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바로 알기

중앙아프리카(Central Africa)-르완다(Rwanda)

林 山 2010. 1. 29. 20:26

르완다 지도

 

르완다공화국(Republic of Rwanda)은 서쪽으로 DR콩고와 키부(Kivu) 호, 북쪽으로 우간다, 동쪽으로 탄자니아, 남쪽으로 부룬디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 중동부에 있는 내륙국이다. 수도는 르완다의 중앙부에 있는 키갈리(Kigali)이고, 화폐는 르완다 프랑(Rwanda franc, RF)을 사용한다. 면적은 약 2만6천3백km², 인구는 920만명(2006년)이다.  
 
르완다는 해발 1500m 이상의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로 나일 강과 콩고 강 분수계의 일부를 이룬다. 서쪽에는 키부 호가 있으며, 이 호수에서 남쪽의 탕가니카 호로 흘러가는 강이 루지지(Ruzizi) 강이다. 키부 호와 루지지 강은 DR콩고와 서쪽 국경선을 이루고 있다. 서부는 산악지대로 북서부의 비룽가(Virunga=M'fumbiro) 산맥으로 이어진다. 비룽가 산맥의 중앙과 동쪽에는 미케노, 사비니오, 카리심비, 비소케, 음가힝가, 무하부라 등 6개의 사화산이 있으며, 서쪽에는 아직도 용암층이 활동중인 니이라공고, 니아물라기라 봉 등 두 개의 화산이 있다. 이 가운데 최고봉은 카리심비 산(Karisimbi, 4507m)이다. 동부에는 카게라(Kagera) 강 유역의 늪지대 평원이 펼쳐져 있다. 카게라 강은 탄자니아와 동쪽 국경을 이룬다. 남동부의 거대한 와지(窪地)에는 수많은 호수가 흩어져 있다. 

 

르완다는 열대국가이지만 고도가 높아서 평균기온이 21℃ 정도로 대체로 온화한 편이다. 고원지대에는 서리와 눈도 내린다. 연평균강수량은 830~1140㎜이며, 동쪽 대초원들보다 북서쪽 산악지대에 집중된다. 우기는 2월~5월과 9월~12월 두 번이다. 우기의 빈번하고 강한 뇌우와 번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건기는 6∼8월이다. 경작지는 국토의 40%, 목초지는 20% 정도이다. 목초지에서는 주로 염소나 소, 양 등을 기른다. 서쪽에는 산이 많아 국토의 10% 가량이 삼림지대이며, 북서쪽 화산지대에는 대나무숲이 있다. 북동부에도 삼림지대가 존재하며, 나머지 국토는 대부분 초원지대이다. 르완다에는 코끼리, 사자, 고릴라, 침팬지, 물소, 영양, 사마귀멧돼지, 얼룩말 등 많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북동부의 카게라 국립공원과 무투라 금렵지구에서는 희귀동물인 큰천산갑 등 여러 종의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있다. 북서부의 화산(Volcanoes)국립공원은 몇 안되는 마운틴고릴라 서식지다. 

 

르완다의 원주민은 질그릇을 만들고 수렵생활을 하던 피그미의 일족인 트와(Twa=Batwa)족이다. 반투어를 사용하는 후투(Hutu=Bahutu)족이 언제 르완다로 이주해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후투족은 트와족을 몰아내고 이 지역의 지배적인 인종집단이 되어 농경생활을 하였다. 14세기초부터 호전적인 유목민인 투치(Tutsi=Batusi)족이 이주해왔다. 투치족은 우수한 군사기술과 토지, 가축(주로 소)을 빌려주는 대가로 온순한 농경민인 후투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5세기 투치족의 지도자 루간주 1세(Ruganzu I, 루간주 브윔바, 재위기간 1458~1482)는 키갈리 근처 브와나캄브웨 지역에 르완다 왕국을 세웠다. 16세기에 르완다 왕국은 현재의 르완다 중부지역을 병합했으며, 17세기에 음와미(Mwami=왕) 루간주 2세(Ruganzu II, 루간주 은도리, 재위기간 1600~1624)는 변방의 후투족 공동체들을 정복했다. 19세기말 키게리 4세(Kigeri IV Rwabugiri, 재위기간 1853~1895)는 왕국의 국경을 완성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중앙집권적 군사조직을 갖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독일은 1890년부터 르완다를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1895년 독일은 르완다를 탕가니카, 부룬디와 함께 독일령 동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로 편입시켰다. 1899년부터 독일은 식민지를 직접 통치할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음와미로 하여금 대리통치하게 하여 르완다인의 노동력과 자본을 최대한 수탈하려고 했다. 음와미는 후투족 부족장들을 통해서 후투족을 통치했다. 후투족은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많은 고통을 받았다. 

