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바로 알기

동아프리카(East Africa) - 탄자니아(Tanzania)

林 山 2010. 1. 28. 15:33

탄자니아 연합공화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은 동아프리카의 적도 바로 남쪽에 있는 나라다. 1961년에 독립한 탕가니카(Tanganyika)와 1963년에 독립한 잔지바르(Zanzibar)가 1964년에 통합하여 생긴 나라로 보통 탄자니아(Tanzania)라고 부른다. 동쪽으로는 인도양에 면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모잠비크, 남서쪽으로는 말라위와 잠비아, 서쪽으로는 콩고 민주공화국과 부룬디, 르완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쪽은 우간다, 북동쪽은 케냐와 접하고 있다. 


 탄자니아 지도


탄자니아의 국기는 1964년 6월 30일에 탕가니카와 잔지바르 두 나라의 국기를 조합하여 제정되었다. 녹색은 국토, 검정색은 국민, 금색은 나라의 광물 자원, 파랑색은 수많은 강과 호수, 인도양을 상징한다.


탄자니아 국기

 

탄자니아의 인구는 2018년 기준 5,630만 명이다. 면적은 942,849㎢(한반도 약 4.3배)이다. 본토 외에 잔지바르 섬(Zanzibar Island)과 펨바 섬(Pemba Island), 마피아 섬(Mafia Island) 등의 해안 영토를 포함한다. 


탄자니아 정치 수도 도도마(Dodoma)


1974년부터 도도마(Dodoma)는 정치 수도이다. 탄나지나의 의회는 도도마에 있다. 1961년에서 1964년까지 탕가니카의 수도였던 다레살람(Dar es Salaam)은 경제, 행정 수도이다, 다레살람은 탄자니아 최대의 도시이자 항구로 대부분의 정부 청사가 이곳에 있다. 


탄자니아 경제, 행정 수도 다레살람(Dar es Salaam)


탄자니아는 헌법상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 35%, 기독교 30%, 토속종교 35%이다. 잔지바르를 지배했던 오만의 영향으로 주로 수니파인 이슬람교는 잔지바르 섬과 펨바 섬, 본토의 해안지방에 가장 널리 퍼져 있다. 잔지바르 섬과 펨바 섬은 주민의 99%가 무슬림이다. 기독교는 1844년 잔지바르에 들어온 독일 선교사 요한 루드비히 크라프(Johann Ludwig Krapf, 1810~1881)와 요하네스 레프만(Johannes Rebmann, 1820~1876)의 선교에 의해 전해졌다. 크라프는 신약을 스와힐리어로 번역하였다. 현재 토속신앙을 믿는 사람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탄자니아는 각 종족마다 고유 언어가 있으나 대표적인 언어는 반투어군, 나일어군, 쿠시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이다. 반투어는 인구의 과반수가 사용하는데, 반투어 중에서도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스와힐리어는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영어도 공식 언어 가운데 하나다. 해안지방에서 널리 쓰이는 아랍어는 잔지바르 지역의 공용어다. 아시아인이 주로 쓰는 언어는 구자라트어, 힌디어, 펀자브어이다.  


잔지바르(Zanzibar)


탄자니아는 대통령 중심제의 연합공화국-합중국으로 대륙 본토와 잔지바르 인민공화국이 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권력의 균형을 위해 본토에서 연합공화국의 대통령이 선출되면 반드시 잔지바르에서 부통령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잔지바르는 자체 선거로 선출하는 별도의 대통령과 별도의 국기가 있다. 잔지바르 인민공화국 국기는 국기의 좌측 상단에 탄자니아 국기를 합친 것이다. 


잔지바르의 스톤 타운(Stone Town, Mji Mkongwe)은 그룹 퀸(Queen)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출생지이다. 퀸의 많은 팬들이 프레디 머큐리의 흔적을 찾아 스톤 타운으로 오지만, 정작 잔지바르에는 퀸의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이란계 출신이었는데, 잔지바르 혁명 당시 아랍인과 인도인, 페르시아인들 대부분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잔지바르 국기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의회는 단원제이고, 정원은 393석이며 임기는 5년이다. 주요 정당은 탄자니아 혁명당(Chama Cha Mapinduzi, CCM)과 민주진보당(Chama cha Demokrasia na Maendeleo, CHADEMA), 시민연합전선(Civic United Front, CUF) 등이다. 탄자니아 유일 노조인 주와따(Juwata)는 CCM 5대 조직의 하나로 전체 노동자의 4%가 가입되어 있다. 


