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키나파소 지도
부르키나파소 공화국(Republic of Burkina Faso)는 서아프리카의 내륙국으로 북쪽과 서쪽은 말리, 남쪽으로 코트디부아르와 가나, 토고, 베냉, 동쪽으로 니제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별칭은 부르키나(Burkina)이다. 1984년 이전의 국명은 오트볼타 공화국(Republic of Haute-Volta) 또는 어퍼볼타(Upper Volta)였다. 오트볼타는 '볼타 강 상류'란 뜻이다. 면적은 27만4200㎢, 인구는 1380만명(2005년)이다. 수도는 와가두구(Ouagadougou)다. 와가두구에는 국제공항이 있으며, 철도를 통해 코트디부아르의 대서양 항구인 아비장(Abidjan)과 연결된다.
부르키나파소는 고원과 평원이 교차하는 지대로 라테라이트(laterite, 홍토) 암석층으로 덮인 광대한 모시 고원이 국토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서부에는 사암질의 고원이 해발 150m의 반포라(Banfora) 단애와 접해 있으며, 북부와 북동부에는 모래벌판 위로 암석구릉들이 솟아 있다. 남서쪽에는 이 나라의 최고봉 테나쿠르 산(Mount Tenakourou, 749m)이 솟아 있다. 중북부에서 발원한 백볼타(White Volta) 또는 나켐브 강(Nakambé River)과 와가두구에서 발원한 홍볼타(Red Volta) 또는 나지논 강(Nazinon River)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가나와의 국경을 지나서 바로 합류한다. 서부에서 발원한 흑볼타(Black Volta) 또는 무훈 강(Mouhoun River)은 남류하다가 가나 내륙에서 백볼타와 합류하여 볼타 강을 이룬 뒤 볼타 호(Lake Volta)로 유입된다. 세 강 가운데 흑볼타만 유일하게 연중 물이 흐른다.
벨리(Béli), 고루올(Gorouol), 구데보(Goudébo), 다르골(Dargol) 같은 지류들은 1년 중 4~6개월 정도만 물이 흐른다. 보보디울라소(Bobo Dioulasso) 남서쪽 40㎞ 지점에서 발원한 코모에 강(Komoé River, Comoé River)은 코트디부아르와의 국경선을 이루며 코트디부아르로 흘러들어간 뒤 남류하여 기니 만으로 유입된다. 나이저 강 퇴적분지는 전체 국토의 27%를 차지한다. 이 나라에는 호수와 연못이 많다. 주요 호수로는 틴그렐라(Tingrela), 밤(Bam), 뎀(Dem) 호수 등이 있다. 그럼에도 북부 지역은 심각한 물부족 현상이 문제가 된다.
부르키나파소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열대기후이다. 기온은 북쪽이 남쪽보다 높고 북쪽으로 갈수록 강수량도 적어진다. 2월 중순~6월까지는 기온이 최고 40℃ 이상 오르는 혹서의 계절이다. 5,6~9월은 우기로 600~900mm의 비가 내린다. 11~2월 중순까지는 건조하고 냉량한 계절로 평균기온은 25.4℃이다. 건기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뜨거운 모래바람인 하마탄(harmattan)이 불어온다.
이 나라에는 북부의 사헬(Sahel), 중부의 수단-사헬(Sudan-Sahel), 남부의 수단-기니(Sudan-Guinea) 등 세 기후대가 있다. 북부의 사헬 기후대는 연간 강우량이 600mm 이하이며, 기온은 밤의 5°C에서 낮의 47 °C를 오르내린다. 건조한 열대성 사바나 초원지대인 사헬 기후대는 대륙의 동쪽 끝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로부터 기니를 지나 대서양까지 길다란 띠처럼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는 사하라 사막과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수단의 비옥한 지역과 경계를 이룬다. 북위 11°3'~13°5'에 걸쳐 있는 수단-사헬 기후대는 강우량과 기온에 있어서 천이지대(遷移地帶)이다. 동부는 연속적인 고원과 산림지대다. 남부의 수단-기니 기후대는 연간 900mm 이상의 비가 내리며, 평균기온은 좀더 서늘하다. 남부는 우림과 사탕수수 농장지대이다.
전국토의 17.66%만이 경작이 가능하며 농경지는 약 0.22%, 82.12%는 초원이나 삼림이다. 천연자원은 망간, 석회석, 대리석, 인산염, 부석(浮石, pumice), 소금, 금 등이 있다. 1950년대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남동부의 다를리국립공원(Parc National d'Arli)에는 영양, 비비원숭이, 가젤, 혹멧돼지, 하마, 악어, 물소, 사자, 코끼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볼타 강 일대에는 아프리카 수면병을 퍼뜨리는 체체파리와 눈이 머는 병을 옮기는 파리매(simulium fly)가 번식하고 있다.
