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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East Africa)-소말리아(Somalia)와 소말릴란드(Somaliland)

林 山 2010. 1. 28. 14:28

소말리아 연방공화국 (Federal Repubic of Somalia) '아프리카의 뿔'에 해당하는 대륙 최동단의 돌출부에 자리잡은 나라다. 소말리아는 적도에서 홍해까지 뻗어 북쪽으로 아덴 만, 동쪽으로 인도양에 면하고 있다. 또 북서쪽으로 지부티, 서쪽으로 에티오피아, 남서쪽으로 케냐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소말리아 지도


소말리아의 국기는 1954년 10월 12일에 제정되었다. 하늘색 바탕 가운데에 하얀색 오각별이 그려져 있다. 소말리아의 독립에 유엔의 공헌이 크기 때문에 유엔기와 비슷한 색상을 가진 디자인을 띠고 있다. 하얀색 오각별은 소말리아인이 거주하는 5개 지역의 단결을 의미한다.


소말리아 국기


면적은 637,657㎢로, 한반도의 약 3배 정도이다. 인구는 주변국가로 피신한 43만 명의 난민을 포함해서 2018년 기준 약 1,126만 명이다. 수도 모가디슈(Mogadishu)는 소말리아의 최대 도시이자 대표적인 항구다.  


소말리아의 민족 구성은 소말리아인 85%, 반투족 등 비소말리아인 15%(아랍인 3만 명 포함)이다. 소말리아의 4대 종족은 다로드족(Darod), 라한웨인족Rahanweyn=Digil-Mirifle), 디르족(Dir), 하위예족(Hawiye)이다. 라한웨인족등 소수 반투족은 유목민이다. 소수 반투족 유목민들은 소말리족으로부터 오랫동안 멸시를 당해왔기 때문에 부족간의 대립이라는 불씨가 남아 있다. 이탈리아인, 인도인도 소수 있다. 


소말리아의 공용어는 소말리어(마아이와 마하하티리)와 아랍어다. 지식층에서는 주로 아랍어를 사용한다. 북부에서는 영어, 남부에서는 이탈리아어와 스와힐리어도 통용된다. 일부는 러시아어도 통한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전국민의 99%가 무슬림이다. 무슬림 중 대부분은 수니파에 속한다. 소수종교로는  0.04%에 불과한 가톨릭과 개신교 등 기독교가 있다.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소말리아 북부 아덴 만 연안의 구반 해안평원은 반건조지대로 강우량이 적고 고온다습한 지역이다. 구반 평원의 남쪽으로 에티오피아와의 북서쪽 국경으로부터 '아프리카의 뿔' 끝까지 산맥이 뻗어간다. 이 산맥에는 소말리아의 최고봉 수루드카드 산(2,407m)을 비롯하여 많은 고봉들이 솟아 있다. 이 산맥의 남쪽에는 기후가 보다 서늘하고 건조한 하우드 평원이 펼쳐져 있다.

 

주바 강(Jubba River)


소말리아의 남부는 경사가 완만한 평원지대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발원한 주바 강(Jubba River)과 셰벨리 강(Shebeli River)은 소말리아를 지나 인도양으로 흘러든다. 농경지는 국토의 1% 정도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목초지나 방목지로 이용되고 있다. 소말리아는 인구의 2/3 이상이 유목민이거나 반유목민으로, 건기에는 마을에 모여 지내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가축을 끌고 각 지역으로 흩어진다.


셰벨리 강(Shebeli River)

 

소말리아는 열대와 아열대 기후의 매우 더운 나라여서 강수량이 불규칙하고, 그래서 가뭄이 자주 일어난다.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낮 최고기온이 30∼42℃를 오르내린다. 최저기온은 18∼27℃ 정도이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5월~10월의 남서계절풍, 12월~2월 북동계절풍 기간에는 기온이 다소 내려기기도 하지만, 계절풍이 나타나지 않는 3~4월과 11월은 매우 덥고 습하다. 소말리아에는 사자, 코끼리, 하이에나, 여우, 표범, 기린, 얼룩말, 영양 등이 서식한다.

