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타니 이슬람공화국(République islamique de Mauritanie, Islamic Republic of Mauritania)은 북쪽으로 서사하라와 알제리, 남서쪽으로 세네갈, 남쪽과 동쪽으로 말리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대서양에 면해 있는 나라다. 모리타니란 나라 이름은 고대의 베르베르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왕국 이름에서 유래했다. 국토 면적은 1,030,700㎢(한반도의 약 4.7배)에 달하며, 15개 주와 1개 특별구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대서양 연안의 누악쇼트(Nouakchott)이다.
모리타니 지도
모리타니의 인구는 406만 명(2019년 10월 현재)이다. 주요 종족은 백인계 무어족(30%,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 집권세력)과 흑인계 무어족(40%), 아프리카계 흑인(30%)이다. 목축민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족은 아랍어 계통의 방언인 하사니야어를 쓴다. 아프리카계 흑인은 세네갈 강 유역에 사는 투쿨로르족, 남쪽에 퍼져 사는 풀라니족, 남서부 해안지대의 로소 근처에 사는 월로프족 등이 있다.
모리타니아 수도 누악쇼트
모리타니의 국어는 아랍어,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그외 풀라니어, 소닝케어, 월로프어가 국민언어로 쓰인다. 고등교육을 받은 상업 관계자나 정부 공무원, 교육 관계자들은 프랑스어를 많이 사용한다. 모리타니의 종교는 100% 수니파 이슬람교다. 1991년 헌법개정으로 이슬람법이 정식으로 채택되어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했다.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종교법이 엄격하여 다른 종교의 선교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선교활동을 하다가 적발되면 국외로 추방된다.
모리타니 국기
모리타니는 국토의 약 40%가 목초지로 주민 대부분이 소나 염소, 양, 낙타를 방목하는 유목민이다. 국민의 80% 이상이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한다. 서남부의 세네갈 강 유역에서는 조나 옥수수, 땅콩, 쌀이 재배된다. 대서양에는 풍부한 어장이 있어 수산업과 수산물가공업도 성장하고 있다.
포르토그로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은 철도편으로 누아디부(Nouadhibou) 항까지 수송되어 수출된다. 철광석은 정부 세입의 50%를 차지한다. 구리도 수출하고 있으며, 금의 개발도 활발하다. 원유 매장량은 1억 배럴, 1일 생산량은 1.5만 배럴이다. 천연가스 매장량은 283억m³로 추정된다.
모리타니 항구도시 누아디브
사하라 사막 서쪽에 위치한 모리타니는 국토의 대부분이 저지대 사막이며, 전국토의 약 50%를 사구가 차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는 대서양 해안의 평야지대와 세네갈 강을 따라서 분포한다. 내륙은 수많은 섬산이 솟아 있는 평원지대이다. 섬산들 가운데 케디에트이질 산(915m)이 최고봉이다. 건조한 내륙 고원에는 여러 군데의 와디(wadi, 건곡)가 있다.
기후는 사하라 사막기후로 고온 건조하고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남부는 사헬 기후 지역으로 7∼10월에 한 번의 우기가 있지만 강우량은 적은 편이다. 최남단의 수단 사바나 지역에는 바오밥나무와 팔미라야자나무가 자란다. 서사하라와 알제리 접경지역인 북부는 건조한 사막지대이다. 남부 사바나 지대에는 영양, 사자, 코끼리 등이 서식하고 있고, 중남부의 사헬 초원지대에는 가젤, 타조, 멧돼지, 표범 등이 서식하고 있다. 물이 마르지 않는 하천에는 악어가 살고 있다.
신석기시대 모리타니에는 소닌케족의 조상인 바푸르(Bafour)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바푸르족은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정착 농경민이 된 아프리카 최초의 부족이었다. 이 지역에 가뭄이 들자 바푸르족은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5세기경 북아프리카에서 산하자 베르베르족이 서부 사하라로 들어와 남아 있는 원주민을 밀어내거나 노예화하였다. 8~11세기까지 가나, 말리 제국은 세네갈 강 인근의 농경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1076년 이슬람교도 무어인들의 전사 수도승들이 세운 알모라비드(Almoravid, Almurabitun) 왕국은 가나 제국을 공격해서 정복했으며, 이어 말리 제국도 멸망시켰다. 11세기 이후 베르베르족은 강력한 알모라비드 왕국을 건설했다. 11∼12세기에 이곳은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에 이슬람을 강요한 베르베르족 알모라비드 운동의 발상지였다.