1973년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기원전 12000~5000년 이 지역의 북서부에 깍는 도구나 끌, 화살촉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수렵채집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3600~2600년 농경민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정착했다. 기원전 1500~1000년 정착민들은 철기와 도자기, 연마된 돌 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들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 거주한 최초의 종족은 보보족(Bobo), 로비족(Lobi), 구룬시족(Gourounsi)으로 알려져 있다.
11~12세기 무렵 모시족(Mossi)과 구르마족(Gurma, Gourma, Gourmantche)이 이 지역의 중앙부와 동부에 정착했다. 모시족은 1120년에 텐코도고 왕국(Tenkodogo kingdom), 1333년에 야텡가 왕국(Yatenga kingdom) 등 많은 작은 왕국을 세우고 연방 형태의 모시 제국(Mossi states)을 형성했다. 모시 제국(Mossi empire)은 와가두구에 거주하는 '모르호 나바(Morho, Mors, Mogho, Moro Naba, 대군주)'를 최고의 제왕(帝王)으로 한 강력한 봉건적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주변 이슬람 세력의 침략에 대항하였다. 1333년 야텡가 왕국은 한때 말리의 팀북투(통북투)까지 점령하고 지배하였다. 1441년 모시족은 와가두구 왕국(Ouagadougou, Wagadogo kingdom)을 세웠다. 구르마족은 파다응구르마 왕국(Fada N'gourma kingdom)을 세웠다. 모시족과 구르마족은 프랑스가 점령할 때까지 경계지역을 두고 계속 싸웠다.
15~16세기 북부와 북서부에 거주하던 도곤족(Dogon)은 이곳을 떠나 말리의 반디아가라 절벽지대(Cliff of Bandiagara)에 정착했다. 1690년 나바 자(Naaba Za)가 워고도고 왕조(Wogodogo Monarchy)를 창건했다. 19세기에 들어와 모시족은 노예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19세기경 모시 왕국의 나바 둘루구(Naba Dulugu, 재위 1796~1825)는 이슬람을 왕실의 종교로 삼았다. 야텡가와 와가두구의 모시 왕국은 20세기초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10여년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프랑스 식민지군은 1895년 야텡가 지역을 보호령으로 삼고, 이듬해에는 와가두구 왕국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897년에는 구르마 지역을 보호령으로 삼은 프랑스는 보보족과 로비족의 영토까지 합병했다. 독화살로 무장한 로비족은 프랑스에 저항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필요에 따라 몇 개의 행정구로 나누었지만 각 부족장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시켰다. 1898년 프랑스는 영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골드코스트(黃金海岸, 지금의 가나)와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901년 프랑스가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몇 개의 통치 단위로 나눔에 따라 볼타 분지는 오트세네갈과 니제르에 편입되었다가 1904년 프랑스령 수단(지금의 말리)으로 합병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지역의 아프리카인들은 세네갈군단의 한 대대로 편성되어 유럽전선에 참전하였다. 1915~1916년 동부 말리와의 접경지대에서 볼타-바니전쟁(Volta-Bani War)으로 알려진 프랑스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참담한 패배를 당한 뒤 식민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무장저항군은 투아레그족과 도리(Dori) 지역의 연합집단이 식민지 당국과의 휴전을 종료하자 사헬 북부지역을 파괴하였다.
무장봉기의 재발을 두려워한 프랑스는 1919년 3월 이 지역을 오트세네갈과 니제르에서 분리하여 오트볼타(어퍼볼타)로 명명한 뒤 하나의 독립된 식민지 단위로 만들었다. 초대 총독 프랑수아 헤슬링(François Charles Alexis Édouard Hesling)은 야심찬 도로건설 계획과 수출을 위한 면화의 증산을 장려했다. 강제로 추진된 면화 증산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으며, 세입도 증가하지 않았다. 1932년 5월 프랑스는 오트볼타를 3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야텡가 지방은 프랑스령 수단, 구르마 지방은 니제르, 그밖의 지방은 코트디부아르에 합병시켰다.
