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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앙골라령 카빈다(Cabinda)

林 山 2010. 1. 29. 22:03

앙골라령 카빈다

 

카빈다(Cabinda, Kabinda)는 앙골라((Republic of Angola)의 고립영토로 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 콩고 강 하구 북쪽에 있다. 북쪽과 북동쪽은 콩고, 남쪽과 남동쪽은 DR콩고와 접해 있다. 면적은 7823㎢, 인구는 약 26만4천명(2006)이다. 주도는 벨레(룰론두) 강 연안에 위치한 석유수출항인 카빈다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90㎞이다. 카빈다는 벨리제(Belize), 부코자우(Buco Zau), 카빈다(Cabinda), 콩고(Congo) 등 네 지역으로 나뉜다. 현재 2만명 이상의 카빈다인이 콩고와 DR콩고의 난민촌에 수용되어 있다.  

 

카빈다에는 로앙고, 카콩고, 응고요 등 세 소왕국이 존재했었다. 15세기경 반투족의 일족인 우요족(Woyo)이 세운 응고요 왕국은 카빈다의 남부 콩고 강 바로 북쪽에 있었다. 지금의 카빈다 남부지방과 DR콩고의 서부에 해당한다. 수도는 음반자 응고요(Mbanza Ngoyo)였다. 초기 정착민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던 왕국의 선조들을 은푸무 은시(nfumu nsi, 대지의 군주)라고 칭했다. 콩고 왕국의 강력한 왕인 마니콩고는 응고요를 비롯한 세 소왕국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의 탐험가, 선교사, 상인들은 콩고 강 하구에 도착하여 콩고 왕국의 마니콩고와 접촉했다. 몇 년 뒤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 영국인들은 카빈다에 무역소와 야자유 공장, 벌목장들을 세웠다. 무역이 확대되고 유럽인들이 증가하자 경쟁적인 식민주의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700년경 노예무역으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카빈다 항은 해외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응고요의 경제는 노예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1783년 포르투갈 군대가 카빈다에 요새를 건설하자 이 지역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응고요는 이웃 왕국인 카콩고와 연합군을 결성하고, 프랑스인들의 도움을 받아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전투가 계속되자 증가하는 전쟁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응고요 왕국은 곧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응고요 귀족층은 노예수출로 부와 세력을 얻은 반면 왕권은 약화되었다.

 

1830년대 귀족들이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데 실패하자 왕국은 여러 작은 공국(公國)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왕국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1885년 2월 1일 응고요 왕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카빈다의 통치자와 왕자들의 요청에 의해 카빈다를 포르투갈 왕실의 보호령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시물람부코조약(Treaty of Simulanbuco)이 체결되었다. 시물람부코조약으로 카빈다는 포르투갈의 보호령이 되었다. 같은 해 베를린회의에서 서구 제국은 카빈다가 포르투갈령 식민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시물람부코조약과 베를린회의에서 카빈다와 앙골라는 별개의 존재로 다루어졌다. 

 

1954년부터 카빈다만석유회사(Cabinda Gulf Oil Company)가 대서양 연안에서 석유탐사를 시작한 이래 카빈다에서는 유전이 계속 발견되었다. 석유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커지던 1960년대초 카빈다에는 포르투갈과 앙골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단체들이 생겨났다. 1960년에는 루이즈 랑크 프랑크(Luiz Ranque Franque)가 지도하는 카빈다해방운동(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the Enclave of Cabinda, MLEC)이 조직되었다. 카빈다해방운동(MLEC)은 콩고의 브라자빌에서 다양한 이주민 단체들이 연합한 결과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마욤베민족동맹(Mayombe National Alliance, ALLIAMA)은 인구가 매우 적은 마욤베를 대표하는 단체였다.

 

1961년부터 앙골라에서 앙골라인민해방운동(Popular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Angola-Party of Labour, MPLA)과 앙골라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Angola, FNLA), 앙골라전면독립민족연맹(National Union for the Total Independence of Angola, UNITA)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을 축출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포르투갈식민지전쟁(Portuguese Colonial War, 1961~1974) 기간동안 카빈다의 민족주의 운동단체들도 포르투갈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카빈다의 독립운동단체들은 앙골라의 반포르투갈 독립투쟁에는 협력하지 않았다. 1960년대 앙골라에서 독립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1963년 5월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카빈다와 앙골라를 각각 39번째와 35번째 미독립국가로 등재하였다.

