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지도
말리 공화국(Republic of Mali)은 아프리카 대륙의 서부에 위치한 내륙국이다. 서쪽으로 세네갈, 북서쪽으로 모리타니아, 북동쪽으로 알제리, 남동쪽은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옛 이름은 오트볼타), 남쪽으로 코트디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 남서쪽으로 기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면적은 약 124만㎢이고, 인구는 약 1400만명(2007)이다. 수도는 말리의 남서부 나이저(Niger) 강 연안에 있는 바마코(Bamako)다.
말리는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 속하여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북부 사하라 사막에는 '공포와 기아의 땅'으로 알려진 광활한 타네즈루프트 평원과 타우데니 평원이 펼쳐져 있다. 동부에는 평균해발고도 600m의 아드라르데지포가(Adrar des Ifoghas) 대산괴가 솟아 있다. 남부와 남서부는 해발 300~600m의 비교적 낮은 고원지대이다. 나이저 강 상류 유역은 말리의 남서부에서 중남부에 이르는 대평원지대를 이룬다. 전체 길이의 1/3이 말리를 관통하는 나이저 강은 내륙 삼각주를 형성한다. 나이저 강 유역의 주기적 범람으로 형성된 삼각주의 비옥한 충적토 평야지대는 말리의 중요한 농경지대를 이루고 있다. 기니의 푸타잘론 고원에서 발원하는 바핑 강과 말리 서부에서 발원하는 바코예 강은 말리의 바풀라베에서 합류한 뒤 북서쪽으로 흘러 세네갈(Senegal) 강의 본류를 이룬다.
말리의 기후는 크게 북부의 사하라 기후대, 남부의 수단 기후대, 사하라 기후대와 수단 기후대 사이의 사헬 기후대 등 세 기후대로 구분된다. 사하라 기후대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매우 건조하다. 기온은 밤의 4℃에서 낮의 47℃까지 오르내려 일교차가 몹시 크다. 사하라 지역에서는 식생을 거의 볼 수 없다. 반건조지대인 사헬 기후대는 연평균강우량 200~500㎜, 평균기온 23~36℃이다. 사헬 지역은 스텝 초원지대이지만 바오밥나무나 이집트 종려나무(doum plam), 팔미라 야자나무 등 건조기후에 강한 나무들도 분포한다. 수단 기후대는 연간 강우량이 500~1400㎜, 평균기온은 24~30℃이다. 수단 지대는 초본식물이 주를 이루는 식생을 보이며, 잡종 마호가니나 케이폭, 바오밥나무 등의 수목도 자란다. 말리에는 사자, 표범, 하이에나, 가젤, 영양, 기린, 코끼리, 악어, 원숭이, 뱀, 조류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나이저 강 북쪽 기슭에 있는 통북투(Tombouctou, Timbuktu) 북부에서 아셀라르인의 유골과 암각화, 조각 등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선사시대 후기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말리 사하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 300년경 말리의 나이저 강 만곡부에서 알제리를 거쳐 모로코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종단 대상로(隊商路)가 개척되었다. 이후 사막 대상로를 따라 사하라 지역과 수단 지역간 종족들의 이동이 매우 빈번해졌다.
4세기경 사하라 사막의 남쪽 세네갈강과 니제르강 상류의 수단 지대, 지금의 서부 말리와 남동부 모리타니아에 만데족(Mande, Mali, Mandingo)의 일족인 소닌케족(Soninke, Sarakole, Seraculeh, Serahuli)은 같은 만데족의 일족인 말링케족(Malinke, Maninka, Mandingo, Manding)을 제압하고 서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제국인 가나 제국(Ghana Empire, Wagadou Empire)을 건설했다. 7세기경 북아프리카 북서부, 즉 마그레브(Maghreb)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이미 가나 제국은 황금의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랍의 역사가이자 여행가인 알 마수디(al-Masudi, 896?∼956)의 저서에도 가나 제국은 황금의 땅으로 묘사되어 있다. 770년경 가나 제국 소닌케 왕조의 카야마간은 지금의 바마코 북쪽 약 322㎞ 지점의 쿰비(Kumbi, Koumbi Saleh)를 수도로 정했다.
