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호반의 도시 춘천기행

林 山 2004. 12. 22. 16:10

2004년 12월 19일. 아침 9시 반경 충주를 떠난다. 치과의사인 후배 부부와 그들의 초등학교 5학년인 딸 서하, 그리고 나와 아내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이번 여행은 서하를 위해서 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과 애니메이션박물관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아침을 거른지라 원주시 흥업면에 있는 '옛날묵집'에서 메밀묵을 한 그릇씩 먹기로 한다. 메밀묵은 찬 육수로 말아서 먹어야 제 맛이다. 메밀은 기미가 차고 담백하여 열을 내려주고 살을 빼주는 좋은 식품이다. 그래서 요즘 메밀묵은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메밀묵을 채썰어서 육수를 붓고 잘 익은 김치와 씨를 빼지않고 거칠게 가루낸 고추가루를 곁들이면 더욱 맛이 좋다. '옛날묵집'은 내가 이 근처를 지날 때마다 들러서 메밀묵 한 그릇을 먹고 가는 집이다. 모두들 맛있게 먹는다. 나도 참 간만에 메밀묵을 맛있게 먹었다.

남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서 춘천으로 향한다. 일요일인데도 고속도로는 한산한 편이다. 도로변 물이 고인 논에는 얼음이 얼어서 햇빛에 반짝인다. 가을걷이를 끝낸 논과 밭들이 텅빈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산에는 활엽수들이 나뭇잎을 떨구고 나목으로 서있다. 날씨가 너무나 화창해서 마치 봄날같다. 원주에서 춘천까지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먼저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에 들렀다. 김유정의 생가는 춘천시내에서 경춘선과 나란히 달리는 김유정로를 따라가다 보면 김유정역이 나오는데 바로 그 역이 있는 마을이다. 이 역은 원래 신남역이었는데 춘천시민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김유정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역이름 하나에도 자기 고장 문화인물의 이름을 붙이려는 모습에서 춘천시민들의 문화의식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김유정 문학촌 정문 앞에서 


증리는 사방이 산에 들러싸여 있어서 마치 움푹한 시루같다고 해서 '실레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실레마을은 1930년대 한국소설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봄.봄',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고향마을이다. 그는 그의 소설 대부분을 이곳에서 썼으며,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지명 등도 대부분 이곳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실레마을 전체가 김유정 작품의 무대이며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유정문학촌에는 김유정의 생가와 전시관이 조성되어 있다. 생가는 김유정의 조카에 의한 설계로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규모로 보아서 제법 큰 대가집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전시관에 들러 잠시 김유정의 작품세계에 젖어본다. 내가 학부때 쓴 '1930년대 한국풍자문학의 양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김유정의 소설들을 분석한 바 있기에 그 감회는 남다른 것이었다.

1908년 이 곳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김유정(金裕貞)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30년 4월 연희전문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결석을 너무 많이 한 탓으로 그 해 6월 24일 제적을 당한다. 1931년 고향에 돌아온 김유정은 '금병의숙'을 열어 농촌계몽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1933년 개벽사에서 나온 '제일선'에 단편 '산골나그네'를 발표한다. 1935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소낙비'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습작기까지 합쳐서 불과 4년 동안 30여 편의, 해학과 풍자라는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당시의 농촌과 사회현실을 담은 그만의 독특한 단편소설들을 발표함으로써 김유정은 1930년대 한국문학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서울에 머무를 때 김유정은 당시의 명창 박록주에 반해서 그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연상의 여인이었던 박록주는 김유정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유정은 박록주를 사모하는 연서를 수없이 보냈으나 끝내 답장을 받지 못 했다고 한다. 당대의 명창인 박록주가 별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데다 나이도 어린 김유정의 구애를 무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연의 아픔으로 세월을 견디던 김유정은 결국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2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뛰어난 소설작품들을 많이 남겼을텐데....... 아쉬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김유정의 생가에서 바로 앞에 있는 금병산을 바라다본다. 금병산은 '동백꽃'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산이다.
..... "닭 죽은 건 염려마라. 내 안 이를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둥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소설 '동백꽃' 중에서-

저 산속 어딘가에 소설속 주인공 '점순이'와 '내'가 동백꽃의 알싸한 냄새에 취해 쓰러지던 곳이 있으리라. '점순이'와 '나'의 로맨스도 어쩌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었을까? 김유정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갖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김유정의 생가를 떠나 애니메이션 박물관으로 향한다. 삼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의암댐을 지나자 드넓은 의암호가 눈앞에 펼쳐진다. 의암호 한가운데는 붕어섬, 중도, 고슴도치섬이 그림처럼 떠있다. 현암민속박물관과 애니메이션박물관은 중도가 바라다보이는 의암호반에 자리잡고 있다. 마침 일요일이라 애니메이션박물관은 어린이를 동반한 관람객들로 붐빈다.

 

▲춘천 의암호반에 있는 애니메이션 박물관 앞에서

 
춘천 애니메이션박물관은 세계 최초로 애니메이션을 테마로 세워진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국내 최대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이 곳에는 초창기 애니메이션 필름과 포스터, 애니메이션을 찍었던 카메라와 장비, 영상자료 뿐만 아니라 각국의 가장 인기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까지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보면 애니메이션의 탄생과 기원에서부터 애니메이션의 원리와 종류, 세계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 외에도 박물관은 3D 애니메이션 상영관, 애니메이션 소리체험 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마침 이 날은 박물관 제 3회 기획전으로 성백엽 감독의 애니메이션 '오세암'(정채봉 원작)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2층 한 켠에는 성백엽 감독의 작업실을 본딴 모형공간과 '오세암'의 제작과정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쓰인 그림 등을 전시해 놓았다. 그림의 양이 엄청나다. 애니메이션 한 편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그림이 필요한 것일까? 상상이 잘 안 된다.

바로 옆방에는 '홍길동'의 작가 신동우 화백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어린이 신문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홍길동'의 원화들이 사방의 벽에 가득하다. 나도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만화라 그림들이 매우 낯익다. 신동우 화백의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문장에 있어서의 과장법을 그는 그림에서 사용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가의 작품들을 대하노라니 감개가 무량하다.

박물관을 나오니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 뱃속에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춘천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위도(일명 고슴도치섬)을 지난다. 이 섬에서는 매년 5월 마지막 주 수요일부터 5일간 마임축제가 열린다. 춘천마임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도깨비난장의 주 무대인 축제의 마을 몽도리가 바로 이 고슴도치섬이다.

춘천시내로 들어와 닭갈비로 유명한 명동 골목에 들렀다. 골목입구에서부터 닭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골목 중간쯤에 있는 닭갈비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닭갈비와 막국수를 주문하자 미리 준비를 해놓았는지 바로 나온다. 양념이 된 닭갈비를 둥그런 큰 철판에 넣고 뒤집어가며 익기를 기다려 맛을 본다. 그런데 닭갈비맛이 영 아니다. 막국수맛도 그저 그렇고........ 닭갈비를 잘하는 집이 분명 있을텐데......... 아무래도 집을 잘못 찾은 것 같다. 그렇지만 식당안의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아마도 우리처럼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찾아든 사람들일시 분명하다.

닭갈비와 막국수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명동골목을 나선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서녘 하늘엔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다. 석양에 잠긴 춘천을 뒤로 하고 귀로에 오르다. 

2004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