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모로 연방(Union of the Comoros)은 남동아프리카 대륙과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사이의 모잠비크 해협 북단에 위치한 그랑드 코모로 섬(Grande Comore 또는 응가지자 Ngazidja)과 모엘리 섬(Moheli 또는 음왈리 Mwali), 앙주앙 섬(Anjouan, 또는 은주아니 Ndzuani, Nzwani)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북서쪽으로 약 5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코모로 지도
코모로의 국기는 1975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변경을 거쳐 2001년 12월 23일 현재의 국기로 확정되었다. 노란색, 하얀색, 빨간색, 파란색 네 가지 색으로 구성된 가로 줄무늬에 깃대 쪽으로 초록색 삼각형이 그려져 있다. 초록색 삼각형 안에는 하얀색 초승달과 세로 방향으로 네 개의 하얀색 별이 그려져 있다.
코모로 국기
네 개의 하얀색 별과 네 가지 색의 줄무늬는 코모로 제도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큰 섬을 상징한다. 노란색은 모엘리 섬, 하얀색은 마요트 섬(Mayotte), 빨간색은 앙주앙 섬, 파란색은 그랑드 코모르 섬을 의미한다. 마요트 섬은 프랑스령이지만 코모로는 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하얀색 초승달과 초록색은 코모로의 종교인 이슬람교의 상징이다.
마요트 섬은 프랑스 자치령이라서 프랑스는 물론 마요트 섬 주민들도 코모로 국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마요트 섬은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래서 4개의 별 중 마요트 섬을 상징하는 별 하나를 빼달라고 코모로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코모로의 수도 모로니(Moroni)
코모로의 수도는 그랑드 코모로 섬에 있는 모로니(Moroni)이다. 인구는 2018년 기준 83만 명이다. 국토 면적은 1,862㎢, 제주도의 약 1.2배 정도이다. 수도 모로니 근처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3개의 섬 모두 마다가스카르나 동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정기 여객선과 항공편이 있다.
코모로의 주민은 아프리카계 흑인과 아랍인이 대다수이며, 프랑스인도 소수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흑인들의 종족은 매우 다양하다. 아랍인들은 17세기부터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이란 등지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코모로 제도에 거주해왔다. 주요 종족은 안탈로테족(Antalote), 카프레족(Cafre), 마코아족(Makoa), 와맛사아족(Oimatsaha), 사카라바족(Sakalava)이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그랑드 코모르 섬에 거주하며, 수도 모로니에 인구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모엘리 섬에는 인구의 5%만이 거주한다.
아랍어와 스와힐리어와 결합된 반투어의 일종인 코모로어는 국어인 동시에 공용어로 주민의 대부분이 사용한다. 아랍어와 프랑스어는 공용어다. 프랑스어는 교육과 행정어이기도 하다. 마다가스카르어(Malagasy language)도 사용된다. 코모로는 이슬람이 국교로 주민의 98%가 수니파 무슬림이고 로마 가톨릭이 2%이다. 코모로에서는 이슬람을 제외한 타종교의 공개적인 선교가 금지되어 있다.
코모로에서는 7~15세까지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교육은 주로 코란을 연구하는 전통적인 이슬람 학교들과 프랑스인들이 세운 프랑스식 학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코모로에는 대학교가 없다. 그래서 교등교육을 받으려면 해외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해외 유학생들이 귀국을 꺼리고 있어 두뇌유출 현상이 심각하다. 고등교육의 부재, 빈약한 의료 및 사회시설 등을 이유로 높은 디아스포라(Diaspora) 비율을 보이고 있다.
코모로는 1978년에 제정되어 1982년과 1985년, 2001년 세 차례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중심제 연방공화국이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다. 내각회의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들로 구성된다. 연방의회는 단원제이며, 정원은 33석이다. 33석 중 3개 섬에 각각 3석을 배분하고, 나머지 24석은 선거로 선출한다. 사법부 최고법원은 대법원이다. 대법원은 코모로의 헌법과 대통령 선거에 관련되는 문제들에 관해 결정을 내린다.