10세기 후반 가나 제국은 사하라 남서부, 지금의 통북투(팀북투) 북서쪽에 있던 베르베르족(Berber)의 이슬람 도시 아우다고스트(Audaghost, Awdaghost)를 점령하였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바시 왕은 무슬림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11세기 중엽 전성기를 맞은 가나 제국의 텡카미넨 왕은 지금의 세네갈과 말리, 모리타니아 등을 지배하였다. 낙타가 사막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가나 제국은 사하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노예, 금, 상아, 콜라열매, 고무, 목화, 타조깃털, 꿀 등 가나 제국의 수출품들은 낙타를 이용하여 사막 무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유목민들을 통해서 사하라를 가로질러 모로코의 시질마사(Sijilmasa)를 거쳐 지중해와 아랍세계로 퍼져나갔다. 가나 제국은 주로 아랍에서 소금과 구리, 말, 직물 등을 수입했다. 강대해진 가나 제국은 주변의 작은 부족국가들까지 정복해서 남쪽의 금 생산지로부터 북쪽의 아우다그호스트를 포함한 사하라 사막 남부 도시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1세기 사하라 사막의 산하자족 등 베르베르 유목민들은 주변 부족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동맹을 맺고 알모라비드 왕국(Almoravid dynasty, Al Moravids)을 세웠다. 알모라비운동의 창시자이자 신학자인 압달라 이븐 야신(Abdallah ibn Yasin, ?~1059)에 의해 사령관으로 임명된 아부 바크르(Abu-Bakr Ibn-Umar, ?~ 1087)가 1054년 아우다그호스트, 1076년 수도 쿰비를 점령하면서 가나 제국은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088년 텡카미넨 왕이 수도 쿰비를 다시 수복하였으나 가나 제국이 지배했던 부족들은 수수(Susu, Soussou, Soso), 타크루르(Takrur, Tekrur, Tekrour), 송가이(Songhai), 디아파누(Diafanu), 말리 등으로 분열되었다. 1203년 카니아가(Kaniaga)의 수수족 왕인 수만구루(Sumanguru, ?~?)가 수도 쿰비를 점령하면서 가나 제국은 멸망했다.
가나 제국 후기에 푸타드잘론 동쪽 상(上)니제르의 나이저 강 중, 상류 지역에 있던 캉가바(Kangaba)의 말링케족(만딩고족)은 황금 중개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3세기초 캉가바를 침략한 수만구루는 순디아타 케이타(Sundiata Keita, Sundjata Keyita, Sundiata, ?~1255)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가혹하고 무능한 통치를 일삼았다. 죽음을 모면하고 캉가바의 왕위에 오른 순디아타는 1235년 키리나(Kirina, 지금의 Koulikoro) 전투에서 수만구루와 수수족을 쳐부수고 말리 제국(Mali empire)을 창건했다. 오늘날의 말리 공화국은 바로 이 제국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캉가바를 수도로 정한 순디아타는 남쪽으로 금이 풍부한 본두와 밤부크(Bambuk)로부터 북서쪽으로 디아라를 정복한 다음 나이저 강을 따라 북쪽으로 라크데보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동쪽으로는 나이저 강의 그레이트벤드(Great Bend)까지 정복하였다. 1240년까지 순디아타는 가나 제국의 옛 영토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는 쿰비를 점령한 뒤 파괴함으로써 가나 제국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수도를 제리바에서 나이저 강과 산카라니 강의 합류지점 근처에 있는 니아니(Niani)로 옮겼다. 금이 풍부한 왕가라의 점령으로 말리 제국은 황금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황금무역을 하려는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니아니는 수단 지역의 주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1307년 순디아타의 손자(혹은 종손)인 만사 무사(Mansa Musa, Kan-Kan Musa, ?~1332 또는 1337)가 즉위했다. 만사 무사는 중부 니제르, 지금의 기니에 있던 통북투, 말리 동부에 있던 송가이 제국의 수도 가오(Gao, 옛 Kawkaw), 왈라타(Walata) 등 사하라 남부 도시들을 병합하고, 북쪽으로는 소금이 풍부한 사하라의 타가자(Taghaza)까지 지배했다. 또, 그는 동쪽 국경을 하우사 제국(Hausa states)까지 확대하였고, 서쪽으로는 사하라 남부의 타크루르, 풀라니(Fulani, Peul, Fulbe)인들을 정복했다. 이에 힘입어 이슬람 디율라족(Dyula, Diula, Dioula)과 왕가라족(Wangara) 상인들은 14세기까지 서아프리카 전역에서 왕성한 상업활동을 벌였다. 