탄자니아 본토에서는 부족법, 이슬람법, 영국 보통법 등 3종류의 법이 적용된다. 잔지바르 인민법원은 변호사, 배심원, 상급법원에의 상소 등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잔지바르 혁명위원회는 법원의 판결을 심의한다.


탄자니아의 GDP는 2018년 기준 574억 달러, 1인당 GDP는 2,809달러이다. 교역 규모는 2018년 기준 125.5억 달러이다. 수출은 43.8억 달러, 수입은 81.7억 달러이다. 화폐단위는 탄자니아 실링(Tanzanian Shilling, Tsh)이다. 미화 1달러는 2020년 2월 기준 2,309Tsh이다. 

 

탄자니아 국민은 129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대 종족 수쿠마족(Sukuma, 13%)을 비롯해서 하야족(Haya, Wahaya, Ziba, Waziba), 니아큐사족(Nyakyusa), 니암웨지족(Nyamwezi), 차가족(Chaga)은 백만 명이 넘는 종족들이다. 수쿠마족과 니암웨지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탄자니아인들은 반투 계열이며, 마사이족(Masai)과 루오족(Luo, 카비론도족) 등은 닐로트(Nilot) 계열이다. 그외 코이산어족(Khoisan languages)과 아프리카아시아어족(Afroasiatic languages)의 일파인 쿠시어계(Cushitic languages)도 있다. 유럽인, 인도인과 파키스탄인, 고아인 같은 남아시아인, 아랍인 등 비 아프리카인도 인구의 약 1%를 차지한다.

  

탄자니아의 초등교육은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초등학교의 교수 언어는 스와힐리어이고, 중등학교 이상에서는 영어로 수업이 이루어진다. 2003년 현재 취학아동의 초등학교 진학률은 88.5%, 중등학교 진학수는 35만 명으로 인구의 10%에 불과하다. 1961년에는 다레살람대학교(University of Dar es Salaam), 1984년 7월에는 제2대학인 소코인(Sokoine) 농업대학이 설립되었다.  

 

탄자니아는 정부가 직접 신문을 발행하는 등 언론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주요 일간지는 CCM 기관지인 우후루(Uhuru, 스와힐리어, 예전의 Nationalist 지)와 키팡가(Kipanga), 정부기관지인 데일리 뉴스(Daily News, 영어, 예전의 Standard지)를 비롯해서 더 가디언(The Guardian, 영어), 데일리 메일(Daily Mail, 영어), 디 아프리칸(The African, 영어) 등 10여 개가 있다. 주간지는 CCM 기관지인 음잘렌도Mzalendo, 스와힐리어)와 노조 조와따(Juwata) 기관지인 음파니야카지(Mfanyakazi)를 비롯해서 선데이 뉴스(Sunday News, 영어), 비즈니스 타임즈(Business Times, 영어), 디 익스프레스(The Express, 영어), 더 미러(The Mirror, 영어), 옵저버(Observer, 영어) 등이 있다. 

 

탄자니아의 방송국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두 개의 라디오 방송국 RTD(Radio Tanzania Dar es Salaam)와 RTZ(Radio Tanzania Zanzibar)는 모두 국영이다. TVT는 국영 TV 방송국이다. ITV(Independent Television Network)와 ITV 2는 탄자니아 최대의 민영 TV 방송국이다. DTV(Dar es Salaam Television Network)와 채널(Channel) 10, CTN(Coastal Television Network), C2C, CEN도 본토에 있는 민간 TV 방송국이다. ZTV(Zanzibar Television Network)는 잔지바르에서 운영하며 대부분 스와힐리어로 방송한다. 

 

한국과 탄자니아는 1992년 4월 30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해 10월 21일 주탄자니아 한국대사관을 설치했다. 탄자니아는 2018년 1월 31일 주한 탄자니아대사관을 개설했다. 한국-탄자니아는 투자보장협정(1998.12.18),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1998.12.18), 문화협정(1998.12.18) 등을 맺었다. 