코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저개발국가 중의 하나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관광산업이다. 주요 수출 농산품은 바닐라, 정향, 향수 원료인 일랑일랑(ylang-ylang), 커피, 자스민, 코프라(copra, 야자열매), 옥수수 등이다. 코모로 경제는 주로 관광산업에 의존한다. 그러나 고급호텔이나 관광산업은 거의 대부분 남아공의 백인 사업가들이 소유하고 았다. 코모로에는 3개의 라디오 방송국만 있을 뿐 TV 방송국은 없다. TV 수상기만 천여 대 보급되어 있다.
코모로의 GDP는 2018년 기준 12억3천만 달러, 1인당 GDP는 1,488달러이다. 2013년 기준 해외로부터의 송금이 GDP의 25%를 차지했다. 교역 규모 4억2,860만 달러 가운데 수출은 1억2,400만 달러, 수입은 3억460만 달러이다. 통화단위는 코모로 프랑(Comoros Franc)이다. 미화 1달러는 2019년 12월 기준 442.25Cfr였다.
코모로의 결혼풍습은 독특하다. 신랑은 결혼식을 올릴 때 2~9일 간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 또 신부에게 의상과 보석을 선물해야 하며, 지참금도 주어야 한다. 이로 인해 결혼은 신랑을 경제적 파산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코모로의 외교정책은 비동맹 중립 친서방 노선이며,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과 코모로는 1979년 2월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주프랑스 대사가 코모로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가 지금은 주마다가스카르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코모로측은 대사가 없다. 코모로에는 2019년 기준 5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한국과 코모로의 교역량은 2018년 기준 26만 달러이다. 수출액은 16만 달러이며, 주로 기계류, 타이어, 가전제품을 수출한다. 수입액은 10만 달러로 주로 화학제품을 수입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코모로는 한국보다 이른 1975년에 수교했으나, 1983년 12월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을 계기로 단교했다. 이후 1989년에 다시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두 나라 모두 공관은 없다.
그랑드 코모로 섬의 기
그랑드 코모로 섬의 카르탈라 산(Mount Karthala)
그랑드 코모르는 가장 큰 섬으로 남쪽에는 활화산인 카르탈라 산(Mount Karthala, 2,361m)이 솟아 있다. 카르탈라 산은 순상 화산이다. 2005년에 화산이 분화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대피하였다. 2006년에는 용암을 분출하며 폭발했다. 이 화산은 2007년에도 분화한 적이 있는 활화산이다. 화산 가스는 나오지 않으나 가끔 수증기가 나온다. 카르탈라 산 북쪽에는 해발 600m의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해안에는 큰 만이 없어 선박의 출입에 부적합하다. 수도 모로니는 이 섬의 남서부에 있으며, 주요도시는 북동부의 음베니(Mbeni)와 남부의 품부니(Foumbouni)다.
모엘리 섬의 기
모엘리 남서부의 니우마추아(Nioumachoua)
모엘리는 가장 작은 섬으로 섬 전체가 해발 300m의 고원으로 되어 있다. 이 섬의 최고봉은 서쪽의 788m봉이다. 경사면은 빽빽한 숲으로 덮여 있으며, 토양은 비옥한 편이다. 해안은 파도가 거세고 높아서 선박의 운항이 어렵다. 주요도시는 북부의 폼보니(Fomboni)와 남서부의 니우마추아(Nioumachoua)이다. 폼보니는 모엘리 섬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코모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앙주앙 섬의 기
앙주앙 섬의 무차무두(Mutsamudu)
앙주앙은 중심부가 해발 1,570m의 화산괴를 이룬 3각형의 섬이다. 주요 도시는 북서부의 무차무두(Mutsamudu)와 남동부의 도모니(Domoney)이다. 무차무드는 코모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주앙 섬의 행정 중심지이다. 도모니는 앙주앙 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앙주앙 섬에는 1980년대 중반 현대적인 항만시설이 건설되었다.
