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셸 지도
세이셸 공화국(Republic of Seychelles)은 남위 4∼11°, 동경 46∼56°에 위치한 약 11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양 서부의 공화국이다. 케냐의 몸바사로부터 동쪽으로 약 1,600km, 마다가스카르로부터 북쪽으로 1062km 떨어져 있다. 남쪽에는 모리셔스와 프랑스령 레위니옹, 남서쪽에는 코모로와 프랑스령 마요트, 북동쪽에는 수바디브와 몰디브가 있다. 면적은 455㎢, 인구는 약 8만3천명이다. 수도는 빅토리아(Victoria)이다.
세이셸 군도의 섬들은 크게 두 제도로 나뉜다. 중앙부의 약 40개의 화강암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는 마헤(Mahe) 제도라고 부른다. 나머지 제도는 마헤 제도 외곽에 산재한 약 70개 이상의 산호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 저지대와 중앙의 구릉지대로 되어 있는 마헤제도는 은빛 모래사장과 맑은 석호 위로 열대식물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산호초로 이루어진 산호섬들은 해발고도가 매우 낮은 평탄한 섬들이다. 많은 섬들이 물이 나지 않아 사람이 거주하기에 부적합하다.
세이셸은 적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고온다습한 열대해양성 기후를 띤다. 그러나 열대성 저기압대에서는 벗어나 있다. 연평균기온은 21∼32℃이다. 몬순의 영향으로 5월말부터 9월까지는 기온이 낮아진다. 마헤 제도의 연강우량은 2300㎜~3560㎜이다. 세이셸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에는 황소거북과 바다거북 등이 있으며, 주변 바다에는 상어가 많다.
유럽 식민지 이전의 세이셸 역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BC 200~300년경 말레이인들이 보르네오 섬에서 인도양을 건너와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할 무렵 세이셸 군도에도 들어오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 당시 아랍이나 페니키아 상인들도 이곳을 방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무역선을 타고 인도양을 오가던 아랍인들은 이 군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851년 아랍 상인이 쓴 필사본에 기록된 '몰디브(Maldives)보다 더 멀리 떨어진 섬들'은 세이셸 군도를 지칭한다. 유럽인들이 이 군도를 발견하기 오래전부터 아랍인들은 세이셸에서만 나는 코코 드 메르(coco de mer)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 식물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열매가 발견되어 프랑스인들이 바다의 코코넛 즉 코코 드 메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1502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는 인도에서 동아프리카로 건너오다가 세이셸 군도에서 남서쪽으로 320km 떨어진 세이셸 군도의 아미란테 제도(Amirantes)를 발견하였다. 이들 화강암 섬들은 포르투갈의 해도에 칠자매 섬(Seven Sisters)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1608년 3월 인도로 항해할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역선단이 꾸려졌다. 이들은 인도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항로를 잃어버렸다. 1609년 1월 19일 어센션(Ascension)호의 승무원들은 하이랜드(high land)를 발견하고 환초호에 닻을 내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창고를 가득채우고도 남을 만큼 풍부한 물과 물고기, 코코넛, 새, 바다거북, 코기리거북 등을 발견하였다. 어센션호는 항해에서 돌아와 그들이 본 것들을 본국에 보고했으나 영국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17세기말 카리브해 출신의 해적들이 인도양으로 들어와 마다가스카르에 근거지를 세웠다. 이들은 홍해나 걸프 만으로 항해하는 선박들을 약탈하였다. 1710년 이래 프랑스는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 1810년 영국이 Mauritius-모리셔스로 이름을 변경)를 점령하였다. 이 식민지가 점차 중요해지자 프랑스는 1735년 버트란드 프랑수아 드 라 부흐도네(Bertrand François de la Bourdonnais, 1699~1753)를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프랑스의 인도 해상로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항해가이기도 했던 드 라 부흐도네는 모리셔스에서 인도로 가는 보다 빠른 해로를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742년 드 라 부흐도네는 탐험가 라자르 피콜(Lazare Picault)이 지휘하는 원정대를 마다가스카르 북동쪽의 이 섬들로 보내 탐험하게 했다. 1744년에 피콜은 지도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파견되었다. 1756년 프랑스는 이 군도를 공식 합병하고 재정장관 장 모로 드 세셸(Jean Moreau de Sechelles, 1690~1761)의 이름을 따서 세셸(Sechelles)로 명명하였다. 이때까지 세이셸 군도는 무인도 상태였다. 세이셸 군도에 처음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과 흑인 노예들이었다.
