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萬壽山, 575m) 무량사(無量寺)로 가는 길. 어느덧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로 들어선다.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길을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의 운명이다.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그 나그네길이 무량사로 나 있는 것이다.
*만수산 무량사 지도
만수산은 보령시 성주면과 부여군 외산면의 경계지점에 솟아 있는 산이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남쪽 기슭에 백제시대에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무량사와 태조암, 도솔암 등 부속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만수산..... 만수산은 무량사가 있기에 만수산인 것이다. 무량사의 주불은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아미타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광명의 부처 즉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수명의 부처 즉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 무량광수불(無量光壽佛)이 머무는 도량이니 무량사요, 그런 무량사를 품에 안은 산이니 만수산인 것이다.
*무량사 부도전
*무량사 부도전의 김시습 부도
*무량사 부도전의 김시습 비석
*무량사 부도전의 풍계선사 부도
*무량사 부도전의 능허당대사 부도와 비석
무량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부도전을 먼저 돌아보기로 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찰에 갈 때면 부도전에 들르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부도전은 아름드리 소나무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파릇파릇 돋아난 풀들이 녹색의 양탄자를 갈아놓은 듯한 부도전에는 아홉 기의 부도가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영겁의 세월을 선정에 든 채 고요히 앉아 있는 아홉 분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한다. 앞줄 한가운데는 조선 세조때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출가하여 설잠(雪岑)이란 법명으로 승려생활을 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부도(浮屠, 충남유형문화재 제25호)와 '五歲金時習之墓(5세김시습지묘)'라고 쓴 작은 비석이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에는 그를 기리는 좀더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를 통털어서 최고의 천재이자 지성인이요, 문인이었던 김시습을 여기서 만나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김시습의 부도는 서로 크기가 다른 팔각의 이중 지대석(地臺石) 위에 이중의 기단을 놓고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세워져 있다. 복련팔엽(覆蓮八葉)으로 장식된 하대석(下臺石) 위에는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을 새긴 팔각의 중대석(中臺石), 그 위에는 팔엽의 앙련(仰蓮)을 새긴 상대석(上臺石)을 올렸다. 탑신의 몸돌도 역시 팔각이며 아무런 무늬가 없다. 연꽃덮개가 조각된 옥개석(玉蓋石) 처마의 안쪽으로는 2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여덟 귀퉁이는 높게 들려 있다. 지붕의 윗면에는 복판(複瓣)의 연화관(蓮花冠)을 새겼으며, 그 위에 납작한 구형(球形)의 복발(覆鉢)과 옥개석, 그리고 보주(寶珠)를 얹어서 머리장식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부도로는 조각이 매우 우수하고 화려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부도를 넘어뜨렸는데, 이때 밑에서 사리 1점이 나와 지금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 초 한양에서 태어난 김시습은 생후 8개월에 이미 글뜻을 알았고, 세 살이 되었을 때는 한시를 지을 정도로 천재였다. 그는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비는 아니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뒤 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이미 한양에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박이창을 시켜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세종이 '어린이의 글이 끝없이 푸른 하늘에 흰 학이 춤추는 듯하도다.'라고 하니, 김시습은 즉석에서 '임금님의 덕은 푸른 바다에 황룡이 튀어 오르는 듯합니다.'라고 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에 세종이 그에게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칭찬하면서 선물을 하사하였다. 이때 '5세신동'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해부터 13세까지 당대의 석학이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과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 윤상(尹祥)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역사서들과 제자백가서는 독학으로 깨우쳤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의 '學而時習之 不亦悅乎(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5세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인간사의 무상함을 깨닫고, 송광사에서 참선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그가 21세 되던 해 과거준비를 위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3일동안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불태운 뒤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하였다.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거열형(車裂刑)을 받고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서슬 퍼런 세조의 위세에 눌려 그 누구도 감히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시습은 밤을 틈타 사육신의 시신을 모아 노량진의 한강변에 임시로 묻어 주었다고 전한다.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서 김시습은 도를 행할 수없는 경우에는 홀로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이 시들은 '매월당집'의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에 수록되어 있다. 26세 때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면서 쓴 시들로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면서 쓴 시들로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같은 해 가을 한양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가 실시한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의 교정(校正)에 참여하여 열흘간 내불당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1465년에는 원각사 낙성식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았으나 일부러 뒷간에 빠져서 그 자리를 피하였다. 그해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가 되어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면서 성리학과 불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김시습은 이때부터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최초의 한문소설이라 일컫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하여 많은 시들을 써서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1471년 서울로 올라와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에서 머물렀다. 1481년 안씨(安氏)라는 여자와 결혼하고 환속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강릉과 양양, 설악산 등지를 유유자적하게 여행하면서 많은 시와 문장을 남겼다. 이때 쓰여진 시와 문장들은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실려 있다. '관동일록'은 김시습의 나이 49세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1483년(성종 14) 3월에 육경자사(六經子史)를 싣고 관동의 산천을 유람하러 떠날 때 남효온(南孝溫)이 전송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관동일록'은 김시습이 춘천을 거쳐서 강릉과 양양을 찾은 여정에 따라 시들이 엮여져 있다. 그는 춘천에서 그 지방의 풍물과 명승을 노래한 '소양인(昭陽引)', '춘사(春思)', '등소양정(登昭陽亭)', '숙우두사 宿牛頭寺)', '도신연(渡新淵)', '청평사(淸平寺)', '고산(孤山)' 등의 시를 남겼다. 김창흡(金昌翕)은 오언율시 '등소양정' 세 수에 대하여 세외지심(世外之心)을 노래한 절창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 첫 수를 들어보자.
鳥外天將盡
愁邊恨不休
山多從北轉
江自向西流
새 저편으로 하늘은 다하고
근심 속에 한은 하염 없구나
산들은 북쪽에서 굽어 나오고
강은 절로 서쪽을 향해 흐르네.
(등소양정)
김시습이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충청도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의 무량사였다. 그는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는데, 그의 초상화가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숙종 33)에 단종이 복위되자 그는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키가 작고 뚱뚱했던 김시습은 성격이 괴팍하고 예리하여 세인들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지행합일을 실천한 참다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그를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그는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그 유례가 드물게 유교와 불교, 도교에 두루 정통했던 사람이다. 그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불교사상을 수용하여 선가(禪家)의 교리를 유가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사상에는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이 서로 융합되어 있다. 그의 사상의 특징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 또는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었다. 이를 두고 이황(李滉)은 그를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이인(異人)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이단시되었으므로 김시습처럼 유교와 불교를 넘나드는 학문의 추구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기에 김시습은 조선시대 사상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김시습은 초선 초기의 사상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성리학(性理學)의 유기론(唯氣論)에 바탕을 두고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를 원융하게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지배체제의 합리화를 위한 명분론으로 이용된 주리론(主理論)을 버리고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신귀설(神鬼說)'과 '태극설(太極說)', '천형(天形)' 등에서 그는 불교의 미신과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 유교철학의 특징인 현실을 중심으로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을 배척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가 자비심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닦아 탐욕을 없애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부처의 자비심을, 한 나라의 왕이 백성들을 소중하게 여겨서 패려(悖戾)나 시역(弑逆) 등의 부도덕한 정치를 사라지게 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도록 하는 데 적용하였다. 백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애민정신은 '애민의(愛民議)'에 잘 나타나 있다. '귀신론'에서 그는 귀신을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철학적으로 인식하여 기의 이합집산에 따른 변화물로 보았다.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질탕하여 세상의 명리나 생업을 돌아보지 않고, 조선천지을 방랑하면서 시를 읊으며 살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표현하였다. 아니 그는 시를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실천적인 유교이념이 몸에 밴 그의 철학에서 보자면 그는 마땅히 경술(經術)과 문장으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하고 경국(經國)의 대업에 이바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단종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은 대역죄인이었으며, 쿠데타 정권에 참여한 벼슬아치들은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일 뿐이었다. 여기에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연과 선문(禪門)에 몸을 맡기고 방랑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시를 읊고 문장을 짓는 일 뿐이었다.
