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서 이틀째 아침을 맞는다. 오늘은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과 한국 최남단 섬인 마라도를 가기로 한 날이다. 친구가 차를 가지고 와서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침식사는 가는 길에 서귀포에서 해물뚝배기를 잘 하기로 유명하다는 식당에 들러서 먹기로 한다. 기대를 잔뜩 하고 소문난 식당에서 해물뚝배기를 먹었는데 명성에 비해 음식맛은 영 아니다. 밥도 어제 팔다가 남은 것인지 묵은 밥이다. 이 식당은 그동안 돈을 좀 번 모양이다. 다음에 또 제주도를 찾게 되면 이 식당을 다시 찾지는 않을 것 같다.
*대정읍과 안덕면 지도(제주특별자치도가 되기 전의 지도)
식당을 나와 용머리해안으로 향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다. 중문을 벗어나 화순으로 접어들자 산방산이 눈에 들어온다.
*산방산
용머리해안에 도착해서 영주 십경 중 하나인 산방산(山房山, 해발 395m, 지름 1200m)을 바라본다. 사방이 주상절리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종모양의 산방산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방산 기슭에 보이는 절은 산방사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슴을 쏘려다가 잘못해서 그만 옥황상제의 궁둥이를 맞추자 이에 화가 난 옥황상제가 손에 잡히는 대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이 곳으로 날아와 산방산이 되었고, 봉우리가 뽑힌 곳은 백록담이 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둘의 둘레와 크기도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산방산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산으로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종상화산이다. 다른 화산들과는 달리 정상부는 분화구가 없는 용암원정구로 마치 돔처럼 돌기둥들을 포개어 세워놓은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신생대 제3기에 바다 속에서 용암이 분출하면서 서서히 융기하여 지금의 산방산이 되었다. 이것은 해발 200m가 넘는 곳에서 발견되는 바닷물에 의한 침식을 받은 흔적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정상부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육박나무, 겨울딸기 등과 같은 난대림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절벽에는 지네발란, 풍란. 석곡 등 희귀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1966년 10월 천연기념물 제182-5호로 지정되었다. 지네발란은 한국에서도 이곳에서만 자생하고 있는 희귀식물이고, 섬회양목과 도라지는 제주도에서 이곳이 유일한 자생지다. 풍란이나 석곡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마구 캐어간 결과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동물로는 산양이 서식하고 있다.
산방산 남서쪽 산록 해발 20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산방굴이라는 해식동굴이 있다. 길이 10여m, 너비 5m, 높이 5m쯤 되는 동굴 안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어 산방굴사(山房窟寺)라고도 부른다. 이 굴사는 고려시대의 고승 혜일이 도를 닦았던 곳이었다고 하며, 제주도로 귀양을 왔던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았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굴 천장의 바위틈에서는 물이 쉬지않고 떨어지는데, 이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물은 산방산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山房德)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고 한다. 또 이 동굴 안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산방덕이 화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설을 들어보도록 하자.
아주 먼 옛날 산방산 자락에 노부부가 자식도 없이 쓸쓸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하르방이 산방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산방굴을 지날 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굴 안을 들여다 보자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있었다. 하르방은 산방산 산신령님께 감사의 절을 올리고, 산방산 신령님의 덕으로 딸을 얻었다는 뜻으로 이름을 산방덕이라 지었다. 산방덕은 자라날수록 아름답고 심성이 착해 온 고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산방덕이 꽃다운 처녀가 되었을 때 노부부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고승(高升)이라는 총각이 홀로 된 산방덕을 찾아가 위로도 해주고, 집안일도 도와주었다. 얼마 후 두 청춘남녀는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혼인을 하였다. 그런데 산방덕의 미모를 탐내던 그 고을의 사또가 고승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고승을 귀양보낸 사또는 그녀를 달래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면서 야욕을 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산방덕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또는 강제로라도 욕심을 채울 생각으로 밤을 틈타 그녀를 찾아갔다. 이를 알아차린 산방덕은 속세에 온 것을 한탄하면서 산방굴로 들어가 바윗돌로 변해 버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당하지 않은 권력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폭력일 뿐이다. 산방덕의 슬픈 전설을 생각하면서 용머리해안으로 향한다.
