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 몇 년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울릉도(鬱陵島)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동수원한방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던 딸이 일주일간 내 대신 진료를 해준다기에 뜻하지 않게 금쪽같은 휴가를 얻었다. 지난 1990년도던가 1991년도에 한 번 다녀온 뒤 17,8년만에 다시 울릉도를 보게 되어 마음이 무척 설레인다. 울릉도는 옛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모습이 많이 변했을까? 이번에는 독도(獨島) 여행도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울릉도 여행길에 최근 일본의 터무니없는 영유권 주장으로 국내외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는 독도에도 꼭 다녀오기로 다짐을 한다.
*동해시 묵호항 여객선 터미널
오전 10시. 동해시 묵호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울릉도 도동항으로 떠나는 한겨레호에 오른다. 배삯은 4만5천원이다. 445톤급의 한겨레호는 445명을 태우고 묵호에서 울릉도까지 161km의 거리를 41노트의 속력으로 2시간 20분만에 항해할 수 있다고 한다. 선실 안은 이미 여행객들로 만원이다. 이윽고 한겨레호는 뱃고동을 울리더니 뱃머리를 돌려 묵호항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묵호항을 떠난 한겨레호는 동해바다 수평선을 향해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육지가 점점 멀어지다가 시나브로 해무속으로 사라진다. 이젠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에는 검푸른 파도만이 넘실거린다. 파도가 일으키는 포말이 눈부신 햇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진다. 내 가슴의 바다에도 어느덧 파도가 일렁인다. 순간 깊이를 알 수없는 고독감이 찾아온다. 나는 일엽편주가 되어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물결이 치는 대로 정처없이 흘러가는 상상에 빠진다.
*울릉도
때때로 큰 파도가 밀려와 뱃전을 때린다. 파도의 충격이 선체를 통해서 내 몸에도 그대로 전해져 온다.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쳐서 산산히 부서진 물방울들이 날아와 선실의 유리창을 때린다. 저 멀리 화물선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간다. 저 배는 어디를 향해서 떠가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 한때 선장이 되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항해하겠다는 꿈을 꾸었던 적도 있다. 아마 먼 나라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깊고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프랑스 영화감독 뤽 베송(Luc Besson)이 감독하고 장 마크 바(Jean-Marc Barr)와 로잔나 아퀘트(Rosanna Arquette) 그리고 장 르노(Jean Reno)가 주연한 영화 '그랑 블루(Le Grand Bleu, 1988년)'가 떠오른다. '그랑 블루'는 그리스의 작은 어촌 출신인 자크(장 자크 바 분)와 엔조(장 르노 분)라는 두 심해잠수부의 바다에 대한 사랑과 우정을 그린 영화다. 자크가 여기자인 조안나(로잔나 아퀘트 분)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양념이고...... 자크와 엔조에게 있어 바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집이고 삶의 터전이며, 나아가 그들 존재의 이유 그 자체이다. 항상 최고의 잠수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엔조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고 마침내 숨을 거둔 채 바다속으로 사라진다. 엔조의 죽음으로 자책감에 시달리던 자크는 바다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밤 지중해의 푸른 심연 속으로 끝없이 잠수해 들어간다. 그들은 결국 그들의 존재 자체였던 바다의 품속에 안겨 영원히 안식한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푸르고 드넓은 지중해의 영상미가 인상적이었다. 바다를 이토록 심오하고도 멋지게 그려낸 영화가 또 있을까?
어느 순간 피로가 몰려와 까무룩이 잠이 들었나보다. 꿈에 한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승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울릉도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강산이 거의 두 번이나 변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는 울릉도가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배는 울릉군 서면 남양리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울릉도는 용암이 분출해서 형성된 섬이라 화산지형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울릉도에도 이제는 봄빛이 완연하다. 성인봉 정상은 구름에 휩싸여 자취를 감춘 채 오리무중이다.
