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바로 알기

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콩고민주공화국(DRC)

林 山 2010. 1. 29. 20:16

 

 콩고민주공화국 지도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DRC, DR콩고)은 적도에 걸쳐 있는 아프리카에서 세번째로 큰 나라다. 동쪽으로는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우간다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콩고, 앙골라의 고립영토인 카빈다와 국경을 접한다. 카빈다 남쪽 40km의 해안선은 대서양에 면하고 있다. 남쪽으로 앙골라, 동남쪽으로 잠비아, 북쪽으로 수단, CAR과 각각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킨샤사(Kinshasa)이다. 인구는 6천3백7십만명(2007년)이고, 면적은 234만4천8백5십8 km²로 서유럽 전체 면적과 비슷하다. 콩고자유국(1885∼1908), 벨기에령 콩고(1908∼60), 콩고공화국(1960∼64), 콩고민주공화국(1964∼71), 자이르(1971∼97)에서 지금의 국명으로 바뀌었다.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은 국토 면적의 60%에 이르는 콩고 분지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콩고 분지는 콩고 강이 북류하다가 적도상에서 왼쪽으로 대서양을 향하여 큰 활 모양으로 휘어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서북부의 광활한 지역에 펼쳐져 있다. 콩고 분지를 중심으로 사방에는 고원지대가 둘러싸고 있다. 콩고 분지의 광대한 열대우림은 동부와 남부의 고원지대로 가면서 사바나 지대로 변한다. 북부에는 목초지대가 있다. 동북부와 동부의 고원지대(900∼1200m)는 동아프리카지구대의 서쪽 끝에 있는 미툼바 산맥으로 이어지고, 우간다와 동부 국경을 이루는 루웬조리(Rwenzori) 대산괴에는 빙하가 있는 마르게리타 봉(Margherita, 5109m)이 솟아 있다. 동남부 고원지대를 이루는 미툼바 산맥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간다.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만나고, 남부와 남서부에는 사바나지대와 함께 평원지대가 나타난다.

 

2002년 1월 17일, 니라공고(Nyiragongo)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된 용암이 고마(Goma) 시를 덮쳐 45명이 사망하고, 12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4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대피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용암은 키부 호에도 흘러들어 수많은 물고기가 죽기도 했다. 6개월 후에 폭발한 니아무라지라 화산(Mount Nyamuragira)은 2006년에도 한 번 더 폭발했다. 

 

세계 제5위의 콩고 강(길이 4700km)은 고원지대 사이를 흘러 콩고 분지를 관통한 뒤, DR콩고와 콩고 국경을 따라 흐르다가 대서양으로 유입된다. 아프리카에서는 나일 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고원지대의 급경사면을 흐르기 때문에 수운에는 불리하지만 수력발전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아프리카지구대의 서쪽 지구에 있는 탕가니카(Tanganyika) 호는 동부의 부룬디, 탄자니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탕가니카 호는 길이 660㎞로 세계에서 가장 긴 담수호이자 동아프리카 제2의 호수이며, 러시아의 바이칼 호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수심을 가진 호수(깊이 1400m)다.

 

DR콩고의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기후를 띤다. 연중 낮 최고기온은 평균 26∼33℃이고, 밤 최저기온도 20℃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적도에 위치한 까닭에 세계 최다우지역에 속한다. 중앙 분지의 연평균강우량은 2000㎜를 넘고, 주변지역도 1500㎜에 달하여 아마존 강 다음으로 가장 큰 열대우림이 형성되어 있다. 열대우림과 사바나지대에는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동부 산악지대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종인 고릴라가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수목이 우거진 대초원에는 코끼리와 비비가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 목초지에는 오카피, 기린, 치타, 사자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5세기경 DR콩고의 남동부 카사이(Cassai) 강 동쪽 루알라바(Lualaba) 강 상류의 우펨바 분지(Upemba Depression)에 반투어계의 루바족(Luba)이 출현하였다. 16세기경 루바족은 카탕가(Katanga, 1972년부터 지금의 Shaba로 이름이 바뀜) 지역에 루바 왕국을 건설했다. 루바족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쾅고 강 동쪽 카사이 강 상류에 거주하던 반투어계의 룬다족(Lunda)을 정복하고 중앙집권적인 룬다 제국을 수립했다. 서북쪽에는 1600년경 카사이 강 하류에서 온 이주민들이 세운 쿠바(Kuba) 왕국이 있었다. 남서쪽으로 카사이 강과 룰루아 강, 북쪽으로 카사이 강의 지류인 상쿠루(Sankuru) 강과 각각 접하는 지역에 있던 이 왕국은 부숑고 왕국, 응공고 왕국 등의 자치 소왕국들의 연합체였다. 1600~1750년 룬다족의 무사들은 카탕가의 많은 소왕국들을 정복하고 루바-룬다 제국(Luba-Lunda states)을 세우고 카산제(Kasanje), 카젬베(Kazembe) 등 많은 위성국들을 통치했다.  

