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 공화국 지도
콩고 공화국(Republic of the Congo)은 중서부 아프리카의 적도에 걸쳐 있는 나라로 전에는 콩고인민공화국이었다. 북쪽으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북서쪽으로 카메룬, 서쪽으로 가봉, 동쪽과 남쪽으로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 남쪽으로 앙골라의 고립 영토인 카빈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의 160km에 이르는 해안선은 대서양에 면한다. 인구는 4백만명(2005), 면적은 3십4만2천km²이다. 수도는 남부의 콩고 강변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브라자빌(Brazzaville)이다. 브라자빌과 콩고 유일의 해항인 푸앵트누아르(Pointe-Noire)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콩고는 콩고 분지의 북서부 대부분을 차지하며, 분지의 서쪽으로는 쿠일루(Kouilou) 강 유역의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북부지방과 쿠일루강 유역은 사바나지대이다. 동서로 펼쳐진 바테케(Bateke) 고원과 방브 고원은 콩고의 2대 강인 콩고(Congo, 자이르) 강과 니아리 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콩고 강은 북부의 75%를 관통하고, 나머지 남부와 남동부에는 니아리 강이 흐른다. 바테케 고원에서 서쪽으로 뻗어간 셸뤼산맥(해발 500∼700m)은 니아리 강과 가봉의 오고웨(Ogowe) 강의 분수령이 된다. 니아리 강 유역(해발 460m)은 경사가 완만하며, 이 강의 하곡에는 비옥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니아리 강의 하곡과 해안평야 사이에는 마욘베 구릉이 뻗어 있다.내륙에는 평원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남북으로 두 개의 분지가 있다. 동부의 DR콩고와 국경을 이루는 우방기(Ubangi) 강과 콩고 강 사이의 콩고 분지(해발 305~460m)는 충적평야와 습지가 많고 열대우림이 우거져 있다. 이 충적평야는 서쪽으로 점점 높아지면서 해발 900m의 고원을 이루고 있다. 해안지역은 북쪽의 모래지대로부터 남쪽의 홍수림 늪지대로 이어진다.
콩고는 고온다습한 열대성 적도기후로 북부 고원지대를 제외하고는 큰 차이가 없다. 전국 연평균기온은 20∼27℃이다. 건기는 6~10월, 우기는 5~6월이다. 연평균강우량은 콩고 강 유역이 1650㎜ 이상, 콩고 강 유역의 남서쪽 고지가 2030㎜ 이상의 분포를 보인다. 분수령을 중심으로 한 고지대는 1600㎜ 이상, 니아리 분지의 대부분은 1270㎜ 미만이다. 우방기 강과 콩고 강 유역은 우기가 되면 범람하는 소택지들이 많다. 소택지와 저지대의 홍수림은 북서쪽으로 뻗어 북부의 광대한 우림지대로 이어진다. 남쪽의 니아리-쿠일루 강 유역은 다소 건조한 편이다. 남서해안을 따라서 벵겔라 해류가 흐른다. 기니 만(Gulf of Guinea)을 흐르는 해류는 차가워서 기후와 강수량, 식생 등에 영향을 준다.
콩고에는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삼림지대에는 침팬지와 고릴라, 여러 종류의 원숭이들이 분포한다. 사바나 지역에는 영양류와 자칼, 치타 등이 서식하며, 고원지대에는 코뿔소와 기린 등이 서식한다.
콩고 최초의 주민은 피그미족이었다. 이후 반투족의 대규모 팽창시대에 여러 부족이 북쪽으로부터 이주해왔다. 피그미족은 대부분 반투족에 의해 추방되거나 흡수되었다. 콩고족(Kongo, 바콩고족)은 오늘날 콩고와 DR콩고, 앙골라, 가봉을 차지한 반투족의 일족이다. 반투족의 강대한 제국이었던 콩고 왕국(Kongo Kingdom, 1400~1914)을 비롯해서 카콩고 왕국(Kingdom of Kakongo), 로앙고 왕국(Kingdom of Loango, Brama kingdom), 안지쿠 왕국(Kingdom of Anziku, Kingdom of Teke, Kingdom of Tyo) 등의 소왕국들은 콩고 강 분지를 따라 무역로를 건설했다.
