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에서 시간에 쫓기듯 바쁘게 살다가 문득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될 때가 있다.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현세의 삶에 만족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 보면서,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에 젖곤 한다. 그것은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은 대개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들만 떠오르기 때문이리라.
한편, 사람들은 현세에 만족하지 않기에 미래를 꿈꾼다. 그 꿈은 대개 장미빛으로 물들어 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자신의 삶이 훨씬 나아지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유와 평등, 평화가 실현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억압과 착취에 맞서 반란과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그러한 혁명이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썩은 세상을 뒤집어 엎는 혁명을 통해서 천지개벽를 이루어줄 절대자였다. 사람들이 목놓아 기다린 그 절대자는 바로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이었다.
미륵불은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때가 되면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그 미륵불은 통영 앞바다에 떠 있는 미륵도에 하생한다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러기에 미륵불이 하생할 미륵도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 세상을 위한 땅이다.
통영운하에서 바라본 미륵산
언젠가 민중들의 염원이 이루어질 세상, 그 불국토는 바로 용화세상(龍華世上)이다. 그러니 용화사는 곧 도솔천에 계신던 미륵불이 하생하여 머물 상주처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미륵도량(彌勒道場)인 미륵산(彌勒山) 용화사(龍華寺)를 돌아보기로 한다. 비가 그치기는 하였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통영 앞바다에 있는 미륵도를 바라보니 미륵산 제일봉인 큰망이 구름에 휩싸여 있다.
충무교를 건너서 미래를 위해 준비된 땅 미륵도로 들어간다.
미수동 벚꽃길
충무교를 건너마자 미수동 벚꽃길이 시작된다.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한 벚꽃이 화사하다. 미수동 벚꽃길을 따라가다가 봉평동으로 들어선다. 용화사(경남문화재자료 제10호)는 통영시 봉평동 미륵산 북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용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32~646) 때 은점화상(恩霑和尙)이 정수사(淨水寺)라는 절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정수사는 고려 원종(元宗) 원년(1260년)의 큰 장마로 산사태가 나 가람전체가 폐사되었다. 3년 뒤 자윤(自允), 성화(性和) 두 스님이 자리를 옮겨 절을 복원하고 천택사(天澤寺)라 하였다. 천택사는 조선 인조(仁祖) 6년(1628년)에 일어난 화재로 다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영조 28년(1752년))벽담선사(碧潭禪師)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한 뒤 절 이름을 용화사로 바꾸었다.
벽담선사가 천택사를 용화사로 바꾼 데 대한 설화가 전해온다. 불에 타버린 천택사를 중창하하기 위해 벽담선사는 미륵산 제일봉인 큰망 아래에서 칠일 밤낮동안 미륵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는 당래교주미륵불(當來敎主彌勒佛)이니라. 이 산은 미래 세상에 용화회상(龍華會上)이 될 도량이니 여기에 가람을 짓고 용화사라 하면 만세에 길이 보전되리라.'라고 계시하였다. 벽담선사는 이 계시에 따라 36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간직해 온 천택사라는 절 이름을 용화사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용화사는 별다른 재난을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미륵도량으로서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오른쪽으로 호수를 끼고 용화사로 오르는 산길을 걷는다. 때마침 피어난 진달래가 산기슭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비에 젖은 진달래 꽃잎이 무거워 보인다.
용화사 부도전
효봉선사 탑비
호수를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용화사 부도전이 나온다. 부도전 오른쪽 끝에 용화사 창건주인 벽담선사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근세의 고승인 효봉선사(曉峰禪師)의 5층 사리탑과 탑비도 나란히 세워져 있다. 역대 공덕주 부도와 정하스님 사리탑비, 5층석탑, 3층석탑도 보인다. 정하스님 사리탑비에는 '입적한 뒤 아미타불이 되셨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부도와 탑비 주변에는 키작은 광대나물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자그마한 붉은색 꽃이 앙증맞다.
용화사 해월루(海月樓)
부도전에서 조금 더 걸어서 올라가면 용화사 해월루가 나온다. 해월루 앞에는 작은 섬이 떠 있는 장방형의 연못이 있다.
이 작은 연못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연못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自覺覺他), 섬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뜻하며 대승불교에서 수행의 이상을 나타낸 것이다. 자각각타란 스스로 깨달은 뒤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자리이타란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더불어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용화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해월루 옆에 나란히 세운 두 개의 돌기둥이 일주문 역할을 한다.
용화사 탐진당(探眞堂)
용화사 경내로 들어서자 선실(禪室)인 적묵당(寂默堂)은 해체보수공사 중이다. 중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적묵당과 탐진당, 정면 석축 기단 위에 보광전(普光殿)이 자리잡고 있다. 보광전의 왼쪽으로는 명부전(冥府殿)과 영각(影閣), 용화전(龍華殿)이 처마를 나란히 늘어서 있다.
수선화
보광전 석축 기단 아래 뜨락에는 노오란 수선화가 활짝 피어 있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가 죽어서 환생했다는 꽃이다. 나르시스를 닮았는지 수선화는 청초하면서도 가련한 느낌을 준다. 수선화는 고결, 자만, 자기애를 상징한다.
