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서 아침을 맞는다. 어제는 한라산을 올랐었다. 어리목에서 출발하여 윗세오름에 오른 다음 영실로 내려왔다. 다리가 좀 뻑적지근하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한라산을 올랐을 때의 그 웅장하고 멋진 경치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백록담 분화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가는 능선들과 깊은 계곡, 야생화가 만발한 고원지대의 대초원을 바라보면서 새삼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느꼈었다.
오늘은 친구와 함께 서귀포 칠십경 또는 서귀포 칠십리로 알려진 이름난 명승지들을 돌아보기로 한다. 칠십경을 하루에 다 볼 수는 없고 그 중 몇 군데만 돌아볼 것이다. 제주도가 특별자치도로 바뀌기 전 서귀포시의 면적은 254.57㎢로 북쪽으로 한라산 정상부인 백록담을 경계로 제주시, 동쪽으로 남원읍, 서쪽으로 안덕면, 남쪽으로 동중국해와 접해 있었다. 북부 산록지대는 한라산과 그 기생화산인 오름들이 솟아 있고, 남부 해안지대는 용암에 의해 형성된 기암절벽과 폭포가 많아 경관이 뛰어나다. 서귀포라는 지명의 유래는 중국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불이라는 사람이 폭포의 경치에 반하여 폭포 절벽에 서불과차(徐不過此)라는 글자를 새기고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가 된 지금은 한라산을 동서로 가르는 선을 중심으로 북쪽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은 제주행정시로, 남쪽의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은 서귀포행정시로 각각 통합되었다(2006년 7월 1일). 행정시의 가장 큰 특징은 시장을 도지사가 임명하는 데 있다.
먼저 서귀포시 법환동 법환포구 앞바다에 있는 범섬으로 갯바위 낚시를 하러 가기로 한다. 친구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지금은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그 친구는 낚시로 다금바리를 잡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바 있는데, 과연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다금바리는 돔의 한 종류로 생선회 중에서도 가장 귀해서 값도 비싸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도 kg당 18만원은 주어야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의 차로 법환포구로 향한다. 아침부터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제주의 햇볕은 육지보다도 더 강한 것 같다. 햇볕이 살에 닿으면 따가울 정도다.
*법환포구
서귀포시 법환동에 있는 작은 포구인 법환포구에 10시쯤 도착했다. 포구에는 작은 낚싯배 몇 척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바다는 잔잔하다. 포구 앞으로 보이는 섬은 문섬과 섶섬(일명 숲섬)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문섬이다. 지금 서귀포항에서 문섬까지 방파제를 연결하는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공사로 인해 문섬 주변의 귀중한 산호초 지대가 파괴될 우려가 많다. 바다 생태계에 있어서 산호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은 한 번 파괴되면 다시는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다. 관계당국과 공사관계자들은 이 점을 명심하고 역사와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죄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법환포구에는 고려말 최영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뒤 목호(牧胡, 몽골의 牧子)들이 일으킨 반란을 '목호의 난'이라 한다. 명나라가 제주마를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자 고려 조정은 말을 가지러 제주목에 관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목호들은 말을 명나라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관리들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공민왕은 최영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하였다. 최영 장군은 군사 2만5천6백여 명을 병선 3백여 척에 태우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목호들을 진압하였다. 목호의 잔당들은 최영 장군에게 쫓겨 법환마을 앞 바다에 있는 범섬으로 도망을 갔다. 이들을 추격한 최영 장군은 법환포구에 군막을 치고 군사를 독려하며 목호의 잔당을 섬멸했다. 그래서 법환포구를 막숙이라고도 한다.
법환포구에는 또 고려말 삼별초군의 대몽항쟁을 이끌었던 김통정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몽고군에 끝까지 저항하며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김통정 장군이 법환 바로 앞에 있는 범섬으로 퇴각하기 위해서 배를 탄 곳이 바로 이 포구였다고 한다.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패한 삼별초군이 제주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제주도민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제주도로 쫓겨온 삼별초군은 방어를 위한 축성공사와 식량조달을 위해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였다. 제주도민들에게 삼별초군은 사실상 수탈자나 다름없었다. 삼벌초군을 토벌하기 위해 제주도로 들어온 려몽연합군은 제주도민들을 수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살까지 자행하였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만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볼 때 미군정과 친미사대주의자로 변신한 친일민족반역자들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일어난 4.3제주민중항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방토호세력과 중앙정부, 외세의 수탈에 제주도민들은 오랜 세월 시달려 왔다. 외세와 외세를 등에 업은 권력자들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뿌리깊은 반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얼마전 제주도는 제주특별자치도가 되었다. 특별자치도가 무엇인지 그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나는 차라리 제주도가 독립국가가 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주호(州胡),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탐라(耽羅) 등으로 불리는 독립된 부족국가였다. 그 후 백제, 신라, 고려의 속국이 되면서 독립국가의 명맥만 이어 오다가 고려 숙종10년(1105년)에야 비로소 고려의 중앙집권제에 편입되어 탐라군이 되었다. 제주라는 명칭은 고려 고종(1214년)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범섬으로 가기 위해 통통배에 올라탄다. 배삯은 일인당 만원이다. 이 배는 법환포구와 범섬 사이를 오가면서 낚시꾼들을 실어나르는 바다 택시인 셈이다. 통통배가 물살을 가르면서 법환포구를 빠져 나간다.