만사 무사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 말리 제국은 지금의 기니, 말리, 세네갈, 감비아, 코트디부아르, 브루키나파소, 가나 등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만사 무사는 모로코와 이집트 등 다른 지역에 대사들과 제국의 관리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14세기 아랍의 위대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h, 1304~1368 또는 1369)는 말리 제국의 북쪽 국경에서 남쪽의 니아니까지 여행하는 데 약 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1324년 만사 무사는 니아니를 출발하여 왈라타(Oualata, Walata), 투아트(Touat, Tuat), 카이로를 거쳐 메카에 이르는 성지순례에 나섰다. 그의 성지순례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노예와 신하 등 6만여명이 수행했으며, 300파운드의 금을 80마리의 낙타에 싣고 갔다고 한다. 아랍 연대기작가들은 만사 무사의 화려한 행렬이 '아프리카의 태양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사 무사가 카이로를 방문했을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는 맘루크(Mamlūk, Mameluke) 왕조의 위대한 술탄으로 알려진 알 말리크 알 나시르(al-Malik al-Nasir, 1285~1341)였다. 종교적 행사에만 몰두했던 알 나시르는 만사 무사를 마지못해 접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랍의 역사가 알 우마리(Chihab Al-Umari, Al-Umari, 1300~1384)에 따르면 만사 무사는 사치스러운 씀씀이로 카이로에서 금을 물쓰듯이 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이로 시장의 금값이 폭락하는 사태가 일어났으며, 그가 다녀간 12년 후까지도 카이로의 경제가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만사 무사의 메카 순례여행은 말리 제국의 엄청난 부를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슬람 왕국 나아가 유럽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만사 무사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그라나다의 건축가이자 시인인 아부 이사크 아스 사힐리에게 가오와 통북투에 이슬람 사원과 이집트식 학교를 짓도록 명했다. 서아프리카 최초로 붉은 벽돌을 사용해서 지은 가오의 모스크는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로 유명했다. 통북투의 상코르 모스크(Sankore Mosque)는 역사와 코란 신학, 법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어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코르 사원의 활발한 학문 연구를 바탕으로 상코르대학이 세워졌다. 만사 무사는 무역과 상업을 장려하는 한편 학문과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통북투는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여러 무역 중심지들과 연결된 중요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15세기에 들어와 말리 제국은 날로 확장되는 영토에 비해 정치력과 군사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결과 곧 쇠퇴하기 시작했다. 1400년경 통북투-가오 지역의 송가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1431년 투아레그족(Tuareg)은 왈라타와 통북투를 점령했다. 타크루르 왕국과 월로프(Wolof, Jolof) 왕국도 반란을 일으켰다. 지금의 부르키나파소에 있던 모시(Mossi, Mosi) 왕국도 말리 제국을 공격했다. 15~16세기 송가이 제국은 동쪽의 하우사 제국에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옛 말리 제국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지금의 니제르와 나이지리아도 송가이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550년경 말리 제국은 이미 정치적 중요성을 상실했다. 1591년에는 모로코의 사디(Saadi) 왕조 6대 통치자 아흐마드 알 만수르(Ahmad al-Mansur, ?~1603)의 원정군이 이 지역을 침략하여 2세기 동안 통북투는 무어인(Moor)의 지배를 받았다. 1645년 말리 제국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1804~1810년 풀라니족은 나이저 강 중류 세구(Ségou)와 통북투 사이의 마시나(Macina, Masina)에 왕국을 건설했다. 투아레그족은 사하라 사막 남쪽 끝 나이저 강변의 가오, 밤바라족(Bambara)은 세구에 각각 왕국을 세웠다. 1850년부터 프랑스는 아프리카 내륙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1850~1864년까지 투쿨로르족(Tukulor, Tukolor, Toucouleur)의 무슬림 알하지 우마르와 그의 아들 아마두는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 저항했다. 1872∼1898년에는 나이저강 상류에 있던 말링케족 왕국의 사모리 투레가 프랑스군에 저항했다. 두 저항세력을 진압한 프랑스는 1899년 말리를 점령하여 오트세네갈 니제르 식민지로 편입시켰다.