 

룬다 제국은 아랍국가들과 교역을 했으며, 1650년경부터는 대서양의 포르투갈인들과도 무역을 했는데, 주로 상아와 노예를 수출하고 직물과 총을 수입했다. 185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룬다 제국은 초퀘족(Chokwe)의 침략을 받은 이후 점차 쇠퇴했다. 19세기 말 벨기에 왕 레오폴 2세(Leopold II, 1835~1909)는 중부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헨리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의 콩고 강 탐험을 지원하였다. 1884∼85년 베를린에서 열린 서아프리카회의에서 레오폴 2세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로부터 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 1885~1908)이 자신의 사유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884년 앙골라에서 포르투갈 군대가 서쪽으로 룬다 제국을 침략한 뒤, 1898년 벨기에 군대는 콩고자유국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룬다 제국은 포르투갈과 벨기에에 분할점령되었다.

 

1900년대 고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레오폴 2세도 룬다 지역에서 고무 채취사업에 뛰어들었다. 고무 채취에 동원된 룬다 원주민들은 무자비한 혹사와 착취에 시달렸다. 룬다 원주민들은 콩고자유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룬다 원주민들에게 자행된 야만적 행위가 폭로되면서 분노한 양심적 유럽인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콩고자유국을 포기하라는 압력에 직면한 레오폴 2세는 1908년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그의 사유지였던 콩고자유국은 폐지되고, 벨기에령 콩고에 합병되었다. 1909년 룬다의 지도자들이 벨기에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사실상 룬다인의 저항도 끝나고 말았다.

 

1921년 4월 시몬 킴방구(Simon Kimbangu, 1887~1951)라는 침례교 목사가 성령치유로 갑자기 콩고인(Kongo people=Bakongo)들에게 유명해졌다. 콩고인들은 그를 응군자(Ngun za)로 부르면서 추종했는데, 응군자는 콩고어(Kongo language=KiKongo)로 예언자란 뜻이었다. 수많은 콩고인들이 킴방구의 설교를 들으러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킴방구의 설교가 특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음에도 그의 대중적 인기와 권위에 놀란 벨기에 식민당국은 1921년 9월 그를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얼마 뒤 종신형으로 감형된 킴방구는 엘리자베스빌(지금의 Lubumbashi)에 있는 감옥에서 여생을 마쳤다.

 

킴방구의 추종자들은 응군자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응군자주의는 벨기에령 콩고나 프랑스령 콩고, 앙골라에서 킴방구주의(Kimbanguism)로 알려졌다. 킴방구주의 종교운동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종교운동은 점차 유럽의 백인문명과 기독교 선교사들을 몰아내자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민족주의는 원주민들을 결집시키면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갔다. 이는 1950년대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급성장한 민족주의에 위협을 느낀 벨기에 식민당국은 원주민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5년 콩고 독립운동의 초기 지도자였던 조제프 카사부부(Joseph Kasa-Vubu, 1910~1969)는 벨기에 식민지 총독부의 철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다수부족인 바콩고족의 강력한 문화적, 정치적 결사체인 바콩고연합(Alliance des Bakongo, ABAKO)의 회장이 되었다. 1957년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 원주민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같은 해  벨기에 식민당국의 허가를 받아 레오폴드빌(Léopoldville, 1966년 이후 킨샤샤로 바뀜)에서 실시된 최초의 지방선거에서 바콩고연합(ABAKO) 후보들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조제프 카사부부는 던데일 시장에 당선되었다. 1958년 10월 소수부족인 바테텔라족 출신의 민족주의 지도자 파트리체 루뭄바(Patrice Lumumba, 1925~1961)는 최초의 전국정당인 콩고국민운동당(Mouvement National Congolais, MNC)을 창당했다. 

 

1959년 벨기에 정부는 5년 이내에 콩고의 독립계획안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12월부터 지방선거가 시작되었다. 콩고국민운동당(MNC)은 스탠리빌(Stanleyvill, 1966년 이후 키상가니로 바뀜) 지방선거에서 90%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같은 해 모이스 촘베(Moise Kapenda Tshombe, 1919~1969)는 카탕가부족연합회(Tribales Confédération des Associations du Katanga, CONAKAT)의 의장이 되었다. 카탕가부족연합회(CONAKAT)는 모이스 촘베의 부족인 강력한 룬다족과 구리광산을 독점하고 있는 하우트 카탕가 광산연합이 지원하는 정당이었다.