*범섬
법환포구를 빠져나온 배는 곧장 범섬으로 향한다. 범섬은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에 속하며, 법환포구 바로 앞바다에 있다. 멀리서 볼 때는 하나의 섬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다가면서 보니 큰섬과 새끼섬 두 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섬의 생긴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와 닮았다고 해서 호도(虎島, 범섬)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이 섬은 어떻게 보면 마치 바다에 떠있는 왕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범섬의 해식쌍굴인 콧쿰(콧구멍)
통통배가 범섬의 북쪽 해안 절벽지대를 향해 다가간다. 절벽 아래로 거의 비슷한 크기로 커다랗게 뚫려 있는 두 개의 해식동굴이 보인다. 지역사람들은 이 해식쌍굴을 콧쿰(콧구멍)이라고 부른다. 이 섬은 범이 웅크리고 앉아서 백록담을 바라보는 형세인데, 구멍이 범의 콧구멍에 해당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멍의 수심은 그리 깊지 않고 소라와 오분작이가 많이 잡힌다. 이 쌍굴에는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할머니의 제주도 방언)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울 때 두 발을 잘못 뻗어서 생겼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이담(神異譚) 중 초인담(超人譚)에 속하는 설문대 할망 설화는 선문대 할망, 설명두 할망, 설명뒤 할망, 세명뒤 할망, 세명주 할망 설화라고도 하며, '탐라지(耽羅誌)' '담수계편'에는 설만두고(雪慢頭姑)라고 표기되어 있다. 제주도 전역에 퍼져 있는 설문대 할망 설화는 이렇다.
'옛날 아주 먼 옛날, 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역발산의 힘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설문대라는 할망(할머니의 제주도 방언)이 있었다. 할망은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제주시 앞 바다에 있는 관탈섬까지 닿았다. 할망이 빨래를 할 때는 빨래감을 관탈섬(冠脫島, 제주시 추자면 묵리에 속하며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에 있는 섬)이나 추자도에 놓아 두고, 손으로는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선 채 발로 밟아서 빨았다. 또 엉덩이로 한라산을 깔고 앉아 한쪽 다리는 관탈섬에 디디고, 한쪽 다리는 지귀섬(地歸島,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속하며 남원읍 앞바다에 있는 섬)이나 마라도(馬羅島,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에 속하며 제주도의 최남단에 있는 섬)에 디디고 서서 소섬(牛島, 제주시 구좌읍 우도면에 속한 섬으로 제주도 동쪽 바다에 있다.)을 빨랫돌로 삼아 빨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할망이 식산봉(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에 있는 오름)과 일출봉(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에 있는 봉우리)에 양다리를 걸치고 앉아 오줌을 누면 육지가 패이고 그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와 섬이 생길 정도였다. 우도는 바로 그렇게 해서 생긴 섬들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날 할망은 남해바다 한가운데에 섬을 만들기로 하고 치마폭에다 흙을 가득 담아 날라 제주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치마가 헌것이어서 터진 구멍으로 떨어진 흙부스러기들은 수많은 오름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날라간 흙을 쏟아 붓자 한라산이 되었다. 할망이 한라산을 만들어 놓고 보니 너무 높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봉우리를 꺾어 내던진 것이 산방산이 되었다. 할망은 커다란 몸으로 인해 옷을 만들어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주 백성들은 할망의 소원이 옷을 입어보는 것임을 알고 옷을 만들어 줄 테니 대신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 달라고 제안했다. 할망은 백성들에게 명주 100동(1동은 50필)으로 속옷을 한 벌 만들어 주면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모은 명주가 99동 밖에 안돼 속옷을 만들지 못하자, 할망은 다리를 놓다가 그만 중단해 버렸다. 그동안 짝이 없어 외롭게 지내던 할망은 할망 못지 않게 덩치가 큰 설문대 하르방(할아버지의 제주도 방언)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다. 할망과 하르방에게는 5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할망은 굉장히 큰 솥에 자식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다 잘못해서 뜨거운 죽 속에 빠져 죽었다(할망이 한라산 물장오리에 들어섰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다는 전승도 있음).'