김시습은 평생을 자연 속에서 노닐다가 간 사람이다. 그는 평소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여 자연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자연'과 '한(閑)'이 가장 흔한 주제 또는 소재로 나타난다. 영원불변하는 자연은 현실에서 한번도 뜻을 펴보지 못한 그에게 귀의처나 마찬가지였다. 어지러운 현실에 대한 실망이 커질수록 그는 시와 문장 등 문학을 통해서 자연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고 비극적인 정서를 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벼슬길에도 나아가지 않고 산천을 찾아서 유연자적한 방랑생활을 한 그는 '한'의 일생을 살다 간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현실에 참여할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었으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바로 이러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시문집인 '매월당집'과 '매월당시사유록', 전기집(傳奇集)인 '금오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김시습은 천성적으로 시를 잘 쓴 사람이다. 그는 약 2천2백여 편에 이르는 시를 남겼다. 이들 시 가운데는 즉흥적으로 읊은 것이 많다. 그럼에도 이들 시에는 매우 깊고 오묘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만큼 그의 철학과 사상이 높고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시의 묘한 곳을 볼 뿐이지 성련(聲聯)은 문제삼지 않는다.'라고 말했듯이 그는 시의 체재나 성률을 초월해서 시를 썼다. 그의 대표작에는 '관동일록'에 들어 있는 '도중(途中)', '등루(登樓)', '독목교(獨木橋)', '유객(有客)'을 비롯해서 '산행즉사(山行卽事)', '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 '소양정(昭陽亭)',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 '고목(古木)', '사청사우(乍晴乍雨)', '무제(無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5언 율시 형식인 '도중'은 산촌의 늦가을 풍경과 함께 방랑의 길을 떠도는 시인의 서글픈 감회을 읊은 시다.
貊國初飛雪 春城木葉疏
秋深村有酒 客久食無魚
山遠天垂野 江遙地接虛
孤鴻落日外 征馬政躊躇
맥의 나라 옛땅에 첫눈이 날리니, 춘성에 나뭇잎이 듬성듬성해지네.
가을은 깊어 마을에 술이 있는데, 나그네 오랫동안 고기맛을 못보았네.
산은 멀어 하늘이 들에 드리웠고, 강물 아득해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외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날아가니, 나그네 발걸음 가는 길 머뭇거리네.
(도중)
'금오신화'는 한국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이 책은 김시습이 돌방에 감추고 세상에 내놓지 않았기에 간본(刊本)은 없고 필사본만 전한다. 그러다가 최남선(崔南善)이 일본에서 1653년(효종 4)에 초간되어 오쓰카(大塚彦太郎)의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던 목판본을 1884년(고종 21) 동경에서 재간행한 '금오신화'를 발견하여 1927년에 잡지 '계명(啓明)' 19호를 통해 국내에 소개하였다. 필사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은 1952년에 정병욱(鄭炳昱)이 발견한 것이다. '금오신화'의 완본은 전하지 않고,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 외에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 5편이 전부다.
'만복사저포기'의 내용은 이렇다. 전라도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 양생(梁生)은 만복사 구석방에서 외롭게 지내다 부처와 저포놀이를 해서 이긴 댓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는다. 그들은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는 훗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던 양생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와 만난다. 여기서 양생은 자기와 사랑을 나눈 처녀가 3년 전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처녀는 양생과 함께 부모가 차려준 음식을 먹고 나더니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면서 홀연히 사라진다. 어느 날 밤 양생의 꿈에 처녀가 나타나 '나는 타국의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양생은 장가도 들지 않고 처녀를 그리워하며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
'만복사저포기'는 살아 있는 남자와 죽은 여자의 사랑을 그린 애정소설로 명혼소설(冥婚小說) 또는 시애소설(屍愛小說)이라고도 한다. 김시습은 저포놀이를 좋아해서 자주 그 놀이를 했다고 하며, 또 2,30대 젊은 시절에는 홀로 산천을 떠돌며 사랑이 결핍된 고독한 삶을 살았다. 작품에는 그러한 작자 자신의 모습과 내면의 간절한 소망이 투영되어 있다. 이 소설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주인공의 갈등과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진다. 어쩌면 김시습은 살아 있는 남녀간의 사랑보다 훨씬 더 절절한 갈망을 표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한편 도교적인 초월로도 볼 수 있다. 일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주의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이생규장전'의 줄거리를 보자. 송도에 사는 이생(李生)이라는 총각은 서당으로 글공부를 하러 다니던 길에 최씨의 딸과 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눈다.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생이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더없이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홍건적의 난으로 가족들이 모두 죽고, 최씨녀(崔氏女)마저 홍건적의 겁탈을 피하려다 죽어서 이생만 살아남는다. 슬픔에 빠져 있던 이생 앞에 이때 최씨녀의 환신(幻身)이 나타난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생은 그토록 사랑하는 부인을 다시 만난 기쁨에 다시 행복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최씨녀는 이승의 인연이 다했다면서 저승으로 떠난다. 이생은 최씨녀의 뼈를 찾아 묻어준 뒤, 오매불망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죽는다.
'이생규장전'의 전반부는 살아 있는 남녀간의 사랑을, 후반부는 산 남자와 죽은 여자의 사랑을 다룬 애정소설이라는 점에서 명혼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전반부는 주인공이 효라는 윤리규범을 어기면서까지 힘겹게 사랑을 성취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주인공의 결혼이 순조롭지 못하고 장애에 부딪히는 것은 두 가문의 신분 또는 문벌의 차이 때문이다. 후반부는 강렬한 사랑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죽은 사람과의 사랑이라는 구성은 강한 사랑의 의지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와의 대립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장치이다. 이러한 장치는 전기성(傳奇性)을 띠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逆說)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매우 비극적이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소외된 신진사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의 처지와 그의 현실적 갈등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통해서 사회의 모순과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취유부벽정기'는 송도의 상인 홍생(洪生)이 평양의 부벽정에서 술에 취해 놀다가 기자(箕子)의 딸 기씨녀(箕氏女)를 만나 나라가 망한 사연을 듣고 울분과 감회를 나누다 헤어진 후 선계(仙界)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다. 홍생은 달밤에 술에 취하여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기자조선의 흥망을 탄식하는 시를 지어서 읊는다. 이때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나 홍생의 시를 칭찬하면서 음식을 대접한다. 두 사람은 시로써 서로 화답하며 즐기다가 홍생이 처녀에게 신분을 묻자, 그녀는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의 딸로서 선계에 올라가 선녀가 되었으며, 달이 밝아 고국 생각이 나서 내려왔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홍생의 청으로 기씨녀는 두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과 고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내용의 시를 읊고는 천명을 어길 수 없다며 사라진다. 홍생은 집으로 돌아와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병이 든다. 어느 날 홍생은 기씨녀의 도움으로 선계로 올라가는 꿈을 꾼 뒤 세상을 떠난다.
