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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East Africa)-지부티(Djibouti)

林 山 2010. 1. 28. 13:03

지부티 공화국(Republic of Djibouti)은 '아프리카의 뿔' 북동쪽 해안에 위치하는 나라다. 동쪽으로 홍해(Red Sea)와 아덴 만(Gulf of Aden, Aden bay)을 잇는 바브엘만데브 해협(Bab-el-Mandeb Strait)에 면해 있다. 북쪽으로 에리트레아, 서쪽으로 에티오피아, 남쪽으로 소말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부티 지도


지부티의 국기는 1977년 6월 27일 독립과 함께 제정되었다. 하늘색과 연두색 두 가지 색의 가로 줄무늬에 깃대 쪽으로 하얀색 이등변삼각형이 그려져 있으며, 이등변삼각형 안에는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연두색은 지구, 하늘색은 하늘과 바다, 하얀색은 평화, 빨간색 별은 통일을 의미한다.


지부티 국기

 

수도는 지부티 최대의 항만도시 지부티 시(Djibouti city)이다. 인구는 2018년 기준 88.4만 명이다. 국토 면적은 23,200㎢(한반도의 1/10)이다. 지부티 민족 구성은 소말리계의 이사족이 60%, 아파르족(다나킬족)이 35%이고, 나머지는 유럽인, 아랍인, 에티오피아인 등이다. 양대 인종집단인 이사족과 아파르족은 대부분 유목민이다. 아파르족은 주로 북부와 서부, 이사족은 남부에 거주한다. 지부티 시의 주민은 전체 인구의 약 절반에 이른다.


수도 지부티 시


지부티의 의무교육은 6세부터 6년 동안 실시하고 있다. 문자해독률은 46.2%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아랍어이다. 아랍어 중에서도 소말리어와 아파르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국교는 이슬람교(94%)이며, 유럽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기독교도(6%)가 있다. 


모우사 알리(Mousa Ali)

 

지부티는 타주라 만(Tadjourah Bay)으로 만입되어 내륙까지 이어지는 동부의 해안평야지대, 해발 300∼1500m의 고원을 중심으로 평야와 호수들로 이루어진 중부와 남부의 화산고원지대, 모우사 알리(Mousa Ali)에서 2,063m의 고봉들이 솟아 있는 북부의 산악지대 등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주요 강인 훔불리 강은 산간지방에서 여러 개의 개천이 모래바닥 위를 흐르다가 지하로 스며들어 흐른다.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황량한 사막에는 키 작은 가시덤불과 약간의 풀만이 자란다. 산악지대에는 깊은 협곡과 가파른 벼랑이 많다. 농경지는 국토의 1% 미만이고, 약 10%가 목초지 또는 방목지로 이용이 가능하다. 


지부티의 기후는 열대성 사막기후이며, 늦여름부터 3월말까지 인도양으로부터 비를 동반하는 해풍이 불어온다. 산간지방에는 약간의 삼림지역이 있으며, 평야지대에는 대추야자, 피마자, 타마린드, 대극(大戟) 등이 자란다. 동물로는 스라소니, 자칼, 영양, 가젤 등이 있다.

 

지부티에는 BC 3세기경 아라비아로부터 아블레 이민들이 들어와 정착했으며, 아파르족은 이들의 후손이다. 그후 소말리계의 이사족이 남부에서 아파르족을 축출하고 해안지방에 정착했다. 


지부티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일찍부터 아라비아에서 멀리 인도, 중국과 모피나 향신료 등의 무역을 하였다. 825년경 선교사들에 의해 이슬람교가 지부티에 전해졌다. 16세기까지는 아랍인들이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포르투갈인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오보크(Obock) 항구

 

1839년부터 1842년까지 프랑스 탐험가 로세 데리쿠르(Rochet d'Hericourt)에 의한 에티오피아의 쇼와(Showa) 지방에 대한 탐사를 계기로 프랑스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지금의 지부티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는 1862년 지부티를 지배하고 있던 술탄들과 평화우호조약을 맺어 오보크(Obock) 항구를 획득하고, 1884년에는 소말리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북부의 소말리랜드(Somaliland) 공화국을 식민지화했다. 프랑스는 이어 1888년 이 지역에 프랑스 소말리 해안령(海岸領, French Somaliland)를 설치했다. 


1892년에 지부티 시는 프랑스령의 수도가 되었다. 1897년 에티오피아와 프랑스령 소말리랜드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가 약간 축소되었다. 1903년에는 지부티 항과 에티오피아의 디레다와를 잇는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1917년에는 아디스아바바까지 연결되었다.

