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일까? 불현듯 백제의 옛서울 부여(扶餘)와 그 앞을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白馬江)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처럼 떠오른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죽어간 백제의 원혼들이 나를 부르는 것인가! 오후 늦게 나는 바람처럼 부여로 향한다. 고속도로 주변의 산에는 산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차창을 통해서 푸르러 오는 산과 들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속세의 번잡한 일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드디어 논산에서 부여땅으로 들어간다. 너른 들판과 올망졸망한 산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문득 부여 어디메쯤에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을 한 비구니 스님이 떠오른다. 2001년 내가 60일간에 걸쳐 백두대간을 순례하고 나서 쓴 기행문 '山으로 가는 길'을 인터넷매체에 기고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의 글을 어디선가 그 스님이 본 모양이었다. 2005년 어느 날 스님의 '山 두고 가는 산'이란 제목의 시집 한권이 바람처럼 배달되어 왔다. 소포 안에는 '저는 백두대간을 주제로 詩를 쓰고 있는 사문입니다. 우연히 선생님께서 쓰신 산행기를 접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저의 누추한 시집 한권을 올립니다.'이라고 쓴 엽서 한장이 들어 있었다. 시집의 첫장에도 '마음의 붓으로 드립니다. 날마다 더욱 좋은 날 되소서.'이라는 글귀가 들어 있었다. 독특한 필체의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스님의 오롯한 마음이 들어 있음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집에는 내가 늘 찾고 있던, 또 평소 쓰고 싶어하던 그런 시들이 실려 있었다. 스님의 시에는 마음을 울리면서 영혼을 정화하는 그런 힘이 들어 있었다. 스님은 한없이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구도자이자 시인이었다. 그후 나는 스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스님은 나중에 나의 백두대간 순례기인 '山으로 가는 길'이 책으로 출판될 때 서문(序文)을 써주게 된다. 그 서문에도 사연이 있으니...... 스님은 네 부탁으로 '山으로 가는 길'에 실을 서문을 인터넷으로 쓰다가 그만 글을 날려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고마감 시간에 맞추어 부랴부랴 다시 쓴 글이 지금 내 책에 실려 있는 그 서문이다.
山 두고 가는 산이라..... 이 얼마나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y)적이고 역설(逆說, paradox)적인 제목인가! 山 두고 가는 산이라니..... 그건 차라리 하나의 화두이다. 평생을 붙잡고 풀어야 할.....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스님은 영혼의 상형문자를 찾아서 죽는 날까지 시(詩)와 선(禪)이 하나가 되는 길을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이다. 영혼의 상형문자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山이다. 그 山은 백두대간일 수도 있고, 선승들이 머물렀던 산사일 수도 있으며, 신들의 땅 티벳의 수미산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 山은 스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찌기 다도(茶道)와 선, 시와 선을 일치시키려고 한 사람은 두륜산 대흥사가 낳은 13대종사 가운데 한 사람이자 다도의 정립자인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이다. 초의선사는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을 주장하여 차와 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한 잔의 차를 마실 때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와 선이 별개가 아니라면 시를 쓸 때도 법희선열을 느껴야 한다. 그렇다면 시와 선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스님은 초의선사를 법스승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의 시들을 읽고 있노라면 시선일미사상(詩禪一味思想)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청산별곡'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다.
반야봉 꼭대기에 사는
어느
구름지기 나그네는
아무데도 걸림 없이 살고자
훠이훠이~~
산 깊숙이 숨어들었다가
마침내
푸른 산덫에 걸려
그대로
한 폭의 靑山圖가 되었네
'푸른 산덫에 걸려 그대로 한 폭의 청산도가 되었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 폭의 청산도'에서 '구름지기 나그네'의 법희선열이 그대로 느껴지지 않는가! 청산도는 어쩌면 스님이 영혼의 순례를 떠나 도달하고자 하는 니르바나인지도 모른다. 스님이 산에 들어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산으로 들어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혼의 상형문자를 찾아가는 한 비구니의 순례는 홀로 감당해야 하는 고독한 나그네길이다. 그래서 스님의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프다. 아니 기쁘고 행복하다. 山 두고 가는 산이기에.....
