일의 시인이었던 소동파는 후저우(湖州) 지사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에 체포되는 필화사건에 연루된다. 다행히 사형은 면했으나 그 필화사건 이후 소동파는 평생 불우하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그의 대표적인 걸작 적벽부(赤壁賦)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된 중국의 명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낙화암 바위절벽 위에서 말없이 백마강을 바라본다. 백마강 물속으로 떨어지는 삼천궁녀들의 단말마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바람에 날리는 복사꽃잎처럼 떨어지는 삼천궁녀들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백마강은 고요하게 흘러만 간다. 백제 멸망 당시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해 백마강에 가득찼을 당나라 수군의 배는 간 곳 없고,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만 한가로이 떠 다니고 있다.
저 강건너 규암면 신리 왕은이골의 산기슭 어디메쯤 왕흥사(王興寺)가 있었으리라. 법왕은 백제의 중흥을 위해 부처의 가호를 입으려고 왕흥사를 세우려고 했었다. 그러나 법왕은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무왕이 왕흥사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아무 소용없이 무왕의 아들 의자왕에 이르러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낙화암은 금남정맥(錦南正脈)이 종점이기도 하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영취산(靈鷲山, 1,075.6m)에서 서쪽으로 정맥 하나가 갈라지는데, 이 정맥이 65km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이다. 금남호남정맥은 영취산에서 장안산(長安山, 1,237m), 수분현(水分峴, 530m), 팔공산(八公山, 1,151m), 성수산(聖壽山, 1,059m), 마이산(馬耳山, 667m), 부귀산(富貴山, 806m)을 지나 전북 무주군의 주화산(珠華山, 565m)에 이르러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갈라진다. 금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북서쪽으로 왕사봉, 배티(梨峙), 대둔산(大屯山), 황령(黃嶺), 개태산(開泰山)을 지나 계룡산에 이른 다음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널티(板峙), 망월산(望月山), 충남 부여군의 월명산(月明山, 183m), 오석산, 금성산(121m)을 거쳐 부소산(扶蘇山)의 이곳 낙화암(落花岩)에서 끝나는 약 120km의 산맥이다. 낙화암에서 금남정맥을 가슴으로 느끼다.
*사자루
*사자루 뒤에 걸려 있는 '백마장강' 편액
낙화암을 떠나 부소산 정상으로 향한다. 부소산(106m) 정상에는 사자루(泗?樓, 문화재자료 제99호)가 세워져 있다. 원래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送月臺)가 있던 자리이다. 1824년(순조 24)에 군수 심노승이 임천의 아문(衙門)으로 세웠던 배산루(背山樓)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 세운 뒤 '사비루(泗?樓)'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사비루'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200년 1월 3일 '사자루'로 명칭을 바꾸었다. 사자루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북쪽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누각 주위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전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사자루를 옮겨 세우기 위해 이곳의 터를 고르던 중 정지원(鄭智遠,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6세기 말경의 작품인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 보물 제196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불상 조성의 발원자인 정지원은 백제시대의 귀족이었다. 불상의 광배(光背)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정지원은 그의 죽은 부인 조사(趙思)의 내세를 위하여 이 금동불상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불상을 일명 '정지원명금동삼존불입상(鄭智遠銘金銅三尊佛立像)'이라고도 한다.
누각의 정면 처마밑에는 조선 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이 쓴 '사자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강은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과 함께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그해 11월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安東)으로 탈출했으나 일본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송환되었다. 그뒤 일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게 도일(渡日)을 강요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며,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하에 살면서도 대일항전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왕자였던 그에게는 백제의 운명이 남의 일같지 않았을 것이다. 이강은 저 글씨를 쓰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저 글씨를 쓰면서 그는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북쪽 즉 백마강쪽 처마밑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아, 저 유장하면서도 힘찬 운필은 과연 해강답다. 보라! 저 거칠고 깊은 호흡으로 단숨에 휘갈긴 '白馬'에서 거침없이 내달리는 천리마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長'이란 글자의 마지막 한 획만 가지고도 '매우 길다'는 뜻이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江'이란 글자에서는 단 한번의 운필로 구비구비 흘러가는 강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강물은 어디서고 멈춤이 없으니 저 글자는 한번의 운필로 써야 한다. '江'이란 글씨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도도하게 흐르는 백마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부소산의 동쪽에는 영월대(迎月臺)가, 서쪽에는 지금의 사자루 자리에 송월대가 있었다. 백제의 왕들은 영월대에서 달맞이를 하였고, 송월대에서 달짐이를 보면서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영월대는 영일대(迎日臺)라고도 한다. 1964년 부여군 흥산에 남아 있던 조선시대의 아문을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영일루(迎日樓, 충남문화재자료 제101호)'라고 하였다. 영월대가 있던 자리 근처에는 백제시대에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군창지가 있어서 지금도 천삼백여 년 전의 탄화된 곡식이 나온다고 한다.
