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룬디 지도
부룬디공화국(Republic of Burundi)은 아프리카 중동부의 적도 이남에 있는 작은 내륙국이다. 북쪽은 르완다, 동쪽과 남쪽은 탄자니아, 남서쪽은 탕가니카 호, 서쪽은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과 접해 있다. 면적은 약 2만7천8백km²로 한국의 약 1/4 정도 된다. 인구는 약 8백10만명으로 아프리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수도는 부줌부라(Bujumbura)이다.
부룬디의 서부 고원지대는 나일 강과 콩고 강의 분수령을 이루면서 남북으로 뻗어간다. 서부 고원지대의 최고봉은 2760m봉이다. 분수령의 서쪽으로는 해발 1400m의 키부 호에서 루지지 강이 동아프리카지구대에 속하는 지구를 따라 남쪽으로 86km를 흘러 해발 760m의 탕가니카 호에 이른다. 루지지 강은 탕가니카 호와 함께 서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북쪽의 홍해로부터 남쪽의 모잠비크까지 종단하는 동아프리카지구대의 단층애는 루지지 강의 협곡으로부터 급격히 솟아올라 나일 강과 콩고 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분수령의 동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넓은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동쪽 국경지대는 해발고도 1500∼1950m의 고원지대로 나일 강의 최남단인 루부부(Ruvubu) 강 유역 분지가 이 고원에 포함된다.
부룬디의 기후는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열대성 기후에 속하지만 해발고도가 높아서 기온이 다소 낮은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16℃~23℃, 연평균강우량은 1000㎜~1400㎜이다. 산악지대의 경사면에는 삼림이 울창하고, 고원지대에는 수목이 우거진 사바나가 대부분이다. 동쪽으로 갈수록 나무가 없는 사바나 초원이 드넓게 분포한다. 부룬디에는 코끼리, 하마, 악어, 물소, 사마귀멧돼지, 비비, 영양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부룬디의 역사는 르완다와 매우 유사하다. 고고학적인 유물은 BC 7만년 전 피그미족(Pygmy)의 일족인 트와족(Twa=Batwa)이 이미 이 지역에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트와족은 성인 남성의 평균신장이 1.5m 이하인 소인족으로 오랜 옛날부터 사냥과 채집, 도기제작을 해왔다. 약 5천년 전 중앙아프리카 산악지대로부터 반투어를 사용하는 후투족이 이주해 왔다. 이후 후투족의 이주는 11세기까지 계속되어 부룬디 최대의 종족이 되었다. 15세기 후반에는 중서부 사하라 회랑지대에서 온 종족과 유사점이 많은 투치족의 이주와 정착이 이루어졌다. 인구의 15%도 안되는 투치족은 가축과 토지의 교묘한 계약을 통해 절대다수 종족인 후투족을 지배하였다. 17세기초부터 투치족의 음와미(Mwami, 왕)는 봉건제도를 확립하고 각 지역의 부족장들을 통해서 후투족과 트와족을 통치하였다.
부룬디 왕국 최초의 음와미인 투치족 은타레 루샤치(Ntare I Kivimira Savuyimba Semunganzashamba Rushatsi Cambarantama, 재위 1680~1709)는 1675∼1705년까지 중앙의 은코마(Nkoma)로부터 주변의 부투치(Bututsi), 킬리미로, 부옌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9세기 은타레 4세(Ntare IV Rutaganzwa Rugamba, 재위 1796∼1850) 때는 지금의 르완다 남부와 탄자니아 서부 일대까지 정복하였다. 1879년부터 로마 카톨릭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왕국의 체제는 점차 지방분권화되어 반자치권을 가진 각 지방의 부족장과 음와미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852~1908년까지 부룬디 왕국을 통치한 므웨지 4세(Mwezi IV Gisabo Bikata-Bijoga, 1840~1908)는 왕권을 탈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마콘코(Maconco)나 비로리(Birori) 같은 그의 정적들을 제압하기 위해 독일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1885년 베를린회의에서 부룬디는 독일의 영향권에 편입되었으며, 1899년에는 마침내 독일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독일인들은 1906년이 되어서야 부룬디에 처음으로 이주해왔다.
