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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East Africa)-에티오피아(Ethiopia)

林 山 2010. 1. 28. 12:57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The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은 1931년 이전에는 아비시니아(Abyssinia)라고 불렀다. 북쪽으로 에리트레아, 동쪽으로 지부티와 소말리아, 서쪽으로 수단, 남쪽으로 케냐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내륙국이다. 'Ethiopia(에티오피아)'란 '태양에 그을린 얼굴의 땅(Land of the Burnt Faces)'이라는 뜻이다. 


에티오피아 지도 


수도는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이다. 인구는 2018년 기준 약 1억 839만 명이고, 면적은 1,104,300㎢(한반도의 5배)이다. 민족 구성은 오로모족(33.8%), 암하라족(29.3%), 티그레이족(5.9%)을 비롯해서 시다모족, 아파르족, 소말리족, 사호족, 아게우족 등 80여개 부족이 있다. 암하라족은 70년대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2천년 간 에티오피아 왕조를 유지한 정치적, 문화적 지배종족이었다. 현 총리는 오로모족 출신이다. 암하라족은 에티오피아 북부와 중부에 살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에티오피아는 식민지 경험이 없고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해 온 나라로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매년 외국의 식량원조와 차관에 의존하는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에티오피아 국기


에티오피아의 국기는 초록, 노랑, 빨강의 가로형 삼색기이며 비율은 1:2이다. 범아프리카색 국기는 이 나라 국기의 스타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색기에 있는 녹색, 노랑, 빨강은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가 축복해 주는 무지개를 상징한다. 녹색은 자원의 부, 노란색은 종교의 자유, 빨간색은 조국에 대한 희생과 충성을 상징한다. 국기 중앙에는 에티오피아의 국장이 그려져 있다. 파란색은 평화, 오각별은 단결과 번영, 빛줄기는 국민과 종교의 평등함을 상징한다.


청나일 강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 가장 동쪽 돌출부인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에 위치해 있다. 에티오피아의 지형은 서부 저지대와 서부 고원지대, 동아프리카 지구대, 동부 고원지대, 동부 저지대 등 5개 지역으로 나뉜다. 서부 저지대는 청(靑)나일 강(Blue Nile River, 아바이 강), 앗바라 강(Nahr ⁽Aṭbarah), 타카제 강(Takaze River) 유역으로 수단과 에리트레아 서부 국경을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뻗어 있다. 이 강들은 서부 고원지대에서 발원해서 수단의 백(白)나일 강(White Nile River)으로 흘러간다. 


에티오피아 고원


서부 고원지대는 평균고도가 2,400∼3,700m의 넓은 에티오피아 고원(Ethiopian Highlands)을 이루고 있다. 이 고원은 북쪽의 에리트레아 중앙으로 뻗어가며, 에리트레아 바로 남쪽의 시멘 산맥(Simen Mountains)에는 에티오피아의 최고봉인 라스다셴 산(Ras Dashen, 4,620m)이 솟아 있다.


시멘 산맥


시멘 산맥에 솟은 라스다셴 산

 

동아프리카 지구대(Great Rift Valley)는 동부와 서부 고원지대와 접하고 있으며, 이 지구대의 북쪽 끝에는 메마른 다나킬 평원(Danakil Plain)이 펼쳐져 있다. 동쪽 경사면이 매우 가파른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동쪽으로는 동부 고원지대가 자리잡고 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


하우드 고원(Haud Plateau)과 오가덴(Ogaden), 시다모-보라나 평원(Sidamo-Borana Plain) 등 동부 저지대는 에티오피아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동부 고원지대에서 발원하는 세벨리 강과 게날레 강은 동부 저지대를 지나 소말리아로 흘러간다.


다나킬 평원의 달롤 화산


고원지대의 기후는 아프로 알파인(Afro-Alpine) 고산기후로 연중 기온변화가 적은(평균 16℃~22℃) 편으로 대체로 온화하고 습기가 많다다. 고원지대는 대부분 사바나 목초지나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때로 숲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열대 삼림지대에는 상록교목인 나한송이 많이 자라고 있다. 