마요트 섬의 수도 마무주(Mamoudzou)
앙주앙 섬의 남동쪽에 있는 마요트(Mayotte, 또는 마오레 Mahoré) 섬은 코모로 제도에 속하는 섬이지만, 1976년 이후 정치공동체(collectivité territoriale)의 자격으로 프랑스와 특수한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공동체는 해외영토와 해외행정구(département)의 중간 개념이다. 따라서 마요트의 통치자는 프랑스의 대통령이며, 프랑스 상원과 하원에 각각 대표 한 명씩을 파견한다. 1인의 고등판무관과 17인으로 구성된 총회가 공동으로 마요트 섬을 관리한다. 사법체계는 프랑스를 따르고 있다. 코모로는 마요트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마요트의 영유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 섬은 사실상 프랑스령으로 계속 남아 있다.
코모로의 기후는 열대성 기후로 뚜렷이 구분되는 두 계절이 있다. 5∼10월은 맑고 건조한 계절, 11∼4월은 고온다습한 계절이다. 11월에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최고 28℃까지 상승하며, 겨울인 7월에는 20℃까지 내려간다. 연강수량은 1,075∼2,850㎜이고, 최다우기인 1월의 강수량은 275∼375㎜를 기록한다. 여름에는 사이클론과 해일이 자주 발생한다.
여우원숭이(lemur, Lemur monkey)
코모로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토의 약 16%가 원시림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가정용 땔감 등을 위해 주민들이 삼림을 마구 벌채한 결과 지금은 원시림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코모로의 해안에는 맹그로브(mangrove) 등의 홍수림이 자란다. 저지대에는 코코스야자와 망고, 바나나 등 열대성 식물들이 분포하며, 삼림지대는 해발 1,770m까지 형성되어 있다. 코모로에 서식하는 동물로는 육상 조류와 희귀동물인 여우원숭이(lemur, Lemur monkey)가 있다. 해안에는 바다거북이 많다. 코모르의 해역에는 살아 있는 화석어류로 멸종위기에 처한 실러캔스(coelacanth)가 서식한다.
화석어류 실러캔스(coelacanth)
코모로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들은 오스트로네시아족(Austronesians)으로 추정된다. 오스트로네시아족은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에 있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다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 마다가스카르, 마이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뉴질랜드와 하와이의 폴리네시아인, 멜라네시아의 비 파푸아 부족들, 타이완 원주민을 포함한다. 그들은 또 태국의 파타니 지방, 베트남의 참족 지역, 캄보디아, 하이난에서도 발견된다.
500~600년 경 폴리네시아인(Polynesian), 멜라네시아인(Melanesian), 인도네시아인, 말레이시아인들이 동쪽에서 인도양을 건너와서 정착했다. 이후 코모로에는 여러 세기에 걸쳐 아프리카 대륙, 마다가스카르, 아랍, 페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로부터 이민이 계속되어 문명이 시작되었다.
9~10세기 경 코모로에는 반투어계의 스와힐리족이 각 섬에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11~15세기에 코모로는 마다가스카르와 교역하였고, 아랍과 페르시아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건너와서 정착했다. 아랍의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교가 코모로에 빠르게 전파되면서 이슬람 사원들이 세워졌다. 코모로는 초기 이슬람 교역로의 중요한 중계지가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시라즈인(Shiraz, Siraz)들은 중동과 인도는 물론 동아프리카에까지 진출하여 교역을 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코모로에는 시라즈인들의 영향으로 이슬람 수니파 문화가 퍼졌다. 동아프리카의 술탄령 잔지바르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아랍의 영향은 점점 더 커졌으며, 16~17세기 시라즈 왕족들은 이 지역에 많은 술탄령을 건설하고 건축술과 목공기술을 전했다. 마요트 섬은 16~19세기에 걸쳐 마다가스카르의 사카라바족(Sakalava)에게 정복당하였다.