1920년 프랑스는 말리는 프랑스령 수단으로서 프랑스 연방의 서아프리카 해외영토가 되었다. 1945년 모비도 케이타(Modibo Keita, 1915~1977)는 마마두 코나테(Mamadou Konaté)와 함께 수단연합(Sudanese Union, US)을 창설하고 사무총장을 맡았다. 1946년 10월, 후에 아이보리코스트의 대통령이 된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의 주도로 아프리카민주연합(African Democratic Rally, RDA)이 창설되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추구하는 국제적 정치운동이 일어났다. 수단연합(US)은 아프리카민주연합(RDA)에 가입하고 수단연합-아프리카민주연합(Sudanese Union-African Democratic Rally, US-RDA)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 헌법에 따라 프랑스령 수단은 자치를 인정받았다. 그해 실시된 프랑스 하원의원 선거에서 US-RDA가 승리함에 따라 케이타는 프랑스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국회부의장을 역임했으며, 프랑스 내각에서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8년 11월 프랑스령 수단은 식민지에서 공동체 내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1959년 4월 4일 수단은 프랑스령 세네갈과 연합하여 말리 연방을 결성했다. 1960년 6월 20일 말리 연방은 프랑스 공동체의 일원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케이타는 말리 연방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말리 연방의 형태를 중앙집권제로 할 것인지 연방제로 할 것인지를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였다. 1960년 8월 20일 세네갈은 수단과의 정치적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말리 연방에서 탈퇴했다. 1960년 9월 22일 수단 공화국은 독립 말리 공화국이 되었다. 초대 대총령으로 선출된 모비도 케이타는 범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를 주창하면서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US-RDA는 말리 유일 합법정당으로서 다른 정당의 활동은 금지되었다.
1961년 북부에 거주하던 투아레그족(Tuareg)은 자신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정부의 토지개혁에 불만을 품고 무장봉기를 일으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1964년 말리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투아레그족의 반란은 끝났다. 이때 많은 투아레그족이 다른 나라로 피신하였다. 1967년 말리의 경제가 악화되고 US-RDA 내부의 불만이 심화되면서 케이타는 좌익과 우익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1968년 11월 무사 트라오레(Moussa Traoré, 1936~)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들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케이타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무사 트라오레는 민족해방군사위원회(CMLN) 의장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는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말리를 공포의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말리에는 큰 가뭄이 장기간 계속되었다. 트라오레 독재정권은 가뭄의 극복을 위해서 외국이 보내준 막대한 국제원조기금을 횡령하였다. 트라오레는 1974년 입법기관으로서 82명 정원의 국민의회 구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트라오레 군사정권은 5년간 집권을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1976년 9월 트라오레는 유일 합법정당인 말리인민민주동맹(Democratic Union of the Malian People, UDPM)을 결성하고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말리인민민주동맹(UDPM)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1977년 감금되어 있던 케이타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트라오레 정권은 케이타 장례식에 참가한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 많은 사람을 체포하였다. 1978년 2월에는 국방장관과 보안장관을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79년 6월 UDPM 일당 후보들만 출마한 대선과 총선에서 트라오레는 9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트라오레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세 번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한국의 광주에서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이 일어난 1980년 말리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 지도자 압둘 카림 카마라(Abdoul Karim Camara)가 고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오레는 오히려 독재권력을 강화하여 육해공군 총사령관까지 겸하였다. 1985년 UDPM이 장악한 국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임기제한을 삭제함으로써 트라오레에게 종신대통령의 길을 열어 주었다.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혹심한 탄압은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트라오레 독재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는 말리 경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IMF는 트라오레 정권에게 곡물유통의 자유화, 사기업의 육성 등 구조조정을 권고했다. 트라오레 정권은 경제개혁을 시도했지만 국민들의 불만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국민들은 다당제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도 트라오레에게 다당제 민주화의 실시를 요구했다. 국내와 국제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 요구 압력에 굴복하여 트라오레는 신문과 정당의 설립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1989년 비합법 마르크스 레닌주의 말리노동자당(Malian Party for Work, PMT)의 당원으로 공산주의 활동가였던 알파 우마르 코나레(Alpha Oumar Konaré, 1946~)는 일간지 레제코(Les échos)를 창간하고, 2년 뒤에는 말리 최초의 민간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바마칸(Radio Bamakan)을 설립했다. 1990년 문타가 탈(Mountaga Tall, 1956~)의 민주국민회의(National Congress for Democratic Initiative, CNID), 압드라만 바바(Abdramane Baba)와 알파 우마르 코나레가 이끄는 말리민주연맹(Alliance for Democracy in Mali, ADEMA)이 창당되었다. 민주국민회의(CNID)와 말리민주연맹(ADEMA)은 말리학생연맹(Association of Students and Pupils of Mali, AEEM), 말리인권연맹(Malian Association for Human Rights, AMDH)과 함께 트라오레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단결했다.