1400년경에 세워진 콩고 왕국은 서쪽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쪽의 쾅고 강(Kwango River)까지와 북쪽의 콩고 강으로부터 남쪽의 콴자 강(Kwanza River) 서부 콩고 강 유역을 차지하고 마니콩고(manikongo)라는 이름의 강력한 왕이 통치했다. 왕국의 영토는 지금의 콩고와 카빈다, DR콩고의 서부와 앙골라의 북부에 해당한다. 콩고 왕국의 마니콩고는 카콩고, 로앙고, 안지쿠, 응고요(Ngoyo) 왕국 등 소왕국들을 통치했다. 이 왕국은 서아프리카의 노예와 상아, 가죽, 패류화폐 등의 교역을 했다. 15세기 후반후터 포르투갈 원정대가 이 지역에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1484년 제6대 마니콩고인 은징가 음벰바(Nzinga Mvemba, Afonso I, 1456~1543)는 최초로 포르투갈인과 접촉한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포르투갈과 통상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이 마구잡이로 노예를 잡아가면서 이 협정은 폐지되었다.
1570년경부터 콩고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665년 10월 29일 음브윌라 전쟁(Battle of Mbwila)에서 왕국의 군대가 포르투갈 군대에게 패한 결과 안토니오 1세(António I, Nvita a Nkanga) 마니콩고는 체포되어 참수를 당하였다. 이후 콩고 왕국은 여러 족장체제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였다. 콩고 왕국의 개념과 주체성은 지금도 여전히 콩고, DR콩고, 앙골라, 가봉 등 중앙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 좋은 예가 1969년 조직된 콩고의회(Bundu dia Kongo) 같은 단체다. 콩고의회는 콩고와 DR콩고, 앙골라, 가봉으로부터 분리독립하여 옛 콩고 왕국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카콩고 왕국은 15세기경 북쪽의 로앙고 왕국과 남쪽의 응고요 왕국 사이의 대서양 연안에 세워진 소왕국이었다. 카콩고를 세운 사람들은 바콩고족의 일족으로 키콩고어(Kikongo)의 방언을 사용하는 순디족이었다. 카콩고의 초기 역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카콩고는 1535년 콩고 왕국의 아폰소 1세(Afonso I, Nzinga Mvemba,1456~1542 또는 1543)의 기록에 최초로 등장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아폰소 1세는 콩고 강 북쪽 유역을 따라 자리잡은 여러 소왕국과 함께 카콩고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카콩고는 14세기 후반에 성립된 왕국연맹체였던 콩고 왕국의 일원이었다가 16세기에 들어와 독립왕국이 되었다.
1620년대부터 포르투갈 상인들은 카콩고의 노예와 상아, 구리 무역에 눈독을 들이고 말렘바 등지의 항구에 무역소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도 이 지역에 들어왔다. 18세기에 카콩고는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무역선들이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중요한 상업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카콩고는 주로 콩고 왕국이나 마탐바(Matamba) 같은 앙골라 동부지역에서 납치되어 끌려온 노예들을 수출했다. 항구도시의 지사직, 무역과 유럽인을 담당하는 행정관직은 왕 못지않은 권력과 부를 축적했다. 노예제도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카콩고인들은 자신이 소유한 노예의 수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자유민들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귀족계급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세력이 강해진 귀족들이 점차 자치권을 주장하자 왕은 권력을 잃고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하게 되었다. 1830년대 이후 카콩고 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로앙고 왕국 또는 브라마 왕국은 콩고 남서부의 쿠일루 강과 니아리 강 유역에서 대서양 연안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이 왕국은 1485년 이전에 빌리족(바빌리족)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80년대 초의 기록에 의하면 로앙고 왕국은 원래 카콩고 왕국의 일부였으며, 한때 콩고 왕국의 속국 또는 동맹국이었다. 대략 1550년경 로앙고 왕국은 콩고 왕국과 동맹관계를 벗어나 독립 왕국이 되었다. 이 왕국은 내륙의 말레보풀에서 들여온 노예와 상아 무역으로 17세기 말에는 그 세력이 크게 떨쳤다. 전성기의 영토는 북쪽의 마욤베(Mayombe)로부터 콩고 강 입구까지 확장되었다. 통치체계는 지방분권적이어서 왕위계승 서열에 포함된 사람들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8세기 무렵에는 권력이 분산되어 왕위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에 타티(Moe Taty)가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다.
