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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West Africa)-카보베르데(Cabo Verde)

林 山 2010. 2. 1. 11:13

카보베르데 지도


카보베르데 공화국(Republic of Cape Verde, República de Cabo Verde)은 아프리카 대륙 서쪽 중부 대서양상에 10개의 큰 섬(유인도는 9개)과 8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세네갈의 베르데 곶(Cape Verde)에서 서쪽으로 약 550km 떨어져 있다. 수도는 상티아구(Santiagu, Santiago) 섬의 프라이아(Praia)다. 면적은 약 4천㎢, 인구는 약 53만3천명(2007년)이다.

 

화산활동과 침식에 의해 생성된 카보베르데 제도(Cape Verde Islands)는 리워드 제도(Leeward Islands, Ilhas de Sotavento)와 윈드워드 제도(Windward Islands, Ilhas de Barlavento)로 구분된다. 리워드 제도는 상티아구, 브라바(Brava), 포구(Fogo), 마이우(Maio) 섬 등으로 구성된다. 이 제도는 대부분 평야와 저지대로 이루어진 평지성 지형이다. 윈드워드 제도는 산투안탕(Santo Antão, Sontonton), 상비센테(São Vicente), 산타루지아(Santa Luzia), 상니콜라우(São Nicolau), 살(Sal), 보아비스타(Boa Vista) 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제도는 험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 침식으로 깊게 골이 팬 산악성 지형이다. 상티아구 섬은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인구도 가장 많다. 포구 섬에서 1951년에 폭발한 활화산인 포구 산은 이 나라 최고봉(2829m)이다. 살 섬과 마이우 섬에는 소금기가 많은 넓은 건호(Playa)들을 볼 수 있다. 가경지는 전체 면적의 10%, 방목지는 7% 정도다. 가축은 주로 소와 양을 방목한다. 

 

카보베르데의 기후는 건조성 열대기후로 연중 큰 차이가 없다. 아프리카 대륙보다 온화한 기후지만 비가 거의 오지 않아 가뭄이 항상 문제가 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24℃(2월 22℃, 9월 29℃)로 7~8월에도 25°C를 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우기는 여름 8~10월이고, 연평균강수량은 261mm(해안 200mm, 산지 1000mm)로 극히 적다. 때때로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하마탄이 태양을 가릴 정도로 짙은 모래안개를 형성하기도 한다. 겨울에는 무역풍이 장기간 불어온다. 살 섬과 마이우 섬에는 건조기후에 강한 식물들이 자란다. 상티아구, 산투안탕, 상니콜라우 섬의 높은 산 아래 경사지에는 사탕수수나 바바나를 재배하는 농장들이 산재한다. 바람이 많이 불어오는 지역에서 자라는 관목들은 대부분 가시가 많고 맛이 쓰며 독성이 있다.

 

카보베르데의 고립성은 많은 고유종 동식물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최근 인간의 개발로 인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지역 고유종 조류에는 알렉산더 칼새(Alexander's Swift, Apus alexandri), 라소 종달새(Raso Lark, Alauda razae), 카보베르데 휘파람새(Cape Verde Warbler, Acrocephalus brevipennis), 이아고 참새(Iago Sparrow, Passer iagoensis) 등이 있다. 고유종 파충류에는 카보베르데 자이언트 도마뱀붙이(Cape Verde Giant Gecko, Tarentola gigas)가 있다. 

 

