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서아프리카 국가들에는 세네갈, 감비아,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기니,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등이 있다. 말리와 니제르, 부르키나파소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다. 카보베르데는 섬나라다.
세네갈 지도
세네갈 공화국(Republic of Senegal)은 서아프리카 중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다. 서쪽으로 대서양에 면한 세네갈은 북쪽과 북동쪽으로 세네갈 강을 국경선으로 모리타니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팔레메(Falémé) 강을 사이에 두고 말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기니비사우, 기니와 국경을 접한다. 남서부 감비아(Gambia) 강 유역의 고립지역은 감비아 공화국이다.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 반도에 위치한 수도 다카르(Dakar)는 철도망의 종착역이자 서아프리카의 중요한 항구다. 면적은 약 19만6천7백㎢, 인구는 약 1220만명(2007년)이다.
세네갈의 국토는 대체로 평탄하며, 지리적으로 크게 3대 지역으로 구분된다. 서쪽 끝의 케이프 베르데 지역은 화산암의 작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와 남동부 지역은 기니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푸타잘롱(Fouta Djallon, Futa Jallon) 대산괴의 하부에 해당하는 고대 산괴의 주변부를 이룬다. 세네갈 최고봉은 남동부 담바큰다 주(Tambacounda)의 네펜 디아카(Nepen Diakha) 근처에 위치한 무명봉으로 해발 584m 정도 된다. 베르데 곶과 동부의 산괴 사이에는 약 6만4천㎢에 이르는 광대한 세네갈 분지가 펼쳐져 있다. 대하천 유역인 이 분지는 말리와 모리타니, 기니까지 이어진다. 대서양 연안은 모래가 많고 파도가 거세다. 살룸 강 하구 남쪽의 해안은 골짜기가 침수되어 이루어진 리아스식 해안이며, 남쪽으로 갈수록 홍수림 소택지가 많아진다. 세네갈의 하천들은 대체로 서쪽의 대서양으로 흐른다. 3대하천인 세네갈 강과 감비아 강, 카자망스 강은 세네갈의 농업과 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삼림은 국토 면적의 약 31%, 가경지는 약 27%를 차지한다. 약 30%는 목초지 또는 방목지로 이용된다.
기후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건조한 사막과 습윤한 열대지방 사이의 천이성 기후인 수단 기후가 나타난다. 다카르 동쪽 56㎞ 지점의 티에(Thiès)와 팔레메 강 하류 골짜기를 잇는 선의 이북 지역은 사헬 기후대이다. 우기는 사헬 기후대에서는 7∼10월, 수단 기후대에서는 6∼10월이다. 연강우량은 북부에서 약 400㎜, 남부에서 약 1600㎜이다. 기온은 지역과 계절에 따라 연평균 24∼38℃를 오르내린다. 남부보다 북부의 기온이 더 높다. 여름에 내륙의 기온은 40℃ 이상 올라간다. 북부 해안은 한류인 카나리아해류가 남하하는 영향으로 겨울 기온이 13℃까지 내려간다. 겨울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바람인 하마탄(harmattan)이 불어온다. 사헬 지대에는 건조에 강한 바오밥나무와 아카시아, 관목이 산재한다. 고온습윤한 남부에는 코코야자와 열대수목이 자란다. 베르데 곶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전형적인 사바나 지대가 펼쳐진다. 세네갈에는 사자와 표범를 비롯해서 하이에나, 들개, 혹돼지, 여러 종류의 원숭이와 영양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하천에는 악어와 하마, 여러 종류의 거북이 살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은 세네갈에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음을 알려준다. 동부 세네갈은 한때 소닌케족(Soninke, Sarakole, Seraculeh, Serahuli)이 세운 가나 제국(Ghana Empire, 400 BC~1235 AD)의 영토였다. 세네갈 강 중류 계곡에 거주하던 투쿨로르족(Tukulor, Tukolor, Toucouleur, Halpulaar)은 10세기 이래 테크루르 왕국(Takrur, Tekrur, Tekrour Kingom, 800~1285)의 지배하에 있었다. 11세기경 투쿨로르족은 이 지역에 전파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3~14세기경 이 지역은 동쪽의 말리 제국(Mali, Mandingo, Manding, Malinke Empire, Manden Kurufa, 1230~1600)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4세기경 월로프 제국(Wolof, Jolof Empire, 1360~1890)이 수립되었으며, 15세기에는 풀라니족(Fulani, Fula, Fulbe, Peul, Pulaar, Peulh, Peuhl, Halpulaar, Fulaand)의 왕국이 번영하였다.
15세기경부터 영국과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 열강들은 서아프리카의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1444년 카보베르데(Cabo Verde)를 답사한 포르투갈인들은 이듬해 세네갈의 해안지방을 탐험했다. 1638년 프랑스가 세네갈 강 하구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1659년 세네갈 강 어귀의 생루이(Saint-Louis, 월로프어로는 Ndar) 섬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생루이는 17∼18세기에 도시로 발전하여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레부족(Lebou)을 몰아내고 케이프 베르데 반도 바로 남쪽에 있는 고레 섬(Île de Gorée, Goree Island)을 점령했다. 1677년 프랑스는 노예무역으로 악명높은 고레 섬을 자국령으로 선포하였다. 유럽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약탈한 수많은 노예와 막대한 황금, 고무, 상아 등의 자원을 고레 섬을 통해서 유럽으로 반출해 갔다.