한국-탄자니아의 교역량은 2019년 기준 1억 7,500만 달러이다. 수출액은 1억 3,802만 달러이다. 수출품은 주로 중고의류, 경유, 석유화학 제품, 섬유 제품 등이다. 수입액은 3,670만 달러이다. 주로 잎담배, 미정제 동괴, 커피 등을 수입한다. 탄자니에는 2018년 6월 기준 약 700명의 한국 교민이 체류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한국보다 훨씬 빠른 1965년부터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상주공관을 설치하였으며, 상호 고위인사의 방문 등 긴밀한 협조체계를 유지해왔다. 이후 1965년 6월 통상협정, 1966년 7월 과학 및 문화 협조협정, 1984년 6월 체신협조협정을 각각 체결했다. 북한은 탄자니아에 기계와 곡물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킬리만자로 산(Mount Kilimanjaro) 우후루 피크(Uhuru peak)

 

탄자니아의 북동부는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산(Mount Kilimanjaro, 5,895m)이 솟아 있는 산악고원지대이다. 킬리만자로의 뜻은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혹은 하얀 산이다. 세 개의 산봉우리 중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우후루 피크(Uhuru peak), 또는 키보 피크(Kibo peak)라고 부른다. 킬리만자로 정상부에는 만년설이 존재한다.


마웬시 봉(Mawensi peak)


파레 산맥(Pare Mountains)


키보 봉 중앙에는 분화구가 있다. 키보 봉에서 안부(鞍部)를 따라 11km 떨어진 곳에는 이보다 오래된 마웬시 봉(Mawensi peak, 5,254m)이 있다. 옛 분화구의 잔해인 시라 봉(Shira peak, 3,778m)은 지금 산마루로 변했다. 키보 봉의 정상은 눈에 덮인 둥근 지붕처럼 보이지만 분화구에는 너비 1.9km, 최고수심 300m의 칼데라 호가 있다. 키보 봉 분화구 안에는 얼음덩어리가 따로 떨어져 녹지 않은 채 남아 있고, 서쪽 가장자리에는 빙하가 있다. 킬리만자로 산에서 이어지는 파레 산맥(Pare Mountains)은 남동쪽 해안으로 뻗어가면서 케냐와 국경을 이룬다. 


올 도이뇨 렝가이 산(Mount Ol Doinyo Lengai)


킬리만자로 산 서쪽, 나트론 호(Lake Natron) 남쪽에 있는 올 도이뇨 렝가이 산(Mount Ol Doinyo Lengai, 2,962m)은 유일한 활화산이다. 올도이뇨렝가이는 마사이어로 신의 산이란 뜻이다.  이 화산은 동아프리카 열곡대의 화산체 중 하나이며, 성층화산에 속한다. 최근의 대형 분화는 2007년에 있었다. 올도이뇨렝가이 산을 올라가는 데는 6시간 정도 걸린다.


나트론 호(Lake Natron)


플라밍고 서식지로 유명한 나트론 호는 탄자니아 북부 아루샤 주에 있는 염호이자 소다호이다. 케냐와의 국경 근처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동쪽 지류인 그레고리 지구대 안에 있다. 그레고리 지구대 안 나트론 호 주위 일대를 나트론 분지라고 한다. 이곳은 람사르 협약에 의해 보호받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이다 


응고롱고로 분화구(Ngorongoro Crater)


탄자니아 북부에는 '달의 분화구'로 유명한 응고롱고로 분화구(Ngorongoro Crater)가 있다. 아프리카의 주요 보전지구 중 하나인 응고롱고로 국립공원(Ngorongoro National Park)의 중심지인 응고롱고로 분화구는 초대형 화산 분화구로, 칼데라 지형이다. 칼데라 지름은 20km이상이다. 지금은 사화산 이다. 화구 중앙의 화구호에는 사자, 물소, 치타 등 많은 아프리카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Serengeti National Park)


북부에는 또 아프리카 대륙에서 육상동물의 대대적인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유일한 곳인 세렝게티 국립공원(Serengeti National Park)이 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은 1백만 마리가 넘는 누와 20만 마리가 넘는 얼룩말의 연례 대이주로 유명하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이다. 


탄자니아  빅토리아 호(Victoria Lake)


북서쪽에는 아프리카 최대의 호수인 빅토리아 호(Victoria Lake)가 있다. 유럽인들 중 이 호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1858년 나일 강의 원류를 찾던 영국탐험가 존 해닝 스피크였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을 기리기 위해 호수 이름을 빅토리아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아프리카에서는 이 호수를 니안자 호(Nyanza Lake)로 부르고 있었다.