  
1916년 독일 대신 벨기에가 르완다를 점령하였다. 1919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1923년 국제연맹(LN)은 르완다와 부룬디를 합병한 루안다-우룬디(Ruanda-Urundi, 1922~1962)를 벨기에의 위임통치령으로 인정했다. 독일의 수법을 본받아 벨기에도 투치족 음와미를 통해서 르완다를 통치했다. 1926년 벨기에는 르완다의 전통적인 토지와 소, 군대 등 분야별 지역지도자 3개 직위를 행정지도자 1개 직위로 통합하였다. 1931년 벨기에가 유히 4세(Yuhi IV Musinga, 재위기간 1896~1931)를 폐위시키자 그의 아들인 무타라 2세(Mutara II Rwogera, 1802~1853)가 음와미에 즉위했다.

 

1935년부터 벨기에 총독부는 소수부족인 투치족과 다수부족인 후투족을 차별하여 전통적 지배종족인 투치족을 중간 지배계층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투치족 우대정책을 시행하였다. 벨기에는 교육자, 공무원 채용 등에서 투치족을 우대하였다. 오랜기간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통혼으로 인해 종족개념이 모호한 상황에서 벨기에 식민당국은 르완다인들을 소 10마리 이상 소유한 자는 투치족, 그 이하 소유자는 후투족으로 분류하여 신분증에 종족명을 기입하도록 함으로써 종족간의 분리를 조장하였다. 벨기에의 교활한 카스트제도의 도입으로 양대 종족 사이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1943년 무타라 3세(Mutara III=Rudahigwa, 1912?~1959) 음와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벨기에는 기존 후투계 지역지도자를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투치족으로 교체하였다. 1946년에 르완다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령으로 바뀌었다. 1950년 투치족이 주도하는 르완다 독립 움직임을 간파한 벨기에는 종전의 투치족 지원을 철회하고 후투족 지원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954년 무타라 3세는 벨기에에 르완다의 독립을 요구했다. 

 

1955년 벨기에는 루안다-부룬디 총독에 해로이(J.P. Harroy)를 임명했다. 1957년 후투족은 해로이 총독과 페로딘(Perraudin) 교황청 대사의 지원하에 후투선언(Hutu Manifesto)를 발표하고 후투족이 정권을 장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투족은 그레고이레 카이반다(Gregoire Kayibanda, 1924~1976)를 중심으로 군사조직인 후투해방운동당(Party of the Movement of Emancipation of Hutu, PARMEHUTU)을 창설했다. 1959년 무타라 3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투치족은 후투족 지도자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무타라 3세의 죽음으로 그의 이복동생인 키게리 5세(Kigeli V, Jean-Baptiste Ndahindurwa, 1935~)가 음와미에 올랐다.

 

1959년 투치족은 후투족의 후투해방운동당(PARMEHUTU)에 맞서 군사조직인 르완다전국연맹(National Union of Rwanda, UNAR)을 결성하였다. 벨기에로부터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르완다전국연맹(UNAR)과 점진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PARMEHUTU간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었다. 그해 11월 후투족 반군은 벨기에군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후투족의 반란으로 1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5만명의 투치족이 부룬디 등의 이웃 국가들로 탈출하였다. 1960년 벨기에가 실시한 르완다 지방선거에서 후투족 정당인 PARMEHUTU가 압승을 거두어 당수인 그레고이레 카이반다가 임시정부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1961년 키게리 5세가 함마슐트(Dag Hammarskjöld, 1905~1961)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기 위해 DR콩고의 수도 킨샤사에 체류할 때, 벨기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후투족의 도미니크 음보뉴무트와(Dominique Mbonyumutwa)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군주제를 폐지하였다. 투치족의 마지막 음와미 키게리 5세는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으로 망명했다.

 

1961년 1월 르완다-우룬디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음보뉴무트와가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지명되었다. 1962년 7월 1일 르완다-우룬디는 각각 르완다와 부룬디로 독립했다. 1962년 UN의 감독하에 치뤄진 국민선거에서 후투족 정당인 PARMEHUTU가 승리하여 후투족 지도자인 카이반다가 초대 대통령 겸 총리에 취임하였다. 후투계 정부는 식민지시대의 투치족 우대정책에 반발하여 종족차별 신분증 제도를 유지하여 이번에는 후투족을 우대하고 투치족을 박해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지배종족이 된 후투족의 박해로 많은 투치족이 강제추방되었다. 1963년 12월 부룬디로 추방되었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후투족의 복수로 르완다의 투치족 2만명이 학살되고, 1만명이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되면서 두 종족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1965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카이반다는 PARMEHUTU의 일당체제를 확립하고, 투치족 학살을 계속하는 동시에 투치계 난민의 귀환을 반대하는 등 반투치정책을 지속하였다. 카이반다는 1969년 PARMEHUTU의 명칭을 민주공화운동(Democratic and Republican Movement, MDR)으로 변경하였다. 같은 해 실시된 대선에서 카이반다가 또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을 기록하였다. 1972년에는 부룬디에서 투치족이 장악한 부룬디군이 후투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저질러 20만명 이상의 후투족이 학살되었다. 부룬디의 수많은 후투족은 부룬디군의 인종청소를 피해 르완다로 탈출하였으며, 르완다의 투치족은 부룬디로 탈출하였다.   

