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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West Africa)-기니비사우(Guinea-Bissau)

林 山 2010. 2. 1. 11:07

기니비사우 지도

 

기니비사우 공화국(Republic of Guinea-Bissau)은 서아프리카의 소국으로 북쪽으로는 세네갈, 동쪽과 남쪽으로는 기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대서양 연안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져 있는 비자고스 제도(Bijagós Islands, Arquipélago dos Bijagós, Bissagos Islands)도 이 나라의 영토에 속한다. 국토 면적은 약 3만6천백㎢, 인구는 160만명이다. 수도는 1687년 포르투갈의 요새와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건설된 항구도시 비사우(Bissau)다.  

 

기니비사우는 고도가 낮은 저지대로 최고봉은 300m 밖에 안된다. 국토는 크게 남서쪽의 해안 저지대, 내륙 평원지대, 북동부 고지대로 구분할 수 있다. 해안 저지대에는 광대한 맹그로브 습지와 리아스식 해안이 내륙 깊숙이까지 발달되어 있다. 평균강우량은 해안(2500㎜)에서 내륙(1800∼2000㎜)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해안지대에서는 쌀이나 사탕수수 같은 열대작물들이 재배된다. 내륙 평원지대는 북서쪽의 세네갈 국경과 게바 강(Geba river) 사이에 걸쳐 있다. 밀림과 사바나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고온다습한 열대성 적도 기후이다. 연평균기온은 26∼27℃, 평균강우량은 1500∼1800㎜이다. 북동부 고지대에는 본토 중심부의 바파타(Bafat, Bafata) 고원, 북동쪽의 가부(Gabu) 고원, 기니에서 이어지는 국경지역의 푸타잘롱(Fouta Djallon, Futa Jallon) 고원 등이 펼쳐져 있다. 건기(11∼4월)가 뚜렷하며, 평균강우량은 1300㎜ 이하로 떨어진다. 이 지역은 세네갈과 기니의 사바나 지대 연장선상에 있어, 건조기후에 잘 견디는 수수나 기장, 목화 같은 작물들이 주로 재배된다. 강이나 물가에는 악어, 뱀, 사다새(펠리칸), 홍학 등이 많다. 사바나 지역에는 가젤, 표범, 하이에나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기니비사우 해안에는 약 천년 전부터 철기를 사용하는 농경민들이 살고 있었다. 농경민들은 관개와 건지농법을 이용한 벼농사에 뛰어났으며, 수단 서부지역의 주요 소금 공급원이기도 했다. 1200년경 이 지역의 북동부에 들어온 만딩카족은 가부 왕국(Kaabu, Gabu, Ngabou, N’Gabu' kingdom, 1537~1867)을 세웠다. 말리 제국의 창건자 순디아타 케이타(Sundiata Keita, 1217~1255)의 장군 티라마칸 트라오레(Tiramakhan Traore)는 가부 왕국을 정복하고 속국으로 삼았다. 14세기경 이 지역의 대부분이 말리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원주민들은 만딩카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점차 동화되었다. 만딩카족에 저항을 하다 붙잡힌 원주민들은 사하라 횡단 무역로를 통해서 아랍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 갔다. 14세기 중엽부터 말리 제국은 송가이 제국의 성장과 모시족(Mossi, Mosi)의 잦은 공격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말리 제국이 쇠퇴하자 많은 속국들을 상실하였다. 

 

1455년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리케(The Infante Henrique, Duke of Viseu, Prince Henry the Navigator, 1394~1460)에게 고용된 이탈리아 해군 대위 알비세 카다모스트(Alvise Cadamosto, Alvide da Ca' da Mosto, Luís Cadamosto, 1432~1488)는 이 지역을 답사했다. 1479~1480년에는 벨기에 출신 프랑스 플랑드르 상인 외스타슈 드 라 포세(Eustache de la Fosse, Eustache Delafosse)가 이 지역을 여행했다. 1480년대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인 디오고 깜(Diogo Cam, Diogo Cão, 1450~?)은 기니비사우에서 적도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장장 1200km를 항해하여 콩고 강 유역의 바콩고족(Bakongo)의 땅에 도달한 뒤 현재의 앙골라의 기초를 놓았다. 16세기 이 지역의 강과 해안은 최초로 포르투갈 식민지가 되었지만, 내륙지방은 19세기까지 탐험되지 못했다.    