설문대 할망설화는 말하자면 제주도 탄생설화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 곳곳에는 설문대 할망설화와 관련된 바위나 섬이 많다. 조천읍 조천리와 신촌리, 모슬포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들은 할망이 다리를 놓던 흔적이라고 한다. 한내(漢川, 제주시 오라동을 흐르는 개천)의 고지렛도에 있는 모자 모양으로 구멍이 패인 큰 바위는 할망이 썼던 감투라고 하고, 일출봉에 있는 두 개의 기암 중에서 촛대 모양의 등경돌(燈擎石)은 설문대 할망이 바느질할 때 등잔을 올려놓던 돌이라고 하며, 하나는 바느질 도구를 넣어 두던 바농상지돌이라고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범섬의 해식쌍굴은 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울 때 발을 잘못 뻗어 뚫린 구멍이라고한다. 섶지코지도 설문대코지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제주도에는 설문대 할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해남이나 강화도 등지에도 이같은 유형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설문대 할망 대신 마고 또는 마귀 할미가 주인공이다. 설문대 할망은 제주도의 굿판에서는 전승되지 않고 있으나 표선면 표선리의 당(堂) 신화에는 할망이 표선리 당캐로 내려와 할망당 신이 되었다고 하고, 구좌읍 송당리 본향당에서는 제주도 당신(堂神)들의 시조인 금백조 할망 이전에 신앙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범섬의 북쪽에 있는 바위절벽지대
법환포구를 떠난지 얼마 안 되어 범섬에 도착했다. 북쪽의 바위벼랑 아래에 있는 좁은 갯바위지대에 상륙했다. 해안은 급경사의 깎아지른 듯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범섬에는 50∼6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가축을 방목하고 고구마 등을 재배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무인도로 남아 있다. 한때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의 마지막 세력인 목호(牧胡, 몽고에서 온 목부)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제주로 와서 이 섬에 숨어 있던 그들을 완전히 섬멸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범섬은 가로 580m, 세로 480m로 둘레 약 2㎞, 면적 0.142㎢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87m이고. 정상부는 평평한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다. 범섬은 수직으로 된 주상절리(柱狀節理, pillar-shaped joint)가 잘 발달된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섬 주위에는 해식동굴들이 있다. 섬의 남쪽 가장자리엔 용천수가 솟는다. 이 섬에는 희귀식물들이 많이 자생하고 연안에는 학술적 가치가 큰 해양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2000년 7월 18일 문섬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421호로 지정되었다. 섬 주변의 바다속에는 기복이 심한 암초가 깔려 있어 참돔과 돌돔, 감성동, 벵에돔(흑돔), 자바리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여름철의 6월부터 7월까지는 감성돔, 벵에돔, 참돔이 잘 잡히고, 겨울철에는 자바리, 참돔, 돌돔 등이 많이 잡힌다. 그래서 범섬은 바다낚시의 명소로 알려져 낚시꾼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섬이다.
*갯바위에 붙어 사는 생물들
발밑으로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밀려 왔다가 물러 가면서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바닷물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갯바위에는 홍합을 비롯해서 따개비와 거북손 등이 다닥다닥 붙어서 살고 있다. 홍합은 큰 것은 없고 거의가 작은 것들이다. 홍합은 아마도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어패류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추운 겨울철 포장마차에 들르면 으레 홍합을 먹곤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홍합을 푹 끓여낸 뜨거운 국물에 실파와 후추를 타서 후후 불면서 마시던 그 맛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거북손은 절지동물 완흉목 거북손과의 갑각류로 생긴 모양이 마치 거북의 손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조간대의 바위에 붙어서 자라고 크기는 3∼5cm 정도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거북손을 값비싼 고급 요리의 재료로 쓴다고 한다. 삶은 거북손의 속살은 쫄깃쫄깃해서 별미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따개비는 굴등이라고도 하는데, 몸체가 딱딱한 석회질 껍데기로 덮여 있다. 따개비는 전복새끼의 맛과 비슷하다고 한다. 울릉도에서는 따개비를 넣어서 지은 따개비밥이 별미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따개비를 넣고 끓인 따개비칼국수도 별미라고 하던데, 나는 아직 따개비로 만든 음식을 접해보지 못 했다. 또 바다낚시를 할 때 돌돔의 미끼로 홍합과 따개비, 거북손을 쓰면 잘 문다고 한다.
*범섬에서 바라본 서귀포 신시가지
바다 건너 법환포구를 무심코 바라본다. 제주월드컵경기장의 하얀색 지붕이 여기서도 눈에 확 띈다. 관광객을 태운 열기구가 공중에 떠 있는 풍경이 한가롭다. 서귀포 신시가지를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는 봉우리가 고근산이다. 그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는 각시바위, 월드컵경기장 왼쪽으로 보이는 낮고 펑퍼짐한 봉우리는 월산봉이다. 한라산 상공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어 백록담 분화구는 보이지 않는다.
고근산(孤根山, 396m)은 기생화산으로 정상에 깊지 않은 원형 분화구를 갖고 있는 오름이다. 근처에 산이 없어 외롭다는 의미로 고근산, 범섬이 가까이 보이는 호근리에 있다고 해서 호근산이라고도 부른다. 그리 높은 오름은 아니지만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하고 있어 멀리 마라도에서부터 지귀도에 이르는 바다경치와 서귀포시의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서귀포 칠십리 야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남동사면 중턱의 머흔저리는 옛날 국상을 당했을 때 곡을 하면서 절을 올리던 곡배단(哭排壇)이 있고, 남서사면에는 꿩사냥을 하던 강생이(강아지의 제주도 방언)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강생이궤(강생이굴이라고도 부르는 수직동굴)가 있다. 고근산에도 설문대 할망의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설문대 할망은 심심할 때마다 한라산을 베개 삼고 고근산 굼부리(분화구의 제주도 방언)에 궁둥이를 얹은 채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물장구를 쳤다고 한다.