 

1973년 7월 후투족 출신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Juvenal Habyarimana, 1937~1994)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 지도자들은 카이반다 정권을 전복하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쿠데타 주도세력은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해 투치족을 대량 학살하였다. 1975년 7월 하비아리마나는 국가개발혁명운동(Mouvement Revolutionnaire National pour le Developpement, MRND)을 창당하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여 군부 실세들을 내각에 임명하였다. 1978년 하비아리마나는 국가개발혁명운동(MRND)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한 새 헌법을 제정하고, 투치족에 대한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하였다. 그해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하비아리마나는 대통령에 선출되어 수상과 국방상을 겸임하였다. 의회는 국가개발심의회가 대행하였다.

 

1979년 해외 망명 르완다인들이 르완다 후투족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투치족의 폴 카가메(Paul Kagame, 1957~)를 중심으로 르완다민족통일동맹(Rwandese Alliance for National Unity, RANU, RPF의 전신)이 결성되었다. 1981년에는 총선을 실시하여 르완다는 군사 쿠데타 이후 최초의 입법기관을 갖게 되었다. 하비아리마나는 1983년과 1988년의 대선에서도 대통령에 계속 당선되어 투치족을 억압하였다. 하비아리마나 정권은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1980년대 후반 세계시장에서의 커피가격 하락과 심각한 가뭄이 초래한 흉작은 르완다의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고갔으며, 빈곤은 더욱 극심해졌다. 

 

1986년 투치족의 폴 카가메는 르완다민족통일동맹(RANU)를 르완다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 RPF)으로 개칭한 뒤, 프레드 르위게마(Fred Rwigema, 1957~1990)와 함께 우간다로 탈출한 투치족과 요웨리 무세베니의 우간다군에 소속된 투치족, 미국에서 훈련받은 투치족 등 5천명 규모의 반군을 조직하였다. 하비아리마나는 1990년 6월 다당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우간다에 근거지를 둔 르완다애국전선(RPF) 반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0년 10월 1일부터 르완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와 벨기에, 자이르군이 르완다에 파견되어 후투족 르완다군과 함께 RPF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르완다군과 자이르군은 르완다의 투치족 뿐만 아니라 투치족과 친하게 지내던 후투족 수천명을 살해했다. 

 

RPF 반군의 공격이 계속 증가하자 1991년 르완다는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를 허용하였다. 1992년부터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남아공, 이집트까지 르완다에 개입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1993년 8월 르완다 정부는 RPF 반군과 탄자니아의 아루샤(Arusha)에서 RPF가 참여하는 과도거국내각 구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양측은 르완다 정부군과 RPF군의 통합에 합의하고, RPF는 르완다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후투족 지도자들이 권력배분을 거부하여 과도정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양측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RPF 반군에 의한 학살을 모면하기 위해 약 150만명의 후투족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1993년 10월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후투족 출신 멜키오르 은다다예(Melchior Ndadaye, 1953~1993) 부룬디 대통령이 투치족이 장악한 군부에 의해 암살되자, 부룬디 내전이 발발하여 후투족과 투치족 수만명이 희생되었다. 부룬디 내전의 여파는 르완다로 튀어 아루샤협정이 무너지고 양 종족간의 증오와 적개심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같은 달 UN은 아루샤 평화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캐나다의 로미오 댈래어(Romeo Dallaire, 1946~) 소장을 사령관으로 한 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Assistance Mission for Rwanda, UNAMIR) 2천5백명을 파견하였다. 댈래어 소장의 저서 '악마와 악수하다(Shake Hands with the Devil)'에 상술된 것처럼 유엔 평화유지군은 두 나라의 내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93년부터 르완다 정부가 살인부대인 후투족 민병대를 창설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중국제 굽은 칼, 러시아제 AK-47 소총, 못을 박은 곤봉, 창 등으로 무장하였다. 프랑스는 르완다 정부군에 대한 무기공급을 계속했다.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백인정권은 590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공급했으며, 이집트는 600만 달러 상당의 무기구매계약을 맺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RPF 반군에게 무기와 군사훈련을 제공했다. 1994년 1월 아루샤협정에 따라 과도정부 총리직에 투치족을 임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하비아리마나가 후투족 출신의 파우스틴 트와기라뭉구(Faustin Twagiramungu, 1945~)를 총리에 선임하자 RPF는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여 정국불안이 지속되었다.