*하멜 상선 전시관
용머리해안 입구에는 하멜이 태풍으로 표류해 왔을 당시의 배와 똑같이 만들었다는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하멜 상선모형은 현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하멜 상선 전시관에서 산방산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하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한국과 네덜란드의 공동출연으로 하멜이 표류해 왔던 용머리해안에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작은 배를 타고 전세계의 대양을 누비고 다녔다니 그들의 항해술이 놀랍기만 하다.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던 하멜은 네덜란드인으로 1653년(효종 4) 1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바다비아를 거쳐 타이완에 도착했다. 그 해 7월 하멜이 탄 배는 타이완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항해를 하던 중 큰 태풍을 만났다. 8월경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중 하멜을 포함한 36명이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로 떠밀려 왔다. 그들은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은 후 이듬해 5월 서울로 호송되어 훈련도감에 강제편입되었다. 그 뒤 1657년에는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현종 4)에는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했다. 1666년 9월 하멜은 7명의 동료와 함께 조선을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마침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귀국 후 하멜은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일명 蘭船濟州島難破記)'를 썼다. 이 책은 조선을 서양에 소개한 서양인 최초의 저술로 당시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하멜 표류기'는 하멜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던 13년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로부터 받아내기 위해서 쓴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내가 만약 제주목사였다면 하멜 일행을 잘 대접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이들을 잡아서 13년 동안이나 억류했다는 것은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조선은 폐쇄적인 사회였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용머리해안의 기암절벽
하멜 상선 전시관을 지나서 내려가면 바로 용머리해안이 시작된다. 산방산 기슭에서 이어지는 해안의 바위언덕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용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기묘묘한 바위절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연이 빚어낸 위대한 경관 앞에서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용머리해안의 서쪽 절벽지대
용머리해안의 중간쯤에서 서쪽 절벽지대를 바라보니 흡사 거대한 용의 머리가 바다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다. 수십 미터의 바위절벽이 500여 미터에 이르는 해안단구의 모습이 기묘하면서도 신비롭다. 이곳의 바위절벽은 제주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용암층이 아니라 수천만 년 동안 퇴적되어 이루어진 사암층이다. 그 사암층이 오랜 세월 바닷물에 의한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지금과 같은 오묘한 절경이 된 것이다. 용머리해안의 바위절벽은 파도와 비바람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걸작품이다. 평평하고 널찍한 갯바위 여지저기에는 참소라나 멍게, 해삼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손님들을 부른다.
*용머리해안의 동쪽 절벽지대
파도가 찰랑대는 갯바위를 걸어가노라니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남해바다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끝도 알 수없는 바다 저 깊은 곳에서 들릴 듯 말 듯 들려오는 이야기.....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용머리 해식단애의 기암절벽은 보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모래가 겹겹이 쌓여 바위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던 것일까? 사암층 한 층 한 층의 절벽주름에는 억겁의 세월이 쌓인 흔적이 보인다. 이곳 용머리해안에는 호종단(胡宗旦, 또는 고종달)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제주는 원래 왕후지지(王侯之地)였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중국왕 또는 고려왕)는 다른 제왕이 나올 것을 염려하여 풍수에 능한 호종단에게 제주에 가서 제왕이 나올 만한 지맥을 끊어버릴 것을 명했다. 이에 호종단은 제주 곳곳을 다니며 수맥과 지맥을 모조리 끊었다. 호종단이 마지막으로 산방산에 와서 보니 용머리를 꿈틀대며 큰 바다로 나가려는 형세를 보고는 용의 꼬리와 허리를 끊어버렸다. 지맥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시뻘건 피가 솟아났고, 산방산은 여러 날 동안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었다. 황명을 완수한 호종단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다가 한라산 수호신의 노여움을 받아 차귀도(遮歸島) 앞바다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그 때부터 제주에는 물도 귀하고 왕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호종단 설화는 지형에 변화가 생기면 집안이나 고장, 나아가 국가의 운수가 달라지게 된다는 단맥설화(斷脈說話) 가운데 하나다. 이 설화에는 샘이 귀하고 땅이 척박한 제주도의 환경조건 속에서 본토와 외세에 의한 억압과 착취에 시달려온 제주인들의 좌절감이 나타나 있다. 호종단을 고려 조정에서 보냈다는 전승도 있는데, 이것은 제주도가 본토로부터 소외된 지역이었음을 반영한다. 호종단이 중국에서 왔다고 한 설화에서는 소외로 인한 내부의 갈등이나 불만을 외부의 대상으로 전이시키는 모습도 발견된다.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지방관과 중앙정부의 가렴주구로 인한 것임에도 제주인들은 호종단이 혈맥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중국은 원나라 때부터 제주도를 수탈했으므로 이런 설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단맥설화는 시대가 바뀌어서도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에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을 두려워 하여 각도의 중요한 지맥들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전국각지의 명당혈에 쇠말뚝을 박아서 지맥을 끊었기 때문에 조선의 운명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 설화에는 나라에 큰 고난과 역경이 닥쳤을 때 그 원인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제주인들은 단맥설화에 나타난 좌절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외세와 외세를 등에 업은 세력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들고 일어난 4.3제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좌절과 절망을 스스로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항쟁을 통해서 제주인들은 그들이 진정 극복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히 깨닫게 된다. 지맥이나 수맥을 끊고 쇠말뚝을 박는 것으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운명을 결코 바꿀 수 없다. 따라서 단맥설화류의 풍수지리설은 하루속히 사라져야 한다.