각시바위(각시암, 해발 395m)는 조면암질의 용암원정구(熔岩圓頂丘, lava dome, 분화구가 없는 종상화산)로 된 바위산으로 남사면은 가파르고 험한 산세를 이루고 있으며, 북사면은 완만한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오름이다. 산세가 학이 양날개를 펼치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학수바위(학수암 또는 각수암)라고도 부른다. 고근산과 마찬가지로 각시바위 정상에서도 서귀포 앞바다가 아주 잘 보인다. 특히 각시바위에서 바라보는 겨울 해돋이의 장관은 유명하다. 각시바위에는 애틋한 전설이 하나 전해오고 있다. 옛날 서귀포로 사냥을 나왔던 고을 원들은 각시바위 정상에 있는 넓은 반석 위에서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 원들의 사냥에는 관기들도 따라가서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구었다. 어느 날 수렵야연이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한 기생이 고을 원의 사랑을 독차지한 관기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그 기생은 불타는 질투심으로 고을 원의 총애를 받는 관기를 마치 실수한 것처럼 바위절벽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려 죽게 하고 말았다. 고을 원은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가 떨어진 바위 아래 장사를 지냈다. 그 기생의 무덤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월산봉(月山峰, 212.2m)은 정상부가 보름달처럼 둥그스레한 형상을 하고 있는 오름이다. 아마 그래서 이름도 월산봉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월산봉의 남쪽 사면은 비교적 가파르고 오름의 형태도 제법 갖추고 있지만, 북쪽 사면은 중산간도로와 맞닿아 있으면서 경사가 완만하고 높이도 매우 낮아 오름이라고 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서귀포 앞바다
동쪽으로 서귀포항이 아스라이 보인다. 서귀포항 앞바다의 잔잔한 수면 위로 문섬이 떠 있고, 그 뒤에 섶섬 일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서귀포항에서 시작된 방파제가 문섬을 향해서 꽤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 방파제 건설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모양이다.
*낚시를 하고 있는 친구
친구는 낚싯대를 바닷물 속에 드리우고 찌를 응시하고 있다. 잡으려는 다금바리는 안 잡히고 10cm 정도 크기의 아지새끼만 자주 올라온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때가 바뀌자 30cm급의 물고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다금바리나 감성돔, 벵에돔과 같은 고급어종은 아니지만 월척을 네 마리나 낚았다. 네 마리 모두 다 같은 어종이었는데 친구도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라고 한다. 다금바리는 아무래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친구가 구경만 하던 나를 보더니 낚시를 한 번 해보라고 권한다. 낚싯대도 없이 그냥 줄에다가 낚시바늘을 단 다음 미끼를 꿰어 나에게 건네준다. 갯바위 사이를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작은 물고기떼에 낚시를 던지자마자 한 녀석이 금방 달려들어 문다. 줄을 당겨 건져 올리니 5cm 밖에 안 되는 작은 물고기가 딸려온다. 물고기의 배에는 둥들고 거무스름한 점이 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다. 녀석을 바다에 도로 놓아 주고는 몇 번 더 낚시질을 하다가 그만 흥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남의 생명을 가지고 하는 놀이가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다. 사람들은 취미로 낚시를 하는지 모르지만 물고기에게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아닌가!
*범섬의 두 여인
낚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 낚시구경을 하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또 있을까?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두 여인의 얼굴이 바알갛게 익었다. 범섬은 사방이 바위절벽으로 되어 있어 그늘이 지는 곳이 거의 없다. 그런데 마침 가까운 곳에 햇볕이 들지 않는 해식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두 여인은 햇볕을 피해 해식동굴로 들어간다.
*범섬에서 서귀포 신시가지를 배경으로 필자
오후가 되자 태양이 하늘에서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수건을 덮어쓰고 뒷목과 얼굴을 가린다. 윗옷은 긴팔옷을 입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손등은 가릴 수가 없었다. 햇볕에 그대로 노출된 까닭에 손등이 화끈거린다. 아무래도 햇볕에 화상을 입은 것 같다. 며칠이 지나면 손등의 피부가 뱀허물처럼 허옇게 벗겨질 것이다.
*범섬의 바위벼랑에 붙어서 자라는 제주연화바위솔
문득 범섬에 이왕 왔으니 정상부에 올라가 주변의 경치와 생태계를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벼랑을 암벽등반으로 올라가는데 몹시 힘이 들고 다리도 후들거린다. 작은 실수라도 해서 수십 미터 바위절벽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는 엄청 뜨겁지만 그래도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절벽의 중간쯤 올랐을까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제주연화바위솔을 만난다. 백록색의 두껍고 다육질인 잎은 그 모양이 꼭 연꽃을 닮았다. 이들이 척박한 바위벼랑의 돌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바위연화솔은 제주도 해안 절벽의 바위 위에서 자라며 바위연꽃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 바위에 잎이 퍼져 붙은 상태가 연꽃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최근 관상용 재배를 위해 마구 채취해가는 바람에 야생의 개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바위연화솔은 꽃이 피고 난 뒤에는 말라죽는 특징이 있다. 유사종으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면 지상부가 마르는 바위솔, 근경은 짧고 비대하며 잎이 주걱모양인 둥근바위솔, 잎은 비늘 모양의 긴 타원형이고 끝이 송곳 끝 같이 생긴 좀바위솔이 있다. 연화바위솔의 근경은 굵고 비후하다. 근생엽은 총생하는데 다육질의 편평하고 긴 타원상 주걱형으로 백록색을 띤다. 잎의 끝은 뭉툭하거나 둥글고, 경생엽은 호생한다. 화축은 직립하며 하단부에 잎이 밀생하고 화수(花穗)에는 매우 많은 꽃이 달린다. 꽃은 10~11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화경이 짧고 꽃 밑에 두 개의 작은 포가 달리며, 포는 난형이고 끝이 뾰족하다. 열매는 대과(袋果)로 긴 타원형이고 양쪽이 뾰족하다.