 

1994년 4월 6일 내전종식을 위한 평화회담을 마치고 탄자니아에서 돌아오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의 후투족 출신 시프리엔 은타리아미라(Cyprien Ntaryamira, 1955~1994) 대통령, 르완다군 총사령관이 탄 비행기가 키갈리 국제공항에 착륙하다가 격추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설에는 우간다군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했지만, 사건의 실상은 권력분배에 반대해온 르완다 대통령 경호대의 소행으로 추정되었다.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RPF 지도자  폴 카가메가 비행기 격추를 명령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법정은 이 사건에 대하여 카가메의 RPF군 소행이라고 판결함으로써 후투족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면 카가메와 하비아리마나 정부의 몇몇 각료들은 후투족 과격파들이 다가올 투치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같은 종족 출신의 두 대통령을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콩고의 천연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저질렀다는 주장도 나왔다.  

 

4월 7일에는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대통령직을 대행하던 투치족 출신 아카테 우윌링이마나(Agathe Uwilingiyimana (1953~1994) 총리를 비롯해 3명의 각료, 벨기에 평화유지군 11명을 살해하였다. 후투족의 장 캄반다(Jean Kambanda (1955~)는 총리에 취임하여 새 정부를 구성하였으나 투치족 RPF 반군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캄반다 정권의 후투족 르완다군과 대통령 경호대, 과격 후투족 민병대 인터아함웨(Interahamwe)가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하자, RPF는 후투족 정부를 공격함으로써 종족간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후투족 정부군과 투치족 반군의 전투는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로 이어져 인종학살과 대량 탈출사태가 발생하였다. 4월 9일~4월 11일까지 3일간의 교전으로 2만명이 학살되었다. 4월 12일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2만명의 RPF가 수도 키갈리 인근까지 진출하자 후투족 정부군은 남쪽으로 물러나면서 남동부의 주요도시와 국경지대의 투치족 주민 20만명을 학살하였다. 

 

벨기에 평화유지군이 살해되자 UN은 4월 30일 270명만을 남겨둔 채 90% 이상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댈래어 사령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량학살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실질적인 지원을 요청했지만 유엔과 미국은 고의적으로 이를 거부했다. 대규모 학살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어이없게도 미국의 유엔 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orbel Albright, 1937~)는 평화유지군 전체의 철수를 주장했다. 60만명의 투치족 난민은 정부군의 학살을 피해 부룬디와 우간다, 탄자니아 등지로 탈출하였다. 두 종족간의 내전과 보복학살이 지속되면서 50만명이 학살되고, 그 몇 배의 난민이 인접국으로 피신하였다. 

 

인종학살 사태가 악화되자 UN은 5월 17일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5천5백명의 평화유지군 증원을 결의하였지만 각국의 호응은 매우 부진하였다. 6월 22일 UN은 결국 2천5백명의 프랑스군 독자파병을 승인하였다. 대학살극이 개시된 지 2개월이 지나서야 프랑스군 2천5백명과 미군 8백명 등 총 3천3백명의 유엔 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Assistance Mission for Rwanda, UNAMIR)이 대량학살을 방지하기 위해 르완다에 긴급투입되었다. 이른바 터키옥작전(Operation Turquoise)이라는 것이다.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을 완료한 르완다 후투족 정부군은 프랑스군을 환영하였다. 투치족은 르완다를 순찰하는 프랑스군을 보고 은신처에서 나왔지만 대부분 후투족 민병대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프랑스군은 학살극을 목격하고도 방관자로 일관했다. 

 

1994년 6월 투치족이 이끄는 RPF 반군은 르완다의 북부와 동부, 남부를 점령하고 수도 키갈리로 진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의 후투족이 희생되었다. 그해 7월 4일 카가메의 투치족 RPF군은 수도 키갈리를 함락시키고 장 캄반다 후투족 정권을 축출하였다. 투치족이 키갈리를 함락시키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90~100만명(유엔의 발표는 80만명)에 이르는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이 학살되었다. 이는 당시 르완다 인구 760만명의 10%가 넘는 인구가 학살된 것이었다. 르완다 사태는 20세기에 들어 1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인종청소에 이은 또 하나의 인류 최악의 끔찍한 인종대학살이었다.

