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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North Africa) - 모로코(Morocco)

林 山 2010. 1. 27. 17:46

모로코 왕국(Kingdom of Morocco)은 동쪽으로 알제리, 남쪽으로 서사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해 있는 나라다. 수도는 라바트(Rabat)지만 최대도시는 카사블랑카(Casablanca)다. 면적은 446,550㎢이며, 한반도의 약 3.5배에 달한다.

 

모로코 지도


인구는 2019년 4월 현재 3,559만 명이다. 민족은 최대의 민족언어학적 집단인 아랍인과 아랍화된 베르베르인이 60%, 산지에 거주하는 덜 아랍화된 베르베르인이 36%를 차지한다. 그외 소수민족인 베두인 아랍족, 흑인, 유대인, 유럽인 등이 4%를 차지한다. 베르베르족은 리프, 타마지트, 슐루 등 세 방언집단으로 나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베르베르어(Amazigh어)와 프랑스어는 상용어, 통용어는 스페인어다. 프랑스어는 공공기관 및 언론, 식자층의 일상어로 사용된다. 1300만 명 이상의 모로코인이 모국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그외 약간의 포르투갈어 사용자도 있다. 최근 젊은 층에서는 프랑스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모로코 독립 이후 프랑스인과 스페인 사람들은 현저히 줄었다.  

 

모로코의 국교는 이슬람교다. 모로코인의 98.7%가 말리키 율법을 따르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테러리스트들의 사상이라 하여 허용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 개신교, 베르베르인들의 토착교회, 유대교 등 기독교는 1.1%밖에 안 된다. 모로코의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모로코인에 대한 선교 활동은 금지되어 있다. 주로 외국인을 위하여 전국에 카톨릭 성당 10개, 기독교회 5개, 유대교회 10개 등이 있다.  


모로코 수도 라바트


평균해발고도 800m의 산악국가인 모로코는 아프리카 북서부 아틀라스 산맥의 고원들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전국토의 20%를 차지하는 비옥한 충적 저지대인 물루야(북동쪽), 라르브(북서쪽), 하이아틀라스 산맥의 산록평원(중부), 수스평원(남서쪽)에서만 집약적 농업이 이루어진다. 

모로코 국기


모로코 국기는 붉은색 바탕에 초록색 5각 별이 그려져 있다. 붉은색은 순교자의 피와 왕실, 초록색 별은 평화와 자연을 상징한다. 별의 다섯 개 각은 모로코의 국교인 이슬람교의 다섯 가지 율법을 상징한다.


국토의 절반은 해발고도 549~915m의 암석고원이다. 동부지방의 고원들이 가장 높고, 라바트 해안과 남부 사하라 사막지대에도 고원이 있다. 모로코의 산들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으며, 모로코 전체 면적의 1/3 이상을 차지한다. 평균고도 2,458m의 리프 산맥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솟아 있으며, 중부에는 평균고도 3,355m인 아틀라스 산맥이 있다. 아틀라스 산맥은 북쪽으로부터 미들아틀라스, 하이아틀라스, 안티아틀라스로 나뉜다. 하이아틀라스에는 모로코 최고봉인 투브칼 산(Mount Toubkal, 4165m)이 솟아 있다. 


모로코 최고봉 투브칼 산(Mount Toubkal, 4165m)


모로코 북부와 중부 대부분 지방은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은 따뜻하고 습기가 많으며, 여름은 무덥고 건조한 반면 남부로 갈수록 반건조 기후와 사막 기후가 나타난다. 알제리처럼 모로코도 조산대에 속해 있어 지진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크다. 모로코는 세계 최대의 인산염이 매장되어 있는 나라다(590억t). 그외 철, 망간, 구리도 생산된다. 

 

BC 2000년대 말경 베르베르인이 현재의 모로코에 출현하였다.  BC 12세기에는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중해 연안에 교역소를 세웠고, BC 5세기에는 카르타고인들이 대서양 연안에 거점을 만들었다. 내륙 지역에는 베르베르계 마우리인의 마우레타니아 왕국이 번영하였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뒤,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왕 주바 2세(BC 25~AD 24 재위)가 통치하던 모로코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 46년 로마는 모로코를 모리타니 속주의 일부로 합병시켰으며, 이 속주는 로마 통치 후반기에 거의 기독교화되었다. 


