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공화국(Republic of Kenya)은 인도양에 면한 국가로 중부 아프리카의 동해안에서 적도에 걸쳐 있다. 북쪽으로는 에티오피아와 수단, 동쪽으로는 소말리아, 남쪽으로는 탄자니아, 서쪽으로는 우간다와 국경을 접한다. 나라 이름은 국내 최고봉이며, 아프리카에서 킬리만자로 산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케냐 산(Mlima Kenya, Mount Kenya, 5,199m)에서 따온것이다.
케냐 지도
케냐의 국기는 1963년 12월 12일 독립과 동시에 제정되었다. 국기의 디자인은 케냐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정치 단체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의 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케냐 국기
검정색, 빨강색, 초록색 가로 줄무늬 사이에 얇은 하얀색 가로 줄무늬 2개가 그려져 있으며, 국기 가운데에는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이 그려져 있다. 검정색은 흑인, 빨간색은 피, 녹색은 자연을 상징하는 범아프리카색이다. 흰색은 평화를 뜻하며,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은 자유의 수호를 나타낸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Nairobi)
국토 면적은 58만㎢, 한반도의 약 2.7배다. 인구는 2019년 기준 약 5,140만 명이다. 케냐에는 언어와 문화로 구별되는 약 42개의 종족이 있다. 민족 구성은 키쿠유족(Kikuyu) 22%, 루히야족(Luhya) 14%, 루오족(Luo) 13%, 칼렌진족(Kalenjin) 12%, 캄바족(Kamba) 11%, 키시족(Kisii) 6%, 메루족(Meru) 6%, 기타 아프리카계 15%, 비아프리카계(남아시아인, 영국인, 아랍인) 1%이다. 종교는 기독교 80%, 이슬람 10%, 기타 10%이다.
케냐의 주요 종족과 소수 부족은 3대 언어군인 반투어, 나일어, 쿠시어를 사용한다. 케냐는 1974년 스와힐리어를 국민어(national language)로 선포하기는 했지만, 국가어(state language) 곧 국어를 정하지는 않았다. 1998년 헌법에 따르면 의회의 공용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이다. 케냐는 영국 연방 회원국이다.
수도는 나이로비(Nairobi)이다. 나이로비 시내에는 다양한 등급의 호텔이 많으며, 관광지로는 코끼리 고아원과 기린 센터, 여러 부족들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보마스 오브 케냐(Bomas of Kenya) 등이 있다. 나이로비에는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과 근거리 노선을 운영하는 윌슨 공항이 있다. 수도라고는 하지만 치안이 상당히 불안하다. 가이드 없이 도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해가 진 이후에는 숙소에만 머물러야 한다.
나이바샤 국립공원(Lake Naivasha National Park)
나이로비에서 차량으로 1시간~1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는 나이바샤 국립공원(Lake Naivasha National Park)이 있다. 홍학으로 유명한 나쿠루 국립공원(Lake Nakuru National Park)도 가볼 만한 곳이다. 사파리도 가능하다. 하마가 보인다고 가까이 다가가면 매우 위험하다. 하마는 굉장히 위험한 동물이다.
인도양의 산호섬에 있는 몸바사(Mombasa)
인도양의 산호섬에 있는 몸바사(Mombasa)는 케냐 최대의 항구도시다. 뭄바사는 포트 지저스(Fort Jesus)와 더불어 올드 타운이 유명하다. 예수 요새라고도 불리는 포트 지저스는 16세기 포르투칼인들이 몸바사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기지이다. 이름은 요새가 예수의 형상과 닮은 데서 유래했다. 포트 지저스는 201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몸바사 남쪽에는 아름다운 휴양지 디아니 해변(Diani beach)이 있다. 디아니 해변에서는 여러 가지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라이키피아 고원(Laikipia plateau)
케냐는 크게 5개 지역으로 나뉜다. 빅토리아 호(Victoria Lake)에서부터 동쪽으로 마우 단애(斷崖, Mau Escarpmen)까지 펼쳐져 있는 남서쪽 분지는 평균 해발고도 1,070m의 평평한 고원이다. 케냐의 서반부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고원지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에 의해 서쪽의 마우 단애와 동쪽의 애버데어 산맥(Aberdare Range, 최고봉 4,000m)으로 나뉘어진다. 탄자니아 국경으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중서부 국경까지 320km에 이르는 마우 단애는 해발 2,740m 이상의 고원지대이며, 나이로비 근처에서 북쪽으로 라이키피아 고원(Laikipia plateau)까지 뻗어간 애버데어 산맥은 거의 3,050m에 이르는 고원지대이다.