 

1960년 벨기에 정부가 소집한 콩고 독립을 위한 회담에서 촘베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진 지역들의 느슨한 연방형태인 국가전선을 내용으로 한 CONAKAT 독립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촘베의 제안은 카사부부 등 다른 연방주의자의 독립안과 함께 부결되고, 루뭄바가 제안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공화국안이 채택되었다. 회담에서 결정된 1960년 5월 콩고 최초의 총선에서 루뭄바의 MNC는 카사부부의 ABAKO와 그 동맹세력을 이겼지만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두 세력은 독자적으로 연립내각을 구성할 수 없어서 협상을 통해 카사부부가 초대 대통령, 루뭄바가 초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령 콩고는 마침내 벨기에로부터 독립하고 콩고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독립 후 2주일도 안 되어 벨기에인 사령관에 불만을 품은 군장교와 경찰간부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카탕가 지방의회 의장 모이스 촘베는 벨기에의 비밀군사원조와 백인용병의 지원을 받아 광물자원이 풍부한 카탕가 주의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파견된 벨기에군은 카탕가에만 진주한 채 촘베의 분리주의 정권을 지원했다. 루뭄바의 내각은 정치적 경험이 없는데다가 군대마저 힘이 없어 벨기에군을 축출하고 국내질서를 회복할 수 없었다.  

 

내전을 피하기 위해 루뭄바의 호소로 파견된 국제연합(UN) 평화유지군은 고압적인 자세로 생색만 내면서 카탕가사태의 진압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에 루뭄바를 지탱하던 정치연합은 급속하게 결속력이 약화되었고, 벨기에마저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아 카탕가 분리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루뭄바가 기댈 곳은 이제 소련밖에 없었다. 그는 소련에 군대를 공수할 군용기의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 지도자들에게는 1960년 8월의 스탠리빌(Stanleyvill, 1966년 이후 키상가니로 바뀜) 정상회담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루뭄바의 이러한 시도는 당시 백인정권이 통치하던 남아공과 서구 제국주의 열강을 불안하게 했다. 또 온건노선을 추구하면서 지방자치를 선호하던 카사부부와 그 지지세력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1960년 9월 5일 카사부부는 군부 지도자인 조제프 모부투(Joseph Mobutu, Mobutu Sese Seko, 1930~1997) 대령이 거느린 군대의 지원으로 루뭄바를 총리직에서 해임하였다. 루뭄바가 이에 불복하자 콩고에는 서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는 두 개의 중앙정부가 생겨났다. 루뭄바가 카사부부를 축출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자, 9월 14일 모부투는 카사부부의 암묵적인 지원하에 군대를 동원하여 통제권을 장악했다. 그해 10월 UN 총회는 카사부부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했는데, 이로 인해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은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1960년 12월 3일 루뭄바는 UN 평화유지군의 보호하에 있던 레오폴드빌을 떠나 자신의 지지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스탠리빌로 가려다가 모부투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1961년 1월 17일 루뭄바는 카탕가 분리주의 정권에 인계되었고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UN 평화유지군은 카탕가 분리주의 정권이 루뭄바를 살해하도록 방치함로써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63년 1월 카탕가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한 UN 평화유지군에 카탕가군이 패하자 촘베는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1964년 콩고공화국은 카탕가 주를 다시 병합하고 국명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변경하였으며, 그해 UN 평화유지군은 철수하였다. UN 평화유지군이 철수한 이후 DR콩고에서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64년 카탕가 주 루바족 출신의 로랑 카빌라(Laurent Desire Kabila, 1939~2001)는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본명 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1967)의 지원을 받아 루뭄바 지지세력의 반란에 가담했다. 이 반란은 1965년 모부투의 정부군에 진압당했다. 그해 촘베는 콩고 동부의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총리직을 맡아달라는 카사부부의 요청을 받고 콩고로 돌아왔다. 1965년 촘베가 도리어 카사부부를 축출하려고 시도하자 카사부부는 반란진압에 외국용병을 고용했다는 이유로 촘베를 해임했다. 촘베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납치되어 알제리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던 중 심장마비로 죽었다.