1916년 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부룬디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했고, 국제연맹은 1923년 부룬디와 르완다를 합병한 루안다-우룬디(Ruanda-Urundi)를 벨기에의 위임통치령으로 승인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로 바뀌었다. 식민지 기간동안 부룬디는 르완다와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종족분리 정책으로 종족간의 적대관계가 심화되었다. 1959년 1월 음왐부차 4세(Mwambutsa IV Bangiriceng, 1912~1977) 음와미는 벨기에 총독에게 루안다-우룬디를 분리하여 르완다와 부룬디로 독립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6개월 뒤 부룬디의 독립을 추진하기 위한 최초의 정당인 루안다-우룬디아프리카민족동맹(African National Union of Ruanda-Urundi, UNARU)이 결성되었다.
1959년 11월 르완다에서 후투족 교사들과 투치족 군인들간의 토지소유권 분쟁이 발단이 되어 후투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후투족은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수많은 투치족이 추방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부룬디의 투치족 군대는 후투족 농민들을 학살하였다. 1960년 르완다에서는 벨기에가 실시한 선거에서 후투족이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부룬디에서는 투치족의 루이스 르와가소르(Louis Rwagasore, 1932~1961) 왕자가 이끄는 범부족정당인 민족진보연합(Union for National Progress, UPRONA)과 기독교민주당(Christian Democratic Party, PDC)이 전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61년 부룬디 입법의원 선거에서 민족진보연합(UPRONA)이 승리한 직후에 르와가소르 왕자가 암살되자 투치족과 후투족간의 종족분쟁이 야기되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학살을 피해 부룬디의 후투족은 르완다로 탈출하였으며, 르완다의 투치족은 부룬디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62년 7월 1일 부룬디는 투치족 음와미가 통치하는 왕국 형태로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1965년 후투족이 의회선거에서 과반수를 넘는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음왐부차 4세는 후투족 수상의 임명을 거부했다. 경찰을 장악한 후투족의 반란은 미셸 미콤베로(Michel Micombero, 1940~1983)가 이끄는 투치족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후투족 출신의 후임 수상마저 암살되자 후투족은 정부의 탄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르완다에서 후투족 정부가 투치족을 학살하는 동안 부룬디의 경찰과 군대는 투치족의 수중에 들어갔다. 1966년 은타레 5세(Ntare V Ndizeye, 1947~1972)는 음왐부차 4세를 폐위시키고 음와미가 되었으나 투치족 미콤베로 수상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어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부룬디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투치족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부와 군부에서는 후투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70∼1971년에는 투치족 일부도 숙청되었다.
1972년 후투족의 군사시설 공격은 후투족에 대한 군부의 조직적인 보복학살을 불러왔다. 투치족 군부에 의해 후투족 20만~25만명이 학살되고 10만~15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1976년 투치족 출신의 쟝 밥티스트 바가자(Jean-Baptiste Bagaza, 1946~) 대령은 무혈 쿠데타을 일으켜 최고혁명평의회를 구성하고 의장에 취임하였다. 1981년 일당제 국가를 주요 내용으로 한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국가원수로 선출된 바가자는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종교의 자유도 박탈했다.
