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월명산 금지사, 아미산 광덕사를 찾아서

林 山 2007. 7. 9. 19:29

오전에는 백제인의 문화와 숨결을 찾아서 봄기운이 완연한 부여(扶餘)의 백마강(白馬江), 낙화암(落花岩), 부소산(扶蘇山), 고란사(皐蘭寺) 등을 주마간산격으로 바삐 둘러보았다. 구드래 나루터 입구에 있는 쌈밥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월명산(月明山, 544m)의 독성기도도량(獨聖祈禱道場)인 금지사(金池寺)와 아미산(峨嵋山, 636m)의 수행정진도량(修行精進道場)인 중대암(中臺庵), 상대암(上臺庵), 천신기도도량(天神祈禱道場)인 광덕사(廣德寺)를 차례로 돌아보기로 한다. 백마강에 가로놓인 백제대교를 건너 부여에서 보령으로 연결되는 국도를 따라서 부여군의 흥산면을 지나 내산면으로 향한다. 산과 들은 지금 한창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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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월명산 지도

 

월명산과 아미산은 충남 보령시와 부여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에 나란히 솟아 있는 산들이다. 월명산은 보령시 미산면과 부여군 내산면, 아미산은 보령시 미산면과 부여군 외산면과 경계가 된다. 1998년에 완공된 보령댐에 의해서 생긴 보령호(保寧湖)의 동쪽에 위치한 아미산과 월명산은 가을이면 산 전체가 불타는 듯한 화려한 단풍이 아름답다. 보령댐은 성주산과 아미산의 계곡물이 서해로 흘러가는 웅천천(熊川川)을 막아 세운 댐으로 상류지역에 오염원이 없어 수질이 매우 맑고 깨끗하다. 아미산과 월명산은 예로부터 산삼이 많이 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정한 사람이 출입하면 화를 입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두 산은 비록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자못 웅장하고 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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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산 금지사 표지석

 

부여군 흥산면을 지나 내산면 지치리 지티고개 조금 못미친 곳에서 좌회전하여 월명산으로 오르는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 입구에는 '大韓佛敎曹溪宗 月明山金池寺 獨聖祈禱道場(대한불교조계종 월명산금지사 독성기도도량)'이라고 쓴 커다란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산기슭에는 하얀 조팝나무꽃과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색의 산벚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갓 피어난 나뭇잎들은 온 산을 연두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생명기운이 넘쳐나는 산길을 오르노라니 어느덧 내 가슴에도 푸르른 물이 든다.  

 

산줄기의 칠팔부 능선을 따라가는 임도에서는 외산면 가덕리와 반교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능선의 북서쪽 저 끝에 아미산이 솟아 있다. 남서쪽으로 산줄기를 따라 계속해서 올라 월명산 남동쪽 팔구부 능선의 가파른 곳에 자리잡은 금지사에 이른다. 금지사 창건불사를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이 높은 곳에 절을 짓느라고 고생 꽤나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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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산 금지사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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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사 법당의 관세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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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사 법당의 지장보살상

 

법당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듯 단청칠이 묻어날 것만 같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법당의 현판이 안 보인다. 금지사는 독성기도도량이고 이 법당은 대웅전에 해당하므로 십중팔구 독성(獨聖)을 모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각의 이름은 독성각(獨聖閣)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독성각은 독성 즉 독각(獨覺)의 성자를 모시는 전각으로 일반적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봉안한다. 당우의 이름은 아무렇게나 짓는 것이 아니기에 나중에 이 전각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나반존자 대신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그 옆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 전에 세상의 평화와 중생들의 복락을 빌면서 합장삼배의 예를 올린다.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을 듯한 표정이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반존자상은 어디로 갔을까? 언젠가 법당 뒤 금지에 묻혀 있던 나반존자상을 발견해서 봉안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후 이 불상은 여러 번 도둑을 맞았는데, 그때마다 훔쳐간 사람의 집에 흉사가 생겨서 몰래 도로 갖다 놓곤 했다고 한다. 정말 영험한 불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반존자는 천태산에서 스승 없이 홀로 도를 닦아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깨달았기에 독성(獨聖)이라고 한다. 독성을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부른다. 독성신앙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불교 특유의 신앙이다. 중국 불교에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없다.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나 오백 나한의 이름 가운데도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찾아볼 수 없고, 불경에도 그 이름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계 일부에서는 나반존자가 말세의 중생에게 복을 주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되고 있기에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로 보고 있다.

 

독성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찰에 널리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거센 탄압을 받으면서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도래하자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 결과다. 또한 나반존자의 신통이 매우 영험하고 세상에 희유할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하여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소원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믿음도 독성신앙이 널리 퍼지게 된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신도들이 독성각에서  독성기도(獨聖祈禱)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는 독성신앙에 단군신앙이 결합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독성각이나 삼성각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에 매우 긴 눈썹을 하고 있으며, 대개 미소를 띠고 있다. 이에 대해 최남선(崔南善)은 '나반존자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민족고유신앙의 것이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여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명산에 신당을 세우고 산신 또는 선황을 신봉하여 왔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절의 불전 위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라고 함으로써 나반존자상이 단군상임을 밝히고 있다.

