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바로 알기

서아프리카(West Africa)-라이베리아(Liberia)

林 山 2010. 2. 1. 12:47

라이베리아 지도

 

라이베리아 공화국(Republic of Liberia)은 북서쪽으로 시에라리온, 북쪽으로 기니, 동쪽으로 코트디부아르와 국경을 접하고,  560km에 이르는 남서 해안은 대서양에 면해 있다. 수도는 몬로비아(Monrovia)다.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절반 정도인 약 11만천3백㎢, 인구는 약 375만명이다. 라이베리아는 노예해방으로 자유가 된 아프리카계-미국인 노예들((Americo-Liberians)에 의해 세워진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다. 

 

라이베리아의 해안평원은 석호(潟湖)와 홍수림(紅樹林)이 산재한다. 북동부 내륙지방은 경사가 완만한 낮은 구릉지대로 열대우림이 우거져 있다. 북동부 내륙의 고원지대에는 해발 180~600m의 산들이 여기저기 솟아 있으며, 최고봉은 위테베 산(Mount Wuteve, 1,440 m)이다. 북서부에는 서아프리카 산맥(West Africa Mountains)과 기니 고원(Guinea Highlands)이 분포한다. 기니, 코트디부아르와 국경을 이루는 님바 산(Mount Nimba, 1,752m)의 게스트 하우스 힐(Guest House Hill)에는 이 나라 최고봉(1,850m)이 있다. 주요하천은 대부분 북동쪽에서 남서쪽의 대서양으로 흐른다. 코트디부아르와 국경을 이루는 카발라 강(Cavalla River)은 부분적으로 배가 다닐 수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적도 기후로 고온다습하다. 5~10월의 우기에는 많은 비가 내리며, 11~4월은 건기로 겨울과 같다. 사헬 지대는 삼림벌채와 가뭄으로 인해 건기가 증가하고 있다. 건기에는 사하라의 하마탄 열풍으로 모래먼지가 많이 날아온다. 연평균기온은 북부 고지대의 18℃에서 해안지대의 27℃를 오르내린다. 연강우량은 해안지대가 5,100㎜, 내륙지방은 1,800㎜ 정도다. 국토의 약 40%를 차지하는 열대 우림지대에는 쇠나무, 캠우드(Camwood), 위스모, 마호가니 등의 나무가 자란다. 이 나라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에는 원숭이, 침팬지, 영양, 뱀, 악어 등이 있으며, 코끼리나 들소, 표범은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경작지는 국토의 약 4%에 불과하며, 지하자원은 철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12~16세기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많은 부족이 현재의 라이베리아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14세기 말리 제국이 무너지자 만데족(Mande, Mali, Mandingo)의 일족인 바이족(Vai)은 이 지역으로 이주를 강요당했다. 이들은 이 지역의 해안지방에 정착하였다. 16세기 말리 전사(Malian Soldiers) 출신 마네족(Mane, Manneh)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로부터 이 지역을 침략했다. 마네족의 침략으로 크루족의 일족인 그레보족(Grebo)은 해안지방으로 밀려났다. 만데족의 일족인 마네족은 정복지와 피정복민들을 분할하여 마네족 추장들이 통치하도록 하였다. 대추장은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Grand Cape Mount)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후 바이족은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내륙지방에 거주하던 크루족(Kru)은 바이족이 자신들의 영토로 이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마네족과 크루족은 동맹을 맺고 바이족의 이주를 저지하였다. 결국 바이족은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 지역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인들과 무역을 시작한 크루족은 나중에는 노예무역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많은 크루족이 고향을 떠나 농장이나 건설현장에서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상당수의 크루족은 수에즈 운하 또는 파나마 운하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크루족의 일족인 그레보족(Grebo)은 마네족 침략 당시 해안지방으로 쫓겨난 부족이었다. 

 

1461년 초 이 지역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서아프리카산 생강과 식물의 매운 씨인 일명 '그레인즈 오브 파라다이스(Grains of paradise, Guinea grains, Guinea pepper)', 즉 멜리구에타 후추(melegueta pepper, aframomum melegueta)가 풍부하게 나는 것을 보고 곡물해안(Grain Coast, 포르투갈어로 Costa da Pimenta)으로 명명했다. 1602년 네덜란드인들이 그랜드 케이프 마운트에 교역소를 세웠지만 1년 뒤에 파괴되었다. 1663년 영국인들이 곡물해안(그레인 코스트)에 교역소를 설치했다.  

  

1800년대부터 미국은 노예제도 폐지의 해결책으로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해방노예, 일명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Americo-Liberians)들을 해외 정착지에 이주시킨다는 생각을 키기 위해 아프리카에 식민지 건설을 계획했다. 1783년 미국에서는 독립혁명 이후 노예제 폐지와 혁명전쟁으로 촉발된 해방노예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1790년 미국의 전체인구는 400만명, 흑인은 80만명, 흑인 해방노예는 약 6만명이었다. 1800년경에는 미국의 인구는 7천2백만명, 흑인 해방노예는 약 10만명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주류 백인들은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백인들은 자신들이 짐승처럼 취급하던 흑인들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백인들에게 노예가 아닌 백인과 동등한 흑인은 필요없었다. 백인들이 생각해낸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의 영토 밖에 정착지를 마련해서 자유흑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이 해방노예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식민지 시에라리온을 세운 것처럼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도 해외에 식민지를 세워 자유흑인들을 이주시키자는 정책을 제안했다. 말하자면 자유흑인 청소정책인 셈이었다.