저지대는 열대기후로 무덥고 습기가 많다. 저지대에는 아카시아나무가 자란다. 동아프리가 지구대 남부는 관목이 많은 사바나 초지이다. 에티오피아의 우기는 2∼3월(소우기), 6∼9월(대우기)로 두 차례이다. 연강우량은 남서부 고레의 고원지대가 2,000㎜, 북부 다나킬 평원은 500㎜ 미만이다. 집약농업과 벌목은 토지의 심각한 토양 침식을 초래하고 있다. 토양 침식은 주기적으로 오는 가뭄과 함께 에티오피아 농업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흰바위염소의 일종인 와리아아이벡스(C. i. walie)

 

에티오피아에 서식하는 희귀동물에는 흰바위염소의 일종인 와리아아이벡스(C. i. walie)와 산니얄라영양(nyala), 겔라다개코원숭이(lion baboon) 등이 있다. 사자, 코끼리, 표범, 물소, 얼룩말, 기린, 코뿔소 등은 지금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산니얄라영양(nyala)


겔라다개코원숭이(lion baboon)

 

에티오피아는 40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인류가 발견된 곳으로 아프리카에서 인류의 발상지로 추정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현존 발견 최고 인류화석 루시(Lucy)가 바로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었다. 루시는 약 30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BC 8000∼6000년 이 지역에는 함셈어족의 문화적 후손인 쿠시족과 셈족이 목축과 농업을 발전시켰다. 게에즈어를 사용하는 농경민들은 BC 2000년경 티그라이의 고원지대에 들어온 뒤, BC 7세기경 고대 에티오피아 왕국인 다마트 왕국을 세웠다. 다마트 왕국은 노예, 상아, 서각, 금 등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BC 300년 이후에는 다마트 왕국이 멸망하고 악숨(Axum) 왕국이 들어섰다. 악숨 왕국은 홍해를 건너 남아라비아를 영토로 삼고 메카에 따라갈 정도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전설에 따르면 BC 1000년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지혜를 겨루는 시합에서 진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 사이에서 낳은 아들 메넬리크(Menelik) 1세가 북에티오피아로 이주하여 황제가 된 것이 에티오피아의 기원이라고 한다. 악숨 왕국의 솔로몬 왕조 창시자인 메넬리크 1세는 에티오피아의 국조인 셈이다. 


악숨 왕국은 4세기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으나, 교리상의 차이로 서구의 기독교 문화와는 단절된 문화가 형성되었다. 악숨 왕국은 6세기경 이슬람의 발흥으로 영토를 빼앗기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7∼8세기 아랍인들에 의해 에티오피아의 지중해 무역이 차단되자 자구에 왕조가 940년 악숨 왕국을 멸망시키고 솔로몬 왕국을 차지하였다. 1268년 예쿠노 암라크 황제는 자신이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를 재건했다. 솔로몬 왕국은 이슬람의 술탄 아흐마드 그란에 의해 정복당했다가 1543년 갈로데오스 왕이 다시 그란을 물리쳤다. 


테오드로스 2세


18세기 이후 150년 동안 봉건적 무정부 상태인 자마나 마사펜트(왕자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부에는 셰와 왕국이 들어서 있었고, 북부에는 카사 하일루가 갈라족(오로모족)의 마지막 왕자를 물리치고 티그라이를 지배했다. 1855년 카사 하일루는 테오드로스 2세(Tewodros II, 1818~1868)로 즉위한 후 셰와 왕국에 대해 복종을 강요했다. 


요한네스 4세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는 테오드로스 2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정치적 오판으로 영국의 침략을 불러들인 테오드로스 2세는 자살했고, 이어 1872년 티그라이 귀족 출신이 요한네스 4세(Yohannes IV, 1831~1889)로 즉위했다. 1875∼76년 요한네스 4세는 에리트레아에서 이집트를 몰아내고, 셰와 왕국의 메넬리크 왕을 복종시켰다. 