카보베르데 제도는 고대로부터 서아프리카인과 페니키아인, 아랍인, 무어인들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56년부터 포르투갈인들이 카보베르데 제도를 탐험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섬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1460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디오구 고메스(Diogo Gomes, 1420~1485)와 안토니우 다 놀리(Antonio Noli, Antonio da Noli, 1415~1497)가 마이우 섬과 상티아구 섬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1462년 포르투갈인 정착민들은 상티아구 섬에 상륙하여 지금의 시다데벨라(Cidade Velha, Sidadi, 포르투갈어로 old city의 뜻)인 리베이라그란데(Ribeira Grande)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466년부터 시다데벨라는 기니비사우나 시에라리온에서 실어온 노예들을 브라질이나 카리브해로 반출하는 대륙횡단 노예무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노예들은 포르투갈인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카보베르데로 끌려 오기도 했다. 그 결과 카보베르데에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 혈통의 혼혈인 코리올인들이 생겨 났다. 이 섬들은 1495년까지 포르투갈 국왕의 개인 소유지였다가 그 후 식민지화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대서양횡단 노예무역으로 카보베르데가 번영하자 해적들이 종종 포르투갈 정착민들을 약탈했다. 1541년 해적들은 포르투갈 왕국에서 두번째로 부유한 도시가 된 리베이라그란데(시다데벨라)를 공격했다. 1585년에는 영국의 해군제독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가 리베이라그란데를 약탈했다. 1592년에도 리베이라그란데는 영국의 공격을 받았다. 1712년 프랑스의 공격을 받은 뒤 정착민들은 이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이후 리베이라그란데는 그 중요성이 점차 사라지고 프라이아가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1770년 프라이아는 카보베르데의 수도로 정해졌다. 1876년 이후 노예무역의 쇠퇴로 침체되기 시작한 카보베르데는 가뭄과 기근의 빈발, 부패와 실정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19세기말에는 유럽과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를 잇는 대서양 횡단무역로의 중간에 자리잡은 상비센테 섬의 천연양항 민델루(Mindelo)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민델루 항에는 석탄보급 기지와 해저 케이블 기지가 개설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해운업의 침체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무역의 부진으로 카보베르데의 경제는 침체되었다.

 

1951년 점증하는 카보베르데인의 민족주의를 둔화시키기 위해 포르투갈은 카보베르데의 지위를 직할식민지에서 해외 주로 전환했다. 통치권은 정부협의회와 입법협의회에서 선출된 지사가 행사했다. 당시 공인된 정당은 민족동맹(National Union, UN)뿐이었다. 1956년 카보베르데 출신 농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 민족주의 정치가인 아밀카르 카브랄(Amilcar Cabral, 1924~1973)이 비합법 반 포르투갈 독립운동단체인 기니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African Party for the Independence of Guinea and Cape Verde, PAIGC)을 결성하였다. 카보베르데와 포르투갈령 기니(기니비사우)의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가세한 기니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PAIGC)은 양국의 독립을 위한 반 포르투갈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1960년 PAIGC는 본부를 기니비사우의 코나크리(Conakry)로 옮겼다. 1961년 포르투갈이 섬 주민 전원에게 포르투갈 공민권을 부여했음에도 PAIGC의 무장투쟁은 오히려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3만5천명에 이르는 포르투갈과 아프리카 군대에 저항하는 PAIGC를 지원하기 위해 당시 소련권 국가들은 1만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1972년 PAIGC는 포르투갈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령 기니의 대부분을 통제했지만, 카보베르데의 통치를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1974년 4월 포르투갈 본토의 사회주의 군사 쿠데타로 에스타두 노부(Estado Novo) 체제가 붕괴되자 카보베르데의 독립투쟁도 결실을 맺어 그해 12월 포르투갈과 PAIGC가 공동으로 구성한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1975년 6월 30일 카보베르데는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1975년 7월 5일 카보베르데는 마침내 독립하고 아리스티데스 페레이라(Aristides Pereira, 1923~)가 초대 대통령이 되어 기니비사우와의 국가간 통합을 추진하였다. 양국은 독립을 위해 함께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싸웠고, 그 주류세력은 모두 PAIGC였기 때문에 양국관계는 그만큼 밀접하였다. PAIGC는 양국의 대표를 두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경찰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협력과 조정을 도모해 왔다. 또, 양국은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평의회를 설치하여 통합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인종과 종교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양국이 따로 국제연합(UN)에 가입한 것도 통합에 걸림돌이 되었다. 무엇보다 PAIGC 내 기니비사우 본토 출신자와 카보베르데 출신자 사이의 대립과 항쟁은 통합추진에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1980년 11월 기니비사우 국가위원회는 카보베르데와의 국가간 통합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통합을 반대하는 본토 출신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João Bernardo Vieira, 1939~) 총리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쿠데타로 통합추진파인 루이스 카브랄(Luís de Almeida Cabral, 1931~) 기니비사우 국가위원회 의장(대통령)이 실각하자 양국의 통합추진은 중단되었다. 1981년 카보베르데는 기니비사우와의 통합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PAIGC를 탈퇴한 뒤 독자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한 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African Party for the Independence of Cape Verde, PAICV)을 결성했다. 카보베르데 국회는 기니비사우와 공식적으로 결별하는 헌법을 승인했다. 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PAICV)은 유일 합법정당으로 카르베르데를 통치했다. 1980년대초부터 카보베르데를 덮친 여러 차례의 극심한 가뭄으로 20만 명 이상이 굶어죽고, 주민들 상당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브라질, 미국 등지로 떠났다.
 