*울릉도 도동항
한겨레호는 오후 12시 55분 울릉군 울릉읍 도동항에 도착해서 손님들을 내려놓는다. 독도행 삼봉호는 2시 30분에 떠난다고 한다. 독도까지의 왕복여행은 5시간(편도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는데 배삯은 3만7천5백원이다. 도동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독도행 유람선을 기다리기로 한다. 터미널은 독도로 가려는 사람들로 몹시 붐빈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자 정원이 210명인 106톤급의 삼봉호가 도동항 부두로 들어온다. 승객들을 모두 태우고 나서 삼봉호는 곧 도동항을 떠나 독도로 향한다.
삼봉호는 작은 배라 큰 파도가 치기라도 하면 배멀미라도 하지않을까 조금은 걱정된다. 하지만 독도는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그까짓 배멀미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하리라. 공수부대 장교 시절 낙하산 강하훈련을 위해 C-123이나 C-130 수송기에 탑승하곤 했었다. 수송기가 계기비행을 시작하면 지상의 높낮이에 따라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면서 날기에 롤링(rolling)이 무척이나 심한 편이었다. 수송기가 롤링을 할 때마다 기내는 온통 멀미를 하는 대원들의 토사물로 흥건하곤 했었다. 그래도 나는 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배멀미보다도 비행기멀미가 훨씬 심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삼봉호가 울릉도에서 상당히 먼 바다로 나갔을 때도 파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느덧 울릉도는 해무속으로 사라지고 삼봉호는 다시 망망대해를 외로이 떠가고 있다. 동해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독도로 가는 길은 외로운 나그네길이다. 서유석은 '홀로아리랑'에서 독도로 가는 그 외로운 나그네길을 노래하고 있다.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후렴)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로 동해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후렴)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해보자
(후렴)
*독도 위성사진(자료출처-환경지리정보서비스)
*독도
그때 갑자기 누군가 '독도다!' 하고 소리친다. 선실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니 독도가 눈앞에 신기루처럼 다가온다. 광활한 바다위에 떠 있는 홀로섬 독도는 보기에도 정말 외로운 섬이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 거센 파도와 세찬 비바람을 묵묵히 견디면서 독도는 그 자리를 홀로 지켰으리.
*동도
*서도를 배경으로 필자
삼봉호가 동도(東島)의 접안시설로 접근하자 관광객들의 안내와 통제를 위해서 나온 독도경비대원들이 손을 흔들면서 환영을 한다. 배가 부두에 정박하자마자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다. 나도 독도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는다. 내 생애 처음 밟아보는 독도에 서서 감회에 젖는다.
독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현재 동도에는 1개 소대 규모의 독도경비대가 주둔하고 있고, 서도(西島)에는 김성도, 김신열씨 부부와 편부경 시인 등 세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독도에 최초로 주민등록을 옮기고 거주한 사람은 최종덕씨였다. 울릉도에 살고 있던 그는 1965년 3월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어로활동을 하면서 1968년 5월부터 주거시설을 비롯한 여러 시설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 서도의 동북쪽 해안 약 5m 높이에 있는 동굴에서 하루 10드럼 정도의 담수가 나오는 것이 발견되어 식수문제도 해결됐다. 1980년 일본이 다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자 그는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1981년 10월 14일 주민등록지를 독도로 옮겼다. 김성도씨는 1970년대부터 최종덕씨 소유의 덕진호 선원으로 서도에 거주하면서 함께 어로활동을 해왔다.
1987년 최종덕씨가 사망하자 김성도씨는 자신의 어선인 명성호와 부영호 등 두 척의 배로 어로활동을 하다가 1991년 11월 17일 현재의 주소지인 경북 울릉군 을릉읍 독도리 20-2번지에 주민등록을 등재했다. 편부경 시인은 2003년 11월 19일 독도로 이주했다. 이들 외에도 독도에 주소를 두고 거주했던 사람들로는 최종덕씨의 사위 조준기씨(1986.7월.8~1994.3.31, 전입은 1991.2.9)와 최종찬씨(1991.6.2~1993.6.7), 김병권씨(1993.1.6~1994.11.7), 황성운씨(1993.1.7~1994.12.26), 전상보씨(1994.10.4~1994.12.18) 등이 있다. 1999년 매스컴에 일본인이 독도에 호적을 등재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범국민독도호적옮기기운동'이 전개되어 2005년 말 기준으로 563세대 1,875명이 이곳에 본적을 두고 있다.
