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Saharawi Arab Democratic Republic, SADR)은 북쪽으로 모로코, 동쪽으로 알제리와 모리타니, 남쪽으로 모리타니에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은 대서양에 면해 있다. 서사하라는 남쪽으로 전체면적의 2/3를 차지하는 블랑 곶(블랑코 곶)과 보자도르 곶 사이의 리오데오로(황금의 강) 지역과 북쪽으로 1/3을 차지하는 사귀아엘함라 지역 등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서사하라는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지대이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에 속한다.
서사하라 지도
서사하라는 옛 스페인의 해외 주였다. 식민지 종주국 스페인이 철수한 이후 서사하라는 망명 정권인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SADR)과 모로코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서사하라 지역 대부분은 지금도 모로코가 지배하고 있고, SADR은 서사하라의 동쪽 지역 일부만 지배하고 있다. 모로코가 서사하라를 공식적으로 식민지화한 이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 국가들이 SADR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사하라는 아직 미승인국이며, 유엔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SADR은 국제 연합의 비자치 지역 목록에 게재되고 있다.
서사하라 국기
서사하라의 인구는 2015년 현재 57만 명, 면적은 266,000㎢이다. 수도는 엘아이운(El Aaiun)이다. SADR 망명정부가 있는 알제리의 틴두프(Tindouf)가 임시수도이다. 민족은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공용어는 아랍어와 에스파냐어, 베르베르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이다.
서사하라 수도 엘아이운 중심가
서사하라의 선사시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사귀아엘함라와 남쪽의 고립지대들에서 발견된 바위에 새겨진 조각들은 기후 조건이 좋은 곳에 약간의 농경민을 비롯해 수렵인과 목축인이 대대로 살았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BC 4세기경 서사하라와 유럽은 지중해를 통해 교역을 했으며, 같은 시기에 페니키아인들은 단거리의 교역로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로마인들 역시 사하라 사람들과 거의 교류가 없었다.
서사하라는 중세에 산하자 베르베르족에게 점령당한 후에 이들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슬람 베두인족의 지배를 받았다. 1346년 포르투갈인들은 만을 발견하고 이곳을 보다 남쪽에 있는 리오데오로 강 유역으로 잘못 생각했는데, 그것은 세네갈 강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사하라 해안지역은 19세기 중엽부터 스코틀랜드와 스페인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개발되었다.
1984년 11월 15일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는 유럽 15개 나라 대표들을 불러 베를린 회의를 열었다. 참가국들은 아프리카에서 열강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 지역을 실효 지배하고 있는 국가가 그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갖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로 인해 열강들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식민지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됐고, 훗날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현지 주민들의 민족과 문화를 무시한 채 그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사하라 내륙 도시 스마라
스페인도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었다. 1884년 스페인 아프리카인과 식민지개척자협회(Sociedad Española de Africanistas y Colonistas)의 에밀리오 보넬리는 리오데오로 만에서 해안에 사는 종족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해안지대를 스페인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스페인은 내륙으로 진출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리타니를 차지한 프랑스 때문에 어려움에 봉착했다. 또 1904년 내륙 오아시스에 스마라(Smara)라는 도시를 세운 샤이크 마 알아이나인이 이끄는 유격부대의 방해로 스페인은 더이상 내륙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1904년부터 스페인은 베를린 회의에서 결정된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계획에 따라서 서사하라를 식민통치하기 시작했다. 1906년 서사하라 주민은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반스페인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스페인은 해안지대를 보호령으로 만든 이후 1934년에는 서사하라 전지역을 점령했다.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모로코는 역사적 근거를 들어 서사하라는 물론 알제리 남서부, 모리타니와 말리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는 서사하라 및 알제리와의 분쟁 원인이 되었다. 1957년 스페인 군은 서사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침입한 모로코 군을 물리쳤다.
1958년 스페인은 리오데오로와 사귀아엘함라를 스페인령 사하라라는 스페인의 한 주로 합병했다. 그러나 1960년 새로 독립한 모리타니가 모로코에 이어 서사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1963년에는 엘아이운의 남동쪽에 위치한 부크라(Bukra)에서 인산염 광상이 발견되어 서사하라의 경제적 가치가 한층 커졌다.
1973년 스페인령 서사하라의 원주민인 사하라위족이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Saguia el Hamra and Río de Oro, Polisario Front, PF)을 중심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반스페인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1975년 유엔은 서사하라를 국제분쟁지역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모로코는 민간인 35만 명을 서사하라에 이주시키는 녹색행진(Green March)을 벌여 영유권 주장을 과시하였다. 1976년 모로코의 압력에 굴복한 스페인은 모로코, 모리타니 양국과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하고, 서사하라의 정치적 지위를 양국에 위임하기로 합의한 뒤, 식민통치를 종료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975년 11월부터 서사하라는 스페인과 모로코, 모리타니의 공동관리에 들어갔다. 1976년 2월 북위 24도선을 기준으로 모로코는 인산염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부의 2/3, 모리타니는 그 나머지 남부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는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서사하라에 연고권을 갖고 있지만, 사하라위인은 민족 자결의 권리를 가진다는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냈다.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와 모리타니의 영유권을 부정하는 판결이었다.
서사하라 남부 해안도시 다클라
1976년 스페인의 통치가 종료되자 서사하라 모리타니령 지역은 다클라(Dakhla)를 중심지로 하여 티리스알가르비야 주가 설치됐다.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PF)은 이에 반발해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SADR)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고무된 PF는 1976년 알제리 틴두프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알제리의 지원을 받아 모로코와 모리타니를 상대로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모로코와 알제리간에도 국지전이 발생하는 등 마그레브 지역의 긴장이 격화되었다.