다당제 민주주의 실시를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PAICV는 1990년 2월 일당제 통치의 종식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을 위한 비상국회을 열 것을 요청했다. 4월 PAICV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은 수도 프라이아에서 중도보수를 표방한 민주운동(Movement for Democracy, Movimento para a Democracia, MPD)을 결성하였다. 9월 헌법의 개정으로 카보베르데는 PAICV의 일당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 민주주의로 전환하였다. 1991년 1월 최초로 실시된 다당제 총선에서는 PAICV가 23석을 얻은 반면에 신생정당인 민주운동(MPD)은 2/3가 넘는 53석을 차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포구 섬 출신의 PAICV의 페드로 피레스(Pedro Pires, 1934~) 수상이 물러나고 카를로스 베이가(Carlos Veiga, 1949~)가 수상직에 취임하였다. 2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운동(MPD)의 안토니오 마스카레나스 몬테이로(António Mascarenhas Monteiro, 1944~)는 73.5%의 지지를 받아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한 PAICV의 아리스티데스 페레이라를 물리쳐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카보베르데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식민지 통치를 겪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1992년 9월 4일 몬테이로 정부는 신헌법을 공포하여 대통령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국가의 주권적 기관으로 명시하여 권력분립의 원칙을 도입하였다. 1995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 MPD는 72석 가운데 50석을 휩쓰는 대승을 거두었다. 총선에서의 압승에 힘입어 카를로스 베이가는 수상직에 유임되었다. 1996년 2월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한 몬테이로는 80%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9년 11월 지방분권화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지방자치권을 명시하였다. 

 

2001년 1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PAICV가 절대다수인 40석을 차지하여 의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MPD는 30석, 민주변혁당(Party for Democratic Convergence, PCD)과 노동자연대당(Party for Labor and Solidarity, PTS)은 각각 1석씩을 얻었다. 3월 실시된 대선에서 PAICV의 페드로 피레스 후보는 몬테이로 정권에서 수상을 지낸 카를로스 베이가 MPD 후보를 불과 13표차로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PAICV는 MPD의 10년간에 걸친 통치를 종식시키고 다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피레스 대통령은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에서 대 포르투갈 독립투쟁을 이끌어온 투사로 PAICV당 총재를 역임했다. 독립운동 초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이후 사회민주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수상에는 상티아구 섬 출신의 호세 마리아 페레이라 네베스(Jose Maria Pereira Neves, 1960~)가 의회의 지명을 받아서 임명되었다.

 

2006년 1월의 총선에서도 PAICV는 72석 중 과반수인 41석을 확보하여 다수당의 자리를 지켰다. MPD는 29석, 카보베르데독립민주연합(Cape Verdean Independent Democratic Union, UCID)이 2석을 차지했다. 2월의 대선에서는 PAICV의 페드로 피레스와 MPD의 카를로스 베이가가 재격돌하여 50.98%의 지지를 받은 피레스가 간발의 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마리아 네베스는 수상직에 재임명되었다.