 

지장보살은 이미 여래의 경지를 증득한데다가 무생법인(無生法印)을 얻었지만 지옥에 떨어진 육도(六道)의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부처의 국토에 머물러 있겠다는 서원을 한 대비보살(大悲菩薩)이다. 또한 지장보살은 억압받는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 나쁜 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그는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나 석가모니에게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악한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적도 있다.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자신의 성불(成佛)을 포기한 보살이다. 그는 악도(惡道)에서 헤매거나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이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은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이라는 원을 세웠다. 그래서 지장보살을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에게는 '정한 업을 면하기 어렵다(定業難免)'는 불교의 업보설이 적용되지 않는다. 업보사상은 모든 중생의 운명은 전생의 업에 의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으로, 누구든지 이 업보에 의해서 결정된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장보살에게 귀의해서 해탈을 구하면 정해진 업도 모두 소멸되고, 악도를 벗어나서 천상락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지장보살은 부처가 없는 세상에서 모든 중생의 행복을 책임지는 보살이다. 그는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바탕으로 모든 악업의 중생들을 열반의 길로 인도한다. 무엇보다도 지장보살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중생을 지옥의 고통에서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이다. 그는 지옥문을 가로막고 있으면서 중생들이 지옥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나아가 지옥 그 자체를 부수어서 지옥고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

 

지장보살에 관한 경전에는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과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등이 있다. '지장십륜경'은 지장보살의 물음에 대하여 석가모니가 열가지 불륜(佛輪)을 설한 경전이다. '지장보살본원경'은 조상들을 지옥으로부터 천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하는 데 대한 공덕이 열거되어 있는 경전인데, 효행을 주제로 한 지장보살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실려 있다. 그리고 '점찰선악업보경'은 중생의 선악과 그 업보를 점치는 경전으로 부처의 명으로 지장보살이 선법(禪法)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인도에서 4세기경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민중들 사이에 널리 신앙되어 온 보살이다. 중국의 지장신앙은 신행(信行, 540~594)이 말법시대를 맞아 말법사상에 바탕을 둔 지장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삼계교(三階敎)를 세우면서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에 있는 지우화산(九華山)은 지장보살의 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에서 지장신앙의 대중화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圓光)이 '점찰경(占察經)'을 기초로 한 신도조직인 '점찰보'를 설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9세기경부터 지장보살이 어린이들의 보호자인 동시에 서민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보살로써 널리 숭배되었다. 

 

지장신앙은 그 자비심으로 인해 일찍부터 대표적인 불교신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지장보살은 조상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 후손들에 의해서 특히 널리 신앙되었다. 현실의 죄악이나 고통을 구원해 주는 보살로서는 관세음보살이 으뜸이지만, 죽은 뒤의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구제해 주는 보살은 지장보살이 으뜸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육도윤회를 심판하는 명부(冥府)의 구세주로 등장하게 되었고, 한국의 사찰에서 독립적으로 세워지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으로 자리잡았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주존이기 때문에 지장전,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있다고 해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또 그 좌우에 시왕을 안치한다. 그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하고, 판관(判官), 녹사(錄事), 장군(將軍)상 등을 갖춘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지장탱화, 시왕상 뒤에는 시왕탱화를 후불탱화로 걸기도 한다. 

금지사의 지장보살상은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왼손에 들려 있고, 오른손은 내려놓은 자세로 손가락을 나란히 편 채 손바닥이 앞으로 향하고 있다. 전형적인 지장보살의 모습은 원래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은차림에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있다. 시무외인은 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 주기 위하여 나타내는 형상인데, 팔을 어깨높이까지 들고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물건을 주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시무외인 대신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의 근기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에 육도윤회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한국의 지장보살상은 대개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을 여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를 들고 있는데, 이는 '연명지장경(延命地藏經)'에 근거한 것이다.     

 

한국에는 지장보살과 관련된 의식이 많이 있다. 매년 7월 24일에 거행되는 지장재(地藏齋)와 백중날에 개최되는 우란분회(盂蘭盆會)는 그 대표적인 의식이다. 백중날인 7월 15일은 과거와 현재의 죽은 어버이를 위하여 시방의 부처와 승려들에게 공양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참회의 날인데, 이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지장보살이 죽은 사람의 넋을 맞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의 기능까지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장보살은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한 49재(齋) 때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는 보살로 숭배되고 있다.

나반존자와 지장보살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이다. 나는 내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있으니 나반존자는 나의 대선배님이시요, 또한 나는 모든 중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극락세계에 간 후 마지막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지장보살은 나의 대스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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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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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절벽에 모셔진 석조나반존자상

 

법당 뒤 오른쪽 바위절벽 밑에는 금지(金池)가 있다. 법당에 봉안된 나반존자상이 묻혀 있었다는 황금연못이다. 바위의 색깔 때문인지 물이 금색으로 보이는 듯도 하다. 법당의 뒤편 절벽 바위틈에는 석조나반존자사유상이 놓여져 있다. 나반존자는 무엇을 그리도 곰곰히 생각하고 있을까? 바위절벽의 한쪽에는 목이 잘려나간 여러 개의 석조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석조상들은 무슨 까닭으로 저렇게 목이 잘려나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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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사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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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사 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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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사 나한전의 석가모니불과 나한상

 

금지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산신각(山神閣)은 전망이 상당히 좋다. 백마강은 물론이고 멀리 부여읍내까지도 보인다. 산신령님께도 합장삼배의 예를 올린다. 산신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인 산신각은 국조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산신을 모신다. 산신은 불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가 나중에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다. 산신의 모습은 대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 불교에서 산신은 산중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外護神)과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산신각은 지금 전국의 거의 모든 사찰에 갖추어져 있다.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사람들은 대개 산신각을 찾아와 기도를 올린다. 

 

금지사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나한전(羅漢殿)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상들의 자세와 복장이 참으로 다양하고 특이하다. 달관한 듯하면서도 해학적인 나한상들의 표정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인간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나한상들에서 낯익은 친근감이 느껴진다. 수도승들을 형상화한 상들이라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그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들 중에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을 안치하는 전각이다. 오백인의 아라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 16대아라한상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한다. 오백나한은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소승(小乘)의 최고 교법인 아라한과를 얻은 오백성중(五百聖衆)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오백나한이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믿었기에 많은 나한전이 생기게 되었다. 오백나한전으로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에 있는 거조암(居祖庵) 영산전(靈山殿)의 오백나한상과 청도군의 운문사 오백나한전이 유명하다.