 

1537년 이후 가부 왕국은 실질적인 자치왕국이 되었다. 가부 왕국은 말리 제국의 사회구조와 문화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족장들의 연맹체로 건설된 말리 제국이 귀족회의를 중심으로 정부를 운용한 반면에 가부 왕국은 영토 전역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통치함으로써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갔다. 가부의 지배계급은 전쟁에서 잡은 노예로 인해 부유해진 은얀초(Nyancho)라 불리는 전사 엘리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귀족들은 막강한 권력도 소유하고 있었다. 노예군대를 보유한 귀족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부족간의 잦은 전쟁은 가부 왕국이 급격하게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가부의 왕들은 아랍 상인들과 노예무역을 장악하였다. 포르투갈은 가부 왕국으로부터 공급받은 노예들을 카보베르데 제도(Cape Verde Islands)와 인력수요가 늘어난 아메리카 대륙에 공급했다. 이처럼 가부 왕국의 경제는 전적으로 노예무역에 의존했다.

 

노예무역으로 번영한 왕국의 통치자들은 유럽인들이 내륙으로 진출하여 노예들을 직접 획득한다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의 주둔은 주로 비사우와 카체우(Cacheu) 항구에 국한되었다. 1790년대 영국은 잠시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섬 볼라마(Bolama)에 거점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19세기까지 비사우에서 해안선을 따라 세네갈 남부에 이르는 해안의 영토를 잘 방어했다.   

 

가부 왕국의 군사력은 푸타투로(Futa Tooro, Mussukeba Sane) 왕국의 호전적이고 엄격한 이슬람 풀라족의 지하드가 시작되면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1866년 카부 왕국의 수도 칸살라(Kansala)는 푸타잘롱의 풀라족 통치자 알파 야야 마우도(Alfa Yaya Maudo)와 이슬람 학자이자 투클로르족 군사령관인 엘 하지 우마르 탈(El Hadj Umar Tall, El Hadj Umar ibn Sa'id Tall, 1797~1864)에 충성하는 군대에 포위되었다. 1867년 얀케 왈리(Janke Waali, Mansa Dianke Walli) 가부 왕의 명령으로 불을 지른 화약 저장고의 폭발로 수많은 만딩카족 수비대와 폴라족 공격군이 죽었다. 1867년 가부 왕국은 멸망했다. 멸망한 가부 왕국의 영토는 풀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포르투갈은 기니를 식민지 보호령으로 선포한 뒤 기니비사우를 점령한 포르투갈인들은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포르투갈령 기니(Portuguese Guinea)는 16~19세기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인 노예해안(Slave Coast)으로 유명했다. 노예무역의 시대가 끝나자 1879년부터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를 카보베르데와 분리 통치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새로운 이권을 찾아 내륙지대로 진출하면서 정복해 들어오자 원주민들은 산발적으로 저항했다. 1915년 토착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유학중이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민족주의 정치가 아밀카르 카브랄(Amilcar Cabral, 1924~1973)은 재포르투갈 아프리카인 민족주의 학생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바파타에서 태어난 아밀카르 카브랄의 부모는 카보베르데 출신이었다. 