*부여관광지도
월명산(月明山, 182.9m)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서경고개를 넘어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에서 부여읍 능산리로 들어간다. 월명산은 백두대간 금남정맥에 낮으막이 솟아 있는 산이다.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설악산, 소백산, 덕유산을 거쳐 전북 장수군의 영취산(靈鷲山, 1,075.6m)까지 치달려 내려와서는 서쪽으로 65km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분기한다. 금남호남정맥은 영취산에서 장안산(長安山, 1,237m), 수분현(水分峴, 530m), 팔공산(八公山, 1,151m), 성수산(聖壽山, 1,059m), 마이산(馬耳山, 667m), 부귀산(富貴山, 806m)을 지나 전북 무주군의 주화산(珠華山, 565m)에 이르러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갈라진다. 금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북서쪽으로 왕사봉, 배티(梨峙), 대둔산(大屯山), 황령(黃嶺), 개태산(開泰山)을 지나 계룡산에 이른 다음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널티(板峙), 망월산(望月山), 충남 부여군의 월명산(月明山, 183m), 오석산, 금성산(121m)을 거쳐 부소산(扶蘇山)의 낙화암(落花岩)에서 끝나는 약 120km의 산맥이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백제의 옛땅 부여의 산과 들에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다. 백제의 슬픈 한이 서려 있는 부여는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곳이다. 가슴으로 느끼려면 차라리 어두운 밤이 좋으리라. 금남정맥과 나란히 난 길을 따라서 부여읍내 구드래 나루터로 향한다. 월명산의 산줄기가 오석산과 금성산, 부소산을 향해서 느릿느릿 이어진다. 저기 월명산 서쪽 산허리 어디메쯤 능산리와 용정리에 걸쳐 있는 청마산성(靑馬山城, 사적 제34호)이 있으리라. 청마산성이 있기에 이 산을 청마산이라고도 부른다.
둘레가 6.5km에 이르는 청마산성은 백제시대의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골짜기를 성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서 돌로 쌓은 순수한 포곡식(包谷式) 토석혼축산성이다. 이 산성은 다른 성과 같이 성안의 흙을 파서 쌓았기 때문에 내부는 자연적인 호를 이루고 있다. 현재 서쪽 부분에서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4~5m, 너비는 3~4m에 이른다. 수구문(水口門)으로 추정되는 서쪽의 계곡 외에 별다른 방어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수도였던 사비성과 연락하기 위하여 이 산성의 주문(主門)도 서쪽 수구문 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산성들은 방어가 주목적이었기에 성문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 산성에는 남문이 없다. 사비성(泗?城)의 동방방어를 위해 쌓은 청마산성은 남쪽의 석성산성(石城山城)이나 서쪽의 성흥산성(聖興山城), 북쪽의 증산성(甑山城)과 함께 수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방어 시설로서 의미가 있다. 성안에는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가 있고, 시야가 트인 곳에는 망대(望臺)터가 있다. 그리고 현재의 경작지는 건물터로 보이며, 성의 북서쪽에는 경룡사지(驚龍寺址)나 의열사지(義烈寺址)같은 절터와 석조(石槽), 의열비(義烈碑) 등도 남아 있다.