케냐 산(Mlima Kenya, Mount Kenya, 5,199m)
케냐 최고봉인 케냐 산은 애버데어 산맥의 외곽을 이룬다. 케냐 산에는 바티안 봉(Batian peak, 5,199m), 넬리온 봉(Nelion peak, 5,188m), 레나나 봉(Lenana peak, 4,985m) 등 고봉들이 솟아 있다. 적도 부근에 있는 산으로는 드물게 케냐 산 정상부에는 만년설과 빙하로 덮여 있었으나, 지난 100년 사이에 92%가 사라졌다. 케냐의 동반부에서는 동부 고원지대와 해안지대 사이에 광대한 니이카 평원이 펼쳐져 있다. 케냐의 북부는 대부분 반건조 또는 건조지대다. 해안지대는 인도양 연안을 따라 약 400km에 걸쳐 뻗어 있다.
타나 강(Tana River)
케냐의 가장 중요한 강인 타나 강(Tana River)은 애버대어 산맥 및 케냐 산의 발원지로부터 708㎞를 흘러 인도양으로 유입된다. 타나 강은 북동쪽으로 흘러 낙차 134m의 키타루 폭포를 거쳐 반사막지대로 흘러간다. 반사막지대에서 커다란 호를 그린 다음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넓은 계곡으로 흐른 뒤 홍수가 잦은 범람원을 굽이쳐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키피니에서 인도양의 포르모사 만으로 흘러든다. 상류의 사수무아 댐은 나이로비에 물을 공급한다. 키타루 폭포의 한 갈래인 킨다루마에는 수력발전소가 있다. 중류 일대의 우거진 숲에는 포코모족(Pokomo)이 자급농업을 하며 산다.
국토가 적도에 걸쳐 있어 해안은 무더운 열대성 기후이며, 내륙의 고원지대는 건조한 기후이다. 해안과 인접한 내륙지방의 연평균 기온은 약 27℃이다. 케냐의 북부지방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지만, 남부지방에는 물이 풍부하다. 케냐에는 3월 말~5월까지의 대우기와 10월~12월까지의 소우기 등 두 차례 우기가 있다. 케냐는 야생동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야생동물은 사자, 표범, 들개, 코끼리, 물소, 코뿔소, 얼룩말, 앤틸로프, 가젤, 영양, 하마, 악어 등이다.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2백만 년 전 케냐에는 이미 인류의 조상이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르카나 호(Lake Turkana, Lake Rudolf) 근처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같은 260만 년 전의 호미니드인(hominid) 화석이 발견되었다.
BC 500~AD 500년경 아프리카 대륙 각지에서 이동한 부족이 케냐에 정착했다. 케냐 최초의 역사 기록은 수세기 동안 남부 아라비아와 교역 관계를 맺은 해안선에 관한 것이다. 14세기경 동부 해안지대에에는 아랍계 스와힐리 공동체(Swahile Community)가 정착했다.
몸바사에 있는 포트 지저스(Fort of Jesus)
1498년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케냐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593~1698년까지 포르투갈이 몸바사를 점령하여 포트 지저스(Fort of Jesus)를 건설했다. 그러나 케냐 내륙은 19세기 전까지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사이족이 북쪽으로부터 케냐의 중부로 들어온 것은 18세기로 추정된다. 18~19세기 오만 제국은 동아프리카 연안지대를 지배하면서 노예무역을 하였다.
빅토리아 호
19세기 아랍계 스와힐리어 사용자들로 구성된 대상이 상아를 찾아 몸바사에서 빅토리아 호(Victoria Lake)를 지나 엘곤 산(Mount Elgon)까지 나아갔다. 이 무역로는 타루 평원의 사막을 횡단하기 어려운데다가 호전적인 마사이족으로 인해 남쪽의 대상로보다 인기가 없었다.
엘곤 산
1830년경 탄자니아의 헤헤족(Hehe=Wahehe)이 마사이족의 남진을 저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포트홀 지역에 거주하던 대종족인 키쿠유족(Kikuyu)이 그들 영토로부터 북쪽과 서쪽,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까지 키쿠유족은 북쪽과 남쪽으로 마사이족의 영토, 서쪽으로는 애버데어 산맥에까지 이르렀다.