메넬리크 2세


1882년 이탈리아는 에리트리아에 현지관리청을 설치하고 식민지 진출을 시작했다. 1889년 요한네스 4세를 전사시키고 수도 아스마라(Asmara)에 입성한 이탈리아는 우치알리(Ucciali) 조약을 맺고 에리트리아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화하였다. 요한네스 4세에 이어 메넬리크 2세(Menelik II, 1844~1913)도 1896년 2월 아디스아바바의 북쪽 아도와(Adowa) 전투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독립을 지켰다. 하지만, 아디스아바바 조약으로 에티오피아로부터 분리된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메넬리크 2세 당시 에티오피아는 지금의 규모로 팽창했으며,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 사이에 철도가 건설되었고 수도는 신식 학교와 병원으로 근대화되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1913년 메넬리크 2세는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성경에 병을 고치는 힘이 있다고 믿어 '열왕기서'를 모두 먹어 그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그의 손자 리가 왕이 되어 무슬림과 손을 잡자 손녀 사위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가 그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920년대에 커피 수출로 비교적 경제 번영을 이루었다. 


1930년대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군은 비인도적인 화학무기 겨자 독가스를 사용하여 에티오피아인 27만5천 명을 학살했다. 1936년 5월 2일 이탈리아의 2차 공격에 패배하여 셀라시에는 예루살렘으로 망명하였다. 5월 5일 오후 5시를 기해 이탈리아 군은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였다. 이탈리아는 1941년 5월까지 에티오피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이 나라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Italian East Africa)의 일부로 유지했다. 


1941년 4월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공격해서 에리트리아를 탈취했다.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셀라시에는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여 이탈리아의 점령을 종식시켰다. 1944년 영국-에티오피아 협정으로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로부터 해방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는 황제근위대 3,518명을 파병해서 122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1952년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합병하여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 지도에서 사라졌다. 에리트레아의 합병으로 에티오피아는 해양을 향한 거점을 확보했다. 1955년 셀라시에는 더 많은 권한을 의회에 위임하는 개정 헌법을 공포했으나 오히려 국민의 불만은 더 높아졌다. 에리트레아와 남동부의 오가덴 지역 등 여러 지역에서 군주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빈발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때는 육상선수 아베베 비킬라가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62년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1개 주로 강제 편입되자 에리트리아는 분리 독립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해 창설된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두었다. 1964년과 1966년, 1968년, 1973년 등 네 차례에 걸쳐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간 오가덴 국경분쟁이 발생하였다.


셀라시에는 부패하여 국민들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음에도 그 자신은 20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가난한 군중에게 돈다발을 뿌리는 등 거만함의 극치를 보이다가 재위 44년 만인 1974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에티오피아는 군사독재체제인 임시군사평의회(EPMAC) 일명 '데르그(Dergue 또는 Derg, 위원회)'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PMAC는 군장교로 구성된 마르크스주의 정권으로 그 의장이 국가원수를 겸했다. 1975년 군사정부는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주요 산업과 금융기관, 토지, 도시민의 재산을 국유화하였다. 2천년 동안 이어져 온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교회가 문을 닫는 등 박해를 받았다. 


1977년 2월에는 PMAC 의장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 1937~) 대령을 국가원수로 한 사회주의 에티오피아 공화국이 출범했다. 그해 4월 미국 군사고문단이 철수하고 소련과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군사원조를 하였다. 이후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의 독립투쟁과 티그라이 지역의 반란, 오가덴 지역을 둘러싼 소말리아와의 국경분쟁(1977년, 1977년 7월)에 휩싸이게 되었다. 1970∼80년대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수십만 명의 아사자와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87년 6월에 총선이 실시되고, 군부의 기구인 에티오피아 임시군사평의회(EPMAC)가 폐지되었고, 멩기스투는 초대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9월 9일에는 인민회의(National Shengo)가 구성되었다. 9월 12일 대선에서 멩기스투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주의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을 선포하였다. 1989년 멩기스투 사회주의 정권에 저항해온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 The Tigrayan People's Liberation Front)은 다른 저항단체와 연합하여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을 결성하였다. 