*범섬의 깊고 푸른 바다
바위벼랑을 기어올라 나무와 풀들이 자라는 정상부 바로 아래 가파른 비탈에 몸을 붙인다. 옷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바위벼랑 끝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니 저기를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다시 내려갈 일이 걱정된다. 범섬의 깊고 푸른 바다가 바위절벽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망망대해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곤 한다. 바다는 그 자체로 가장 웅대하고 장엄한 대서사시이기 때문이리라.
범섬은 천연기념물 제215호인 흑비둘기의 최남단 서식지로 관속식물 147종이 자생하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섬에는 거문도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물푸레나무과의 박달목서의 자생지이기도 하다. 또 제주도 특산종인 큰보리장나무 군락도 있다. 언뜻 둘러보아도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와 풀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동글동글한 배설물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범섬에는 토끼가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거진 숲을 뚫고 나아가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노란색을 띤 새끼뱀이 바위밑으로 사라진다. 새끼뱀은 나를 보고 놀란 것 같다. 이 작은 섬에 뱀이 살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끼뱀이 있다면 분명 어미뱀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살아가려면 새나 쥐, 개구리같은 동물들이 살고 있을 테고..... 범섬은 비록 작은 섬이지만 나름대로 하나의 독립적인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토끼와 뱀은 사방이 바위 낭떠러지인 이 섬에 어떻게 들어와 살게 된 것일까? 빈 소주병이나 우유곽과 같은 쓰레기도 발견된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흔적이다. 쓰레기로 지구를 더럽히는 유일한 동물..... 인간.....
내가 여기 더 머무른다면 지금까지 평형을 이루면서 유지되어 온 범섬의 생태계가 교란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시 바위벼랑을 타고 내려가기로 한다. 바위절벽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들다. 용을 써 가면서 가까스로 바위벼랑을 내려왔다.
*낚싯배
친구에게 미끼를 다 쓰면 낚시를 접자고 했다. 육지에 있는 선장에게 전화를 해서 배를 가지고 오라고 이른다. 잠시후 통통배가 물살을 가르며 나타난다. 배에 올라타자 선장은 뱃머리를 범섬의 남쪽으로 돌린다. 그 쪽에도 태우고 가야 할 낚시꾼이 있는 모양이다. 뜻하지 않게 범섬의 남쪽 해안지대의 경치를 보게 생겼다.
*범섬의 남쪽 해안의 해식단애
범섬의 남쪽 해안지대는 북쪽보다 더 깎아지른 듯 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주상절리의 수직암벽이 금방이라도 우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이 간신히 발을 붙이고 설 만한 갯바위에서 낚시꾼 한 사람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범섬 남쪽에 있는 큰항문이도
범섬 남쪽의 주상절리 지대에도 해식동굴인 큰항문이도가 있다. 절리에는 쪼개지는 방향에 따라서 판상절리(板狀節理)와 주상절리가 있다. 주상절리란 화산암(火山岩) 암맥이나 용암(熔岩), 용결응회암(熔結凝灰岩) 등에서 생기는 단면의 형태가 육각형이나 삼각형으로 긴 기둥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절리를 말한다. 큰항문이도 위의 지선 부분으로 북쪽 30m 지점에는 애기물이라는 용천수가 있다. 물이 조금밖에 솟아나지 않아 애기물이라 한다. 바닷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생겨난 동굴로 인해 범섬의 경치가 더욱 특이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범섬의 새끼섬
통통배가 범섬의 서쪽으로 다가가자 새끼섬이 눈에 들어온다. 새끼섬은 범섬에 딸린 작은 바위섬으로 정상부에는 주상절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키작은 나무도 몇 그루 보인다. 대동여지도에는 새끼섬이 추도라고 표기되어 있다. 새끼섬이 법섬보다 작은 섬이기 때문에 추도라고 훈자표기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역 주민들도 이 섬을 새끼섬이라 부른다. 면적은 9,281㎡이며 국유지이다. 범섬은 새끼섬이 있어서 외롭지는 않겠다.