 

카사부부와 촘베의 권력투쟁이 일단락되자, 모부투는 1965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카사부부를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모부투는 자신의 정권안정을 위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모부투는 1967년 카탕가 반군과 콩고군에 편입된 백인용병의 반란으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해 카탕가 주의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반군 지도자들은 앙골라로 망명했다. 그해 모부투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로랑 카빌라는 동부 산악지대 키부(Kivu)에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인민혁명당(People's Revolutionary Party, PRP)을 창당하고 금광채굴과 상아무역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한편, 모부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카탕가의 구리광산 등 기업과 산업을 국유화하고, 자신의 인민혁명당(Mouvement Populaire de la Révolution, MPR)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했다. 반체제 세력과 반군들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모부투는 1970년 대선에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1년 10월 모부투는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국명을 다시 자이르(Zaire)로 변경하고, 지명도 아프리카식으로 바꾸었다. 1972년 1월에는 자신의 이름도 조제프 데지레 모부투에서 모부투 세세 세코로 개명했다. 이 무렵 카탕가 주도 샤바 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부투는 1977년 대선에서도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해 앙골라의 지원을 받은 카탕가 반군이 샤바 주를 공격해오자 모부투는 프랑스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카탕가 반군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서방진영은 냉전기간에 모부투를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보루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재자 모부투는 국고와 천연자원을 착복해서 수십억 달러를 축재하면서 국가경제를 거덜나게 하는 등 도둑정치(kleptocracy)를 일삼았다.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정치적 무능력, 행정의 실패로 인해 국가의 기간산업이나 농업, 교통체계 등 국가 전체의 기반시설이 무너졌음에도 모부투는 서방 강대국들의 지원으로 쿠데타 기도나 외부의 침입과 같은 자신의 정권에 대한 도전을 물리칠 수 있었다. 

 

냉전이 끝나자 서방 강대국들은 모부투에게 다당제와 권력배분 등을 요구하며 압력을 행사했다. 1990년 궁지에 몰린 모부투는 다당제하의 선거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91년 모부투는 반대세력이 날로 확대되는 가운데 다당제하의 선거를 실시하고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르완다의 종족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자이르로 유입되면서 그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모부투 정권은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패배하고 자이르로 도주하던 50만명의 투치족(Tutsi)을 학살하면서 동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반대로 로랑 카빌라의 군대가 투치족의 박해로 르완다에서 자이르로 탈출하는 수천 명의 후투족(Hutu) 난민들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동부의 접경국가 부룬디와 르완다에서 소수 귀족계급인 투치족이 원주민 다수부족인 후투족을 박해하자 후투족은 자이르로 탈출하여 난민촌을 형성했다. 후투족 난민들은 자이르를 거점으로 반군을 조직해서 부룬디와 르완다를 공격하였다. 부룬디와 르완다 정부군이 후투족 반군을 소탕하기 위해 자이르 국경을 넘어오자 자이르 정부군은 이들을 격퇴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자이르는 1995년 르완다와 부룬디의 종족분쟁으로 유입된 약 120만명의 난민을 본국으로 강제송환하기 시작했으나, 8월 국제연합의 요청에 따라 중지하였다. 1996년 2월 자국 영내에 설치된 약 112만명의 르완다 난민캠프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자이르 정부군은 난민캠프를 포위하여 압력을 가했다. 그해 10월 자이르의 투치족 무장세력이 자이르 동부 우비라의 후투족 난민캠프를 공격하여 112명을 살해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2만명에 이르는 난민이 탈출을 시작하는 등 종족간의 전쟁이 다시 격화되었다.

 

이후 자이르 투치족 무장세력의 습격과 학살의 공포로 후투족 난민의 대다수가 자이르에서 탈출을 시작하여 1996년 11월 6일에는 120만명으로 늘어났다. 난민의 대집단이 르완다와 부룬디, 탄자니아를 향해 이동하는 가운데 사망자도 속출하였다. 유엔 안보리는 1996년 11월 15일 난민의 보호를 위해 다국적군 1만명을 파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29일에는 이를 다시 번복하여 330명만을 파견하기로 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모부투 정권은 자이르에 유입된 후투족의 르완다 구정부군과 민병대를 이용하여 동부의 르완다 투치족 출신으로 자이르 국적을 가진 바냐물렝게족(Banyamulenge)을 탄압하였다. 이에 1996년 10월 바냐물렝게족을 중심으로 한 범반정부조직인 콩고-자이르민주해방연합군(Alliance of Democratic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Congo-Zaire, ADFL)이 결성되어 로랑 카빌라가 지도자가 되었다. 투치족의 르완다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 RPF) 지도자 폴 카가메(Paul Kagame, 1957~)는 카빌라와 동맹을 맺었다.