용화사 보광전(普光殿)
보광전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보광전 신중탱화(神衆幀畵)
보광전(경남유형문화재 제249호)은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모신 전각이다.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오량구조로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보광전 법당 안으로 들어가 아미타삼존불님께 합장반배로 예를 올린다. 아미타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 우측 벽면에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주재자이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한다. 또 아미타불을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극락전, 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 무량광전 등은 바로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불의 결인(結印)은 아홉 종의 미타정인(彌陀定印) 가운데 한 가지나 묘관찰인(妙觀察印)을 취하게 되며, 좌우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두고 있다. 아미타불은 수행 중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大願)을 품고 성불하여 극락정토에서 교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생들이 아미타불을 간절하게 염송하기만 해도 죽어서 극락세계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미타불 신앙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이 대승불교의 정토교(淨土敎)다.
원효(元曉)는 '오직 마음이 정토요, 성품은 아미타불과 같다(唯心淨土同性彌陀).'고 부르짖은 바 있다.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과 선이 둘이 아니라는 선정불이(禪淨不二)의 전통은 원효로부터 지눌(知訥), 보우(普愚), 나옹(懶翁), 기화(己和), 휴정(休靜)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보광전과 명부전, 영각, 용화전
명부전(冥府殿)과 영각(影閣)
명부전 편액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님 전에 합장반배로 예를 올린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모든 사자(死者)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서원을 한 보살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경외하는 보살님이다.
명부전의 주존불은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의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봉안한다. 그 좌우에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상(十王像)을 안치하고 그 앞에 동자상과 판관(判官), 녹사(錄事), 장군(將軍) 등의 존상(尊像)을 갖춘다. 그래서 명부전을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지장탱화, 시왕상 뒤에는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한다.
명부전의 편액 글씨는 추사체의 대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5~1943)가 썼다.
명부전 왼쪽 1칸은 영각이다. 안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불교계의 큰 스승인 효봉선사의 사진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이 영각을 효봉영각(曉峰影閣)이라고도 한다.
용화전(龍華殿)
용화전 편액
용화전 미륵부처님 앞에서 합장반배로 예를 올린다.
용화사는 미륵하생지인 용화수를 상징하는 사찰이고, 용화전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전각이다. 그래서 용화전을 미륵전 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모신다고 해서 장륙전이라고도 한다. 용화전에는 도솔천에서 설법중인 미륵보살을 봉안하거나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봉안하고, 용화회상도(龍華會上圖)를 후불탱화로 봉안한다. 이것은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화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은 사실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뒤 56억7천만 년이 지나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한다는 부처다. 미륵불이 하생하면 이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불국토 이상향으로 변하여 모든 사람들이 수복강녕을 누리게 되는 용화세상이 실현된다고 한다.
미륵불이 하생하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에 걸쳐 사제(四諦),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법문을 설하는데, 이것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이다. 용화삼회의 설법으로 1회에는 96억 명, 2회에는 94억 명, 3회에는 96억 명이 아라한과를 얻는다고 한다. 용화세상에서 중생을 교화하기를 6만 년, 마침내 미륵불은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미륵불신앙 특히 미륵하생신앙은 도탄에 빠진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신앙이었다. 예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여망을 이용해서 미륵불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후삼국의 궁예(弓裔)와 견훤, 고려 우왕 때의 이금(伊金), 조선 숙종 때의 승려 여환(呂還)이 바로 그들이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증산교 교주 강일순, 영생교 교주 조희성, 아가동산 교주 김기순 등과 같은 미륵불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하나같이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 사이비 미륵불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요즘도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할 때마다 후보들이 내거는 공약들을 보면 미륵불이 아닌 후보가 없다. 여러 명의 대통령과 수많은 국회의원들을 뽑았음에도 용화세상이 이루어졌는가?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의 가슴속에는 이미 미륵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용화세상은 결코 누가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용화세상은 스스로 실현해야만 하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용화세상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용화전 편액 글씨도 성파 하동주의 작품이다.
불사리사사자법륜탑(佛舍利四獅子法輪塔)
춘백
경내 입구 오른쪽에는 고대 인도 아쇼카양식의 원주석탑인 불사리4사자법륜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에는 진신사리 7과가 봉안되어 있다. 불사리탑 뒤편 오래된 춘백나무에 붉은 꽃이 활짝 피었다.
종루
해월루와 적묵당 사이를 지나 미륵산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팔모정 형태의 종루가 있다. 종루의 편액 글씨도 성파 하동주가 썼다.
효봉선사 석조좌상
종루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아름드리 노송 곁에 효봉선사 석조좌상이 있다. 좌상에 사리도 함께 모셨다고 한다. 저 좌상 어디에 사리를 모셨을까?
미륵산 큰망
효봉스님 석조좌상 옆에서 잠시 미륵산을 바라다본다. 미륵산 제일봉 큰망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큰망을 미륵봉이라고도 부르니 저 봉우리가 미륵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꿈꾸는 미래가 있는가? 그렇다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륵불을 내 안에서 찾을 일이다. 우주 삼라만상에는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내 안의 불성을 찾지 않고 밖에서만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륵불을 가슴에 안고 용화사를 떠나다.
2008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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