애버데어 산맥
1885년 독일은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케냐 내륙으로 침투한 최초의 유럽인은 독일의 기독교 전도회 선교사들이었다. 독일 선교사들은 라바이(Rabai)에 전도본부를 설치하였다. 1888년에는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이 지역에 들어와 무역을 독점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이 지역은 독일인과 영국인들이 점령했다. 이 지역은 마사이족이 약탈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지배하지는 못했던 곳이다.
라바이 세인트 폴 교회
1890년 영국과 독일은 동아프리카의 분할점령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영국은 케냐와 우간다, 독일은 탕가니카 지역을 점령했다. 1895년부터 케냐는 영국의 보호령(British East Africa)이 되었으며, 유럽인들은 고지대에 정착했다. 1899년 영국은 우간다 철도회사 본사를 몸바사에서 나이로비로 이전하였다. 1906년에는 유럽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식민지 의회(Legislative Council)가 구성되었다.
1914년 세계 제1차대전 발발전까지 영국은 케냐 내륙 개척에 대한 현지 부족의 반발을 제압하였다. 1920년 케냐는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으며, 동아프리카 회사가 이 지역의 상권을 장악했다. 1920년부터 아프리카인들의 각종 정치사회단체가 결성되었고, 케냐 최대부족인 키쿠유족이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1944년 5월 영국이 케냐 국민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면서 식민지 의회에 최초의 케냐인이 진출하였다. 1946년에는 키쿠유족 출신의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본명 Kamau Ngengi 1894~1978)는 케냐 아프리카 연맹(KAU, Kenya Africa Union)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나이로비에 본부를 둔 동아프리카 고등위원회가 구성되어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 식민지 사업을 관리하였다. 케냐 총독이 위원장을 맡은 이 위원회는 세 식민지의 총독으로 구성되었다.
조모 케냐타
1948년부터 키쿠유족이 조직한 반제국주의, 반백인 저항단체인 마우마우(Mau Mau)는 케냐타를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52~1956년까지 마우마우는 케냐에서 유럽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52년 10월 영국 식민지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케냐타를 구금하는 한편, 키쿠유 독립저항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959년 12월까지 제국주의 영국은 7년 동안 무려 13,500명의 케냐인을 학살하였으며, 10만 명 이상을 수용소에 가둔 채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세뇌공작을 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마우마우의 봉기로 선포된 비상사태는 196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의 야만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키쿠유족 저항군은 무장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고, 영국은 단계적으로 독립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1957년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케냐 최초의 입법회의 직접선거가 실시되었다. 1960년에는 케냐타를 중심으로 신생 정당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 KANU)이 창당되었으며, 1963년 6월에는 케냐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선언과 함께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온건파에게 권력을 넘기려던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독립정부 구성은 KANU가 주도하였다. 케냐는 1963년 유엔, 1964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비동맹노선을 표방했다. 하지만, 미군기지를 허용하는 등 서방제국과의 협력도 강화했다.
1964년 11월 키쿠유족과 루오족, 캄바족을 대표하는 KANU는 소수부족을 대표하는 케냐 아프리카 민주연맹(KADU, Kenya Africa Democratic Union)과 합당하고 일당체제를 구축하였다. 1964년 12월 12일 조모 케냐타를 초대 대통령, 루오족 출신의 오깅가 오딩가(Jaramogi Ajuma Oginga Odinga, 1911~1994)를 부통령으로 한 케냐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영연방에도 가입했다. 케냐타 통치하의 케냐는 서방세계로부터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서구 국가들에게 케냐 투자를 개방하고, 영연방에 가입하는 등 케냐타의 친서방적 경향 때문이었다.
루오족의 지도자였던 오깅가 오딩가는 1965년 KANU와 결별하였다. 1966년 4월 오딩가는 케냐타와 결별함과 동시에 케냐 인민연맹(Kenya People's Union, KPU)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으나 케냐타로부터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1969년 10월 케냐타는 KPU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오딩가를 비롯한 당간부들을 구속했다. 이후 KANU는 케냐 유일의 정당이 되었다. 1971년 석방된 오딩가는 다시 KANU에 입당했다. 1974년 케냐타는 오딩가의 총선 출마를 금지시켰으나, 1975년 그는 지구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77년 오딩가는 케냐타에 의해 또 다시 구금되었다.