 

석가모니불은 부처로 모시는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B.C 624~544)를 말한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성불한 뒤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붙여 준 존칭인 석가모니는 범어 샤카무니(Sakyamuni)의 음역(音譯)으로 석가족에서 나온 성자라는 뜻이다. 그는 중인도 카필라(Kapila)국의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태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칠일만에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그를 맡아서 키웠다. 그는 성장하여 이웃 나라의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태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던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29세가 되던 해 어느날 삶의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길을 찾아서 마침내 출가를 하였다. 그후 6년 동안 여러 스승을 찾아 다니기도 하고 고행도 해 보았지만 깨달음을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수행방법을 바꾸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조용한 명상에 들었다가 칠일만에 드디어 대각을 이루고 35세의 나이에 부처가 되었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는 베나레스의 녹야원에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에게 초전법륜을 전하고, 45년 동안 인도의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설법을 하고 교단을 일으켰다.

 

80세가 되던 해 석가모니는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자신이야말로 등불이요 법이야말로 등불이다.'라는 유명한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석가모니의 임종게를 통해서 불교가 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학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해탈을 얻은 석가모니는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 내고자 한량없는 지혜와 무한한 자비심을 현시한 도덕적 완성자였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신앙대상은 당연히 석가모니불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은 신격화된 절대적 존재라기보다는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을 여실하게 깨달은 진리의 대발견자로서 숭배와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부처(佛)는 '진리를 증득한 자'의 의미와 '진리를 중생들을 위해 널리 펴는 자'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불교는 바로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신앙형태인 것이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불교 교단 내에서는 부처란 누구이며, 불신(佛身)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불신관은 근본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라는 불교의 발전단계를 거치면서 최종적으로는 삼신설(三身說)로 정리되었다. 삼신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用身), 변화신(變化身)이고, 다른 한 가지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 또는 응신(化身)이다. 사실 이 두가지 삼신설은 말만 다를 뿐 서로 큰 차이가 없다.

'장엄경론'의 '자성신과 수용신, 변화신은 실로 모든 부처의 몸을 구분한 것이며, 제1신은 다른 두 신의 소의(所依)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세친(世親, 바수반두)은 '자성신은 법신으로서 전의(轉依)를 특질로 한다. 수용신은 이에 의해 회중륜(會衆輪)에서 법의 수용을 이루는 것이며, 변화신은 그 변화에 의해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 '섭대승론'에서는 '자성신이란 여러 여래의 법신이다. 수용신이란 부처의 각종 회중륜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법신을 소의로 한다. 변화신이란 법신에 의지해서 출가하여 외도(外道)가 있는 곳에서 수행하고, 고행을 이루고, 보리를 증득하고, 법륜을 굴리고 대열반에 들어간다.'라고 각각 설명하고 있다. 

 

즉 법신은 깨달음의 본체, 보신은 수많은 공덕의 과보로 받은 몸, 화신은 지혜와 자비심을 본질로 하는 깨달음을 중생의 이익을 위해 회향하려는 목적에서 현세에 태어난 몸을 말한다. 여기서 변화신은 바로 석가모니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엄경'이나 '대승기신론'에서는 삼신간의 관계를 좀더 알기 쉽게 체(體)와 상(相), 그리고 용(用)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곧 진여의 체는 법신이고, 상은 보신이며, 용은 화신 또는 응신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불은 화신불이라고 할 수 있다. 

 

금지사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월명산을 내려간다. 문득 석가모니의 일생을 노래한 명상곡인 '싯다르타의 출가'가 떠오른다. 가끔 나 혼자서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곤 한다.

 

동쪽문 나갔을 적에 늙은 자 모습 보았네
세월이 흘러간 뒤에 그의 환영 보는 것같아.
남쪽문 나갔을 적에 병든 자 모습 보았네
괴로움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모습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속에 번민하셨네.

서쪽문 나갔을 적에 죽은 자 모습 보았네
육체에 영혼이 떠난 제일 슬픈 이별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속에 번민하셨네.

북쪽문 나갔을 적에 구도자 모습 보았네
남루한 옷차림속에 눈빛만은 총명하였네.
반가운 마음 깨달은 마음 출가의 길 결심하셨네.

왕궁의 부귀영화도 한순간 던져버리고
외로운 구도의 길을 구름따라 헤메이셨네.
보리수나무 그늘아래서 명상속에 깨달으셨네
우주의 진리 생명의 실상 명상속에 깨달으셨네.

 

지티고개로 도로 내려와 국도를 타고 보령시 미산면으로 향한다. 도화담리에서부터 보령호가 보이기 시작한다. 왼쪽으로는 아미산, 오른쪽으로는 푸르른 보령호를 바라보면서 호반길을 달린다. 중대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좌회전해서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면 중대암과 상대암이 있는 적시골이다. 적시골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인근 주민들이 중대암 계곡으로 피난했을 때 사찰이 불타면서 왜군들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데서 유래한다.  

 

598봉 서쪽 계곡에 있는 중대암과 상대암은 879년(신라 헌강왕 4)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중대암을 창건하면서 이 산의 이름을 아미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후 고려 숙종 21년 중대암을 중수할 때 남쪽과 서쪽에 지장암과 미타암을 창건했으나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왜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1522년(조선 중종 17)에 김기, 최삼오 등 두 선사가 중건한 중대암과 상대암은 1988년 전통보존사찰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중대암 남쪽 40m 지점에 있는 이끼 낀 3기의 부도탑은 이 암자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적시골에서 중대암을 지나 바위너덜길을 따라 올라가면 십여미터의 바위절벽 밑에서 석간수인 영천약수가 솟아난다. 영천약수는 도화담약수와 더불어 보령 2대약수로 치는 명약수이다. 바위절벽 아래에는 수백 년 전에 세운 '영천(靈泉)'이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영천약수에서 가파른 바윗길을 약 15분 정도 오르면 상대암이다. 상대암에는 높이 20m의 바위절벽에 4m 크기로 조각된 마애불상이 있다. 이 마애불의 조성연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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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로 가는 길에 바라본 아미산의 중대암과 산벚꽃

 

