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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차드(Chad)

林 山 2010. 1. 28. 16:58

중앙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 이남과 잠베지 강 이북 사이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중앙부 지역을 말한다. 중앙아프리카 국가들은 차드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 르완다, 부룬디, 콩고공화국, 앙골라령 카빈다 등이다. 

  

 차드 지도

 

차드 공화국(Republic of Chad)은 아프리카에서 4번째로 큰 호수인 차드 호 분지의 북동부에서 남동부에 걸쳐 있다. 북쪽은 리비아, 서쪽은 니제르와 나이지리아,  남서쪽은 카메룬, 남쪽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동쪽은 수단과 국경을 접한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6배인 128만4천㎢이고, 인구는 약 천8십만명(2007년)이다. 수도는 은자메나(N'Djamena, 옛 이름은 Fort Lamy, 포르라미)이다.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차드는 국토의 대부분이 광활한 사막이다. 차드의 국토는 서쪽 국경의 중앙에 위치한 차드 호의 해발 228m에서 점차 고도가 높아지는 분지 형태로 되어 있다. 분지의 북쪽에는 차드 최고봉  쿠시 산(3415m)이 솟아 있는 화산성의 티베스티(Tibesti)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북동쪽에는 거대한 사암 산괴(山塊)로 이루어진 엔네디(Ennedi) 고원, 동쪽에는 수정질 암산의 연봉들이 솟아 있는 와다이(Wadai) 산맥, 남쪽에는 우방기(Ubangi) 고원이 분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분지의 가장 낮은 곳은 주라브 저지대(175m)이다. 차드의 주요 강인 샤리(Shari) 강과 로곤(Logone) 강은 남동쪽으로부터 차드 호로 흘러든다. 

차드의 기후는 크게 남부의 열대몬순 기후, 중남부의 반건조 기후, 중북부의 혹서건조 기후로 구분된다. 열대몬순 기후대인 남부는 5∼10월에 800∼1200㎜의 비가 내리며, 반건조 기후의 중부 사바나 지대인 사헬(Sahel) 지대는 6∼9월에 300∼800㎜의 비가 내린다. 연중 최저기온은 12℃, 최고기온은 50℃를 기록한다. 식물이 드문 사구와 고원들로 이루어진 혹서건조 기후대는 야자나무가 자라는 오아시스가 산재한다. 1970년대 혹심한 가뭄으로 중부지방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북부는 일년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황량한 사막만이 펼쳐져 있다. 남부와 중남부 지방에는 많은 종류의 조류와 파충류, 코끼리, 하마, 코뿔소, 혹돼지, 기린, 영양류, 사자, 표범, 치타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차드의 북부 보르쿠엔네디티베스티(Borkou-Ennedi-Tibesti) 주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신석기인들은 흑인종 혈거인(穴居人)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BC 500년경부터 차드 호 남쪽 지방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8세기초에는 사하라 지방의 사막화가 진행됨에 따라 베르베르인들이 차드로 이주해 왔다. 800년경에는 카넴(Kanem) 왕국이 건설되었으며, 이 왕국은 1085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200년대초 카넴 왕국의 국경은 북쪽으로 페잔(Fezzan), 동쪽으로 와다이, 서쪽으로 나이저(Niger) 강에서 차드 호의 북쪽 보르누(Bornu)왕국까지 확대되었다. 카넴 왕국과 보르누 왕국은 합병을 통해 카넴보르누(Kanem-Bornu) 왕국이 되었다. 16세기 카넴보르누 왕국은 사하라를 종단하여 리비아의 트리폴리까지 이어지는 무역로의 남쪽 종점을 장악함으로써 크게 번성하였다. 

 