'취유부벽정기'는 기자조선의 도읍으로 알려진 평양을 배경으로 하고 역사적 인물인 기자왕을 등장시킴으로써 김시습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과 동일하지만, 정신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위만에 의해 기자조선이 멸망하고 그로 인해 기씨녀가 죽음에 이름으로써 한 인간의 삶이 좌절되는 아픔을 그리고 있기에 이 작품은 비극성을 띤다. 또 주인공이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결말도 비극적이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주인공이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는 결말은 그러한 비극성을 다소 완화시키고 있다.
김시습은 위만과 기자조선을 빌려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역사적 사건을 우의(寓意)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선녀와의 사랑과 신선이 된 주인공의 승천을 현실도피로 본다면 그것은 김시습의 현실주의적 사상과 모순되기에 이 작품에는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소설은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의지와 그러한 의지를 용납하지 않는 현실과의 대립을 통한 문학적 진실을 보여주는 한편, 도가사상을 바탕으로 동이족(東夷族)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존화사상(尊華思想)에 대한 반감을 드러냄으로써 주체적인 역사의식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남염부주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주에 사는 주인공 박생(朴生)은 고매하고 강직한 성품의 인물로 유학으로 대성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고 만다. 그는 '중용'과 '역경' 등 유교경전들을 읽고,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이치만 존재한다는 일리론(一理論)을 써서 극락이나 지옥, 귀신, 무당 등 모든 설을 부정한다. 어느 날 밤 꿈에 그는 저승사자에게 인도되어 염부주(炎浮洲)로 가서 그곳을 다스리는 염왕(閻王)을 만나 사상적인 담론을 벌인다. 박생은 도(道)의 요체를 가르쳐 달라는 염왕의 요청으로 유교와 불교, 미신, 우주,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사상을 설파한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재(齋)를 올리고 시왕상(十王像)에 공양을 올리는 폐단은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염왕은 박생의 올바른 사상과 참된 지식을 칭찬한다. 염왕은 박생이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기에 죄인들을 심판하는 염부주의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선위문(禪位文)을 내려주고는 세상에 잠시 다녀오라고 한다. 꿈에서 깬 박생은 가사를 정리하고 지내다가 얼마 뒤에 병이 들어서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이웃집 사람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박생이 염부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남염부주지'는 '남쪽에 있는 염부주 이야기'라는 뜻으로, '염부주'는 전생에 부모나 임금을 죽인 흉악한 죄인들을 다스리는,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는 섬을 말한다. 김시습의 사상을 밀도있게 다룬 최초의 작품인 이 소설에는 세 가지 사상이 나타나 있다. 첫째, 유교가 불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상이다. 철저한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주인공은 바로 작가의 철학사상이 투영되어 있는 인물로 불교의 미신적 타락상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둘째, 세상에는 현실세계만 존재할 뿐 극락이나 지옥같은 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이치도 오로지 정도(正道) 하나일 뿐이라는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미신적, 신비주의적인 세계관을 부정하고 현실적, 합리적인 세계관에 입각해 있는 작가 자신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셋째, 한 나라의 왕은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애민적(愛民的) 왕도정치 사상이다. 김시습은 꿈의 형식을 빌어서 천명과 민심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비난하는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이들 사상의 타당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러한 사상에 투철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탁월한 인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은연중 비판하고 있다.
'용궁부연록'의 줄거리는 이렇다. 문장이 뛰어나 그 재주가 조정에까지 알려진 한생(韓生)은 어느 날 꿈속에서 용궁으로 초대되어 간다. 용왕의 청으로 한생은 새로 지은 누각의 상량문을 지어준다. 용왕은 그의 재주를 크게 칭찬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접한다. 잔치가 끝난 뒤 한생은 용왕의 호의로 이 세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하게 된다. 용궁을 떠날 때 용왕은 그에게 귀한 구슬과 비단을 선물로 준다. 꿈에서 깨어난 한생은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명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용국부연록'도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자신의 뛰어난 지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하지만 그러한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불만이 나타나 있다. 한생이 용궁에 가서 상량문을 지어 용왕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선물까지 받았다는 줄거리는, 5세 때 이미 천재적인 글재주를 인정받아 조정에 초대되어 세종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선물을 하사받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이 반영된 것이다.
'금오신화'는 명나라 구우(瞿佑)가 쓴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도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미 나말여초부터 이 땅에는 전기(傳奇) 또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라 불리는 일련의 서사문학적 작품이 나타나고 있었다. '수이전(殊異傳)'의 '최치원 이야기', '보한집(補閑集)'의 '이인보(李寅甫) 이야기' 같은 명혼설화(冥婚說話)와 삼국유사의 '조신(調信) 이야기' 같은 몽유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문학사적 전통 위에 조선의 건국으로 구질서가 무너지고 등장한 사회체제와 더불어 새로운 사상사의 전개가 '금오신화'를 쓰게 된 배경이 되었다.
'금오신화'는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을 제외하고 모두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을 낭만적이면서도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있는 괴기담(怪奇譚)이다. 소설의 도처에는 시가 상당히 많이 삽입되어 있어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 표현에 독특한 효과를 주고 있는데, 이 시들은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들이다. 김시습은 전기체 소설의 형식을 빌어 어쩌면 그에게 가장 결핍된 것일 수도 있었을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 되었다.
다음은 그러한 염정시들 가운데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이 달밤에 만복사 배나무 아래를 거닐면서 외로운 심정을 읊은 시와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이 담장 너머로 최씨녀에게 날려 보낸 연시, '취유부벽정기'에서 기씨녀가 사라지고 나서 홍생이 가슴에 남은 이야기를 다 전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면서 읊은 시다.
一樹梨花伴寂廖, 可憐辜負月明宵.
靑年獨臥孤窓畔, 何處玉人吹鳳簫.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지만
휘영청 밝은 달밤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젊은 이 몸 홀로 누운 호젓한 창가로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네.
翡翠孤飛不作雙, 鴛鴦失侶浴晴江.
誰家有約敲碁子, 夜卜燈花愁倚窓.
외로운 저 물총새는 제 홀로 날아가고
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노니는데,
바둑알 두드리며 인연을 그리다가
등불로 점치고는 창가에서 시름하네.
(만복사저포기)
巫山六六霧重回, 半露尖峰紫翠堆.
惱却襄王孤枕夢, 肯爲雲雨下陽臺.
무산 열두 봉에 첩첩이 싸인 안개,
반쯤 들난 봉우리는 붉고도 푸르러라.
외로운 이 내 꿈 수고롭게 하지 마오,
구름과 비가 되어 양대에서 만나 보세.
相如欲挑卓文君, 多少情懷已十分.
紅粉墻頭桃李艶, 隨風何處落?紛.
사마상여 본받아서 탁문군 꾀어 내려니,
마음 속 품은 생각 벌써 흠뻑 깊어지네.
담머리의 저 요염한 저 복사 오얏꽃은,
바람에 흩어지며 고운 봄을 앗아가네.
好因緣邪惡因緣, 空把愁腸日抵年.
二十八字媒已就, 藍橋何日遇神仙.
호연이 되려는지 악연이 되려는지,
부질없는 이내 시름 하루가 삼추 같네.
28자 시 한 수에 가약 이미 맺었나니,
남교 어느 날에 고운 님 만나질까.
(이생규장전)
雲雨陽臺一夢間, 何年重見玉簫還.
江波縱是無情物, 嗚咽哀鳴下別灣.
비개더니 구름이야 하염없이 한 꿈이라
가신 님은 언제나 퉁소 불며 돌아올꼬
대동강 푸른 물결 무정하다 마소서
님 여읜 저곳으로 슬피 울며 나는구나.