멜레스 제나위

 

1991년 5월 28일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 1955~2012)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반군은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여 소련의 원조로 권력을 유지하던 멩기스투 정권을 전복시키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Isaias Afewerki, 현 에리트리아 대통령)가 이끄는 에리트리아 인민해방전선(EPLF)도 동시에 에리트레아의 아스마라에 입성하였다.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

 

1991년 7월 1일부터 5일까지 개최된 평화와 민주주의에 관한 국민회의에서는 에티오피아 의회의 구성과 2년 동안의 과도정부(Transitional Government of Ethiopia)의 집권이 결정되었고, 에리트레아 주민의 자결권을 확인하였다. 7월 22일에는 의회에서 과도정부 대통령으로 멜레스 제나위를 선출하고, 과도기간 중 최고법인 헌법을 채택하였다. 1993년 4월 에리트리아에서는 독립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99.8%가 독립을 찬성하였다. 1993년 5월 24일 에티오피아 과도정부의 묵인 하에 에리트레아는 독립을 선포하고, 아프리카 지도에서 부활했다.  

 

1994년 6월 제헌의회 선거를 거쳐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해 12월 8일 제헌의회에서 확정된 종족자치에 입각한 내각책임제와 연방제 공화국 등을 주내용으로 한 연방헌법이 공포됨으로써 종족계통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 에티오피아의 각 주들은 이전보다 더 큰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995년 5월 7일 실시된 총선에서 최대 종족인 오모로족 및 암하라족 일부가 중심이 된 반정부 단체가 불참한 가운데 집권 EPRDF가 압승함에 따라 8월 22일 마침내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멜레스 제나위 과도정부 대통령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국경도시 바드메

 

1998년 5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의 국경분쟁이 발발하였다. 2000년 5월 14일 실시된 제2기 총선에서 집권 EPRDF가 압승하여 멜레스 제나위가 또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2000년 6월 18일부터 12월 12일까지 에티오피아는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에리트리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에리트리아-에티오피아 국경위원회(EEBC)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EEBC가 소도시 바드메(Badme)를 에리트리아 소속으로 결정하자 에티오피아는 이에 불복했다. 국경분쟁이 시작된 이래 2000년 6월까지 사망한 사람은 7만 명이 넘었다.


2001년 4월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발전하여 6월 멜레스 제나위 총리에 반대하는 네가소 기다다(Negasso Gidada, 1943~2019) 대통령이 사임하고, 8월에는 알마즈 메코(Almaz Meko) 연방의회(상원) 의장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해 10월 기르마 월데 기오르기스(Girma Wolde Giorgis, 1924~2018)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집권 중심세력인 소수종족 티그라이족 우대정책과 집권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민심이반, 오로모 해방전선(OLF, Oromo Liberation Front)의 반정부 무력투쟁, 통일민주연합(CUD, Coalition for Unity and Democracy)과 연합에티오피아민주전선(UEDF, United Ethiopian Democratic Front) 등 야당들의 국회 보이코트,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만성적 기근, 경제개혁 실패 등은 에티오피아 국내정세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다. 거기다 가뭄으로 인한 흉작으로 2003년 약 1500만 명이 기아상태에 빠지자 국제사회가 식량원조를 한 바 있다. 


2003년 12월에는 수단과 국경지역인 서부의 감벨라(Gambela) 지역에서 토지와 거주권 문제를 둘러싼 종족 간의 분쟁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부군과 경찰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기는 했지만 종족 간의 반목과 갈등이 깊어서 언제든 폭동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2004년 1월에는 아디스아바바와 오로모를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시위가 발생하여 종족 간의 분쟁에 더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2004년 12월 이래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임시안전지대(TSZ) 부근에 병력을 계속 증강시키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2005년 3월초에는 에티오피아 병력 16만 명, 에리트리아 병력 12만5천 명이 TSZ 부근에서 대치하여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으나, 같은 달 케냐에서 열린 군사조정위원회에서 국경지대의 양국 병력을 감축하기로 합의한 뒤 긴장이 다소 완화되었다.