*범섬과 새끼섬
범섬을 한바퀴 돈 통통배는 법환포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린다. 범섬과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나눈다. 언제 또 다시 이 곳을 찾아올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인연이란 어쩌면 수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것이다. 범섬이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법환포구
통통배가 법환포구로 들어간다.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오니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았다. 포구가 있는 마을은 서귀포에서 해녀가 가장 많다는 해녀마을이다. 해녀마을에는 1950년대 잠수복장에다 전래도구를 들고 있는 1.8m 크기의 청동해녀상이 세워져 있다. 이 해녀상은 미술협회 서귀포지부 회원들의 공동작업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다를 향해 카다란 통유리로 창을 내어 법환동 앞바다와 범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횟집으로 들어가 한치물회를 먹기로 한다. 잠시후 한치물회가 나왔는데 커다란 양푼에 하나 가득 담겨 있다. 얼음을 띄워서 시원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한치물회는 뭐니뭐니해도 여름이 제철이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큰 그릇이 금방 동이 나버린다.
한치(표준어는 화살오징어)는 주로 강원도 동해안 일부 지역과 제주도 근해에서 잡힌다. 동해산은 대체로 몸체가 길고 희며 살이 얇으나 제주도산은 몸체가 짧고 붉은색을 띠며 살이 두껍다. 다리가 짧아서 한 치(3cm)밖에 안된다고 하여 한치라고도 하고, 한겨울 추운 바다에서도 잡힌다고 하여 寒(찰 한)자를 써서 한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건조한치는 제주도산을 으뜸으로 친다. 마른 한치를 약한 불에다 살짝 구워서 먹으면 아주 맛이 좋다. 값도 오징어보다 비싸다.
한치물회를 먹고나서 해녀마을을 떠나 외돌개로 향한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바다경치가 아름답다. 서귀포항을 지나 삼매봉 중턱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아래로 내려가면 외돌개가 나온다.
삼매봉은 서귀포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외돌개는 그 삼매봉 남쪽 기슭의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는 20m 높이의 바위기둥이다. 뭍과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홀로 우뚝 솟아 있다고 해서 외돌개란 이름이 붙었다. 약 150만 년 전 화산의 폭발로 섬의 모습이 바뀔 때 생겨난 바위섬으로 꼭대기에는 몇 그루의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외돌개를 장군석이라고도 하고 할망바위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역사와 관련된 전설과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장군석이란 이름을 얻게 된 유래는 이렇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토벌할 때 외돌개 뒤에 있는 범섬이 최후의 격전장이 되었다. 최영 장군은 전술상 이 외돌개를 장대한 장군의 형상으로 보이도록 치장시켜 놓았다. 범섬에서 목호들이 외돌개를 바라보았을 때 대장군이 진을 친 것으로 알고 모두 놀라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외돌개를 장군석이라 불렀다. 또 다른 하나는 할망바위 설화다. 옛날 한라산 기슭에 고기잡이를 하는 하르방과 할망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 하르방이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 할망은 하르방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래도 하르방이 돌아오지 않자 할망은 바다를 향해 하르방을 소리쳐 부르면서 통곡하다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외돌개. 뒤에 보이는 섬이 문섬이다.
외돌개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다르다. 남해의 검푸른 바다와 기암절벽, 그리고 섬이 잘 어우러진 경치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외돌개 앞바다는 이른바 서귀포 칠십리라고 일컬을 만큼 유명한 곳으로 해안 경관이 빼어나다. 해안절벽 위를 따라서 산책로가 잘 나 있고, 곳곳에 아름드리 해송들이 자라고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외돌개 주변에는 정방폭포를 비롯해서 돈내코, 소정방폭포, 엉또폭포, 천지연폭포, 문섬, 범섬, 섶섬, 법화사지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다. 최근에는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기도 하다.
외돌개 바로 뒤로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이는 섬이 문섬이다. 문섬은 해발 73m, 면적 96,833㎡의 작은 무인도이다. 섬 주위로는 난류가 흐르고 있어서 사시사철 아열대성 어류들이 서식하며, 63종에 이르는 각종 희귀 산호들이 자라고 있어 국내 최고의 수중생태계라고 일컬어진. 문섬에서 확인된 관속식물은 54과 106속 123종류나 된다. 문섬의 상록활엽수림은 지방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이 섬에는 오래된 담팔수나무 등 상록난대림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범섬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42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문섬이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모기가 많아 모기 문(蚊)자를 쓴 데서 유래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냥꾼은 그만 실수를 해서 활집으로 옥황상제의 배를 건드렸다. 이에 크게 노한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집어 던졌다. 그것이 흩어져서 서귀포 앞 바다의 문섬과 범섬이 되었다는 것이다.
*맥문아재비
산책로 주변에는 맥문아재비를 심어 놓았다. 하얀색 맥문아재비꽃이 활짝 피어 있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초본식물인 맥문아재비는 왕맥문동이라고도 부르며, 바닷가 산지의 그늘이나 습지에서 자란다. 맥문아재비의 지하경은 옆으로 뻗고 잎이 총생한다. 잎은 선형으로 두껍고 짙은 녹색에 광택이 나며 여러 개의 맥이 있다. 꽃은 5~8월에 피며 흰색 또는 흰색 바탕에 연한 자줏빛이 돌고 밑으로 처진다. 화경(花莖)은 편평하고 윗부분이 넓으며 높이 30~50cm로 좁은 날개가 있다.