코트디부아르는 와가두구와 보보디울라소 뿐만 아니라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가장 큰 지역을 받았다. 프랑스의 이러한 식민지 분할은 제2차 세계대전말까지 계속된 반식민지 저항운동을 약화시키려는 교활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1947년 9월 오트볼타는 프랑스연합(French Union, 1958년 French Community로 개칭)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다. 1947년 뱅상 쥘 오리올(Vincent Jules Auriol, 1884~1966) 프랑스 대통령이 서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모르호 나바는 오트볼타의 부활을 요청하였다. 그해 9월 오트볼타의 부활이 실현되었다.
1957년 웨장 쿨리발리(Daniel Ouezzin Coulibaly, Ouezzin Coulibaly, 1909~1958)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민주연합-볼타민주동맹(Voltaic Democratic Union-African Democratic Rally, UDV-RDA)이 결성되어 대프랑스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볼타민주동맹(UDV)은 국회를 통해 오트볼타의 자치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5월 웨장 쿨리발리는 자치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 2월 모시족 출신 모리스 야메오고(Maurice Yaméogo, 1921~1993)는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9월 웨장 크리발리가 사망함에 따라 모리스 야메오고가 자치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58년 12월 자치정부를 수립한 오트볼타는 오트볼타 공화국(Republic of Haute-Volta)이 되었으며, 프랑스-아프리카 공동체(Franco-African Community)의 회원국이 되었다. 1960년 8월 오트볼타는 마침내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새 헌법에 따라 UDV의 지도자 모리스 야메오고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새 헌법은 5년 임기의 국회와 대통령을 보통선거로 선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야메오고는 권력을 잡자마자 UDV를 제외한 모든 정당을 금지시켰다. 야메오고 정권의 정책실패와 권력층의 독직사건, 권력투쟁이 계속되면서 학생과 노동조합, 공무원들은 대규모 파업과 항의시위로 저항했다.
야메오고는 코트디부아르 초대 대통령 우푸에 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와 가까운 친구였다. 1965년 12월 야메오고는 이중국적(double nationality) 허용 문제로 우푸에 부아니와 회담하기 위해 코트디부아르를 방문하고 있었다. 이때 오트볼타에서는 예산삭감과 봉급인하 등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났다. 1966년 1월 상굴레 라미자나(Sangoulé Lamizana, 1916~2005) 육군 중령은 총파업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켜 야메오고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라미자나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한 뒤 군사통치를 실시했다.
1970년 라미자나 정권은 민정이양의 준비를 위해 4년간의 과도기간을 둔다는 내용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라미자나의 속셈은 군부의 통치를 4년간 더 연장하는 것이었다. 1971년 2월 정치활동을 허용한 라미자나는 장 밥티스트 웨드라오고(Jean-Baptiste Ouédraogo, 1942~)를 총리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였다. 1974년 2월 라미자나는 내각을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다시 금지한 뒤 자신이 총리직까지 겸임함으로써 군사통치를 강화하였다. 1976년 군사정부를 해체한 라미자나는 민간인과 군인이 참여한 준군사정부를 구성했다.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 1949~1987)는 20대 중반에 특수부대 훈련소장에 임명되었다. 상카라는 모로코에서 블레이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 1951~)를 만났다.
전통적으로 강력한 조직력을 갖춘 오트볼타의 노동조합은 라미자나 정권의 독직과 권력남용에 저항했다. 1977년 10월 자미자나 정권은 정당활동 금지조치를 해제하고, 11월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초안을 확정했다. 1978년 새로운 헌법에 따라 총선과 대선이 실시되었다. 대선에서는 라미자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라미자나 정권의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파벌대립은 여전했다. 이에 군부는 반발했고 노동조합은 치열한 저항을 전개했다.
1980년 11월 수도경비사령관인 사예 제르보(Saye Zerbo, 1932~) 대령은 무혈 쿠데타를 주도하여 라미자나 정권을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다. 제르보 군사정권은 1977년의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가진보회복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 of Recovery for National Progress)라는 통치기구를 설치하였다. 제르보 정권도 만성적인 경제난, 노조의 노동운동 탄압, 정당의 불법화, 노조와 학생운동 지도자의 체포 등으로 노동자, 학생, 서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오트볼타는 권력형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극심했고,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되었으며, 자연환경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날로 황폐해져 갔다.
이때부터 토마스 상카라는 오트볼타의 정치와 경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또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착취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에 분노했다. 상카라를 중심으로 한 혁명을 꿈꾸는 일단의 젊은 장교들은 공산주의자장교단(Communist Officers' Group, ROC)을 결성했다. 상카라와 블레이즈 콩파오레, 헨리 종고(Henri Zongo), 장 밥티스트 부카리 링가니(Jean-Baptiste Boukary Lingani)는 공산주의자장교단(ROC)의 핵심인물이었다.