어렵사리 온 길이라 동도의 정상에도 올라보고도 싶었으나 독도의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접안시설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동도와 서도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이러려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돈을 들여서 독도에 온 것이 아닌데..... 아쉽다. 관광객들은 동도와 서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하다.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끈 것은 '곰이'와 '몽이'라는 이름의 독도경비견이다. 남매간인 이들은 1998년 사단법인 '한국삽살개보존회가' 처음으로 보내준 삽살개 '동돌이'와 '서순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고 한다.
독도는 동경 131° 52' 10.4", 북위 37° 14' 26.8"에 위치한 한국 최동단의 섬으로 행정구역상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속한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 또는 우산도(于山島), 자산도(子山島), 가지도(可支島), 요도(蓼島) 등으로 불리워 오다가 1881년(고종 18)부터 독도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독도는 한국의 경북 울진군 죽변에서 동쪽으로 약 216.8km, 일본의 시마네현(島根縣) 사카이미나도(境港)에서 북서쪽으로 220㎞ 지점에 위치함으로써 한일양국의 본토와는 거의 같은 거리인 동해상의 한가운데 있는 섬이다. 그러나 독도는 울릉도에서 동남방으로 87.4㎞,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의 오키섬(隱岐島)으로부터는 157.5㎞ 떨어져 있어 일본과 독도의 거리는 울릉도보다 훨씬 멀다.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 또는 마쓰시마(松島)라 불렀고,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선박의 이름을 따서 프랑스는 '리앙쿠르(Liancourt)', 영국은 '호넷(Hornet)'이라는 명칭으로 해도에 표시하고 있다.
독도는 주도(主島)인 동도와 서도를 비롯해서 가제바위, 삼형제굴바위, 지네바위, 닭바위 등 89개의 부속섬과 암초로 구성된 총 0.187㎢의 면적을 가진 작은 군도이다. 제3기말에서 제4기초 수심 2천m가 넘는 동해의 바다밑에서 분출한 화산성해산(火山性海山)인 독도의 지질구조는 상부는 조면암질집괴암(粗面岩質集塊岩)과 응회암(凝灰岩)이 서로 호층(互層)을 이루고 있으며 , 하부는 현무암질집괴암(玄武岩質集塊岩)으로 되어 있어 울릉도와 비숫하다. 동도와 서도 사이에는 폭 110~160m, 길이 330m인 좁은 해협이 가로놓여 있다. 동도는 면적 약 7만 3300㎡, 최고 높이 98.6m의 섬으로 경사가 가파르고 북쪽 사면에 두 개의 분화구 흔적이 남아 있으며, 동남쪽에는 많은 해식동(海蝕洞)과 수중 아치가 있다. 동도의 꼭대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부분이 있어 이곳에 유인등대와 경비대원막사, 헬기장, 식품저장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서도는 면적 약 8만 8700㎡, 최고 높이 168.5m로 산정이 뾰족하고 경사도 가파르다. 그리고 깎아지른 듯한 암석해안에는 급경사의 해식애가 발달되어 있고, 북쪽과 서쪽의 비교적 넓은 파식대지와 자갈로 된 해빈(海濱)에는 어업인숙소, 선가장, 해산물 건조장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수십 개의 암도(岩島, sea stack의 일종)가 산재해 있다.