14세기에는 아랍의 하산조 군대가 남부 지역에 이슬람 왕조를 수립하고, 200년 후에는 중부까지 진출하여 베르베르인을 통치하게 되었다. 유목생활을 하던 아랍 부족은 몇 개의 강력한 동맹을 결성했다. 트라르자와 브라크나는 세네갈 강 지역을 차지했으며 동쪽에 쿤타, 북쪽에는 리가이바트가 있었다.
15세기에는 포르투갈인이 모리타니에 찾아와 아르구인 요새를 세웠으며, 이후 모리타니의 해안 영토를 놓고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1644년 베니 하산 부족을 중심으로 아랍 예멘의 마킬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한 모리타니 30년전쟁(1644 ~ 1674년)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베니 하산 부족 전사들의 자손들은 모리타니 사회의 최상위층이 되었다.
1817년 세네갈 조약으로 모리타니는 프랑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1904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가 된 모리타니는 1920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1959년에는 프랑스의 자치령이 되었다. 1960년 11월 28일 모리타니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모리타니는 독립일까지 근대국가로서의 국가기구나 수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 이후에도 모리타니는 프랑스와 기존의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며, 비동맹 중립노선을 외교기조로 삼았기 때문에 공산권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모크타르 울드 다다
1961년 8월 모리타니 수상 겸 임시국가 수반인 모크타르 울드 다다(Moktar Ould Daddah, 1924~2003)가 신헌법 하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해 모리타니는 유엔에 가입했다. 12월 다다 대통령은 모리타니 인민당 (PPM, Parti du Peuple Mauritnaien)을 창당했다. 1964년 다다는 다른 모든 정당을 통합하여 인민당 일당체제를 수립했다. 그해 모리타니는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1974년 모로코가 서사하라를 병합하자, 모리타니도 군대롤 보내 서사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해 프랑스 회사의 자산을 국유화해서 세운 북부종합광산회사가 철광석 개발을 담당했다.
1975년 모리타니는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마드리드협정 체결로 스페인이 서사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모리타니는 1976년 2월 마드리드협정에 따라 서사하라 남부, 모로코는 서사하라 북부를 병합했다. 모리타니가 서사하라를 병합하자 서사하라 인민해방전선(The Polisario, Polisario Front)은 모리타니아 군과 전투에 돌입했다. 1976년 3월 모리타니는 서사하라 인민해방전선(폴리사리오)을 지원하는 알제리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1977년 5월 모로코와 공동방위 협정을 체결했다.
1978년에 석유 정제를 위한 정유소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아크주트의 구리광산의 재개발을 위해 새로운 회사도 세워졌다. 이해부터 석유와 텅스텐, 철, 인회석, 우라늄 등의 광물자원을 독점생산하던 국영 모리타니광공업회사는 민간부문의 참여를 허용했다.
1978년 7월 폴리사리오와의 전쟁 수행으로 경제가 악화되고 이로 인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무혈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모크타르 울드 다다(Moktar Ould Daddah, 1924~2003) 초대 대통령을 축출한 무스타파 울드 모하메드 살렉(Moustapha Ould Mohamed Saleck) 중령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국가재건군사위원회와 국가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1979년 8월 모리타니는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서사하라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폴리사리오 망명정부와 서사하라에 대한 일체의 권리 포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듬해 모리타니가 서사하라의 티리스엘가르비아 지역의 통치권을 포기하자 모로코가 이곳을 합병했다. 모리타니는 알제리와 외교관계를 재개한 반면, 1975년에 모로코와 맺은 방위동맹을 파기했다. 1980년대 초 세계 철광석 수요가 줄어들면서 무역수지가 적자를 보이자 모리타니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차관협정을 맺어 경제구조를 조정하는 한편 지출을 억제시켰다.