중대암의 부도탑과 영천, 그리고 상대암의 마애불을 돌아보려고 하였으나 입구에서 수도정진도량이라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대신 월명산과 아미산 사이의 598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에 솟은 472봉의 북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광덕사를 돌아보기로 한다. 광덕사로 오르는 계곡의 산기슭에는 산벚꽃이 활짝 피어 있다. 산에 들에 봄꽃이 만발하면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가파른 산길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중대암이 저만치 바라다 보인다. 지금은 어느 사문이 저 암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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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광덕사

 

 

대한불교내외종 소속 사찰인 광덕사는 산이 빙 둘러막은 골짜기의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암자 입구에는 물이 졸졸 흐르는 수각이 있어 길손들이 마른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수각의 위에는 작은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법당으로 오르는 돌계단과 산기슭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이 싱그럽다. 광덕사 주지인 비구니 스님이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준다. 천신기도도량이라는 광덕사는 아직 사세가 빈약하여 사찰이라기보다는 여염집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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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 법당의 약사삼존불

 

법당에는 본존불인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삼존불 앞에서 이 세상의 병으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구원해 주기를 빌면서 합장삼배로 예를 올린다. 한의사의 길을 가고 있는 나에게 약사여래는 대선배님이자 영원한 스승이기도 하다.  

 

약사여래를 숭배하는 약사신앙(藥師信仰)은 티베트와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 널리 퍼져 있는 신앙형태이다. 약사여래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하는데, 중생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부처이다. 또한 그는 구원불(久遠佛)의 하나로 동방 극락세계를 주재하고 있다는 아축불(阿?佛)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일본의 일부 종파에서는 역시 구원불의 하나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티베트에서 약사불은 흔히 약용 과일인 미로발란 열매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중국 불교에서는 약사여래의 권속인 12신장(十二神將)을 역법에 있어서의 12지(十二支)와 연관시키고 있다. 약사경변상도는 당나라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8세기에 이르러 정형화되었다. 일본의 약사신앙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에 들어와서 가장 성행하였다. 지금도 일본의 천태종이나 진언종, 선종에서는 여전히 약사여래에 대한 숭배가 성행하고 있다. 일본에서 약사여래는 흔히 한 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푸른 피부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약사신앙의 소의경전인 약사여래본원공덕경(藥師如來本願功德經, 약사경)은 약사여래가 동방에 불국토(佛國土)인 정유리국(淨瑠璃國)을 건설한 뒤, 교주가 되어서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을 세워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없애주며, 나아가 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고 서원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藥王)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고통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십이대원을 세웠으며, 그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다. 십이대원을 통해서 약사여래는 중생들을 병고에서 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중생, 사도에 빠진 자, 파계자, 범법자 등도 구제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생들은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면서 발원하면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 온갖 재앙과 횡사를 면하고 싶은 자들도 구제를 받을 수 있으며,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 태풍과 폭우, 가뭄, 전염병의 유행 등 나라의 큰 재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에서 약사여래의 상을 만지거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질병과 재앙을 면할 수 있다는 약사신앙(藥師信仰)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 대단한 설득력과 호소력를 가지고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약사신앙은 통일신라 초기부터 중요한 불교신앙 형태의 하나가 되면서 경흥(憬興)과 태현(太賢) 등의 고승들을 중심으로 약사경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탑의 기단이나 1층의 탑신에 약사여래의 권속(眷屬)을 조각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을 읽어 선덕여왕의 병을 고쳤고, 경덕왕대에 경주 분황사에 거대한 약사불을 안치하였다.'는 기록에 따르면, 7세기 중엽에 이미 약사불이 널리 숭배되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에는 크게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약사여래를 본존불로 하는 기원법회인 약사도량(藥師道場)이 자주 열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약사여래의 명호를 외우면 국가의 재난이 소멸된다는 약사여래의 본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약사여래는 현재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미륵불과 더불어 가장 널리 신봉되는 부처의 하나이다. 대표적인 약사여래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백율사(栢栗寺)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과 굴불사지(掘佛寺址) 동면(東面) 약사불좌상(藥師佛坐像) 등이 있다. 약사여래도로서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협시(脇侍)보살로 한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12신장을 권속으로 거느린 약사신중도(藥師神衆圖), 동방 정유리세계를 그린 약사정토변상도(藥師淨土變相圖) 등이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방위신앙(方位信仰)인 사방불(四方佛)신앙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사방불 중 약사여래는 항상 동방불로 사찰에서 동향(東向)의 약사전에 주불로 봉안되었다. 약사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보살로 배치된다. 약사여래의 권속으로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신중(八部神衆), 십이지신(十二支神)이 있다. 약사신앙은 관음신앙이나 미륵신앙처럼 독립된 신앙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약사신앙은 약사여래만이 지니고 있는 구병(求病)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한국의 불보살 신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약사신앙의 연원은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된 밀교(密敎)에서 찾을 수 있다. 이론과 승려중심의 부파불교(소승불교)의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불교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사상(空思想)과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사상(有思想)을 함께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와 힌두교, 민간신앙까지 수용하여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밀교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서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래서 밀교 수행자는 입으로 진언(眞言)을 외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삼밀과 불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를 ‘잡밀(雜密)’, 그 이후의 밀교를 ‘순밀(純密)’이라고 한다. 인도밀교 중 중국에 먼저 들어온 것은 잡밀이다. 잡밀은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에 전래된 '대공작왕신주경(大孔雀王神呪經)'과 '관정경(灌頂經)'이 번역되면서 전파되었으며, 순밀은 725년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 753년 불공(不空)이 금강정경을 번역하면서 전래되었다. 밀교는 송(宋)나라때까지 크게 발전하는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잡밀계통의 중국밀교가 들어왔다. 신라에서는 7세기 초에 잡밀이, 8세기에 순밀이 전해지면서 밀교가 발전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민중신앙으로 자리잡았다.