안지쿠 왕국 또는 테케 왕국은 로앙고의 동쪽으로 콩고 강의 팽창부인 스탠리풀(Stanley Pool, Malebo Pool, 지금의 말레보풀)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테케족(바테케족)이 세운 이 왕국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왕국의 수도는 몬솔(Monsol)이었으며, 마코코(makoko)라는 이름의 왕이 통치했다. 마코코는 13명 이상의 봉신(封臣, vassal)을 거느렸다. 안지쿠인들은 바콩고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군사계급으로 용감하고 뛰어난 전사로 유명했다. 이들은 독화살을 개발하고 근접전에서는 도끼를 사용했다.
1600년대 들어와 콩고 왕국과 세력을 다툴 정도로 세력이 강대해진 안지쿠 왕국은 콩고 강 하류로부터 북서쪽으로 쿠일루-니아리 분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내륙교역 특히 상아와 노예무역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상아와 노예를 수출하고 별보배조개(cowry), 소금, 리넨, 유리 등을 수입하였다. 콩( Kong)의 북동부 국경 근처에는 구리 매장량이 풍부하였다. 1620년경 안지쿠가 밤푸누(Bampunu)와 반자비(Banzabi) 등을 합병하여 독립왕국을 세우자 구리광산을 차지하려는 남부의 콩고 왕국과 17세기 내내 전쟁이 지속되었다. 안지쿠 왕국은 19세기까지 존속했다.
반투족의 여러 왕국들과 유럽의 상인들 사이에는 내륙에서 잡아온 노예와 유럽의 다양한 상품을 교역하기 위한 상업적 관계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반투족의 왕국들은 유럽 상인과의 노예무역으로 번영하였다. 당시 연안의 왕국과 내륙의 왕국 사이에는 소금과 농산물의 교역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이 교역망을 바탕으로 유럽의 노예선은 연안의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내륙에서 납치되어 온 노예를 유럽 각국으로 실어날랐다. 18세기에는 대서양 연안의 크고 작은 상업항구마다 소왕국이 들어서서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이후 콩고 강 삼각주는 대서양 횡단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콩고와 앙골라 연안에서 팔려나간 노예는 약 13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콩고의 인구밀도가 지금도 매우 낮은 것은 노예무역시대의 후유증이다.
1880년 마지막 독립 안지쿠의 일루(Iloo) 왕은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해군장교이자 식민주의자인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Pierre Savorgnan de Brazza, Savorgnan de Brazza, 1852~1905)와 테케 왕국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프랑스 의회는 이 조약을 승인했다. 브라자는 1883년에 로앙고 왕국과도 같은 조약을 맺었다. 1885년 콩고분지조약으로 프랑스령 콩고는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다. 1891년 안지쿠 왕국은 프랑스령 콩고가 되었다. 이때 왕국의 영토는 지금의 수도 브라자빌을 포함한 콩고 중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직할식민지화하면서 반투족의 왕국들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1898년 브라자가 프랑스령 콩고의 행정관에서 해임된 뒤 그 영토는 특허회사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특허회사들이 인적 자원과 천연자원을 무자비하게 착취하자 원주민들은 격렬한 봉기로써 저항했다. 1902년 프랑스는 콩고를 가봉과 함께 직할식민지로 삼은 뒤, 1905년 행정개편을 통해 이 지역을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무아앵(중부) 콩고 식민지로 편입시키고 브라지빌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럼에도 특허회사들의 가혹한 수탈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자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도 분노와 비난의 여론이 일어났다. 프랑스 정부는 여론무마용으로 특허회사들을 개혁한다고 했지만 이들의 착취와 수탈은 계속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이러한 행태를 보인 것은 브라자빌이 무아앵 콩고의 수도인 동시에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수도였으며, 무아앵 콩고가 철도와 항구를 가진 유일한 식민지라는 중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프랑스는 브라자빌과 푸앵트누아르를 연결하는 콩고 대서양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원주민들을 징발함으로써 인구의 대규모 이동이 일어났다. 강제노동으로 인해 원주민들 가운데 사망자가 속출하였으며, 자원의 수탈로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제국주의 프랑스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한 콩고인들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콩고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식민지 종주국들의 패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무아앵 콩고는 프랑스 해외령으로 승격되었고, 이어 1946년에는 프랑스 의회에 파견할 대의원들을 선출했다. 1950년대부터 부족을 기반으로 한 정당간의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57년에는 콩고에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1958년에는 주민투표를 거쳐 프랑스공동체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 8월 15일 콩고는 독립하여 국명을 콩고공화국으로 정했다. 독립 후 아프리카인이익옹호민주연합(Democratic Union for the Defense of African Interests, UDDIA)의 당수인 풀베르 율루(Fulbert Youlou, 1917~1972)가 콩고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친프랑스 정권을 수립했다. 율루는 3년 후 경쟁 정당과 노동자들이 일으킨 3일 봉기로 축출되었다.