 

7월 18일 RPF군은 서남부의 프랑스군 주둔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후 투치족 난민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7월 19일 RPF가 르완다 신정부를 수립하자 장 캄반다는 외국으로 탈출하였다. 7월 23일 RPF는 종족간의 융화정책을 표방하고 후투족 온건파 파스퇴르 비지뭉구(Pasteur Bizimungu, 1950~)를 대통령, 트와기라뭉구를 총리에 취임시키는 등 후투족과의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실권은 부통령과 국방장관인 카가메에게 있었다. 이때 RPF가 키갈리에서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하자 키갈리에 고립된 6만명의 후투족이 투치족의 보복을 피해 탈출하면서 또 다시 엑소더스가 시작되었다. RPF가 르완다 제2의 도시인 부타레(Butare)와 후투족의 최후거점인 기세니이(Gisenyi)까지 진격하자 투치족의 보복학살을 두려워한 300만명의 후투족이 르완다를 탈출하는 이른바 대호수난민위기(Great Lakes refugee crisis)가 발생하였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키갈리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진 후투족 임시정부의 잠정수도인 기타라마(Gitarama) 시나 자이르(지금의 DR콩고) 동부 북키부 주(Northern Kivu province)의 고마(Goma) 인근으로 피신하였다. 1994년 10월 후투족 구정부의 주요 인사와 구정부군 3만명은 고마로 도피하여 난민촌을 장악하였다. 11월 고마난민촌에 수립된 후투족의 신디쿠브와브 전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르완다 망명정부는 후투족 난민들을 구정부군에 편입시키는 등 병력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1994년말  RPF는 전투를 중지하고 내전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자이르에 근거지를 둔 후투족 구정부군은 1995년 1월 11일 르완다의 남서부 지역인 냐마새크를 침공하여 투치족의 르완다 RPF 신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RPF 신정부군이 후투족 구정부군을 격퇴하자 200만명 이상의 후투족이 보복학살을 피해 르완다 남서부와 자이르 동부 등지로 탈출하였다. 후투족 난민들은 자이르에 125만명, 탄자니아에 59만 1천명, 부룬디에 27만 5천명, 우간다에 4천명, 르완다 남서부 안전지대에 3만명씩 각각 분산수용되었다. 2만5천명 단위로 수용된 난민들은 열악한 환경과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유엔의 보고서에 따르면 고마난민촌에서는 1994년 7월 한달 동안 후투족 난민 120만명 가운데 콜레라와 기아로 4만3천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1995년 2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르완다 내전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와 인권침해를 재판하기 위해 탄자니아의 아루샤(Arusha)에 국제르완다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TR)가 설치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1995년 4월 22일 르완다에 설치된 난민수용소에서 투치족 RPF 정부군이 8천명의 후투족 난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8월에는 난민촌에서 귀환한 3만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RPF 정부군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어 키갈리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1996년 3월 8일 유엔 안보리는 2천명의 평화유지군(UNAMIR) 잔류병력의 6주 이내 완전철수를 결의하고, 4월 19일까지 철군을 완료하였다. 이로써 2년반에 걸친 UNAMIR 활동은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1996년 7월 25일 르완다 남쪽에 있는 나라 부룬디에서 투치족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자 7월 31일부터 8월 10일까지 부룬디에 머물던 르완다 후투족 난민 2만명이 귀환하였다. 8월 19일에는 부룬디의 투치족이 후투족 난민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루동안 8천명이 귀환하기도 하였다. 1996년 8월 22일 자이르는 자국내의 난민캠프 40개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르완다 난민 백만명을 전원 송환하기로 르완다와 합의하였다. 탄자니아의 르완다 후투족 난민 47만5천명은 1996년 12월 30일까지 귀환을 완료하였으나 나머지 6만5천명은 주변의 산속으로 도피하였다.

 

UNAMIR 철수 이후 투치족이 지휘하는 르완다애국군(Rwandan Patriotic Army, RPA)의 후투족에 대한 보복학살은 1997년까지 계속되었다. RPA는 중포병대를 동원 은야숑가(Nyacyonga) 후투족 난민캠프를 포격하여 폐허로 만들었다. RPF는 1996년말~1997년초에 자이르로부터 르완다 남부의 키베호(Kibeho) 난민캠프로 돌아온 수천명의 후투족 귀환민들을 학살하였다. 투치족의 보복학살을 두려워한 후투족 난민 240만명은 주변국의 난민촌을 떠돌면서 그 나라의 분쟁에 휩싸여 대량학살되기도 하였다. 

 

1996년 카가메와 미국관리들간의 회담직후 RPF군은 자이르 동부로 탈출한 후투족 인터아함웨 민병대를 공격하기 위해 자이르를 침공하였다. 카가메는 자이르의 장기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의 정적인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와 동맹을 맺었다. 카가메가 1980년대 후반 군사훈련을 받았던 우간다군의 지원으로 카빌라의 콩고-자이르해방민주세력동맹(Alliance of Democratic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Congo-Zaire, AFDL)이 동부 자이르를 침공하면서 제1차 콩고 내전이 발발했다. 