 

고대로부터 소말리아는 상업 중심지였다. 소말리아의 선원과 상인들은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미케네에 유향, 몰약, 향신료 등을 공급하였다. 소말리아의 북부와 동부 해안은 고대 푼트(Punt) 왕국의 일부였다. 푼트는 지금의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해안, 지부티 해안에 해당한다. 


고대 푼트인들은 제5왕조 2대 파라오 사후레(Sahure, BC 2491~BC 2477)와 제18왕조 3대 파라오 하트셉수트(Hatshepsut,, BC 1508~BC 1458) 시대에 이집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소말리아에 있는 피라미드, 신전, 석조 가옥도 이 시대의 것이다. 고전기에 사바(Saba') 왕국과 경쟁하던 오포네(Opone), 모실론(Mosyllon), 말라오(Malao) 같은 고대 도시국가와 파르티아(Parthia), 악숨(Aksum)은 부유한 인도나 그리스, 로마와의 교역으로 소말리아에서 번성하였다.


7∼10세기 이슬람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은 아덴 만과 인도양 연안의 무역 중심지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10세기에 아덴 만 내륙지방은 소말리아 유목민, 남부와 서부는 농경민인 갈라족이 차지했다. 


아랍에서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소말리아 상인, 선원, 거류민들이 점차 새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이 발생하고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소말리아로 무슬림이 이주하고, 무슬림 학자가 소말리아 사람들을 개종시키면서 고대 도시국가들은 이슬람화되어 베르베리(Berberi) 문명의 일부가 되었다. 베르베리 문명의 일부가 된 모가디슈, 메르카(Merca), 브라바(Brava), 베르베라(Berbera) 등의 무역 중심지에는 이슬람교가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의 도시'로 알려진 모가디슈는 수백 년 동안 동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을 장악하였다.


중세 시대에 여러 강력한 소말리아 제국들은 이 지역의 교역을 지배하였다. 아주란 왕국(Ajuuraan State)은 수로 공학과 요새 건축이 뛰어났으며, 아달 술탄국(Adal Sultanate)의 아흐메드 구레이(Ahmed Gurey) 장군은 에티오피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대포를 사용했다. 겔레디 술탄국(Geledi Sultanate)은 소말리아인 술탄 아흐메드 유수프(Ahmed Yusuf)에게 공물을 바쳐 라무(Lamu) 북쪽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했다. 


1839년 영국은 아덴 만 일대를 차지하고, 1884년 소말리아 북부를 식민지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884년 11월 15일 베를린회의에서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의 주재로 유럽 15개 나라 대표가 모여 아프리카 분할의 기본 원칙을 마련했다. 참가국들은 아프리카에서 열강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가가 그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갖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로 인해 열강들은 다른 나라보다 한발 먼저 식민지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됐고, 훗날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현지 민족과 문화를 무시한 채 그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를린회의가 끝나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뿔'을 향해 군대를 이끌고 왔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말리아를 침략하기 시작하자 데르비시(dervish) 지도자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Mohammed Abdulla Hassan)은 위기를 느끼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소말리아 병사를 모아 반식민 투쟁을 전개하였다. 데르비시 국가는 대영 제국 군대를 네 번이나 격퇴하여 해안 지역에서 철수하게 하였다.


이탈리아는 1889년 소말리아 북동쪽에 2개의 보호령을 만들고, 1905년에는 남부 해안에도 식민지를 건설했다. 1900년대 초반 사이이드 모하메드(Sayyid Mohammed)를 중심으로 한 무슬림들은 영국 식민주의 침략자들에 대해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Somaliland)에는 이탈리아인의 이주가 더욱 증가하였다. 


데르비시 국가는 중동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어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동맹이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무슬림 독립국가로 남았다. 1920년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전투기를 동원해서 수도 탈레흐(Taleh)를 폭격하여 결국 데르비시를 굴복시켰다. 이 폭격으로 데르비시 영토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소말리아 술탄 군대의 저항에 부딪혔는데 1927년 말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하고 나서야 소말리아 일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1936년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이탈리아는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했다. 1년 뒤 영국은 이 지역을 재탈환하고 1950년까지 통치하였다.