1527년 포르투갈의 디오구 로베로스는 세계지도를 제작하면서 최초로 코모로를 표기하였다. 1591년 경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영국의 제임스 랭커스터(James Lancaster)가 코모로에 도착하였다. 16세기 이래 유럽의 항해자들은 코모로에 기항했으며,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인과 인도인들도 코모로에 들어왔다.
1843년 프랑스는 마요트 섬을 점령하고 식민지화했다. 1886년에는 코모로 제도 전체가 프랑스의 식민지 보호령이 되었다. 1914년 코모로는 마다가스카르 총독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1947년에는 프랑스의 해외 준주(準州)가 되었다. 1950년대부터 코모로 지도자들은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58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해외 준주로서의 코모로의 지위가 확정되었다.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에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0년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 이듬해인 1961년 코모로도 내정 자치권을 가진 프랑스의 해외령이 되었다. 1974년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그랑드 코모로, 모엘리, 앙주앙 등 세 섬의 주민 96%가 독립에 찬성했지만, 마요트 섬의 주민들은 64%가 독립을 반대하고 프랑스의 통치를 지지했다. 이후 코모로 정부는 줄곧 프랑스에 마요트 섬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아메드 아브달라 아브데레마네
프랑스 국회가 각 섬은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자, 1975년 7월 6일 아메드 아브달라 아브데레마네(Ahmed Abdallah Abderemane, 1919~1989)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은 코모로 제도 전체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국명을 코모로 공화국(Republic of the Comoros)으로 정했다. 아메드 아브달라 아브데레마네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해 11월에는 국제연합에도 가입하였다. 12월 프랑스는 3개 섬의 주권을 인정했지만, 마요트 섬에 대해서는 자치권을 지지했다.
봅 드나르(Bob Denard)
1976년 1월 남아공 백인정권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해병대 출신 봅 드나르(Bob Denard, 1929~2007)가 이끄는 백인 용병부대의 지원을 받은 사이드 모아메드 자파르(Saïd Mohamed Jaffar, 1918~1993)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메드 아브데레마네를 축출했다. 사회주의자인 알리 소일리 음차시와(Ali Soilih M'tsashiwa, 1937~1978)는 사이드 자파르를 축출하고 최고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1976년 1월 알리 소일리 음차시와는 코모로의 대통령이 되었다.
알리 소일리 음차시와(Ali Soilih M'tsashiwa)
1976년 마요트 섬은 단독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프랑스령 잔류를 희망하여 프랑스의 준주도 아니고 주도 아닌 특별공동체로 잠정 지정되었다. 코모로와 프랑스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자 프랑스는 코모로에 대한 일체의 원조를 중단했다. 1978년 5월 봅 드나르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알리 소일리 음차시와를 암살하였다. 국외에서 망명 중이던 아메드 아브데레마네 전 대통령은 귀국하여 신설 정치군사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올라 권좌에 복귀했다. 봅 드나르는 아메드 아브데레마네 대통령의 경호대장을 10년 간이나 맡아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이후 프랑스와의 외교관계가 재개되었다.
코모로의 역사는 독립 이후 19번의 쿠데타, 두 차례의 대통령 암살, 남아공 백인정권이 지원한 용병과 프랑스의 군사개입으로 얼룩졌으며 그 배후에는 봅 드나르가 있었다. 아프리카와 아랍 등지에서 수많은 '더러운 전쟁(Dirty Wars)'에 용병으로 개입하여 '전쟁의 개(Dog of War)', '하얀 악마(White Devil)'라는 별명을 얻은 봅 드나르는 여러 차례 코모로의 쿠데타에 관여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30여년 간 아프리카의 알제리, 가봉, 나이지리아, 베냉, 앙골라, 콩고민주공화국, 모잠비크, 짐바브웨, 코모로와 중동의 이란, 예멘에서 발생한 분쟁이나 쿠데타에 개입하였다. 그가 개입한 대표적인 분쟁은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비아프라 전쟁(Nigerian Civil War)과 콩고민주공화국의 카탕가 주(Province du Katanga) 분쟁이다. 이후 그는 주로 코모로에서 활동하였으며, 최소한 4번의 쿠데타와 쿠데타 시도에 관여했다.
