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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North Africa)-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

林 山 2010. 1. 27. 18:00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는 북서아프리카의 서사하라에서 서쪽으로 108㎞ 떨어진 대서양에 있는 스페인령 화산군도이다. 스페인 본토 카디스(Cadiz) 항으로부터 1,050㎞ 떨어져 있고, 아프리카 서안 모로코로부터는 115㎞ 떨어져 있다.  

 

카나리아 제도


카나리아 제도 기


카나리아 제도의 총면적은 7,447㎢이다. 2011년 기준으로 카나리아 제도 총 인구는 212만 6000명이다. 수도는 라스팔마스(Las Palmas)이다. 카나리아 제도는 행정구역상 하나의 주였으나 1927년 라스팔마스데그란카나리아(Las Palmas de Gran Canaria, 라스팔마스 주) 주와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Santa Cruz de Tenerife, 테네리페 주) 주로 분리되었다. 


카나리아 제도의 수도이자 라스팔마스 주도 라스팔마스


라스팔마스 주에는 그란카나리아(Gran Canaria), 푸에르테벤투라(Fuerteventura), 란사로테(Lanzarote), 알레그란사(Alegranza), 그라시오사(La Graciosa), 로보스(Lobos) 등 크고 작은 유인도와 몇 개의 무인도가 속해 있다. 에르테벤투라 섬이 대륙에 가장 가깝다. 라스팔마스 주의 주도는 그란 카나리아 섬에 있는 라스팔마스 시이다. 라스팔마스 주의 면적은 4,066㎢이다.


테네리페 주도 산타크루스


테네리페 주는 테네리페(Tenerife), 라팔마(La Palma), 라고메라(La Gomera), 엘이에로(El Hierro)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테네리페 주의 주도는 테네리페 섬에 있는 산타 크루스(Santa Cruz) 시이다. 테네리페 주의 면적은 3,381㎢이다.   

 

카나리아 제도


카나리아 제도는 북회귀선에서 북쪽으로 4° 떨어져 있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아열대성 기후를 띤다. 무역풍의 영향으로 온난건조하고 계절에 따른 변화가 거의 없다. 비는 11~12월에 집중적으로 내리며 연평균강수량은 적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은 20 ℃로 피한지(避寒地)이다. 카나리아 제도에는 테네리페 섬의 테이데 산(3,718m, 테네리페 산)을 비롯하여 많은 화산이 있다. 


테네리페 섬에 있는 테이데 산

 

카나리아 제도에 정착한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의 관체족(Guanches)과 카나리오족(Canario)이었다. BC 40년경 모리타니의 왕 주바 2세(Juba II, BC 50~AD 24)는 카나리아 제도를 탐험하였다. 이 무렵 카나리아 제도는 로마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플루타르코스(Plutarchus, 46~120)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는 주바 2세가 이 제도를 탐험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카나리아 제도의 이름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매우 큰 개(카네)들이 많아 카나리아로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라틴어 '개들의 섬(Insula Cana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섬에는 덩치가 크고 매우 사나운 프레사 카나리오라는 개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란사로테 섬

 

999년경에는 아랍인들이 그란카나리아에 상륙하여 무역을 했다. 13∼14세기부터 카나리아 제도는 유럽 항해자들의 쟁탈 표적이 되어 제노바, 마요르카, 포르투갈, 프랑스의 항해가들이 이 제도를 찾아왔다. 15세기부터 카나리아 제도는 에스파냐인들이 지배하였다. 1404년 카스티야의 왕 엔리케 3세(Enrique III, 1379~1406)는 프랑스 출신 장 드 베탕쿠르에게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베탕쿠르는 란사로테와 푸에르테벤투라, 페로를 정복한 뒤, 1406년 12월 조카 마시오를 책임자로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푸에르테벤투라 섬


1420년경부터는 포르투갈 군대가 고메라를 점령하고 주둔했다. 그러나 1479년 알카소바스 협정에 의해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은 스페인은 1496년까지 나머지 섬들을 모두 정복했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이곳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였다.