1950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UN의 위임을 받아 이탈리아의 신탁통치가 실시되었다. 남부 소말리아가 신탁 통치를 받을 때 북부 소말리아는 보호령 상태였다. 1960년 영국령 소말릴란드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하나로 합쳐져 독립 소말리아 공화국(Somali Republic)이 되었다. 1967년 아브디라시드 알리 셰르마르케(Abdirashid Ali Shermarke, 1919~1969)가 대통령, 무하마드 하지 이브라힘 에갈(Mohamed Haji Ibrahim Egal, 1928~2002)이 총리에 선출되었다.


무하마드 시아드 바레


1969년 알리 셰르마르케 대통령이 암살된 후 이브라힘 에갈 총리가 대통령직을 대행했다. 무하마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1919~1995)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에갈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고 소말리아 민주공화국(Somalia Democratic Republic)을 선포했다. 시아드 바레 정권은 군장교들로 구성된 최고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소련과 강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74년 소말리아는 아랍 연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1977년 시아드 바레 정권은 주민 대부분이 소말리아계 사람인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을 침공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오가덴 전쟁 당시 소련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자 소말리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을 동맹국으로 삼았다. 1980년 오가덴 지역에서 게릴라전이 발생하여 이 지역으로부터 여자와 어린이들이 대대적으로 탈출하자, 바레 정권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국가비상사태는 소말리아가 유럽 국가들 및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기 시작하면서 1981년 말에 해제되었다. 1970~1980년대에는 전쟁과 가뭄으로 에티오피아 오가덴으로부터 약 100만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소말리아로 유입되었다.


시아드 바레는 1984년 12월 자신이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직과 총리직을 겸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199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반정부 부족연합체인 통일소말리아회의(USC, Union of Somali Congress)는 일당독재와 족벌정치를 일삼던 소말리아 혁명사회민주주의당(SRSP)의 바레 정권을 축출하였다. 미 국무부는 1991년 1월 바레 정권이 군벌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rah Aidid, 1934~1996)에 의해 축출된 이후 현지 치안상황이 악화되자 대사관 문을 닫고 공관원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알리 마흐디 무하마드

 

정권을 장악한 USC 내에서 알리 마흐디 무하마드(Ali Mahdi Muhammad, 1938~) 대통령과 파라 아이디드 의장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후 소말리아는 각 부족이 관장하는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1991년 5월 18일 소말리아 북부 지역도 소말릴란드라는 국명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소말릴란드를 승인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가뭄과 내전으로 인한 폭력, 기근, 질병 등으로 소말리아인 30만 명이 사망했고, 약 100만 명의 난민들이 인근 국가로 빠져나갔으며, 150만 명이 기아상태에 빠졌다.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1992년 12월 미국 주도의 UN 다국적군은 식량 보급과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유지 활동에 들어갔다. 1993년 1월과 3월 15개 파벌 대표들이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 모여 평화 및 무장해제를 위한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파벌 간의 대립과 긴장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한국은 1993년 6월 UN 평화유지군(UNOSOM)의 일원으로 516명 규모의 상록수부대(공병대)를 파견했다. 이때 다국적군 파키스탄 병사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UN 다국적군은 아이디드파를 공격해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UN과 미국에 대한 반발로 소말리아인들은 다국적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미군 헬기 2대가 모가디슈 상공에서 격추돼 병사 18명이 사망했다. 모가디슈 전투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 , 2001)'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인명피해가 속출하자 다국적군은 1994년부터 1995년 3월까지 소말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한국군 상록수부대도 철수했다.  