탕가니카 호(Lake Tanganyika)


곰베 국립공원(Gombe National Park)

 

탄자니아의 중부지방에는 넓은 평원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서부에는 러시아의 바이칼 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깊은 호수인 탕가니카 호(Lake Tanganyika, 수심 1,410m)가 있다. 탕가니카 호는 세계 최대의 지구대인 동아프리카지구대의 일부를 이룬다. 서쪽에 있는 곰베 국립공원(Gombe National Park)은 제인 구달(Dame Jane Goodall, 1934~)의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곳이다. 


울루구루 산맥(Uluguru Mountains)


음베야 산맥(Mbeya Mountains)


동부 해안지대는 덥고 습하다. 동부의 다레살람에서 서쪽으로 약 190km 떨어진 곳에는 울루구루 산맥(Uluguru Mountains)이 있다. 남서부는 우피파 고원과 음베야 산맥(Mbeya Mountains), 룽궤 산맥(Rungwe Mountains) 등이 고원지대를 이루고 있다. 


올두바이 협곡(The Olduvai Gorge)


올두바이 협곡(The Olduvai Gorge)은 인류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이 협곡에서 800만 년~50만 년 전 출현한 화석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의 화석을 비롯한 초기 인류의 화석이 출토되었다. 참고로 최초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이 발견된 곳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올두바이 협곡에는 선캄브리아대부터 구석기 시대까지 각 시대별 화석과 퇴적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지구의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니아사 호(Lake Nyasa)


남부에 있는 니아사 호(Lake Nyasa)는 동아프리카지구대의 남쪽 끝을 이룬다. 니아사 호를 말라위 호(Lake Malawi)라고도 부른다, 호수 대부분이 말라위의 깊은 지구(地溝)에 자리잡고 있다. 호수의 중앙선과 북동쪽 연안선이 말라위와 탄자니아, 말라위와 모잠비크 경계선의 상당부분을 이룬다. 


니아사 호 주변에는 키펭게레 산(Mount Kipengere)과 리빙스턴 산(Mount Livingstone)이 솟아 있다. 니아사 호의 북쪽에서 동아프리카지구대는 서쪽 지구와 동쪽 지구로 갈라지는데, 킬리만자로에서 남동쪽으로 인도양까지 뻗어 있는 팡가니 계곡(Pangani valley)과 말라가라시-무요보지 소택지(Malagarasi-Muyovozi Wetlands) 등은 이로 인해 생긴 지형이다. 


루피지 강(Rufiji River)


마피아 섬(Mafia Island, Chole Shamba)

 

아프리카의 3개 강인 나일 강, 콩고 강, 잠베지 강은 모두 탄자니아에서 발원한다. 탄자니아 최대의 하천은 남부에서 발원하여 북동쪽과 동쪽으로 흐르다가 마피아 섬의 맞은 편에서 인도양으로 흘러드는 루피지 강(Rufiji River)이다. 마피아 섬은 웅구자 섬(Unguja Island), 펨바 섬과 함께 잔지바르 제도를 구성하는 섬이다. 마피아 섬은 잔지바르 혁명 정부의 자치령인 다른 두 섬과는 달리 탄자니아 본토에 위치한 프와니 주에 속한다. 루피지 강으로는 킬롬베로 강(Kilombero River)과 루웨구 강(Luwegu River)이 합류한다. 루피지 강의 주요 지류에는 그레이트 루아하 강(Great Ruaha River)이 있다.

 

탄자니아의 기후는 적도기후로 고온다습한 열대우림 기후를 보인다. 해안지역은 평균 26.6℃의 기온과 높은 습도를 보이며, 연강수량은 1000∼1900㎜이다. 고온건조한 중앙고원의 연강수량은 500∼750㎜이다. 빅토리아 호 일대는 750∼2,250㎜의 비가 내린다. 


카타비 국립공원(Katavi National Park)


루아하 국립공원(Ruaha National Park)

 

탄자니아는 전국토의 30% 이상이 일명 미옴보(Miombo)라고 하는 삼림지대이다. 탄자니아에는 세렝게티, 응고롱고로, 곰베 국립공원을 비롯해서 카타비 국립공원(Katavi National Park), 루아하 국립공원(Ruaha National Park), 아루샤 국립공원(Arusha National Park), 타랑기르 국립공원(Tarangire National Park) 등의 국립공원과 무요보지, 키지고 등의 금렵구역이 있다. 