다니엘 아라프 모이
1978년 8월 케냐타가 죽자 소수종족인 칼렌진족(Kalenjin) 출신의 부통령 다니엘 아라프 모이(Daniel Toroitich arap Moi, 1924 ~2020)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KANU 당수로 취임하였다. 1979년 11월 8일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에서 단독후보로 출마한 모이는 2대 대통령에 무투표 당선되었다. 모이는 KANU 일당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집권세력 내의 케냐타 전 대통령 인맥을 완전히 축출하므로써 정치적 도전자들을 제압하였다. 모이 정권은 오딩가 전 부통령의 정계진출도 철저하게 막았다. 오딩가는 1981년 다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1982년 6월 9일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개헌으로 케냐는 일당 독재국가가 되었다. 모이 독재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계속해오던 오딩가는 1982년 5월 20일 신당 창당을 구상한 혐의로 KANU에서 축출되었으며, 6월에는 KANU를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오딩가는 1982년 8월 1일 시도되었던 케냐 공군의 쿠데타 기도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그해 11월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1년 후에 석방되었다.
1983년 9월 26일 실시된 대선에서 모이는 무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1984년 8월 21일 모이는 모든 공무원들에게 KANU 입당을 의무화하였다. 1985년 12월 2일 케냐는 헌법 일부 수정안이 가결되어 법무장관과 감사원장에 대한 해임 요건이 완화되었고, 대통령 비서실장 지위도 약화되었다.
1987년 5월 KANU는 케냐 최대 여성단체인 마엔델레오(Maendeleo)와 통합함으로써 당원이 6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988년 2월 29일 대선에서 모이는 또 다시 무투표로 당선되어 3선을 기록하였다. 3선에 성공한 모이는 자신의 독재정권을 더욱 강화하고,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처럼 의회를 자신의 홍위병으로 만들었다. 24년 간에 걸친 모이 독재정권의 철권정치로 키쿠유족과 루오족은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8월 2일에는 법관과 직업공무원 위원회 위원 해임 요건의 완화, 피의자의 경찰 구금기간을 연장하는 헌법 개정안이 가결되었다. 10월에는 모이의 집권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나이로비에서 열렸다.
리프트 밸리
1991년 8월 2일 오깅가 오딩가와 마틴 쉬쿠쿠(Martin Shikuku) 등은 민주회복협의회(Forum for the Restoration of Democracy, FORD)를 결성하였다. 1991년 10월 리프트 밸리(Rift Valley)에서 종족 분규가 일어났다. 음와이 키바키의 키쿠유족과 오딩가의 루오족, 칼렌진족 사이에 벌어진 종족 분규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91년 12월 19일 아프리카 민주화 추세와 미국, 영국 등 원조국들의 민주화 압력, 국민들의 요구로 모이는 선거법 개정을 통해서 일당제 헌법조항을 폐지하였다. 1992년 1월 17일 음와이 키바키(Mwai Kibaki, 1931~)는 민주당(Democratic Party, DP)을 결성하였다. 1992년 9월 FORD는 오딩가가 의장인 케냐 민주회복협의회(Forum for the Restoration of Democracy-Kenya, FORD-Kenya)와 아실리 민주회복협의회(Forum for the Restoration of Democracy-Asili, FORD-Asili)로 분열되었다.
1992년 10월 28일 독재자 모이는 의회를 해산했다. 12월 29일 헌법 개정으로 다당제에 의한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었다. 야당이 분열한 가운데 실시된 총선 결과 KANU 후보로 출마한 모이는 총 유효표의 36%를 얻어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총선에서 KANU는 188개 지역구 중 과반수를 넘는 100석을 차지했지만, 야당도 의석의 45%를 얻는 선전을 했다. 집권 KANU는 전국정당이었지만 케냐 최대 종족인 키쿠유족과 루오족 후보들이 전멸하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1993년 1월 26일 다당제 하의 제7대 국회가 개원했다. 의석 분포에서 종족 간 대립현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야당들은 총선 이후 사실상 부족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FORD-Kenya는 전국 8개 주에서 모두 당선자를 냈으나 의원의 60% 이상이 루오족 출신으로 구성될 만큼 루오족 기반이 강했고, FORD-Asili와 민주당(DP)은 키쿠유족, 키쿠유족과 연계된 메루족(Meru), 엠부족(Embu) 출신이 의원의 65% 이상을 차지하였다.