 

1950년 아밀카르 카브랄은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1956년 아밀카르 카브랄을 중심으로 반 포르투갈 독립운동단체인 기니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African Party for the Independence of Guinea and Cape Verde, PAIGC)이 결성되었다. 기니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PAIGC)의 사무총장을 맡은 아밀카르 카브랄은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에서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을 이끄는 한편, 아고스티노 네토(Agostinho Neto, Agostino Neto, 1922~1979)와 함께 앙골라 해방운동에도 투신했다. 1961년부터 아밀카르 카브랄은 PAIGC 소속 게릴라들을 이끌고 포르투갈령 기니(Portuguese Guinea)의 독립을 위해 포르투갈의 군사, 행정 거점들을 공격하면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에서의 게릴라전과는 달리 PAIGC는 정글 지형의 도움을 받아 빠른 도로 군사적 통제권을 확장해 나갔다. 그들은 쉽게 동맹국 국경에 도달하여 소련과 중국, 쿠바, 그리고 좌파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무기를 공급받았다. 쿠바는 군사전문가와 의사, 기술자들을 파견했다. PAIGC는 전투기 공격에 대비한 대공방어 능력까지 갖추었다.

 

1960년대말 아밀카르 카브랄은 포르투갈령 기니 중 포르투갈군에 점령되지 않은 지역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1972년 아밀카르 카브랄은 독립을 위한 단계적 조치의 일환으로 인민회의(People's Assembly)를 설립했다. 1973년이 되자 PAIGC는 포르투갈령 기니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1월 아밀카르 카브랄은 PAIGC에서 암약하던 포르투갈 정보요원의 도움을 받은 정적 이노센시오 카니(Inocêncio Kani)에게 코나크리(Conakry) 자택 근처에서 암살되었다. 아밀카르 카브랄이 암살되자 그의 이복동생인 루이스 카브랄(Luís de Almeida Cabral, 1931~)이 PAIGC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9월 24일 PAIGC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 사회주의 군사 쿠데타로 에스타두 노부(Estado Novo) 체제가 붕괴되자 기니비사우는 마침내 독립했다. 독립 직후 PAIGC에 대항하여 포르투갈 편에서 싸웠던 흑인들 수천명이 처형되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된 한국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치욕적인 역사와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루이스 카브랄은 독립 기니비사우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기니비사우는 소련과 중국, 북유럽 국가들의 지원하에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PAIGC 내 본토인과 카보베르데인 당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토인들은 카보베르데 출신인 루이스 카브랄이 정권을 독점한 것에 대해 반발했다. PAIGC 지도부 내 본토인과 카보베르데인의 갈등은 권력투쟁으로 치달았다. 1977년 통합추진파인 루이스 카브랄 대통령의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 합병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PAIGC는 여전히 양국 정부를 지배했다. 1978년 7월 프란시스코 멘데스(Francisco Mendes, 1939~1978) 초대 총리가 피살되자 콘스탄티노 테세이라(Constantino Teixeira)가 3개월 동안 총리에 지명되었다. 9월 테세이라 총리가 해임되고 전국인민회의 의장 겸 최고사령관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João Bernardo Vieira, 1939~)가 총리에 임명되었다.

 

1980년 11월 PAIGC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 와중에 본토 출신의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 총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루이스 카브랄 대통령을 축출하고 혁명평의회(revolutionary council)를 수립하였다. 비에이라는 루이스 카브랄을 체포하여 13개월 동안 구금했다가 쿠바로 추방하였다. 비에이라는 혁명평의회 의장과  정부 수반, 군총사령관에 취임하여 기니비사우를 통치했다. 비에이라가 카보베르데인들을 혁명평의회 구성에서 제외시키자 카보베르데는 독자적인 정당을 설립했다. 기니비사우는 1980년 1월 단절했던 카보베르데와의 외교관계를 1982년 6월 재개하였다. 쿠데타 이후 이 나라를 통치해 온 혁명평의회는 민정이양을 위해 1984년 5월 해체되고 국가 최고 통치기구인 국가평의회가 들어섰다. 비에이라는 국가평의회의 설치, 유일 정당인 좌파성향의 PAIGC가 지배하는 일당제 국가, 입법기관인 전국인민회의(National People's Assembly) 구성, 총리제의 폐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비에이라는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1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전국인민회의는 직접선거로 구성된 8인 지역의회가 의원 전체에 대한 지명권을 행사했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평의회는 인민회의 의원 가운데에서 선출된 15인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1991년 5월 비에이라 정권은 헌법을 개정하여 노조결성과 보도의 자유를 보장하고, 복수정당제 의회민주개혁안을 도입했지만 야당에 대한 탄압은 여전했다. 1993년부터 국가평의회를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실시하였다. 1994년 7∼8월 기니비사우 최초의 다당제하에 민주적으로 실시된 대선과 총선에서 PAIGC 후보로 1차전을 통과한 비에이라는 결선투표에서 사회주의부흥당(Social Renewal Party,  PRS)의 쿰바 얄라(Kumba Yala, Mohamed Ialá Embaló, Kumba Ialá, 1953~)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5월 PAIGC는 당대회를 열어 비에이라를 4년 임기의 총재로 재선출하였다. 6월 비에이라는 세네갈 남부의 카자망스 지역의 반군에 대한 기니비사우 군부의 무기 공급설과 관련된 혐의로 과거 독립투쟁의 동지였던 안수마네 마네(Ansumane Mané, 1940~2000) 참모총장을 해임시키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 고위장성들을 진급시키는 인사를 단행했다. 불만을 품은 안수마네 마네와 일부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기도하면서 양측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였다. 