알제리 서쪽 변경 틴두프의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 망명정부 캠프
1979년 PF의 무력항쟁으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교체된 모리타니가 PF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부의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이에 모로코는 구 모리타니령 지역도 모로코령이라고 선포하고 서사하라 남부까지 합병하였다. 그리고, 부크라 광산과 식민지 수도였던 엘아이운, 스마라 시를 잇는 주요 삼각지대의 수비를 강화했다. 모로코의 발빠른 군사행동으로 PF는 구 모리타니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PF는 결국 모로코의 장벽 축조로 인해 20%~25%의 지역만 장악하게 되었다. 1980년 유엔 신탁통치위원회는 PF를 서사하라 주민의 대표로 승인하였고, 1984년 아프리카단결기구(OAU)도 SADR을 승인하자 모로코는 OAU를 탈퇴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2만 명 규모의 PF는 서사하라 주둔 모로코 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서사하라 해방전쟁 과정에서 약 5만 명의 사하라위족이 알제리 남서부 끝에 있는 틴두프 근처의 난민 수용소로 피신했다. 1988년 모로코와 PF는 주민투표에 의한 서사하라의 독립여부 결정을 골자로 한 유엔 평화안을 수용하고, 1989년에는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서사하라 대통령 모하메드 압델 아지즈
1989년 신설된 서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SADR) 의장 겸 대통령에 모하메드 압델 아지즈(Mohamed Abdelaziz, 1947~) PF 총비서가 선출되었다. 1991년에 유엔 서사하라 주민투표 감시단(MINURSO)과 평화유지군(PKF)이 파견되어 정전은 되었지만 투표자격을 둘러싸고 주민투표가 계속 연기되면서 분쟁의 해결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분쟁의 핵심 쟁점인 서사하라 주민의 민족자결권 부여, 즉 주민투표를 통한 독립 여부 결정을 묻는 주민투표는 1992년 주민투표권을 부여하는 대상범위를 놓고 모로코와 SADR 간 이견이 팽팽하여 실시되지 못했다. SADR는 1976년 스페인 식민통치 종료 당시 서사하라 지역에 거주했던 주민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입장이었고, 모로코는 서사하라 지역으로 이주시킨 모로코인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1994년 한국은 서사하라에 유엔 평화유지군(PKF)의 일원으로 국군을 파병했다. 파병 규모와 병과는 20명 수준의 육군 의료지원단이었다. 한국군 의료지원단은 현지 주민들에 대한 의료 지원을 함으로써 많은 환영을 받았다.
1999년부터 모로코에 모하메드 6세가 집권하면서 이전의 하산 2세 시절과는 달리 서사하라의 엘리트들을 대하는 태도가 소홀해졌고, 이에 따라 서사하라 거주 모로코인들 사이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2001년 6월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의 외교 및 국방권을 인정하면서 추후 자치정부 구성을 위한 주민투표를 규정한 베이커 1안(Baker Plan I)이 제시되었으나 서사하라의 독립을 추구하는 알제리와 PF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03년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베이커 2안(Baker Plan II)에 의한 분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전 미 국무장관을 역임한 제임스 베이커가 마련한 2안은 분쟁 당사자인 모로코와 PF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유엔이 이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는 한편, 평화협정 체결 후 5년 간 서사하라 주민이 통치기구를 구성하되 모로코가 군사 및 대외관계를 관장하는 과도통치를 실시하며, 5년 경과 후에는 유엔의 주관 하에 주민투표로 독립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안이었다. 베이커 2안에 대해 PF와 알제리는 찬성하였으나, 서사하라의 독립 가능성을 우려한 모로코는 국제사회의 개입 없이 PF와의 직접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반대하였다.
이후 모로코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무시해 왔으며, PF는 게릴라전을 통한 대 모로코 독립투쟁을 재개했다. 서사하라 문제가 이처럼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은 알제리, 모리타니 등 주변국과 미국, 프랑스, 스페인 등 서방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모로코와 알제리는 매년 유엔 총회에서 상반된 내용의 서사하라 결의안을 제출하며 대립했다. 2005년 9월까지 인도, 멕시코, 남아공, 이란, 알제리, 리비아, 북한 등 66개국이 SADR을 독립국가로 승인하였다.
2005년부터 서사하라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경우 서사하라 주민 1세대나 모로코인들과는 정치적으로 다소 다른 입장을 보였다. 이들은 PF에 가담하지 않고, 시민권을 요구하며 민족주의보다는 인권과 국제적인 합법성을 원했다. 그러나 국제 연합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았다.
2011년에 서사하라는 비르레흘루에서 티파리티(Tifariti)로 공식적인 임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인구 3천 명의 아주 작은 소도시인 티파리티는 기후가 좋지 않고, 지형도 방어에 불리한 지역이다.
서사하라 임시수도 티파리티
서사하라는 현재 주권 독립국이 아니다. 모든 무역과 경제 활동은 모로코 정부가 주관하고 있다. 모로코 정부는 필수재에 대한 가격 통제와 이점을 제공하면서 모로코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한다. 모로코 정부의 영향력은 서사하라 전체에 미치고 있다.
서사하라는 수산물과 인산 외에는 자원도 거의 없다. 농업 활동을 위한 강수도 부족한 상황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식량은 수입한다. 최근에는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 때문에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상업성 여부는 불투명하다. 주민들 대부분은 낙타나 염소, 양 등의 유목과 목축, 수산업을 한다. 건어물은 카나리 제도로 수출한다.
광대한 인산염 광상이 부크라에 있지만 PF 유격대가 광산에서 항구의 부두까지 인산염을 나르는 콘베이어벨트를 공격하는 데다가 물이 부족하여 채굴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아그라차 등지에서는 칼륨, 철광석 등이 생산된다.
2020. 1. 11.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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