1693년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세네갈의 해안지방을 두고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생루이는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기부터 1815년까지 영국령이 되었다. 1817년 프랑스는 1814년의 파리 조약에 의해 자국에 양도된 생루이와 고레 섬을 재점령하였다. 1848년 세네갈에서는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1850년경 알 하지 우마르 탈(El Hadj Umar Tall, El Hadj Umar ibn Sa'id Tall, 1797~1864)은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이슬람 투쿨로르 제국(Tijaniyya Jihad state, Segu Tukulor, Toucouleur Empire)을 선포하고 지하드(jihd, 聖戰)를 일으켰다. 우마르는 유럽제 무기를 갖춘 트쿨로르족을 이끌고 북쪽의 밤바라족(Bambara)과 전투를 벌이면서 어퍼세네갈 강을 건너 북상하여 2년 뒤에는 카르타의 밤바라 제국(Bambara, Bamana, Segou Empire, 1640~1861)을 정복했다.
1854년 프랑스의 루이 페데르브(Louis Faidherbe, 1818∼1889) 소령은 34세의 나이로 세네갈 총독이 되었다. 페데르브 휘하의 프랑스군은 밤바라 제국을 정복하고 서쪽의 세네갈 강으로 진출하려던 알 하지 우마르의 투쿨로르군을 저지하고 세네갈 강 하류로 몰아냈다. 프랑스군에 패퇴한 투쿨로르 제국은 1861년 세구의 밤바라 제국과 마시나(Macina, Masina)를 정복한 뒤 북으로 통북투(Tombouctou, Timbuktu)까지 지배영역을 확장시켰다. 프랑스군은 세네갈 본토의 왈루(Waalo, Oualo, 1287~1855) 왕국과 바올(Baol, Bawol, 1555~1874) 왕국, 카이요(Cayor, 1549~1879) 왕국, 월로프 왕국을 차례로 제압하고 내륙지방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페데르브는 다카르 항을 개항하여 땅콩의 수출을 추진하였으며, 상(上)세네갈에 메디나(Medinah)를 세워 서아프리카 내륙으로의 팽창을 위한 기지로 삼았다. 카이요 왕국의 라트 디오르(Lat-Dior, Lat Dior Ngoné Latyr Diop, 1842~1886) 왕은 프랑스의 침략에 저항했으나 데케울(Dekheule)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1861년에 이르러 페데르브는 세네갈을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군사력을 갖춘 식민지로 만들었다. 1863년 페데르브는 프랑스의 세력을 나이저 강과 통북투를 넘어서 서아프리카 전역을 식민지로 만들어 경쟁국인 영국령 인도에 맞먹는 프랑스령 아프리카 제국의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다는 이유로 그의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으나 페데르브의 구상은 20세기초에 창설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의 기초가 되었다. 1890년 이후 세네갈 전역을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투쿨로르 제국을 제압하고 세구와 마시나, 통북투 등을 차례로 정복했다. 1895년 세네갈은 다른 지역과 함께 묶여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 편입되었다.
1902년 다카르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수도가 되어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생루이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하였다. 1928년 프랑스 파리의 리세 루이르그랑(Lycée Louis-le-Grand, LLG)과 소르본느(Sorbonne) 대학교에 유학한 세레르족(Serer, Sérère, Sereer) 출신의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셍고르, 1906~2001)는 아프리카 예술이 현대 유럽의 회화나 조각, 음악, 문학 등에 다양한 영향을 주었음을 발견하고, 아프리카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위대성을 자각하였다. 1930년대부터 레오폴드 상고르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의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 1913~), 기아나(Guiana)의 레옹 다마스(Leon Gontran Damas, 1912~1978)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저항하면서 아프리카의 전통과 아프리카인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문학운동인 네그리튀드(Negritude) 운동을 주창하였다.
1935년 레오폴드 상고르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최고의 유자격 교사인 아그레제(agrégé)가 되었다. 1939년 프랑스군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상고르는 이듬해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2년을 보냈다. 수용소에서 그는 네그리튀드 운동에 입각한 뛰어난 시들을 썼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상고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입하여 나치 독일과 싸웠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상고르를 중심으로 세네갈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상고르는 대전 직후 구성된 프랑스 제헌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1946년 세네갈은 프랑스의 해외 준주(準州)가 되었다. 같은 해 레오폴드 상고르는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선거에서 프랑스 사회당(Parti Socialiste, PS)의 전신인 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French Section of the Workers' International, SFIO)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상고르는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국민의회에 파견된 세네갈 출신 2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48년 상고르는 마마두 디아(Mamadou Dia, 1910~)와 함께 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SFIO)로부터 분리하여 세네갈민주연합(Senegalese Democratic Bloc, BDS)을 창당했다. 1951년 실시된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상고르는 재선에 성공하였다.