독도의 식물은 목본식물로 소나무과와 노랑덩굴과, 장미과 등 3종이 자생하고 있지만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할 뿐만 아니라 키가 작아서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초본식물은 명아주과, 비름과, 질경이과, 여뀌과, 벼과 등 50여 종이 경사가 다소 완만한 곳에 자생하고 있다. 동물은 바다제비와 슴새, 괭이갈매기, 황초롱이, 물수리, 노랑지빠귀 등과 같은 조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특히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등의 번식지는 천연기념물 제 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독도는 동해를 경유해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철새들이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이기도 하다. 곤충류는 잠자리와 집게벌레, 메뚜기, 매미, 딱정벌레, 나비, 파리 등 37종이 서식하고 있는데, 이중 3종은 독도에서만 발견되는 종이다. 독도에 서식하는 자연산 육상 포유류는 없으며, 1973년 독도경비대가 들여와 풀어놓은 10여 마리의 토끼들이 번식을 통해서 그 수가 불어나 독도의 생태를 파괴하고 있다.
독도의 기후는 해풍이 심한 해양성기후로 연평균기온이 연중 영상이다. 강수량도 연중 고른 분포를 보인다. 독도 연근해의 표면수온은 3~4월에 10℃ 정도로 가장 낮고, 8월에는 25℃ 정도이다. 독도의 연근해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청정수역으로 회유성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황금어장이 형성되어 있다. 리만한류의 한 지류인 북한해류는 독도 부근까지 남하하여 반시계방향으로 선회한다. 쿠로시오난류의 한 지류인 쓰시마해류(對馬海流)는 대한해협을 지나 북상하여 겨울에는 독도 부근에서 동쪽으로 선회하고, 여름에는 더 북상하여 선회한다. 그래서 독도 인근 해역에서는 회유성 어류인 연어와 대구를 비롯해서 오징어, 명태, 꽁치, 상어, 그리고 해양 포유류인 고래 등이 많이 잡힌다. 또 독도 주변의 파식대지와 암초에서는 미역, 다시마 등의 해초와 전복, 소라 등의 패류도 풍부하게 채취된다. 1999년과 2000년 두 번에 걸친 한국해양연구원의 수중탐사 결과 독도 주변 해역에는 파랑돔과 자리돔, 줄도화돔, 세줄얼게비늘, 일곱줄얼게비늘, 청황베도라치 등 소형 아열대 어종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독도 주변의 암초에는 물개들이 서식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물개를 '가제'라 부르는데, 그래서 한때 독도를 가제도(可支島)라고 하였으며, 서도 북쪽의 가제바위도 물개가 자주 출몰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밖에도 독도 주변 해역의 무척추동물상은 강장동물(腔腸動物)인 산호 1종, 전복·밤고둥·소라·군소·홍합 등의 연체동물 19종, 바위게·부채게 등 절지동물 17종, 불가사리·성게 등 극피동물(棘皮動物) 5종 등 총 42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도는 최근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이 왜 그토록 독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지 이곳에 와서야 절실하게 깨닫는다. 독도 자체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바위섬이지만 이곳을 차지하면 광대한 바다가 일본의 영해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독도는 본래 조선의 영토였으므로 일본으로서는 생떼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전혀 밑질 것이 없다. 일본이 외교문서를 통해서 끊임없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루기를 원한다. 만일 국제사법재판소가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는 판결을 내린다면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고, 패소한다고 하더라도 영유권 문제를 계속해서 제기할 수 있으니까.