교학이론보다는 실천수행을 중시한 한국의 밀교는 선(禪)이나 정토신앙, 천태종(天台宗) 등과 결합되어 발전하였는데, 고려시대 이후에는 의식이나 진언염송을 통한 밀교신앙으로 나아갔다. 한국의 밀교는 전쟁과 재액의 방지, 질병의 치료 등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였다. 밀교의 이러한 성격은 불교를 세속화된 기복신앙의 성격을 띠게 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밀교의 한 형태로 나타난 약사신앙은 민간신앙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사신앙은 불교 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불교계에서는 이를 수용하여 사찰에 약사전(藥師殿)을 건립하고 약사여래를 봉안하여 불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였던 것이다.

 

관세음 또는 관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타(Avalokita, 觀하다)와 이슈와라(i○vara, 신, 自在天)의 합성어인 아바로키테슈와라(Avalokite○vara)의 한역어(漢譯語)로 '모든 곳을 살피는 자' 또는 '세상의 주인'을 뜻한다. 밀호(密號)로는 정법금강(正法金剛) 또는 청정금강(淸淨金剛)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구원을 바라는 중생의 근기에 알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푸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그는 석가모니불의 열반 이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모든 재앙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주며, 구제할 중생의 근기에 따라 33가지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난다. 변화가 무쌍한 33가지의 몸으로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대략 칠관음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성관음(聖觀音)이 본신이고 나머지 여섯 가지 모습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아귀도를 구제하는 성관음은 가장 단순한 형태로서 한 손에 연꽃을 든 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다. 연꽃은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는데,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 것을 뜻하고,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는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미래에 피어날 불성을 각각 상징한다.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은 천개의 팔을 가진 모습을 하고 있고, 생사의 고해를 떠도는 중생을 구제하는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은 올가미 밧줄이 독특한 상징이며, 축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마두관음(馬頭觀音)은 사나운 표정을 한 말의 머리를 하고 있다. 아수라의 고통을 구제하는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은 머리가 열 하나이고 팔이 둘 또는 넷을 가진 모습이며, 인간의 고통을 구제하는 준제관음(准提觀音)은 18개의 팔을 가지고 앉아 있는 가장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천상의 고통을 구제하는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은 6개의 팔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여의주를 들고 있다.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정토교(淨土敎)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삼고 있다.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의 중대(中臺) 팔엽원(八葉院)의 서북방에 머물면서 동시에 연화부원(蓮華部院)의 주존불이기도 한 관세음보살은 흔히 죽은 이들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은 3~5세기 무렵에 한역된 정토계 경전들에 근거한 것이다. 중국에서 관음신앙의 주요 경전은 관음경(觀音經)이었으며, 이 경전은 3세기 이후에 대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법화경(法華經)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관음상과 관음신앙은 후에 한국이나 일본의 관음신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법화경 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고 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誓願)한 보살이다. 이렇듯 관세음보살은 온갖 재앙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해 주는 현세이익 신앙의 대표적인 보살이다. 자력구원의 특성을 지녔던 종래의 불교신앙에 비해 관음신앙은 타력구원의 요소가 강하다. 현세이익과 타력구원의 보살로서 관세음보살은 인도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 일본의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받았으며 널리 신봉되었다. 불교의 여러 보살들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은 팔리어경전을 신행(信行)의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보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승불교의 상좌부(上座部)불교에서조차 신봉할 정도로 모든 불교문화권에서 가장 널리 숭배되고 있으며, 또한 종교문화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수많은 종류의 불상과 신앙을 낳기도 하였다.


관세음보살의 상주처는 인도 남부의 말나야(Malaya)산 동쪽에 있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국의 유명한 관음도량인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사찰명은 바로 보타락가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 절강성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산(普陀山) 진제사(晋濟寺)도 관세음보살의 상주처로 알려져 있다. 티베트에서는 포탈라산이 관세음보살의 정토로 여겨지고 있으며, 역대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신봉되었다. 특히 한국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기도 도량이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낙산사를 비롯 강화도의 보문사(普門寺)와 남해의 보리암(菩提庵)이 가장 유명하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으로서 이 세상에 출현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이 보살상의 머리에 쓰고 있는 천관(天冠)에는 대개 아미타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이란의 종교문화적 영향을 받아 북서 인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관세음보살이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했는데, 여기서 다른 나라란 이란을 말한다. 이란의 수신(水神)이자 풍요의 여신인 아나히타는 당시 간다라 지방에서 나나이야 여신 및 아르드후쇼 여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이 여신이 불교화된 것으로 보인다. 손에 물바가지를 든 관음상이나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수월(水月)관음,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楊柳)관음 등은 아나히타 여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관세음보살의 기원이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관음신앙은 3~7세기 북부에서 가장 번성하였다. 1세기경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에 전해진 관음신앙은 6세기 무렵에는 거의 모든 불교사찰에서 관음상을 모실 정도로 널리 퍼졌다. 관음신앙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민간신앙이 관음신앙에 수용되면서 관세음보살은 남성적 보살로 변모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송대(960~1126) 이전에는 관세음보살이 대부분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초기의 대승경전인 법화경과 대아미타경에서도 관세음보살은 남성적 보살로 나타난다. 당시의 그림이나 조각상들도 남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그후 관세음보살은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동시에 갖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지금도 관세음보살은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분간하기가 사실상 매우 어렵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이 남성과 여성의 속성을 비롯한 모든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여자가 성불할 때는 일단 남자로 바뀐 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정토계 경전의 '변성 남성' 사상과도 관련이 있다. '변성 남성' 사상은 당시 인도에 만연했던 여성 경시 풍조를 인정하는 한편, 깨달음에 있어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상이 절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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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 법당의 칠성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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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 법당의 신중탱화

 

약사삼존불의 오른쪽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畵), 왼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걸려 있다. 검은색과 금색이 주조인 칠성탱화는 그 느낌이 차분하면서도 엄숙하다.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신중탱화는 화려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탱화는 불교 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리는 불화를 말한다. 그러기에 불교 경전의 내용을 모르면 탱화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국 불화의 기원은 이미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굴암 조각의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이나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의 구도가 현재의 팔부신장도와 거의 같은 점 등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 불화는 여러 존상을 함께 그릴 경우 주존(主尊)을 돋보이도록 상방(上方) 높은 곳에 배치하고 있는 반면에 조선시대의 불화는 보살상이나 불제자상이 주존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고려 탱화가 다분히 귀족적 취향을 나타내고 있다면 조선 탱화에는 민중적 취향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귀족성향의 불교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중 불교로 전개된 한편 여러 보살신앙이 발전한 데서 온 결과다.  