아루샤 국립공원(Arusha National Park)


탄자니아 국립공원의 면적은 약 23,500㎢에 달하는데, 그중 세렝게티 국립공원이 가장 방대한 규모(약 14,600㎢)를 자랑한다. 이곳에 서식하는 야생동물로는 코끼리, 코뿔소, 물소, 사자, 표범, 얼룩말, 기린 등을 비롯해서 일런드, 쿠두, 디크딕, 누 등 다양한 영양류가 있다.


타랑기르 국립공원(Tarangire National Park)

 

동아프리카에 살던 토착 부족은 수렵채집 사회 부족이자 고립어계의 하자족과 산다웨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탄자니아 최초의 타민족 유입은 BC 1000∼1년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남쪽으로 건너온 남부 쿠시인으로 추정되는 카프카스 인종의 사람들이 북부에 거주하면서 점차 남부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언어학적으로 이들의 언어는 이라크어, 고로와어, 부룬게어의 조상들로 추정된다. 


약 4000년~2000년 전에는 투르카나 호 북쪽에서부터 동부 쿠시인들도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약 2900년~2400년 전에는 남부 나일어계 종족들이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및 남수단 지역에서 중북부 탄자니아 지방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AD 1∼1000년 전반에는 빅토리아 호와 탕가니카 호에서 건너온 철기를 사용하는 소수의 부족과 반투어계 종족들이 서아프리카를 떠나 탄자니아에 정착했다. 이들은 서아프리카의 농업 양식과 주식인 얌을 전파시켰다. 마사이족을 포함한 동부 나일어계 종족들은 오늘날의 남수단 지역에서 500~1500년 전에 들어왔다.


1세기 말부터 페르시아 만과 인도, 아라비아 지역에서 온 여행가들과 상인들은 동아프리카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10세기 무렵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동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랍 지역과 동아프리카 사이에 무역이 행해지면서 아랍인들이 해안의 무역 중심지에 정착하였다. 14세기 경 아랍인과 동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의 통혼으로 아랍인 이민자들이 점차 원주민들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슬람교가 탄자니아에 전해졌다. 


15세기 말 포르투갈인들이 해안지방에 들어온 뒤 아랍인들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동아프리카를 점령했다. 1652년 포르투갈 제국령 몸바사는 포르투갈에 대항하기 위해 오만(Oman)에 지원을 요청했다. 오만은 동아프리카에 군대를 보내 몸바사 저항 세력을 지원했다. 1698년 오만과 몸바사 연합군에게 축출된 포르투갈은 잔지바르를 점령하여 영향력을 쌓은 뒤 약 100여년 뒤부터 동아프리카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 아랍인과 오만 술탄(Sultan)의 동맹으로 포르투갈인들은 루부마 강(Ruvuma River) 이북의 소유지를 상실했다. 오만의 술탄 사이드 빈은 수도를 잔지바르로 옮겼다. 아랍의 무역상들은 노예무역을 위해 니아사 호를 향한 남서쪽 경로를 따라 내륙으로 침투했다. 1825년경부터 아랍인들은 상아를 찾아서 니암웨지(Nyamwezi)로 들어갔으며, 1840년대 초에는 니암웨지로부터 탕가니카 호까지 진출하여 교역소를 설치하였다.

 

1840년대말 독일인 요한 루드비히 크라프와 요하네스 레프만이 영국 국교회 선교회의 대표로 탕가니카에 왔다가 킬리만자로 산을 발견하였다. 1856년에 잔지바르 섬은 오만의 술탄령이 되었고, 탄자니아는 잔지바르 왕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1885년 경 독일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탕가니카에 들어왔다. 


1890년에 잔지바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07년 경 탕가니카는 완전히 독일의 지배 하에 들어가 1916년까지 독일의 보호령으로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은 탕가니카를 점령했다. 1919년부터 영국은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


1954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 1922~1999)는 사회주의 농업에 의한 경제발전과 120개 이상의 종족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이념에 따라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동맹(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 TANU)을 창립하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1960년 니에레레는 영국령 탕가니카의 장관이 되었다. 1961년까지 영국은 탕가니카를 국제연합(UN)의 신탁통치령으로 계속 식민지배했다.