*구멍바위
바위절벽 곳곳에는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이한 모양의 무늬와 움푹 패인 자국들이 무수히 많다. 어떤 곳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크게 뚫린 굴도 있다. 파도는 암벽에 큰 구멍도 �어 놓았다. 산책로는 이 구멍바위로 나 있다.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바위경치가 멋지다.
*용머리해안의 바위협곡
구멍바위를 빠져나오면 마치 두 동강난 것처럼 갈라진 비좁은 바위절벽 사이로 돌계단길이 나타난다. 아마도 여기가 단맥설화에 나오는 호종단이 칼로 내려친 용의 잔등이나 꼬리에 해당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돌계단을 올라가면 용머리해안을 다 둘러보게 된다. 돌계단길을 올라가 언덕 위에 서면 용머리해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용의 등에 해당되는 밋밋한 능선에는 잔디가 녹색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하멜 표류 기념비를 보고나서 용머리해안을 떠난다. 마라도행 유람선을 타려면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산이수동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사계해안도로를 따라 송악산 기슭에 있는 산이수동 선착장에 도착하니 12시에 떠나는 유람선이 막 출발하려고 한다. 승선권을 사서 뛰다시피 하여 간신히 유람선에 오를 수 있었다.
*송악산 해안절벽에 뚫려 있는 굴
유람선은 곧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바다로 나간다. 송악산 기슭 바위절벽 밑에 보이는 여러 개의 동굴은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파놓은 것이다. 일본군은 저 동굴 안에 해안포대를 설치하여 제주 앞바다로 들어오는 미국과 중국의 전함들을 격침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피해를 준 것에 대해 아직도 진정한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보여준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송악산
유람선이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자 송악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송악산은 다른 기생화산들과는 달리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99개의 봉우리가 모여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99봉이라고도 부른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높이는 해발 104m 이다. 주봉의 정상부에는 깊이 80m, 둘레 500m 정도 되는 분화구가 있다. 그 안에는 아직도 검붉은 돌과 같은 화산분출물의 흔적이 보인다. 송악산 주봉을 중심으로 서북쪽은 넓고 평평한 초원지대로 서너 개의 봉우리가 있고, 동쪽은 제법 가파른 분지형태로 되어 있다. 송악산 해안은 해식단애의 바위절벽으로 되어 있어 용머리해안 못지 않은 경치를 자랑한다. 이 해안은 감성돔이나 벵에돔, 다금바리가 많이 잡히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송악산의 섯알오름은 6.25 때 195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섯알오름 학살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8월20일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347명 가운데 195명이 계엄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건이며, 백조일손(百祖一孫)묘역에 132구가, 만뱅디묘역에 63구가 안장돼 있다. 이들 주민들은 무고한 양민과 보도연맹원, 4ㆍ3 당시 체포됐다가 석방된 사람들로 정부는 6·25후 예비검속이란 미명하에 한림, 대정 지역의 주민들을 체포하여 대량으로 학살했다. 당시 학살된 시신은 6년 후에야 겨우 유족들에 의해 수습됐는데, 수습된 132구나 되는 유골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유족들은 '조상은 백이나 자손은 하나'라는 뜻의 백조일손 묘역을 조성하고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군, 경에 의한 저항군의 토벌과정에서 자행된 무고한 양민학살은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범죄행위다. 대부분의 양민학살은 군,경에 의해 저질러졌다. 정규전이 아닌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항군과 내통했다는 정황만으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고한 양민들을 집단학살한 것은 분명 반인류적이고 반문명적인 만행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정권의 탄압정치에 대한 저항으로 1948년 4월 3일 일어난 4.3제주민중항쟁으로부터 6.25에 이르기까지 군,경에 의해 자행된 제주도 양민학살사건은 반드시 그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산 넘어 산이다. 그것은 가해자들은 득세하여 떵떵거리고 살아가는데 피해자들은 오히려 숨죽이면서 살아야만 했던 불행한 한국현대사와 무관하지 않다. 미군이 한반도를 점령하자 친일파들은 재빨리 친미파로 변신하여 정부관료와 군, 경의 수뇌부를 장악하였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지금도 보수의 탈을 쓰고 한국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산방산