*외돌개의 잔디밭
산책로 위로는 넓은 잔디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잔디밭에는 말 한 필이 우두커니 서 있다. 곁에 사진기를 든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광객을 태우고 사진을 찍어 주는 말인 것 같다. 외돌개를 한바퀴 둘러보고 나서 소정방폭포로 향한다.
*소정방폭포
지중해풍의 파라다이스호텔(옛 허니문하우스) 담을 따라서 내려가니 해안절벽 위에 '소라의 성'이라는 이름의 하얀색 식당건물이 보인다. 건물주변에는 커다란 야자수들이 자라고 있어 이국적인 풍경이다. 소정방폭포는 이 식당 바로 아래에 있다. 약 5m 높이 정도 되는 곳에거 여러 가닥의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쏟아진다. 폭포 속으로 뛰어들어 물맞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물이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이 정방폭포와 흡사하다 해서 소정방폭포란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폭포의 수량이나 높이에 있어서 정방폭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폭포 주위로는 기암절벽이 솟아 있고, 앞에는 드넓은 바다와 섶섬이 있어 경관은 아름답다. 소정방폭포는 수량이 적고 높이도 얕아서 제주도에 있는 폭포 중에서 유일하게 물맞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이 곳의 폭포수는 옛날부터 신경통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지금도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물이 떨어지면서 물안개가 일어난다. 물안개가 얼굴을 스치자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갑다.
*소정방폭포에서 바라본 섶섬
소정방폭포 바로 앞바다에는 섶섬이 떠 있다. 섬 주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작은 배들의 풍경이 아름답다. 서귀포시 보목동 앞에 있는 무인도인 섶섬의 면적은 142.612㎡이며, 가장 높은 곳의 해발고도는 155m에 이른다. 섶섬은 숲이 우거졌다고 해서 숲 삼(森), 섬 도(島)자를 써서 삼도(森島) 또는 숲섬이라고도 불린다. 또 섶 신(薪)자를 써서 신도(薪島)라고도 하고, 찾는 이가 없어 섭섭하다고 해서 섭섬이라고도 한다. 섶섬은 상록수림으로 뒤덮여 있으며 180여 종의 희귀식물과 450여 종에 이르는 난대성 식물이 자생하고 있어 범섬, 문섬과 더불어 식물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특히 파초일엽인 넙고사리가 자생하는 북방한계선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넙고사리는 고사리과에 속하는 아열대성 상록 양치류 식물로서 음습지의 나무나 바위에 붙어 자라며, 한국에서는 유일하게도 섶섬에서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섶섬의 넙고사리 자생지는 1962년부터 천연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또 돌돔, 벵에돔(흑돔), 참돔, 다금바리, 감성돔을 비롯한 각종 어종이 풍부하여 천혜의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섶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섶섬에는 큰 귀가 달린 붉은 구렁이가 살고 있었는데 용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구렁이는 매달 초하루와 여드레가 되면 용이 되게 해달라고 용왕에게 빌었다. 구렁이는 그렇게 삼년동안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용왕은 구렁이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용왕은 홀연히 구렁이에게 나타나 '섶섬과 지귀섬 사이에 야광주 하나를 숨겨 두겠다. 네가 그것을 찾아내면 바로 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 날부터 구렁이는 야광주를 찾기 위해 섶섬과 지귀섬 사이의 깊고 넓은 바다 속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오로지 용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구렁이는 날이면 날마다 야광주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야광주를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한 구렁이의 노력은 백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구렁이는 끝내 야광주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힘이 빠지고 지친 구렁이는 그만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슬픈 한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구렁이의 원혼은 섶섬 구석구석에 서리었다. 그 뒤로 비가 올라치면 섶섬의 상봉에 짙은 안개가 끼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한많은 구렁이의 조화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을 느낀 어부들은 섶섬에 당을 짓고 구렁이에게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섶섬 인근 마을에는 음력 매달 초여드렛날 당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 있다.
*쇠소깍
소정방폭포에서 더위를 식히고 다음에 찾아간 곳은 쇠소깍이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봄이 오는 곳은 서귀포로 그 중에서도 서귀포 동쪽 끝자락에 있는 효돈동 하효마을이 가장 따뜻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쇠소깍은 바로 그 하효마을을 흐르는 효돈천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소(沼)다. 약 3m 정도 되는 절벽밑에서 용출수가 솟아나 항아리처럼 생긴 소가 되었다. 용출수는 항상 섭씨 18도를 유지하므로 겨울에도 차갑지 않다. 효돈천을 따라서 지하로 흐르던 물은 이 곳에서 솟아나 소를 만들고는 둑처럼 쌓인 모래사장을 관통하는 수로를 통해 서귀포 앞바다로 흘러들어 해수와 합류한다. 쇠소의 수심은 3~4m이고, 폭은 10~30m, 길이는 250m에 이른다. 용암에 의해 형성된 기암괴석과 아름드리 송림에 둘러싸인 쇠소의 검푸른 호수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쇠소깍은 아름다운 해안절경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서귀포 칠십리에 숨겨진 비경 중의 하나다. 또 이 곳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 전에 분출된 조면암지대로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매우 크다.