셰이크 아베이드 아마니 카루메

 

1961년 12월 9일 탕가니카는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UN에도 가입했으며, 니에레레는 독립 탕가니카의 총리가 되었다. 독립 이후에도 탕가니카는 영연방국으로 남았다. 1962년 출범한 탕가니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니에레레는 우자마(Ujamaa)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우자마  운동은 아프리카적인 맑스주의 운동이었다. 1963년 12월 10일 잔지바르 술탄령은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여 유엔에 가입했다. 1964년 1월 12일 잔지바르에서 선원 출신 셰이크 아베이드 아마니 카루메(Sheikh Abeid Amani Karume, 1905~1972)가 주도한 시민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오만계 술탄 군주제가 와해되었다.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은 학살을 피해 잔지바르를 탈출하였다. 카루메는 잔지바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4년 4월 26일 탕가니카 공화국과 잔지바르 공화국은 하나로 합병되었으며, 10월에는 국명을 탄자니아 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같은 해 탄자니아는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1965년 9월 21일 실시된 총선에서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합병국 대통령, 잔지바르의 아프로 쉬라지당(Afro-Shirazi Party, ASP) 지도자 아베이드 카루메가 제1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5년 9월 30일에는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67년 니에레레는 인종 평등주의와 자유를 주내용으로 한 아루샤(Arusha) 선언을 통해 주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니에레레가 도입한 우자마 운동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집단농장제의 실패로 경제가 파탄나면서 탄자니아인들은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니에레레는 소코인(E.M. Sokoine)을 수상에 임명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는 등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해 탄자니아는 케냐, 우간다와 함께 동아프리카 공동체의 창설을 주도했다.

 

1977년 탄자니아는 잔지바르의 자치를 보장하는 신헌법을 제정하고, 본토의 아프리카 민족동맹(TANU)과 잔지바르의 아프로 쉬라지당(ASP)이 합당하여 만들어진 혁명당(Chama Cha Mapinduzi, Party of the Revolution, CCM)을 유일 합법정당으로 하는 일당독재 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정치적 기반이 더욱 확고해진 니에레레는 사회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니에레레 집권 하의 탄자니아는 비동맹중립, 범아프리카주의, 공산국가와의 친밀한 관계 유지, 서방측과의 관계 향상을 통한 원조 획득 등을 특징으로 한 좌경중립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1978년 말 우간다 대통령 이디 아민은 내정의 실패로 여론이 악화되자 국민들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탄자니아 북부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9년 탄자니아는 우간다를 침공하여 독재자 이디 아민을 축출하였다. 1979년 11월에는 잔지바르에서 별도의 자치헌법이 제정되었다.  

 

1980년 10월 26일 실시된 총선에서 니에레레는 탄자니아의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2년 조직을 정비한 CCM은 니에레레를 총재로 추대하였다. 1984년 4월 알리 하산 음위니(Ali Hassan Mwinyi, 1925~)가 잔지바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제한하고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헌법이 개정되었다. 그러나 1984년 잔지바르에서 발생한 소요사태 이후 잔지바르 대통령이 사임하는 등 잔지바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인종적 종교적 대립이 지속되었다. 1985년 1월 잔지바르에서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알리 하산 음위니(Ali Hassan Mwinyi)

 

1985년 8월 잔지바르 출신의 알리 하산 음위니(Ali Hassan Mwinyi, 1925~ )는 5년 임기의 탄자니아 제6대 대통령, 10월에는 이드리스 압둘 와킬(Idris Abdul Wakil, 1925~2000)이 잔지바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니에레레는 1987년 11월 집권 CCM 총재에 다시 당선되어 사회주의 노선 고수를 선언하였다. 그는 여전히 탄자니아의 실권자이자 섭정자였다. 음위니는 니에레레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어 농촌을 지지세력으로 한 경제개혁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기반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음위니가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자 서방국가들은 탄자니아에 막대한 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이드리스 압둘 와킬(Idris Abdul Wakil)


공공분야를 독점하고 있던 CCM 내 보수파들은 경제개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분배의 불평등 문제를 구실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오히려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음위니식의 개혁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하였다. 1989년 1월 압둘 와킬 잔지바르 대통령이 하마드(Hamad) 장관을 해임하면서 잔지바르의 정정 불안사태가 야기되었다. 잔지바르 사태로 출신 지역을 둘러싼 권력암투가 재연되었다. 음위니는 잔지바르 출신이었지만 보수파 대부분은 본토 출신이었다. 권력 암투에서 입지가 강화된 보수강경파는 이후 음위니의 개혁노선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1990년 2월 CCM 총재 니에레레는 다당제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발표하였다. 3월 음위니 대통령은 과감한 경제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전면 개각을 시도했다. 그러나 니에레레의 견제로 역량있는 새로운 인물의 등용은 실패로 돌아가고, 니에레레 측근 인사의 경제각료 일부만 교체되었다. 8월 음위니가 CCM 총재로 선출된 후 실시된 총선에서 CCM은 241석을 차지하였다. 