그런데 부처는 절대적인 경지에서 보면 형상도 없고 형체도 없으므로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를 표현하려면 가상(假相)을 통해서 나타낼 수 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법신불(法身佛)과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 등 삼신불(三身佛)로 구분하는데, 화신불은 바로 법신과 보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화신불은 곧 가상의 불신으로 법신불멸의 설법을 남기고 입멸(入滅)한 실존인물인 석가모니가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부처를 형상화할 때는 가상불인 석가모니에 근거를 두고 표현하게 된다. 석가모니의  설법은 역시 가상의 문자에 의해 경전으로 만들어졌다.

 

경전에 나타난 석가모니의 일생은 팔상(八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팔상이란 석가모니가 중생을 제도하려고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인 여덟 가지 상(相)을 말한다. 팔상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을 가리키는데, 내용상 강도솔상(降兜率相), 탁태상(託胎相), 강탄상(降誕相), 출가상(出家相), 항마상(降魔相), 성도상(成道相), 설법상(說法相), 열반상(涅槃相)으로 구분할 수 있다.  

팔상도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일생은 천(天)과 인(人), 불(佛)의 세 가지 모습을 띠고 있다. 이 가운데 석가모니의 불상(佛相)은 성도상과 설법상, 열반상이다.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이 담긴 경전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화엄경(華嚴經), 아함경(阿含經), 방등경(方等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순이다. 석가모니의 생애중에서 화엄경은 성도의 불심(佛心), 법화경은 전법륜, 열반경은 입열반(入涅槃)의 불심을 각각 담고 있다. 한국 사찰의 전통적인 탱화는 바로 화엄경과 법화경의 내용 가운데 석가모니의 성도상과 설법상, 열반상에 중점을 두고 도설화한 것이다. 한국의 탱화는 화엄경과 법화경에 바탕을 둔 후불탱화(後佛幀畵)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현재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탱화는 이 후불탱화에서 분화된 것이다.  

법화경은 팔상 중에서 전법륜상에 해당한다. 법화경의 도설은 영산법회의 광경을 도설화한 것으로 이를 일명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라고 한다.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으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장소이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보좌(寶座)에 앉아 보살들과 십대제자들 앞에서 설법을 할 때 호법선신인 사대천왕(四大天王)과 팔부신장(八部神將)들이 도량을 호위하고, 천선녀(天仙女)가 회상의 장엄한 광경을 찬탄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한국 사찰의 후불탱화는 석가모니의 설법 광경을 도설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영산회상도에 나오는 제성중(諸聖衆)에는 당시 인도의 토속신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대승불교가 발전함과 동시에 여러 지역에 전파됨으로써 수호신은 더욱 많아지고 분화되어 제법선신중(諸法善神衆)으로서의 신중신앙을 낳았다. 이러한 신중신앙에 의해서 영산회상도의 호법선신중(護法善神衆)이 신중탱화로 분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관음탱화(觀音幀畵)는 법화경 유통분(流通分)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밖의 여러 후불탱화도 영산회상도를 근거로 하고 있다.  

상단탱화(上壇幀畵)는 불교의 근본진리와 그 근본진리의 설법상, 그리고 그러한 근본진리에 귀의한 공덕을 도설화한 불화이다. 상단탱화는 봉안된 전각에 따라 대웅전 후불탱화, 화엄전 후불탱화, 극락전 후불탱화, 약사전 후불탱화, 용화전 후불탱화, 영산전 후불탱화, 관음전 후불탱화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 탱화들도 화엄경과 법화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탱화는 불교의 근본교리가 담긴 화엄경에 근거한 화엄도설(華嚴圖說)보다 불교 근본교리의 전법륜(轉法輪)의 성격을 띤 법화경에 바탕을 둔 법화회상(法華會相)의 도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사찰이 가지는 전법의 기능이 더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상단탱화는 화엄탱화를 제외하고는 영산회상도를 근거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봉안하는 전각인 극락전의 후불탱화는 서방 극락세계를 도설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대웅전의 후불탱화처럼 석가모니의 영산회상도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음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아미타신앙이 아미타경(阿彌陀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무량수경(無量壽經) 등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의한 신앙이지만 이 경전들의 설법자가 석가모니이고, 듣는 자 또한 법화경과 거의 같은 비구와 보살, 십대제자로 되어 있는 전법륜상(轉法輪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약사전 후불탱화는 약사정토를 도설화한 것이다. 약사경에 의하면 약사정토의 2대보살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다른 여러 보살들의 우두머리이고, 호법신장은 십이신장이다. 그런데 한국의 약사전 후불탱화의 호법신은 십이신장이 아니라 석가정토의 호법신인 사천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도사 약사전과 직지사 약사탱화에는 사천왕과 십이신장이 동시에 등장한다. 한국의 약사신앙은 법화경 유통분의 공덕을 강조하는 관음신앙의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여래탱화를 그릴 때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을 삼여래로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를 삼여래로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를 삼여래로 하는 후불탱화는 대웅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를 바탕으로 하는데, 아미타불상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약사여래상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배치된다. 