 

콩고 내전에서 자이르 남키부 주에서 활동하던, 르완다 투치족 출신으로 자이르 국적을 가진 바냐물렝게(Banyamulenge) 반군은 북키부 주에서 인터아함웨 민병대를 포함한 후투족 난민들을 공격하던 RPF군과 동맹을 맺었다. 후투족 르완다 구정부군은 자이르 정부군과 함께 이 지역의 투치족을 공격하여 콩고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콩고 내전의 악화로 자이르를 탈출하던 20만명의 르완다 후투족 난민이 카빌라의 반군에 의해 행방불명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97년 카빌라는 모부투를 축출하고 자이르의 정권을 잡은 뒤, 국명을 콩고민주공화국(DRC)으로 바꿨다.   

 

1998년 4월 르완다 정부는 국내법에 따라 자체적으로 학살범들을 재판에 넘겨 22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1998년 9월 4일 국제르완다형사재판소(ICTR)는 1997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체포된 장 캄반다에게 투치족 대량학살 등 6개항의 범죄행위에 대해 최고형량인 종신형을 선고하고 탄자니아의 아루샤 UN 감옥에 수감함으로써 1994년 이 재판소가 설치된 이후 처음으로 대량학살 관련자를 단죄하였다. 이 판결은 인류역사에서 수없이 자행된 대량학살의 책임자를 국제재판에서 최초로 처벌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한편, DR콩고의 정권을 잡은 카빌라는 이제 더 이상 우간다군과 투치족 RPF 르완다군이 필요없었다. 1998년 카빌라는 우간다군과 르완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카빌라의 요구를 두 나라가 거부하면서 제2차 콩고 내전이 일어났다. 바냐물렝게족 반군의 투치족 민병대가 르완다군으로 편입되자 DR콩고의 키부 주에서 르완다의 전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카빌라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르완다는 바냐물렝게족의 새로운 반군조직인 콩고민주연합(RCD), 우간다는 북동부를 장악한 콩고해방운동(CLM)을 지원하였다. 이에 카빌라는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앙골라와 짐바브웨 등 SADC 회원국들이 군대를 파견하면서 콩고 내전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2000년 르완다 인종학살 희생자 6주년 추모식에 참석한 벨기에 총리는 식민통치와 대량학살을 외면한 데 대해 공식사과하였다. UN도 학살을 막지 못한 잘못을 사과했다. 그러나, 1990년부터 르완다의 후투족 정권과 군부를 지원하고 투치족 학살을 격려한 프랑스는 아직 어떤 공식적인 사과도 내놓지 않았다. 그해 비지뭉구 르완다 대통령이 카가메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카가메는 비지뭉구를 해임하고, 그해 4월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1년 비지뭉구는 민주부흥당(Party for Democratic Renewal, PDR)을 창당하였으나 카가메 정권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같은 해 르완다 구정부군(Ex-Far)과 인터아함웨 민병대는 다시 르완다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르완다 RPF 정부군은 DR콩고의 콩고민주연합(RCD) 반군과 연합하여 후투족 반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2002년 남아공 썬시티 평화협정 체결로 제2차 콩고 내전이 끝나자 르완다군은 DR콩고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러나 후투족 르완다 반군은 콩고 북동부의 키부 지역에서 계속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투치족 대학살의 책임에 대한 사면 없이는 르완다로 귀환할 수 없는 후투족의 르완다 구정부군이었다. 2002년에 비지뭉구는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2004년 6월 법정에서 반군 민병대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징역 15년형, 폭력과 횡령 혐의로 각각 5년형, 도합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007년 카가메의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2003년 투치족의 RPF는 정권을 장악한 뒤 르완다 내전이 발발한 1994년 이래 대량학살의 역사를 편찬했다. 정부가 발표한 대량학살에 대한 의문의 제기는 범죄로 간주되었다. 그해 5월26일 양원제 의회를 주요 내용으로 한 르완다의 새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되었다. 임기 8년의 상원은 24명(지역정부 선출 12명, 대통령 임명 8명, 공개토론에서 선출하는 고등학문기관 대표를 포함한 4명)으로 구성되며, 다음 선거는 2011년에 실시될 예정이다. 임기 5년의 하원은 80명(직접선거 53명, 여성대표 24명, 장애인과 청년대표 3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같은해 6월 25일에는 한국의 박선기 변호사가 임기 4년의 ICTR 비상임 재판관으로 당선되어 이듬해 9월 25일부터 재판관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ICTR 설치기간은 2008년까지 연장되었다.

 

2003년 8월 25일 카가메 군대가 1990년에 르완다를 침공해서 1994년에 군사정부를 수립한 이래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2000년 그 자신의 정부에서 이미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카가메는 95.05%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임기 7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투족 후보 트와기라뭉구 전 총리는 3.62%로 2위, 전 내각장관 장-네포무세네 나인지라(Jean-Nepomuscene Nayinzira) 후보는 1.33%로 3위를 차지했다. 트와기라뭉구는 즉각 투명성이 결여된 선거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카가메는 RPF를 제외한 다른 정당들을 2003년 선거직전까지 불법화한 바 있다. 이어 2004년에는 종족간 분리주의(divisionism)를 표방하는 정당들도 금지시켰다. 그러나 투치족 정치조직인 RPF는 해체되지 않고 르완다를 계속 지배했다. 다음 대통령 선거는 2010년에 실시될 예정이다. 르완다 정부는 종족간 분리주의를 금지하고, 종족간 대립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언급이나 행동을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야당 및 정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난도 있다.