살민 아무르(Salmin Amour)


1990년 10월 28일 CCM의 후보 음위니는 탄자니아 제7대 대통령, 살민 아무르(Salmin Amour, 1948~ )는 잔지바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음위니는 1985년 이래 수상직에 있었던 조셉 신데 와리오바(Joseph Sinde Warioba, 1940~ )를 해임하고 존 사무엘 말레셀라(John Samuel Malecela, 1934~ )를 그 자리에 임명하여 부정부패 척결과 다당제 도입, 경제개방 정책 등을 추진하였다.

 

세계적인 민주화 추세로 1992년 5월 탄자니아에서도 다당제 도입을 위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30년 간 지속된 일당독재가 폐지되고 7월부터 재야정당의 등록이 허용되었다. 1992년 10월 잔지바르 정부는 연방정부의 승인없이 세계회교국연합(OIC, Organization of Islamic Countries)에 가입하여 의회에서 논란이 야기되자 외무장관이 해임되고 OIC 가입이 취소되었다. 1992년 12월 3권의 분리와 견제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는 대신 의회에 대통령 탄핵소추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잔지바르 대통령이 당연직으로 탄자니아의 제2부통령이 되도록 한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본토와 잔지바르의 갈등이 재연되어 연방 결속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같은 달 음위니는 또 다시 CCM 총재로 선출되었다.

 

1993년 4월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정육점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8월에는 국회의원 55명 발의로 '탕가니카 별도 정부 수립 가능성 검토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니에레레는 이 사태를 두고 연방분열 획책이라고 비판하면서 수상과 CCM 사무총장의 퇴진을 요구하자 별도 정부 수립 논의는 중단되었다. 1994년 10월 잔지바르 음웬도(Mwendo)에서 카톨릭 성당이 방화로 인해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종교 갈등이 재연되었다. 이후 잔지바르의 카톨릭 성당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고, 루터 교회에 대한 방화 기도, 다레살람 거주 이슬람교도들의 타종교 비난 시위 등 이슬람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벤자민 윌리엄 음카파(Benjamin William Mkapa)

 

1995년 10월 일당독재가 폐지된 후 최초로 다당제 하에 실시된 대선에서 본토 출신 CCM 후보 벤자민 윌리엄 음카파(Benjamin William Mkapa, 1938~ )가 탄자니아 제8대 대통령, 연방정부 제2부통령인 아무르도 CCM의 후보로 잔지바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총선에서는 집권 여당 CCM이 186석을 차지함으로서 안정 의석을 확보했다. 


1996년 1월 음파카는 전 수상 와리오바를 위원장으로 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부정부패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1996년 3월에는 탄자니아와 우간다, 케냐 등 동부아프리카협력체(East African Cooperation, EAC)가 재출범하였다. 1996년 6월 CCM은 임기 전에 사임한 음위니 대신 음카파 대통령을 총재로 선출하였다. 1997년 10월 CCM 전당대회에서 음카파는 또 다시 총재로 선출됨으로써 당과 행정부를 장악하였다. 같은 달 13개 야당 대표들은 1985년 시장경제로 전환한 이후 현실과 동떨어진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헌법개정위원회를 설립했다. 1998년 7월 CCM은 헌법개정에 관한 백서(White Paper)를 발간하고 헌법 개정 국면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아마니 아베이드 카루메(Amani Abeid Karume)

 

2000년 8월 실시된 잔지바르 대선에서는 CCM의 후보로 나선 셰이크 카루메의 아들 아마니 아베이드 카루메(Amani Abeid Karume, 1948~)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실시된 탄자니아 대선에서는 CCM의 음카파가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다시 집권하였다. 2001년 1월 26일~27일 잔지바르와 펨바 섬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한 제1야당 시민연합전선(CUF, Civic United Front)의 주도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 군경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다. 군경의 진압을 피해 케냐와 에티오피아로 탈출하는 CUF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이 대량으로 속출하여 탄자니아의 독립 이후 최대의 정치 위기가 발생하였다. 