 

2005년 5월 15일 실시된 제3차 총선(소말리 주는 8월 21일 총선 실시)에서는 집권당인 EPRDF가 인민의회 547석 가운데 과반수를 넘는 327석을 차지하였으나, 통일민주연합(CUD)과 연합에티오피아민주전선(UEDF) 등 야당은 정부측의 투개표 부정에 항의하는 반정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6월 8일에는 아디스아바바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경찰의 발포로 40여 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5년 10월 제3차 멜레스 제나위 정부가 출범하였으나 CUD 등 야당들은 연립정부의 구성과 선관위의 개편, 야당 구금인사의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정부출범식 등원을 거부하였다. 2005년 11월에는 아디스아바바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여 경찰의 발포로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야당 당원과 시위가담 혐의자 등 1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2010년 5월 23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당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압도적 승리하여 인민의회 547석 중 499석을 차지하면서 재집권에 성공했다. 2012년 8월 20일 멜레스 제나위 총리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9월 21일 하일레마리암 데살렌(Hailemariam Desalegn) 부총리가 총리에 취임했다. 2013년 10월 7일에는 물라투 테쇼메(Mulatu Teshome)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2015년 5월 24일 실시된 제5차 총선에서 집권당인 EPRDF가 압승을 거뒀다. 10월 5일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총리가 재임명되었다. 2017년 8월 데살렌 총리는 국가비상사태를 해제했다. 2018년 2월 국가비상사태 선포 전 오로모족이 반발해온 데살렌 총리가 전격 사임했다.


아비 아흐메드


2018년 4월 오로미아 주 오로모족 출신의 아비 아흐메드(Abiy Ahmed) 총리가 집권하면서 정치,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7월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평화우호선언 서명을 통해 양국의 적대관계가 종식되었다. 9월 양국은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10월에는 아프리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샤흘레워크 쥬드(Sahlework Zewde)가 에티오피아 대통령에 취임했다. 


샤흘레워크 쥬드

  

2019년 6월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진압되었다. 12월 아흐메드 총리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 선정위원회는 아흐메디 총리를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에티오피아와 오랫동안 국경분쟁을 벌여온 이웃 에리트레아와의 화해를 이끈 공로가 있다고 소개했다. 동아프리카의 앙숙으로 불리던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역사적인 종전선언을 이끌어낸 공로였다.  

 

에티오피아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비롯해서 티그라이(Tigray) 주, 아파르(Afar) 주, 암하라(Amhara) 주, 오로미아(Oromia) 주, 소말리(Somali) 주, 베니샨굴-구무즈(Benishangul-Gumuz) 주, 남에티오피아(SNNPR, Southern Nations, Nationalities and People's Region) 주, 감벨라(Gambela) 주, 하라(Harar) 주 등 9개로 구성된 연방제 공화국으로 총리에게 실권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이다. 입법기관은 5년 임기의 연방의회(House of Federation, 상원, 112석)와 인민의회(House of People`s Representative, 하원, 547석) 양원으로 구성되지만 인민의회가 실세다. 


인민의회는 인구비에 따라 선출하며, 소수인종을 배려하는 특별조항으로 인해 에티오피아의 수많은 종족집단들도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로미아 주는 총 의석수의 33%, 암하라 주와 SNNPR은 각각 25%, 티그라이 주는 7%를 차지한다. 

 

실질적 행정권은 인민의회 의원들 중에서 선출되는 총리에게 부여된다. 6년 임기의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한다. 에티오피아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실권은 거의 없다. 에티오피아 헌법에는 지방분권화와 종족계통에 따른 주의 신설 규정을 두고 있어서 각 주들은 분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사법체계의 최고기관은 연방 최고법원이다. 각 주에는 최고법원과 고등법원, 하급법원이 있다.

 