 

1996년 11월 소말리아의 26개 정파가 이디오피아의 소데레(Sodere)에서 구국위원회(NSC)를 개최한 이후 NSC가 두 번 더 열렸다. 2001년 12월 나이로비에서 열린 소말리아 평화회의 이후 소말리아 임시정부(TNG) 및 24개 정파는 2002년 10월부터 2003년 6월까지 케냐 정부와 IGAD(Inter-Government Authority on Development)의 지원으로 케냐의 엘도레트(Eldoret), 나이로비 등지에서 소말리아 평화회담을 개최하였다. 평화회담에서는 450명으로 구성되는 통합정부 구성과 연방의회 창설, 파벌 간 전투행위 중지협약에 합의하였고, 평화회담이 종료되는대로 연방의회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압둘라 유수프 아흐메드

 

2004년 8월 케냐의 엘도레트에서 275명의 소말리아 과도연방의회(4대 주요 종족대표 각 61석, 소수 부족대표 31석)가 구성되었고, 그해 10월 대통령에 압둘라 유수프 아흐메드(Abdullahi Yusuf Ahmed, 1934~2012)를 선출하였다. 2005년 1월에는 드디어 과도연방정부(TFG, 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가 출범하였다. 2005년 6월 소말리아로 돌아온 과도 연방정부와 의회는 모가디슈의 치안이 불안해지자 2006년 2월 모가디슈 북서쪽  256Km 지점에 있는 바이도아(Baidoa)로 옮겨갔다. 


바이도아(Baidoa)


2006년 1월 예멘 대통령의 중재로 유수프 아메드 대통령, 알리 모하메드 게디(Ali Mohamed Gedi, 1951~) 수상 등 친에티오피아파와 민족주의 노선을 걷는 샤리프 하산 체이크 아단(Sharif Hasan Sheikh Adan, 1954~)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한 의회파는 의회소집에 합의하였다. 2006년 2월 26일 소말리아 남부 내륙 도시 바이도아(Baidoa)에서 모가디슈로 의회를 이전한 뒤 처음으로 의회가 소집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2006년 4월 4일 한국 원양어선 동원 628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상에서 조업 중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다가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2006년 6월에는 반군 군벌 소말리아 이슬람법정연합(UIC, The Unions of the Islamic Courts) 세력이 수도 모가디슈를 비롯해서 남부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고 바이도아까지 위협하였다. 2006년 12월부터 에티오피아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소말리아 과도연방정부(TFG)는 UIC를 몰아내고 모가디슈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였다. 


2007년 1월 소말리아 평화정착을 위해 아프리카연합(AU)과 동아프리카 정부간개발기구(IGAD, The Intergovernmental Authority on Development) 중심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2007년 3월 UIC를 몰아낸 과도연방정부(TFG)는 모가디슈로 돌아왔으며, 과도의회는 바이도아에 머물렀다. 2007년 4월부터 AU 평화유지군으로 1,600명의 우간다 군이 모가디슈 지역에 주둔했다. AU 평화유지군은 이슬람 무장세력 알샤바브(Al-Shabab)에 대항해서 전투를 벌였다. 알샤바브는 소말리아 남부를 거점으로 하는 이슬람 반군 이슬람법정연합(ICU)의 하부 청년조직이었지만 2006년 분파되면서 '청년’이란 뜻의 Al-Shabaab란 이름을 사용했다. 


2007년 5월 15일 한국인 안현수 씨가 선주인 탄자니아 국적 마부노 호가 케냐의 뭄바사 항에서 예멘으로 항해하던 중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다. 마부노 호는 납치 174일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각국의 적극적인 해적 소탕작전 및 첩보활동 등으로 소말리아 해적이 납치한 선박수는 급감하였다. 


샤리프 셰이크 흐메드


2009년 1월 31일 실시된 대선에서 샤리프 셰이크 아흐메드(Sharif Sheikh Ahmed, 1964~)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0년 알샤바브는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해서 7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011년 6월 소말리아 과도정부(TFG)는 임기를 1년 연장했다. 8월에는 알샤바브가 모가디슈에서 퇴각했으며, 9월에는 헌법 제정, 대선 실시 등 과도체제 종식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했다. 그해 12월에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모가디슈를 방문했다. 


2012년 2월 UN 안보리는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AMISOM)의 규모 확대와 케냐 군 편입을 결정했다. 같은 달 알샤바브 지도자인 무크타르 아부 주베이르(Mukhtar Abu Zubair, 1977~2014)가 범세계적인 테러활동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알카에다와의 동맹을 발표했다. 