금남정맥 남쪽 기슭 논산 부여간 도로 바로 옆에는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부여왕릉원, 사적 제14호)이 있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사비성이 있었던 곳으로서 사비시대(538~660)의 백제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고분으로는 능산리고분군과 정암리고분군, 두곡리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다. 논산시의 육정리고분군과 표정리고분군도 넓은 의미에서 부여고분군에 포함할 수 있다. 능산리고분군은 백제시대 사비성의 나성(羅城)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다. 백제의 왕족묘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과 1917년, 해방후인 1965년의 발굴조사로 모두 8기가 알려졌으나, 대부분 심하게 도굴되어 널을 꾸미는 금구(金具)와 약간의 금동제식금구(金銅製飾金具) 외에는 별다른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동상총(東上塚)은 널길(羨道)이 널방(玄室)의 남벽 중앙에 딸린 전형적인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며, 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큰 중하총(中下塚)은 터널형 천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하총(東下塚)은 부여지방 유일의 벽화고분으로 널방 네 벽에는 4신도(四神圖), 천장에는 연꽃무늬(蓮花紋)를 교차시켜 배치한 사이에 비운무늬(飛雲紋)가 그려져 있다. 능산리고분군에서 발견되는 구조적인 특징인 판석으로 짠 직사각형의 널방이나 꺾임천장, 단벽의 중앙에 붙어 있는 널길 등을 갖춘 무덤을 능산리형 돌방무덤(陵山里型石室墳)이라고 부른다. 능산리형 고분은 부여뿐만 아니라 충남과 전북지방에까지 퍼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무덤을 만들 때 엄격한 규제의 흔적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백제의 지방통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금남정맥의 154.8봉에서 금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있는 작은 고개를 넘어서 부여읍내 부소산 남쪽의 관북리로 들어간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다. 사비문 바로 아래 유적발굴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구드래 나루터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을 걷기로 한다. 늦게 핀 벚꽃이 봄바람에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린다. 관북리는 백제 사비도읍기의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사비(부여)는 한성(漢城, 서울)과 웅진(熊津, 공주)에 이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다. 백제 제26대 왕인 성왕(聖王, ?~554)은 538년에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고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으나 아직까지 그 왕궁터는 별견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익산 왕궁리와 공주 공산성 내 쌍수전 앞 건물터, 부여 박물관 앞 궁궐터 등이 왕궁터로 거론되고 있지만 어느 곳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관북리가 유력한 왕궁터로 추정되는 이유는 지난 20여년간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무려 천여 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궁이나 관아의 물품을 저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창고시설 유적지의 발견은 이곳이 사비성의 왕궁터였음을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로 평가되고 있다.
이곳이 백제 사비시대의 왕궁터라면? 그렇다면 약 15세기 전 왕권과 국력의 강화를 위해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성왕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이남의 땅을 수복하려고 밤잠도 잊은 채 이곳을 거닐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551년 백제군을 주축으로 한 신라와 가야 연합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의 6군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의 6군을 도로 빼앗겼으니 얼마나 원통했을까!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일으킨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1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이 깨지면서 마지막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원수의 관계가 되었다.
백제 제29대 왕인 법왕(法王, ?~600)은 구복적 신앙을 통해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백마강 건너편에 세운 왕흥사(王興寺)로 가기 위해 신하들과 함께 자주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이미 한강유역 전부와 남양만 일대를 신라에게 빼앗겨 대중국 무역의 전초기지를 상실한 백제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데다가 귀족들의 내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법왕은 왕흥사라는 대규모 사찰을 지어 부처의 가호에 의탁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또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려 사냥에 쓰이는 매를 풀어주게 하고, 어로나 사냥의 도구들을 거둬들여서 불태우는 등 불교계율을 민간인들에게까지 강요하여 구복적 신앙으로 현실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복적 신앙을 통해서 국가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재위 2년만에 죽은 법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무왕(武王, ?~641)도 왕실의 원찰인 왕흥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이 길을 지나다녔을 것이다. 무왕은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로 내외정세의 악화와 귀족간의 내분으로 왕실이 약화된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권의 안정을 위해 신라의 서쪽 변방을 빈번하게 공격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정복전쟁에서의 승리는 국내정치를 어느 정도 안정시킨 반면에 신라와 당나라간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수(隋)나라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며,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자 624년 당 고조(高祖)에게 조공을 바치고 대방군왕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627년에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에게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 시도했다가 당나라의 권유로 포기한 적도 있다.