모하메드 쿠나 울드 하이달라
1979년 4월 아메드 울드 보우시프(Ahmed Ould Bouceif) 중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수상직에 취임하였으나, 한달 뒤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1979년 6월 모하메드 울드 아메드 라울리(Mohamed Ould Ahmed Louly) 전 총리가 신임 대통령 및 구국군사위원장, 국방장관인 모하메드 쿠나 울드 하이달라(Mohamed Khouna Ould Haidalla, 1940~)가 수상 겸 국방상에 취임하였다.
1980년 1월 하이달라 수상 겸 국방장관은 쿠데타로 대통령 및 구국군사위원장에 취임하였다. 하이달라가 이끄는 구국군사위원회는 1960년에 제정된 헌법을 정지시키고, 이슬람 율법을 법체제의 기본원리로 하는 임시헌법을 공포했다. 그해 12월 모리타니는 하이달라를 대통령, 마우야 울드 시드 아메드 타야(Maaouya Ould Sid'Ahmed Taya, 1941~) 참모총장을 수상으로 하는 군인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였다. 1982년 2월 살렉 전 대통령과 브네이자라(Bneijara) 전 수상(대통령실 장관)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가 관련된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었다.
마우야 울드 시드 아메드 타야
1984년 12월 12일 타야 참모총장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하이달라 대통령을 축출하고 자신이 구국군사위원회 의장 겸 국가원수로 취임하였다. 1986년에 모리타니는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1980년대 후반 흑인들이 소외되자 무어인과 흑인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풀라족(Pular)이 주도한 흑인 쿠데타에 대한 타야 정권의 강경진압으로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타야 정권이 500여 명의 부족지도자들을 처형하자 20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이 말리나 세네갈로 피신하였다. 1989년 수도 누악쇼트에서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을 타야 정권이 강경진압하면서 주변국 말리와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민주화에 대한 국제적 압력과 해외원조를 받기 위한 필요성에서 타야 정권은 민주화 개혁을 시작했다. 1991년 7월 모리타니는 다당제 헌법을 채택하였다. 1992년 1월 실시된 대선에서 타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해 3월 실시된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사회민주공화당(PRDS, Parti du Rassemblement Democratique et Social)이 승리했다. 다당제의 실시로 야당 세력도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2년 4월에는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시드 모하메드 울드 부바카르(Sid Mohamed Ould Boubacar) 총리 내각이 출범하면서 구국군사위원회는 해체되었다. 1994년 1월에는 지방의회선거가 실시되었다.
1996년 10월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부정선거운동에 항의하는 야당의 선거 보이코트로 PRDS가 압승을 거두었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는 부정선거운동 의혹으로 야당이 선거를 보이코트한 가운데 타야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001년 10월에는 제3차 총선과 제5차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15개 야당이 후보를 내세워 의회 11석, 지방의회 의석의 15%를 차지했다.
2003년 11월 실시된 대선에서도 타야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하였다. 타야 정권은 대선 라이벌 하이달라를 여론조사일 전날 체포하여 구금함으로써 스스로 선거의 정당성을 뒤집어 엎었다. 야당 지도자들은 타야 정권이 광범위한 부정선거와 야당에 대한 위협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재선거를 요구했다. 하이달라는 대법원에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타야 정권에 예속된 사법부는 그 제소를 기각했다.
엘리 울드 모하메드 발
2005년 8월 엘리 울드 모하메드 발(Ely Ould Mohamed Vall, 1953~) 치안총감과 모하메드 압델 아지즈(Mohamed Abdel Aziz, 1956~) 경호실장 등 타야의 측근들은 집권세력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타야가 사우디아라비아 파드(Fahd) 국왕의 장례식에 참석차 해외순방 기간 중 쿠데타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정의민주군사평의회(CMJD, Military Council for Justice and Democracy)를 설치했다. CMJD는 의회를 해산하고 1990년대 타야 정권에서 총리를 역임한 부바카르를 총리로 하는 신정부를 구성하여 2년 간 군정을 실시했다. CMJD 발 의장은 임시군정의 수장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CMJD는 1년 이내 개헌, 2년 이내 총선 실시, 야당 등록의 허가 등 민주화 일정을 제시하였다. 임시 군정은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위해 2005년 11월 독립적 선거관리기관(CENI, Commission Electorale Nationale Indépendante)를 설립하고 향후 선거일정(2006. 6. 24 개헌 투표, 11. 29 총선 및 지방의회 선거, 2007. 1. 21 상원 선거, 2007. 3. 11 대통령 선거)을 발표하였다. 발 의장을 포함한 CMJD 위원 17인 모두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2006년 6월 임시군정은 개헌을 통하여 대통령 임기를 6년 연임제에서 5년 중임제로 변경하고, 대통령의 정당 당수 겸직을 금지하였으며, 법관 최고회의를 신설하여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하였다. 또한 언론의 검열을 폐지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지방자치권을 확대하였다.