8월 20일 소말리아는 신헌법 제정과 신연방의회를 구성하여 과도정부 체제를 끝내고 소말리아 연방공화국이 출범하였다. 9월 10일 소말리아 국회에서 하산 셰이크 모하무드(Hassan Sheikh Mohamud, 1955~)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9월 16일 공식 취임하였다. 소말리아는 지난 1991년 내전 발생 이후 최초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역사적인 정식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모하무드는 쉬르돈(Shirdon)을 총리에 임명하고, 내각을 구성했다. 같은 달 알샤바브는 모하무드 대통령을 노린 호텔 폭탄테러를 자행했다. 


하산 셰흐 모하무드


2013년 9월 21일 알샤바브가 케냐의 웨스트게이트(Westgate) 쇼핑몰에 테러를 가했다. 알샤바브는 수년 동안 소말리아에서 외국인 구호활동가를 살해했고, 성폭행당한 13세 소녀에게 간통 혐의를 씌워 공개 투석 처형을 하는 등 극단주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해 미군은 대테러 임무 수행 등을 위해 소말리아에 재파병되었다. 


모하무드 대통령은 쉬르돈 총리를 해임하고 압디웰리 셰이크 아흐메드(Abdiweli Sheikh Ahmed, 1958~)를 신임 총리에 임명했으나 1년 뒤 사퇴했다. 2014년 오마르 압디라시드 알리 샤르마르케(Cumar Cabdirashiid Cali Sharmaarke, 1960~)가 총리에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내각이 구성됐다.  


모하메드 압둘라히 모하메드 '파르마조'


2017년 2월 8일 실시된 대선에서 모하메드 압둘라히 모하메드 '파르마조'(Mohamed Abdullahi Mohamed 'Farmaajo', 1962~) 전 총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18년 12월 4일 소말리아 주재 미국대사관이 재건되었다. 1991년 철수 후 실로 28년만의 대사관 재개관이었다. 


소말리아는 치안상황이 다소 나아지긴 했지만 알카에다와 연계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알샤바브는 현지에서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미군은 2018년 한 해에만 30여 차례에 걸쳐 알샤바브를 상대로 한 공습 작전을 벌였다.


2019년 10월 30일 6개 야당은 국가정당포럼(Forum for the National Parties, FNP)을 구성하고, 샤리프 셰이크 아흐메드 전 대통령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FNP는 셰이크 아흐메드가 이끄는 히밀로 카란(Himilo Qaran)과 하산 셰이크 모하무드 전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개발연합당(Union for Peace and Development Party)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2월 FNP는 연방정부의 주정부 선거 개입, 야당 의원에 대한 탄압(지역구 방문 금지 및 체포)에 항의하면서 파르마조 대통령과의 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12월 10일 알샤바브는 대통령궁 인근 SYL 호텔에 대한 차량폭탄 및 수류탄 공격을 감행했다. 알샤바브 소속 무장대원 5명이 SYL 호텔을 7시간 동안 점거하고 공격을 실시하여 보안군 3명,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무장대원 5명도 전원 사살됐다. 12월 28일 오전 8시 경 알샤바브는 모가디슈 서부에 위치한 경찰검문소를 공격해서 총 78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당했다. 미군 아프리카통합사령부(US AFRICOM)는 보복조치로 공습을 실시하여 최소 4명의 무장대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미군 공습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래 2017년 35회, 2018년 47회, 2019년 63회를 기록하며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2020년 1월 8일 대통령궁 및 의회로부터 불과 300m 떨어진 시내 중심가 검문소에서 폭발물을 탑재한 차량이 폭발했다. 사건 직후 알샤바브는 정부 공무원 및 의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공격을 실시하였다고 발표했다. 사망자 중에는 소말리아 정규군 대령, 재정부 국장, 여성 및 인권부 소속 직원 등이 포함되었다. 18일 알샤바브는 모가디슈로부터 30km 떨어진 아프고예(Afgoye) 지역에서 터키 회사가 참여 중인 건설 현장을 공격하여 총 3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당했다. 터키는 2011년 이래 소말리아의 최대 개발 협력 파트너로서 알샤바브의 지속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다. 