 

1930년대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건설이라는 야욕을 품고 프랑스령 소말리랜드를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에티오피아와 소말리랜드 국경지대에서 프랑스 군과 이탈리아 군 사이에 자주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고 친독 비시 정권이 들어서자 프랑스령 소말리랜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1940년 7월 10일 영국은 자유 프랑스 군과 에티오피아 저항군을 비롯해서 영국령 또는 영연방 국가들의 군대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동부 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1941년 11월 27일까지 계속된 이 전쟁에서 패한 이탈리아는 동부 아프리카에서 물러났다. 1942년 12월 영국 해군의 봉쇄를 견디지 못한 비시 정권의 소말리랜드 총독은 항복을 하고, 이 지역은 자유 프랑스 군에게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지부티 항은 에리트레아의 아사브 항에 고객을 거의 다 잃었다. 

 

프랑스령 소말리랜드는 1946년 해외 준주(準州)가 되었고, 1957년 7월에는 프랑스 제4공화국은 프랑스령 소말리랜드에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령 소말리랜드에서는 식민지 자치정부의 장관급인 8명의 행정관이 선출되어 이들이 프랑스 총독을 보좌하였다. 1958년 프랑스는 드골의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같은 해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소말리랜드 주민들은 프랑스령으로 계속 잔류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프랑스령 소말리랜드는 곧 프랑스 공동체에 해외 준주의 일원으로 가입하고, 레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 시스템에 따라 프랑스 의회에 하원의원 1명과 상원의원 1명을 파견하게 되었다.  

 

1963년 프랑스령 소말리랜드에서 레프리젠테이션 시스템이 폐지되고, 다당제에 기초한 직접 선거제가 시행되었다. 이때부터 소말리랜드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66년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소말리랜드를 방문했을 때, 격렬한 독립운동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7년 독립 여부를 묻는 두번째 국민투표에서도 주민들의 60%는 또다시 프랑스령으로 남는 선택을 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령 소말리랜드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두 주요 부족의 이름을 따서 프랑스령 아파르족과 이사족 준주(French Territory of the Afars and Issas)로 바뀌었다. 


당시 프랑스 식민당국은 지부티의 두 주요 종족 가운데 소수파인 아파르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 결과 다수파인 이사족이 반발하여 두 부족의 무력충돌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프랑스 식민당국은 다시 다수파인 이사족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하산 굴레드 압티돈 


1967년의 국민투표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령 소말리랜드의 독립 요구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1975년 이래 에티오피아 내란과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난민이 지부티로 유입되었다. 이들 난민들은 지부티의 환경과 경제에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1977년 프랑스령 가운데 아파르족과 이사족 준주는 국민투표를 거쳐 지부티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초대 대통령에는 이사족 출신의 하산 굴레드 압티돈(Hassan Gouled Aptidon, 1916~2006)이 선출되었다. 아프리카에서 50번째로 독립국이 된 지부티는 독립과 동시에 아프리카 단결기구(OAU)에 가입하고, 비동맹 중립주의를 지향하였다. 그해 5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임기 5년의 단원제 국회를 구성하였다. 65석 가운데 이사족이 33석, 아파르족이 30석, 아랍인이 2석을 차지하였다. 독립 후에도 양국의 합의에 따라 지부티에는 프랑스 외인부대가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압티돈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독재정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1978년 오가덴 분쟁으로 단절되었던 지부티와 아디스아바바 간 철도가 재개되었다. 이어 프랑스와는 우호협력협정, 경제협력협정, 잠정군사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80년대초부터 아파르족과 이사족 사이의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압티돈은 1981년 지부티를 일당 독재국가로 만들고, 집권당인 진보인민연합(RPP, People's Rally for Progress, Rassemblement populaire pour le Progrès)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들을 불법화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아파르족의 거센 반발을 불러와 1991년부터 이사족의 압티돈 정권과 아파르족 반군단체인 통일민주회복전선(FRUD, Front for the Restoration of Unity and Democracy, Front pour la Restauration de l'Unité et de la Démocratie) 사이에 치열한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 지부티는 에리트레아와 오가덴 교전지대 난민들의 유입으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1993년 5월에 실시된 대선에서 4선에 성공한 압티돈은 다당제 하의 탈부족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994년의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FRUD 반군 가운데 아흐매드 디니 아흐매드(Ahmed Dini Ahmed, 1932~2004) 등 강경파는 압티돈 정권에 대해 무력투쟁을 계속했다. 


불안한 국내정치 상황 외에도 지부티는 에리트레아와의 국경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96년 지부티는 자국 영토에 에리트레아가 포격을 가했다고 비난하면서 양국 간 1차 국경분쟁이 발생하여 전쟁 직전까지 갔었다. 1999년 에리트레아는 자신들의 적대국인 에티오피아를 지부티가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지부티는 자국의 반군단체에 대해 에리트레아가 지원하고 있다고 서로 비난하면서 2차 국경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지부티와 에리트레아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에티오피아는 북동부 지방이 에리트레아로 독립을 하면서 지부티를 통한 홍해로의 진출이 꼭 필요하기에 이 지역에 언제든지 또 국경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상존했다. 