뒤를 돌아보니 사계항 뒤로 산방산이 우람한 자태로 앉아 있다. 그 모양이 흡사 거대한 종을 엎어놓은 듯이 보인다. 산방산 앞으로는 용머리해안이 바다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형제섬
유람선 오른쪽으로 형제섬이 사이좋게 떠 있다. 북쪽 용머리해안에서 볼 때는 하나의 섬으로 보였는데, 바다로 나와 서쪽에서 바라보니 큰 섬과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섬이 형제처럼 다정하게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형제섬으로 부른다. 형제섬은 약 10만 년 전 빙하기 무렵 송악산이 화산폭발할 때 바다속에서 용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섬으로 추정된다. 지질학적으로도 풍화, 침식 정도로 볼 때 송악산의 지질과 거의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계포구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져 있는 이 섬은 제주도의 무인도 가운데 경관이 빼어난 곳 중 하나다. 또 이 섬에는 감성돔, 벵에돔, 전복, 소라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형제섬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대피소가 있으나 해양오염과 불법 수석채취로 인해 지금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형제섬에는 옛날부터 쥐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쥐섬이라고도 부른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섬에는 수만 마리에 달하는 쥐가 살고 있었다. 쥐떼를 잡으려고 고양이 백 마리를 갖다 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쥐들이 오히려 고양이들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4.3제주민중항쟁 당시 형제섬에 살았던 사람이 실제로 경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람은 쥐를 잡으려고 고양이를 들여와 부엌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밤이 되자 고양이가 마구 날뛰며 울부짖는 것이 아닌가! 주인이 부엌으로 나가보니 수십 마리의 쥐떼가 달려들어 고양이를 뜯어먹고 있었다. 주인은 그 광경을 보고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지금도 형제섬에는 쥐가 많다고 한다. 낚시꾼들이 형제섬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면 쥐들이 낚싯대에 기어올라 끊어 먹는 일도 있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가파도
바다경치를 좀더 잘 보기 위해서 뱃머리로 나간다. 유람선은 가파도(加波島)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大靜邑) 가파리에 속하는 가파도는 낮고 펑퍼짐한 접시를 엎어놓은 모양의 섬이다. 구릉이나 단애가 없는 평탄한 섬으로 전체적 모양은 가오리 형태를 이루고 있다. 큰 파도가 몰려오면 섬 전체가 바다에 잠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제주도와 마라도 중간에 있는 이 섬의 면적은 2.41㎢, 해안선 길이는 4.2㎞,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0.5m이다. 하루 2회의 정기선이 모슬포와 섬 북쪽의 하동포구(下洞浦口)를 오고간다. 가파도에 논은 없지만 밭과 임야가 있어서 보리와 고구마가 생산된다. 그러나 농업은 어디까지나 부업이고 주산업은 어업이다. 주변 해역에는 어로자원이 풍부하여 전복이나 소라, 옥돔, 자리돔, 자리젓 등의 특산물이 유명하다.
가파도는 다양한 지명을 가지고 있다. 섬 전체의 모습이 덮개와 비슷하다고 해서 개도(蓋島)라고도 하고, 개파도(蓋波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 더위섬(더우섬), 더푸섬으로도 불린다. 하멜표류기는 이 섬을 ‘Quelpart’ 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가파도는 무인도로 버려진 섬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750년(영조 26) 제주 목사가 조정에 진상하기 위하여 이 섬에 소 50마리를 방목하였는데, 이 때 소를 돌보기 위해 40여 가구의 주민들도 함께 들어왔다. 그후 1842년(헌종 8)에는 가파도의 개간과 출입이 허가되었다. 가파도에는 조개무지와 선돌, 고인돌군 등의 유적이 있고 해녀 노젓는 소리, 방아질 소리, 맷돌질 소리와 같은 민요도 전해진다.