쇠소깍의 '쇠'는 소(牛), '소'는 연못, '깍'은 끝을 뜻한다. 원래 효돈동의 옛이름은 '쉐(牛)둔' 또는 '쉐돈'이다. '쉐둔'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우둔(牛屯, 소를 모아 두었던 곳이란 뜻)이고, 그 후 우둔을 효돈(孝敦)으로 표기하여 왔다. 효(孝)의 제주도 방언이 '소'이므로 '효돈'은 곧 '소돈' 혹은 '쉐돈'의 음가자 결합 표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쇠소깍은 쇠둔의 '쇠'에 연못이란 뜻을 가진 '소'가 붙고, 마지막에 끝이란 의미의 접미사 '깍'이 붙어서 된 이름이다. 효돈천 하류에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소를 이루고 있어서 쇠소, 쇠소의 끝이라고 하여 쇠소깍이란 지명이 된 것이다. 한편 쇠소깍은 한라산을 베개 삼아 소가 누운 끝자락이라는 설화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쇠소가 잘 보이는 곳에는 군데군데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는 도로변의 산책로에서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면 나온다. 쇠소에는 관광객을 태운 테우(뗏목의 제주도 방언)가 한가로이 떠 있다. 테우를 한 번 타려면 어른은 5천원, 아이들은 2천원의 요금을 내야 한다. 왕복 5백 미터를 갔다가 돌아오는데 40분 정도 걸리는 테우는 노를 젓거나 삿대를 쓰지 않고 사공이 상류와 하류 양쪽에 매어놓은 줄을 잡아당겨서 오고간다.
*쇠소깍 앞바다. 멀리 보이는 섬은 지귀도
쇠소깍 끝자락 바위절벽 위에 세워진 전망대에 오르니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없는 지평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사람들이 바다를 찾는 것은 그 끝없는 넓음과 깊음을 동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도 저 바다처럼 넓고 깊은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쇠소깍의 모래사장은 검은색이다. 그것은 제주도의 대부분이 화산암인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곳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전에 분출한 조면암지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흑사장 앞 바닷물이 검푸르게 보인다. 수평선 위로 지귀도가 보일 듯 말 듯 떠 있다. 예전에는 지귀도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낚시꾼들만이 찾는 무인도라고 한다. 이 섬은 남제주 해역중에서도 가장 청정한 곳으로 유명하며, 주변에는 연산호 군락이 형성되어 있어서 수중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쇠소깍을 떠나 큰엉으로 향한다. 해는 이미 서쪽 바다를 향해 기울고 있다. 서녘 하늘이 서서히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큰엉의 동쪽 해안지대
*큰엉의 기암괴석
*큰엉의 서쪽 해안지대
남원읍에 새로 난 우회도로 아래쪽의 옛날 길로 들어가면 신영영화박물관과 금호리조트가 나란히 서 있다. 금호리조트 앞으로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서 내려가면 해안명승지인 큰엉이 나온다. '엉'은 제주도 방언으로 언덕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큰엉은 큰 언덕이라는 말이다.
바다로 돌출되어 있는 거대한 기암괴석에 올라 큰엉을 바라본다. 높이 30m에 이르는 해안절벽이 수백 미터나 이어지는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기암괴석 바로 옆에는 엄청나게 큰 해식동굴이 뚫려 있어 마치 상상 속의 커다란 동물이 입을 벌리고 으르릉거리는 것 같다. 파도는 끝없이 밀려왔다가는 하얀 물거품만 남기고 산산히 부서진다. 낮에는 잔잔했던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다. 큰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치면서 천둥소리를 낸다. 내 마음도 따라서 고동을 치는 것만 같다. 새까만 바위절벽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검푸른 바다와 일렁이는 파도, 하얗게 부서지는 물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큰엉의 서쪽 끝에 보이는 섶섬과 문섬 너머로 황혼이 지고 있다. 이제는 여로에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돌아가야 할 때다.
위미항에서 일몰을 맞이한다. 구름 사이로 지는 해가 새빨간 불덩어리처럼 보인다. 위미항에는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온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해 있다. 부두에는 사람들이 낚시로 오징어를 낚고 있다. 한 낚시꾼이 잡아올린 오징어를 구경하다가 그만 먹물세례를 받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근처에 있는 수도로 가 옷을 벗어서 빨았다.
저녁식사는 남원에 있는 갈비집에서 돼지 통갈비를 먹었다. 돼지 통갈비는 제주에 와서 처음 먹어 보는데 양도 푸짐하고 맛도 좋다. 소주도 한 잔 곁들였다.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마시다 보니 어느덧 취기가 오른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친구의 차로 서귀포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친구는 남원 집으로 돌아갔다. 감귤농사로 바쁠 텐데도 나를 위해서 시간을 내준 친구가 고맙다.
여행은 영혼을 살찌운다고 했다. 그 말은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들로부터 귀중한 경험과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여행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기에 낭만적인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서도 만남과 이별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게 여행이다. 인생 자체가 긴 여정의 여행이 아니던가! 오늘은 서귀포 칠십리를 돌아보면서 참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내일은 어떤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까? 부푼 기대를 안고서 잠들다.
2006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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