반목과 분열로 선거에 패배한 야당들은 총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한동안 반정부 시위, 파업 등을 별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1993년 9월 이후 제1야당인 FORD-Kenya의 오딩가 의장이 모이 정권과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KANU와 FORD-Kenya의 협력관계 정국이 형성되었다.
리프트 밸리에서 시작된 종족 분규는 이후 산발적으로 계속되다가 1993년 8월에는 몰로(Molo), 10월에는 나록(Narok)에서 재발하여 약 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0월 독재자 모이는 집권 15주년 기념식을 나이로비에서 열었다. 모이는 이디오피아, 모잠비크, 수단 등의 지역분쟁을 중재하고, 11월 동부 아프리카 공동체(EAC)의 부활, 동남 아프리카 공동시장(COMESA)의 창설을 주도하는 등 아프리카 역내 지도자로서 대외적 이미지 제고를 통해 독재자로서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기도하였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11월 22~23일 파리에서 열린 원조 공여국 회의는 2년만에 케냐에 대한 원조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 2월 FORD-Kenya의 오깅가 오딩가 의장이 사망했다. 종족 분쟁은 1994년이후 일부 지역의 간헐적인 유혈사태 외에는 비교적 잠잠하였다. 그러다가 총선을 몇 달 앞둔 1997년 8월 몸바사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65명이 사망하였다. 여당과 야당은 서로 정치적 음모론을 들먹이며 비방전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케냐는 1990년대 정치적, 경제적 과도기를 겪는 가운데 유혈 종족 분쟁이 발생하여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거기다 소말리아, 수단, 이디오피아 등 주변국 난민 약 25만 명이 유입된 케냐는 세계 7위의 난민 보유국이 됨으로써 치안마저 불안해졌다.
1997년 11월 10일 독재자 모이는 의회를 해산하고, 12월 29~30 양일 간 총선을 실시하였다. 헌법의 연임제한 규정에 따라 총선에 마지막으로 출마한 모이는 또 다시 야당의 분열을 틈타 어부지리로 5선에 성공했으나 사회적 혼란은 더 심해졌다. 의회 선거에서도 KANU는 간신히 의석의 과반수를 넘겼다.
2000년 7월 IMF는 대케냐 원조차관(3년간 2.5억불)을 재개했으며, 8월 세계은행은 대케냐 개발차관(1.5억 달러)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0월 4일 모이는 개헌검토위원회(KCRC)를 발족시켰다. 12월 IMF와 세계은행은 모이의 경제개혁 부진을 이유로 차관 제공을 중단했다.
2002년 3월 오깅가 오딩가의 아들 라일라 오딩가(Raila Odinga, 1945~)의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 NDP)은 연립정부에 참여함으로써 KANU에 흡수통합되었다. 2002년 10월 모이는 정계은퇴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의 유지와 신변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조모 케냐타 초대 대통령의 아들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ta, 1961~) KANU 부총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마사이족 출신의 죠지 사이토티(George Saitoti, 1945~) 전 부통령 등 무지개연합(Rainbow Alliance)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에 KANU의 무지개연합 세력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라일라 오딩가 KANU 사무총장, 사이토티 부통령, 칼론조 무쇼카(Kalonzo Musyoka, 1953~) KANU 부총재 등은 키바키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케냐 국민연합당(National Alliance Party of Kenya, NAK)과 함께 국민무지개연합(NARC, National Alliance Rainbow Coalition)을 결성하였다. NARC는 부정부패를 끝장내고 한 종족에게만 권력과 부가 독점되는 것을 막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때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는 키쿠유족 출신의 음와이 키바키와 손을 잡았다.
2002년 12월 27일 실시된 대선 및 총선에서 14개 군소야당이 연합한 NARC는 음와이 키바키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승리함으로써 독립 후 39년 동안 지속된 여당 KANU의 독주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24년 간 권좌에 앉아 있었던 모이는 임기를 앞당겨 조기퇴진하였다.