1987년 투치족 출신의 피에르 부요야(Pierre Buyoya, 1949~) 소령은 쿠데타로 바가자 정권을 전복시키고 헌법을 폐지하였으며 정치단체들을 해산시켰다. 피에르 부요야는 국가구제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 for National Salvation, CSMN)를 통한 군부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1988년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종족분쟁이 일어나자 군부는 2만명의 후투족을 학살하였다. 그 결과 부요야는 1992년 종족을 초월한 정부와 의회 구성, 연립정권의 수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을 공포하였다. 1988년의 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도 설치되었다. 조사위원회는 1962~1993년 사이에 25만명이 학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1993년 6월 부룬디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서 후투족 정당인 부룬디민주전선(Front for Democracy in Burundi, FRODEBU)의 지도자 멜키오르 은다다예(Melchior Ndadaye, 1953~1993)가 국가원수에 당선되어 그해 10월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102일만에 은다다예 대통령이 투치족 군부에 의해 암살되자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였다. 1994년초 의회에서 후투족의 시프리엔 은타리아미라(Cyprien Ntaryamira, 1955~1994)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르완다에서 은타리아미라 대통령과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함께 탄 비행기가 격추되면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종학살사태가 일어나 대규모 난민이 르완다를 탈출하였다. 1994년 10월 부룬디 의회는 후투족의 실베스터 은티반퉁가니아(Sylvestre Ntibantunganya, 1956~) 국회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한달도 채 안되어 정부와 의회에서 투치계 정당인 국가진보연맹(Union for National Progress, UPRONA)이 철수하고, 수도인 부줌부라에서 후투족 난민들의 대학살이 일어나면서 종족간의 폭력사태가 촉발되었다. 이 내전으로 1994년 한 해 동안만 약 30만명이 학살되었다.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의 인도주의적 요청에 따라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부룬디 교전당사자간의 평화회담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1995년 줄리우수 니에레레 전 탄자니아 대통령의 중재로 평화회담이 시작되었다. 1996년 투치족의 피에르 부요야가 또 다시 쿠데타로 부룬디의 정권을 잡았다. 그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1998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부요야 정권은 반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주로 후투족 주민들을 난민촌에 강제로 수용하였다. 니에레레가 사망하자 바통을 이어받은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중재로 평화회담이 진행되었다. 2000년 탄자니아의 아루샤와 남아공의 프리토리아에서 부룬디 대통령과 교전당사자 13개 단체 대표들 사이에 권력배분에 합의하는 이른바 아루샤평화화해협정이 체결되었다. 평화협정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후투족과 투치족의 차별을 없애고 부룬디의 정부와 군부를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3년간의 과도정부를 두고, 양대 종족이 같은 비율로 군부에 참여하는 방안이 제출되었다.
2000년 8월 28일 아루샤평화화해협정의 일환으로 3년시한(2001.11.1~2004.10.31)의 부룬디 과도정부 출범안이 수립되었다. 2001년 11월부터 평화안과 권력배분협정의 이행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투치족과 후투족 강경파들은 이 협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종족간 충돌이 다시 증가하였다. 2002년 12월 3일 부요야 부룬디 대통령과 후투족 최대 반군단체인 민주수호국가평의회-민주수호군(National Council for the Defense of Democracy-Forces for the Defense of Democracy, CNDD-FDD) 지도자 피에르 은쿠룬지자(Pierre Nkurunziza, 1963~) 사이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2003년 2월 아프리카연합(AU) 특별 정상회의는 브룬디 정전협정의 이행을 위한 부룬디 평화유지군 파견을 승인하였다. 2003년 4월 30일 아루샤평화협정에 따라 과도정부 후반기 대통령으로 후투족의 부룬디민주전선(FRODEBU) 지도자 도미티엔 은다이제예(Domitien Ndayizeye, 1953~) 전 부통령이 취임하였다. 부요야 전 대통령은 종신직 상원의원으로 남게 되었다.
2004년 6월 유엔도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등 부룬디 문제에 개입하였다. 유엔 파견단은 평화유지군 5650명, 민간경찰 120명, 민간요원 1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투치계 민족주의자 반군단체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는 수도 외곽에서조차 후투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다가 2005년 6월이 되어서야 무력행사를 중단했다. 2005년 2월 국민투표에서 종족할당에 따른 정부 각료의 임명과 의회의 구성, 군대 편성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이 90%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 그해 6월부터 7월까지 지방의원과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부룬디 최초의 민주적 선거가 각 지역별로 실시되었다. 후투계 민주수호국가평의회-민주수호군(CNDD-FDD)은 지방선거에서 55%, 하원선거에서 58%의 지지를 얻어서 승리하였다. 2005년 8월 은쿠룬지자 CNDD-FDD 의장은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후투계 정부가 들어섰다.