1981년 9월 상카라는 군사정권의 정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첫 각료회의 때 자전거를 타고 참석했다. 1982년 4월 군사정권의 반노동자 정책에 반발한 상카라는 '민중에게 재갈을 물리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Misfortune to those who gag the peopl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사직했다. 1982년 11월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일어나 제르보 군사정권을 전복하고 장 밥티스트 웨드라오고(Jean-Baptiste Ouédraogo, 1942~)를 의장으로 한 인민임시구제위원회(People's Provisional Salvation Council, Council of Popular Salvation, PPSC, CSP, 잠정인민구국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웨드라오고는 민정이양과 헌법개정을 약속하면서도 정당의 활동은 금지하는 모순된 정책을 폈다. 이때 인민구제위원회(CSP) 내의 온건파와 상카라 대위가 이끄는 과격급진파 사이에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다.
1983년 1월 상카라는 총리직에 임명되었다. 5월 프랑소와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1916~1996) 프랑스 대통령의 아들로 아프리카담당고문인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Jean-Christophe Mitterrand, 1946~)의 방문 직후 상카라는 총리에서 해임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헨리 종고와 장 밥티스트 부카리 링가니도 체포되었다. 이들의 체포는 민중봉기를 야기시켰다. 1983년 8월 4일 콩파오레는 차드에서 프랑스군과 전쟁 직전에 있던 리비아군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로 웨드라오고 군사정권을 전복시켰다.
실미-모시족(Silmi-Mossi) 출신의 상카라는 33살의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하여 식민지 잔재의 일소와 부정부패의 타파를 위해 국가혁명위원회(National Council for the Revolution, CNR)를 설치하였다. 모시족 남자와 목축민 풀라니족 여자 사이에 생겨난 종족인 실미-모시족은 모시족 계급사회에서 최하위 계급이었다. 상카라는 자신을 혁명가라 생각했고, 쿠바혁명과 가나의 군사지도자 제리 롤링스(Jerry Rawlings, 1947~) 공군 대위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상카라는 혁명의 이념을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anti-imperialism)로 정의하고 민중민주혁명(Democratic and Popular Revolution, RDP)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상카라는 권력자와 관료들의 부정부패 청산, 개발이란 명목으로 파괴된 국토의 재녹화사업, 소수 재벌이 독점한 부의 재분배, 일부다처제와 여성의 할례금지 등 여성평등의 제도화, 빈민을 위한 교육과 의료의 확대, 기근의 예방에 정책의 최우선을 두었다.
상카라 정부는 국가혁명위원회(CNR)의 정책 시행과 대규모 군중동원을 위해 지역 또는 조직 단위별로 혁명수비위원회(Committees for the Defense of the Revolution, CDRs)라는 대규모 민중조직을 창설하여 무장까지 갖추는 한편, SERNAPO(Service National et Populaire, SERNAPO)를 통해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CDRs와 SERNAPO는 이 나라 군대의 양대 근간을 이루었다. 나중에 몇몇 지역의 부패한 혁명수비위원회(CDRs)는 무기거래를 하는 갱조직으로 전락하였다. 상카라는 모두 여성으로만 구성된 오토바이 경호부대도 창설하였다.
상카라는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에이즈 퇴치에 나서는 한편, 모든 아동에게 홍역과 황열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모든 마을이 자체적으로 의사를 양성하도록 했다. 또, 전국적으로 350여 개의 학교를 신설하여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였으며, 니제르 국경까지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여 대중교통시설을 확충했다. 상카라는 IMF와 세계은행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간주하고 이에 반대하였다. 그는 정부의 관용차였던 메르세데스를 팔고 당시 가장 싼 소형차였던 르노 5S로 교체했으며, 군대의 식량판매점을 시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국가소유로 전환했다. 장관들의 봉급을 25% 삭감하고, 보수가 많은 공무원은 일년 중 한 달치 월급을 국가적 사업에 헌납하도록 했다. 부족장들에 의해 자행되어 온 강제노동과 공납도 금지되었다.