음와이 키바키
2002년 12월 30일 키바키는 케냐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부정부패와 빈곤퇴치를 위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신집권여당 NARC는 구 KANU 출신인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ic Party, LDP) 소속 의원이 68명으로 NARC 의원 총 132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각료직 등에서 50%를 확보하지 못한 결과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 통합 당시 총리직에 라일라 오딩가를 임명한다는 약속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당내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2003년 4월 10일 키바키는 소속 의원들에게 국가 경제 건설을 위해 대동단결해 줄 것을 호소하여 당내 권력투쟁을 완화시켰다. 4월 17일에는 공직자 윤리법, 반부패법이 제정되었다. 5~6월에는 헌법개정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왕가리 마타이
2004년 10월에는 케냐의 여성 환경운동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왕가리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1940~) 환경부장관이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2002년 총선에서 NARC 후보로 출마하여 KANU 후보를 물리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바 있다.
2005년 개헌 문제가 케냐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2005년 8월 헌법 개정안(Wako안)이 발표되었다.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정부측 헌법 개정안은 연립정부 내 LDP와 야당인 KANU가 연합한 오렌지 민주운동(ODM, Orange Democratic Movement)이 주도적으로 반대한 결과 부결되고 말았다. 헌법 개정안 부결로 NARC는 분열되었고, 라일라 오딩가는 ODM 대표가 되었다.
키바키는 각료 전원을 해임하고 ODM의 정치집회와 시위를 금지시켰으며, 2006년 3월 키바키는 국회 기능을 정지시켰다. 또 ODM에 대한 보복으로 키바키는 새 각료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라일라 오딩가, 칼론조 무쇼카 등 LDP 소속 인사들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무시카리 콤보(Musikari Kombo, 1944~)가 이끄는 FORD-Kenya와 차리티 응길루(Charity Ngilu, 1952~)가 이끄는 케냐 국민당(NPK, National Party of Kenya)에서 장관에 임명된 인사들도 일부 수락을 거부하는 등 키바키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2006년 8월 미국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1961~)는 1982년에 사망한 생부 오바마 시니어의 나라 케냐를 방문했다. 키수무에서 태어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케냐 고위직까지 올랐던 오바마 시니어는 라일라 오딩가와 같은 루오족 출신으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반독재 저항운동을 해온 동지였다. ODM은 2007년 8월 다시 라일라 오딩가의 케냐 오렌지 민주운동당(Orange Democratic Movement Party of Kenya, ODM)과 캄바족 출신 칼론조 무쇼카의 오렌지 민주운동-케냐(Orange Democratic Movement–Kenya, ODM–Kenya)로 분열되었다.
케냐는 2007년 10월 제9대 국회 임기가 종료되고, 2007년 12월 27일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키바키는 재선에 성공하였다. 키부티(Kibuti) 선거관리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여당 거국일치당(PNU)의 압력으로 키바키의 당선을 발표했으나 그 당선에 의문을 표시함으로써 부정선거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12월 28일부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나 1,500여 명이 사망하고, 35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하였다.
키바키 집권 후 2억3천만 달러 규모의 부정부패 사건인 앙글로 임대차 스캔들(Anglo Leasing Scandal)이 터지면서 이 사건에 연루된 키바키의 최측근 데이비드 음위라리아(David Mwiraria) 재무장관, 키라이투 무룽기(Kiraitu Murungi) 에너지장관 등이 사임하였다. 이 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NARC 연립정부 내에서도 이견을 보이는 등 연립정부의 분열 움직임마저 나타났다. 또 모이 정권 당시 발생한 6억 달러 규모의 골든버그(Goldenburg) 부정부패 사건의 진상도 밝혀지면서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사이토티 교육장관이 사임했다.
2008년 1월 8일 키바키는 ODM-K 소속 대선 경쟁자 칼론조 무쇼카(Kalonzo Mushoka)를 부통령으로 영입하고, 16명의 각료를 임명함으로써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1월 15일에는 10대 국회가 개원했다. 국회의장에는 ODM 소속 케네스 마렌데(Kenneth Marende)가 취임했다. 2월 28일에는 집권당인 PNU, 원내 제1당인 ODM이 대연정에 합의하고, 4월 17일 대연정 내각이 출범했다. 총리에는 라일라 오딩가가 취임했다.
2010년 8월 27일 케냐는 신헌법을 공포하고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신헌법은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로 케냐 국민들이 스스로 제정한 것이었다. 신헌법은 대통령의 권력집중 완화, 견제와 균형의 원칙, 사법부 개혁, 인권 강화 등을 규정했다.