1963년 8월 15일 알퐁스 마상바 데바(Alphonse Massamba-Debat, 1921~1977)가 이끄는 콩고군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튿날 국가혁명평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Revolution, NCR) 의장으로서 총리에 지명된 마상바 데바는 민족혁명운동(Movement for National Revolution, MNR)이 유일 합법정당임을 선언하였다. 그해 12월 19일 마상바 데바는 콩고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파스칼 리수바(Pascal Lissouba, 1931~)를 총리에 임명하였다. 사회주의 성향의 마상바 데바 정권은 1964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승인하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등 공산권 국가와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 등 자본주의권 국가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66년 6월 마상바 데바는 좌파의 리더인 마리앙 응구아비(Marien Ngouabi, 1938~1977)를 강등시키고, 한달 뒤인 7월 그를 체포하였다. 이 사건은 콩고 군부의 불만을 야기시켰으며, 7월 말 응구아비는 군인들에 의해 석방되었다. 1968년 8월 5일 응구아비를 지도자로 한 국가혁명평의회(National Revolutionary Council, CNR)가 구성되었다. 9월 4일 국가혁명평의회(CNR)는 쿠데타를 일으켜 마상바 데바 정권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CNR은 콩고 최고권력기관으로 부상하였으며, CNR 의장 응구아비 소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응구아비는 헌법을 개정하여 국명을 콩고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the Congo)으로 변경하고, 콩고가 아프리카 최초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국가임을 천명하였다. 이어 콩고 유일의 합법정당인 콩고노동당(Congolese Party of Labor, Congolese Workers' Party, PCT)을 창당하였다.
북부 출신의 응구아비는 콩고노동당(PCT)을 통해서 그동안 남부가 장악하고 있던 지배권력과 기득권을 박탈하였다. 민간인과 군장교들로 구성된 PCT 중앙위원회가 선출한 위원장은 대통령이 되어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또 PCT 중앙위원회는 일반투표로 선출되는 국회의원격인 153명의 전국인민회의 의원 후보자 명단을 작성하는 권한과 혁명재판소의 재판관들을 임명하는 권한도 보유하고 있었다. 외국기업과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도 진행되었다. 이에 수도 브라자빌을 중심으로 한 남부인들은 응구아비의 반대파로 돌아섰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행해진 1972년 2월에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는 석유가 풍부한 카빈다를 합병하기 위해 응구아비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응구아비를 제거하기 위한 일련의 쿠데타 시도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이후 매년 쿠데타 미수사건이 발생하였다.