7세기 말 모로코는 동쪽에서 온 이슬람교도의 침략을 받았으나, 740년 베르베르족은 다마스커스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그 결과 모로코는 우마이야 왕조나 아바스 왕조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지킬 수 있었다. 8세기경 모로코에는 최초의 이슬람왕국이 들어섰다. 11세기 중엽에는 베르베르족 동맹으로 수립된 알모라비데 왕조가 모로코 전역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이슬람교도 지역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12세기 초에는 또다른 베르베르족의 알모아데 왕조가 알모라비데 왕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한때 모로코와 알제리, 리비아, 이슬람권 스페인 전역을 통치했다. 알모아데 왕조는 13세기에 점차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모로코에서는 1269년 마린 왕조에 패배했다. 


15세기 중엽까지 계속된 마린 왕조의 통치 기간 동안 모로코에는 이슬람교 신비주의 교파인 수피즘(Sufism)이 발달했다. 마린 왕조 몰락 후 모로코는 작은 독립국가들로 나뉘어졌다가 1550년경부터 1세기 동안 사디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알라위 왕조의 술탄이 정치와 종교의 지배자가 되었다. 


1830년에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846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략하고 모로코의 지원을 강제하여 알제리의 지도자 아브델카데르를 사로잡았다. 1856년 영국은 모로코로부터 유리한 교역권을 받아냈으며, 1859년 스페인은 모로코를 조종하여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확장했다. 


1905년과 1911년 모로코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를 모로코 사건이라고 한다. 모로코 사건으로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콩고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모로코 사건 이후 1912년 모로코 술탄 모울라이 아브드 알 하피드는 프랑스 보호령의 지위를 받아들이고 식민지로 전락했고, 탕헤르(Tangier)는 국제 관리지대가 되었다. 


탕헤르


1934년 12월 프랑스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모로코인들이 프랑스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모로코 최초의 정당 국민행동위원회(National Action Bloc, NAB)를 결성했다. 모로코 정부에 이슬람교도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등 NAB가 제안한 개혁정책은 프랑스인들에 의해 거부당했지만, 아랍어가 프랑스어와 함께 공용어로 인정받게 되었다. NAB가 모로코 국민들로부터 점차 지지세력을 확보하자 프랑스는 강제로 NAB를 해산시켰으며, NAB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했다.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모로코의 민족주의를 일깨웠다. 아마드 발라프레이는 1943년 모로코로 돌아와 이스티클랄당(Parti d’ Istiqlal, PI, 독립당)을 창립하고, 모로코 해방운동을 이끌었다. 1956년 3월 2일 모하메드 5세(Sidi Mohammed ben Yusef, 1909~1961) 술탄이 이끄는 모로코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여 입헌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해 모로코는 국제연합에도 가입하였다. 국제 관리지대 탕헤르는 1956년 6월 7일, 서사하라를 제외한 스페인령은 8월 12일에 모로코왕국에 반환되었다. 


1961년 모하메드 5세를 이어 하산 2세(Mawly Hassan Muammad Ibn Ysuf, 1929~1999)가 즉위했으며, 그해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모로코는 몇 차례의 군부 쿠데타로 의회정부 수립이 지연되었다. 1962년 12월 하산 2세는 모로코가 입헌군주국임을 선포하였다. 1972년 3월 모로코는 국왕이 삼권을 장악하는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였다. 모로코는 명목상 왕권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 입헌군주제였지만, 국왕은 의회 해산권과 비상사태 선포권 등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1975년 11월 스페인이 PF와 모로코가 서로 싸우도록 남겨둔 채 군대를 철수시키자 모로코는 서사하라를 점령하였다. 모로코는 약 35만 명의 모로코인들을 서사하라로 이주시켜 이 지역이 자국 영토임을 거듭 주장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서사하라 폴리사리오 해방전선(Polisario Front, PF)은 1976년 2월 알제리의 틴두푸(Tindouf)에 망명정부인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Republique Arabe Saharouie Democratique)의 수립을 선포하고, 알제리의 지원하에 대 모로코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모로코는 폴리사리오 해방전선(PF)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알제리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1977년 선거를 통해 왕정 지지자들이 권력을 잡은 모로코는 1979년 3월 이디오피아, 4월에는 이집트와도 단교하였다. PF와의 전투로 모로코는 1년 예산 가운데 거의 25%를 사하라 전쟁 유지비로 지출해야만 했다. 1981년 5월 모로코에서는 사하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생활고와 식료품 가격 폭등, 노사 분규 등이 겹쳐 대규모 유혈폭동이 일어났다.  


아프리카단결기구(OAU)와 국제연합은 1983년 모로코와 PF 간의 직접교섭과 서하라에서의 휴전 및 국민투표 실시를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하지만 모로코는 이에 응하지 않고 서사하라 문제의 군사적 해결에 집착함으로써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984년 1월에는 사하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야당과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유혈폭동이 일어났다. 