 

카보베르데는 대통령중심제 공화국이다. 5년 임기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정부는 수상과 각료, 준각료로 구성되며, 행정부 수반인 수상이 각료회의를 주재한다. 수상은 대통령이 총선결과를 고려하여 의회 다수당과 협의를 거친 후 임명한다. 각료는 수상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입법권은 72명 정원의 단원제 국회에 있다. 임기는 5년이고,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PAICV와 MPD는 카보베르데의 주요 정당이다. 그외 카보베르데독립민주연합(UCID), 사회민주당(PSD), 민주변혁당(PCD), 노동자연대당(PTS) 등의 군소정당이 있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다. 대법원은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의 지명을 받은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카보베르데는 민주주의 원칙의 적용과 인권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모범적인 민주국가 가운데 하나다. 전국민의 70% 이상이 혼혈인 크리올로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 빈발하는 종족 또는 민족간의 대립이나 분쟁 가능성도 거의 없다. 독립 이후 카보베르데는 단지 3명의 대통령과 3명의 수상이 재임하였으며, 1990년 복수정당제 도입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카보베르데는 농업을 중심으로 한 개발도상국이다. 1968년 시작된 극심한 가뭄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식량위기가 자주 발생하여 주민들은 대규모의 국제식량원조로 아사를 모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수량의 부족으로 10개의 유인도 중 산투안탕, 브라바, 포구, 상티아구 등 4개 섬에서만 우기에 경작과 가축사육이 가능하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수요의 90% 이상을 수입해야 한다. 정부는 한발 방지책으로 관개용 우물을 파고, 많은 댐과 제방을 건설하고 있다. 1980년대초 건조기후에 강한 나무를 200만 그루 이상 심었다.

 

농업은 GNP의 약 1/3을 차지하고, 전체인구의 1/3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주식 생산물은 커피, 피마자유, 옥수수, 땅콩, 사탕수수, 감자, 토마토, 바나나, 콩, 카사바, 고구마 등이다. 커피는 품질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바나나, 사탕수수, 커피, 땅콩 등의 환금작물의 재배도 권장하고 있다. 살, 마리우, 보아비스타 섬에서는 소금이 생산된다. 시멘트 제조에 쓰이는 화산암의 일종인 포졸라나(pozzolana)가 소량 수출된다. 어업은 카보베르데의 중요한 산업이다. 민델루(Mindelo)에는 냉장공장이 있고, 수도 프라이아와 살 섬에는 참치 통조림 공장이 있다. 주요 해산물은 다랑어와 바다가재다.

제조업과 건설업은 GNP의 25%를 차지한다. 제조업은 주로 식품가공업과 섬유업이다. 1980년대초 극심한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하는 공장을 건설하였다. 서비스업과 운송업은 GNP의 약 50%를 차지한다. 중부 대서양의 항공로와 해로의 중계지에 자리잡은 카보베르데는 항만과 공항의 시설 개선으로 전략적 가치가 더욱 증대되었다. 또, 관광산업의 발전에도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1980년대초 프라이아에 호텔 단지가 조성되었다. 살 섬과 프라이아의 국제공항 외에 모든 유인도에 공항이 건설되었다. 보아비스타 섬에는 또 하나의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있다. 민델루 항과 프라이아 항 등 주요 항구 외에도 각 섬에는 항구를 갖추고 있다. 카보베르데의 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고 있어 경제발전은 해외의 원조에 크게 의존한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이다. 주요 수출품은 어류, 광물, 소금이며, 수입품은 석유제품, 식품, 기계류이다.

 

인구 구성은 아프리카 흑인과 포르투갈인의 흑백혼혈인 크리올인이 71%, 흑인이 28%, 유럽인은 1%를 차지한다. 크리올인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홀몸으로 건너와 정착한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여성노예와 국제결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교민 60만명과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포함한 카보베르데인 약 200만명이 해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카보베르데인 중 약 1/4만이 모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미국으로 이주한 50만명의 카보베르데인은 주로 북동부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주의 프로비던스(Providence)에서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의 뉴베드퍼드(New Bedford)에 이르기까지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방에 살고 있다. 특히 매사추세츠 주의 브록톤(Brockton)에 가장 큰 카보베르데인촌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8만명, 앙골라에 4만5천명, 세네갈에 2만5천명, 네덜란드에 2만명, 이탈리아에 만명이 살고 있다. 상투메프린시페(São Tomé and Príncipe)에도 큰 규모의 카보베르데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외 마카오, 하이티, 아르헨티나, 북유럽 등지에도 진출했다. 교민이 보내오는 해외 송금액은 GDP의 약 20%에 이를 만큼 중요한 수입원이다. 