1973년 응구아비는 중국을 방문하였다. 1974년 12월 30일 응구아비는 PCT 중앙위원회 의장에 이어 PCT의 사무총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75년 1월 9일 응구아비는 두번째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해 그는 소련과 경제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1977년 3월 18일 응구아비는 자살특공대에 의해 암살되었다. 4월 PCT 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 of the Party, CMP)는 조아섕 용비 오팡고(Joachim Yhombi-Opango, 1939~) 대령을 PCT 의장 겸 국가원수로 선출하였다. 6월에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오팡고는 1979년 2월 5일 PCT 내에 우파 파벌의 형성과 부정부패, 정치적 타락 등의 혐의로 대통령직에서 축출됨과 동시에 체포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2월 8일 PCT 군사위원회(CMP)는 드니 사수 응게소(Denis Sassou Nguesso, 1943~) 대령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3월 27일 3차 비상회의를 개최한 PCT는 응게소를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추대하였다. 이를 계기로 CMP의 권력은 PCT 중앙위원회로 이양되었다. 응게소는 PCT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비동맹노선을 표방한 응게소는 마르크시즘에 충실한 군부 독재자로서 공산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서구 자본주의권 국가들과도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등 실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그는 IMF와 대부금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으며, 석유와 광물자원을 개발할 목적으로 프랑스와 미국 등 서방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1981년 응게소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소련과 20년 기한의 우호협력조약을 맺었다. 이후 소련과 중국, 동유럽 국가들은 콩고에 군사 및 안보 원조를 했으며, 콩고는 푸앵트누아르에 소련 군사기지의 설치를 허용했다. 프랑스와 EC로부터도 경제원조를 받았다.
1984년 7월 PCT 3차 정기 전당대회에서 응게소는 5년 임기의 대통령과 PCT 중앙위원회 의장에 재선출되었다. 11월 10일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오팡고를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정국은 점차 안정되었지만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한 공기업의 낮은 효율성은 1980년대 초반의 콩고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석유생산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려 할 때 석유와 광물자원의 가격이 하락하면서 콩고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었다. IMF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채는 오히려 3배나 증가했으며 경제위기는 1980년대말까지 지속되었다.
응게소는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아프리카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 의장을 역임했다. 1987년 후반 응게소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북부에서 일어난 심각한 군사반란에 직면했다. 군사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1989년 7월 PCT 4차 정기 전당대회는 응게소를 대통령과 PCT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재선출하였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목격한 데다가 프랑스로부터 줄기차게 압력을 받아온 응게소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2월 그는 경제에 대한 정부 통제의 폐지를 발표하고 정치범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선언하였다. 1990년부터 전국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빈발하였다. 이에 응게소는 악화된 경제상황을 개선하고 만연한 부정부패의 근절을 시도함과 동시에 9월에는 정당설립을 자유화하였다. 그리고 미국을 방문하고 조건부 IMF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였다.
1991년 2월부터 각계 대표로 구성된 국민회의가 출범하여 반대파가 주도하였으나 응게소는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전국회의는 1992년으로 예정된 선거를 관리할 과도기간의 수상에 앙드레 밀링고(Andre Milongo, 1935~2007)를 선출하고 그에게 행정권을 일임하였다. 공식 국가명에서 '인민'을 삭제하는 안을 포함한 새로운 헌법개정안도 제출되었다. 응게소는 이제 명목상의 대통령일 뿐이었다. 전국회의에 의해 응게소의 권력은 제한되었으며, 과도정부의 승인 없이 그는 콩고 밖으로의 여행도 할 수 없었다. 전국회의 기간 내내 그는 1977년의 응구아비 암살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이라는 비판과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1992년 6~7월에 걸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PCT는 125석 중 단 19석만 얻었다. 범아프리카사회민주연합(Pan-African Union for Social Democracy, UPADS)은 민주균형발전콩고인운동(Congolese Movement for Democracy and Integral Development, MCDDI)과 함께 최대정당으로 등장하였다. 이어 8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응게소는 북부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서의 냉담한 반응으로 초반 탈락하고 말았다. 결선투표에서 범아프리카사회민주연합(UPADS)의 파스칼 리수바 후보와 민주균형발전콩고인운동(MCDDI)의 버나드 콜렐라(Bernard Kolelas, 1933~) 후보가 맞붙게 되었다. 리수바는 응게소의 지지를 등에 업고 61%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선정부가 들어섰다. 리수바 정권이 PCT측에 기대치 이하의 각료자리를 분배하자 두 정파는 서로 반대파가 되었다. 한편 대선 이후에도 계속해서 리수바가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비난이 고조되자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압정치를 펼쳤다. 1993년부터 그해 말까지 리수바와 콜렐라 지지세력간의 충돌로 150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94년 응게소는 콩고를 떠나 파리로 갔다. 1997년 1월 26일 콩고로 돌아온 그는 7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다. 5월 응게소가 오팡고의 정치적 아성인 콩고 중부 쿠유 강(Kouyou River)변의 오완도(Owando)를 방문했을 때 양측 지지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발생하였다. 6월 오완도 폭력사태에 연루된 혐의로 피에르 아보야(Pierre Aboya)와 엥고보 보나방튀르(Engobo Bonaventure)를 체포하기 위해 리수바의 정부군이 브라자빌 음필라(Mpila)구에 있는 응게소의 집을 포위하자 응게소는 자신의 사병집단인 코브라(Cobra)군에게 저항하라고 명령했다.