이스마일 오마르 겔레

 

1977년 독립 이후 1999년까지 대통령직을 5연임하면서 장기간 집권한 압티돈은 84세의 고령을 이유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999년 4월 2대 대선에서는 집권당인 진보인민연합(RPP) 후보로 출마한 압티돈의 조카이자 비밀경찰 총수인 이스마일 오마르 겔레(Ismail Omar Guelleh, 1947~)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겔레 정권하에서도 FRUD 강경파의 무장투쟁은 지속되었다. 겔레 정권은 반군 진압과정에서의 인권침해와 언론탄압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2000년 12월 겔레가 해임한 국가경찰부대 참모총장 야신 야베(Yacin Yabeh)가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군병력을 동원해서 진압하였다. 2001년 5월 겔레 정권은 FRUD 강경파의 무장해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FRUD와 화해를 하였다.

 

2005년 4월 대선에서 FRUD를 비롯한 여러 정당과 연합한 겔레는 경쟁후보 없이 단독후보로 출마하여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겔레는 RPP의 당수도 겸임했다. 정당 간 연합에 따라 대통령은 이사족인 겔레, 수상과 외무장관 등은 FRUD의 아파르족 인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야당들은 정당연합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대선에 불참하였다. 지부티의 정치상황은 다수파인 이사족이 사회 전분야에 걸쳐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에 소수파인 아파르족은 상당히 소외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족 갈등이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2010년 4월 지부티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3선 제한 규정을 삭제하였다. 종신 대통령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2011년 4월 대선에서 겔레는 81%의 득표율로 삼선에 성공했다. 2012년 1월 제2대 지방선거에서 여당 중심의다수당연합(UMP, Union for a Presidential Majority)이 총 8개 선거구 중 6개 선거구에서 압승을 거뒀다. 2013년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UMP가 49석, USN(Union for National Salvation)이 16석을 차지했다. 2016년 4월 대선에서 겔레는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지부티는 대통령제 국가이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총리는 내각의 수반이 된다. 법제는 전통적인 관습, 이슬람 법, 프랑스인의 관행을 혼합한 것을 기초로 한다. 주요 정당은 RPP와 UMP가 있다. 공공의료는 종합병원, 개인병원, 다목적 약국과 보건소를 통해서 제공된다. 실업자가 상당수이며, 임금수준은 일반적으로 낮다. 교육은 무상이지만 의무제는 아니다. 학제는 초등, 중등, 기술 교육 등으로 구분된다. 


언론사 중 통신사는 지부티통신(ADP)가 있으며, 신문은 정부에서 발행하는 주간신문 '지부티 국민(La Nation de Djibouti)'이 있다. 지부티 라디오와 TV는 국영이다. 


지부티 주둔 프랑스 제13외인부대


지부티에는 1962년 이래 약 8백 명의 프랑스 제13외인부대(13th Foreign Legion Demi-Brigade)가 주둔하고 있다. 지부티 공항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약 2만 명 규모의 미 중부군사령부 소속 레모니어 캠프(Camp Lemonier)는 소말리아의 이슬람 강경파 세력인 알카에다와 이슬람법정연합군(Islamic Courts Union)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작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지부티 항은 동아프리카에서 이슬람 급진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과 유럽 강대국들의 해군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지부티 주둔 미 중부군사령부 소속 레모니어 캠프


지부티는 거의 전적으로 무역과 상업 서비스에 의존하는 시장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지부티 시는 에티오피아를 출입하는 상품의 주요적환지 역할을 한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인근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데, 이는 지부티에 유럽인 국적 이탈자들의 큰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지부티는 거의 전부가 사막이어서 농업생산은 GNP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다. 방목지에서의 가축 사육이 가장 중요한 농업활동이다. 환금작물로는 대추야자를 비롯한 몇 가지의 과일과 야채가 있다. 근해에서는어업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조업은 소규모 회사에 국한되어 있으며, 거의 모든 소비재를 수입한다.


지부티는 통과무역과 서비스업이 GNP의 3/4 이상을 차지한다. 지부티에는 항구와 지부티-아디스아바바 철도, 현대화된 공항이 있으며, 아프리카의 여러 내륙국들은 상품을 지부티로 공수하여 재수출한다. 지부티를 경유하여 수출되는 주요 품목은 커피, 소금, 짐승가죽, 말린 콩과 곡물이며, 주로 지부티에서 소비되는 수입품은 기계류와 직물, 식품 등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프랑스, 에티오피아, 일본, 예멘, 소말리아 등이다.

 

지부티와 한국은 1977년 12월 정식 수교했다. 한국은 주 에티오피아 대사가 겸임하고, 지부티는 주 일본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양국은 1979년 2월 경제기술협력협정과 1980년 6월 항공협정을 체결했다. 한국의 주요 수입품은 동(銅), 건설기계 등이고, 주요 수출품은 화학제품, 기계부품, 전자 등이다. 한국 교민은 2017년 기준 4명이 거주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는 1993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지부티는 주일본 대사가 겸임하고 있으며, 북한은 주에티오피아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2020. 2. 17.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