카넴보르누 왕국의 남쪽에서는 1522년에 들어선 바기르미(Baguirmi) 왕국과 16세기경에 세워진 와다이 왕국이 세력을 키워 새로운 경쟁국으로 떠올랐다. 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바기르미 왕국은 카넴보르누 왕국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1630년경 이슬람 왕조가 들어선 와다이 왕국은 바기르미 왕국을 정복한 뒤, 카넴보르누 왕국까지 약탈했다. 와다이, 바기르미, 카넴보르누 세 아랍왕국은 남부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무역을 일삼았다. 1883∼1893년 세 왕국은 모두 수단의 장군 라비흐 앗 주바이르(Rabih az-Zubayr, 1842~1900)에게 정복당했다. 1891년 프랑스인들은 라비흐의 영토를 탐험한 뒤, 1900년 라비흐를 축출하고 이 지역을 점령했다. 1910년 차드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연방의 일부가 되었고, 1946년에는 프랑스의 해외 준주(準州)가 되었다. 북부인들에게 프랑스는 악몽이 되었으나, 남부의 흑인들은 프랑스군을 노예해방군으로 환영했다. 프랑스가 차드에 면화농장을 세우고 인두세를 부과하자 남부인들도 프랑스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1958년 차드는 프랑스공동체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으며, 1960년 8월 11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차드는 독립 이후 남부의 흑인계 기독교 세력과 북부의 아랍계 이슬람 세력의 갈등과 대립으로 정정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가운데 초대 대통령에 남부 사라(Sara)족 출신의 프랑수아(응가르타) 톰발바예(Francois Tombalbaye, Ngarta Tombalbaye, 1918~1975)가 취임하였다. 2년 뒤 신헌법을 채택한 톰발바예는 프랑스와의 방위동맹을 기반으로 남부인 중심의 차드진보당(Chadian Progressive Party, PPT) 일당의 통치체제로 국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1966년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조성하려는 북부 이슬람계 차드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톰발바예 정권과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남부 정부군에 대한 게릴라 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내전이 일어났다. 톰발바예 정권은 헌법개정과 의회해산으로 국면을 전환하고, 프롤리나트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반정부 무장투쟁을 무력화시키려고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내전은 리비아가 북부 프롤리나트(FROLINAT)를 지원하고, 프랑스가 남부 정부군을 지원하면서 국제분쟁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1968년 8월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남부 정부군은 그해 11월 프롤리나트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969년 6월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톰발바예는 차관도입을 위해 리비아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톰발바예는 1975년 4월 사라족 출신의 노엘 오딘가르(Noël Milarew Odingar, 1932~2007)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축출된 후 피살되었다. 쿠데타 직후 톰발바예에 의해 1973년 반역죄로 체포된 바 있던 남부 출신의 펠릭스 말룸(Felix Malloum, Felix Malloum Ngakoutou Bey-Ndi, 1932~) 준장이 최고군사평의회 의장과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말룸의 군사정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파업이 자주 일어나자 말룸은 노조의 파업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했다. 말룸 정권은 프롤리나트로부터도 도전을 받았다. 1976년 4월 혁명기념일에는 프롤리나트가 주도한 말룸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7년 리비아는 차드의 영토 일부를 병합하고, 2년 뒤에는 차드를 침공했지만 격퇴되고 말았다. 1978년 8월 말룸은 최고군사평의회를 해산한 뒤 대통령에 취임하여 거국내각을 출범시키고, 북부 파야(Faya)에서 태어난 프롤리나트 지도자 히센 하브레(Hissène Habré, 1942~)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히센 하브레는 투부(Toubou)족의 일족인 아나카자(Anakaza)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말룸과 같은 북부 출신의 프롤리나트 지도자 구쿠니 웨데이(Goukouni Oueddei, 1944~) 사이에 극심한 대립으로 말룸은 결국 1979년 3월 국외로 망명하고 말았다. 그해 4월 구쿠니 웨데이가 인민국가평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정정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1979년 8월 남부와 북부 양파벌은 대통령에 구쿠니 웨데이, 부통령에 와델 압델카데르 카무게(Wadel Abdelkader Kamougué, 1939~)를 추대하고 자유선거를 실시하였으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다.

 

1979년 8월 나이지리아의 라고스(Lagos)에서 차드 인접 5개국의 중재로 체결된 화해협정에 따라, 그해 11월 북부 프롤리나트의 구쿠니 웨데이가 주도하는 과도거국일치내각(Government of National Unity, GUNT)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80년 3월 프롤리나트는 구쿠니 웨데이 대통령파의 인민군(People's armed Forces, FAP)과 히센 하브레 국방장관파의 북부군(Armed Forces of the North, FAN)으로 분열되면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여기에 압델카데르 카무게 부통령파까지 합세하여 세 파벌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은 리비아가 인민군(FAP)을 지원하고, 수단이 북부군(FAN)을 지원하면서 국제적인 분쟁이 되었다. 

 

1981년 1월 리비아의 카다피 원수와 차드의 웨데이 대통령은 양국의 통합을 선언하였다. 양국간의 통합선언은 차드 국내는 물론 주변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면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세계 각국은 리비아군의 차드 개입과 양국가간의 통합을 맹비난하였다. 1981년말 리비아군은 국제여론에 밀려 차드로부터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때부터 FAP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이집트와 수단의 지원을 받은  FAN이 FAP를 제압하자 구쿠니 웨데이는 알제리로 망명하였다. 