 

대부분의 관측통들은 2003년의 선거가 공정했다고 믿지 않았으며, 정통성에도 의문을 표시했다. 이들은 또 이 선거를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1924~)가 이끄는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맹-애국전선(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 ZANU-PF)의 공정선거와 비교하기도 했다. 2003년 9월에는 실시된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투치족의 집권 RPF당이 40석을 차지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사회민주당(PSD)은 7석, 자유당(PL)은 6석을 차지하였다. 27석은 간접선거로 채워졌다. 카가메 정권은 후투족 민주공화운동당(MDR)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일부 야당들은 집권 RPF의 허수아비로 알려졌다.

 

2003년 9월 내전을 피해 국외로 탈출했던 난민들이 르완다로 최종 귀환하였다. 2004년 4월 7일 많은 외국 고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지스 트러스트(Aegis Trust)가 후원한 키갈리의 기소지기념관(Gisozi Memorial)에서 르완다 대학살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르완다는 매년 4월 7일을 국민애도일로 정해 이를 준수하고 있다. 기소지기념관은 1994년 당시 대규모 학살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유엔 평화유지군이 철수하는 등 국제사회가 학살방지와 인권보호의 노력을 방기했음을 상기시키고, 이같은 비인도적인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르완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취지로 2002년에 설립되었다. 이 기념과은 인종학살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을 모아놓은 공동묘지이자 박물관이다. 

2005년 7월 르완다를 방문한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은 인종학살 당시 미국이 취했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 르완다인들에게 사과하였다.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에서 자국의 병사가 희생된 이후 1994년에 발생한 르완다 인종학살 사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미국은 르완다 대량학살 당시 불개입정책의 정당화를 위해 1994년 르완다 상황에 대해 아직도 인종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약 80만명의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이 희생된 1994년의 인종대학살을 이끈 후투족 주동자들은 탄자니아의 아루샤 ICTR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르완다 정부는 유럽국가들의 요구에 따라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교도소 시설을 신축한 뒤, ICTR측에 학살혐의자들을 르완다로 이송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ICTR측은 르완다가 공정한 재판의 진행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100만명에 이르는 인종학살을 저지른 후투족 혐의자들은 1996년부터 전통적인 마을단위의 재판기구인 가차차(Gacaca)가 재판을 진행해 왔다. 재판이 완료된 혐의자들은 아직 20% 밖에 안된다. 가차차의 판결에 따라 유족이나 생존자들은 수많은 후투족 혐의자들을 보복살인하였다. 르완다 정부는 가차차의 존속기간을 2008년까지 연장하였다. 재판진행의 지연에 대해 생존자들의 비판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이 재판을 통해 학살에 가담한 후투족과 희생자측인 투치족간의 반목이 심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투치족의 RPF가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지 않은 인종학살 기념관은 지나치게 편파적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당 독재정권일 수 밖에 없는 르완다 투치족 카가메 정권에 의한 선전전략의 일환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호텔 르완다(Hotel Rwanda)'의 저자 폴 루세사바기나(Paul Rusesabagina, 1954~)는 폴 카가메도 전쟁범죄자로 법정에 세울 것을 촉구했다. 그는 키갈리에 있는 자신의 밀 콜린스 호텔(Milles Collines Hotel)에 1268명의 후투족과 후투족을 도와준 투치족 난민들을 숨겨주어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르완다판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인 '호텔 르완다'는 후에 영화로도 나왔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인류에 대한 절망과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자들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어야만 했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종족분쟁과 이로 인해 촉발된 제1,2차 콩고 내전을 통해서 DR콩고와 부룬디의 안정은 르완다의 안정과도 직결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DR콩고 동부지역에는 후투족 반군인 르완다민주해방군(Democratic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Rwanda, FDLR)과 르완다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투치족 응쿤다가 이끄는 5만5천명 규모의 DR콩고 반군이 활동하고 있다. 르완다민주해방군(FDLR)은 94년 인종학살을 주도한 르완다 후투족 구정부군(Ex-FAR)과 후투족 민병대인 인터아함웨가 2001년에 조직을 합병하고 이름을 바꾼 반군단체이다. 르완다 북서부 지역에도 후투족 반군 게릴라들이 활동하고 있다. 여기에 투치족의 집권 RPF의 강압정치가 지속되고 경제적 상황이 악화된다면 언제든지 종족갈등이 폭발하여 내전이 다시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      

 

르완다에는 3개의 인종집단이 있다. 후투족 85%, 나일 원주민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투치족 14%, 피그미 계통의 트와족 1% 순이다. 그외 소수의 남아시아인, 아랍인, 영국인, 프랑스인, 벨기에인들이 있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모두 르완다어(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하며, 공통의 사회구조와 신앙을 지니고 있다. 종교는 로마 카톨릭 49.6%, 개신교 43.9%, 이슬람 4.6%(어떤 통계는 14%), 무종교 1.7%, 토착신앙 0.1% 순이다. 최근 독립적인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들이 증가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쓴 언론인들이 체포되거나 실종되고 있다. 2006년 RPF와 카가메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를 한 프랑스 RFI(Radio France International) 기자가 추방되기도 했다.   