1956년 8월 세네갈 민주연합(BDS)은 세네갈 민주동맹(Senegalese Democratic Union, UDS)과 카자망스 자치운동(Casamance Autonomist Movement, MAC), 세네갈 민중운동(Senegalese Popular Movement, MPS)의 한 분파와 연합하여 세네갈민중연합(Senegalese Popular Bloc, BPS)을 결성했다. 11월 상고르는 세네갈의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티에(Thiès) 시장이 취임했으며, 국민의회 선거에서 또 다시 당선되었다.
1958년에는 프랑스 제국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58년 세네갈 사회당(Socialist Party of Senegal, PSS, PS)의 전신인 세네갈 진보연맹(Senegalese Progressive Union, UPS)은 레오폴드 상고르를 중심으로 프랑스에 독립을 요구했다. 1959년 4월 4일 세네갈과 프랑스령 수단(Sudan,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는 연합하여 말리 연방(Mali Federation)을 결성했다. 1960년 6월 20일 말리 연방은 프랑스 공동체의 일원으로 완전 독립했다. 독립 직전에 상고르는 카자망스(Casamance) 지도자들에게 20년 뒤에 카자망스의 완전한 독립을 약속했다. 8월 20일 말리 연방은 각국 지도자들의 의견과 이해의 대립으로 세네갈이 연방을 탈퇴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세네갈은 단독국가로 독립하고, 프랑스령 수단은 독립 말리 공화국을 선포했다. 9월 레오폴드 상고르는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레오폴드 상고르는 내각책임제를 도입하여 초대 총리에 마마두 디아를 임명하고 세네갈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1962년 상고르의 정치적 경쟁자이던 마마두 디아가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세네갈 국민은 상고르를 지지하여 궐기했다.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디아는 체포되어 종신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쿠데타 미수사건을 계기로 상고르는 의원내각제에서 온건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놓았다. 상고르는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선에서 권력이 한층 강화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6년 4월 상고르는 헌법을 개정하여 제한적인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80년 상고르의 독립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카자망스의 주도인 지깡쇼(Ziguinchor, 지갱쇼르)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20여년간 장기집권한 상고르는 1980년 12월 31일 임기 도중 대통령직에서의 은퇴를 발표하였다. 그는 세레르족의 가톨릭 신도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정치력으로 월로프족과 무슬림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를 이끌었다. 1981년 1월 압두 디우프(Abdou Diouf, 월로프어 Abdu Juuf, 1935~) 국무총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압두 디우프의 어머니는 풀라니족, 아버지는 세레르족이었다. 디우프 정권이 헌법을 개정하여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자, 기존의 사회당(PS), 민주당(Parti Democratique Senegalais, PDS)을 포함하여 정당이 10여개로 늘어났다.
1981년 7월 감비아에서 쿠코이 삼바 산양(Kukoi Samba Sanyang, 1952~)이 이끄는 좌파 민족혁명회의(National Revolutionary Council, NRC)가 다우다 자와라(Dawda Kairaba Jawara)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쿠테타을 일으키자 세네갈은 3천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진압하였다. 12월 세네갈과 감비아는 세네-감비아 연방협정에 서명했다. 1982년 2월 세네감비아 연방(Senegambia federation)이 출범하고 자국의 주권을 유지한 채 외교와 국방, 통화 분야에서 공동정책을 취했으나 7년 뒤에 해체되었다.
남부 카자망스는 독립운동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졸라족(Jola, Diola)이 다수 부족을 이루고 있었다. 국민의 95%가 이슬람인 세네갈에서 다수가 카톨릭 신도인 카자망스 주민들은 이슬람화에 대한 반대와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 분리주의 운동단체인 카자망스 민주운동군(Movement of Democratic Forces of Casamance, MFDC)이 결성되었다. 카자망스 민주운동군(MFDC)은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João Bernardo Vieira, 1939~) 기니비사우 대통령의 지원을 받았다. MFDC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세네갈 정부에 의해 MFDC의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저항운동은 점차 치열해졌다. 이후 MFDC는 세네갈 정부군과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
1983년의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디우프는 국민들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는 동시에 경제분야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축소시켰으며, 개발도상국들과의 외교를 강화하였다. 디우프는 1988년의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디우프 정권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빈곤층의 확산, 실업률과 범죄의 증가 등으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디우푸의 집권기간 내내 반정부 시위와 국경분쟁, 남부 카자망스 지역의 분리주의 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89년 4월 모리타니와 세네갈간 방목권 분쟁의 와중에 모리타니 국경수비대의 무어인(Moor, Arabo-berber)이 세네갈의 소닌케족 농부 2명을 사살하는 사건으로 인종분규가 일어났다. 세네갈에서는 분노한 소닌케족을 비롯한 흑인들이 봉기하여 모리타니인들의 상점들을 약탈하고, 무어인들을 추방하였다. 모리타니에서는 마위야 울드 시드 아흐메드 타야(Maawiya Ould Sid'Ahmed Taya, 1941~) 정권의 비호를 받는 무자비한 무어인 경찰과 테러집단이 모리타니 남부인 수백명을 학살하고 강간과 신체훼손, 폭행, 토지약탈, 가옥파괴를 자행하였다. 또, 7만명 이상의 남부인들을 아무 연고도 없는 세네갈로 강제추방하였다. 25만명이 넘는 남부인 난민들은 타야 정권과 무어인의 인종청소를 피해 세네갈과 말리로 탈출하였다. 8월 모리타니가 국경을 폐쇄하자 세네갈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모리타니 남부인이란 모리타니 남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풀라-투쿨로르족, 월로프족, 소닌케족, 밤바라족 등의 아프리카 흑인 하층민들을 일컫는다.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노예제도에 묶여 있던 아프리카 흑인들은 모리타니의 독립 이후에도 북부의 지배종족인 무어인들에 의한 아랍화와 인종차별 정책에 시달렸다. 모리타니 정부는 특히 국경지대 세네갈 강 유역의 투쿨로르족과 소닌케족을 차별하였다. 상당수의 흑인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을 받았다.