양측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곧 전면적인 콩고 내전(Congo Civil War, Republic of the Congo Civil War, Congo-Brazzaville Civil War)으로 치달았다. 4개월에 걸친 내전으로 브라자빌은 대량 파괴되었다. 10월초 응게소를 지원하는 앙골라군이 콩고를 침범해 들어왔다. 코브라군과 앙골라군은 수도 브라자빌과 쿠일루 주의 중심도시이자 항구도시인 푸앵트누아르 대부분을 장악했다. 10월 19일 리수바는 응게소의 코브라군에게 패배하여 부르키나파소로 도주했고, 리수바의 각료들은 DR콩고로 망명했다. 10월 25일 응게소는 콩고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3년간의 과도기간을 거친 뒤 콩고에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리수바를 지지하는 반군 민병대가 응게소의 정부군을 공격하면서 콩고는 내전이 재발했다. 이 내전으로 브라자빌-프앵트누아르 철도가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으며, 남부의 브라자빌을 비롯해서 풀(Pool)주와 보우엔자(Bouenza), 니아리 지역도 큰 피해를 입었다. 2년 6개월간 지속된 내전으로 1만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고, 수만명이 추방되었다. 1999년 12월 오마르 봉고(Omar Bongo, 1935~) 가봉 대통령의 중재로 다양한 정파들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콩고 내전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대통령선거는 2002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되었다. 문제의 2002년 선거에서 응게소는 두 정적 리수바와 콜렐라의 후보등록을 금지시켰다. 밀링고는 지지자들의 충고에 따라 선거를 보이코트하고 출마를 포기했다. 응게소는 90%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1월 국민투표에서 통과된 새로운 헌법으로 대통령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임기는 5년에서 7년으로 늘어났다. 국제감시단은 대통령 선거기구와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대해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1999년의 공식적인 내전 종결 이후에도 콩고 정부군과 반군간에는 무력충돌이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2003년 콩고 정부와 반군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나 갈등요인이 해소되지 않아 정국불안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2005년 10월 응게소 정권은 범국민적인 화합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1997년부터 해외망명 중이던 콜렐라 전 총리를 사면하였다. 2007년 8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 PCT 등 집권 친여정당연합이 137석 중 123석을 차지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다음 대통령선거는 2009년 7월로 예정되어 있다.
콩고의 현 집권당은 응게소 대통령의 민주애국군(Democratic and Patriotic Forces, FDP)이다. FDP는 PCT와 대안민주주의협의회(Convention for Alternative Democracy, ADC), 자유공화주의자당(Liberal Republican Party, LRP), 민주진보전국연합(National Union for Democracy and Progress), 국가재건애국동맹(Patriotic Union for the National Reconstruction), 헬라시아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 Party of Helasia), 국가부흥연합(Union for the National Renewal) 등의 정당들과 연합을 이루고 있다. 주요 야당은 MCDDI와 UPADS를 비롯해서 민주사회진보모임(Rally for Democracy and Social Progress, RDPS), 민주공화국모임(Rally for Democracy and the Republic, RDR), 민주공화국연합(Union for Democracy and Republic, UDR), 민주군연합(Union of Democratic Forces, UFD) 등이 있다. 의회는 상하 양원제다. 상원은 60석, 하원은 125석으로 임기는 5년이다.