 

1996년 폴 카가메와 미국 관리들 사이에 회담이 있은 바로 뒤, 자이르 동부로 탈출한 후투족 인터아함웨(Interahamwe) 민병대를 공격하기 위해 르완다애국전선(RPF) 신정부군은 자이르를 침공하였다. 1996년 카가메가 훈련을 받았던 우간다군으로부터 무기와 군사훈련 등의 지원을 받은 콩고-자이르민주해방연합군(ADFL)은 자이르 정부군과 연합한 르완다 후투족 구정부군과의 전투를 개시하면서 제1차 콩고 내전이 일어났다. 자이르 남키부 주에서 활동하던 바냐물렝게족 반군은 북키부 주에서 인터아함웨 민병대를 포함한 후투족 난민들을 공격하던 RPF군과 동맹을 맺었다. 탈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지원을 상실한 자이르 정부군은 쉽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내전이 발발하자 후투족 난민 1백만명이 실종됐으며, 11월 한달동안 난민 역사상 최단기간에 최대인원인 50만명이 피란길에 오르는 엑소더스로 이어졌다. 카빌라는 자이르 난민캠프에서 르완다로 귀환중이던 후투족 난민 20만명이 실종된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투족 대량실종사건과 관련하여 카빌라는 유엔이 요청한 진상조사를 거부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97년 5월 카빌라는 르완다 RPF군의 지원하에 모부투 정권시절 대량학살된 투치족의 로랑 응쿤다(Laurent Nkunda, 1962~)가 지원하는 반군을 이끌고 동부로부터 수도 킨샤사로 진격하였다. 모부투는 카빌라가 킨샤사에 입성하기도 전에 암치료를 핑계로 스위스로 도주했다. 카빌라의 ADFL군이 킨샤사를 비롯하여 자이르의 대부분을 점령하자 32년동안이나 자이르를 통치해온 모부투는 그해 5월 모로코로 망명해서 9월 그곳에서 전립선암으로 죽었다.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실패로 얼룩진 모부투 도둑정권이 남긴 것은 경제기반이 무너진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모부투 정권의 종말은 아프리카 독재국가들의 몰락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모부투는 자이르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프랑스의 지원하에 도둑정치로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최고의 사치를 누린 반면, 국가는 풍부했던 광물자원의 고갈과 함께 독립 전보다 못한 세계최빈국으로 돌아갔다. 

 

1997년 5월 17일 ADFL 의장 카빌라는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모부투가 1971년에 바꾼 국기와 국명을 모두 독립 당시의 것으로 되돌렸다. 국명은 다시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이 되었다. 그러나 카빌라도 모부투와 마찬가지로 독재정치를 실시하고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여 서방국가들의 비난을 받았다. 서방국가들은 DR콩고의 인권문제와 민주화를 주시하면서 카빌라에 대한 원조에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카빌라는 1997년 7월 20일 수도 킨샤샤에서 주최한 주변 8개국 정상회담에서 난민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응쿤다 반군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은 카빌라는 동부 키부의 막대한 다이아몬드, 구리, 아연, 콜탄 매장량을 차지하려는 야욕으로 돌연 응쿤다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DVD 플레이어나 휴대전화, 컴퓨터의 필수재료인 콜탄은 전세계 매장량의 80%가 이 지역에 매장되어 있었다. 응쿤다 반군은 그동안 북키부(North Kivu)의 콜탄 채굴권을 독점하고 주민들을 죽음의 노역으로 내몰았다. 모부투가 투치족을 학살한 것도, 카빌라가 투치족과 다시 적이 된 것도 바로 광물자원 때문이었다. 카빌라가 등을 돌리자 응쿤다는 투치족 반군을 조직하여 정권전복에 나섰다. 카빌라는 또 투치족이 지배하는 르완다에 대한 나쁜 국민감정을 배경으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정권을 잡은 카빌라는 우간다군과 르완다 RPF군 주둔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더 이상 동맹을 원하지 않았다. 1998년 7월 카빌라는 자신의 집권을 도운 투치족의 르완다 신정부군과 우간다군에게 DR콩고에서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두 나라는 거부했다. 그 결과 제2차 콩고 내전이 발발했다. 르완다와 우간다는 카빌라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북키부와 남키부의 투치족계 바냐물렝게족을 중심으로 결성된 새로운 반군조직으로 에르네스트 왐바(Ernest Wamba dia Wamba, 1942~)가 이끄는 콩고민주연합(Rally for Congolese Democracy, RCD)을 지원하였다. 바냐물렝게족 반군에서 활동하던 투치족 민병대가 르완다군에 편입되면서 DR콩고 키부 주에서 르완다의 세력이 확대되었으며 투치족 인구도 증가했다. 르완다는 카빌라 정권이 국경지역의 르완다 후투족 반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하고 국경수비를 위해 동부를 장악한 투치족 중심의 콩고민주연합(RCD)을 지원했고, 우간다는 DR콩고에 거점을 둔 우간다 반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DR콩고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북동부를 장악한 콩고해방운동(Congolese Liberation Movement, MLC)을 지원하였다. 

 

남서부의 키토나까지 진출한 반군은 마타디(Matadi) 항과 잉가(Inga) 수력발전소를 장악하였다. 잉가 수력발전소는 킨샤사 뿐만 아니라 샤바 주의 구리광산, 짐바브웨까지 전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후 반군들은 수도 킨샤사까지 진출했다. 다급해진 카빌라는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outhern Africa Development, SADC)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였다. DR콩고는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의 회원국이었다. 카빌라의 요청에 따라 SADC 회원국인 앙골라, 짐바브웨, 잠비아, 나미비아는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하여 군사개입을 감행하였다. 