한일 양국간 독도 영유권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952년부터다. 한국 정부는 1952년 1월 18일 현재 행정구역상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속하는 독도를 포함한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일명 평화선)을 선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0일 뒤인 1월 28일 시마네현(1905년) 고시(告示)를 근거로 다케시마, 즉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문서를 한국 정부에 보내옴으로써 독도문제가 한일 양국간의 중요한 외교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시마네현 고시는 조선에 대한 침략을 목적으로 한 영토편입이기 때문에 1905년 이전에도 일본이 독도를 배타적으로 영유하였다는 근거가 없는 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편입은 원천적으로 무효다. 1952년 이후 한국과 일본정부는 독도에 대한 서로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상대국의 주장에 항의하거나 반박하는 외교문서를 주고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1905년 이전의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랜동안 무인도였던 독도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울릉도의 역사와 관련지어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울릉도에는 내륙의 유민(流民)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고대의 소국이 존재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산국은 512년(지증왕 13) 하슬라주(何瑟羅州, 지금의 강릉)의 군주(軍主)였던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에게 정벌된 뒤 신라에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으며, 고려가 개창되자 새 왕조에도 토산물을 바쳐 왔다. 6세기초부터 우산국은 내륙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세기초 우산국은 동북여진족(東北女眞族)의 침략으로 인해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반면에 고려는 12세기 중엽 이후 내륙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 수차례에 걸쳐 관원들을 울릉도로 파견하였다. 이때 울릉도는 동계(東界) 울진현(蔚珍縣)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수차에 걸친 관원들의 파견으로 고려왕조는 어느 정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울진현조(蔚珍縣條)에서 비록 '혹은'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였지만 '무릉(武陵, 울릉도)과 우산(于山, 독도)은 본디 두 섬으로 서로 떨어짐이 멀지 않아 풍일(風日)이 청명(淸明)하면 바라 볼 수 있다..(一云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玄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는 기록은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에서는 독도를 우산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울릉도라는 이름이 정착됨에 따라 우산이라는 이름이 독도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울릉도와 독도가 잊혀진 섬이 되어버린 것은 조선왕조가 15세기초부터 실시한 공도정책(空島政策)에 기인한다. 조선왕조는 태종(1401~18 재위) 때부터 과중한 조세와 부역을 피해 육지로부터 도망쳐 온 백성들을 소환하거나 왜구의 침입을 예방할 목적으로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도민들을 이주시켰다. 조선왕조 초기만 해도 거주민 소환을 위한 관원들의 잦은 파견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고려시대보다 더 정확한 지리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432년, 세종 14년)' 지리지 울진현조의 '우산과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 두 섬은 떨어짐이 멀지 않아 풍일이 청명하면 바라 볼 수 있다.'고 한 기록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고려사 지리지에서 보였던 '혹은'이라는 말을 삭제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별개의 섬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은 15세기 초엽 이후 1880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울릉도 거주민들을 계속해서 소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본국을 모반한 죄'까지 적용하여 처벌한 결과 내륙인들의 울릉도 왕래는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다. 그리하여 울릉도는 점점 잊혀진 섬이 되어 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1년, 중종 26년)' 울진현조의 '우산도와 울릉도가 울진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 일설에는 우산과 무릉은 본디 한 섬이라고 한다.'고 한 기록에서 세종실록 지리지보다 퇴보한 지리학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잊혀진 섬이었던 울릉도와 독도는 17세기 말경 안용복(安龍福) 사건에 의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경상도 동래부 출신의 안용복은 일찌기 동래 수군에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할 때 부산의 왜관(倭館)에 자주 출입하면서 일본어를 익혔다. 1693년(숙종 19) 봄 안용복은 40여 명의 어부와 함께 울릉도에서 어로활동을 하던 중 고기잡이를 위해 침입한 일본 어민들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이들에게 납치되어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 안용복은 호키슈(伯耆州) 태수와 에도바쿠후(江戶幕府)에게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고, 바쿠후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서계(書啓, 외교문서)를 받아냈으나 귀국하는 도중 나가사키(長崎)에서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요시쓰구(宗義倫)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말았다.
1693년 9월 쓰시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목적으로 다케시마(죽도) 문서를 위조하여 차왜(差倭, 조선 후기 일본의 쓰시마도에서 조선에 수시로 파견한 외교사절)를 동래에 보내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예조(禮曹)에 서계를 보내 조선 어민들의 울릉도 출어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1694년(숙종 20) 조선정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외딴 섬으로의 왕래를 금지하는 공도정책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요청하는 예조 서계를 보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 쓰시마도주는 사신을 보내 예조 서계를 반환하면서 '울릉' 두 글자의 삭제를 요청하였다. 쓰시마도주의 계략을 간파한 영의정 남구만(南九萬)과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은 삼척첨사(三陟僉使) 장한상(張漢相)를 파견하여 울릉도를 조사하게 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나갔다. 또한 접위관을 동래에 보내 울릉도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실려 있는 조선의 판도로서 앞으로 일본 어민들의 왕래를 금한다는 내용의 예조 서계를 차왜를 통해서 쓰시마도주에게 전달하였다.