1984년 들어서 PF를 승인하는 국가 수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PF는 아프리카단결기구 제20차 정상회의에 정식으로 참가했다. 모로코는 이에 항의하여 아프리카단결기구에서 탈퇴하였다. 1980년대에도 모로코는 서사하라 개발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알제리, 모리타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8년 모로코와 PF 양측은 UN의 평화안을 수락했다. 1989년 2월 모로코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리타니와 아랍-아그레브연합(AMU)을 결성하고, 1991년 9월에는 PF와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분쟁종식에 주력했다. 휴전이 발효되자 국제연합 서사하라 주민투표 지원단(MINURSO)이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주민투표 참가자격에 대한 모로코 측의 이의신청자가 7만9천 명에 이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6세


1999년 7월 하산 2세 뒤를 이어 현 국왕 모하메드 6세(Sidi Moulay Mohammed Ben Al-Hassan, 1963~)가 즉위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내놓았다. 과거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였던 아베라하메 유수피(Aberrahame Youssoufi) 사회당 당수의 원만한 국정운영으로 점진적인 정치 민주화가 추진되었다. 정치적 이유로 실종되었거나 구속당한 양심범들에 대한 보상위원회가 설치되고, 해외로 망명한 반정부 인사들의 귀국도 허용하였다. 


2002년 9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26개 정당이 참여해서 22개 정당이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 선거에서 여당연합의 다수당이었던 사회당(Union Socialiste des Forces Populaires, USFP)의 의석은 크게 줄어든 반면, 온건 이슬람 정당인 정의개발당(Parti de la Justice et du Developpement, PJD)이 제3당으로 부상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같은 현상은 경제성장의 둔화, 경제개혁의 부진에 따른 높은 실업률과 빈곤층의 증가, 빈부격차의 확대로 인한 이슬람 원리주의의 득세가 원인이었다.  


그동안 모로코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중시하는 등 온건노선을 취하여 왔으며, 이슬람권 중에서 비교적 안전한 국가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2003년 5월 16일 카사블랑카에서 연쇄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테러 주동세력은 모로코를 포함한 아랍 이슬람권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 증대를 반대하는 자생적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빈민층 출신 모로코인들이었다. 모로코는 카사블랑카 테러 직후 대테러법을 제정하여 사회안정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단속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모하메드 6세는 2005년 5월 빈곤 퇴치와 소외계층의 국민통합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인적 자원 개발을 위한 국가 구상'을 제창하였다.


2006년 9월 실시된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독립당(PI, Parti de l'Istiqlal), 사회당, 민중운동당(MP, Mouvement Populaire) 등 연립여당의 주요 정당들이 선전하여 다수당의 위치를 유지하였으며, 총 13개 정당이 의석을 확보하였다. 모로코의 주요 정당은 2007년 당시 독립당, 사회당, 민중운동당, 정의개발당 외에 자주국민연합(RNI, Rassemblement National des Indépendants), 헌정연맹(UC, Union Constitutionnelle), 진보사회당(PPS, Parti du Progres et du Socialisme) 등이 존재했다. 


카사블랑카

 

그런 가운데 2007년 3~4월 카사블랑카 자살 폭탄 테러범 검거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테러리스트 6명, 경찰 1명 등 7명이 사망하였으며, 8월 13일에는 메크네스(Meknes)에서 버스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모로코의 높은 실업률과 빈곤층의 증가는 사회불안의 요소로 작용했다.


2007년 실시될 예정이던 서사하라 독립에 관한 주민투표가 어려워지게 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모로코와 PF, 알제리, 모리타니 간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는 기본협정을 채택하였다. 기본협정은 모로코의 외교권과 국방권을 인정하면서 서사하라 지역의 자치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를 규정하고 있다. 모로코는 기본협정에 찬성했으나 알제리와 PF가 반대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분쟁의 해결이 불투명해졌다.


2011년 3월 '아랍의 봄' 영향으로 정국 불안의 조짐이 보이자 모하메드 6세는 포괄적 정치개혁을 위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11월 7일에는 헌법을 개정해서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고, 정부수반의 권한을 강화했다. 2012년 1월 3일 온건 이슬람 성향의 압델릴라 벤키라네(Abdelilah Benkirane) 정부가 출범했다. 2013년 10월에는 벤키라네 정부수반의 제2기 내각이 출범했다. 모하메드 6세가 지지를 받는 가운데, 벤키라네 정부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지만,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17.9%), 빈부격차의 심화,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위협으로 불안정 요인도 상존했다. 