1월 23일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9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 2019) 조사에서 소말리아는 180개국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 2019년 소말리아의 부패인식지수는 9점(100점 만점)을 기록하여 세계 평균 43점 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평균 32점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투명성기구는 소말리아가 사소한 뇌물수수에서부터 고위 정치인이 연루된 부패까지 전반적인 법치주의 기반이 취약하다고 분석하였다. 특히, 파르마조 행정부가 채무경감을 위해 약속한 부패척결 관련 성과가 미미하다고 평가했다. 


소말리아 세력 분포도


현재 소말리아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다. 분리 독립하려는 소말릴란드와 소말리아 연방 내에서 자치를 선언한 아자니아(Azania)와 푼틀란드, 갈무두그(Galmudug), 알샤바브, 친연방정부를 표방하는 이슬람주의자, 기타 부족 군벌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말리아 국경에는 내전이 끊일 날 없는 막장 국가를 탈출하려는 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푼틀란드 지역은 1998년 자치를 선언했다. 독립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연방의 자치주로 남아 있다. 해적들의 상당수 근거지가 푼틀란드 주에 있었다. 푼틀란드 주정부에서 2009~2010년 해적 퇴치에 적극 나서면서 이들 근거지가 이웃 갈무두그 자치주로 옮겨갔다. 


아자니아 주는 과거에는 주바랜드(Jubbaland)로 불리던 지역이다. 2011년 3월 자치를 선언해 알샤바브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다. 케냐의 지원을 받고 있다. 아자니아 대통령에는 소말리아 전 국방장관 모하메드 아부디 모하메드(Mohamed Abdi Mohamed, 1954~)가 선출되었다.


연방정부는 구 ICU 세력을 포함해 여러 세력이 포진되어 있다. ICU는 원리주의를 표방한 군벌이지만 에티오피아의 침공으로 조직이 붕괴되고 합법적 정부 수립을 하면서 친미 온건으로 전향한 상태다. 현재 과도 체제를 청산하고 진정한연방정부로 거듭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내전 이래 처음으로 연방정부가 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알샤바브도 원리주의자들을 모아 IES(Islamic Emirate of Somalia)를 만들어 대항하고 있기에 정치 안정은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이다. 연방정부도 여러 군벌의 집합체이기에 통일이 된다고 해도 각 군벌들이 이권을 두고 쟁탈전을 벌일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남부 소말리아의 대부분은 알샤바브를 중심으로 한 IES가 장악하고 있다. IES가 점령한 지역에서는 투석형, 음악 금지, UN 기구 파괴, 외국인에 대한 테러 등이 자행되고 있다. 이들은 알카에다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해적질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말리아 남부에서는 연방정부군과 IES 간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서로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겠다는 입장이어서 평화는 아직 요원한 상황이다. 

  

반군 군벌들은 자파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소말리아 연안에서 외국선박에 대한 납치를 자행하고 있다. 이것이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해적이 들끓는 이유다. 부족 간의 내전으로 치안이 부재하고, 군벌들이 해적활동으로 전비를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해적이 납치한 배는 수도 없이 많다. 


지금까지 약 90척에 이르는 세계 각국의 선박이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에 의한 피해가 급증하자 미국과 유럽연합, 러시아, 인도, 중국, 일본, 한국 등 각국 해군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자국의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을 보내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소말리아 정부형태는 현재 연방정부 체제다. 하지만 연방정부와 반군세력의 계속된 대립으로 소말리아는 1960년 독립이래 이름뿐인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1979년에 제정된 헌법은 대통령에게 집행권을 부여하고 있다. 의회는 양원제(하원 275석, 상원 54석)이다. 중앙위원회와 내각은 투표로 선출되는 연방의원들에 의해 구성된다. 


소말리아 사법제도의 상당부분은 이슬람교 율법을 기초로 한 것이다. 사법부의 정상에는 민사·형사·행정·재정 소송에 대한 재판권을 갖고 있는 민간인 출신의 법관들로 구성된 대법원이 있다. 그러나, 독립된 사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말리아는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는 나라다. 모든 대중매체는 정부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아랍어나 이탈리아어, 영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은 소수의 교육받은 특권층만이 읽는다. 모가디슈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소말리아의 경제는 주로 축산과 농업에 기반을 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이다.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에 약 11억 3,000만 달러에 달했으나, 1990년대 초 내전 발발 이후 경제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1인당 GNP가 세계에서 최하수준으로 추락했다.