 

르완다의 공용어는 키냐르완다어와 영어, 프랑스어다. 아랍인 지역이나 아랍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스와힐리어도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미국은 중서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프랑스어사용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국의 영향력을 제고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을 영어사용국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내전 기간 중에 우간다에서 영어로 훈련받은 투치족 80만명이 르완다로 귀환하여 권력을 장악하면서 영어가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가 되었다. 영어는 정부 웹사이트의 공식어와 국립 르완다대학교의 교수언어가 되었다. 영어만으로 작성되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 언어란에도 영어, 키냐르완다어, 프랑스어 순으로 적혀 있다. 프랑스어와 르완다어로 표기되었던 지폐도 2004년부터 앞면에는 키냐르완다어, 뒷면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표기하였다.  

 

르완다는 프랑스 판사가 카가메 대통령의 측근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2006년 11월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프랑스와 외교관계 단절 이후 르완다는 동아프리카의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등 영연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르완다는 2006년 12월 영미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영연방회원국 가입을 신청하였다. 또, 프랑스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영국의 대표적인 스포츠인 크리켓(cricket)을 장려하는 등 친영, 친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르완다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어 조만간 탈퇴할 가능성이 있다. 르완다에서는 프랑스어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르완다의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도리어 인종학살의 가해자가 된 카가메 대통령이 이제는 언어 표현권을 침해하고 문화적 다양성에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르완다의 인구밀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 특이하게도 르완다에서는 다른 부족과의 결혼이 허용된다. 타부족과의 결혼은 다른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르완다는 오랜 내전으로 인구의 거의 절반이 15세 이하이며, 인구의 90% 이상이 시골에 산다. 평균수명은 남자 45세, 여자 47세로 낮다. 보건위생 상태가 열악하여  말라리아, 성병, 소화기 질환, 호흡기 질환, 기생충으로 인한 질병 등이 만연하고 있다. 유아사망률은 중부 아프리카에서 최고이며, 의사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7∼15세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해당연령의 약 60%만이 초등학교에 다닌다. 교육은 주로 공립학교와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이루어진다. 1963년 고등교육과 과학연구의 중심지인 남부의 부타레(Butare)에 르완다국립대학교가 세워졌다.

 

르완다는 농업이 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개발도상국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노동력의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은 플랜틴(plantain), 고구마, 카사바, 감자, 수수, 콩, 바나나다. 환금작물로는 커피, 차, 사탕수수, 국화, 키니케 등을 재배한다. 가축은 주로 소와 염소를 키운다. 어업은 키부 호에서 이루어지고, 사냥은 전통적으로 트와족 사이에서 행해진다. 주요 광물자원은 주석과 텅스텐이다. 토탄과 콜롬보-탄탈석, 녹주석, 금도 매장되어 있다. 키부 호 근처에서는 천연 가스가 나온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은 2%도 되지 않는다. 주요 생산물로는 가공식품, 면직물, 시멘트, 페인트, 약품, 식물추출물, 비누, 성냥, 가구 등이 있다. 국내 수력발전소에 의해 르완다 전역에 전기가 공급된다. 지속적인 무역적자로 인해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원조를 받아왔다. 도로 포장률은 10% 이하다. 키부 호에는 콩고민주공화국까지 운항하는 배들이 정박하는 항구들이 있다. 키갈리와 카멤베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커피, 차, 주석, 텅스텐 원광 등 주요 수출품은 주로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로 수출된다. 르완다의 수출입은 대부분 우간다를 거쳐 인도양의 몸바사 항과 케냐 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국은 1963년 3월 르완다와 수교하고 1972년 8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으나 1975년 5월 국내사정에 의해 상주공관을 철수했다. 1987년 9월 주르완다 상주대사관을 재개설했다가 1990년 11월 다시 공관을 폐쇄하고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겸임해왔다. 르완다는 주일대사가 주한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르완다에 체류하는 한국인은 37명(2007년)이다. 조선은 1972년 4월 르완다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75년 8월에 상주공관을 설치하여 각종 경제협력을 제공하였다. 1992년도에 조선은 르완다 상주공관을 폐쇄하고 주우간다대사가 겸임토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