 

1816년 버지니아의 정치인 찰스 머서(Charles Fenton Mercer, 1778~1858)와 뉴저지 출신 장로교회 목사 로버트 핀리(Robert Finley, 1772~1817) 등 정치인과 종교지도자들의 주도로 워싱턴 D.C.에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ACS)가 설립되었다. 1820년 1월 88명의 자유흑인과 3명의 백인 직원들을 태운 미국식민협회(ACS)의 배가 뉴욕을 떠나 서아프리카로 향했다. 1821년 12월 ACS는 이 지역의 통치자인 피터 왕(King Peter)으로부터 몬로비아 근처 세인트 폴 강(Saint Paul River) 입구의 36마일에 이르는 좁고 긴 메수라도 곶(Cape Mesurado)을 구입했다. 초기의 식민지 점령자들은 풍토병, 혹독한 기후, 음식과 의약품의 부족, 주택 부족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토착 원주민들은 미국인과 미국 출신 흑인들의 정착과 영토확장에 분노했다. 말링케족(Malinké) 등 토착민들은 식민지 점령자들에 대한 격렬한 공격에 나섰다.   

 

1822년 감리교 목사 제후디 아시문은 미국의 이주민 식민지 지도자가 되었다. 1824년 라이베리아로 명명된 식민지는 수도를 몬로비아로 정했다. 1833년 메릴랜드 식민지협회(Maryland State Colonization Society)의 후원으로 라이베리아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인 케이프 팔마스(Cape Palmas, 지금의 Harper)에 미국의 해방노예들이 정착했다. 1835년 5곳 이상으로 늘어난 미국의 식민지는 점차 해안을 따라 확장되었다.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재정적 부담으로 사실상 파산직전에 이른 ACS는 아메리카라이베리안인들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기 시작했다. 1839년 식민지 명칭을 라이베리아 연방으로 변경했다. 1841년 흑백혼혈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인 조셉 젠킨스 로버츠(Joseph Jenkins Roberts, 1809~1876)는 라이베리아를 통치하는 최초의 흑인 총독이 되었다. 1842년 원주민들에 의해 파괴된 식민지를 제외한 나머지 4개의 식민지는 라이베리아로 합병되었다. 1846년 ACS는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에게 독립을 선언하도록 지도했다.

 

1847년 조셉 로버츠는 라이베리아가 자유와 독립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3천명에 불과했다. 로버츠는 국경을 확장하고 서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856년 로버츠가 물러나자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스티븐 알렌 벤슨(Stephen Allen Benson, 1816~1865)이 2대 대통령이 되었다. 같은 해 그레보족(Grebo)과 크루족(Kru)은 미국의 마지막 아프리카 식민지인 메릴랜드 공화국(Republic of Maryland)이 노예무역을 방해하자 그 보복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1857년 라이베리아 의용군의 개입으로 그레보족과 크루족은 격퇴되고 메릴랜드 공화국은 라이베리아의 한 주로 병합이 되었다. 같은 해 케이프 팔마스에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과 토착 원주민 그레보족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에 합병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864년 내륙과 해안의 부족들은 벤슨 정권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같은 해 공화당(Republican Party, RP) 소속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다니엘 워너(Daniel Bashiel Warner, 1815~1880)가 3대 대통령이 되었다. 유럽의 상인들은 1856년~1864년까지 자국정부의 지원하에 수출과 수입 관세를 교묘하게 회피함으로써 라이베리아 정부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1868년 공화당(RP) 소속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제임스 페인(James Spriggs Payne, 1819~1882)이 4대 대통령이 되었다. 1869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미국휘그당(United States Whig Party)의 영향을 받아 유일 합법정당인 트루휘그당(True Whig Party, Liberian Whig Party, TWP, LWP)을 창당했다. 1870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으로 트루휘그당(TWP)의 지도자였던 에드워드 제임스 로예(Edward James Roye, 1815~1872)가 5대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듯이 TWP 일당 독재정권도 헌법에 라이베리아 토착 원주민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한 조항을 명문화했다. 미국에서의 흑백간 인종차별이 라이베리아에서는 흑흑간 인종차별로 나타났다.

 

5%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미국 출신 흑인)들에 의해 통치를 받던 95%의 토착민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미국 출신 흑인들은 라이베리아에 미국 사회를 그대로 들여왔다. 라이베리아에 미국 남부와 유사한 농장과 교회, 저택을 건설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영어로 말하고 미국식으로 생활하면서 자녀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이들은 일제시대 친일 조선인들이 조선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현재 친일 조선인들의 후손인 친미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동일한 행태를 보여주었다. 