 

1833∼1834년 카나리아 제도는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해저전선 중계지가 되었다.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이곳에서 스페인 민주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해 일어난 군사반란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카나리아 제도는 1982년 8월 10일에 제정된 자치법령에 따라 스페인의 자치령이자 자유항으로 공포되었다. 1986년 카나리아 제도의 여러 정치단체들이 합쳐서 카나리아 연합당(CC)이 창당되었다. 온건 민족주의 정당인 CC는 국민당과 연합으로 카나리아 제도를 통치할 정도로 세력이 크다. 현 카나리아 제도 자치정부 대통령은 카나리아 연합당의 파울리노 리베로(Paulino Rivero Baute, 1952~ )이다. 행정은 스페인 본토의 주와 같고, 7개의 주요 섬에는 각각 자치의회가 있다.


파울리노 리베로

 

카나리아 제도의 주요 산업은 관광 등 서비스업, 수산업, 농업, 무역이다. 카나리아 제도는 유럽 연합(EU)의 최남단 주변지역으로 분류되며, 대서양의 해공(海空) 정기항로의 요지여서 무역, 금융, 기술 이전, 남북간 서비스 교환의 최적지이다. 특히 2억 5,000만 명의 서아프리카 시장에 접근하려는 각국 회사들에게는 이상적인 기지가 되고 있다. 


라스팔마스 항만은 그란카나리아 섬 북단에 위치하며, 서부 아프리카 연안국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해상 거점이다. 라스팔마스 항구에서는 어선 및 상선의 물자 하역, 보급품 공급이 용이하다. 또한 서부 아프리카 연안에서 조업하는 어선 및 항해하는 선박과의 교신이 용이하다. 라스팔마스 항구는 전 세계 380개 항구와 연결되어 있으며, 매년 200만 톤의 연료 보급 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매년 50만 톤의 냉동어류를 가공처리하는 라스팔마스는 서부 아프리카지역에서 제1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는 항만이다.  


라스팔마스 항


카나리아 제도는 스페인이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이전까지 관세자유지역(Free Zone)으로 지정되어 스페인 중앙정부가 인정한 경제적 특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유럽연합 가입 이후 유럽연합 체제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증대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1994년 6월 스페인 의회에서 카나리아 제도에 한시적으로 경제, 재정상의 특수 지위를 부여한 카나리아 경제 재정법(REF, Regimen Economico Y Fiscal)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카나리아 지자체 정부가 별도의 부가세를 받을 수 있도록 EU가 허용하고 있다. 통화는 유로화를 사용한다. 


경제는 관광과 농업이 중심이다. 스페인 전체의 13개 국립공원 가운데 4곳이 카나리아 제도에 있어 중요한 자연유산이 되고 있다. 이 섬을 찾아오는 관광객은 해마다 천만 명 이상이다. 따라서 카나리아 제도의 경제도 전체 생산의 32%를 차지하는 관광산업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농업은 화산질의 기름진 땅에서 포도와 사탕수수, 바나나, 토마토, 감귤류 등을 재배한다. 최근 화훼농업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그 밖에 수산업도 활발하다. 한때 특산물이었던 코치닐 염료는 쇠퇴한 상태이다. 주요 수출품은 토마토, 바나나 등 농산물이다. 주요 수입품은 기계류, 자동차, 석유제품 등 2차 상품이다. 카나리아 제도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2차 산업이 취약하여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하고 있다. 


라스팔마스데그란카나리아 대학교

 

카나리아 제도의 공용어는 스페인어다. 주민들은 안달루시아어의 억양이 약간 섞인 카스티야어를 사용하며, 포르투갈어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고어를 쓰기도 한다. 1900년 경에는 주민의 약 80 %가 문맹자였으나, 지금은 교육이 많이 보급되어 문맹률이 낮아졌다. 그란카나리아 섬에는 라스팔마스데그란카나리아 대학교, 테네리페 섬에는 1710년에 설립된 라라그나 종합대학교가 있다.


2020. 2. 6.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