 

공용어는 포르투갈어다. 주민들 대부분은 크리올어의 방언인 크리오울로(Crioulo)를 사용한다. 지식인층은 주로 포르투갈어를 쓴다. TV는 2개 채널이 있다. 종교는 로마 카톨릭이 인구의 85%에 이를 정도로 우세하다. 개신교는 나자렛교회(Church of the Nazarene)의 세력이 가장 크다. 그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말일성도지저스크라이스트교회(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모르몬교),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하나님의왕국우주교회(Universal Church of the Kingdom of God),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 복음주의교회(Evangelical Church) 등이 있다. 소규모 바하이교(Bahai) 공동체와 작지만 점차 성장하고 있는 무슬림 공동체도 있다. 토착신앙인 애니미즘도 존재한다.

 

카보베르데의 복지제도는 제한적이나마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국민의료 서비스가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보건위생 서비스의 불량과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전염병과 기생충병의 높은 발병률을 보이고 있다. 특히 결핵, 폐렴, 기관지염, 위장병 환자가 많다. 유아사망률도 높은 편이고, 소아병 환자도 많다. 평균수명은 여자 76.1세, 남자 72.3세다. 교육은 6∼14세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되며, 학령아동의 약 90%가 초등학교에 다닌다. 문자해독율은 성인 79%, 청소년 97%에 이른다.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HDI)는 아프리카에서 9위에 올라 있다. 고등교육을 받으려는 학생들은 해외로 나가며, 특히 포르투갈로 많이 나간다. 해외 취업을 하려는 주민들은 주로 베네수엘라와 브라질로 떠난다. 

 

카보베르데에는 포르투갈의 문화가 아프리카의 문화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 아프리카 문화의 흔적은 카보베르데 주민의 약 50%가 거주하는 산티아고섬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포르투갈 문화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탓에 카보베르데는 풍부한 크리올 문학과 음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문학작품은 해방과 독립에 대한 내용이 많다. 또, 카보베르데인이 미국으로 건너간 '아메리카노'를 다룬 작품도 많다. 대표적인 시인에는 세르지오 프루소니(Sergio Frusoni, 1901~1975)와 유제니오 따바레스(Eugenio Tavares, 1867~1930), B. 레자(B. Léza) 등이 있다. 유명한 작가에는 마누엘 로페스(Manuel Lopes, 1907~2005), 게르마노 알메이다(Germano Almeida, 1945~), 엔리케 텍세이라 데 수사(Henrique Teixeira de Sousa, 1919~2006) 등이 있다. 

 

음악은 포르투갈, 카리브해, 아프리카, 브라질에서 받은 영향이 융합되어 있다. 그리움과 이별을 주제로 한 포르투갈 음악 파두의 선율과 아프리카 퍼커션 리듬이 결합해서 탄생한 모르나(morna)는 애상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노래다. 2002년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는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 1941~)는 전형적인 카보(cabo) 형식의 노래로 유명한 모르나 가수다. 그녀의 음반은 4백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고, 다섯 차례나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퓨나나(funaná)와 바투크(batuque)도 인기 있는 음악이다. 모르나는 부드러운 춤이고, 파사다(passada)는 모르나의 현대화된 버전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퓨나나는 포르투갈과 아프리카 춤이 혼합된 관능적인 춤이다. 바투크와 꼴라데이라(coladeira)는 과격할 정도로 관능적이고 빠른 움직임의 춤이다.  

 

1975년 8월 25일 카보베르데는 비동맹국에 가입하고, 1975년 9월 16일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아프리카해방운동이나 인종차별철폐투쟁 단체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등 온건 비동맹노선을 취하고 있다. 경제회복을 위해 서유럽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등 친서방적 실용주의 외교정책도 구사하고 있다. 포르투갈어권(Lusophone) 국가들과도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카보베르데와 1988년 10월 수교하였으며, 1992년 1월에는 경제기술협정을 체결하였다. 현재 주세네갈 대사가 카보베르데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한국 교민은 1명이다. 조선과 카보베르데는 1975년 8월 16일 정식 국교를 맺었다. 1977년 9월에는 양국간 문화협정, 1982년 5월에는 경제과학기술문화협조에 관한 일반협정을 체결하였다. 조선은 주기니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