펨바 섬(Pemba Island)


2001년 10월 10일 CCM과 CUF는 정치화해를 위한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민화합을 이루기로 합의하였다. 화해협정의 이행조치로 '잔지바르, 펨바 유혈폭동진압살상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조사위원장은음비타(Mbita) 예비역 중장이 맡았다. 2002년 3월 음비타 위원장은 진상보고서를 작성하여 정부측의 피해자 보상과 해외 탈출 시위 가담자의 귀국 보장 등 치유책을 발표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2002년 10월 집권 여당 CCM은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중앙위원회와 전국집행위원회의 표결을 거쳐 2005년 10월로 예정된 대선 후보군을 선출했다. 2003년 3월 12개 군소 야당들은 무지개당 야당연대(UMOJA=Unity)를 결성하였으나, 제1야당인 CUF와 제2야당인 탄자니아노동당(Tanzania Labour Party, TLP)은 독자노선을 선택하고 야당연대에 불참하였다. 2003년 4월 CCM과 CUF는 부정선거로 인한 폭동으로 선거사고가 발생한 잔지바르 섬과 펨바 섬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보궐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2003년 5월 실시된 잔지바르 섬과 펨바 섬에서 실시된 연방의회 의원(17석)과 잔지바르 의회 의원(15석)에 대한 보궐선거에서 CUF는 연방의원 11석, 잔지바르 의회 의원 15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2003년 8월 9개 군소 야당대표는 2005년 실시 예정인 총선에서 단일후보를 선출하기로 합의했으나, CUF와 TLP 등 6개 유력 야당은 선거연합에 불참하였다. 2004년 12월 26일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인 인도양 지진해일의 영향으로 진원지인 수마트라 서안을 포함한 인도양 연안 국가에서 약 22만 명이 사망하였다. 탄자니아에서도 이 쓰나미의 여파로 11명이 사망하였다.


자카야 음리쇼 키크웨테(Jakaya Mrisho Kikwete)

 

2005년 10월 30일 CCM과 CUF 지지자들 사이의 충돌 속에서 잔지바르의 대선과 총선이 실시되었다. 대선에서는 CCM의 아마니 카루메가 CUF의 세이프 샤리프 하마드(Seif Sharif Hamad, 1943~ )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다시 집권하였다. 총선에서는 CCM이 30석, CUF가 19석을 차지하여 CCM이 우위를 지켰다. 본토 선거는 민주진보당(CHADEMA, Chama cha Demokrasia na Maendeleo, Party for Democracy and Progress) 부통령 후보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연기되었다. 2005년 12월 실시된 탄자니아 대선과 총선에서는 CCM 후보 자카야 음리쇼 키크웨테(Jakaya Mrisho Kikwete, 1950~)가 5년 임기의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잔지바르는 2005년 11월 2일 아마니 카루메 대통령 취임식 일정을 앞당겨 거행함으로써 점차 안정을 회복했다. 탄자니아는 2005년 12월 21일 키크웨테 대통령 취임 이후 지속적인 해외원조에 의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부정부패 척결과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그러나 전현직 대통령과 총리, 장차관, 중앙은행 총재 등이 연루된 집권층의 뿌리깊은 부정부패, 본토인-잔지바르인들 사이의 공직 참여기회의 불균형과 경제적 격차, 이슬람교와 기독교 간 종교적 갈등은 탄자니아 정국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상존했다. 


2010년 10월 실시된 대선에서 자카야 키크웨테는 재선에 성공했다. 총선에서도 집권 여당인 CCM이 다수당이 되었다. 2012년부터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종교 갈등이 간헐적으로 발생했지만 대체로 종교 간 평화가 유지되어 왔다. 2014년 2월 헌법 개정을 위한 제헌의회가 개회되어 헌법 개정안을 논의했다. 


존 마구풀리(John Magufuli)


발 터치로 악수를 대신하는 존 마구풀리


2015년 10월 실시된 대선에서는 존 마구풀리(John Magufuli, 1959~ )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구풀리는 취임 이후 공공부문 개혁, 부정부패 척결, 예산 절약 및 세수 확대 등 국내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마구풀리는 코비드-19(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자 야당 지도부를 만날 때 악수를 하는 대신 발을 서로 툭 치는 식으로 악수를 대신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20. 3. 9.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