1794년부터 1811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세이셸의 통치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다. 19세기 들어 프랑스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소수의 영국인들이 세이셸 군도에 이주해왔다. 아랍인과 중국인, 인도인 말라야인들도 소수 이주해왔다. 1810년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 결과 영국은 세이셸 군도를 병합했으며, 이 군도를 모리셔스의 관할하에 두고 행정경험이 있는 인도인들에게 행정을 위임했다. 1814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에 양도된 세이셸은 1903년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은 이 군도의 이름을 세셸에서 세이셸(Seychelles)로 바꾸었다.
1948년 세이셸은 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입법회의가 구성되었다. 1964년 프랑스 알베르 르네(France Albert Rene, 1935~)를 중심으로 한 세이셸인민통일당(Seychelles People's United Party, SPUP, 현재의 SPPF)과 제임스 맨첨(James Richard Marie Mancham, 1939~)을 중심으로 한 세이셸민주당(Seychelles Democratic Party, SDP, 현재의 DP)이 결성된 후 두 당은 영국에게 독립을 요구했다. 1970년 세이셸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보통선거를 규정하였으며, 다수당 의원으로 구성된 통치보좌기관을 설치했다.
1975년 세이셸에 자치정부 수립이 허용되자 SDP의 당수 제임스 맨첨을 대통령, 알베르 르네를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1976년 세이셸은 영연방 내의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독립 후 세이셸에서는 서구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SDP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SPUP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977년 6월 맨첨 대통령이 영국연방 회의에 참석차 런던에 체류하던 중 사회주의자인 르네 총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르네는 SPUP에서 세이셸인민진보전선(Seychelles People's Progressive Front, SPPF)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세이셸을 SPPF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1979년 실시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르네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는 파리 조약에 의거해 1954년 이래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던 트로멜린 섬에 대한 세이셸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1984년 실시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르네는 제임스 맨첨이 이끄는 SDP와 그 지지자들에 의한 쿠데타 가능성을 우려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주요 경제원조국이 영국과 프랑스이고, 관광객도 주로 구미지역에서 오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진영에 의존하는 등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구사했다. 실용적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하여 르네 정권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르네는 1989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3선을 기록하였다. 1991년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르네는 다당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의 개정으로 민주화를 위한 문을 열었다. 1993년 신헌법이 채택된 후 다당제 하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여당인 SPPF는 압승을 거두고, 대선에서는 르네가 또 당선되어 4선 대통령이 되었다.
르네는 1998년 대선에서도 대통령에 당선되어 5번째 집권하였으며, 여당인 SPPF도 압승을 거두었다. 최대 야당이던 민주당(Democratic Party, DP)은 내부 권력투쟁으로 1994년 10월 폴 초우(Paul Chow) 사무총장이 사임하고, 역대 선거에서 누적된 막대한 부채로 야당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총선 참패를 기록한 가운데 세이쉘국민당(Seychelles' National Party, SNP)이 3석을 차지하여 새로운 최대 야당으로 등장하였다. DP는 르네 정권과의 협력을 통해 세이셸의 민주화와 경제 자유화를 추구하던 맨첨 당수와 이에 소극적인 다니엘 벨(Daniel Bell) 신임 사무총장과의 내분이 심화되었다. SNP는 여당인 SPPF의 가장 중요한 정책인 보건과 교육 문제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통해 수권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여갔다.