에티오피아의 주요 정당은 대체로 3개가 있다. 집권당인 EPRDF는 1989년 멩기스투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싸우던 티그레이 인민해방전선(TPLF)과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운동(EPDM), 오로모(Oromo) 인민민주조직(OPDO) 등 3개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된 정당이다. EPRDF는 OLF 등 반정부 단체들의 제도권 진입 거부로 집권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이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일당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CUD는 2004년 11월 AEUP(All Ethiopian Unity Party)와 UEDP-Medhin(United Ethiopian Democratic Party-Mehdin), EDL(Ethiopian Democratic League),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한 무지개 에티오피아(Rainbow Ethiopia for Democracy and Social Justice) 등 4개 정당의 연합이다. 2005년 5월 총선에서는 109석을 차지하여 EPRDF에 이어 제2당으로 부상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23개 선거구 전의석을 차지하고, 시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138석중 135석을 석권하여 시정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CUD가 의회를 보이코트함과 동시에 아디스아바바 시정부 인수도 거부했다. 당 지도층은 주로 교육수준이 높고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에티오피아 내 거의 모든 지역과 종족에 걸쳐 당원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학자나 기업인, 노동자, 전직 외교관, 국제기구 근무자, 해외 거주자들이 주요 지지층이다. CUD의 주요 정책공약은 농민의 토지 소유권 보장, 노동자의 권리 존중, 인권보장, 각 종족의 민주적 권리 존중 등이다.

     

UEDF는 2003년 8월 onC(Oromo National Council)와 ARDUF(Afar Revolutionary Democratic Unity Front) 등 14개 정당의 연합으로 결성된 정당이다. 2005년 5월 총선에서 52석을 얻어 CUD에 이은 제2야당이 되었다. UEDF는 종족에 기반을 둔 정당의 연합체로 주로 남부와 중부지역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으며, onC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외 거주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당이다. 주요 정책에 대해서 공동입장이 불분명한 상태다.


에티오피아는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국민총생산(GNP)에 비해 인구성장이 훨씬 빠른 편이며, 1인당 GNP는 세계 최하위에 속한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1/2, 노동력의 9/10를 차지하며, 주로 자급하는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수확량이 적어 식량 생산은 전체 주민의 필요량만큼 충분하지 않다. 옥수수, 보리, 밀, 밀릿, 테프(곡초), 수수 등이 주식작물로 재배된다. 주요 수출작물은 커피로 전체 수출량의 2/3를 차지한다. 그밖에 환금작물로는 유료종자, 밀랍, 케트(마취용제 식물잎), 사탕수수가 있다. 


축산은 피혁 및 가죽과 고기를 얻기 위한 농업 생산의 중요한 일부이다. 제조업과 광업은 GDP의 10% 미만, 노동력의 2% 미만을 차지한다. 식품가공(제당업 포함), 직물, 신발, 가죽제품, 담배, 화학제품 등이 제조업 분야의 주종을 이룬다. 에티오피아는 전력의 4/5 가량을 수력발전소에서 얻고 있지만, 절대 다수의 인구가 전기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막대한 무역적자는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내부혼란에 기인한다. 이로 이해 수출품 생산력이 떨어지고, 1990년대 초반까지 군사장비 수입이 많이 늘었다. 커피 이외의 수출품은 주로 피혁 및 가죽이 차지한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이탈리아, 미국, 지부티, 일본이다. 케냐의 나이로비를 잇는 고속도로와 아덴 만에 있는 지부티 항으로 가는 철도가 아디스아바바에서 출발한다. 국제공항이 4군데 있다.


아디스아바바대학교

 

에티오피아는 영아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며, 5세 이하의 어린이 가운데 47%가 영양실조 상태에 처해 있다. 평균수명도 남녀 50세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문맹률도 높아서 성인인구의 약 60%가 문맹(2001년)이다. 초등학교 취학률(2004)은 남자 79%, 여자 61%이고, 중등학교 취학률(2004)은 12.7%에 불과하다. 에티오피아에는 7개의 종합대학교가 있으며, 아디스아바바 대학교가 최고 교육기관이다. 대학 및 전문학교 24개, 직업 및 기술학교 17개, 교원 양성소 13개가 있다.


에티오피아의 공용어는 암하라어이지만, 행정언어로는 암하라어, 갈라어(오로모어), 영어가 많이 사용된다. 암하라어는 아프리카 국가 언어 중 드물게 게즈문자라는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다. 게즈문자는 남아라비아 계통을 잇고 있는 유일한 문자다. 그외 쿠시어군과 나일제어에 속하는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나 유럽의 라틴어처럼 게즈어와 같은 사멸된 고대 언어도 존재한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언어인 게즈어는 전례의식에 사용되는 전통적으로 중요한 언어다. 많은 대중이 접하는 대중매체인 라디오는 두 언어 외에도 갈라어나 불어, 소말리아어, 아랍어로도 방송한다.