상카라가 취한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인두세의 폐지와 토지의 국유화였다. 토지 국유화로 식량의 자급자족 가능성이 엿보이자 프랑스의 일부 세력은 이를 두려워했다. 상카라는 노동자, 서민, 여성들로부터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는 칭송과 함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부족장이나 중산층 이상의 기득권층으로부터는 반감을 샀다. 특히 부족장들은 전통적인 부족의 생활양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반대자들은 혁명위원회가 합법적 살인기구였으며, 상카라의 정책이 서민들의 삶을 약간 개선했을 뿐 오히려 개혁에 장애물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1984년 8월 4일 임기 1년을 기념하여 상카라는 국명을 어퍼볼타에서 모시어와 디울라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the country of honorable people)'라는 뜻의 부르키나파소로 개명했다. 유명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그는 새 국가를 작곡하고 국기도 새로 만들었다. 그해 10월 혁명가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39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상카라는 연설을 통해 전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타파할 것을 부르짖었다. 전세계적 차원에서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상카라는 쿠바와 연대했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상카라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Sandinista National Liberation Front, FSLN)의 사회주의 혁명운동과 FSLN의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 Saavedra, 1945~)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악명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후 상카라는 제3세계 혁명운동의 지도적 상징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이스라엘 등 강대국들은 제국주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리비아의 무하마르 카다피(Muammar Abu Minyar al-Gaddafi, 1942~)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상카라를 곱게 볼 리 없었다.
1987년 10월 예전의 동지였던 콩파오레 대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정부를 전복하고 상카라를 와가두구 외곽으로 끌고가 사살했다. 이때 12명의 장교도 함께 처형됐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된 상카라는 이름없는 무덤에 서둘러 매장됐다. 인근국가와의 관계악화도 콩파오레의 쿠데타 유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설에는 미국의 CIA가 콩파오레를 사주하여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다고도 하고, 프랑스도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라이베리아의 군벌 프린스 존슨(Prince Johnson, 1959~)은 라이베리아의 진실화해위원회(TRC)에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48~)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이 상카라에 대한 암살음모를 꾸몄다고 증언했다. 상카라가 처형된 뒤에도 CDRs의 일부 세력은 수일 동안 콩파오레 군부에 대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콩파오레는 대통령이 된 후 동료이자 혁명지도자인 헨리 종고와 장 밥티스트 부카리 링가니마저 제거했다.
상카라는 암살당하기 일주일 전 체 게바라 사망 20주년 추모 군중집회에 참석하여 피델 카스트로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면서 '혁명가 개인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사상을 죽일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겨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연설을 했다. 자본주의로 무장한 제국주의의 억압과 착취의 고리를 끊고자 투쟁한 상카라의 신념과 용기는 이상사회를 위한 혁명을 꿈꾸는 아프리카인은 물론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인들은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1925~1961), 남아공의 스티브 비코(Steve Bico)와 함께 상카라를 아프리카의 위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1989년 콩파오레 정권하에서 부르키나베공산주의자동맹(Union of Burkinabè Communists), 혁명군사기구(Revolutionary Military Organization, OMR), 공산주의자투쟁동맹-불꽃(Communist Struggle Union-The Flame), 부르키나베공산주의자그룹(Burkinabè Communist Group)이 연합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민중민주노동운동기구(Organization for Popular Democracy-Labour Movement, Congrès Organisation pour la Démocratie Populaire-Mouvement du Travail, ODP-MT)를 결성했다. 민중민주노동운동기구(ODP-MT)는 2년 뒤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였다. 1990년 콩파오레 정권은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다당제 허용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1991년 실시된 대선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한 콩파오레는 25%의 득표율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1야당은 상카라의 암살에 항의하여 대선을 보이코트했다.
1992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중민주노동운동기구(ODP-MT)는 107석 가운데 70석을 차지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ODP-MT는 전국진보애국자회의-사회민주당(National Convention of Progressive Patriots-Social Democratic Party, CNPP-PSD), 혁명민주주의자그룹(Group of Revolutionary Democrats, GDR), 사회민주운동(Movement for Socialist Democracy, MDS), 자유연대행동당(Party of Action for the Liberalism in Solidarity, PACTILS), 민주연합당(Party for Democracy and Rally, PDR), 독립사회민주주의자연합Rally of Independent Social Democrats, RSI), 사회민주주의자동맹(Union of Social Democrats, UDS), 부르키나애국민주주의자동맹(Union of Democrats and Patriots of Burkina, UDPB), 애국민주주의자그룹(Groups of Patriotic Democrats, GDP), 부르키나베사회주의자연합(Burkinabè Socialist Bloc, BSB)를 합병하여 민주진보회의(Congress for Democracy and Progress, CDP)를 창당했다. 부르키나파소의 역대 총리와 공무원들은 민주진보회의(CDP) 당원이 되었다. 1997년 실시된 총선에서 CDP는 111석 중 101석을 휩쓸면서 압승을 거두었다. 1998년 실시된 대선에서 콩파오레는 재선에 성공하였다.