중단탱화(中壇幀畵)의 중단은 신중단(神衆壇)을 가리킨다. 중단탱화는 상단의 불법과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상을 도설화한 불화이다. 신중탱화는 원래 호법선신이자 외호신(外護神)에 지나지 않는 상단탱화의 한 구성요소인데, 신중 자체의 호법과 외호의 기능이 강조되어 독립된 신앙과 탱화로 분화되었다. 즉 호법과 외호의 기능이 복을 내려주고 재앙을 없애준다는 강복소재(降福消災)의 신앙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신중탱화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라 할 수 있고, 화엄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은 곧 삼라만상(森羅萬上)의 정각을 의미하므로 세상의 모든 신은 모두 호법신에 포함될 수 있다. 그래서 석가모니 당시 인도의 토속신들 뿐만 아니라 불교가 전파되는 지역의 모든 신들이 신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근거한 39위(位) 신중탱화가 그 원형을 이룬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민간신앙을 수용하면서 많은 신들이 첨가되어 104위 신중탱화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104위(位)로 구성된 신중에는 인도와 중국, 한국의 토속신들이 거의 모두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중탱화의 상단, 중단과 하단의 일부에는 인도의 토속신이 들어가 있고, 중단의 칠성신은 중국에서 첨가된 것이며, 하단신중은 한국의 토속신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불교가 전파된 각 지역의 토착신앙이 불교에 수용된 결과이며, 그러기에 신중탱화는 다른 탱화들보다 한국 고유의 특성이 강한 불화다. 이렇듯 신중탱화의 구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신중탱화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각 신중이 원래 가지고 있던 독립적인 신의 기능이 강조되면서 신중탱화의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칠성탱화나 제석탱화, 산신탱화, 조왕탱화, 시왕탱화 등이 그 예이다.

 

한국의 신중탱화는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대예적금강신(大穢跡金剛神)을 중심으로 한 탱화는 전체 화폭의 삼분의 일을 이 금강신이 차지하고 좌측에 제석천(帝釋天), 우측에 대범천(大梵天), 밑에 동진보살(童眞菩薩)을 배치한다. 이들 주위에는 성군(星君)과 명왕(明王), 천녀(天女)들이 둘러싸고 있다. 둘째,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탱화는 삼위의 중심 신중을 중심으로 그리되 권속의 수는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이 탱화의 좌측은 천상(天像)을 중심으로 한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때로는 제석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천신을 위에,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금강신장을 밑에 배열하기도 한다. 

 

세째,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탱화를 제석탱화라고도 부른다. 제석탱화를 신중탱화에서 분화된 것으로 보고 따로 독립된 탱화로 분류하기도 한다. 제석은 신중탱화에서 삼십삼천지거세주제석천왕(三十三天地居世主帝釋天王)의 위목(位目)에 해당된다. 모든 신중을 제석의 주위에 배치하는데, 비무장의 보살이나 왕의 모습만 표현한 것도 있고 무장을 한 신장까지 포함한 것도 있다. 네째, 삼장탱화의 천장회상중(天藏會上衆)의 도설은 제석탱화, 지지회상중(持地會上衆)의 도설은 신장탱화, 지장회상중(地藏會上衆)의 도설은 지장탱화의 구도와 각각 같다. 삼장탱화는 천상계와 지상계, 지하계 등 삼계(三界)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불화이다. 


칠성탱화는 칠성신이 수명신으로서 대중의 신앙대상이 되면서 신중탱화에서 분화된 것이다. 칠성탱화를 구성하는 칠성신은 신중탱화에서 중단신중으로 교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중의 하나이다. 칠성신앙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인 북두칠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칠여래의 증명을 거친 칠성신에 대한 신앙이므로 칠성탱화를 그릴 때에는 칠여래와 함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칠성탱화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칠여래와 칠원성군만을 도설하는 탱화가 있다. 이 탱화는 가운데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보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상단 좌우에는 칠여래, 하단 좌우에는 칠원성군을 배치하는 구도이다. 둘째, 첫번째의 구도에 삼태(三台)와 육성(六星),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첨가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모두 탱화의 위쪽 좌우에 배치된다. 셋째, 둘째의 구도에다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의 바깥 좌우에 보필성(補弼星)을 배치하고, 칠원성군의 중앙에는 자미대제통성(紫微大帝統星)을 도설하는 유형이다. 넷째, 세째의 구도에 칠성 원래의 모습을 아래쪽에 묘사하는 유형이다. 이 탱화에서는 칠여래와 칠원성군, 불교와 습합되지 않은 원모습의 칠성이 모두 표현된다. 이때 칠여래는 여래상을 하고 있고, 칠원성군은 관모와 관복을 입은 모습이며, 원모습의 칠성은 도사상(道士像)이다. 다섯째, 칠여래와 칠성을 각각 별개의 그림으로 묘사하는 유형이다. 두 폭의 탱화 속에 한쪽은 3여래, 한쪽은 4여래를 도설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칠성탱화가 여러 유형을 보이는 것은 칠성에 대한 신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분화되었음을 뜻한다. 칠성탱화가 각 사찰에 널리 봉안된 것은 칠성의 주불(主佛)인 치성광여래가 약사여래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칠성각에는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부인, 자녀의 수명을 비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고 있다. 칠성탱화 중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현재 모두 일본에 건너가 있다. 고베(神戶)의 다몬사(多聞寺)에 있는 칠성탱화와 일본인 개인 소장품인 1569년(선조 2)에 제작된 칠성탱화가 그것이다. 국내의 대표적인 칠성탱화는 1749년(영조 25)에 제작된 천은사(泉隱寺) 탱화와 1895년에 제작된 선암사(仙巖寺) 탱화 등이다.

산신탱화도 신중탱화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산신신앙은 한민족의 오랜 토속신앙이었으나 불교가 전래되자 산신은 불교의 호법선신으로 수용되었다. 산신은 신중탱화 하단위목(下壇位目)의 봉청만덕고승성개한적주산신(奉請萬德高勝性皆閑寂主山神) 위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호법선신으로서의 산신은 후에 다시 본래의 성격을 되찾고 독립된 신앙으로 발전하여 사찰의 산신각에 산신탱화를 봉안하게 된 것이다. 조왕신앙도 한민족의 오래된 토속신앙이었으나 불교가 들어오자 조왕신은 호법선신으로 수용되었다. 후에 조왕신은 다시 원래의 성격을 되찾아 조왕탱화의 성립을 보게 된다.