1978년 10월 아메드 아브데레마네는 신헌법을 채택하고 국명을 코모로 이슬람 연방공화국(Federal and Islamic Republic of the Comoros)으로 변경하였다. 신헌법에 따라 정치군사집행위원회 위원장 아브데레마네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78년 후반 실시된 대선에서도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4년 대선에서도 아브데레마네는 반대세력 없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봅 드나르와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3번이나 쿠데타 기도가 발생하여 그의 정치적 장래가 불투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알리 소일리 음차시와를 지지하는 청년층들도 아브데레마네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사이드 모하메드 도하르(Said Mohammed Djohar)
1987년 4월 아메드 아브데레마네는 한국의 군부독재자 전두환을 방문했다. 1989년 11월 아브데레마네가 암살되자 봅 드나르는 코모로를 탈출하였다. 1990년 3월 실시된 대선에서 알리 소일리 음차시와의 이복형이자 최고재판소장이었던 사이드 모하메드 도하르(Said Mohammed Djohar, 1918~2006)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5년 봅 드나르는 용병을 이끌고 코모로에 상륙하여 모하메드 도하르를 군사감옥에 일시 구금하였다. 그러나 1995년 10월 코모로와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출동한 프랑스군에 투항함으로써 봅 드나르의 파란만장한 용병 인생도 마침내 종말을 맞이했다. 사이드 모하메드 도하르는 다시 대통령직을 회복하였다.
봅 드나르는 프랑스 법원에 의해 1995년 코모로에서의 쿠데타를 기도한 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으나 실제로 봅 드나르가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재판과정에서 봅 드나르는 프랑스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프랑스는 봅 드나르와 같은 용병들을 이용하여 옛 식민지 국가들에 쿠데타로 친 프랑스 정권을 세워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 정권조차도 봅 드나르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는 소문이 폭넓게 퍼져 있었다.
모하메드 타키 아브둘카림(Mohamed Taki Abdoulkarim)
1996년 실시된 대선에서 모하메드 타키 아브둘카림(Mohamed Taki Abdoulkarim, 1936~1998)이 당선되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97년 앙주앙 섬과 모엘리 섬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코모로의 정치불안이 야기되었다. 모엘리, 앙주앙 두 섬은 독립 선언 이후 프랑스에 병합되기를 희망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두 섬은 프랑스로부터 너머 멀어서 얻어도 전혀 실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 섬을 자국령으로 받아들이면 무슬림 수십 만 명이 프랑스 본토로 이주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998년 11월 모하메드 아브둘카림은 임기 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아브둘카림의 사망으로 전 총리이자 최고혁명평의회 의장인 타지딘 벤 사이드 마쑨데(Tadjidine Ben Said Massounde, 1938~2004)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해 모엘리 섬은 코모로 연방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99년 4월 30일 코모로 군참모본부장 아잘리 아수마니(Azali Assoumani, 1961~ ) 대령이 무혈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어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앙주앙 섬 강경 분리주의자들은 1999년 8월 선거에서 25석 전체 의석을 휩쓸면서 연방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잘리 아수마니의 쿠데타 이후 24개 정당과 정치단체는 단일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아수마니의 퇴진과 민정회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수마니는 2000년 4월 이전에 물러나겠다는 공약을 저버리고 옷만 민간인으로 바꿔입은 채 장기집권을 기도하였다.
아잘리 아수마니(Azali Assoumani)
2001년 연방정부와 의회, 3개의 자치정부와 의회를 규정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2002년 4월 연방대통령 선거에서 아잘리 아수마니는 다른 두 후보의 선거 보이코트에도 불구하고 75%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8개월 간 아잘리 아수마니 연방대통령과 3개 섬의 자치대통령이 대립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앙주앙 섬이 코모로 연방에 복귀하면서 3개 섬은 별도의 자치대통령을 두되 연방대통령은 윤번제로 선출한다는 내용의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2004년 4월 실시된 총선에서 아수마니의 CRC(Renaissance des Comores)는 18석 가운데 단 6석만을 얻었으며, 각 섬의 의회에서 지명되는 15석도 반 아수마니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2004년 7월 4년 임기의 연방대통령을 3개 섬에서 윤번제로 선출하는 내용의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2005년 7월 아수마니는 개각을 통해서 측근 인사들을 주요 장관직에 임명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하였다.