1998년 12월 인디펜던트(Independent)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노르베르트 종고(Norbert Zongo, 1949~1998)가 콩파오레 대통령의 동생인 프랑소와 콩파오레(Francois Compaoré)의 집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에 대통령 경호실이 개입해 용의자인 운전기사 데이베드 웨드라오고(David Ouedraogo)가 고문을 받고 살해된 사건을 기사화한 뒤 교통사고로 위장된 현장에서 동료 3명과 함께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국경없는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 Reporters Sans Frontières, RSF)가 종고의 몸에서 두 개의 총알을 발견하고 콩파오레와 그의 경호대가 종고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발표하자 부르키나파소 당국은 로베르 메나르(Robert Menard, 1953~)를 추방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국내외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마침내 대통령 경호원들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로베르 메나르는 '범죄를 사주한 자들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도 명령을 이행한 자들만 처벌받는 정의에 만족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2000년 콩파오레 정권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2번에 한해서 연임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2002년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 CDP는 111석 가운데 57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었다. 제1야당인 민주연방연합-아프리카민주연합(Alliance for Democracy and Federation–African Democratic Rally, ADF-RDA)은 17석, 민주진보당-사회당(Party for Democracy and Progress-Socialist Party, PDP-SP)은 10석, 아프리카독립당(African Independence Party, AIP)은 5석, 전국부활당(National Rebirth Party, NRP)은 4석, 부활동맹-상카라주의자운동(Union for Rebirth-Sankarist Movement, UR-SM)은 3석, 민주사회당(Party for Democracy and Socialism, PDS)은 2석을 차지하는 등 군소야당이 난립하였다.
2005년 8월 콩파오레는 차기 대선에도 출마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야당은 콩파오레의 대선 출마가 헌법위반이라고 주장했다. 10월 헌법위원회는 헌법을 개정할 당시 콩파오레는 현직 대통령이었으므로 그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때까지 이 조항은 적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2005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대선을 앞두고 16개 야당은 콩파오레의 낙선을 위해 연합한다고 발표했지만,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005년 11월 실시된 대선에서 콩파오레는 80.35%을 얻어 12명의 경쟁자들을 손쉽게 물리치고 3선에 성공하였다.
2006년 8월 콩파오레는 와가두구에서 토고 정부와 야당간의 협정을 맺도록 하여 토고 내분을 중재하였다. 2007년 3월에는 콩파오레의 중재로 와가두구에서 코트디부아르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 1946~) 대통령과 신군부 지도자인 귈라우메 소로(Guillaume Soro, 1972~)는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2007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CDP는 111석 중 73석을 얻어 다수당의 위치를 고수했다. 민주연방연합-아프리카민주연합(ADF-RDA)는 14석, 공화국동맹(Union for the Republic, UR)은 5석, 부활동맹-상카라주의자운동(UR-SM)은 4석을 차지했다. 상카라주의자동맹당(Union of Sankarist Parties, USP), 민주진보당-사회당(PDP-SP), 민주사회당(PDS)은 각각 2석을 얻었다. 전국부활당(NRP), 아프리카독립당(AIP), 시민대중연합(Citizen's Popular Rally, CPR), 민주사회진보동맹(Union for Democracy and Social Progress, UDSP)은 각각 겨우 1석을 건졌다. 2005년에 민주연방협의회(Convention for Democracy and Federation, CDF)와 부르키나발전연합(Rally for the Development of Burkina, RDB), 부르키나녹색당(Greens of Burkina)이 연합한 민주세력협의회(Convention of Democratic Forces, CFD)는 3석을 얻었다. 민주세력협의회(CFD)에서 탈퇴한 뒤 총선에 참여한 부르키나발전연합(RDB)은 2석을 건졌다.
부르키나파소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블레이즈 콩파오레는 198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계속 장기집권하고 있다. 입법부는 111석 정원의 단원제 국회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주요 정당에는 집권당인 민주진보회의(CDP), 제1야당인 민주연방연합-아프리카민주연합(ADF-RDA), 공화국동맹(UR), 부활동맹-상카라주의자운동(UR-SM) 등이 있다.