1990년 기니비사우군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카자망스 민주운동군(MFDC)은 그 지역의 세네갈 정부군 시설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세네갈 정부군은 지깡쇼 지역의 바세 카자망스(Basse Casamance)와 기니비사우에 있는 MFDC 반군 근거지들을 공격했다. 1990년대 양측간 몇 차례의 휴전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오거스틴 디아마쿤 상고르(Augustin Diamacoune Senghor) 신부가 MFDC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면서 세네갈 정부와의 화해와 대화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세네갈 정부가 상고르 신부가 제안한 평화적 대화조차 거부하자 MFDC는 전투를 재개했다.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모리타니와 세네갈간 국경분쟁 해결을 위해 협상을 촉구했다. 1991년 7월 압두 디우프 세네갈 대통령의 제안으로 양국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국경분쟁은 종식되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대부분의 남부인들이 모리타니로 귀환했지만 울드 타야 정권은 인종차별 정책을 지속했다. 흑인 귀환민들에게 토지반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분증 발급도 해주지 않았으며, 은행대출도 금지시켰다. 심지어 흑인들은 취업조차 할 수 없었다. 타야는 지배층인 '아랍 무어인(Arab Moors)'과 대비시켜 남부인들을 '아프리카 검둥이(black Africans)'라고 부르면서 경멸하였다. 2만~3만명의 난민들은 모리타니로 귀환하지 않고 세네갈 난민캠프에 머물렀다. 난민 가운데 약 2만5천명은 흑인 민족주의 무장운동단체인 모리타니 아프리카인해방군(African Liberation Forces of Mauritania, FLAM)에 소속되어 모리타니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저항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1992년 4월 세네갈은 1989년에 국경분쟁으로 단절되었던 모리타니와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8월 MFDC 반군은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카자망스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의 교전으로 수백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1993년 2월 실시된 대선에서 디우프 대통령은 3선에 성공하였다. 5월 내전의 와중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 사회당(PS)이 120석 가운데 85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93년 7월 정부군과 MFDC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나 MFDC 반군의 공격 재개로 평화협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MFDC 반군의 간헐적인 게릴라전 수행과 정부군의 진압이 반복되었다. 1994년 2월에는 물가의 급등으로 세네갈 국민들의 폭동이 발생하였다. 1995년 3월 집권 사회당은 지지도가 낮아지자 세네갈 민주당(Senegalese Democratic Party, PDS)과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그해 4월로 예정된 세네갈 정부와 MFDC간의 평화회담은 MFDC측의 거부로 취소되었다. 1996년 전반기에는 정부군과 MFDC간의 산발적인 충돌이 지속되었다.
1996년 실시된 지방의회선거에서는 집권 사회당(PS)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야당들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독립선거위원회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여당과 야당이 대립으로 치닫자 디우프 정권은 1996년 8월 국가선거감시위원회(ONEL)의 설치를 허용하였다. 1996년 미국의 주도로 아프리카 역내 평화유지를 위해 창설된 아프리카위기신속대응체제(ACRI)에 적극 참여한 세네갈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로는 최초로 동 체제에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미국은 세네갈 정예병력 4백명에게 평화유지활동에 필요한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미군교관을 파견하였다. 8월 하순 미국 군사훈련단 파견에 고무된 정부군은 MFDC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실시하여 MFDC 기지 다수를 파괴하였다. 양측의 교전으로 약 2천명의 카자망스 난민이 기니비사우로 탈출하였다. 당시 기니비사우의 난민캠프에는 2∼3만명의 카자망스 난민이 수용되어 있었다. MFDC 반군은 지뢰 등을 이용한 테러작전으로 맞섰다.
1997년 MFDC와 세네갈 정부는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세네갈 정부는 반군과의 협상은 지속하되 카자망스의 분리독립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9월 MFDC 반군의 게릴라전 재개로 정부군과 반군 등 수십명이 사망하고, 약 5천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12월 프랑스의 리오넬 죠스팽(Lionel Robert Jospin, 1937~) 총리는 세네갈을 방문한 자리에서 프랑스는 앞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간섭이 아닌 긍정적 개입형태의 새로운 외교정책을 추진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1998년 1월 13일 MFDC 반군 지도자인 상고르 신부가 기자회견을 열어 지뢰매설과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중단한다고 선언하자, 야햐 자메(Yahya Jammeh, 1965~) 감비아 대통령은 평화회담을 위해 중재를 맡을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3월 MFDC는 2개의 단체로 분열되어 서로 경쟁하였다. 북부지역의 반군파벌 MFDC-Diatta는 무장독립투쟁이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MFDC의 분열 이후에도 저강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미국은 평화유지 목적으로 세네갈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미군 특수부대를 파견하였다. 3월 31일~4월 1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세네갈을 공식방문하고 양국간 관계강화를 도모하였다.