무왕은 실지회복을 꾀하는 한편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과 지리, 역서(曆書)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게 했다. 또한 630년에는 사비궁(泗?宮)을 중수했고, 634년에는 지금의 부여군 규암면 신리 왕언이(왕은리) 마을에 웅장하고 화려한 왕흥사를 완성했으며,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인 궁남지(宮南池)를 만들었다. 이러한 정복전쟁의 승리와 대규모 토목공사는 바로 전제왕권의 강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무왕이 구축한 왕권의 강화는 그의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의 정치개혁으로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도 궁녀들과 함께 이 길을 거닐었을 것이다. 백강(白江, 지금의 금강)을 거슬러 오는 소정방(蘇定方)의 당나라군과 탄현(炭峴, 지금의 대전시 대덕구 동면)을 넘어 황산벌(지금의 충남 연산)로 진격해오는 김유신의 신라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왕궁을 버리고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으로 허둥지둥 도망치는 의자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그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백제가 건국한 지 678년만에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의자왕은 태자 효와 왕자 융(隆), 대신, 장군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거기서 병사하였다.
*백마강변의 구드래 나루터
부소산 서쪽 끝자락의 구교리 백마강변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구드래 나루터를 비롯한 구드래 일원은 1983년에는 국민관광지, 1984년에는 충남사적 및 명승 제6호로 지정되어 공원화되었다. 1996~1997년에는 이곳에 조각예술품을 설치한 뒤 조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백제 문화권 출신 조각가들이 기증한 작품 30점과 1999년도 국제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 29점 등 총 59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구드래는 백마강, 부소산과 어울려 풍광이 뛰어나고 주변에는 유적이 많다. 구드래 나루터는 삼국시대에 외국의 사신들이 사비성이나 부소산성을 드나들던 유서깊은 포구로 지금은 유람선만 떠다니고 있다. 구드래 나루 건너 울성산에는 600년(무왕 1년)에 창건된 왕흥사 터가 있고, 백마강 양쪽 기슭에는 낙화암(落花岩), 고란사(皐蘭寺), 천정대(天政臺), 호암사지(虎岩寺址), 청룡사지(靑龍寺址),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나성(扶餘羅城) 등이 있으며, 부여읍내에는 국립부여박물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 등이 있다.
*구드래 나루터와 부소산
구드래의 유래는 무엇일까?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다. 구드래는 처음에 '구ㄷ으래'였을 것이다. 왕칭어인 어라하에 '구(大)'가 접두사로 붙고, 두 말 사이에 촉음 'ㄷ'이 첨가되어 '구ㄷ어라하' 가 되었으며, 이것이 다시 축약되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구드래'는 '대왕(大王)'의 뜻을 가지고 있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일본 천황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쓰여진 일본서기(720년)에도 백제를 '구다라(くだら)'로 칭한 문장을 자주 볼 수 있다. 여기서 '구다라'는 '큰 나라', 곧 '섬기는 나라, 본국, 대국(大國), 대왕국(大王國)'의 뜻으로 쓰인 동시에 백제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사실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 왕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유민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지배귀족층을 형성하였다. 실제로 일본인들 중에는 백제를 조상의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으며,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이 백제가 망하기 전 마지막 서울이었던 부여로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순례여행을 떠나온다. 또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들에 의해 꽃피운 문화가 바로 일본의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이다. 그런데 아스카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일본인들이 막상 부여에 오면 백제문화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들은 부여에 와서 구드래를 거닐며 백제인들의 숨결만이라도 느끼려고 한다.