부르키나파소는 주로 농업에 토대를 둔 혼합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천연자원의 부족과 혹심한 가뭄의 빈발, 국제시장에서의 농산물 가격 하락 등의 요인에 의해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세계 최빈국이다. 2005년도 UNDP의 인간개발지수상 177개 국가중 175위를 차지했다. 절대빈곤층의 비율이 46.4%, 실업율이 77%(2004년)에 달한다. 높은 실업률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이주한다. 코트디부아르에는 약 3백만명의 부르키나파소인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매년 본국으로 막대한 액수의 돈을 송금한다. 반면에 이들을 수용한 국가들은 부의 유출로 사회적 긴장이 야기되었다. 1967년 가나는 부르키나파소인들을 본국으로 추방하였으며, 2003년에는 코트디부아르 내전으로 30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귀환했다.
농업은 노동인구의 80%가 종사하며,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2% 정도다. 주요 수출작물은 면화와 설탕, 땅콩 등이다. 특히 면화는 2004년도 총수출액의 69%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작물이다. 소, 염소, 양 등의 축산물도 수출되고 있으나 비중은 아주 낮다. 주식작물은 수수, 기장, 옥수수, 쌀, 카사바, 고구마 등이다. 금의 매장량은 약 45만톤으로 연간 약 200-400kg이 생산되고 있다. 푸라에서는 금을 함유한 석영을 채굴하고 있다. 북동부 탐바오(Tambao)에는 1천만톤에 달하는 대규모 망간 매장지가 있다. 1975년부터 미국과 독일, 프랑스, 일본의 자본이 공동으로 탐바오 광산회사를 설립하여 망간을 채굴해 왔으며, 캐나다의 Coronation Int'l Mining Corp사도 망간을 개발에 뛰어들었다. 공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 미만이다. 제조업은 농산물 가공업이 주를 이룬다. 전력생산은 거의 전적으로 수입석유에 의존한다. 서비스업은 GNP의 40%를 차지한다. 통신시설은 열악한 편이며, 도로개량사업에 필요한 경비는 유럽 개발기금에 의존하고 있다.
부르키나파소의 주요 수출품은 면화, 가축, 금이다. 주요 수입품은 자본재, 석유제품, 식품이다. 주요 수출국은 중국과 싱가포르이고, 주요 수입국은 프랑스,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이다. 이 나라는 만성적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국제수지 균형을 위해 해외원조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부르키나파소의 국민은 60개 이상의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2대 인종집단은 니제르콩고어족의 볼타어군(Voltaic languages, 구르 제어)의 언어를 쓰는 종족과 니제르콩고어족의 만데어군(Mande languages, 일상어 디울라어)을 쓰는 종족이다. 원주민인 볼타족 가운데 최대종족은 인구의 50%를 차지하는 모시족(Mossi)이다. 그외 구룬시족(Gourounsi)과 보보족(Bobo), 로비족(Lobi)이 있다. 와가두구에는 지금도 모시족의 워고도고 왕조와 모르호 나바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총독부와 독립 후 행정부에 의해 모르호 나바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모르호 나바의 후손들은 지금도 사회적으로 높은 명성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워고도고 왕국의 현 모르호 나바는 1982년에 즉위한 나바 바옹고 2세(Naaba Baongo II)다.
만데족(Mande, Mali, Mandingo, 만딩고족, 말리족)은 밤바라족(Bambara), 말링케족(Malinke), 소닌케족(Soninke, Sarakole, Seraculeh, Serahuli, 사라콜레족) 등 몇 개의 부족으로 나뉜다. 볼타족과 만데족은 주로 농경생활을 하면서 애니미즘을 믿는다. 유목민과 반유목민인 풀라니족(Fulani, Peul, Fulbe, 페울족)은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세누포족(Senufo)은 서부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과거 프랑스군에 근무했던 15∼20만명의 퇴역군인들은 특이한 사회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볼타어군의 모레어(More language)는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이며, 디울라어(Dioula, Dyula language)는 상거래 통용어이다. 그외 84개의 방언이 있어 의사소통에 지장을 준다. 부르키나파소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1996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종교는 이슬람 60%, 전통신앙 24%, 로마 카톨릭 17%, 개신교 3%의 분포를 보인다. 그러나 속설은 이슬람 50%, 기독교 50%, 정령신앙 100%라고 주장한다. 이슬람은 대부분 수니파이고 소수의 시아파가 있다. 수니파 중 티자니야 수피(Tijaniyah Sufi)파와 살라피(Salafi)파가 중요한 종파다.
부르키나파소의 보건위생 상황은 의료진의 부족과 의료시설의 부족 등 극도로 열악하다. 어린이들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있으며, 상당수의 국민들이 나병, 뇌막염, 과립성 결막염, 주혈흡충병, 사상충증 등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 감염된 인구 비율도 4.2%(2003년)로 비교적 높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동시에 높아 전체인구의 약 50%가 15세 이하이다. 유아사망률도 매우 높다. 평균수명은 52.55세이다.