세네갈 정부는 1998년 5월로 예정된 선거에서 MFDC 반군의 방해를 막기 위해 카자망스 지역에 군병력을 증원하였다. 선거 결과 집권 사회당(PS)이 140석 중 93석을 휩쓸면서 압승을 거두자 야당들은 일제히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국제기구의 감시하에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였다. 6월 기니비사우의 안수마네 마네(Ansumane Mane, 1940~2000) 장군이 MFDC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한 혐의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에 안수마네 마네 참모총장이 주앙 비에이라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기니비사우 내전이 발발하였다. 세네갈은 이 정변이 카자망스의 분리독립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장갑차 등 중화기로 무장한 25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비에이라 기니비사우 대통령과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1998년 7월 디우프 대통령은 개각을 단행하여 마마두 라미네 로움(Mamadou Lamine Loum, 1952~) 총리 내각이 출범하였다. 8월 세네갈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직의 3회 이상 연임제한을 철폐하였다. 1999년 1월 상하양원제 의회제 하에서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집권 사회당(PS)이 압승을 거두었다. 2월 세네갈 정부는 카자망스 정치범 123명을 석방하고 MFDC 지도자 상고르 신부와 직접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4월부터 MFDC 반군은 새로운 평화협정에 따라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MFDC의 다른 파벌이 도시와 정부군 주둔지들을 공격하면서 정전협정은 파기되었다. 2000년 1월 세네갈 정부와 MFDC는 감비아의 수도 반줄(Banjul)에서 평화협상을 재개하여 정부군의 철수와 MFDC의 합법화, 적대행위의 중지, 정치범 석방, MFDC의 군사조직 ATIKA의 점령지역으로부터의 철수, 지뢰제거 등의 현안을 논의하였다. 같은 달 세네갈 인권단체는 세네갈에 머물고 있던 차드의 독재자 히센 하브레(Hissene Habre, 1942~)를 인종학살 혐의로 고발하였다.
2000년 3월 실시된 대선 결선투표에서 세네갈 민주당(PDS)의 압둘라예 와드(Abdoulaye Wade, 와데, 1926~) 후보는 좌파연합과 빈곤층의 지지를 받아 집권 사회당(PS)의 압두 디우프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4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지난 40년간 계속된 PS의 장기집권에 식상한 데다가 경제사정의 악화에 지친 나머지 세네갈 국민은 PDS의 압둘라예 와드를 선택했다. 그동안 사회당(PS)을 지지해온 세네갈의 가장 큰 수피(Sufi) 이슬람 무리드(Mouride)파의 수장(Khalife-General) 세린 살류 음바케(Serigne Saliou Mbacke, 1915~)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선거관련 교령(ndigel)을 포기한 것은 와드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무리드파 칼리프는 선거관련 교령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와드는 당선 이후 세네갈 대통령으로서는 전례없이 무리드파 칼리프를 수시로 예방하면서 종교적 헌신을 공표하였다.
와드는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과 프랑스, 리비아, 모로코, 대만 등의 국가를 방문하여 세네갈의 위상을 높이고 해외원조원과 투자원 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선진국의 원조가 선진국과 아프리카 개도국간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오히려 외채 증가의 결과만 가져왔다는 비판적 인식하에 아프리카 발전을 위한 오메가 플랜(Plan Omega)을 주창했다. 오메가 플랜이란 아프리카의 인적 자원과 사회기반 시설에 대한 선진국의 장기 저리 융자로 아프리카의 자원을 장기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투자 기반이 조성되면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제안이었다.
2000년 4월 와드 대통령이 상고르 신부의 가택연금을 해제하였음에도 기니비사우에 근거지를 둔 MFDC 반군은 국경을 넘어 지깡쇼 남쪽 25km 지점의 므팍(Mpack)을 공격하자 세네갈은 국경을 폐쇄하였다. 5월 와드 대통령은 MFDC 사령관과 직접 협상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고, 중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리비아에게 반군을 위한 무기공급의 중지를 요청했다. 세네갈 정부는 2천4백명의 공수부대와 특수부대를 카자망스에서 철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철군의 이행은 계속 연기되었다. MFDC 반군은 기니비사우와의 국경을 수시로 넘어와 군사작전을 펼쳤다. 세네갈은 기니비사우가 MFDC 반군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8월 세네갈과 기니비사우는 국경 감시를 위한 공동정보체계를 공동으로 운용하고 국경을 공동순찰하기로 합의하였다.