1990년 말리와 니제르의 투아레그족은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투아레그 반군은 가오에 있는 말리 정부청사를 공격했다. 말리군의 보복은 투아레그족의 전면적인 반란을 야기시켰다. 반정부 투쟁으로 위기에 처한 트라오레 정권은 투아레그족의 반란으로 더욱 곤경에 처했다. 1991년 코나레는 ADEMA를 ADEMA-PASJ(Alliance for Democracy in Mali-Pan-African Party for Liberty, Solidarity and Justice)로 전환하고 US-RDA와 말리민주혁명당(Malian Party for Revolution and Democracy, PMDR), 말리노동자당(PMT), 말리인민민주전선(Malian Popular and Democratic Front, FDPM)과 우산연합을 결성했다. 1991년 3월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반정부 투쟁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공수부대장 아마두 투마니 투레(Amadou Toumani Touré, 1936~)가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나 트라오레를 축출한 뒤 구금했다. 투레는 민주화로 이행하는 기간에 과도국민복지위원회(Transitional Committee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를 이끌었다. 7월 투레는 1992년으로 예정된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담당하고 헌법을 기초할 국민회의를 조직했다.
1992년 1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다당제 민주주의와 분권형 대통령제(semi-presidential system, 준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를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이 통과되었다. 4월 다당제 하에서 실시된 대선에서 코나레는 말리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 결과에 따라 투레는 권력을 깨끗이 민간정부에 넘겨주었다. 이 일로 투레는 '민주군인(The Soldier of Democracy)'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투아레그족의 반란은 코나레의 새 정부가 들어서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나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코나레 정부는 투아레그족을 말리 사회에 융화시키기 위해 키달지구(Kidal Region)를 자치행정구역으로 설정했다.
리비아에서 훈련받고 무장한 투아레그족은 1994년 재차 가오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말리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불러왔고, 투아레그족과 적대적인 송가이족의 간다 코이(Ghanda Koi) 민병대의 창설을 초래했다. 말리는 사실상 내전상태로 돌입했다. 1995년 양측의 온건파는 평화정착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바마코의 중앙정부에 투아레그족의 참여를 확대하고, 말리 남부에 강제수용된 투아레그족의 귀환을 보장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제1차 투아레그 반란은 종식되었다. 1996년 통북투에서 반군이 반납한 무기를 소각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코나레는 1997년 4월 실시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재야세력은 반대당연합(COPPO)을 결성하고 1999년까지 반정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코나레는 민주주의 정착, 인권상황의 개선, 시장경제의 도입, 각종 규제의 철폐, 외국 원조의 유치 등 정치 개혁과 경제의 구조조정을 추진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코나레의 대중적 지지기반 확보에 세불리를 느낀 일부 야당들은 COPPO를 이탈해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참여하였다.
국제무대에서 코나레는 서아프리카의 평화와 통합을 위해서 노력했다. 1999년에는 서아프리카국가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ECOWAS) 의장, 2000년에는 서아프리카통화연합(West African Monetary Union, UEMOA) 의장을 역임했다. 2002년 헌법상의 연임제한으로 코나레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5월 실시된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아마두 투마니 투레는 ADEMA의 수마일라 씨쎄(Soumaila Cissé, 1949~)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3년 7월 코나레는 모잠비크의 마푸토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AU) 정상회의에서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06년 7월 투레는 자치를 요구하는 투아레그 반군과 알제리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말리 동북부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투레는 일부 말리인들로부터 투아레그 반군에 대해 너무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07년 4월 실시된 대선에서 진보민주연합(Alliance for Democracy and Progress, ADP) 후보인 투레는 공화국민주전선(Front for Democracy and the Republic, FDR)의 이브라히마 부바카 케이타(Ibrahima Boubacar Keïta, 1945~) 국민회의 의장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진보민주연합(ADP)은 ADEMA, CNID, 공화국민주연맹(Union for the Republic and Democracy, URD), 재건애국운동(Patriotic Movement for Renewal, MPR) 등 13개 정당이 연합했다. 반면에 공화국민주전선(FDR)은 말리연합(Rally for Mali, RPM), 민족갱생당(Party for National Rebirth, PARENA), 사회민주대표자회의(Social Democratic Convention, CDS-Mogotiguiya) 등 16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했다. 7월의 총선에서도 투레 대통령의 집권 여당연합인 ADP는 160석 가운데 11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FDR은 단 15석을 얻는데 그쳤다.