 

카빌라는 그 댓가로 앙골라에게는 대서양 연해의 유전채굴권, 짐바브웨에게는 다이아몬드와 코발트 채굴권, 나미비아에게는 다이아몬드 광산지분을 넘겨주었다. 앙골라는 자국의 반군조직인 앙골라완전독립민족동맹(UNITA, National Union for the Total Independence of Angola)을 지원하는 RCD를 궤멸시켜 반군세력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998년 9월 15일 수단도 2천명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차드도 군대를 보내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SADC 의장국인 남아공은 중부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개입의사를 밝혔으며, 미국은 1998년 9월 25일 DR콩고 내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촉구하면서 개입의사를 밝혔다. 프랑스와 벨기에도 개입하였다.

 

이처럼 콩고 내전은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대전'이라 불리면서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반군을 지원하는 르완다군 2만명과 우간다군 만명의 연합군은 정부군을 지원하는 짐바브웨군 만2천명, 앙골라군 7천명, 나미비아군 2천명, 수단군 2천명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DR콩고 정부군과 연합군은 마타디 항과 잉가 댐을 탈환하였으며, 반군은 킨샤사에서도 물러났다. 그러나 반군이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카사이 오리엔탈 주의 다이아몬드 광산 점령을 시도하자 정부군과 연합군은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여 반군과 전투를 벌였다. 

 

1999년 1월 18일 카다피의 중재로 리비아 시르테에서 열린 DR콩고의 카빌라, 차드의 이드리스 데비,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 에리트리아의 이사이아스 아파웨르키 대통령 등 4개국 정상회담에서 콩고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반군측은 이 평화협정 체결에 불참하였다.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양측의 즉각 휴전, 분쟁지역에 아프리카 평화유지군 주둔, 외국군 철수와 내정간섭 중단, DR콩고의 거국적 회담 촉구 등이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내전은 종식되지 않았다. 같은 해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을 카빌라가 거부하면서 내전은 계속되었다. 카빌라는 연립정부를 세워 반군세력에게 권력을 배분하기보다 국토를 분할하는 쪽을 택했다. 콩고 내전은 1999년 내내 지속되었다.   

 

제2차 콩고 내전 중 DR콩고는 세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각 지역에는 '마이마이(Mai-Mai)'라 불리던 다수의 기회주의적 민병대, 일명 정글반군들이 할거하였다. 전세계의 국지전에 개입하여 이권을 챙기거나 전쟁무기를 팔아먹는 미국,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이들 정글반군에게 무기를 판매하거나 지원하였다. 3년간의 내전에서 170만명의 희생자를 낸 제2차 콩고 내전은 정부군을 지원하던 연합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2000년 2월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이 결정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반군을 지원해 온 르완다군과 우간다군도 3월말부터 DR콩고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는 계속되다가 2000년 12월 6일 양측은 완충지대 설정에 합의하였다. 2001년 1월 16일 카빌라는 쿠데타 시도에 의한 총격을 받고 짐바브웨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에 숨졌다. 

 

2001년 1월 26일 그의 아들 조셉 카빌라(Joseph Kabila Kabange, 1971 ~ )가 29세의 나이로 DR콩고의 정권을 잡았다. 그는 모부투를 패퇴시킨 의용군 정예부대 지휘관이라는 점과 SADC 연합군과 함께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받아 DR콩고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탄자니아와 우간다에서 공부하고 중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조셉 카빌라는 프랑스어와 영어, 키스와힐리어(Kiswahili)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조셉 카빌라는 콩고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외국군대의 조속한 철수를 주장하였다. 파병국들의 국내사정과 국제사회의 압력이 작용하여 조셉 카빌라 정권은 반군과 외국군대의 철수에 합의하였다.

 

2001년 2월 루사카 회담에서 유엔 감시단을 완충지대에 배치하기로 한 협정에 따라 정부군과 반군이 국토를 분할점령한 DR콩고에 유엔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다. 콩고 내전 막바지에는 우간다군과 르완다군, 마이마이 민병대, 심지어 DR콩고 정부군조차도 점령지역을 확대하거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전투를 벌였다. 내전이 종식될 때까지 난민촌에서는 전염병과 영양실조로 매월 수천명이 죽어갔다. 1996년부터 2003년에 걸친 1, 2차 콩고 내전 기간에 약 540만명이 사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동물 대부분이 죽었다.