부소산에는 둘레가 2.2km에 이르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식(土石混築式) 산성인 부소산성(扶蘇山城, 사적 제5호)이 있다. 성왕대의 사비천도를 전후해서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산성은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일차로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쌓은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부소산성이 사비성,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538년 성왕이 웅진(熊津,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여 의자왕대에 멸망할 때까지 사비시대 123년 동안 국도를 지킨 산성이었다. 한편 이 산성은 500년(동성왕 20)경 처음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성왕이 천도할 무렵 개축한 뒤 605년(무왕 6)경 완공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먼저 축조된 둘레 1.5km의 테뫼식 산성 안에는 군창터와 백제식 가람의 장방형 건물터, 영일루,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이곳에 있던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보물 제21호)는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층 누각인 영일루(충남문화재자료 제 101호)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 누각은 1871년(고종 8) 당시 홍산(鴻山) 군수 정몽화가 세운 아문인 집홍정을 1964년 부소산성 안의 옛 영일대(迎日臺)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복원한 뒤, 영일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옛 영일대는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영일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는 다포식이고, 누각 정면에는 '迎日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크다. 부소산의 남쪽 봉우리에 있는 반월루는 부여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이다.
유인원기공비는 백제 멸망 후 진주한 당나라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기념하여 663년(문무왕 3)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유인원은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백제부흥운동도 진압한 사람이다. 그는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설치한 지방통치기구인 오도독부(五都督府)의 낭장(郎將)으로 도성방어의 책임을 맡았었는데, 한때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의 백제부흥운동군에 의해 도성이 포위되었다가 유인궤(劉仁軌)의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구출되기도 하였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도 그는 뛰어난 전공을 세워 우무위봉명부좌과의도위(右武衛鳳鳴府左果毅都尉)에 제수되었다. 이 비석은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를 비롯한 7백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간 사실, 백제부흥운동군의 주요활동,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및 신라와의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사자루 부근에는 둘레 0.7km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이 안에 사자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산봉우리를 빙 둘러싸는 형태를 가진 이 두 테뫼식 산성의 외곽은 포곡식 산성으로 연결되고 있어 백제의 독특한 산성양식을 보여준다. 성안에는 동문과 서문, 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백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는 북문과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성의 북쪽에는 고란사와 낙화암, 서쪽에는 서복사지(西覆寺址, 충남기념물 제161호)가 있으며, 그밖에 삼충사(三忠祠, 충남문화재자료 제115호)와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청산성(靑山城, 사적 제59호), 청마산성(靑馬山城, 사적 제34호)과 함께 유사시에 국도인 사비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으며, 평화시에는 왕과 귀족들의 비원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자루에서 서복사지로 내려가는 길가 산기슭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운치가 있다. 부소산의 소나무들은 강직한 기상보다는 유려한 곡선미가 돋보인다. 이러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부소산의 소나무들을 어떤 이는 '백제송(百濟松)'이라 이름하기도 하였다. '부소(扶蘇)'란 지명도 소나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부소산에는 그만큼 수백년 묵은 소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길가의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는 서복사지는 원래의 사찰명이 알려지지 않았다. '산성의 서쪽에 있는 절터'라고 하여 '서복사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 남북자오선상에 중문―탑(목탑)―금당순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던 전형적인 백제 사찰지임이 드러났다. 여기서 출토된 치미(雉尾), 금동판, 소조불두, 금동제 과판, 청동제 등개, 벽화편 등으로 보아 서복사는 백제왕실의 원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루 아래에는 안부가 있는데, 이 안부에서 궁녀사로 내려가는 길은 호젓해서 좋다. 궁녀사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사당이다. 부소산의 남쪽 기슭에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과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위패를 모신 삼충사가 있다. 성충은 좌평으로 있으면서 의자왕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 옥중단식을 하다가 죽었다.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려고 했던 흥수는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계백은 5천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황산벌(지금의 연산)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1957년에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정부의 지원으로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가 되면 백제의 세 충신을 기리는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부소산성의 정문인 사자문(泗?門)으로 내려와 부소산 고란사 여행을 마무리한다. 부소산과 고란사를 돌아보면서 찬란했던 백제의 옛 문화와 백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부여여행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다. 백제의 천년고도 부여에 와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간다. 아, 백제여!
2007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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