 

FAN은 과도거국일치내각(GUNT)을 전복하고 6인 임시위원으로 구성된 국가위원회가 통치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전 국방장관 히센 하브레는 차드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GUNT를 구성했던 파벌들은 대부분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정부의 통치력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1983년 6월 구쿠니 웨데이 전 대통령이 이끄는 FAP 반군은 리비아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부의 전략요충지 파야를 점령하고 하브레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시도했다. 이에 프랑스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또 미국은 정부군, 소련은 반군을 측면지원함으로써 차드 내전은 다시 국제분쟁으로 발전했다. 그해 8월 정부군과 반군은 북위 15°선을 경계선으로 휴전을 선포하였다. 
 

1988년 우라늄이 풍부하게 매장된 아오즈의 영유권을 둘러싼 리비아와의 전쟁을 종결한 히센 하브레는 1989년의 대선에서 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0년 12월 수단에 망명해 있던, 북부 파다(Fada) 태생으로 이드리스 데비(Idriss Deby, 1952~) 전 참모총장의 애국구제운동(Patriotic Salvation Movement, MPS) 반군이 리비아와 수단의 지원을 받아서 일으킨 쿠데타로 하브레는 축출되고 말았다. 데비는 자그하와(Zaghawa)족의 일족인 비다야트(Bidayat)족 출신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데비는 1991년 3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는 등 민주화를 추진하였다. 

 

이드리스 데비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차드에는 몇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일어났다. 1991년 10월 압바스(Abbas) 내무장관을 추종하는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2월에는 하브레 전 대통령을 추종하는 구 정부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진압되었다. 1992년 6월에도 야쿠브(Yacoub) 공공사업장관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같은해 데비 정권은 반군단체인 개발과민주를위한운동(MDD)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1993년 잦은 쿠데타로 정세가 불안해지자 데비 정권은 야당의 요구를 수용해서 정부와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국민회의(National Conference)를 소집하였다. 1993년 4월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다시 추대된 데비는 1994년 11월 차드 민주화 일정을 발표했다. 1996년 4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민정이양을 위한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그해 7월 차드 최초의 민선 대통령선거에서 2차까지 가는 결선투표 끝에 데비가 69%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7년 2월 국회의원 선거 이후 5월에 여야 연립내각이 출범하였으며, 제1야당 재건민주연합(Union for Renewal and Democracy, URD) 당수인 압델카데르 카무게 전 부통령이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1998년에는 북서부 티베스티 산맥 근처 주아르(Zouar) 출신의 전 국방장관 유수프 토고이미(Youssouf Togoimi, 1953~2002)가 이끄는 투부족의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001년 5월 20일 실시된 대선에서 이드리스 데비 현 대통령은 67%의 득표율로 5년 임기의 대통령 3선에 성공하였다. 데비는 헌법상의 연임제한으로 마지막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2년 4월 21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당인 애국구제운동(MPS)이 총 155석의 의석 가운데 113석을 휩쓸었으며, 제1야당인 공화국행동연맹(Federation, Action for the Republic, FAR)은 10석을 얻었다. 데비 정권하에서 과거 20여년간 지속된 내전과 군부 쿠데타로 인한 정치불안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장기집권에 따른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5년 헌법상 연임제한으로 대통령 출마가 불가능해진 데비는 헌법개정으로 종신대통령의 길을 열어놓았다. 2006년 5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수단 국경지역에 근거지를 둔 반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면서 또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대선 3주일전 수도인 은자메나 외곽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대규모 교전이 발생하여 4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데비 정권은 수단을 반군의 배후 지원세력이라고 비난하면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수단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유엔은 양측에 폭력종식을 촉구하고, 구호요원과 비정부기구 관계자들을 카메룬으로 대피시켰다. 그해 5월 3일 강행된 대선에서 야당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선거에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데비는 4선 연임을 달성했다.

 

차드는 북부의 아랍계 무슬림 세력과 남부의 아프리카계 비이슬람 세력간의 갈등으로 언제든지 내전이 발생할 위험을 안고 있다. 여기에 북아프리카의 맹주를 노리는 리비아의 개입, 약 20억 배럴에 이르는 원유와 광물자원을 둘러싼 이집트, 수단 등의 주변국들과 미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차드의 내전종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차드 국민은 크게 중부와 북부의 아랍인, 남부의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을 구성하는 부족은 200여개에 이를 정도로 매우 다양하다. 차드 전체인구의 약 25%를 차지하는 최대 인종집단인 비이슬람 사라족은 주로 중남부에 정착하고 있다. 굴라족, 카라족, 크레이시족, 은두카족, 응가마족도 사라족의 일족이다. 샤리나일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라족은 친연관계가 있는 부족과 함께 차드 호 남쪽에 있는 사르(Sarh) 주변의 중남부, 샤리 강과 로곤 강 유역의 중심부에 거주한다. 라카족과 음붐족은 니제르콩고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며, 사라족의 거주지 서쪽에 분포한다. 당굴레족은 샤리 강과 로곤 강 연변에 거주한다.