 

2002년 조셉 카빌라의 주도하에 DR콩고의 모든 정파가 남아공의 썬시티에 모여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제2차 콩고 내전을 종식시키고, 조셉 카빌라가 DR콩고의 국가원수와 대통령직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또, 2년간의 과도기간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관리위원회의 구성도 합의되었다. 그 결과 조셉 카빌라가 대통령, 두 주요 반군단체의 지도자를 부통령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구성됨으로써 제2차 콩고 내전은 종식되었다. 그해 르완다 RPF군과 우간다군은 DR콩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2004년 3월 28일 킨샤사에서 전 독재자 모부투의 경호원들이 일으킨 반란이나 쿠데타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004년 6월 11일에는 대통령비밀경호대 에릭 랑그(Eric Lenge, 1971~) 소령이 이끄는 쿠데타군이 과도정부를 전복했다고 국영방송이 발표했으나 조셉 카빌라에게 충성하는 부대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2005년 12월 새로운 정부구성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새 헌법은 대통령 후보의 제한연령을 35세에서 30세로 낮췄는데, 그것은 조셉 카빌라의 나이가 선거 직전에서야 35세가 되기 때문이었다.

 

2006년 7월 DR콩고 역사상 40년만에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재건인민당(People's Party for Reconstruction and Democracy, PPRD) 후보로 출마한 조셉 카빌라는 45%, 반군 무장단체에서 정당으로 전환한 콩고해방운동(MLC)의 장-피에르 벰바 곰보(Jean-Pierre Bemba Gombo, 1962~) 전 부통령은 20%를 얻어 그 누구도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다. 10월 29일 실시된 결선투표에서 조셉 카빌라는 그의 지지기반인 동부 콩고의 압도적인 지지로 58%를 얻어 장 피에르 벰바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해 12월 6일 조셉 카빌라는 DR콩고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총리에는 안토니 기젠가(Antoine Gizenga, 1925~)를 지명하였다.

 

통일루뭄바주의자당(Unified Lumumbist Party, PALU) 후보로 나선 기젠가는 대선 1차전에서 3위를 한 뒤, 결선투표에서는 조셉 카빌라를 지지하였다. 2006년 하원선거에서 민주재건인민당(PPRD)은 500석 가운데 111석을 차지하여 원내 제1당이 되었다. 2007년 1월 19일 상원선거에서는 108석 중 22석을 얻었다. PPRD는 34석의 통일루뭄바주의자당(PALU), 27석의 사회부흥운동(Social Movement for Renewal, MSR), 10석의 콩고민주연합(Coalition of Congolese Democrats, CODECO) 등 여러 약소정당과 연합하여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의회 다수당이 되었다. 

 

르완다 RPF군이 철수한 뒤에도 르완다 후투족 반군은 콩고 북동부의 키부 지역에서 계속 활동했다. 이들은 투치족 대학살의 책임에 대한 사면 없이는 르완다로 귀환할 수 없는 르완다 후투족의 구정부군이었다. 후투족 반군은 DR콩고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으며, DR콩고 정부군의 추적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2007년 전반기에만 26만명의 시민들이 난민이 되어 떠돌았다. DR콩고의 마이마이 반군은 지금도 주민과 야생동물을 위협하고 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지원으로 민병대의 무장해제 노력이 지속되어 2007년 마지막 민병대가 무기를 반납하고 있다. 그러나 콩고 북동부 이투리(Ituri) 열대우림지역에서는 토착종족간의 격렬한 충돌이 다시 일어났다. 후투족과 투치족의 종족분쟁으로 촉발된 제2차 콩고 내전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DR콩고는 금과 다이아몬드 등 지하자원을 둘러싼 정파간의 이해관계, 종족갈등, 난민문제, 주변국들의 정부군과 반군에 대한 상호지원문제, 정부군과 반군에 줄을 댄 외국의 사업가들, 이권을 노린 강대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언제든지 내전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콩고에 금과 다이아몬드, 콜탄이 없었다면 누가 이기든 콩고 내전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내전기간 동안에 DR콩고에서 발생한 잔인한 성폭력 범죄는 전세계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2007년 한 해 보고된 성폭력 범죄만 해도 1만3천여건이었는데, 이는 한달 평균 1100건의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통계다. 문제는 강간범의 절반 이상이 군인들로 이들은 전쟁의 도구로써 잔혹한 강간을 자행하였다. 심리전의 일환으로 적성 부족의 남자들 앞에서 그들의 부인이나 딸, 심지어 어머니, 할머니까지 강간함으로써 사기를 저하시키는 용서할 수 없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들은 강간을 한 뒤 여성의 성기를 막대기나 쇠고챙이로 쑤셔서 평생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예사로 저질렀다. 콩고 정부군에 의해서 자행된 성폭력 범죄의 고발에 대해서 조셉 카빌라는 그 중 300건만 인정하였다.     