(취유부벽정기)
'금오신화'는 조선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최씨녀를 비롯한 굳은 의지를 지닌 조선인들을 등장인물로 하여 조선사람의 풍속과 사상, 감정 등을 표현함으로써 문화적 주체의식이 드러나 있다. 이 소설의 귀신이나 염부주, 염왕, 용왕, 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들은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독특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주인공과 세계의 대결구도를 빌어서 문제의식을 더욱 예리하게 부각시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케 하는 구실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법으로 주인공의 이상과 요구를 용납하지 않는 현실세계의 모순과 횡포에 맞서 그러한 세계를 개조하여 화해에 이르고자 하는 갈망이 반영된 것이다. 김시습은 이(理)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주자학의 주리론이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론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기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주기론, 즉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성리사상에 입각해서 사물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인식하려고 했다. 따라서 '금오신화'는 신비주의적, 미신적 세계관에 대한 합리주의적,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김시습의 철학사상적 투쟁의 문학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고전소설들이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금오신화'는 유가적 선비의 입장을 고수하던 주인공들이 불교의 인연관이 투영된 만남을 가진 다음 끝에 가서는 하나같이 죽거나 세상을 등진다는 도가적 결말을 보인다. 유자(儒者)와 선승(禪僧), 방외인(方外人)으로서의 삶을 살다 간 김시습은 서로 이질적인 유불선 3교의 사상을 원융하게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완성된 사상적 토대 위에 그 자신의 문학적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금오신화'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세상을 등지는 것은 운명에 대한 순종이나 패배가 아니라 모순된 현실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결단의 표현이며, 현실을 극복하려는 초월의지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비극적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지만, 그러한 비극성은 시에 의한 대상의 미화와 섬세한 묘사로 인해 비장한 아름다움을 띠게 된다.
조선왕조를 세운 주체세력은 주자학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삼아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집권층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지배세력이 재편되는 와중에서 소위 신진사류로 불리는 소외된 지식인들은 조선왕조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학문적 능력이 탁월했지만 정치경제적 토대가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초선 초기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현실의 모순에서 비롯된 심한 갈등 속에서 고독하면서도 불우한 일생을 보낸 비극적 인물이다. '금오신화'는 바로 이러한 작가의 기구한 일생이 투영된 자서전적 성격을 갖는다.
이 소설은 몇 가지 한계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내용이나 기교, 작가의식에 있어서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또한 한국소설의 출발점이자 후대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금오신화'는 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금오신화'는 나중에 일본의 전기문학인 '도기보코(伽婢子)'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김시습은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한 한국 최초의 역사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소재로 인식하였다. 그는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興亡論)'에서 역사적 위기도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무엇보다도 인간의 바른 마음을 중요시하였다.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본이론이기도 하다. 여기서 성리사상과 불교사상의 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에서는 삼대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생활에 공헌을 한 바 있다고 해석하면서 고대문화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세종대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를 문화사상사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발전적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김시습의 부도 바로 오른쪽에는 풍계(楓溪)라고 새겨진 종형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이 부도의 주인공이 시문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풍계집(楓溪集)'이라는 문집을 남긴 조선 후기의 승려 풍계 명찰(楓溪 明察, 1640∼1708)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부도전과 조금 떨어진 언덕배기에는 능허당대사(凌虛堂大師)의 부도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능허당대사의 행적도 확인할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부도전을 떠난다.
*무량사 일주문(앞)
*무량사 일주문(뒤)
만수산 기슭에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다. 부도전을 내려와 만수골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무량사 일주문(一柱門)에 이른다. 일주문 앞쪽에는 '萬壽山無量寺(만수산무량사)', 뒤쪽에는 '光明門(광명문)'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무량사에 와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친견하면 마음은 밝은 빛으로 가득차서 이 문을 나서게 되리라. 그래서 광명문인 것이다.
앞뒤 두 편액의 글씨는 모두 차우 김찬균(此愚 金瓚均)이 쓴 것이다. 특이하게도 편액의 오른쪽 위 귀퉁이에 한반도 지도가 두인(頭印)으로 찍혀 있고, 그 지도 안에는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통영 미륵산 관음선원의 보광루(普光樓), 양산 통도사의 범종루(梵鐘樓), 화성 용주사 천보루(天保樓) 안의 홍제루(弘濟樓)의 편액 글씨도 김찬균의 작품이다. 설악산 신흥사, 두륜산 대흥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도 그가 글씨를 쓴 편액들이 많이 있는데, 그 편액들에는 모두 '일체유심조'가 새겨진 한반도 지도가 있다고 한다. 일종의 낙관인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를 건넌다.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의 왼쪽 언덕에 세워진 김시습의 시비로 향한다. 왠지 쓸쓸하게 보이는 시비 앞에는 작은 돌탑들이 여러 개 보인다. 시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반달이 뜬 어느 날 산사의 풍경을 읊은 시다.
半輪新月上林梢
山寺昏鐘第一鼓
淸影漸移風露下
一庭凉氣透窓凹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종이 가장 먼저 울리네.
달 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 틈으로 스미네.
*무량사 당간지주
천왕문(天王門)의 오른쪽 담장 앞에는 무량사당간지주(無量寺幢竿支柱, 충남유형문화재 제57호)가 서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에 설치하여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곳을 말한다. 깃발을 걸어두는 긴 장대가 당간, 당간의 양쪽에서 장대를 지탱해주는 두 개의 돌기둥이 당간지주이다. 기단부는 앞뒤 두 개의 판석으로 대석을 놓고, 그 사이에 당간 받침돌을 올려놓았으며, 그 양 옆으로 돌기둥을 세웠다. 당간 받침돌의 중앙에는 당간을 받는 홈을 파서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돌기둥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 양 옆면 가운데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겼다. 돌기둥의 상단은 둥글게 모깎이를 하면서 한 차례 굴곡을 주어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돌기둥의 안쪽면에는 상하 두 곳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높이 2.84m인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출하고 질박한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무량사 천왕문
돌계단을 올라 천왕문으로 들어가니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이 험상궂고 무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천왕문을 나서면 서방극락정토도량(西方極樂淨土道場)이자 아미타기도도량(阿彌陀祈禱道場)인 무량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량사는 넓직하고 평탄한 대지에 전각들이 비교적 드문드문 배체되어 있어 시원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석등(石燈)과 5층석탑(五層石塔), 극락전(極樂殿)은 천왕문에서 중정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다. 천왕문 서쪽 가까이에 있는 ㄱ자형 건물이 요사채인 심검당(尋劍堂)이고 그 뒤로 좀 떨어져서 앉아 있는 건물은 적묵당(寂默堂)이다. 극락전의 서쪽에는 우화궁(雨花宮), 우화궁의 서쪽 언덕배기에는 영정각(影幀閣)과 영산전(靈山殿), 천불전(千佛殿)이 삼각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화궁에서 작은 계곡 건너편에 있는 작은 전각은 산신각(山神閣)이다. 중정의 동쪽에는 명부전(冥府殿)과 범종각(梵鐘閣)이 있으며, 범종각 앞에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큰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다.
*무량사 극락전 앞의 5층석탑과 석등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 무량사는 신라 말기 사굴산문의 개조인 통효 범일국사(通曉 梵日國師, 810~889)에 의해서 창건되었다. 무량사는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한 바 있으며, 임진왜란의 방화로 사찰 전체가 불타버린 뒤 조선 인조 때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량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인 신라 말기의 고승 무량 무염(無量 無染, 801~888)이 잠시 머무르기도 했던 절이다. 또 김시습은 세상을 피해 이 절에서 은둔의 말년을 보냈는데, 그가 입적하자 승려들은 절 곁에 영각(影閣)을 짓고 그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신이(神異)한 행적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 일옥(震默 一玉, 1562~1633)도 무량사에서 극락전의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빚은 술을 마시면서 시심삼매(詩心三昧)에 들곤 하였다.