2006년 11월과 12월 실시된 1, 2차 총선에서 총의석수 95석 중 야당연합의 민주변화동맹(CFCD, Coalition des Forces du Changement Democratique)이 차지한 40석 가운데 RFD(Rassaemblement des Forces Democratiques)가 15석을 확보하여 제1당이 되었다. 타야 정권에서 집권당이었던 PRDS는 2006년 8월 쿠데타 이후 타야 지지세력과 신정권 지지세력으로 분열되면서 몰락했다. 이전의 PRDS에서 당명을 바꾼 PRDR(Parti Republicai pour la Democratie et le Renouveau)은 겨우 7석을 얻는데 그쳤다. 반면에 PRDR 출신 무소속은 16석을 차지했다. 그외 UFP(Union des Forces du Progres)가 8석, APP(Alliance Poplulaire Progressiste)가 5석을 얻었다. 온건 이슬람 정당과 무소속은 총 31석을 차지했다.
시디 울드 셰이크 압달라히
2007년 1월 지방의회 의원이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간선제로 실시된 상원선거 1차 투표에서는 미결정 선거구를 제외한 38석(총 53석) 가운데 무소속이 23석을 차지했다. 그해 3월 실시된 대선에서는 시디 울드 셰이크 압달라히(Sidi Ould Cheikh Abdallahi, 1938~2007)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모하메드 압델 아지즈
2008년 8월 6일 모하메드 압델 아지즈가 쿠데타를 일으켜 문민정부의 셰이크 압달라히 대통령 등을 포함한 고위층 인사를 체포함으로써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쿠데타 이후 설립된 고등국가평의회 의장을 역임한 아지즈는 2009년에 실시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아지즈는 지역협력기구(UMA), 아랍연맹, 아프리카 연합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프랑스에 이어 스페인과도 기존의 우호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2011년 2월 '아랍 민주화 시위'의 영향으로 모리타니에도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였으나 영향력은 미미했다. 모리타니가 서방국과의 테러 공조 추진에 불만을 가진 알카에다 마그레브 지부(AQMI)는 아지즈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다. 또 대통령궁과 군부대, 프랑스 대사관 등을 겨냥한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모리타니는 2014년 아프리카 연합 의장국이 되었다. 그해 6월 21일 실시된 대선에서 압델 아지즈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두 달 뒤에는 총리를 교체했다. 2017년 3월 9일 모리타니 하원은 상원 폐지, 국기 및 국가 변경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정부제출 헌법개정안을 채택했다. 아지즈는 2018년 10월 29일에도 총리를 교체했다. 2019년 6월 22일 실시된 대선에서는 모하메드 울드 셰이크 엘 가즈와니(Mohamed Ould Cheikh El Ghzouani, 1956~)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가즈와니는 이스마일 오울드 베다 울드 체이크 시디야(Ismail OUld Bedda Ould Cheikh Sidiya, 1961~)를 총리로 임명했다.
모하메드 울드 셰이크 엘 가즈와니
모리타니는 1991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중심제 이슬람공화국이지만 1978년 이후 군부 쿠데타가 빈번하게 일어나 사실상 군부 독재국가나 다름없다. 대통령도 그동안 거의 군부에서만 배출되었다. 이 나라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임기 5년의 대통령은 재선이 가능하며, 반드시 무슬림이어야 한다. 입법부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직선인 81석의 하원은 임기 5년이다. 사법부는 최고재판소와 하급재판소로 구성된다.