전직 장군 출신인 투레는 말리 군부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말리는 아프리카에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사하라 사막을 근거지로 한 투아레그족 반군은 반정부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 언제든지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말리는 국토의 사막화와 식수부족, 삼림남벌, 토양침식 등 커다란 환경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말리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기초한 개발도상국가로 혼합경제체제를 택하고 있다. 기업은 대부분 국영기업이며, 1인당 GNP는 세계 최하위국 수준이다. 산업개발과 에너지 개발사업은 거의 외국 정부의 원조나 외국 자본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의 원조기금은 GNP의 거의 1/6에 달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의 가뭄에 인플레이션과 유가상승이 겹쳐 경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농업은 전체 노동인구의 80%가 종사하며, GNP의 50%를 차지한다. 말리는 사막이 많아 농경지는 전국토의 약 2%에 불과하고, 25%는 목초지나 방목지로 이용되고 있다. 농업은 영세하고 가뭄의 피해를 자주 입는다. 주요작물은 목화, 땅콩, 기장, 수수, 옥수수, 쌀 등이다. 가축은 주로 염소나 양, 소 등을 방목한다. 하천에서는 어업도 행해진다. 광업은 주로 금과 대리석, 석회석, 고령토, 암염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철광석과 보크사이트, 니켈, 구리, 망간 등의 광물도 매장되어 있지만 대부분 미개발 상태이다. 공업은 GNP의 약 7%를 차지하며, 노동인구의 5% 가량이 종사한다. 제조업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영세하여 주로 식품가공과 소비재 생산에 국한되고 있다. 서비스업은 GNP의 약 1/3을 차지하며 전체 노동인구의 10%가 종사한다.
말리의 주요 수출품은 금과 면화, 면제품, 동물이다. 주요 수입품은 기계류와 운송장비, 석유제품, 건축자재, 식료품 등이다. 프랑스는 주요 원조국이자 무역상대국이다. 말리는 만성적인 대외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말리에는 흑인과 백인 두 인종이 있다. 아랍-베르베르족의 무어인과 베르베르족의 유목집단인 투아레그족은 백인으로 주로 중부의 사헬 지대에 거주한다. 흑인은 여러 부족이 있으며 주로 농경생활을 한다. 밤바라족은 흑인 최대의 부족으로 전체 인구의 약 36.5%를 차지한다. 밤바라족, 소닌케족(사라콜레족), 카쏭크족(Khassonk, Khassonke), 말링케족 등 만데족은 말리 인구의 50%에 달한다. 다른 주요 부족은 풀라니족(페울족, 풀베족) 17%, 볼타익족(Voltaic) 12%, 투아레그족과 무어인 10%, 송가이족 6% 순이다. 풀라니족은 사헬 지대와 마시나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가나 제국을 세운 부족의 후손인 소닌케족은 사헬 지대 서부에서 농경생활을 한다. 말리 제국을 건설한 부족의 후손인 말링케족은 남서부에 살고 있다. 송가이족은 젠네(Jenne, Dienné)에서 안송고(Ansongo)에 이르는 나이저 강 유역에 거주한다.
도곤족(Dogon)은 반디아가라(Bandiagara) 주변의 고원지대에 살고 있다. 반디아가라의 도곤족 거주지인 파이스 도곤(Pays Dogon)은 독특한 문화로 인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볼타어를 쓰는 보보족(Bobo, 브와족), 세누포족(Senufo, Senoufo), 미니안카족은 주로 동부와 남동부에 거주한다. 말리 국민의 68%는 농촌지역에 거주하며, 5~10%는 유목생활을 한다. 어떤 지역에는 아직도 대물림되는 노예제도가 존재한다. 이로 인해 송가이족과 투아레그족 사이에 종족적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말리의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인종이나 지역에 따라 밤바라어(밤바라족), 풀풀데어(풀라니족), 송가이어(송가이족), 타마셰크어와 아랍어(투아레그족) 등 토착어와 방언도 널리 쓰인다. 무어인은 아랍어를 사용한다. 밤바라어는 국민의 약 80%가 사용한다.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이 90%, 토착신앙인 애니미즘이 5%, 기독교 5% 순이다.