우후루 케냐타
2013년 3월 실시된 대선에서 우후루 케냐타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월 9일 케냐타 대통령과 윌리엄 루토(William Ruto) 부통령이 취임했다. 9월 21일 나이로비의 웨스트게이트 쇼핑몰에 무장괴한들이 난입해 인질극을 벌이며 손님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면서 수류탄을 터뜨려 최소 39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다치는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소말리아 이슬람 반군 알샤바브는 이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나이로비 웨스트게이트 쇼핑몰
2017년 8월 8일 실시된 대선에서 케냐타는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케냐 대법원은 대선을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10월에 실시된 재선거에서 케냐타는 재선이 확정되었다.
2019년 1월 15일 수도 나이로비 시내에서 알샤바브의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20여 명이 사망했다. 3월 10일에는 에티오피아발 케냐행 여객기 추락 사고로 총 157명이 사망했다. 승객 중 케냐인은 32명이었다.
2020년 2월 19일 케냐 북동부 도시 만데라에서 알샤바브로 추정되는 무장 괴한들이 버스에 총격을 난사해 승객 3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제 테러단체 알카에다와 연계된 알샤바브는 2020년 초부터 소말리아 접경 케냐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테러 공격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알샤바브는 향후 케냐에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케냐는 아프리카에서의 정치적 비중이 커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등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지도국의 위치를 유지해 온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1963년에 독립한 이래 케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급증하는 인구는 일자리와 사회복지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
케냐의 산업구조(GDP 대비)는 서비스업 64.6%, 농업 25%, 제조업 11%이다. 노동력의 80%는 농업에 종사한다.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공업화된 나라로 노동력의 10%가 고용되어 있다. 공업 투자의 약 50%는 외국 자본이다. 서비스업은 노동력의 12.5%가 종사한다. 케냐의 관광산업은 가장 중요한 외화 소득원 가운데 하나다.
2018년 기준 케냐의 GDP는 879억 달러, 1인당 GDP는 2,961달러이다. 교역규모는 224억 달러이다. 수출품은 차, 커피, 정유제품 등이고, 수입품은 공산품, 원유, 식품 등이다. 통화단위는 케냐 실링(Kenya Shilling)이다. 미화 1달러는 2019년 7월 기준 103케냐 실링(Ksh)이다. 주요자원은 무연탄, 형석, 소금, 석회석 등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초까지 케냐는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 World Bank,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으로 외형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과실은 부정부패가 만연한 권력층이 독차지하고, 도시와 농촌 빈민층의 경제사정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경제개혁의 실패로 IBRD와 IMF는 원조를 몇 번이나 중단하기도 하였다.
케냐의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은 5년 임기로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대통령에 당선되려면 전국 최다득표는 물론, 7개 주 중 적어도 5개 주에서 25% 이상을 얻어야 한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가운데 부통령과 장관을 임명하여 내각을 구성한다. 부통령은 권력이 약하며,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케냐 의회는 양원제이다. 하원은 350석, 상원은 68석이다. 주요 정당은 ODM, 국민통합당(PNU, Party of National Unity), ODM-Kenya, KANU 등이 있다. 사법부는 대법원, 고등법원, 상설 하급법원, 지방 하급법원 체계로 되어 있다. 이슬람 관습법이 법원에서 수용된다.
케냐의 사망률은 비교적 높으나 이보다 출산율이 훨씬 높아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주민의 평균연령이 낮아 75%가 29세 미만이다. 평균수명은 남자 51세, 여자 55세이다. 15세 이상 문자 해독률은 85.1%(남자 90.6%, 여자 79.7%)이다(2003년). 케냐의 교육제도는 의무제가 아니다. 학제는 8년제 초등교육, 4년제 중등교육, 대학교육의 3단계로 되어 있다. 사립학교들은 정부로부터 많은 보조를 받는다. 케냐의 명문대학은 나이로비대학교이다.
신문은 자치적으로 발행되고 대개 검열을 받지 않으며, 일간신문과 주간신문이 각각 발간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시설은 정부 소유이며 프로그램은 스와힐리어와 영어로 방송되는데, 많은 프로그램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수입된다.