모리타니에 현재 등록된 언론은 400개 이상이나 그 중 30여개만이 실제로 발행되고 있다. 언론매체는 헌법상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그동안 군부 독재정권 하에서 광범위한 검열이 행하여졌다. 프랑스어로 발행되는 Horizon은 국영 일간지이고, CHAAB는 아랍어 일간지다. AMI(Agence Mauritanienne de Presse)는 통신사다.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TV와 라디오는 TV방송 1, 라디오 방송 AM 1, FM 2, 단파 1 등이 있다. 국영 TV 방송은 아랍어, 불어로 방송되며, 위성방송을 통해 프랑스 방송 등 다수의 채널을 시청할 수 있다.
수단-마그레브 교통로의 중심지 오왈래타
12세기에 건설된 유목민의 중심지 오우아데인
모리타니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4곳의 고대도시가 있다. 11세기에 건설된 수단-마그레브 교통로의 중심지 오왈래타(Oualata)는 건물장식이 아름다운 모스크가 유명하고, 오우아데인(Ouadane)은 12세기에 건설된 유목민의 중심지로 유목행상단의 사하라 횡단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티치트(Tichit)는 12세기에 세워진 사막의 진주라고 불리워지던 곳이며, 칭게티(Chinguitti)는 13세기에 건설된 유목행상단의 중심도시이자 교육중심지로 모스크와 고도서관이 있다.
사막의 진주라고 불리던 티치트
13세기에 건설된 유목행상단의 중심도시 칭게티
모리타니의 의무교육은 6년이다. 초등학교 등록 비율은 86%다. 15세 이상 문맹률은 62.3%(남자 50.4%, 여자 73.7%)에 이른다. 6~14세까지의 취학률은 남녀 44.22%에 불과하다. 모리타니는 가난하지만 사회복지제도가 있어 노령수당과 출산보조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가난한 나라이기에 유아 사망률이 출생아 천 명당 약 127명으로 매우 높고, 평균수명은 약 46세로 매우 낮다. 1980년 7월 백인 무어인 유목민 사이에 행해지던 흑인 무어인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으나 그 실행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런던에 본부를 둔 반노예제협회는 보고서에서 아직도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노예가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 케빈 베일스 교수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아직도 전세계에는 2,7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상태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노예의 수가 많은 국가는 인도(1,800만~2,200만), 파키스탄(250만~350만), 브라질(30만~50만), 중국(25~50만), 네팔과 모리타니(25만~30만), 미국(10만~15만) 순이다. 베일스 교수는 아이티나 미얀마, 타이,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등 후진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도 수만 명의 노예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베일스 교수는 한국에도 1만~1만5천 명의 노예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언론매체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신매매에 관한 보도가 그 증거다. 한국에도 엄연히 현대판 노예선인 멍텅구리배, 인신을 구속당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성노예들이 있지 않은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과 모리타니는 1963년 7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모리타니가 1964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수교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국교를 단절했다. 그뒤 1978년 11월 양국은 다시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1984년 어업협정 체결 후 모리타니에 한국 원양어선과 선원들의 진출이 한결 수월해졌다. 모리타니에는 현재 상주공관이 없고, 주 모로코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모리타니는 주 일본 대사가 겸임한다. 한국 교민은 2018년 현재 66명이다. 모리타니는 현재 여행경보가 발효 중이다. 누악쇼트와 누아디브는 황색경보(여행자제), 그외 전 지역은 적색경보(철수권고)가 내려져 있다.
북한과 모리타니는 1964년 11월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외교관계 수립 이후 다다 모리타니 초대 대통령은 1967년과 1974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75년 모리타니를 방문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북한이 1977년 6월 1일 서사하라의 폴리사리오를 승인하자 모리타니는 이에 대한 항의로 국교를 단절했다. 1979년 8월 모리타니가 폴리사리오와 알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북한과의 외교관계 단절사유가 없어짐으로써 양국은 1980년 3월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외교관계 재개 이후 하이달라 대통령은 1982년 4월 북한을 방문한 바 있다. 북한은 주 리비아 대사, 모리타니는 주중국 대사가 겸임한다.
2020. 1. 19.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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