말리에서는 학령아동의 25%만 초등학교에 취학한다. 초중등학교 9년의 교육과정 동안 프랑스어로만 가르친다. 중등학교는 3년 과정이다. 말리의 문맹률은 69%로 매우 높은 편이다. 통북투에는 1300년대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하나인 상코르대학교가 있다. 말리는 아직 의료시설과 의료진이 부족하여 보건환경이 열악한 편이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높은 편에 속한다. 평균수명은 44세로 비교적 낮다. 인구의 50%가 15세 이하이다.
말리는 북쪽의 아랍권과 남쪽의 아프리카 흑인 국가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수세기 동안 서부 아프리카의 문화적 교차로였던 까닭에 독특한 수단 문화가 발전했다. 이 가운데 말링케족과 송가이족의 음악과 춤, 말링케족의 장신구, 밤바라족과 볼타어군계 부족의 목각예술, 도곤족의 가면, 나이저 강 유역의 건축물 등은 말리의 우수한 문화유산이다. 말리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는 60년에 한번 열리는 시구이(Sigui)라는 종교의식이다. 시구이는 시리우스 성(星)이 두 산봉우리 사이에 나타날 때 시작된다. 이 종교의식은 3천년 전쯤 시리우스에서 온 수륙양생의 존재들이 도곤족을 방문했다는 믿음에서 유래한다. 160여년의 전통을 가진 디아파라베(Diafarab'e)의 '소 건너기' 축제도 유명하다. 이 축제는 소떼를 몰고 사막으로 떠났다가 몇 달 뒤에 돌아오는 12월에 열린다. 도곤족은 매년 4월 가면축제(Fete des Masque)를 열어 5일간 의식을 행한다. 가면축제의 기원은 천년 이상이나 거술러 올라간다.
말리의 전통음악은 말리 제국시대부터 내려온 계층인 그리오(griot)들의 구비전승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오들은 자단으로 만든 목이 긴 21현금인 코라를 연주하면서 수렵담에 바탕을 둔 역사적이고 교훈적인 구송시를 노래했다. 말리 최고의 그리오 뮤지션은 살리프 케이타(Salif Keita, 1949~)이다. 그는 13세기 말리 제국을 창건한 순디아타 케이타 황제의 후손으로 아프로 팝(afro-pop) 가수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1967년 살리프 케이타는 말리 정부의 후원을 받는 말리 역사상 최고 인기 그룹인 바마코수퍼레일밴드(Super Rail Band de Bamako)에 참여했다. 1984년 프랑스 파리로 간 케이타는 이슬람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서아프리카의 전통음악에 유럽과 아메리카 스타일을 융합시켰다. 2002년에 발표한 케이타의 앨범인 모포우(Moffou)는 여러 해 동안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2005년에는 케이타는 바마코에 세운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앨범 음벰바(M'Bemba)를 발매하였다.
말리는 독립 초기에 친소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비동맹 중립노선을 걷고 있다. 프랑스와는 기존의 우호관계가 유지되다가 1986년 프랑스 정부가 불법체류 말리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한국과 말리는 1990년 9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주 세네갈 대사가 말리 대사를 겸임하고 있고, 말리는 주 일본 대사가 한국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수교 후 1991년 11월까지 말리의 대한수출은 612만 달러, 대한수입은 50만 달러였다. 1999년에는 케이타 대통령, 2000년에는 모비도 시디베(Modibo Sidibe, 1952~) 외무장관이 방한한 바 있다. 말리의 대한국 수출액은 821만 달러, 수입액은 115만 4천 달러(2000년 현재)이다. 말리의 주요 수출품은 면화이고, 수입품은 면류, 고무, 전기기기, 인조 필라멘트, 기계류 등이다. 말리의 한국 교민은 총 4가구(2006년)이다.
조선은 한국보다 훨씬 빠른 1960년 10월 말리의 독립 직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1년 7월에 무역 및 지불에 관한 협정과 문화협조협정을 체결했다. 1968년 조선은 말리에 상주공관을 개설하고, 1986년 6월에는 농업 및 공업부문 합영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998년 2월 상주공관을 철수하였다. 북한은 주 기니 대사가 말리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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