쓰시마도주는 이런 조선측의 통보에 승복하려 하지 않았으나, 에도바쿠후는 1696년 다께시마(죽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여 일본 어민들에게 도해금지령(渡海禁止令)을 내렸다. 같은 해 봄 10여 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했던 안용복은 일본 어선들을 발견하자 마쓰시마(松島, 독도)까지 추격하여 영토침입을 문책한 뒤, 호키슈에 당도하여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자칭하고 호키슈 태수로부터 영토침입에 대한 사과와 함께 울릉도에 출어했던 일본 어민들의 처벌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안용복은 귀국 후 나라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남구만의 도움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1697년 새 쓰시마도주 소요시미치(宗義方)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어로를 금한다는 내용의 서계를 보내와 조선과 일본간의 울릉도 영유권 분규는 마침내 타결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안용복의 활약으로 철종때까지는 울릉도에 대한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이 없었다.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안용복에게 조선정부는 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귀양을 보냈으니 이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울릉도 영유권 다툼이 일단락되자 1697년 조선정부는 3년에 1번씩 삼척영장(三陟營將) 등이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수토제도(搜討制度)를 공식화하였다. 수토가 정기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울릉도와 독도를 비롯한 동해의 지리가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정상기(鄭尙冀, 1679~1752)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에는 울릉도와 우산의 위치와 크기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이 그 한 예다. 수토제의 실시로 일본과의 국경도 점차 확정되어 갔다. 1714년(숙종 40) 강원도어사 조석명(趙錫命)은 '울릉도 동쪽으로 도서가 잇달아 있고 이 섬들은 왜경(倭境)과 접하게 된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마쓰시마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사이토(齋藤豊仙)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에 '일본의 서북경은 은주(隱州, 隱岐)로써 한계를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81년(고종 18) 수토관에 의해 울릉도에 일본인들이 왕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조선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항의 서계를 보내는 한편, 울릉도 개척여부에 대한 조사를 겸해서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검찰사(檢察使)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규원은 1882년 울릉도를 검찰하고 돌아와 울릉도는 개척이 가능하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규원의 보고에 따라 조선정부는 울릉도 개척을 결정하고 1883년부터 희망자를 모집하여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조선정부의 울릉도 공도정책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울릉도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자 조선정부는 1895년초 2백년간 계속되어 온 수토제도를 폐지함과 동시에 도감제(島監制)를 실시하여 울릉도민 중에서 도감을 임명하였다.
1900년(광무 4) 10월 조선정부는 울릉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내부시찰관(內部視察官) 우용정(禹用鼎)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칙령 제41호를 제정해서 반포하였다. 이 칙령에 따라 울릉도에도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울도군의 관할구역으로 울릉전도(鬱陵全島, 울릉도와 이에 부속된 섬과 암초의 총칭), 죽도(竹島, 지금의 죽도)와 함께 석도(石島, 독도)를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석도를 훈독(訓讀)하면 '독섬' 또는 돌섬'이 된다. 지금도 울릉도 토착민들은 독도를 '독섬' 또는 '돌섬'이라고 부르고 있다.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 정부가 독도를 영토로 재확인했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반포하기 이전에 이미 일본 메이지정부는 량고시마(リャンコ島, 정식 명칭은 리앙쿠르 암초, Rochers Liancourt,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중인 1905년 2월 비밀리에 량고시마를 다케시마로 개칭한 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근거로 일본영토에 편입시켰다. 그것은 일본이 국운을 걸었던 '동해해전(東海海戰)'을 앞두고 대러시아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조처였다.