교육은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이 분류된다. 초등교육은 공식적으로는 의무제지만 중등교육을 받으려면 연 5만CFA(97달러)의 수업료를 내야 한다. 대부분의 부르키나파소인 가정에서는 수업료를 낼 수 없어 학령기 아동의 25%만이 학교에 다닌다. 그래서 문맹률은 76%로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높다. 여학생은 남학생보다 교육과정에서 차별을 받는다. 와가두구에는 1974년에 설립된 와가두구대학교가 있으며, 사립대학도 있다. 보보디울라소에는 공업기술대학, 쿠두구(Koudougou)에는 사범대학이 있다.
부르키나파소의 신문 중 Sidwaya는 정부가 발행하는 일간지이고, Le Pays와 L'Observateur Paalga는 민간인 발행하는 신문이다. TV는 국영인 Television Nationale du Burkina와 민영인 Canal 3가 있다. 라디오는 국영 Radio Burkina와 민영인 Radio Pulsar, Radio Frequence Magique, Radio Salankoloto, Radio La Voix du Paysan 등이 있다. 이 나라의 언론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
와가두구에 있는 국립박물관은 부르키나파소인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 나라는 다양하고 풍부한 각 종족의 전승문화를 갖고 있다. 문학은 구비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프랑스 점령기인 1934년 딤-돌롭솜 웨드라오고(Dim-Dolobsom Ouedraogo)는 모시족에서 구전되는 역사의 기록인 '잠언과 고찰, 모시족의 수수께끼와 사상(Maximes, Thoughts and Riddles of the Mossi)'을 썼다. 나지 보니(Nazi Boni, 1909~1969)와 로저 니키에마(Roger Nikiema)도 구비전승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다. 1962년 나지 보니는 식민지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브와무족(Bwamu) 탐험기인 '지난 날의 추억(The Twilight of the Bygone Days)'을 썼다.
연극은 전통연희와 결합되어 있다. 많은 부족들의 전통의식에는 가면춤이 등장한다. 모시족은 2m가 넘는 영양의 가죽으로 만든 가면으로 유명하다. 보보족은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사용하는 적, 백, 흑의 줄무늬가 들어간 나비가면이 유명하다. 로비족은 소년들의 통과의례 의식인 됴로(Dyoro)가 유명하다. 식민지시대에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서양 스타일의 연극이 보편화되었다. 독립 이후에는 시골사람들의 교육과 여흥을 위해 토론연극(forum theatre)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 나타났다.
아프리카 영화산업에 있어서 이 나라의 영화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와가두구에서는 1969년부터 2년마다 2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에 '제3세계의 칸영화제'라 불리는 페스파코영화제(FESPACO : Festival of Pan-African Cinema in Ouagadougou)가 열리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의 영화제인 페스파코영화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만든 영화들만 상영한다. 해외에 흩어져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영화도 포함된다. 영화제의 해 4월의 마지막 주에 보보디울라소에서는 전국문화주간(La Semaine Nationale de la Cluture)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에서는 각종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은 물론 현대적인 음악, 무용, 연극이 공연된다.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도 각 종족은 수도인 와가두구에 모여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공연한다.
부르키나파소의 외교정책은 비동맹 중립노선이다. 1960년 9월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비동맹가입 1973년 9월에는 비동맹회의에 가입했다. 콩파오레 정권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프랑스 등 서방의 원조를 요청하는 등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과 부르키나파소는 1962년 4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70년 7월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1970년 3월 양국은 의료기술협력협정, 1978년 10월에는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한국은 1976년 이래 의약품이나 농기계 등의 물자를 무상으로 원조하고 있다. 한국은 주코트디부아르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부르키나파소에는 교민이 없으며, 공관원과 태권도사범 등 10명(1997년)이 체류하고 있다.
조선과 부르키나파소는 1972년 10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74년 7월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부르키나파소는 1980년대말까지 친조선노선을 유지했다. 현재는 비동맹 중립노선에 따라 한국과 조선에 대해 등거리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아프리카 바로 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아프리카(West Africa)-라이베리아(Liberia) (0) | 2010.02.01 |
---|---|
서아프리카(West Africa)-시에라리온(Sierra Leone) (0) | 2010.02.01 |
서아프리카(West Africa)-니제르(Niger) (0) | 2010.02.01 |
서아프리카(West Africa)-말리(Mali) (0) | 2010.02.01 |
서아프리카(West Africa)-기니(Guinea) (0) | 2010.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