와드 정권은 구여당인 PS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제도 개혁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제안하였다. 2001년 1월 세네갈은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변경, 대통령의 3선 연임제한, 상원과 경제사회평의회의 폐지,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도입, 의원내각제 요소의 일부 도입, 여성의 권리 강화, 국회의원의 당적 변경시 의원직 박탈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와드 대통령은 경과규정에 의해 7년 임기가 보장되었다. 2월 새 헌법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4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PDS는 120석 가운데 89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진보세력연합(Alliance des Forces de Progres)은 11석, 사회당(PS)은 10석, 개혁운동(Renouveau)은 3석, 기타 6개 정당이 7석을 차지하였다.
MFDC 반군과 정부군은 정전협정 이후에도 전투를 계속하여 사망자가 5백여명에 이르렀다. 2001년 3월 압둘라예 와드 대통령과 상고르 신부는 평화를 위한 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다. 평화안에는 카자망스인 정치범의 석방과 난민의 귀환보장, 지뢰의 제거 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카자망스의 독립은 빠져 있었다. MFDC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 평화안을 상고르의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MFDC의 일부 강경파들이 간헐적인 양민학살을 계속하면서 평화정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2001년 6월 기니비사우군이 자국내 MFDC 반군기지를 공격하자 100명 이상의 카자망스 난민이 세네갈로 귀환하였다. 2002년 9월 코트디부와르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세네갈은 자국군을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ECOWAS) 평화유지군의 주력부대로 파견하였다. 2003년 7월 세네갈은 미국의 조지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 대통령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의 협력관계 강화를 도모하였다. 2004년 4월 와드는 마키 살(Macky Sall , 1961~)을 총리에 임명하였다.
2004년 12월 30일 와드 대통령과 MFDC의 상고르 대표 및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와 반군은 카자망스 분쟁관련 평화협약에 서명했다. 평화협약은 반군측의 항구적 무력투쟁 포기, 정부와 반군간 진지한 후속교섭의 추진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2005년 2월 평화협약 서명의 후속조치로서 정부와 반군 양측은 1차 실무교섭 회의를 열고 정치와 경제 및 재건, 사회개발, 무장해제, 사회복귀 등 4개 분야 위원회의 설치에 합의했으나 현실적인 이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화협약에 불참한 일부 반군은 대민 약탈 등 무력 행사를 계속했다. 평화협약 서명 이후 MFDC 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두 파벌 사이에 무력충돌까지 일어났다. 두 파벌간의 충돌로 2006년 수천명의 카자망스인들이 감비아로 떠났다.
2005년 2월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Jacques Rene Chirac, 1932~) 대통령은 세네갈과의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2000년 와드 대통령의 취임 이후 최초로 세네갈을 공식방문하였다. 프랑스는 세네갈과 미국의 관계가 매우 빠르게 강화되고 있는 점과 코트디부아르 사태 이후 서아프리카에서 점증하는 세네갈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06년 6월 이듬해 3월과 6월로 예정된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군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자 야당은 이에 반대하는 장외투쟁을 선언하였다. 12월 다카르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이슬람권 정상회의는 11월 메카에서 열리는 이슬람권 특별 정상회의로 인해 2007년으로 연기되었다.
2007년 3월의 대선에서 와드가 55.9%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자 주요 야당인 사회당(PS)과 Rewimi 등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헌법소원을 냈다. 야권은 범정파 국민회의(Assises nationales) 개최를 제안하고 와드 대통령과 집권 PDS의 참가를 주장했다. 와드 대통령과 PDS는 참가를 거부하고 야당 지도자들의 비리를 조사하겠다고 압력을 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6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 민주당(PDS)과 소수정당들이 연합한 소피(Sopi, 월로프어로 변화의 의미)연합이 150석 가운데 13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Takku Defaraat Senegal은 3석, 선거에 참여한 11개 군소정당들은 나머지 16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PS와 Rewimi 등 야당은 와드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총선을 보이코트하여 앞으로 정국 불안을 예고했다. 국제 참관단은 민주적으로 진행된 총선 결과를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2007년 6월 시디 울드 쉐이크 압달라이(Sidi Ould Cheikh Abdallahi, 1938~) 모리타니 대통령은 세네갈과 말리의 난민캠프에 수용된 흑인난민들의 귀환을 지원해 줄 것을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에게 요청했다. 7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은 말리에 6천명, 세네갈에 2만명의 모리타니인 난민이 있다고 발표했다. 북부의 모리타니 흑인 난민문제는 향후 세네갈에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MFDC 반군이 무력적 해결 방법을 포기하고 평화협약의 이행에 참가했다는 점에서 남부 카자망스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기대되고 있으나 오랜 내전으로 인한 경제의 피폐, 지리적인 교통연계의 어려움 때문에 세네갈의 정치, 경제에 계속 불안 요인이 될 것이다.