농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3이며, 노동인구의 3/4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960년대에 시작한 축산업이 급신장해,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축산물 수출이 전체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상에 달했다. 주바 강, 셰벨레 강 연변에서는 바나나 등의 과일이 자란다. 그밖의 작물로는 사탕수수·목화·옥수수·수수 등이 있다. 한편 어업을 되살리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어획량이 증가하고 있다.


공업은 주로 육류 및 어류 가공, 섬유공업, 피혁업 등인데,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할 뿐 아니라 종사 인구가 총노동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업의 4/5 이상은 국가소유지만, 사기업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 전기는 화력발전에 의존하며 도시지역에만 제한적으로 송전된다.


소말리아는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수입품은 대부분 종이·직물·시멘트·철강·기계류와 같은 기초 제품과 석유류 제품, 비료·살충제, 식료품 등이며 주로 서유럽으로부터 들여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예멘·이탈리아는 가축·동물가죽·바나나와 같은 소말리아 제품이 소비되는 중요한 시장이다.


소말리아에는 철도가 없으며, 철도를 대신해 트럭과 버스가 내륙 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국내 및 국제 항공의 이용이 가능하며, 몇 개의 심해 항구도 있다.

 

한국은 소말리아와 1987년 9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소말리아 내전으로 치안이 악화되자 한국은 1992년 3월 31일 대사관을 폐쇄하고 현재 주케냐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소말리아는 공관이 없다. 한국 정부는 소말리아를 내전과 치안 부재 등으로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한국보다 이른 1967년에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1969년 상주대사관을 설치했다. 1991년 1월 소말리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자 대사관을 폐쇄하였다. 현재는 주에티오피아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소말릴란드 공화국(Republic ofSomaliland)


소말릴란드 공화국(Republic ofSomaliland)은 남쪽으로는 소말리아, 북쪽으로는 지부티, 서쪽으로는 에티오피아와 접한다. 동쪽으로는 홍해, 예멘과 접한다. 소말릴란드는 1991년 5월 18일 소말리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말릴란드는 현재 소말리아 북부 5개 주를 통치하고 있다. 수도는 하르게이사(Hargeisa)이다.


소말릴란드 지도


소말릴란드의 국기는 1996년 10월 14일에 제정되었다. 초록색, 하얀색, 빨간색  등 세 가지 색의 가로 줄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초록색 줄무늬 가운데에는 이슬람교의 신앙 고백인 샤하다(알라 이외의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가 새겨져 있으며, 하얀색 줄무늬 가운데에는 검정색 오각별이 그려져 있다. 초록색은 번영, 하얀색은 평화, 빨간색은 영웅의 피를 의미한다. 샤하다는 이슬람교, 검정색 오각별은 소말리아인이 거주하는 5개 지역이 단결하는 꿈이 좌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슬람교의 신성한 구절인 샤하다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와 마찬가지로 조기를 게양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소말릴란드 국기


1960년 6월 26일 소말릴란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5일 후인 7월 1일 소말리아에 의해서 강제병합을 당했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소말리아 대통령 시아드 바레가 자신의 씨족인 다로드-마레한 족을 우대하고 다른 씨족을 차별하자, 이에 격렬하게 반발한 여러 부족들 중 3대 씨족인 하비에족(통일소말리아회의, USC), 다로드족(소말리아애국운동, SPM), 이사크족(소말리아국민운동, SNM, 현 소말릴란드 집권 세력)이 연합하여 바레 정권에 대항했다.


수도 하르게이사


1986년 시아드 바레가 친위대를 동원해 다른 부족들을 탄압하면서 소말리아 내전이 심화되었다. 1987년 소말리아 바레 정권은 이사크족에 대한 인종학살을 주도해 1989년까지 소말릴란드 지역에서 수만 명의 이사크족이 사망하고 5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에티오피아로 넘어갔다. 이때 소말릴란드의 수도 하르게이사와 토그데르 주의 수도 부라오(Burco)가 소말리아 공군기에 폭격당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브디라흐만 아흐메드 알리 투르


1990년 반 시아드 바레 연합저항군은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하고 바레 정권을 붕괴시켰다. 하지만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결국 내란으로 번졌고, 이 와중에 1991년 이사크족의 소말리아국민운동(SNM)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초대 대통령에는 아브디라흐만 아흐메드 알리 투르(Abdirahman Ahmed Ali Tuur, 1931~2003)가 취임하였다. 