 

DR콩고에는 약 250개 종족이 있으며, 그 중 다수부족은 콩고족, 루바족, 몽고족(Mongo)이다. 이들 부족은 모두 10∼14세기 서쪽과 북쪽으로부터 이 지역에 들어와 16세기 유럽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될 때까지 왕국을 이루며 번창했던 반투어계 종족에 속한다. 그외 반투족에는 룬다족, 카사이족, 쾅고족 등이 있다. 반투어계 종족은 DR콩고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비반투족으로는 북부의 망베투족, 반다족, 아바람보족, 아잔데족 등의 수단계 종족과 동북부의 나일어군 종족들이 있다. 구석기시대 말에 도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정착민인 피그미족은 주로 산림과 강변 지역에 거주한다. DR콩고에서 쓰이는 언어와 방언은 700개에 이른다.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4대 언어는 스와힐리어, 루바어, 링갈라어, 콩고어다. 4대 언어는 지역 상거래와 라디오 방송에서 쓰인다. 군대 공용어인 링갈라어는 킨샤사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 50%, 개신교 20%, 킴방구주의자교회(Kimbanguist) 10%, 이슬람 10%, 토착신앙 10% 순이다.  

 

DR콩고의 경제는 주로 광업과 농업에 의존하는 세계최빈국이다. 다이아몬드, 콜탄, 구리, 금, 은, 코발트, 우라늄, 아연, 카드뮴 등 광물자원이 매우 풍부하여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가장 중요한 외화 소득원이었다. 구리를 비롯한 광물자원은 샤바 주에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다.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세계 제1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한때는 세계 굴지의 코발트 생산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부패와 내전, 부실경영, 국제원조의 중단 등으로 1990년대초에는 광업이 완전히 붕괴하기에 이르렀다. 대서양에서는 광범위한 석유가 개발되고 있다. 1966년부터 벨기에 등의 자본으로 운영되는 기업을 국유화하고, 1977년에는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콩고 프랑을 폐지하고 자이르화를 도입하였다.

 

DR콩고의 가경지는 3%도 안된다. 농업인구는 전체 노동력의 65% 이상을 차지하지만 농사는 대부분 호구지책에 불과하다. 야자제품, 커피, 차, 코코아, 고무, 목화 등을 수출한다. 주요 식량인 카사바는 자급되며, 옥수수와 쌀은 생산이 부족하다. 바나나도 재배되고 있다. 국토의 75%가 삼림이지만 임업은 미개발 상태이다. 1977년 콩고 강 하류에 잉가댐 건설을 완료하여 1300MW의 수력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력은 충분하지만 공업의 발달은 아직 미약하며, 공업인구는 노동력의 약 10%를 점한다. 수출품은 구리, 코발트, 다이아몬드 등 광산물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농산물은 커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미국, 이탈리아, 남아공, 중국 등이다.

 

DR콩고 국민들은 오랜 독재정치와 내전으로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또, 환경이 열악하여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나 말라리아, 이질, 결핵, 나병, 아프리카수면병, 주혈흡충증(住血吸蟲症) 같은 전염성 질병이 만연해 있다. 병의원과 의사가 매우 부족하고 위생시설도 빈약하다. 영아사망률은 높고 평균수명은 낮다.

 

DR콩고의 교육제도는 초등교육 6년, 중등교육 4년제다. 6∼11세 아동 가운데 약 60%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중등학교에 진학하는 아동은 소수에 불과하다. 학교시설이 미비하고 교사들은 대부분 자격미달로 교육의 질이 매우 낮은 실정이다. 킨샤사와 키상가니, 루붐바시에는 대학교가 있다. 언론은 정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며,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인은 투옥될 수 있다.

 

한국과 DR콩고는 구 자이르 시절인 1963년 4월 수교하고, 1969년 12월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양국 사이에는 의료협력협정(1969. 11), 경제·기술·과학·사회 및 문화 협력에 관한 일반협정(1980. 11), 무역협정(1981. 11), 문화협정(1981. 11)이 체결되어 있다. 한국은 의료진 파견, 무상원조, 기술연수생 초청교육 등 정부차원의 지원과 민속예술단의 방문공연 등 여러 분야에서 DR콩고와 교류해왔다. 1982년 6월에는 모부투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DR콩고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가 진출해 있으며, 한국은 구리와 코발트 등 천연자원을 수입하고 있다. 

 

조선과 DR콩고는 1972년 12월 수교하고 1973년 5월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양국은 1973년 11월 경제 및 과학·기술 협정, 1974년 12월 군사차관협정, 1974년 12월 문화협조협정, 1987년 9월 정부간 공동위원회 창설합의서 등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