 

1963년 카빈다민족연맹행동위원회(Action Committee of the Cabinda National Union, CAUNC)와 카빈다해방운동(MLEC), 마욤베민족동맹(ALLIAMA) 등 세 조직은 카빈다해방전선(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Enclave of Cabinda, FLEC)으로 통합되었다. 당시 콩고는 카빈다해방전선(FLEC)을 지원했다. FLEC의 지도자는 앙골라 독립운동에의 참여를 거부한 MLEC의 랑크 프랑크가 맡았다. FLEC은 카빈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FLEC 임시정부 수반은 은지타 헨리크 티아고(N’zita Henriques Tiago)가 맡았다. 이어 실시된 임시정부 대통령선거에서는 랑크 프랑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4년 4월 24일 포르투갈의 에스타두노부(Estado Novo) 체제가 좌익 군부쿠데타로 전복되자 앙골라를 포함한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독립이 허용되었다. 포르투갈이 앙골라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결정하자 카빈다는 별도의 독립국가 수립을 요구하였다. 1975년 1월 포르투갈의 알보르(Alvor, Algarve)에서 포르투갈 식민지 당국과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 앙골라민족해방전선(FNLA), 앙골라전면독립민족연맹(UNITA) 등 앙골라 해방운동단체들이 독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담에 FLEC은 초청받지 못했다. 이들 사이에 체결된 알보르조약(Treaty of Alvor)은 카빈다를 앙골라에 병합시켰다. 그러나 카빈다의 모든 정치단체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채 체결된 조약은 불법이며, 따라서 카빈다를 앙골라에 편입시킨 알보르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카빈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앙골라를 상대로 분리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75년 3월 앙골라에서는 좌익 MPLA와 우익 FNLA, 5월에는 MPLA와 우익 UNITA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7월 28일 우간다의 캄팔라에서 앙골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열린 아프리카단결기구(OAU) 정상회담에서 랑크 프랑크는 카빈다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대부분의 아프리카단결기구(OAU) 회원국들은 카빈다의 분리독립투쟁이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FLEC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자이르(DR콩고)의 모부투 대통령은 카빈다의 미래를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카빈다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지리적으나 역사적으로 앙골라와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콩고의 헨리 로페스(Henri Lopes, 1937~) 수상의 지지를 받았다. 8월 1일 FLEC은 킨샤사에 카빈다공화국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재천명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앙골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75년 8월부터 앙골라 내전은 MPLA와 FNLA-UNITA 연합세력간의 전투로 격화되었다. 소련과 쿠바는 MPLA를 지원한 반면에 미국과 중국, 프랑스, 이스라엘, DR콩고, 남아공 백인정권 등은 FNLA와 UNITA를 지원하였다. 또, 불가리아와 이집트, 모로코, 조선, 사우디아라비아, 잠비아는 UNITA를 지원하고 루마니아와 알제리, 가나는 FNLA를 지원하여 앙골라 내전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앙골라 내전에 개입한 것은 카빈다의 석유채굴권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1976년 2월 MPLA는 마침내 FNLA-UNITA 연합세력을 물리치고 내전에서 승리했다. 1975년 11월 11일~1976년 1월 4일 MPLA군은 쿠바군의 지원을 받아 프앵트누아르를 통해서 카빈다를 침략했다. MPLA는 FLEC의 임시정부를 전복시키고 카빈다를 앙골라의 한 주로 병합했다. 2천명에 이르는 MPLA군은 주로 도시지역을 장악한 반면 FLEC은 지방을 장악했다.