콩고는 개발도상국이다. 응구아비 정권하에서 외국기업과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가 진행된 바 있다. 1980년대 석유수출로 콩고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 최고의 성장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 석유수출의 부진과 CFA franc 화폐의 50% 평가절하로 인한 물가상승, 장기간의 내전에 의한 산업시설 파괴 등으로 경제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98년부터 콩고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IMF 등 국제사회의 지원하에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을 추진해왔다. 그럼에도 콩고 경제의 특징은 농촌인구의 도시집중, 정부기업의 적자운영, 사회간접자본의 부족에 따른 민간경제의 부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콩고는 국내총생산의 약 65%, 수출의 약 90%, 국가예산의 약 40%를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콩고 경제는 석유산업이 무너지면 동반 붕괴할 수 밖에 없는 매우 취약한 구조다.
콩고의 주요 산업은 농업, 임업, 축산업, 광업(석유)이다. 농업은 노동인구의 30% 이상이 종사하지만, 주곡작물인 카사바의 생산부족으로 쌀을 수입한다. 중요한 농작물은 사탕수수와 담배, 코코아, 커피, 야자, 땅콩 등이다. 콩고는 국토의 약 절반이 삼림지대다. 벌목된 목재의 약 80%는 현지에서 가공된다. 광업은 해외무역의 2/3를 차지한다. 석유매장량은 약 16억 배럴로 추정되고 있다. 1970년대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원유생산이 크게 증가되었다. 최근 국제유가가 상승하고 산유량이 증가하면서 2005년 국내총생산이 7.9% 증가하고 재정수입도 크게 증대되는 등 경제상황이 전반적으로 호전되고 있다. 2006년 콩고는 사하라 이남 지역 국가들 중 생산량에서 5위를 차지했다.
2007년 현재 콩고에는 3.2조 입방 피트에 달하는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이는 아프리카 전체매장량의 약 1%에 달하며, 서부 사하라 이남 국가중 4위의 매장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프라의 부족으로 상업적 천연가스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콩고 정부는 소각처리되고 있는 천연가스를 전력생산을 위해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북서쪽의 카메룬 국경지대에는 품질이 좋은 철광이 매장되어 있다. 1977년의 홍수로 폐광된 푸앵트누아르 부근 생폴의 염화칼륨(가성칼리) 광산은 생산의 재개를 위해 미국과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광산은 이전에 프랑스인 소유였다. 그외 광물로는 다이아몬드, 금, 납, 아연, 주석, 구리도 생산된다. 공업은 노동력의 25%가 종사하고 있다. 주요 부문은 농산물과 임산물 가공, 건축, 금속가공, 시멘트, 석유, 신발, 비누 제조업 등이다. 서비스업은 노동력의 40%를 고용하고 있다.
콩고의 교통은 콩고 강에서 우방기 강 상류까지 2400km에 달하는 내륙수로, 브라자빌과 푸앵투누아르를 연결하는 대서양철도가 중심이다. 1977년에 국제화된 브라자빌 항과 푸앵트누아르 항은 아프리카 대륙의 유수한 국제무역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차드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모든 철도와 하천 운송망을 연결하는 두 항구는 중부아프리카 내륙지방에서 대서양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였다. 당시 동서 양진영 국가들이 중부아프리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콩고를 거쳐야만 했다. 콩고가 동서 양진영으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해외개발 원조를 받은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주요 수출품은 석유와 목재, 커피, 설탕, 코코아, 다이아몬드 등이다. 주요 수입품은 기계류와 운송장비, 석유관련제품, 식료품, 건축자재, 전자제품 등이다. 1980년대초 석유수출로 콩고는 무역수지 흑자로 전환하였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프랑스, 중국, 대만, 미국, 조선, 이탈리아, 독일, 한국 등이다. 카메룬, 가봉 등 옛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국가와는 공동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콩고 인구는 콩고족(바콩고족) 48%, 상가족(Sangha) 20%, 테케족(Teke) 17%, 우방기족(Ubangi, 방기족) 12% 등 75개에 이르는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콩고족의 일족에는 순디족, 랄리족(바랄리족), 쿠그니족, 벰베족, 캄바족, 돈도족, 빌리족, 욤베족 등이 있다. 우방기족의 일족에는 마쿠아족, 쿠유족, 음보시족, 리쿠알라족, 응갈라족, 봉가족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바콩고족(40만)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스탠리풀 지역에 거주하는 바테케족(19만), 북부의 우방기족(14만) 순이다. 북부에는 가봉에서 유입된 이주민 14만명이 살고 있다. 음보시족은 주로 북부의 열대우림지대, 빌리족은 주로 해안평야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주류 부족은 남부의 콩고족, 그 중에서도 랄리족이다.