와드 대통령은 고령과 헌법의 3선 연임제한 조항에 따라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와드 대통령의 장남인 카림 와드(Karim Wade, 1968~)를 중심으로 한 'Generation du Concret' 그룹이 정부의 주요 각료직과 대통령실, 집권 PDS당의 요직, 국가 주요 프로젝트 등을 장악하면서 집권당 내부에서도 지지세력과 반대세력간의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집권 PDS의 전통적 지도세력과 카림 와드 지지세력간의 갈등은 향후 중요한 정치적 사안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 이슬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점도 세네갈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다. 특히 무리드파는 종교적인 단결은 물론 운수업, 농장 등을 경영하면서 적극적인 경제 활동으로 추종자와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
세네갈은 대통령중심제 공화국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대통령은 장관들을 임명하며 각료회의 의장직과 군총사령관을 겸한다. 입법기관은 단원제인 국회(National Assembly)로 임기 5년의 의원 150명으로 구성된다. 세네갈에는 80개 이상의 정당이 있다. 세네갈의 사법기구는 독립적이다. 최고재판소의 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한다. 세네갈의 민주적 정치문화의 정착은 과거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의 행정책임자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세네갈 무슬림 공동체의 종교지도자인 마라부트(marabout)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세네갈은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개발도상국이다. 1인당 GNP는 비교적 낮은 편이다. 독립 이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가뭄은 세네갈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곤 한다. 세네갈은 무역적자국으로 경제발전은 주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다. 프랑스는 최대의 원조국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프랑스,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미국, 일본 등이다. 노동력의 해외유출이 많아 프랑스로 떠나는 노동자가 한해 약 6만명에 이른다.
농업 인구는 전체의 75%나 되지만, 농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25%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수출 농작물은 땅콩으로 전체경작면적의 약 40%를 차지한다. 그외 주요 식량작물로 기장과 수수, 옥수수, 카사바, 바나나를 재배한다. 식량의 부족으로 다량의 쌀이 수입된다. 정부는 땅콩에 대한 국가경제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목화나 쌀, 사탕수수 등 작물의 다양화를 장려하고 있다. 어업의 급성장에 힘입어 수산물 수출은 총수출액의 약 10%를 차지한다. 연안에서는 주로 다랑어와 가다랭이, 도미, 새우, 문어 등이 잡힌다. 주요 어항은 다카르와 생루이다.
세네갈에는 인산염과 철광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카자망스 지방의 근해에는 상당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그외 티탄, 구리, 천연가스, 석회암도 생산된다. GDP의 약 25%를 차지하는 제조업은 노동인구의 약 10%를 고용한다. 가장 중요한 산업은 땅콩기름 추출 산업과 섬유공업이다. 그외 청량음료나 정당(精糖), 유제품, 담배, 생선통조림(주로 참치) 등도 생산된다. 서비스업과 상업, 운송업은 GDP의 약 50%를 차지한다. 관광업은 중요한 외화소득원이다. 철도는 1885년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부설된 다카르-생루이 철도를 비롯해서 다카르-말리간 국제철도 등 4개 노선이 있다. 다카르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중계지로 항공로와 해상항로가 집중되어 있다. 전국 13개 도시에 공항이 있다.
세네갈 국민을 구성하는 주요 종족은 월로프족(35%), 풀라니족(14%)과 투쿨로르족(10%), 세레르족(15%), 레부족(10%), 졸라족(4%), 만딩고족(Mandingo, Manding, Malinke, Mandinka, 3%)이다. 풀라니족과 투클로르족은 같은 종족으로 둘을 합하면 세네갈 제2위의 종족이 된다. 주요 종족들은 가나와 말리, 송가이 등 과거 서부 수단의 제국들이 있던 사헬과 사바나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각각 고유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외 무어인(Moors, Maures), 소닌케족, 바사리족(Bassari), 베딕족(Bedick) 등 많은 소수 부족이 있다. 세네갈에는 약 5만명의 유럽인(프랑스인이 대부분)과 레바논인이 있다. 모리타니인, 모로코인, 중국인, 베트남인도 소수 있다.
세네갈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월로프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각 부족의 언어가 사용된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로 교육한다. 세네갈은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종교는 이슬람 94%, 기독교 5%, 토속신앙 1% 순이다. 교육은 6∼12세까지 의무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취학아동은 약 60%에 불과하다. 다카르에는 종합대학교가 있다. 보건의료 서비스는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농촌지역은 매우 취약하다. 전체 의사의 약 70%가 다카르에 있다. 인구의 47%가 15세 미만으로 평균연령이 낮다. 평균 기대수명은 남자 44세, 여자 47세이다.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다. 각 부족은 흑인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도시에서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구비문학은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말리 제국시대부터 내려온 음유시인 계층인 그리오(griot)들은 전사의 무용담을 담은 구비전승시를 낭송한다. 그리오들은 역사가이자 시인이며, 또 이야기꾼이자 가수다. 월로프족의 퍼커션(Percussion) 음악인 음발락스(mbalax)는 유명한 세네갈 민속음악이다. 음발락스는 세네갈 출신의 가수이자 '더 슈퍼 에뜨왈 밴드'의 리더인 유쑤 은두르(Youssou N'Dour, 1959~)에 의해서 대중화되었다. 2007년 3월 1일 은두르는 자신의 밴드와 서울에서 내한공연을 한 바 있다. 사바르(Sabar) 드럼 연주는 특히 인기가 많다. 사바르는 결혼식 같은 특별한 의식에서 연주된다. 다른 악기로는 타마(tama)가 있다. 은두르 외에 빠쁘 디우프(Pape Diouf), 바바 말(Baba Maal, 1953~), 시온 섹(Thione Seck, 1955~) 등도 인기 있는 뮤지션들이다.