 

1970~80년대 내내 FLEC은 카빈다의 독립을 위해 앙골라에 대한 정치적 투쟁과 함께 저강도 게릴라 작전을 전개하였다. 앙골라의 UNITA와 남아공은 FLEC을 지원하였다. FLEC은 앙골라 정부군과 경제적으로 중요한 목표물들을 공격하여 앙골라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FLEC은 랑크 프랑크의 FLEC-Ranque Franque, 은지타 헨리크 티아고의 FLEC-N'Zita,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루보타(Francisco Xavier Lubota)가 이끄는 FLEC-Lubota 등 세 개의 파벌로 분열되었다. 1977년 11월에는 카빈다해방군사령부(Military Command for the Liberation of Cabinda, MCLC)라는 또 하나의 파벌이 조직되었다. 1979년 6월 카빈다해방군(Armed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Cabinda, AFLC)은 카빈다인민해방운동(Popular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Cabinda, MPLC)을 창설하였다. 1988년 카야 모하메드 야이(Kaya Mohamed Yay)가 이끄는 카빈다공산주의자평의회(Communist Committee of Cabinda, CCC)는 FLEC과 결별했다.

 

1990년대에는 루밍구 루이스 김비(Lumingu Luis Gimby)가 이끄는 카빈다민족해방연맹(National Union for the Liberation of Cabinda, UNLC)이 결성되었다. FLEC은 카빈다부흥해방전선(FLEC-Renewal, FLEC-R)과 카빈다해방전선-카빈다무장군(FLEC-Armed Forces of Cabinda, FLEC-FAC)으로 분열되었다. 1991년 국제연합의 중재로 앙골라의 각 정치세력들은 휴전협정을 맺었다. 1992년 앙골라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MPLA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제1야당인 UNITA가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아 다시 내전이 일어났다.   

 

1990년대 카빈다 반군은 앙골라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위해 외국계 석유회사 직원들을 납치한 뒤 몸값을 요구하였다. 1992년 3월 27일과 4월 23일 두 차례에 걸쳐 FLEC군은 셰브론 석유회사의 버스를 세우고 노동자들을 내리게 한 뒤 불을 질렀다. 5월 14일에는 셰브론사 FLEC군과 말롱고(Malongo) 경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25발의 박격포탄이 셰브론사 근처에 떨어졌다. 막대한 수입을 보장하는 유전의 상실을 우려한 앙골라 정부는 1995년 카빈다부흥해방전선(FLEC-R)과 카빈다무장군(FLEC-FAC), 카빈다민주전선(Democratic Front of Cabinda, FDC) 대표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곧 결렬됐다. 

 

1996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망명 카빈다인들이 카빈다해방전선(Liberation Front of the State of Cabinda, FLEC-Lopes)을 결성했다. 1997년 2월 FLEC-FAC은 목재회사 SDN의 직원 2명을 납치해서 1명을 살해하고, 1명은 40만 달러를 받고 석방했다. 1997년 4월 FLEC은 피점령 국가와 원주민들의 연대를 위한 조직인 이름없는국가와인민기구(Unrepresented Nations and Peoples Organization, UNPO)에 가입하는 한편, 외국계 석유회사와 건설회사의 직원들을 납치함으로써 국제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려고 노렸했다. 1998년 4월 FLEC-FAC은 앙골라인 9명, 포르투갈인 2명을 납치해서 50만 달러의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1999년 3월 FLEC-R은 비안솔오일엔지니어링(Byansol oil engineering)에 근무하는 프랑스인 2명과 포르투갈인 2명, 앙골라인 1명을 납치했다. 앙골라 정부는 인질의 몸값으로 천2백5십만 달러를 반군 지도부에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앙골라군은 안토니오 벤토 벰베(Antonio Bento Bembe) FLEC-R 의장이 나타나자 경호원들과 함께 체포했다. 1999년말 앙골라 정부는 세 반군단체의 지도자들을 거의 모두 체포했다. 2000년에는 FLEC-FAC이 건설회사에 고용된 3명의 포르투갈 노동자를 납치했으며, FLEC-R은 5명의 포르투갈인을 납치했다. 이들 인질들은 가봉과 콩고 정부의 외교적 중재로 2001년 6월이 되어서야 풀려났다. 

 

앙골라 내전은 2002년 UNITA의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Jonas Malheiro Savimbi, 1934~2002)가 암살되고 나서야 끝났다. 앙골라 내전은 끝났지만 카빈다에서는 독립전쟁이 계속되었다. 파리에 본부를 둔 독립운동단체들은 카빈다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 단체들은 시물람부코조약에 근거하여 앙골라의 카빈다 점령을 불법이라고 주장하였다. 2003년 유엔 카빈다 인권위원회는 MPLA가 카빈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면서 수많은 잔혹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고했다. 2004년 사하라이남아프리카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 for Sub-Saharan Africa)의 피터 타키람부떼(Peter Takirambudde) 사무총장은 카빈다에서 앙골라군의 반인도적 범죄행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앙골라 정부는 FLEC-FAC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카빈다공화국 임시정부의 헨리크 티아고 대통령은 이를 반박하였다. 