무함마드 하지 이브라힘 에갈


SNM은 2년 후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1993년에는 소말리아 아브디라시드 알리 셰르마르케 대통령 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했던 무함마드 하지 이브라힘 에갈이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소말릴란드는 아프리카에서도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다히르 리얄레 카힌


소말릴란드는 독립한 이후 2001년 다당제를 도입하였다. 2003년 4월 실시된 소말릴란드 대선에서 다히르 리얄레 카힌(Dahir Riyale Kahin, 1952~)이 임기 5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행정부를 구성했다. 2005년 9월에는 소말릴란드 의회선거가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실시되었다. 


아흐메드 모하무드 시라아뇨


2010년 7월 실시된 대선에서는 리얄레 카힌 대통령과 평화통일개발당(Peace, Unity, and Development Party)의 아흐메드 모하무드 시라아뇨(Ahmed Mohamud Silanyo, 1936~), 정의복지당의 파이살 알리 와라베가 출마했다. 이때 푼틀란트에서 넘어온 민병대가 투표소를 습격하면서 4명이 사망했다. 결국 아흐메드 모하무드 시라아뇨 후보가 4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소말리아에서는 2012년 8월 20일 연방제 수립 전까지 소말릴란드 자체를 인정하지 않다가 연방제 수립 후 소말리아의 연방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소말릴란드 정부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무세 비히 아브디


2017년 대선에서는 세계 최초로 홍채인식 확인 절차를 도입했다. 3명의 후보가 출마했는데, 대선 이슈는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소말릴란드의 독립을 인정받을 것인가?'였다. 선거 결과 집권당인 평화통일개발당의 무세 비히 아브디(Muuse Bixi Abdi, 1948~)가 55.1%의 득표율을 얻어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시위가 일어나 2명이 숨졌다.


토그데르 주의 수도 부라오(Burco)


소말릴란드는 구성 부족들이 정부와 함께 치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나 소말리아 반군 세력에 의한 테러 위험이 있다. 아프리카 국가 중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음으로 군과 경찰에 여성의 비율이 높다. 


소말릴란드의 공용어는 소말리아어, 제2언어는 아랍어이다. 소말릴란드는 영국의 영향으로 영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는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이 나라는 소말릴란드 실링이라는 독자적인 화폐를 가지고 있다. 수도 하르게이사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항구도시 베르베라(Berbera)


소말릴란드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여러 나라에 양, 염소, 낙타 등의 가축을 수출하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 또 레바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과일을 수입하면서 아랍 동맹의 여러 나라와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현재 미승인국이라는 현실로 인해 소말릴란드 실링의 가치가 매우 평가절하되어 있기에 국민의 25%가 전자화폐를 사용한다. 항구가 없는 에티오피아는 소말릴란드 베르베라(Berbera) 항에 출자했다.


소말릴란드는 1991년 5월 18일 독립을 선언했으나 아직 어떠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미승인국이다. 하지만 국가적 요소는 모두 갖추었고, 자국의 화폐까지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독립국이다. 오히려 정세가 혼란한 소말리아보다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국제 여론에 의해 승인이 안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말리아의 자치 지역으로 여겨진다. 최근에는 해적 납치를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16년 기준으로 소말릴란드를 승인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다만 일부 국가에서는 연락사무소나 영사관을 개설하여 소말릴란드 정부와의 교섭 업무를 대행하고 있기는 하다. 한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도 외교 관계가 없다. 마이크로네이션(Micronation)인 리버랜드(Liberland)가 최근 소말릴란드와 공식 수교를 맺었고, 리버랜드 대통령 비트 예들리치카(Vít Jedlička)가 소말릴란드를 방문했다.


2020. 2. 23.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