 

중부 사헬지역에는 차드 제2의 종족인 아랍계 이슬람 유목민이 거주하고 있다. 투아레그(Tuareg)족 등 다수부족으로 이루어진 아랍인들은 분포지역이 넓지만 단일인종집단에 속한다. 사하라어군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두마족, 쿠리족, 카넴부족 등은 차드 호 부근 지역에 분포한다. 북부에는 주로 투부족 유목민이 살고 있다. 차드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아랍어다. 그러나 실제로는 100개 이상의 언어와 방언이 사용되고 있다. 차드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차드의 종교는 무슬림 54%, 카톨릭 20%, 개신교 14%, 토속종교 10%, 기타 2%(1993년) 순이다. 무슬림의 절대다수는 중부와 북부, 그리고 동부에 분포한다. 대도시와 아랍인 거주지 어디에나 이슬람이 존재한다. 남부와 게라 주(州) 산간지방의 주민 대부분은 아직도 정령신앙을 믿고 있다. 차드에는 여러 개의 로마 가톨릭 주교관구와 몇 개의 개신교 선교단이 있다. 차드의 초등교육은 주로 공립학교나 카톨릭, 개신교 등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 이루어진다. 학령아동의 50% 미만이 취학한다. 문자해독률은 약 18%에 불과하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유일하게 1971년에 설립된 차드대학교가 있다.

차드는 혼합경제체제의 저개발 농업국가이다. 농업은 남부와 중남부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며, 농업인구는 노동인구의 80%가 넘는다. 중부와 중북부 지방에서는 주로 소나 낙타를 사육한다. 가장 중요한 수출작물은 목화이며, 그 다음이 생우(生牛)와 냉동 쇠고기이다. 주요 식량작물은 수수, 기장, 땅콩 등이다. 차드 호 북쪽의 카넴 주에서는 1977년부터 석유가 나왔지만, 잦은 내전으로 1980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후 남부 도바(Doba) 지역의 석유개발과 화력발전소 건설사업에 대한 외국기업들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2003년 7월부터 석유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차드는 공업개발이 크게 뒤쳐진 나라로 주된 공업은 조면(繰綿)이다. 차드는 교통 서비스가 매우 낙후되어 있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의 원조로 사헬지대에 도로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무역수지는 만년 적자이며 프랑스 등 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형편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해서 카메룬, 독일, 이탈리아 등이다.

차드 국민의 건강상태는 매우 열악하다. 평균수명은 45세로 낮은 편이고 유아사망률도 매우 높다. 보건시설과 의료진이 부족하고 위생이 불량하여 소화기 계통의 질병이 사망의 주범이다. 전염성 간염, 말라리아, 결핵, 파상풍, 나병, 홍역 등의 질병이 널리 퍼져 있다.


차드는 독립 이래 비동맹 중립국으로서 친서방 노선을 걸어왔다. 프랑스는 프랑스-차드 군사협정 체결(1976) 이래 차드 중앙정부를 지원해 줌으로써 차드 정부와 지속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친리비아 성향의 데비 정권과 관계가 소원했으나 최근 관계가 다소 호전되었다.

 

한국과 차드는 1961년 8월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64년 4월 주프랑스 대사가 초대 차드 겸임대사로 부임했다. 1971년 2월 양국은 의료협력협정을 체결했다. 1975년부터 주카메룬 대사가 차드 대사를 겸임하였다. 1978년 1월 양국은 무역협정을 맺었으며, 1998년 8월 이후 주나이지리아 대사가 차드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차드는 주중국 대사가 주한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차드에는 한국교민 4명(2002년)이 체류하고 있다

 

조선과 차드는 1969년 5월 수교하였다. 1977년 조선은 비동맹국에 대한 외교를 강화하기 위해 차드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원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1982년에는 공관을 철수하고 주카메룬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차드와 대만은 1997년 8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대만은 수교 대가로 3000km에 이르는 도로건설 등의 원조를 제공하였다. 중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따라 대만과 수교 즉시 차드와 단교하고 대사관을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