르네는 197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선거를 통해 계속 집권하면서 야당인사에 대한 숙청과 탄압을 통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러 왔다. 르네 정권은 2000년초 조기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헙법을 개정하였다. 2001년 8월 조기 실시된 대선에서 르네는 54%를 얻어 45%를 얻은 SNP의 와벨 람칼라완(Wavel Ramkalawan, 1961~)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6선에 성공했다. 2002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도 집권당 SPPF는 34석 중 23석을 차지하여 다수당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SNP는 11석을 차지함으로써 SPPF와 양당체제를 확립하였다. 총선 이후 르네 정권은 다당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고, 주요 국유산업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함으로써 독재국가에서 민주국가로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2004년 4월 27년동안이나 장기집권한 르네 대통령이 조기 사퇴하자 부통령이던 제임스 미셸(James Michel, 1944~)이 승계했다. 미셸은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개혁의 추진으로 지지기반을 확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2005년 5월 집권 SPPF 의장으로 재선출된 르네 전 대통령이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개혁도 SPPF의 사회주의 강령을 크게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한계가 드러났다. 2006년 8월 경기침체와 민주정치, 인권개선 등이 주요 이슈가 된 대선에서 SPPF 후보 제임스 미셸은 SNP의 와벨 람칼라완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세이셸 공화국은 대통령중심제 공화국으로 5년 임기의 대통령은 주민들의 직선으로 선출된다. 내각은 대통령이 임명하되 의회의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입법부는 34석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이다. 34석 가운데 25석은 직선으로 선출하고, 9석은 각 당의 득표수에 따른 비례대표이다. 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주요 정당은 SPPF, SNP, DP 등이다. 사법기관은 대법원과 항소법원이 있다. 세이셸은 인도양위원회(Commission de l'Océan Indien)의 회원국이다. 또 영연방 회원국이며,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현재 세이셸 국민을 구성하는 주요 인종은 프랑스, 아프리카, 인도, 중국, 아랍인들 사이의 광범위한 결혼으로 주민의 대다수가 혼혈인 크리올(Creole, 혼혈백인)이며, 그외 프랑스인과 영국인 등 유럽 백인, 아프리카 흑인, 인도인, 인도네시아인, 마다가스카르인, 중국인이 있다. 전체 인구의 90%가 마헤 섬에 살고 있으며, 그들 중 상당수(6만명)가 수도인 빅토리아에 거주한다.
주민들의 모국어는 크리올어이고,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다. 1981년부터 공식언어가 된 크리올어는 불어의 방언으로 노예제도가 있을 당시 프랑스인과 아프리카 흑인노예 사이의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 법률 분야에서는 주로 영어와 크리올어가 사용된다. 프랑스계 가정에서는 아직도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관광산업에 종사하면서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세이셸의 교육은 9년제 초등교육을 무료 의무제로 하고 있다. 학령아동의 거의 전부가 취학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첫 학년에 크리올어를 배우고, 그 후에는 영어, 그 후에는 프랑스어를 배운다. 세이셸의 문맹률은 약 40%에 이른다. 종교는 로마카톨릭 90%, 영국성공회 8%, 기타 2% 순이다.
세이셸의 경제는 관광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대단히 높다. 1971년 마헤 국제공항이 개설되자 관광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주민의 30% 이상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외화수입의 75% 이상이 관광산업에서 나온다. 농업은 미미하여 식량을 주로 수입에 의존한다. 농산물 가운데 야자열매(copra), 계피, 바닐라 등을 수출한다. 국영 어업개발회사(Fishing Development Co, FIDECO)는 참치 통조림 등 수산물 수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구아노도 주요 수출품이다. 제조업 분야에서는 소규모의 식품가공업이 주를 이룬다.
세이셸의 일간지는 관영신문인 네이션을 비롯해 세 종류가 있다. 방송국은 세이셸방송공사(SBC) 등 2국이 있다. 라디오 세이셸(Radio Seychelles)은 국영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세이셸 정부는 일부 섬들을 대상으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세이셸의 외교정책은 비동맹 중립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세이셸은 1976년 남북한 동시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77년 르네의 사회주의 쿠데타가 성공하자 세이셸은 조선으로부터 군사훈련을 지원받는 등 양국간 정치 군사적 유대가 긴밀해졌다. 1977년 5월 14일부터 조선은 주탄자니아 대사가 세이셸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1980년 세이셸은 10. 26 신군부 쿠데타와 광주민중항쟁의 유혈진압을 이유로 한국과 단교했다가 1995년 1월 다시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세이셸의 르네 대통령은 1980년 9월 조선을 방문한 바 있다. 세이셸과 조선은 문화협정, 무역협정, 항공운수협정 등을 체결했다. 세이셸에는 조선의 군사요원이 주둔하면서 군사훈련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은 주케냐 대사가 세이셸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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