 

1998년 11월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평화협정의 체결로 내란이 종식되었다. 11월 27일 전국인민회의는 비에이라의 퇴진을 요구하는 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999년 2월 총선 실시를 위한 과도거국정부가 구성되었다. 5월 6일 수도 비사우에서 전투를 재개한 반군은 다음날 정부군을 항복시키고 비에이라를 축출하였다. 실각한 비에이라가 포르투갈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포르투갈로 망명하자, 반군 지도자 마네가 주도하는 신정부가 출범했다. 5월 12일 PAIGC 총재 직무대행에 전 수상 마누엘 사투르니노 다 코스타(Manuel Saturnino da Costa, 1942~)가 지명되었다. 5월 14일 말람 바카이 산하(Malam Bacai Sanhá, 1947~)는 대통령 직무대행에 취임했다. 

 

1999년 11월 실시된 대선 1차전에서 1위를 차지한 야당인 사회주의부흥당(PRS)의 쿰바 얄라는 2000년 1월에 치뤄진 결선투표에서 PAIGC의 말람 바카이 산하를 물리치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11월 얄라가 고위 군장교들을 대거 진급시키자 마네는 이에 반대하고 자신을 참모총장으로 선언하였다. 마네는 이미 해산된 국가평의회 의장 명의로 얄라가 임명한 베리시모 코레이아 시브라(Verissimo Correia Seabra, 1947~2004) 참모총장과 에밀리오 코스타(Emilio Costa) 참모차장을 가택연금에 처하고, 부오타 난 바차(Buota Nan Batcha)를 신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11월 23일 마네에 충성하는 군대와 시브라에 충성하는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발하였다. 11월 30일 마네는 비옴보(Biombo) 주의 주도인 퀸하멜(Quinhamel)에서 정부군과 교전 중 사망했다. 2001년 2월 얄라는 연정에 참여했던 야당 RGB 출신 각료들이 집단으로 사임하자, 3월 자신의 PRS 소속 인사를 중심으로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얄라의 집권 후 경제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재정 부족에 따른 월급의 미지급과 노조의 파업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얄라의 소수 정부는 야당의 공세로 인해 정치적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었다. 2002년 11월 얄라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의회 해산을 단행하고 임시내각을 출범시켰다. 

 

2003년 9월 12일 기니비사우 선거관리위원회는 10월 12일로 예정된 총선에 맞게 유권자 등록을 제때 완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불황으로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한 군부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있었다. 9월 14일 시브라 참모총장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국가과도평의회(National Transition Council) 의장에 취임했다. 9월 17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실각한 쿰바 얄라는 향후 5년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9월말 엔리케 로사(Henrique Rosa, 1946~) 임시대통령과 PRS 사무총장 아투르 산하(Artur Sanhá, 1965~) 총리의 민간 과도정부가 출범하였다. 2004년 3월 8일 총선 직전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얄라는 정치활동을 금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PRS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3월 28일 실시된 총선에서 PAIGC는 100석 중 45석을 얻어 1당이 되었으며 PRS는 35석, 사회민주주의연합당(United Social Democratic Party, PUSD)은 17석을 차지하였다. 그외 유권자동맹(Electoral Union, EU)은 2석, 통일인민연맹(United People's Alliance, PAD)은 1석만을 건졌다. 2004년 5월 12일 PAIGC 총재 카를로스 고메스 주니어(Carlos Gomes Junior, 1949~) 총리 중심의 신정부가 출범했다.