무량사는 보물 다섯 점과 지방유형문화재 여덟 점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에는 5층석탑(보물 제185호)를 비롯해서 석등(보물 제233호), 극락전(보물 제356호), 미륵괘불탱(彌勒掛佛幀, 보물 제1265호), 김시습초상화(보물 제1497호) 등이 있고, 지방문화재에는 김시습부도(충남유형문화재 제25호)와 당간지주(충남유형문화재 제57호), 5층석탑출토유물(충남유형문화재 제100호), 범종(충남유형문화재 제162호), 극락전후불탱화(極樂殿後佛幀畵, 충남유형문화재 제163호), 극락전소조아미타삼존불상(極樂殿塑造阿彌陀三尊佛像, 충남유형문화재 제164호), 지장보살 및 시왕상일괄(地藏菩薩및十王像一括, 충남유형문화재 제176호), 삼전패(三殿牌, 충남유형문화재 제177호) 등이 있다.
무량사에서는 조선시대 상당수의 경판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는 '법계성풍수륙승회수재의궤(法界聖風水陸勝會修齋儀軌)', 1522년(중종 17)에는 '몽산화상육도보설(夢山和尙六道普說)', 1470년에서 1494년 사이에는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源經)'이 간행되었다.
*무량사 극락전
*무량사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상(자료출처-문화재청)
무량사 주불전인 극락전에 이르니 불경을 염송하는 스님의 낭낭한 독경소리가 들려온다. 청아한 목탁소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스님의 염불소리는 그야말로 천상의 음악이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산사에 울려 퍼지는 염불소리에 번뇌 한 자락을 벗어놓는다. 스님의 염불소리에서 법희선열이 느껴진다. 스님은 지금 염불삼매경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저 행복감, 저 희열...... 알 듯도 하다.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우주 삼라만상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고, 또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빌면서 합장삼배를 올린다.
극락보전 또는 극락전은 불자들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이자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인도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전각이다. 극락전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토종이나 화엄종 등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는 무량수전 또는 수광전(壽光殿)이라고 하며,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아미타전이라고 한다. 극락정토가 서방에 있으므로 극락전은 대개 동향으로 지어서 불자들이 서쪽을 향해서 참배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극락전 안에는 주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들어서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지혜의 광명으로 중생을 비추어 한량없는 힘을 얻게 하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보살로 봉안한다. 극락전에는 충남유형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된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후불탱화는 주로 서방극락정토를 묘사한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봉안하지만 극락의 구품연화대를 묘사한 극락구품탱화(極樂九品幀畵)나 아미타탱화를 봉안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의 부처 가운데 서방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로 주로 정토종에서 숭배하는 구원불이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또는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한다. 아미타불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 정토교(淨土敎)이다. 아미타불이라는 이름은 범어로 아미타유스(amita-yus, 무량한 수명을 가진 자, 無量壽), 아미타브하(amita-bhas, 한량없는 광명을 지닌 자, 無量光)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으로 전해질 때 '아미타'라고 음사(音寫)되었다.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아미타불과 무량수불이라는 명칭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기원은 부파불교의 불타관(佛陀觀)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량수와 무량광이라는 관념은 원시불교보다 부파불교의 불타관 전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두 관념은 석가모니를 표현한 말이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석가모니를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의 불타관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보살사상(菩薩思想)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석가모니가 대승불교 보살의 이상상(理想像)으로 여겨지면서 구원불로서 숭배되었던 시기에 출현한 부처로 보인다.
정토종의 근본 경전은 아미타불을 주제로 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 등 정토삼부경(정토경)이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 이승에 있을 때 법장(法藏)이라는 보살이었다고 한다. 그는 더없는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48원(願)을 세웠다. 그 가운데 18번째 서원에서 자신이 부처가 되면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만든 정토에 나서 열반에 이를 때까지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오랜 수행을 거쳐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 지금으로부터 10겁(劫) 전에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그 뒤 아미타불은 사바세계에서 십만억불토(十萬億佛土) 떨어진 극락세계인 서방정토를 주재하면서 지금도 설법을 하고 있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 정토의 대표적인 장소로 삼고 있는 서방극락세계는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중생들은 오로지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만 해도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위없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아미타불의 48대원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정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48대원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만 들어보면, '내가 부처되는 국토에는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三惡道)의 불행이 없을 것이다. 내 국토에 나는 이는 이 생에서 바로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서 바로 부처를 이룰 것이다. 내 광명은 한량이 없어 적어도 백천억 나유타 부처님 세계를 비추게 될 것이다. 내 국토에 나는 이의 목숨이 한량이 없을 것이다. 어떤 중생이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내 국토를 믿고 열 번만 내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가서 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국토에 가서 나는 보살들은 모두 나라연천(那羅延天)과 같은 굳센 몸을 얻게 될 것이다. 내 국토는 여러 가지 보배와 향으로 되어 비길 데 없이 훌륭하여 그 향기가 시방세계(十方世界)에 풍겨 그 냄새를 맡는 이는 모두 거룩한 부처님의 행을 닦게 될 것이다. 또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들이 내 광명에 비추기만 하면 그 몸과 마음은 부드럽고 깨끗하며 하늘 사람보다도 뛰어날 것이다. 다른 세계의 보살로서 내 이름을 들은 이는 부처님 법에서 물러나지 아니할 것이다.' 등이다. 이처럼 아미타불은 중생들의 물질적, 정신적인 완성 뿐만 아니라 그 정신적 완성의 환경인 국토의 장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서방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이러한 아미타불 신앙은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된 이후 종파를 가리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6,7세기경부터 이 땅에는 아미타신앙이 대중화되어 신라시대에는 집집마다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원효(元曉)는 아미타염불을 널리 권장하였다. 그는 정토교를 전파하기 위해 아미타염불을 권장하면서 경향각지를 누비고 다녔으며, 정토종과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원효 이후의 많은 신라 교학승(敎學僧)들도 아미타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기도는 자연스럽게 아미타불에 귀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아미타불상으로는 경주 구황동 황복사(皇福寺) 3층석탑 출토 금제아미타불좌상(金製阿彌陀佛坐像)을 비롯하여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 불국사(佛國寺) 금동아미타불좌상(金銅阿彌陀佛坐像) 등이 유명하다. 염불수행을 통해서 극락왕생을 했다는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설화'나 현신의 몸 그대로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달달박박이설화', 피나는 염불정진을 하여 서방정토로 날아갔다는 '욱면(郁面)설화' 등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신라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아미타신앙은 선(禪)과 극락정토가 회통되는 특징이 보인다. 선과 아미타염불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선정불이(禪淨不二)의 전통은 원효가 '오직 마음이 정토요, 성품은 아미타불과 같다(唯心淨土同性彌陀).'고 천명한 이후, 지눌(知訥)과 보우(普愚), 나옹(懶翁), 기화(己和), 휴정(休靜) 등을 거쳐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 고종 때 요세(了世)가 설립한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와 조선시대 각 사찰에서 결성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에서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통하여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한 것에서는 아미타신앙의 또 다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독존도(獨尊圖)나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극락회상도 등 아미타불을 주제로 한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밖에도 왕생자를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장면을 묘사한 아미타내영도(來迎圖),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도해한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가 있다. 관경변상도는 마가다왕국의 왕사성(王舍城)에서 일어난 부자간의 왕권쟁탈에 얽힌 비극적인 내용을 그린 관경서품변상도(觀經序品變相圖)와 마가다왕국의 왕비 위데휘(韋提希)에게 아미타불 및 그 세계를 관상하는 16가지 방법을 표현한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로 나뉜다.