아메드 아브달라 모하메드 삼비
2006년 5월 14일 신헌법 채택 후 최초로 실시된 대선에서 아수마니가 권력 이양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우려와는 달리 앙주앙 섬 출신의 이슬람 성직자이자 사업가인 아메드 아브달라 모하메드 삼비(Ahmed Abdallah Mohamed Sambi, 1958~ )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2007년 5월 연방군이 앙주앙 섬에 주둔하는 문제로 앙주앙 자치정부와 연방정부 간의 갈등이 심했으나 아프리카연합(AU)의 중재로 일단 봉합되었다.
모하메드 바카르(Mohamed Bacar)
2007년 6월 앙주앙 자치정부는 연방정부가 정정불안을 이유로 자치정부 대선을 연기한다는 결정을 무시하고 선거를 강행하여 모하메드 바카르(Mohamed Bacar, 1962~ ) 대령이 부정선거로 재집권했다. 아프리카연합(AU)과 중앙정부는 바카르를 비난하면서 민주적인 선거를 촉구했으나 바카르는 이를 무시했다. 바카르는 연방정부와 AU의 퇴진 요구를 거부하고 앙주앙 섬의 독립을 추진했다. 앙주앙 자치정부와 연방정부 간의 갈등은 마침내 극한으로 치달아 바카르 대령의 반군에 대한 연방정부군의 군사작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무사 토이보(Moussa Toybou)
2008년 3월 AU는 앙주앙 섬에 군사개입을 해서 바카르를 축출하였다. 6월 29일 실시된 앙주앙 섬 자치대통령 선거에서 삼비 연방대통령과 친밀한 무사 토이보(Moussa Toybou, 1962~ )가 당선되었다. 토이보가 앙주앙 섬 자치대통령이 되자 분리독립 움직임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킬릴로우 도이니네(Ikililou Dhoinine)
2010년 12월 실시된 대선 결선투표에서 모엘리 섬 출신 이킬릴로우 도이니네(Ikililou Dhoinine, 1962~ ) 부통령이 61%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2011년 1월 코모로 선거관리위원회는 대선 결과를 추인하였고, 도이니네는 5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2016년 2월 대선 1차 선거를 거쳐 5월 11일 대선 3차 선거에서 아잘리 아수마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7년 8월 코모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남아프리카 개발공동체(SADC) 회원국으로 참여하여 장기적인 지역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2018년 4월 프랑스령인 마요트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수천 명의 코모로 시민들이 연이어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마요트 섬에 대한 관할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시사하여 갈등이 지속되었다.
아잘리 아수마니(Azali Assoumani)
아잘리 아수마니는 2030년까지 코모로를 개발도상국으로 올려놓겠다는 비전을 추진하였다. 그는 2018년 7월에는 자신의 임기를 2년 단축하는 대신 윤번제를 2019년부터 10년 간격으로 리셋하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2019년 3월 24일 실시된 대선에서 아잘리 아수마니는 재선에 성공했다. 3월 28일에는 총격사태가 발생해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되는 등 정정 불안이 야기되었다.
정정이 불안해지자 한국 외교부는 코모로에 체류하거나 방문하는 국민의 신변안전을 위해 3월 26일부로 코모로 전 지역에 2단계 여행경보인 황색경보를 발령했다. 외교부의 황색경보 발령은 2019년 3월 24일 실시된 코모로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결과에 따라 시위 등 폭력사태가 발생할 가능성과 정치적 불안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 여타 주요국의 코모로에 대한 여행경보 발령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한 것이다. 코모로 체류자는 신변 안전에 특별히 유의해야 하고, 여행 예정자는 여행 필요성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2020. 3. 10.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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