 

2006년 7월 17일 FLEC-R과 앙골라 정부는 콩고의 브라자빌에서 카빈다 주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8월 FLEC-R과 앙골라 정부는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카빈다 평화안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가봉, 콩고, DR콩고, 일본, 한국, 포르투갈어사용국공동체(CPLP) 등의 승인을 받았다. 평화조약의 체결로 1975년 이래 계속된 카빈다 독립전쟁은 비로소 종식되는 듯 보였다. 정전회담 직후 FLEC-R의 전 의장이자 FLEC의 사무총장 겸 부의장, 카빈다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하는 조직 대화와평화를위한카빈다포럼(Cabindan Forum for Dialogue and Peace, CFDP) 의장인 안토니오 벤토 벰베(Antonio Bento Bembe)는 자치가 허용된다면 앙골라에 대한 전투중지를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그와 그의 소속 단체는 자치권만 허용된다면 카빈다가 앙골라의 일부로 존속되는 것도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FLEC-R을 제외한 카빈다의 다른 정치단체들은 이 휴전협정이 무효라고 비난하였다. FLEC-FAC은 벰베가 앙골라와 협상을 벌일 권한이 없다고 반박했으며, 카빈다의 완전한 독립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FLEC은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카빈다 안팎에서 대앙골라 분리투쟁을 지속했다. 정전회담을 계기로 카빈다 독립운동단체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었다. 2006년 10월 FLEC-FAC은 아프리카인권연맹위원회(African Union's Commission on Human and People's Rights)에 중재를 요청했다.   

 

카빈다의 대앙골라 독립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카빈다의 분리운동단체들은 여전히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 있어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석유가격의 인상으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미개발 유전은 카빈다의 문제해결에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앙골라는 카빈다의 석유이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앙골라 국영석유회사인 소낭골(Sonangol)의 뒤에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거대 석유자본이 버티고 있다.    

 

카빈다에서는 현재 1일 약 90만 배럴의 원유가 생산된다. 카빈다만석유회사는 앙골라의 소낭골과 이탈리아의 아집(AGIP) 앙골라 현지법인이 41%, 미국의 셰브론(Chevron)이 39.2%, 프랑스의 토탈(Total)이 10%, 이탈리아의 에니(Eni)가 9.8%의 지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의 셰브론은 카빈다산 석유의 75%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원유 수출액은 주민 1인당 10만 달러씩 돌아가지만 카빈다는 아직도 앙골라에서 가장 가난한 주다. 1996년 앙골라 중앙정부와 카빈다 지방정부는 석유수입의 10%를 카빈다에 돌려준다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정부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석유수입이 카빈다인들을 위해 제대로 쓰여지지 않고 있다. 

 
카빈다의 자치권에 대한 논쟁은 문화적, 인종적 특수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카빈다인들은 인종적으로는 바콩고족, 언어학적으로는 키콩고어군에 속한다. 바콩고족에는 앙골라의 자이르 주와 우이게(Uige, 옛 Carmona) 지방 인구의 대다수가 포함된다. 지역적으로 격리된 카빈다인들은 앙골라의 바콩고족과는 매우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카빈다인들은 대부분 앙골라인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종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빈다인 자치권 주장의 토대가 된 민족문화의 특수성 논쟁은 앙골라 정부와 저명인사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MPLA 사무총장은 '문화적 특수성은 독립을 허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앙골라의 모든 주는 저마다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카빈다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MPLA 사무총장의 주장은 카빈다 주민의 자결권을 무시한 강자의 논리일 뿐이다.    

 

카빈다는 석유와 목재, 야자유, 야자열매, 카카오, 커피, 고무, 과일, 상아 등을 수출한다. 석유는 현재 카빈다 최대의 수출품이다. 광물자원으로는 금이 채굴되며, 망간과 인산염도 매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