현재 한국의 사찰에는 대부분 극락전을 갖추고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전의 아미타불상은 9종의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 중에서 한 가지나 묘관찰인(妙觀察印)을 취하게 되며, 좌우의 협시보살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안치한다. 현재 아미타불은 불교신앙에서 타력신앙의 중심부처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아미타신앙은 12세기에 형성된 정토종과 13세기에 형성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지금도 대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신앙되고 있다. 동아시아와는 달리 티베트와 네팔에서는 구세주로서의 아미타불에 대한 숭배가 널리 유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비로자나불과 아촉불, 보생불, 불공성취불과 더불어 영원히 존재한다는 다섯 구원불(선정불)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 왔다. 티베트와 네팔에서는 역사에 실존했던 부처인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화현으로 본다. 아미타불의 상징색은 빨강색이고, 상징 자세는 선정인(禪定印)이며, 상징 사물은 발우(鉢盂), 타고 다니는 것은 공작이다. 그리고 배우자는 판다라, 성(姓)은 라가(Rga), 상징 요소는 물, 상징 음절은 '바(ba)' 또는 '아(h)'이다. 또 상징 온(skandha,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은 상(sanjna, 감각적 대상에 대한 지각), 상징 방향은 서쪽, 상징 감각은 미각, 상징 감각기관은 혀, 인체에서 그가 머무는 장소는 입이다. 티베트에서는 아미타불과 무량수불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티베트의 라마의식에서는 무량수불을 숭배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무량수불은 흔히 화려한 장식에 왕관을 쓰고 영원한 생명의 보석들이 나온다는 신비스러운 항아리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극락정토왕생신앙이 강했기 때문에 극락전은 대웅전에 못지 않은 화려함을 보인다. 불단은 화문(花紋)과 비천문(飛天紋)으로 장식하고, 본존불의 위에는 닫집인 천개(天蓋)를 설치하여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나 극락조 등을 조각하기도 한다. 주불전이 극락전인 사찰에서는 '극락'을 의역한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양교나 안양문, 안양루 등을 갖추기도 한다. 대표적인 극락전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주심포 양식의 목조건물인 경북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제18호)과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無爲寺極樂殿, 국보 제13호), 경북 영천의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제15호) 등이 있다.
보물 제356호인 무량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장중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빛 바랜 단청과 거칠게 갈라진 기둥, 삭은 흔적이 역력한 살문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극락전의 편액글씨는 김시습이 무량사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쓴 것이라고 한다. 극락전은 사찰의 불전으로서는 드물게 밖에서 보면 2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위아래층이 통층(通層)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이고, 2층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 정면에는 기둥 사이에 모두 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칸은 네 짝, 그 옆 협간(夾間)은 두 짝, 그 옆의 툇간(退間)은 한 짝을 달았다. 좌우 측면의 앞쪽 한 칸과 뒷면 가운데 칸에도 출입문을 달았으며, 그밖의 기둥 사이에는 판벽을 쳤다.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얹은 다포식(多包式)으로, 포작(包作)의 수는 아래층이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 데 비해 위층은 내외사출목(內外四出目)이다. 공포 맨 위의 쇠서(牛舌)의 형태는 초화형(草花形)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살미첨차가 한 장의 장식판처럼 연결되어 운공(雲工, 초새김한 짧은 부재) 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
마루를 깐 내부에는 주위 네 면에 한 칸 너비의 바깥둘레 칸을 두고 그 안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평면을 구획한 후 고주(高柱)를 빙 둘러세웠다. 그 중앙부 뒤쪽에 대형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했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되어 네 귀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2층의 각 기둥 사이에는 원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光窓)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판벽으로 막아 놓았다. 천장은 종보(宗樑) 위에 우물천장을 만들고, 그 아래쪽에 있는 대들보로부터 측면 기둥에 걸쳐 충량(衝樑)을 설치했으며, 그 끝을 용머리로 장식하여 매우 화려한 모습이다. 무량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으며, 장식적 특징이 매우 풍부하게 보이는 우수한 불교건축물이다.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상은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거대하다. 삼존불좌상 가운데 본존불상의 높이는 5.4m, 좌우 두 협시보살상의 높이는 4.8m에 달한다. 흙으로 빚은 중앙의 아미타불은 나발로 표현된 머리 위에 반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원통형의 정상계주로 각각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머리 모양은 정의대왕대비(貞懿大王大妃)의 시주로 1628년에 조성된 수종사탑 출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유사하다.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과 코, 입이 비교적 작게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옷주름은 좌우대칭으로 늘어져 도식화되어 있다. 밋밋한 가슴 위에 군의(裙衣)를 주름잡아 묶은 단순한 띠매듭 등에서 조선조 후기의 불상 양식으로 넘어가는 단순화가 보인다. 투박하고 큰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다리에 올려놓아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관음보살좌상은 신체를 치장한 영락 장식이 크게 생략된 반면에 보관(寶冠)은 중앙의 화불(化佛)을 중심으로 화문(花紋)과 화염문(火焰紋), 봉황문(鳳凰紋), 운문(雲紋) 등을 오려붙여서 육중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고 오른손은 다리 위에 올려놓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구품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세지보살좌상은 정병(淨甁)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세 줄로 늘어진 목걸이 장식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군의 상단이 겹쳐져 띠매듭은 보이지 않는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손은 아미타구품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복장품(腹藏品)에서 나온 발원문에 의하면 이 삼존불좌상은 1633년(인조 11)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1476년경에 조성된 전남 강진의 무위사목조아미타삼존불상(無爲寺木造阿彌陀三尊佛像)이나 1500년경에 제작된 무량사탑 출토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金銅阿彌陀佛三尊佛坐像) 등 조선 전기의 아미타삼존불 형식은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하고 그 좌우의 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무량사 아미타삼존불은 지장보살이 빠지고 대세지보살로 대치된 점이 특이하다. 무량사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상은 손 모양과 목걸이 장식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무량사 미륵괘불탱(자료출처-문화재청)
무량사에는 국가지정 보물 제1265호인 미륵괘불탱을 소장하고 있다. 1627년(인조 5)에 제작된 이 탱화는 5단의 화면을 이어서 하나의 화면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에는 두 손으로 용화수 가지를 받쳐들고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쓴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여덟구씩의 화불이 그려져 있다. 미륵불의 옷은 온갖 장식들로 치장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다. 보관의 끝에는 6구의 불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등 59구의 얼굴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다소 네모진 얼굴은 눈과 속눈썹이 가늘고, 입술은 도톰하며, 콧수염은 빈약한 모습으로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머리광배(頭光背)와 몸광배(身光背) 밖으로 오색구름과 함께 배치된 작은 불상들은 마치 미륵불을 수호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몸광배의 연꽃과 모란꽃 무늬가 화려함과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 탱화는 녹색과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 화려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무량사 미륵괘불탱은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면이 있지만, 위엄 있는 모습과 중후한 형태미로 볼 때 17세기 전반기 탱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무량사 5층석탑과 석등
극락전 바로 앞에는 높이 7.5m의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장중하고 우아한 이 석탑은 보물 제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기단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1층기단은 땅속에 묻혀 있어 그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없지만 면석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1층 갑석은 12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밑에는 부연(副椽,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을 조각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3단의 기단받침이 있다. 2단의 기단받침 중 1단과 3단받침은 낮은 받침이며, 2층받침은 높고 광대한 호형(弧形, 활모양)받침을 각출한 것이 특징이다. 2층기단은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이나 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감은사지동서탑(感恩寺址東西塔)의 수법과 동일하게 4개의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각 면 중앙에 일주식(一柱式)의 탱주(撑柱, 받침기둥)를 표현하였다. 우주와 탱주 사이의 면석들은 모두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갑석은 8매로서 기단을 마감하였는데 밑에는 3단의 갑석받침인 부연을 조각하였다.