 

2004년 10월 임금 미지급으로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시브라 국가과도평의회(NTCl) 의장과 그의 부관 도밍고 바로스(Domingos Barros)을 붙잡아 타살하면서 정국불안이 야기되었다. 2005년 6월 얄라를 실각시킨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얄라는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면서 PRS 후보로 출마했고, 1998년의 쿠데타로 실각했다가 정계에 복귀한 비에이라는 PAIGC 내 한 파벌의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PAIGC 주류는 말람 바카이 산하를 후보로 내세웠다. 1차전에서는 그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비에이라와 산하가 결선에 진출하였다. 2005년 7월 28일 실시된 대선 결선투표에서 한 비에이라가 산하를 물리치고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산하는 수도 비사우를 포함한 두 곳의 선거구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5년 10월 비에이라는 정적인 카를로스 고메스 주니어 총리를 해임하고 정치적 동지인 아리스티데스 고메스(Aristides Gomes, 1954~)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2007년 3월 PAIGC와 PRS, PUSD 3당연합은 국회에서 아리스티데스 고메스 총리의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비에이라는 3당연합이 추천한 PAIGC 지도부의 일원인 마르티노 은다파 카비(Martinho Ndafa Kabi, 1957~)를 총리로 임명할 수 밖에 없었다. 총리직에서 해임된 아리스티데스 고메스는 정당활동도 정지되었다. 카비 내각의 장관은 PAIGC에서 8명, PRS에서 8명, PUSD에서 2명이 지명되었다. 비에이라 측근으로 카비의 3당연합 내각에 입각한 사람은 바시로 다보(Baciro Dabo) 내무장관이 유일한 사람이었다.  

 

기니비사우는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 semi-presidential system, semi-presidential republic) 공화국이다. 대통령은 국가 수반이고 수상은 행정부 수반이다. 과거에는 행정부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1991년 중반부터 다당제 정치제도가 도입되었다. 내전으로 실각했던 비에이라는 6년 뒤인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권좌에 복귀했다. 그는 1980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장장 19년간이나 기니비사우를 통치했던 인물이다. 입법기관인 전국인민회의는 1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4년 임기의 의원은 중대선거구에서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주요 정당은 PAIGC, PRS, 사회민주주의연합당(PUSD), 유권자동맹(EU), 통일인민연맹(PAD) 등이다. 최고사법기관은 대법원으로 9명의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한다. 따라서 대법관들의 판결은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기니비사우는 정부가 경제 전분야를 관리 감독한다. 1974년 기니비사우의 독립 이후 군부와 정치 권력자들은 이 나라의 경제적 토대와 사회질서, 생활수준에 엄청난 손실을 끼쳤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초 사헬 지역을 강타한 가뭄과 메뚜기 재해, 밀수출로 인한 피해 등으로 경제가 더욱 악화되어 기니비사우 정부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98~1999년의 내전과 2003년의 쿠데타는 이 나라의 경제를 다시 한번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그 결과 1인당 GNP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인구의 2/3 이상이 빈곤선 이하에 처해 있다. 기니비사우는 세계 10대 최빈국의 하나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다.