2006년 9월 8일 부룬디 정부는 마지막 반군세력인 후투인민해방당의 민족해방군(Hutu Peoples Liberation Party-National Liberation Forces, PALIPEHUTU-FNL, NLF, FROLINA)과 반군의 무장해제 및 정규군으로의 편입을 주요 내용으로 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반군의 각료 및 의원직 배분 요구에 대해 부룬디 정부는 이들 직위가 헌법상 선출직으로 반군들을 임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은쿠룬지자는 반군들이 각료와 의원직에 진출할 경우 자신의 권력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여 반군들의 무장해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2007년말까지 반군의 무장해제 기한이 연장되었으나 민족해방군(FNL) 고위간부들은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휴전감시기구에서 철수했다. 같은 달 FNL과 경쟁관계에 있는 무장단체가 수도에서 무력충돌을 일으켜 20명을 살해하자 주민들이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군들의 기습공격은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동시다발로 이루어졌다. 반군단체들은 정부의 무장해제 요구를, 정부는 반군단체들의 정치범 석방 요구를 거부했다.
FNL 반군은 정부가 보호하는 난민촌을 공격하고, 지역주민들의 가옥을 약탈했다. FNL에 보충된 소년병들의 폭력으로 많은 어린이들이 희생되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부녀자들에 대한 폭행과 강간도 증가했다. 이 사건으로 FNL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범법자들은 정부에 의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기소되지도 않았다. 사법체계의 재수립은 부룬디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부룬디에서는 비인도적인 집단학살과 고문, 강간, 납치 등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범죄자들에 대한 조사와 기소를 위한 진실화해위원회와 특별재판소의 설치도 이행되지 않았다.
아가손 르와사(Agathon Rwasa)가 이끄는 FNL은 부룬디 내전기간에 투치족의 군사정부에 대한 무장투쟁을 벌이던 피에르 은쿠룬지자가 이끄는 CNDD-FDD와 함께 후투족의 양대 반군단체였다. FNL은 2000년 12월 부줌부라에서 관광객들이 탄 버스를 공격하여 21명을 살해한 일명 '타이타닉 고속버스 집단학살(Titanic Express massacre)'과 2004년 8월 부룬디 서부 접경지역에 있는 가툼바(Gatumba)에서 125명의 DR콩고 바냐물렝게족 집단학살, 부룬디 카톨릭 교회 수장인 몬시뇨르 마이클 코트니(Monsignor Michael Courtney) 살해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FNL은 또 2차 콩고내전에도 개입했다. 가툼바 학살사건 이후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르와사를 국제형사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룬디 정부도 르와사 체포령을 내렸다. FNL은 수백명의 소년병들을 시켜서 어린이들을 살해하고 불구로 만들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6년 9월 부룬디 정부와 FNL은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2006년 11월 은다이제예 전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부룬디 정부에 의해 쿠데타 음모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2007년 2월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집권당 CNDD-FDD의 특별당대회를 소집하여 집권당 총재인 후세인 라쟈부(Hussein Radjabu)를 해임하였다. 후세인 라쟈부는 집권당 총재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2006년 11월 은다이제예 전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을 쿠데타 음모혐의로 체포하여 반역죄로 기소하는데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1월 부룬디 법원이 쿠데타 음모혐의자들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은쿠룬지자는 자신의 정적 중 한명인 라쟈부를 해임하고 그해 4월 국가반역죄로 체포하여 구금했다. 2007년 7월 은쿠룬지자는 라쟈부의 측근인 제2부통령, 상원부의장, 국회의장을 해임하고 새 내각의 각료들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집권당 의원 가운데 40여명(하원 118석 가운데 집권당 64석, 후투계 FRODEBU 30석, 투치계 UPRONA 15석)은 라쟈부 지지의사를 표명하면서 내각참여를 거부하였다.