1층탑신은 너비에 비해 높이가 낮아 안정감을 주며, 4우주와 면석은 서로 다른 석재로 조성하였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우각(隅角)에 이르러 경쾌하게 반전되어 있다. 옥개 낙수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매우 미약하다. 받침과 옥개부는 각각 별석으로 4매씩이며, 추녀 밑으로 한 줄의 홈이 돌려 있고 그 안에 받침을 삽입할 수 있도록 패어 있다. 받침의 수는 위로 올라갈수록 감소되고 있다. 2층 이상의 탑신과 옥개석도 1층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장식하였다. 상륜부(相輪部)는 낮은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 있다. 노반은 탑신부의 형식을 따라 신부에 4우주를 갖추고 별개의 노반 갑석으로 마무리하였다. 갑석 밑부분에는 빗물이 탑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절수구(切水溝)를 마련하였으며, 윗면에는 반구형의 복발(覆鉢)과 원형의 앙화(仰花)로 장식하였다.
이 탑의 전체적인 모습과 양식은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중부지방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석탑양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이 넓고, 상층 기단받침의 양식이나 기단의 면석부재들이 모두 별석으로 구성된 점도 미륵사지석탑이나 정림사지오층석탑, 감은사지석탑 등과 같은 수법이다. 옥개석의 추녀곡선 처마 밑에 설치된 절수구는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탑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다. 따라서, 이 탑은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조화시켜서 조성한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백제의 고토에 자리잡은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인한 백제의 기법과 통일신라의 시대적인 양식을 함께 계승한 데서 온 결과다.
1971년 이 탑의 해체 보수공사를 할 때 9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5층탑신 속에서는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었는데, 2단의 층단을 이룬 석조대좌 위에는 청동외합(靑銅外盒)이 올려져 있었고, 그 안에 금동의 내합(內盒)이 들어 있었다. 내합 속에는 수정제소병(水晶製小甁)과 다라니경(陀羅泥經), 자단목(紫壇木), 방분향(芳粉香), 금속병(金屬甁)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정병에서는 청색 사리 1과(顆), 화병 모습의 금속병에서는 회백색 사리 93과가 나왔다. 또, 제1층 탑신에서는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 제3층탑신에서는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이 발견되었다. 1층 탑신에서 발견된 아미타삼존불의 본존인 아미타좌상은 얼굴을 앞으로 수그린 자세에 아미타구품인(중품하생인, 中品下生印)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좌상은 아미타불과 손모양은 같으나 방향이 다른 아미타구품인(중품하생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3개의 산모양의 관 중앙에는 부처가 새겨 있고, 늘어진 목걸이 장식이 화려하다. 지장보살좌상은 관음보살과 모습은 같으나 삼산관이 없고 손모양이 반대인 아미타구품인(중품하생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3층 탑신에서 나온 금동보살좌상은 관과 두 손이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5층석탑 앞에는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높이 2.5m의 석등이 서 있다. 석등은 시방세계에 영원히 진리의 불을 밝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8각의 이 석등은 화사석(火舍石, 점등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여러 개의 판석을 조립한 방형의 지대석 위에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옥개석과 보주를 얹은 모습이다. 원형의 연화대(蓮花臺)로서 복엽8판(複葉八瓣)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는 하대석은 길쭉한 8각간주(八角竿柱)를 받고 있으며, 그 위에 연꽃이 새겨진 상대석이 올려져 있다. 상대석 위에 놓인 화사석은 부등변 8각형으로서 화창(火窓)이 뚫려 있는 4면은 넓고 나머지 면은 좁다. 8각의 옥개석은 추녀의 반전과 처마의 경사가 잘 조화되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정상부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작은 보주(寶珠)가 솟아 있다. 이 석등의 조성연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석등을 보고 나서 극락전 동편에 있는 명부전(문화재자료 제389호)에 들러 지장보살과 시왕상 전에 합장삼배를 올린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이기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각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창건되었다. 무량사 명부전은 19세기 사찰건축물로서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익공양식과 목판재 벽체 등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충남유형문화재 제 1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의 불단 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등 지장삼존(地藏三尊)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 시왕이 각각 5왕씩 대칭으로 안치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판관(判官)과 사자(使者), 인왕(仁王) 등이 늘어서 있다. 불단에 안치된 다양한 모습의 존상들은 화려한 색채와 옷에 새겨진 섬세한 문양 등을 볼 때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량사 명부전의 지장보살과 시왕상은 종교적,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크며,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지장전 오른쪽에 있는 범종각은 지은 지 아직 얼마 안 되는 듯 단청색이 선명하다. 지금쯤 범종이 울려도 좋으리라. 잠시 눈을 감고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만수골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마음으로 듣는다.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가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 악도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지옥중생까지 제도하는 데 범종의 신앙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범종소리를 오래도록 들으면 생사의 고해를 건너서 불과를 얻는다고 한다. 범종각 곁에 서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고목을 정겹게 한 번 안아주고..... 우화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량사 우화궁
우화궁 앞에서 우화(雨花, 또는 雨華)의 의미를 생각한다. 우화는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꽃, 즉 꽃비를 말한다. 우화궁이란 명칭은 법화경(法華經)에서 유래한다. 법화경 서품에 '이때에 하늘에서 만다라화(曼陀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陀羅華), 만수사화(曼殊沙華), 마하만수사화(摩訶曼殊沙華)가 부처님 좌상과 여러 대중 앞에 비오듯 우수수 쏟아졌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 법화경에 나타난 상서로운 여섯장면(法華六瑞) 가운데 세번째가 우화서(雨花瑞)인데,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하려고 삼매에 들었을 때 하늘에서 네 가지 종류의 꽃이 비오듯 쏟아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화는 석가모니가 설법할 때 일어나는 상서로운 조짐인 것이다. 우화궁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량사 영정각(앞)과 천불전(뒤 우측), 영산전(뒤 좌측)
*김시습영정(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화궁을 떠나 김시습을 영정으로나마 만나기 위해 영정각으로 향한다. 영정각에는 어찌 된 일인지 현판이 보이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 영정에 참배하려고 했으나 너무 어두워서 겨우 윤곽만 눈에 들어올 뿐 진품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불을 밝히려고 하였으나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날이 밝을 때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하고 영정각을 나온다.