가파도를 지나자 바로 앞에 마라도가 그림같이 떠 있다. 한국의 최남단에 있는 작은 섬 마라도..... 유람선이 점점 다가가자 용암 해식단애 위로 펼쳐진 푸른 초원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마라도는 산이수동 송악산포구에서 남쪽으로 11.5km 떨여져 있으며, 뱃길로는 30분 정도 걸린다.
*자리덕 선착장의 남쪽 해안. 팔각정 근처의 해식동굴을 일명 남대문이라고 부른다.
*자리덕 선착장의 북쪽 해안
유람선이 마라도 서쪽에 있는 자리덕 선착장으로 들어간다. 마라도의 관문은 서쪽의 자리덕 선착장과 동쪽의 살레덕 선착장 두 곳이다. 동풍이 불면 자리덕 선착장에 배를 대고 서풍이 불면 살레덕에 사람을 내려놓는다. 예로부터 마라도는 자리돔이 유명한데 특히 이곳에서 잘 잡힌다고 해서 자리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착장 주변 해안은 거무튀튀한 용암 해식단애로 되어 있다. 해안의 바위절벽에는 커다란 해식동굴이 여기저기 �려 있어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유람선에서 내려 마라도에 첫 발을 내딛는다. 마라도는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섬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큰 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에 속한다. 동서폭은 0.5㎞, 남북길이는 1.2㎞, 가장 높은 곳의 해발고도는 39m, 면적은 약 0.3Km²(10만평) 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다.
마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83년부터다. 그 전까지는 '금(禁)섬'이라 하여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꺼렸던 섬이다. 1883년(고종21년) 제주사람 김명오씨 일가가 파산하여 거처할 곳이 없게 되자 고을 원에게 간청하여 마라도에 들어가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때 라씨, 한씨, 이씨 가족들도 함께 들어왔다. 처음에 이들은 먹을거리가 없어 물고기를 잡거나 해초를 따서 연명을 하였다. 그러다가 농사 지을 땅을 얻기 위해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숲에다 불을 놓았다. 불은 3개월이나 계속 탔다. 그러자 숲에서 살던 새들은 다 날아가고, 그 많던 뱀들은 꼬리를 물고 동쪽바다로 헤엄을 쳐서 도망을 갔다. 이 때부터 마라도에는 더 이상 나무가 자라지 않고, 개구리와 뱀도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마라도란 명칭은 1702년(조선 숙종 28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순력중에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제작토록 한 '탐라순력도' 대정강사편에 등장한다. 탐라순력도에는 이 섬을 마라도(麻羅島)로 표기하고 있다. 지명으로 미루어 보아 '칡넝쿨이 우거진 섬'이란 뜻에서 마라도란 이름이 유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마라도의 지명유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제주사람들은 마라도와 가파도가 외딴 곳이어서 이 두 섬사람과 거래한 돈은 '갚아도(가파도) 그만, 말아도(마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마라도는 풍랑이 늘 거세게 몰아쳐서 위험한 섬이었기에 '오지도, 가지도 마라'는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지명유래에는 마라도가 옛날부터 육지와 멀리 떨어진 낙도일 뿐만 아니라 기상조건도 상당히 좋지 않은 섬이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장
자리덕 선착장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다가 보니 바닷가 언덕 위에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교문에 해당하는 정주먹에 정낭이라고 부르는 나무기둥 세 개가 다 걸쳐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주먹과 정낭은 제주도의 전통 대문이다. 3~4개의 구멍이 �려 있는 정주먹은 현무암이나 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정주먹은 현무암으로 만들면 정주석, 나무로 만들면 정주목이라고 한다. 정낭이 하나도 걸쳐 있지 않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밑에 정낭이 하나만 걸쳐 있으면 집안에 사람이 없으나 곧 돌아온다는 뜻이다. 또 두 개의 정낭이 걸쳐 있으면 사람이 이웃동네에 가 있으나 금일 중에는 돌아온다는 뜻이고, 세 개의 정낭이 모두 걸쳐 있으면 먼 곳으로 출타하여 금일 중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라분교에는 현재 6학년 남녀 각 1명씩과 1학년 남녀 각 1명씩 총 4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내년에 두 명이 졸업하면 신입생이 들어오지 않는 한 두 명의 재학생만 남게 된다. 한때 마라분교는 폐교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가 한국 최남단에 있는 학교라는 상징성 때문에 폐교를 면했다고 한다. 마라분교가 문을 닫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라는 것은 학교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과 같은 것들 말이다.