하단탱화(下壇幀畵)의 하단은 일반적으로 불전의 좌측 벽면에 설치하고 영가의 위패나 사진을 봉안한다. 하단탱화는 상단과 중단의 신앙에 의한 많은 공덕을 조상에게로 돌리는 동시에 중생 영혼의 극락왕생을 비는 내용을 도설화한 것이다. 하단의 후면에 내거는 탱화를 감로탱화(甘露幀畵)라 한다. 하단탱화에는 감로탱화 외에도 지옥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찾는 신앙을 나타낸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도 있다.  

 

모든 탱화의 내용에 나타난 신앙 형태는 상단탱화 하나로 귀일될 수 있으며, 나아가 화엄탱화로 귀일하는 개합(開合)의 신앙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탱화의 출현은 그만큼 불교신앙이 구체화되고 민중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불교신앙이 점차 민중화되면서 상단탱화에서 관음탱화와 약사탱화, 아미타탱화 등이 분화되었다. 또한 상단탱화에서 호법선신으로 수용된 신중은 독립하여 신중탱화로 분화되었으며, 신중탱화에서 각 신중은 다시 독립된 신앙형태로 분화되어 칠성, 산신, 시왕, 현왕(現王)탱화로 나타났다. 중단탱화에서는 시왕탱화에서의 지장이 지장탱화로 전개되었으며, 감로탱화에서의 극락내영(極樂來迎)과 접인(接引), 지장 등은 다시 지장도와 극락접인도(極樂接引圖)로 전개되어 나갔다.

위에서 살펴본 바 한국 탱화는 기본적으로 밀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탱화의 도설은 밀교의 만다라(曼茶羅)라고 할 수 있다. 상단탱화는 밀교의 능통일(能統一)의 객체, 나머지 탱화는 소통일(所統一)의 객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탱화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만다라인 것이다. 역으로 모든 탱화는 하나의 만다라 구조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탱화의 개합과 만다라적인 원리는 밀교의 교합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엄의 체계에서 구해야 한다. 그것은 화엄의 원리가 밀교처럼 다양한 신앙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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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 천주대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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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 지산화선덕산신위

 

법당을 나와 뒤로 돌아 올라가면 천신을 모시는 천주대덕단(天主大德壇)과 산신을 모시는 지산화선덕산신위(芝山華仙德山神位) 비석이 세워져 있다. 천신은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 등으로 호칭되는 하늘 그 자체를 신격화한 존재이다. 또한 천신은 그가 창조한 세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로 하늘과 동일시되는 전지전능한 최고 최상의 존재이다. 제주신화의 천지왕, 중국도교의 영향을 받은 옥황상제(玉皇上帝), 불교의 영향을 받은 제석(帝釋), '가락국기(駕洛國記)'의 황천(皇天) 등은 모두 천신의 다른 호칭이다. 천신신앙은 다른 어떤 신앙보다도 그 기원이 오래된 신앙형태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이나 영성제(靈星祭), 백제의 천지에 대한 제사, 신라의 영성제나 일월제, 오성제(五星祭)는 천신신앙에 바탕을 둔 제사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천신신앙의 원형은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인 환인(桓因)은 하늘의 신으로서 천신이다. 환인의 서자 환웅(桓雄)은 아버지로부터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아서 삼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 신시(神市)를 열고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 환웅은 천왕(天王)으로 환인과 마찬가지로 역시 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아들로 고조선의 시조왕이 됨으로써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     

 

단군을 비롯해서 한국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씨족의 시조나 부족국가의 시조왕들은 하나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으로서 지상왕국의 왕이 된 존재들이다. 해모수(解慕漱)와 주몽신화, 신라 육촌(六村)의 시조신화, 김해 김씨 시조인 김수로(金首露)신화, 경주 박씨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신화에서도 천신상을 발견할 수 있다. 부족국가의 시조나 씨족의 시조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한 천신이라고 했을 때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하느님 즉 천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천신은 지상의 모든 것들을 주재하는 지배자이기에 지상의 인간들은 시조왕들에 대하여 '하늘이 내린 통치자', 나아가 '하늘 그 자체인 지배자'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은 천신신화를 창조해서 유포한 지배세력들이 의도했던 바이기도 하다.    

 

천신신앙은 오늘날 한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음이 발견된다. 요즘도 고사나 축원 등에서 기도의 대상인 '천지신명'은 바로 천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라든가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말에서 '하늘'은 천신을 가리킨다. 현재 천신신앙은 환인과 환웅, 단군 등 삼성(三聖)을 모시는 단군교(檀君敎)에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 상제교(上帝敎) 등 신흥종교의 이름에서도 천신신앙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불교는 전파된 지역의 토착신들을 호법선신으로 수용하는 등 포용력이 넓고 크다. 불교의 포용력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광덕사에서 천신인 천주대덕을 어떻게 수용할 지 자못 궁금해진다. 광덕사의 사세가 커져서 전각을 더 짓게 된다면 어디에 모시게 될까? 불교에는 하느님 즉 천신과 비슷한 부처에 비로자나불이 있기 때문이다. 지산화선덕산신은 산신이기에 산신각에 모시면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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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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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백꽃

 

광덕사 요사채 뒤안에는 노오란 수선화꽃이 활짝 피어 있다. 수선화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라는 미청년이 샘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모습에 반해 물속에 빠져 죽은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그래서 자기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자기애(自己愛)를 말한다. 활짝 피어난 붉은 춘백꽃도 봄날을 구가하고 있다. 춘백은 '봄에 피는 동백'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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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 앞산의 관음바위와 미륵바위

 

광덕사 마당에서 앞산을 바라보니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봉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주지스님은 저 암봉에 미륵불과 관세음보살이 있다고 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맨앞에 있는 바위가 마치 관세음보살이 앉아 있는 듯도 하고, 그 바로 뒤에는 미륵불이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지스님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광덕사를 떠난다. 남을 자 남고 떠날 자 떠나야 한다. 그게 인연법이다. 산기슭을 화사하게 수놓은 산벚꽃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산문을 나서다. 

 

2007년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