*구드래 백마강변의 유채꽃
구드래 나루터에서 어둠속에 잠긴 백마강을 바라다본다. 백마강변에는 때마침 노오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 있다. 백제의 멸망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백마강은 고요하게 흘러만 간다. 법왕은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건너 왕흥사로 가곤 했을 것이다. 무왕이 신하들과 함께 흥겹게 어울려 즐겼다는 대왕포(大王浦)도 아마 이곳이 아니었을까? 궁녀들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의자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구드래 나루터를 거닐면서 '꿈꾸는 백마강'을 불러본다. 이 노래는 백제의 비극적인 멸망과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지는 궁녀들을 생각하면서 애절한 심정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오로리 찢어지는데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꿈꾸는 백마강'은 부여와 백마강을 무대로 활동했던 백제의 비극적인 멸망에 대한 나그네의 애달픈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조명암(趙鳴岩, 본명 조영출, 1913~1993)이 작사하고 임근식이 작곡한 이 노래는 일본강점기인 1940년에 이인권이 오케이레코드사에서 취입하여 백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후 고복수와 남인수, 최무룡, 배호, 나훈아, 레이디스 토크, 주현미 등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백제의 멸망을 이처럼 나그네의 애절한 심정에 담은 노래는 일찌기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노랫말 중의 '잃어버린 옛날'이 일본에 빼앗긴 조선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며, '백마강 탄식'은 나라를 잃은 슬픔일 수도 있었다. 조선의 국권상실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백제의 멸망에 대입하여 노래한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라는 구절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고뇌가 엿보인다. 백제의 멸망과 향수를 노래했지만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듯한 노랫말로 인해 조선민중들은 더욱더 이 노래를 사랑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이 노래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발매를 금지시켰다.
'꿈꾸는 백마강'의 실제 작사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밝혀지지 않았었다. 작사자 조명암이 바로 월북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역대 반공독재정권하에서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되었다. 충남 아산출신의 조명암은 모더니즘 시인이자 연극인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시들을 창작함과 동시에 해방 전에 이미 5백여편이 넘는 노래가사를 씀으로써 남한의 현대시사와 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꿈꾸는 백마강' 외에도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고향초', '바다의 교향시'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월북해서 숙청당한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북한에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평양가무단 단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희곡과 작사활동을 하면서 1993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상 계관인(최고훈장에 해당)이란 칭호를 받았다.
조명암은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에 의해 '꿈꾸는 백마강'의 애달픈 가사만큼이나 슬픈 가족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1941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1945년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한 뒤, 1948년 미군정이 진보적 작가들을 탄압하자 홀로 월북했다. 6.25가 발발한 이듬해 부인 장옥경도 남희와 용희 등 두 딸을 데리고 월북하였다. 그러나 둘째 딸 조혜령은 경기도 조모댁에 홀로 남겨졌다. 역대 반공정권의 혹독한 연좌제를 피하기 위해 그녀는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승려생활도 하였다. 1992년 마침내 조명암이 해금되자 남한의 유일한 혈육인 조혜령은 조영출의 친자확인 소송에서 승소한 데 이어 조명암, 조영출, 이가실, 금운탄 등 자신의 아버지 이름으로 등록된 수백곡의 저작권을 되찾았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마강
'꿈꾸는 백마강'을 부르면서 구드래 나루터를 이리저리 거닐어 본다. 노래를 부르다보니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의 슬픔과 한이 전해오는 듯하다. 오늘따라 조상의 땅 부여를 찾아와 구드래를 헤매고 다니는 일본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백제의 혼을 찾으려는 듯 간절한 눈빛을 한 일본인들에게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동질감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 그들을 만날 때마다 동질감을 가벼운 눈인사로 대신하곤 한다.