집권당의 다수 의원들이 정부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수개월간 국회의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내부분열로 야당과의 연합정권을 구성할 수 밖에 없는 은쿠룬지자의 권력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부룬디는 2010년에 대선과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 2010년으로 예정된 대선과 총선에서 은쿠룬지자 현 대통령과 집권당의 승리는 불투명하다. 후투계 FRODEBU는 후투족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것을 내세워 차기 의회선거에서 다수당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룬디에서는 아직도 정부군과 FNL의 전투가 지속되고 있어 언제든지 내전이 재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약 2천명의 남아공 군인들이 주축이 된 부룬디 주둔 유엔 평화유지군도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부룬디 주변국인 DR콩고와 르완다, 우간다는 3자간 플러스(Tripartite Plus) 체제를 구성하고 반군의 무장해제를 촉구하고 있으나, 반군 내부의 갈등과 부룬디 정부내 반군의 지분을 둘러싸고 양측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탄자니아 정부는 자국내 부룬디 난민 약 20만명을 2008년 중반까지 귀국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부룬디 정부는 갑작스런 대규모 인구의 유입을 반대하고 있다. 1972년의 종족학살과 1993년의 내전으로 유입된 탄자니아내 부룬디 난민 가운데 상당수는 탄자니아 국적의 취득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룬디는 현재 21개의 정당간 연립에 기초한 대통령제 민주공화국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다. 입법기관은 양원제로 하원과 상원이 있다. 국민투표로 선출되는 5년 임기의 하원은 정원이 140석으로 후투족 60%, 투치족 40% 비율로 구성되는데 양측 모두 30%는 여성에게 할당된다. 트와족에게도 3석이 배정된다. 17개 주의 대표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5년 임기의 상원은 54석으로 구성되는데 30%는 여성이어야 한다. 3석은 전직 대통령들의 몫이다. 17개 주는 후투족 1명, 투치족 1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한다. 주요정당은 후투계 CNDD-FDD와 FRODEBU, 투치계 UPRONA, 후투계 무장반군세력인 PALIPEHUTU-FNL 등이 있다.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하고, 대통령은 두 명의 부통령과 행정부 내각협의회의 각료들을 임명한다. 대통령은 내각협의회에 참여하는 상원의원 14명을 지명할 수 있다. 각료협의회 구성원은 입법기관의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대법원은 부룬디 최고사법기관이며, 그 밑에 3개의 항소법원이 있다. 각 주와 123개 지역에는 1심재판소가 있다.
부룬디의 인구는 후투족 85%, 투치족 14%, 트와족 1%로 구성되어 있다. 서아프리카의 차드-니제르 지역에서 온 반투어를 쓰는 후투족은 대개 농사를 짓고 있다. 나일 하곡 또는 에티오피아에서 온 투치족은 동아프리카의 갈라족과 관련이 있으며 주로 목축을 한다. 원주민인 트와족은 콩고 분지에서 들어온 피그미의 일족이다. 공용어는 룬디어와 프랑스어지만 스와힐리어도 사용되고 있다. 모든 교육은 무료이지만 초등학교 학령아동의 25%만이 취학한다. 초등학교에서는 룬디어로 수업을 하며, 중학교 이상의 수업은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일부 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10세 이상의 인구 중 2/3는 문맹이다. 종교는 로마 카톨릭 62%, 전통신앙 23%, 이슬람 10%, 개신교 5% 순이다.
부룬디에서는 합법적인 취재활동을 하던 언론인들이 빈번하게 체포되고 있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나라다. 교육수준이 낮고 문맹자가 많아서 신문의 보급률도 저조하다. 방송은 국영 라디오 방송국이 유일하다.