 

2005년부터 남미의 마약조직이 유럽으로 마약을 밀반입하기 위한 중간기지로 기니비사우를 이용하면서 이 나라는 마약밀매 거점이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콜롬비아 마약밀매조직은 소형 비행기로 기니비사우의 섬들에 수 톤의 마약을 투하한 다음 가난한 원주민들을 동원해서 유럽의 해안으로 실어 날라 왔다. 마약경제에 일단 편입이 되고 나면 콜롬비아나 볼리비아 등 남미 국가들처럼 막대한 자금력을 갖춘 마약조직이 기니비사우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기니비사우의 산업은 농업과 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GDP의 60%를 넘는다. 이 나라의 경제는 주로 땅콩, 캐슈너트(cashew nut), 야자열매 등의 농산물과 수산물 가공품의 수출에 의존한다. 농업은 GNP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며, 전체 노동인구의 80%가 이에 종사한다. 전국토의 46%는 목초지, 38%는 삼림으로 10%만이 경작지로 이용된다. 토지의 대부분이 국유화되어 있어 집단농장 형태로 경작되고 있다. 주요 수출 농산물은 땅콩과 코코넛으로 수출액의 40%를 차지한다. 모든 농산물은 국가 대행기관만이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량의 땅콩이 세네갈을 통해 밀수출되고 있다. 주요 작물은 쌀, 카사바, 바나나, 고구마, 사탕수수, 채소류, 멜론 등이다. 곡물 생산의 부족으로 식량을 수입해야 한다. 목축업은 주로 발란타족과 풀라족 이슬람 유목민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다. 주요가축은 소와 염소, 돼지 등이다. 임업은 비실롬(bissilom)이라는 목재가 소량 수출되고 있으나 벌목된 목재의 대부분이 연료로 이용된다. 어업은 소련과 알제리, 프랑스, 기니 기업 간의 합작을 통해서 발전했다. 주요 수산물은 새우와 오징어다. 어업 생산물 수출은 총수출의 약 10%를 차지한다.

 

기니비사우에는 보크사이트와 인산염이 상당량 매장되어 있으나 개발은 미미한 실정이다. 벽돌과 타일 생산에 필요한 점토가 채굴되는 유일한 광물이다. 주요 산업은 야자유, 야자열매, 코프라(copra), 거피 땅콩, 낙화생유 등 농산물 가공업과 냉동생선, 생선통조림 등 수산물 가공업이다. 제조업은 직물, 의류, 맥주, 청량음료, 럼주 등을 생산하는 수준이다. 전기는 주로 석탄과 석유 등 수입 화석연료를 이용한 화력발전에 의존한다.

기니비사우는 대외원조를 통해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나 결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 나라의 차관액수는 국가 총예산의 약 2/3에 달한다. 2004년 세계은행과 IMF, UNDP가 지원한 107백만 달러는 정부 예산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주요 대외원조국은 포르투갈,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유럽연합(EU) 국가들, 사우디아라비아 등이다. 이 나라에는 철도시설이 전혀 없으며, 포장도로는 전국 도로의 10%도 채 안된다. 내륙수로가 국내수송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항구는 비사우이며 근교의 비사랑카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수출은 수입의 20%에 불과한 수입초과국이다. 주요 수출국은 인도, 나이지리아, 에쿠아도르, 우르과이, 태국 등이다. 주요 수입국은 이탈리아, 세네갈, 포르투갈, 중국, 코트디브와르 등이다.  

 

기니비사우의 종족은 매우 다양하며, 각 종족마다 고유의 언어와 문화,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주요 종족은 북부와 북동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풀라족(27%)과 만딩카족(12%), 남부의 해안지역에 주로 살고 있는 발란타족(Balanta, Balante, 27%)과 파펠족(Papel, 10%), 중부와 북부 해안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만자코족(Manjaco, 11%) 등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카보베르데인을 포함한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 혼혈 메스티조들이다. 마카오로부터 온 중국인과 포르투갈인 혼혈과 중국인도 소수 존재한다. 발란타족은 국가개념이 없이 가족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풀라족은 아직도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다.  