구드래를 떠나 정림사지(사적 제301호)가 있는 동남리로 향한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정림사는 부여읍 동남리에 있었던 절로,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다.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申定林寺大藏堂草(태평팔년무신정림사대장당초)’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1028년(현종 19년) 중건 당시 정림사라는 사찰명을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정림사의 가람배치는 중문(中門)과 석탑(石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장방형의 남북일탑식가람(南北一塔式伽藍)으로 전형적인 백제식의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회랑지 서남쪽 모서리에서는 다량의 막새기와편, 벼루, 삼족토기(三足土器),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陶俑)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금당과 중문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이 절의 중수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扶餘定林寺址石佛坐像, 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는 백제의 가람형태 및 석탑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일명 백제탑이라고도 하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지금까지 평제탑(平濟塔)이라고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어왔는데, 그것은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망시킨 기념으로 일층탑신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명은 그 전부터 있었던 이 탑에 소정방이 글을 새겨넣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탑은 660년(의자왕 20년) 훨씬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탑의 높이는 8.33m이며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탑의 구조는 기단 위에 탑신부가 있고, 상륜부는 복발(覆鉢)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지고 없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끼워 놓았다. 탑신부의 각 층 탑신에는 모서리마다 우주를 세워 놓았는데, 목조건물의 기둥처럼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기법을 사용하였다. 얇고 넓은 옥개석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반전되어 경쾌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며, 층급받침은 2단으로 얕은 편이다. 전체적으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의 옥개석,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목조탑을 창조적으로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서 장중한 아름다움과 격조높은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단 두 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삼국시대의 석탑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정림사지석불좌상은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높이 5.62m의 거대한 불상으로 오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다.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 나간데다가 몸체의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다. 또 머리와 보관은 후대에 만들어 얹은 것이어서 자세한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몸집이 다소 왜소한 느낌을 준다. 좁은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쥔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보존상태가 훨씬 좋은 편이다. 상중하 3단의 팔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의 상대에는 활짝 핀 연꽃(仰蓮)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의 팔각 받침돌(竿石)에는 큼직한 눈모양(眼象)이 새겨져 있다. 하대의 상부에는 엎어진 연꽃(覆蓮), 하부에는 각 면에 안상을 삼중으로 조각하였다. 이 불상은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불대좌 등과 그 양식이 비슷한 점, 강당지에서 출토된 기와명문을 통해서 고려시대 정림사 중건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지를 떠나 궁남지(사적 제135호)가 있는 동남리 대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동남리에는 시 '껍데기는 가라'와 장편 서사시 '금강'으로 유명한 신동엽(1930~1969) 시인의 생가가 있으며, 동남리 백마강변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신동엽(申東燁)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토착정서에 역사의식을 담은 민족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시들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에 민중시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껍데기는 가라'는 1960년대 참여문학의 대표작이며, 외세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민중문학과 민족문학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껍데기'는 사라져야 할 '전쟁, 분단, 외세, 독재, 불의, 가짜'를, '알맹이'는 보존되어야 할 '평화, 통일, 자주, 민중, 정의, 진짜'를 상징한다. 신동엽은 이 시를 통해서 그는 민족의 자주성이 보장되는 민중 주체의 민주사회를 강렬하게 열망하고 있다. 지금 남한에서 껍데기들은 과연 사라졌는가?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밤이 늦어서 그런지 가로등불 아래 윤곽만 희미하게 드러낸 궁남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이 뱃놀이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을 궁남지는 백제의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속에 잠겨 있다. 무왕과 의자왕이 걸었을 이 길을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다. 궁남지는 무왕이 별궁의 연못으로 만든 호수이다. '삼국사기'의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에서 궁남지란 이름이 유래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수로를 통해서 호수에 물을 끌어들였고,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한가운데에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호수의 중앙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어 섬의 존재가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그 주위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수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동해바다에 신선이 산다는 세 개의 섬, 즉 봉래(蓬萊), 방장, 영주(瀛州) 등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믿어서, 정원의 호수에 삼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어 놓고 불로장수를 기원하였다. 궁남지는 바로 이 삼신산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神仙庭園)이라고도 불린다. 궁남지의 동쪽에 있는 화지산(花枝山) 서쪽 기슭에는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와 우물,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이 호수는 백제의 조경양식과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적이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남지는 커다란 연못과 여러 개의 작은 연못으로 나뉘어져 있다. 작은 연못 한가운데 있는 정자에 앉아 비운의 의자왕을 생각하다. 연못마다 죽은 연잎들이 가득 떠 있다. 5월 연꽃들이 활짝 피어나면 장관이겠다. 어디선가 개구리 우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고 들려온다. 마한의 옛땅 백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2007년 4월 21일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명산 금지사, 아미산 광덕사를 찾아서 (0) | 2007.07.09 |
---|---|
부소산 고란사를 찾아서 (0) | 2007.06.26 |
겨울 서해바다 포토기행 (0) | 2007.02.07 |
무릉계 비경을 찾아서 (0) | 2006.12.22 |
아라리의 고장 정선 아우라지를 찾아서 (0) | 2006.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