인구의 약 3%를 차지하는 빙가(Binga) 피그미족은 동부 습지대 삼림에서 작은 무리를 이루어 전통적 수렵채집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피그미족은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반투계의 언어를 쓴다. 아직도 많은 피그미들은 반투족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 피그미들은 전통에 따라 태어나면서부터 반투족의 노예가 된다. 피그미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 사냥과 어로, 수공업을 도맡아 하면서도 그 댓가로 담배나 입던 옷가지를 받을 뿐이다. 댓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유니세프와 인권운동가들은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 피그미보호법이 콩고 국회에서 표결을 기다리고 있다. 1997년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약 9천명의 유럽인과 비아프리카인들이 거주했으나, 지금은 소수만이 남아 있다. 미국에서 추방된 약 백여명도 거주하고 있다. 유럽인 가운데는 프랑스인이 대다수이며, 소수의 아프리카 외국인, 포르투갈인, 중국인도 있다.
콩고는 어느 부족어에도 우선권을 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 국민의사소통어는 링갈라어와 투바어(키투바어)다. 키투바어는 콩코어(키공고어)의 다른 이름이다. 라디오와 TV에서는 프랑스어와 링갈라어, 콩고어로 된 프로그램을 함께 내보낸다. 콩고는 DR콩고의 4개 국민어 중 2개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콩고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콩고의 종교는 기독교 50%, 토착신앙 48%, 이슬람 2% 순이다. 기독교 중 로마 카톨릭이 약 2/3, 나머지는 개신교다. 개신교 최대 종파는 콩고 복음주의 교회다. 예언자 시몽 킴방구가 일으킨 킴방구주의자 교회는 아프리카 최대의 독립 기독교 종파다. 교육은 6∼16세까지 무상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있다. 전국에 1만여개소의 초등학교가 있다.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로 바뀌었다. 교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학령아동들의 문자 해득률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문맹률은 남자 31%, 여자 56%로 높은 편이다. 주요 고등교육기관은 1961년에 설립된 브라자빌의 마리앙응구아비대학교다. 콩고의 보건환경은 매우 열악한 편이다. 병원과 의사도 태부족이다. 상당수의 주민들이 백일해나 말라리아, 임질 등의 질병을 앓는다. 영아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며, 평균수명은 50세 미만이다.
PCT 치하에서 콩고의 대중전달매체는 정부가 소유하고 감독하였다. 콩고의 전통예술은 사회적, 종교적 경험과 결합되어 의식을 위한 음악, 춤, 조각, 그리고 구비문학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정책과 백인들이 들여온 기독교는 콩고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음악과 춤은 서양의 악기와 음악형식의 도입으로 변형되었다. 의식용 물건의 조각은 상업화되었다. 프랑스어는 구비문학에서 저술문학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했다. 1970년대 콩고의 문학은 시인 제랄드 펠릭스 치카야 위 탐시와 작가 장 말롱가가 주도하였다. 이들은 민간설화에 바탕을 둔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대 브라자빌은 아프리카 음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한국은 콩고와 1962년 8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해 9월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콩고는 1964년 12월 조선과 수교하였으며, 1965년 5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조선이 콩고와 수교하자 한국은 할슈타인원칙에 따라 콩고와 단교했다. 콩고와 조선은 무역 및 통상협정(1965.1), 경제과학기술협정(1987.5), 무역협정(1978.5) 등을 체결하였다. 특히, 조선은 1969년부터 콩고에 성냥공장을 비롯한 상당량의 경제협력을 제공하여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 탈냉전시대가 열리고 사회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자 콩고는 실리외교를 추구하여 1990년 6월 16일 한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한국은 콩고에 주로 의류나 전기전자제품, 합성수지, 여행용구, 기계류 등을 수출하고, 원유와 동광, 원목 등을 수입하고 있다. 한국 거류민은 20명(1997년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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