 

기니비사우에서는 니제르콩고어족에서 파생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고, 상용어는 포르투갈어에서 파생된 크리올어다. 인구의 14%는 공용어인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44%는 크리올어를 사용한다. 각 부족은 부족 고유의 언어를 쓰는데, 이는 다시 여러 방언으로 갈라진다. 지식인층에서는 프랑스어 시용자도 많다. 포르투갈인이나 메스티조들은 아프리카 언어 중 적어도 한 가지와 크리올어를 구사한다. 주변국이 모두 프랑스어 사용국이어서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도 가르친다. 기니비사우는 프랑코포니(Francophonie, 프랑스어사용국기구) 정회원국이다. 

 

이슬람(수니파)은 인구의 50%가 믿는 주류 종교다. 기니비사우는 이슬람이 주류이고 기독교가 비주류인 국가에서 유일한 루소폰(Lusophone, 포르투갈어 사용국)이다. 무슬림은 주로 풀라족과 만딩카족이다. 인구의 40%는 토착신앙인 애니미즘을 믿는다. 발란타족은 애니미즘을 신봉한다. 인구의 10%는 기독교를 믿는다. 기독교는 대부분 로마 카톨릭이며, 개신교는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기니비사우의 보건위생은 최악의 상태에 있다. 주민들은 결핵, 백일해, 장티푸스, 세균성 이질, 말라리아 등의 전염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유아사망률은 높고, 평균수명은 약 43세로 매우 낮다. 연인구증가율은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낮은 편이다. 인구의 40% 이상이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다. 학교교육은 시설과 교사의 부족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식민지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교육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결과 성인의 문맹률이 63%에 이른다. 기니비사우에서 언론의 자유는 제한을 받는다. 라디오와 TV 방송국, 신문은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 라디오 방송국은 4곳, TV 방송국은 1곳으로 금요일만 방영한다. 정부 공식 기관지인 노 핀차(No Pintcha)는 주 3회 발행한다.

 

기니비사우의 세계적인 민속음악 굼베(Gumbe)는 프랑스령 카리브해 국가들의 주크(zouk)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칼라바쉬(calabash)는 이 나라의 주요 민속악기다. 플로라 고메스(Flora Gomes)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에는 '나 팔라(Nha Fala, 나의 목소리)'와 '포 디 상구이(Po di sangui, 핏방울)' 등이 있다.  

 

기니비사우는 1974년 9월 유엔에 가입했다. 비동맹노선을 기본 외교정책으로 채택한 기니비사우는 소련과 중국, 조선,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해 왔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구미 자본주의 국가를 포함한 비사회주의국가와도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고 있다. 또,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서부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 서부아프리카경제통화연합(WAEMU), 이슬람콘퍼런스기구(OIC), 아프리카연합(AU), 사하라지역 한발 대책위원회(Permanent Interstate Committee for drought control in the Sahel, CILSS)에도 가입하여 이슬람 국가나 아프리카 국가들과도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대만과는 1990년 5월 국교를 수립했다가 1998년 4월 중국과 복교하면서 단교했다. 

 

한국은 1974년 기니비사우가 독립하자마자 승인하고 주로 수산업 분야에서 협력을 증진해 왔다. 1983년 12월 양국은 수교에 합의하고, 이듬해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은 주 세네갈대사가 기니비사우 대사를 겸임하고, 기니비사우는 주 중국대사가 겸임한다. 1985년 6월 비에이라 국가평의회 의장이 방한한 바 있다. 1988년에는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했다. 한국 교민은 15명(2007)이다. 기니비사우 수역에는 라스팔마스에 기지를 둔 한국 원양어선들이 진출해 조업하고 있다. 이 수역에서 잡은 민어(croaker)는 한국에 반입되기도 한다.

 

기니비사우의 친조선 외교정책에 따라 조선은 한국보다 이른 1974년 3월 수교에 합의하고, 1975년 4월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1979년에 루이스 카브랄 대통령, 1982년에 비에이라 혁명평의회 의장이 조선을 방문한 바 있다. 이후 기니비사우는 국제연합이나 비동맹 등 국제회의에서 조선을 지지해 왔다. 1991년 3월 조선은 상주공관을 폐쇄하고 주 기니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기니비사우는 주 중국대사가 겸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