마라케쉬


2015년 신헌법에 예정되었으나 하위법령 미비 및 지방행정구역 개편 등으로 연기되었던 직능선거(8월), 지방선거(9월), 상원선거(10월)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기존 국왕 세력과 신흥 이슬람 세력 간 양강 구도가 형성되었다. 2016년 10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PJD)이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해 11월 마라케쉬(Marrakesh)에서 개최된 COP22를 통해 모로코는 개방적 온건 이슬람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2017년 1월 모로코는 아프리카연합(AU)에 복귀했다. 그해 3월 17일에는 사드 에딘 엘 오트마니(Saad Eddine El Othmani) 정부수반의 신내각이 출범했다. 2018년 5월 이후 6개 연립정부 내 정당 간 권력 투쟁으로 RNI 소속의 부사이드(Boussaid) 재경장관이 경질되는 등 연정 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사드 에딘 엘 오트마니 행정수반


모로코의 정부 형태는 입헌군주제이다. 현재 국왕은 모하메드 6세이고, 정부수반은 엘 오트마니 총리이다. 모로코는 입헌군주국으로 세습 국왕에게 최고 행정권이 있으며, 국왕이 총리와 대법원장을 임명한다. 총리가 신정부를 구성하지 않으면 국왕이 총리를 겸할 수도 있다. 국왕은 3권을 초월한 존재이며, 종교의 수장이자 모로코 군 참모총장을 겸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다. 


모로코는 현재 유엔을 비롯해 지중해 연합, 아랍 연맹, 마그레브 연합, 아프리카 연합의 회원국이다. 대외적으로 우경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마그레브연방의 건설, 아랍 및 아프리카의 단결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화폐는 모로코 디르함(Morocco Dirham, MAD)이다. 환율은 1US$=9.39MAD이다. 


모로코 국회는 상하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원(Chambre des Representants)은 지역구 295명, 여성 전국구 30명 등 총 325석이다. 임기 6년으로 직선에 의해 선출된다. 상원(Chambre des Conseillers)은 지방자치단체 대표 162석, 직능대표 91석, 노동자 대표 27석 등 총 270석이다. 임기는 9년으로 매 3년마다 재적의원의 1/3을 선출한다. 모로코 사법부는 독립되어 있고, 대법원이 최고 사법권을 가진다.  

 

모로코의 교육제도는 모로코를 식민통치한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거의 그대로 모방하였다. 모로코는 최근 교육에 큰 비중을 두어 국가예산의 약 25%를 교육에 투자한다. 교육은 7~13세의 어린이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아직 문맹률이 52%에 달한다. 모로코에는 Universite Mohammed V Agdal, Universite Hassan II Ain Chock, Universite al Karaouiyne 등 정부가 운영하는 13개의 종합대학교와 9개의 특수대학이 있다. 이프란에 있는 Al Akhawayn University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모로코 유일의 미국계 사립 종합대학이다. 특수대학은 정부가 운영하며 전문관료와 경영인, 교원, 전문기술자 등 고급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모로코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다. 이중 카사블랑카 소재의 ISCAE(Institute Superieur de Commerce et Administration des Entreprises)는 경영전문대학으로 입학 경쟁률이 가장 높은 유명대학이다. 2년제를 포함한 사립대학은 32개가 있다.  

 

모로코 언론은 주로 관변언론이며, 그것도 보급율이 매우 낮은 편이어서 일부 제한된 사람들만이 이를 접할 수 있다. 문맹률이 높아 인쇄매체보다 국유 전파매체가 훨씬 중요하며 교육 및 종교 프로그램에 중점을 둔다. 모로코에는 RTM과 Medi I 등 2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Medi I은 1980년 설립된 모로코 유일의 민간 라디오 방송국이다.  TV 방송국은 2개가 있다. RTM TV는 국영이고, 민간 상업 TV 방송인 2M도 68% 주식을 국가가 보유함으로써 사실상 국영이나 다름없다. 주요 일간지는 총 19종이 있다. 1958년 설립된 국영통신사 MAP는 10개의 지방국과 17개의 해외지사를 두고 있다.

 

한국은 1962년 모로코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관을 개설했다. 모로코는 1966년 이후 주일본 대사가 주한대사를 겸임해오다가 1988년 12월 대사관을 설치했다. 수교 이후 양국은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서의 협력은 꾸준히 확대되어 왔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도 긴밀한 공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양국 간에는 무역협정과 경제기술협력협정(1976. 5), 군사협력합의각서(1977. 8), 문화·과학협력협정(1977. 9) 등이 체결되어 있다. 2019년 현재 모로코 교민은 428명이다. 

 

모로코는 그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이는 북한이 PF에 군사원조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모로코는 1989년에 이르러 북한과도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북한은 주이집트 대사가 모로코 대사를, 모로코는 주중국 대사가 북한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모로코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서 북한 핵문제나 남북한 간 대화, 통일문제 등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 왔다.


2020. 1. 11.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