국가지정 보물 제1497호인 김시습 영정은 무색 도포에 평량자(平凉子) 형태의 흑립(黑笠)을 쓰고 오른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선 자세로 두 손을 마주잡은 모습을 반신상으로 비단에 그린 가로 48.5cm, 세로 72cm 크기의 채색화이다. 이 영정은 김시습이 생존했을 때 그려진 조선 전기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도포의 팔과 소매의 옷주름 형태가 17세기 초반의 공신도상(功臣圖像)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필법과 흡사한 점이나 얼굴에 분홍색을 배채(背彩)하고 도포에 흰색을 배채한 것은 18세기 초상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점, 조선 초중기의 초상화가 전반적으로 강건하고 호무(豪武)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비해 김시습의 영정은 대체적으로 단순하고 우아하며 세련되어 17세기 중후반경의 허목(許穆)이나 송시열(宋時烈) 및 윤증(尹拯) 같은 산림학자들의 초상화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는 점, 그리고 김시습이 사대부 사이에서 고절(孤節)로 존경받고 그의 초상화가 여러 차례 모사(模寫)된 것도 산림학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17세기 중후반경의 일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무량사 소장본은 조선 중후기 숙종대를 전후한 시기의 모사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중 한 점이 무량사에 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무량사본은 사대부들의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던 화원 화가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화법으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자화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송시열은 김시습의 영정이 수염을 기르되 승려의 옷을 입은 승려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량사본의 흑립과 귀 사이에 위로 쓸어 올린 머리카락, 두 손을 마주잡은 공수(拱手) 자세 등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상인데, 이는 이 영정이 사대부들의 시각에서 다시 제작되었다는 증거다. 평량자 형태의 흑립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그려진 초상화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흑립의 기본 형태를 가는 먹선으로 그리고 나서 모정 부분은 짙은 농묵(濃墨)으로 칠하고 양테 부분은 이보다 약간 흐린 농묵으로 칠하여 두 부분을 미묘한 명암의 차이가 나도록 구분하고 있다. 갓끈의 구슬도 짙고 가는 농묵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그 내부는 같은 농묵으로 칠하였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맑고 옅은 살색을 배채하고, 윤곽선과 주름선은 옅은 갈색으로 농담의 차이를 주면서 그렸다. 콧등과 속눈썹이 있는 눈꺼풀 부분은 짙고 강한 필선으로 처리하였다. 눈은 눈동자의 동그란 윤곽을 가는 먹선으로 그리고, 흰자위는 맑은 담묵(淡墨)으로 칠한 다음 동공을 짙은 먹으로 칠하여 강조하고 있다. 의복은 옅은 홍색으로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채색하였다. 빠른 필세로 그린 옷주름선은 직선이 내함된 유연한 곡선으로 처리하여 적절하게 단순화되고 추상화되어 있다. 약간 찌푸린 듯한 눈매와 총명한 기운이 넘치는 눈, 꼭 다문 입술, 미간의 주름,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묘사된 수염 등은 주인공의 청정하고 초연한 내면세계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영정각 바로 뒤에 있는 천불전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진 지 이미 꽤 오래되어 어둑어둑하다. 천불전도 불이 꺼진 채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천불전에는 천수관세음보살상(千手觀世音菩薩像)을 중앙에 봉안하고 그 뒤로 천불을 안치하였다. 천불전 안을 들여다 보니 천수관음상은 윤곽만 간신히 보일 뿐이고 천불상은 분간조차 할 수 없다. 마음의 눈으로 천수관음상과 천불에 합장삼배를 올린다. 천수관세음보살(천수관음)은 천 개의 팔에 달린 각각의 손바닥에 눈이 있는 관음으로 본래 이름은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이며, 천비천안관음(千臂千眼觀音) 또는 대비관음(大悲觀音)이라고도 한다. 한량 없이 많은 손과 눈으로 무한한 자비를 베푸는 보살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상징적으로 표현된 보살인 동시에 대표적인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다.
'천수천안'의 '천'은 광대무변함을 뜻한다. '천수'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위대한 작용을 의미하며, 특히 중생을 지옥고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소원을 성취시켜준다고 믿어지고 있다. 천수관음상은 일반적으로 42개의 손과 27개의 얼굴을 지닌 형상인데, 42개의 손 가운데 합장한 손을 제외한 40개의 손에는 모두 소지물이 있다. 나머지 950여 개의 손은 광배 상태의 작은 손으로 표현되어 있다. 서역이나 티베트에는 실제로 천 개의 손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일본에서는 천수관음이 병을 없애주어 생명을 연장하고 죄악를 소멸시켜주는 공덕이 있는 보살로 신앙되어 왔다. 일본 도쇼다이사(唐招提寺)에는 실제로 천 개의 손을 가진 유명한 목조천수관음입상이 조성되어 있다.
천불전은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이 전각은 삼신불과 삼세불, 천불, 삼천불 등 다불사상(多佛思想)상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천불에는 과거 장엄겁천불(莊嚴劫千佛, 과거천불)과 현재 현겁천불(賢劫千佛, 현재천불), 미래 성수겁천불(星宿劫千佛, 미래천불)이 있는데, 천불전에는 일반적으로 현겁천불을 봉안한다. 현세에 출현하는 천불을 소개한 경전인 '현겁경(賢劫經)'에 의하면, 현겁은 세상이 한 번 개벽한 뒤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매우 장구한 기간을 이른다. 이 기간에 구류손불(拘留孫佛)과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 등 천 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한국에 현존하는 천불전 중에는 직지사 천불전과 대흥사 천불전이 유명하며, 그밖에 구례 화엄사와 강화 보문사 등에도 천불전이 있다.
고색이 창연한 영산전 앞에는 일반적인 석등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불꺼진 영산전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감돈다.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던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따라서 불교의 성지(聖地)인 영축산을 현현시킨 영산전에 참배하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거의 모두 영산전이 있는데, 특히 천태종사상(天台宗思想)을 계승한 사찰에서는 영산전을 본전으로 삼고 있다.
영산전에는 대개 팔상탱화를 봉안하기에 이 전각을 팔상전(捌相殿)이라고도 한다. 팔상탱화는 도솔천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는 모습(兜率來儀相)과 룸비니공원에서 부처님이 탄생하는 모습(毘藍降生相), 동서남북의 4문을 둘러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모습(四門遊觀相), 성문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瑜城出家相), 설산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고행하는 모습(雪山苦行相), 보리수나무 밑에서 악마의 항복을 받는 모습(樹下降魔相),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鹿苑轉法相), 사라쌍수나무 밑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雙林涅槃相) 등 여덟 가지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표적인 영산전으로는 충북 보은군의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하여 전남 순천시의 송광사 영산전(보물 제303호), 경남 양산시의 통도사 영산전(경남유형문화재 제203호) 등이 있다.
*무량사 산신각
마지막으로 산신각에 들렀다. 산신각의 손바닥만한 마당 한켠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다. 산신각에는 다행히도 불이 밝혀져 있다.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표정의 산신 전에 예를 올린다. 김시습의 영정은 원래 이 산신각에 걸려 있었는데, 영정각을 짓고 나서 그리로 옮겼다고 한다. 산신각 앞에 서서 잠시 무량사 경내를 바라다 본다. 오늘은 무슨 인연법으로 무량사에 발길이 닿았던 것일까?
*무량사 야경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극락전에서 여전히 들려오는 스님의 염불소리를 뒤로 하고 무량사를 떠난다. 천왕문을 나서면서 불이 환하게 들어온 무량사 경내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본다. 무량사에 와서 아미타불을 비롯한 여러 보살과 김시습을 만났다. 이들은 이제 내 나그네 인생길에 있어서 동반자가 될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내가 넘어야 할 산들이기도 하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다. 공자나 예수, 마호메트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내 자신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고, 공자가 되고, 예수가 되고, 마호메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가 공자가 예수가 마호메트가 아무리 많더라도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는 법!
마음을 비추는 빛을 한아름 안고 광명문을 나서다.
2007년 4월 22일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아프리카공화국 기행-요하네스버어그로 가는 길 (0) | 2007.09.29 |
---|---|
동해바다 외로운 섬 독도기행 (0) | 2007.08.25 |
월명산 금지사, 아미산 광덕사를 찾아서 (0) | 2007.07.09 |
부소산 고란사를 찾아서 (0) | 2007.06.26 |
백제의 고도 부여기행 (0) | 2007.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