1930~1950년대 레오폴드 상고르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의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 1913~), 기아나(Guiana)의 레옹 다마스(Leon Gontran Damas, 1912~1978)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저항하면서 아프리카의 전통과 아프리카인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문학운동인 네그리튀드(Negritude) 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상고르의 시는 아프리카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세네갈의 시인 비라고 디오프(Birago Ishmael Diop, 1906~1989)는 아프리카인의 삶의 신비를 다룬 시를 쓰는 한편, 월로프족의 전통적인 민담과 전설을 기록하였으며, 다비드 디오프(David Diop, 1927~1960)는 제국주의 유럽 열강들을 축출하고 아프리카인의 독립과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혁명적 시들을 썼다.
세네갈의 기본적 외교정책은 비동맹중립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프랑스와는 식민지 시대 이후에도 특별 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언어를 포함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노동, 제도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프랑스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1974년 3월 프랑스와 세네갈간 체결된 공동방위협정에 따라 약 1200명의 프랑스군이 세네갈에 주둔하고 있다. 클린턴과 부시 대통령의 방문 이후 미국의 기술과 자본력을 유치하고 미국시장을 겨냥한 수출산업 육성을 추진하면서 미국계 대기업들의 활발한 투자와 현지공장의 건설이 이루어졌으며, 제2 이동통신 사업자로 미국업체가 선정되었다. 또, 미국이 추진하는 후진국개발지원프로그램(Millennium Challenge Account, MCA) 지원대상국으로 선정되어 5억4천8백만 달러 규모의 산업 인프라 개발계획을 위한 재정지원을 요청하였다.
세네갈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인 까닭에 아랍국가들과의 관계도 중시한다. 와드 정권은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서구 편향적 외교에서 벗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UAE 등 아랍국가에 대한 우호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빈라덴 그룹은 다카르 인근 디아스(Diass) 신공항 건설에 3억유로, UAE의 두바이 포츠 월드(Dubai Ports World, DP World)는 다카르 항의 확장 및 경영권에 5억3천4백만 달러, UAE의 제벨알리자유무역청(Jafza)는 디아스 지역 경제특구 건설에 8억 달러를 지원하거나 투자했다.
일본과 대만은 매년 막대한 공공원조를 세네갈에 제공해 왔다. 세네갈은 유엔에서 일본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였다. 1995년 대만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세네갈은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대만을 적극 지지하는 등 친대만노선을 견지하였다. 1997년 6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자 세네갈은 홍콩 주재 영사관을 폐쇄하였다. 와데 대통령은 천수이벤(陳水扁, 1951~) 대만 총통 취임식에 참석하여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2005년 세네갈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대만과 단교하였다. 서북아프리카지역의 정치, 경제, 외교, 문화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세네갈은 아프리카단결기구(OAU) 등의 국제기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02년 12월의 마다가스카르 사태와 2003년 9월의 기니비사우에서 발생한 쿠데타, 2004년 10월의 기니비사우 군사반란 등을 적극 중재하기도 하였다.
세네갈은 경제적 지원을 더 많이 얻어내기 위해 중국과 베네수엘라, 이란 등 서방국가들과 대립적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EU-아프리카경제파트너쉽(APE)체결을 주도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중국은 세네갈 기간 통신망 건설에 5천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또, 다카르와 인근 지역의 송배전망을 현대화와 고속도로, 11개의 스타디움, 국립극장 등의 건설을 지원해 주었다. 베네수엘라는 제2정유공장을 지어 주었다. 이란은 자동차 조립공장을 지어 주고, 다카르 이슬람정상회의 의전차량 100대를 지원하였다.
세네갈은 한국과 조선 동시수교국으로서, 등거리 외교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한국은 1960년 9월 세네갈이 독립하자마자 승인하였다. 한국과 세네갈은 1962년 10월에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73년 5월 세네갈에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세네갈은 주일본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1975년에는 양국간 무역협정이 체결되었다. 1979년 4월 레오폴드 상고르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양국은 문화협정과 경제기술협력협정을 맺었다.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에 일어난 광주민중봉기에 참여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군부독재정권을 수립한 이듬해 세네갈을 방문했다. 1984년에는 세네갈의 디우프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양국은 1984년 7월 투자보장협정, 1997년 9월 청년봉사단 퍄견협정을 체결하였다. 세네갈의 대한국 수입품은 주로 전자제품, 차량, 기계류, 섬유류, 화학제품, 고무, 시멘트다. 대한국 수출품은 인산염, 어류, 육어류 등이다. 세네갈에는 총 51가구 156명이 거주(2004년 현재)하고 있다. 수도 다카르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직원과 상사 주재원, 태권도 사범 등이 체류하고 있다.
조선은 1972년 9월 세네갈과 수교하고, 같은 해 11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1974년 상고르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세네갈은 한때 친조선 경향을 띠기도 했다. 친서방 실리외교를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선 이후 양국간의 활발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8년 2월 조선은 경제사정으로 인해 주세네갈 상주대사관을 폐쇄하였다. 조선은 주기니대사, 세네갈은 주일본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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