*원조 마라도 해물 자장면집
마라분교 바로 길건너 왼쪽에는 원조 마라도 해물 자장면집이 있다. 언젠가 텔레비젼에 개그맨이 자장면을 배달하러 마라도 앞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서 '자장면 시키신 분!'하고 외치던 광고에서 힌트를 얻어서 문을 열었다는 자장면집이다. 그래서인지 이 집에는 제법 여러 사람들이 탁자에 앉아서 자장면을 먹고 있다. 좀 전에 지나쳐온 자장면집에는 손님이 별로 없던데..... 매스컴의 위력이 세긴 세다.
한반도의 최남단인 마라도, 그 마라도에서도 가장 남쪽 끝에는 장군바위가 있다. 따라서 바로 이곳이 한국의 최남단이리고 할 수 있다. 마라도 사람들은 이곳이 하늘에 살고 있는 천신이 지신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길목이라고 믿고 있다. 일제시대 때는 일본인들이 신사비를 세우고 자기 나라 일왕이 살고 있는 왕궁을 향하여 신사참배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장군바위 근처에는 신사비가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철거해 버렸다고 한다. 마라도 사람들은 장군바위를 수호신으로 받들고 매년 이 곳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장군바위에 올라가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는데, 이 바위에 올라가면 바다가 노한다고 믿고 있다. 장군바위 주변은 일출과 일몰을 한자리에서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다.
*장시덕 선착장쪽에서 바라본 장군바위
계단길을 내려가 장시덕 선착장에서 장군바위를 올려다 본다. 위풍당당한 장군바위가 한반도의 최남단에 우뚝 서서 남해바다는 물론 북태평양까지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 바위절벽에 '한국최남단'이라고 새긴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장시덕 선착장의 넙적여
장시덕 선착장에는 넙적여라는 갯바위가 있다. 사실은 바로 이곳이 마라도의 남쪽 땅끝이다. '여'는 '암초, 갯바위'를 나타내는 말로, '넙적여'는 '널찍하고 평평한 갯바위'라는 뜻이다. 이곳은 바다낚시꾼들에게 벵에돔과 긴꼬리벵에돔의 포인트로 잘 알려진 낚시터다. 넘실대는 파도가 쉴 새 없이 넙적여로 밀려와서는 산산이 부서진다. 넙적여 앞으로 보이는 것은 푸르른 바다와 가없는 수평선 뿐..... 남해바다는 저 수평선 너머로 북태평양과 이어진다.
*장군바위 동쪽의 해식단애
장군바위 동쪽해안은 태평양의 거센 파도에 침식되어 수직암벽을 이루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용암 해식단애를 '그정'이라고 부른다. 그정의 가장 높은 곳은 39m에 달하며, 평균 20~30m에 이른다. 바위절벽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우렁차다. 바다가 파란 것은 바위에 수없이 부딪쳐서 멍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대한민국최남단비
*최남단비 앞에서 친구 박정선
*최남단비 앞에서 필자
장군바위 바로 위에 세워져 있는 대한민국 최남단을 알리는 기념비 앞에 선다. 관광객들도 최남단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야단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외롭게 서 있는 기념비를 뒤로 하고 그정 위로 난 산책로를 따라서 등대로 향한다.
*마라도 카톨릭 성당
장군바위에서 동쪽 해안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초원지대에 자리잡은 카톨릭 성당이 보인다. 마라도에는 2005년말 당시 주민등록상 인구 104명에 상주인구는 40여명 밖에 살고 있지 않은데, 이렇게 작은 마을에 사찰과 교회, 성당이 모두 다 있다. 카톨릭 신자는 한 명도 없어 성당은 일년 내내 거의 닫혀 있으며, 교회와 사찰의 신자도 5,6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마라도 등대
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마라도 등대가 있다. 등대 한쪽에는 세계 각국의 유명한 등대의 모형을 전시해 놓았다. 일제시대 때인 1915년에 세워진 이 등대는 마라도의 명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해도에도 표기되어 있다. 등대는 1987년에 새로 개축되었는데, 등탑은 8각형 콘크리트 구조물로 높이가 약 16m에 이른다. 밤에 등대의 불빛은 10초에 1회씩 반짝이며, 그 불빛은 39km 거리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등대의 전원은 태양전지와 풍력발전기에서 나오는 전기를 사용한다. 언덕 위의 하얀 집, 마라도 등대는 오늘도 변함없이 캄캄한 밤이 오면 동중국해와 제주도 남부해역을 오가는 배들을 위해 등불을 밝히리라.