주요 종교는 기독교 50%, 이슬람교 40%, 토속 애니미즘 10% 순이며, 그외 성공회와 KHC 등의 개신교 교파도 있다. 기독교도의 45%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이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비 칼케돈 계열 교회 즉,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기독교 종파로 멩기스투 공산주의 정권 통치 시절(1974~1991)에는 교회가 폐쇄되고 사제들이 체포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20세기 후반부터 기독교의 지배를 줄이려는 노력으로 인해 이슬람교의 지위도 매우 높아졌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이슬람교도가 급증하여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도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2005년 6월과 11월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 반정부 시위 이후 다수 민영 신문을 폐간시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현재 Addis Zemen(암하릭어), Daily Monitor(영어), Ethiopian Herald(영어)를 비롯한 다수의 일간지와 Addis Tribune(영어), Press Digest(영어), 7days Update 등 약간의 주간지가 있다. 라디오 방송국은 공영 Ethiopian Radio, 집권당인 EPRDF가 운영하는 Fana Radio가 있고, TV 방송국은 1964년에 개설된 ETV(Ethiopian Television)가 있다. 통신사에는 ENA(Ethiopian News Agency)가 있다. 


라리벨라(Lalibela) 암굴교회

 

에티오피아는 오랜 문화적 전통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고대 기독교문명이 남긴 문화유산이 상당히 많다.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라리벨라(Lalibela) 암굴교회는 유명하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강탈해 갔다가 67년 만에 반환된 악숨 오벨리스크(Axum Obelisk)는 에티오피아의 국보급 문화재다. 북서부 고원에 있는 도시 곤다르(Gondar)는 17~19세기까지 에티오피아 제국의 수도로 역대 황제의 궁전 유적이 있다.


악숨 오벨리스크


곤다르

 

에티오피아와 한국은 1963년 12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5년에는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에티오피아는 1992년 7월에 주 한국 에티오피아 대사관을 개설했다가 2002년 4월에 폐쇄하고, 주 일본 대사관에 외교 업무를 겸하도록 했으며 이후 2012년 3월에 주 대한민국 대사관을 재개설했다. 


1968년에는 셀라시에 황제가 방한하기도 했다. 멩기스투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한때 양국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멜레스 제나위 정부는 시장경제체제의 도입과 친서방 정책을 채택하면서 친북한 일변도 정책에서 탈피하여 한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아디스아바바의 아핀초 베르(Afincho Berr) 공원에는 2006년 2월,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내어 준 에티오피아 제국의 군인들에게 감사한다.'라고 글을 새긴 참전 기념탑이 세워졌다. 아디스아바바시 외곽에는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귀국후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인 한국촌(Korea Village)이 있다. 아디스아바바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은 춘천시에는 참전기념관이 세워졌다. 에티오피아에는 약 1,500명의 회원을 가진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결성되어 있다. 2018년 12월 현재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는 한국교민은 338명이다.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832명의 에티오피아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에티오피아와 멩기스투 사회주의 정권 시절(1974~91)인 1975년 6월 국교를 수립하고 상주공관을 설치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주 북한 에티오피아 대사관을 설치했다가 2002년 4월에 폐쇄했다. 북한은 1977년 5월에 주 에티오피아 대사관을 설치했다. 양국은 1975년 11월 항공협정, 1985년 12월 경제 및 기술협조협정, 1992년 과학기술협력협정, 1998년 문화협정을 체결했다.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되자 다소 소원해졌다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전쟁(1998~2000) 당시 조선이 재래식 무기를 공급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면서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다. 


에티오피아는 남북한 문제에서 철저하게 등거리 노선을 취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잔재로 인해 이념적으로는 북한에 동정적이다. 현재 북한과 에티오피아 우호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으며, 에티오피아 수석대표는 청소년체육문화부 장관이 맡고 있다. 에티오피아에는 공관원과 군인, 무역 및 농업 전문가 등 100여 명의 북한교민이 체류하고 있다. 


2020. 2. 12.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