대한제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06년 4월 8일 일본의 시마네현의 관리들이 울릉군수 심흥택을 방문하고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일방적으로 통고받으면서부터였다. 일본 스스로 일본의 고유 영토가 아닌 독도를 처음으로 영토로 편입한 조처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같은 영토편입 조처는 국제법상 무주지에 대해서만 가능한 영토취득 방식이다. 그러므로 당시 이미 대한제국의 영토였던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편입은 국제법상 당연히 무효다. 심홍택의 보고를 받은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은 같은 해 5월 20일 지령 제3호를 통해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편입을 부인하였다.
이후 한일 양국간 독도영유권과 관련된 교섭기록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乙巳條約,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 韓日協商條約)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어 1910년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됨으로써 일본이 불법적으로 약탈했던 독도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의 회복으로 국내법이나 국제법상 완전히 원상회복이 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 6월 미국 공군의 폭격 연습 도중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 30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1951년 6월 이들을 기리는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세워졌는데, 일본은 6.25내전을 틈타서 1953년 수차에 걸쳐 독도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 영토 표식을 하였다. 이에 한국의 국회는 1953년 7월 일본의 침탈로부터 독도를 수호할 것을 결의하고 경비대를 상주토록 했다. 독도의 수비는 1953년 4월 20일 홍순칠(洪淳七) 대장 등 민간인 7명으로 구성된 독도사수특수의용대(의용수비대)에 의하여 최초로 수행되었으며, 1954년 8월 15일 정오부터는 독도에 등대를 점등하고 세계각국에 통보했다. 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까지 3년 8개월 동안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냈다. 경찰청은 독도사수특수의용대가 독도경비대의 전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경찰사에 기록하기로 한 바 있다. 독도경비대는 울릉경찰서 소속의 경찰이 정식으로 맡은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도의 동쪽
*동도의 동쪽
*서도의 서북쪽
*서도의 서쪽
2,30분쯤 지났을까 승선하라는 안내방송이 삼봉호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온다. 승객들이 배에 다 오르자 삼봉호는 도열한 독도경비대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접안시설을 벗어나 먼저 동도를 천천히 한바퀴 돈 다음 서도로 향한다. 서도를 끝까지 한바퀴 다 돈 삼봉호는 속도를 높이더니 울릉도 도동항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독도를 가슴에 담는다. 동해바다 외로운 섬 독도야, 다음에 다시 또 반가운 해후를 하도록 하자꾸나!
*독도
*유람선을 따라서 날고 있는 괭이갈매기들
삼봉호 뒤를 괭이 갈매기들이 저공비행을 하면서 따라오고 있다. 사람들이 새우깡을 던져줄 때마다 날쌔게 날아와 공중에서 낚아챈다. 어떤 녀석은 새우깡을 들고 있는 사람의 손까지 접근해서는 잽싸게 낚아채서는 달아난다. 검푸른 동해바다에는 저녁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삼봉호가 독도에서 상당히 멀리 떠나왔음에도 갈매기들은 여전히 배 뒤를 따라오고 있다.
삼봉호가 동해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자 작은 점으로 보이던 독도가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진다. 독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갑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갈매기들도 이제는 독도로 다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삼봉호는 망망대해 한가운데를 홀로 외로이 항해하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도동항의 불빛이 아스라이 보인다. 삼봉호는 곧 어둠이 내려앉은 도동항으로 들어간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도동항 근처에 있는 '울릉회타운'이라는 횟집에서 울릉도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따개비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처음 접하는 음식인데 부지깽이나물과 명이나물을 곁들여 먹으니 따개비살이 씹히는 맛이 참 좋다. 산마늘을 울릉도에서는 명이나물이라고 부른다. 저녁을 먹고 나서 꽁치물회에 소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식당주인이 소개한 '섬마을민박'(최명심) 옥탑방에 여장을 풀었다. 울릉도의 밤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빛나다.
2007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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