부룬디의 출생률과 사망률은 동시에 높다. 평균수명은 남자 42세, 여자 46세로 세계 최하수준이다. 높은 인구밀도와 인구증가율은 식량난 등 많은 사회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보건환경이 극히 열악하여 홍역, 이질, 말라리아, 폐결핵이 만연해 있다. 부룬디 정부는 인구의 재배치와 식량난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룬디는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최빈국 가운데 한 나라다. 전체 노동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환금작물은 커피, 목화, 차 등이다. 내수용 작물로는 카사바, 바나나, 옥수수, 땅콩, 기장 등을 재배한다. 축산업은 주로 염소와 소, 양을 기른다. 소가죽은 부룬디의 주요 수출품이다. 목재는 주로 숯을 굽거나 연료로 이용된다. 탕가니카 호에서는 어업이 행해지고 있다.
부룬디 남동부에는 전세계 니켈 매장량의 3%가 묻혀 있다. 그외 소량의 구리, 코발트, 바나듐도 매장되어 있다. 북동부 르완다와의 국경지대에는 상당량의 주석과 텅스텐이 매장되어 있다. 루지지 강 하곡과 탕가니카 호에는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부룬디에서 채굴되는 광물은 고령토, 금, 석회, 이탄 등이다. 제조업에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2%가 종사한다. 주요 생산품은 면직물, 시멘트, 가공 커피, 차, 야자유, 화장품, 신발, 도기, 살충제, 페인트, 비누, 바나나, 맥주, 담배 등이다. 전기는 주로 DR콩고의 부카부 수력발전소에서 수입해오고 있다. 루부부 강의 기테가 수력발전소, 무게레 강의 부반자 수력발전소에서는 소량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 개발, 중공업, 면직공업은 국유산업이다.
2006년 12월 탄자니아를 비롯하여 케냐, DR콩고, 우간다, 부룬디, 잠비아, 르완다, 앙골라, 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앙골라 등 11개국은 대호수지역(Great Lakes Region) 정상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상설 사무국을 부룬디에 두기로 합의하였다. 2007년 4월에는 르완다, DR콩고와 함께 지난 1976년 결성되었다가 1994년 지역분쟁으로 와해된 지역 경제협력 블록인 대호수국가경제공동체(Great Lakes Countries Economic Community)를 재건하기로 합의하였다. 2007년 6월 부룬디는 황폐화된 국내경제를 재건하고 지역간 경제협력을 위해 르완다와 함께 동아프리카공동체(East African Community, EAC)에 가입하고 주변국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르완다의 투치계 대통령인 폴 카가메 대통령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탕가니카 호안의 부줌부라, 루몬즈, 니아비신두에는 부룬디의 중요한 항구들이다. 부줌부라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벨기에, 프랑스, 서독은 주요 차관제공국들이다. 주요 수출품은 커피(수출총액의 80%), 차, 원면, 가죽 등이다. 수입품은 대부분 각종 소비재, 석유제품, 기계류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다.
부룬디의 외교노선은 비동맹중립이다. 한국은 부룬디와 1991년 10월 뉴욕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7년 부룬디는 소규모의 광물연료, 신발류, 자동차 등을 한국으로부터 수입하였다. 2004년 11 은쿠룬지자 당시 선정장관(현 대통령)이 통일교의 세계종교행사에 개인자격으로 참석한 바 있다. 부룬디의 한국교민은 4명이 있다(2007).
조선은 부룬디와 1967년 3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9년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1994년 상주공관을 철수한 뒤에는 주우간다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부룬디는 주중국대사가 북한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부룬디는 과거 국제무대에서 친북한 노선을 유지하였다.
'아프리카 바로 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앙골라령 카빈다(Cabinda) (0) | 2010.01.29 |
---|---|
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콩고(Congo) (0) | 2010.01.29 |
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르완다(Rwanda) (0) | 2010.01.29 |
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콩고민주공화국(DRC) (0) | 2010.01.29 |
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중앙아프리카공화국(CAR) (0) | 2010.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