마사이마라
케냐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많다. 마사이마라(Masai Mara)는 탄자니아와 케냐 국경선 사이에 있는 사파리(Safari)이자 국립공원(National Park) 이름이다. 같은 사파리를 탄자니아가 75%, 케냐가 25% 차지하고 있다. 이를 탄자니아에서는 세렝기티(Serengiti), 케냐에서는 마사이마라라고 부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Lion King)'의 무대가 되었던 세렝기티 대초원을 케냐에서 부르는 이름이 바로 마사이마라다. 마사이(Masai)는 마사이족을 가리킨다. 마사이족이 사는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마사이마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쿠루 국립공원(Lake Nakuru National Park)
마사이마라는 케냐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상당수가 방문하는 곳이다. 성수기인 7월~8월에 가면 초식동물들의 거대한 이동을 볼 수 있다. 사자, 기린, 얼룩말 등의 다양한 동물도 볼 수 있다. 마사이마라에서는 유독 코뿔소는 보기가 매우 힘들다. 코뿔소를 보려면 나쿠루 국립공원(Lake Nakuru National Park)으로 가는 것이 좋다. 2019년 이후 나쿠루 국립공원의 명물 홍학이 사라졌다고 한다.
말린디(Malindi)에 있는 바스코 다 가마의 기둥(Vasco Da Gama Pillar)
말린디(Malindi)는 몸바사와 라무 섬(Lamu Island) 중간에 있는 작은 도시다. 말린디는 몸바사에서 라무, 라무에서 몸바사로 가는 여행객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다. 말린디에는 유명한 바스코 다 가마의 기둥(Vasco Da Gama Pillar)이 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이 곳에서 아마드 이븐 마지드(Ahmad ibn Majid)를 항해사로 고용해 인도로 항해를 떠났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둥을 세웠다.
라무 섬(Lamu Island)
라무 섬은 케냐와 소말리아 국경에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이다. 다양한 해산물을 비교적 싼값에 즐길 수 있으며, 당나귀를 빌려서 탈 수도 있다. 몸바사에서 버스로 약 15시간 정도 걸린다. 소말리아 국경 근처이므로 안전한 여행지는 아니다. 영국 외무부에서도 나이로비, 몸바사 등 케냐 영토의 대부분을 녹색 경보(여행정보 숙지)로 지정한 반면에 라무 섬을 포함한 소말리아 국경 일대는 황색 경보(필요한 여행 외에는 자제)로 지정했다.
미지켄다 부족의 신성한 카야 숲(Sacred Mijikenda Kaya Forests)
미지켄다 부족의 신성한 카야 숲(Sacred Mijikenda Kaya Forests)은 미지켄다족의 조상이 사는 곳으로 믿어지는 숲이다. 카야 숲은 미지켄다족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카야 숲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은 천을 허리에 둘러서 외부의 더러운 것들을 가려주어야 한다. 또한 나무 안기(tree hugging)를 통해 조상들과 대화하고 소원을 빌며 건강을 기원하는 의식이 있다. 몸바사에서 봉고 합승 택시 마따투(Matatu)로 약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카야 숲은 2008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은 1963년 8월 케냐와 영사관계를 맺고 총영사관을 설치한 이후 1964년 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고 나이로비에 주케냐 한국대사관을 설치했다. 1982년 2월에는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한국의 전두환이 케냐를 방문했고,1990년 9월에는 케냐의 독재자 모이가 방한한 바 있다. 양국 간 체결된 협정으로는 의료협력협정(1973. 9), 무역협정(1977. 8), 문화협정(1980. 12), 항공협정(1981. 1) 등이 있다.
케냐는 한국에 상주공관의 설치를 위해 2007년 5월 개설 준비반을 파견하여, 7월부터 업무를 개시하였다. 2015년 현재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를 비롯하여 대우, 삼성, LG전자 등이 진출해 있다. 우리나라의 대 케냐 주요 수출품은 2015년 현재 합성수지, 화학제품, 타이어 등이며, 수입품은 주로 동과 커피다. 2018년 기준 재케냐 교민은 1,183명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케냐는 1975년 5월 수교에 합의했으나 아직 상주공관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케냐는 북한에 대하여 케냐 주변국에 대한 군사원조 등 일련의 동향에 경계심을 갖고 한동안 상주공관의 설치를 불허했다. 2008년 9월 26일 북한은 케냐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주 남아공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양측은 1973년 10월에 무역협정, 1976년 5월에 경제기술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2020. 3. 1.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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