*동쪽 해안절벽과 살레덕 선착장
동쪽 해안절벽 위에는 사람들의 추락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다. 울타리를 따라서 마라도 동쪽 해안절벽과 바다경치를 잘 볼 수 있도록 산책로가 나 있다. 해안절벽을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아찔한 느낌이 든다. 해안절벽과 살레덕 선착장 방파제에는 제법 높은 파도가 밀려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살레덕 선척장 바다 건너 산방산과 송악산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반들가시나무꽃
산책로 주변에는 자주색 순비기나무꽃과 반들가시나무의 하얀꽃이 활짝 피어 있다. 연보라색 갯쑥부쟁이꽃도 한 송이 호젓하게 피었다. 이들 외에도 백년초와 갯기름나물, 해국 군락도 흔하게 눈에 띈다. 마라도는 이런 들꽃들이 있어서 더 아름다운 섬이다.
*마라도 연못
살레덕 선착장으로 가다가 초원지대의 풀밭 한가운데 있는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아마도 빗물이 고여서 된 연못이리라. 마라도처럼 작은 섬에 이런 연못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살레덕 선착장에서 바라본 동쪽 해안절벽지대
살레덕 선착장으로 내려가니 해안절벽과 커다랗게 뚫려 있는 해식동굴이 장관이다. 마라도 동쪽 해안은 확실히 서쪽 해안보다 파도가 더 높게 치는 것 같다. 넘실대는 파도가 해안절벽으로 밀려와 부딪칠 때마다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해식동굴 안에서도 파도가 요동을 친다.
마라도 북쪽 해안은 다른 곳과는 달리 해식단애가 아니다. 이 곳은 넓고 평평한 용암 갯바위가 해안을 이루고 있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는 산방산과 송악산, 가파도가 비교적 잘 보인다.
북쪽 해안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돌아오면 해식동굴 위에 할망당(아기업개당)이 있다. 현무암으로 낮은 담을 두르고 바다를 향한 지점에는 넙적한 돌로 제물을 올리는 곳을 만들어 놓았다. 이 할망당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마라도는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까지만 해도 금(禁)섬이었다. 누구든지 이 섬을 다녀가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입도를 금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섬에 몰래 들어와 해산물을 잡아가곤 하였다. 가파도 상모리에 살던 고부 이씨 부부는 가산을 탕진하고 마라도로 건너왔다. 이 때 업저지(남의 아이를 업어주는 소녀)도 이들과 함께 왔다. 이씨 부부는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마라도의 숲을 불태우고 개간작업을 벌였다. 작업을 마치고 다시 가파도로 건너가려고 했던 전날 밤, 이씨에게 처녀 한 사람을 두고 가지 않으면 풍랑을 만나 모두 물에 빠져죽을 것이라는 신의 현몽이 있었다. 이씨는 인정상 업저지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 함께 가려고 하니 마라도 앞바다에 갑자기 안개와 폭풍이 몰아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씨는 배를 타기 직전 업저지한테 심부름을 시켜놓고 가파도로 떠나버렸다. 업저지는 주인을 애절하게 소리쳐 부르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3년이 지난 후 그들이 다시 마라도로 돌아왔을 때 업저지는 울다가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이씨 부부는 업저지의 시신을 정성껏 거두어 주고, 그녀의 애절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당(堂)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가련한 업저지 처녀의 혼을 기리기 위해 마라도 사람들은 지금도 이 할망당에서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할망당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마라도 여정은 끝났다. 섬을 한바퀴 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약 1시간 정도 걸렸을까? 마라도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마라도에 오게 되면 보름달이 뜨는 날을 택해서 하룻밤 묵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리덕 선착장에는 관광객들을 태우고 갈 유람선이 정박해 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유람선에 오른다. 사람들이 다 올라타자 유람선은 곧바로 출항한다. 뱃전에서 멀어져 가는 마라도를 바라본다. 마라도여,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안녕!
2006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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