 

라이베리아 최상류층과 지배층을 형성한 미국 출신 흑인들은 토착민들을 2등 시민으로 취급하고 경멸하며 억압했다. 이들은 토착 원주민들을 끊임없이 미국식으로 변화시키려고 기도했으며, 서양의 문화와 서구적 가치들을 전통사회에 주입하려고 노력했다. 일부 토착민들은 영어를 배우고 개신교로 개종했지만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고유전통과 부족언어를 지켰다.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말링케족 등 토착민들은 지속적인 시위와 폭동, 무력투쟁으로 저항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지배계급인 라이베리아아메리카인들 편만 들었다. 미국이 한국의 해방공간에서 일방적으로 민족주의와 보수의 탈을 쓴 친일민족반역자들의 편만 들었듯이 말이다.

 

1871년 로예는 공금횡령 혐의로 고발을 당했으면서도 임기를 2년 더 연장하려고 기도했다. 10월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로예는 재판에 회부되자 야밤도주하였다. 그해 11월 TWP 소속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부통령 제임스 스미스(James Skivring Smith, 1825~1884?)가 6대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1872년 2월 로예는 잔인하게 암살되었다. 로예가 암살되자 초대 대통령을 지낸 RP의 지도자 조셉 로버츠가 대선에서 승리하여 7대 대통령이 되었다. 1875년 9월 메릴랜드 주 케이프 팔마스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영국은 공화당과 경쟁관계에 있는 당에 무기를 공급하였다. 1876년에는 RP 후보 제임스 페인이 8대 대통령이 되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마지막 RP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3월 페인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케이프 팔마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878년 TWP 소속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앤소니 윌리엄 가디너(Anthony William Gardiner, 1820~1885)가 9대 대통령이 되었다. 가디너는 외국과의 무역을 증진시키고 외국의 투자를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 해부터 영국과 프랑스, 독일은 식민지 확장을 위해 라이베리아에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노골적으로 영토의 할양을 강요했다. 1883년 가드너가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자 TWP 소속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부통령 알프레드 프랜시스 러셀(Alfred Francis Russell, 1817~1884)이 10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884년 러셀이 잔여임기를 마치고 실시된 대선에서 RP와 TWP의 지명을 동시에 받은 힐러리 존슨(Hilary Richard Wright Johnson, 1837~1901)이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존슨은 자신이 트루휘그당 소속임을 선언하였다.    

 

1892년 1월 라이베리아의 그랜드바싸 주(Grand Bassa County) 에디나(Edina)에서 출생한 TWP의 조셉 제임스 치즈맨(Joseph James Cheeseman, 1843~1896)이 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는 케이프 팔마스 바로 건너편의 아이보리코스트를 양도하라고 강요했다. 라이베리아의 국경선은 유럽 강대국간 협상을 통해 획정되었다. 1896년 치즈맨이 사망하자 TWP 소속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윌리엄 데이비드 콜맨(William David Coleman, 1842~1908)이 13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콜맨은 라이베리아의 미래가 자원의 개발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1900년 12월 TWP 소속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개레스톤 윌모트 깁슨(Garreston Wilmot Gibson, 1832~1910)은 68세의 나이에 14대 대통령직에 올랐다. 콜맨과 생각이 같았던 깁슨은 라이베리아개발특허회사(Liberian Development Chartered Company, Union Mining Company)에 내륙지방의 광물탐사를 허가했다.

 

1904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출생한 TWP 소속의 아더 바클리(Arthur Barclay, 1854~1938)가 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심각한 재정위기로 영국 은행과 이 지역 독일 상인들에게서 고리대 차관을 들여온 지 10년 후인 1906년경 라이베리아는 마침내 파산하고 말았다. 1910년부터 독일은 라이베리아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1912년 미, 영, 불, 독 등 서방 4대 강대국이 14년간 라이베리아의 재정을 통제한다는 전제하에 미국은 170만 달러의 국제차관을 제공하여 파산을 수습했다.

 

1912년 라이베리아의 그랜드바싸 주 뷰캐넌(Buchanan)에서 태어난 TWP 소속 다니엘 에드워드 하워드(Daniel Edward Howard, 1861~1935)가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하워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라이베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연합국을 지지했다. 1914년 8월 5일 라이베리아는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독일과의 무역이 중단되자 라이베리아의 관세수입은 대폭 감소했다. 게다가 독일 해군이 잠수함으로 대서양을 봉쇄하면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의 무역도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재정상태가 크게 악화되었다.   

 

미국은 1915년까지 원주민들의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지배자들을 지원했다. 영국은 국경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프랑스가 계속 국경을 침범하자 1919년 라이베리아가 통치할 수 없는 오지 5,180㎢를 넘겨주는 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1882~1919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라이베리아의 영토를 합병하거나 합병을 위협할 때마다 군함을 보내 독립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다. 1920년 프리타운의 크리올 출신의 TWP 후보 찰스 킹(Charles Dunbar Burgess King, 1875~1961)이 1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26년 경제가 악화되면서 라이베리아가 외채를 지불할 능력이 없게 되자 미국의 파이어스톤 타이어 고무회사(Firestone Tire and Rubber Company)는 5백만 달러의 차관을 주는 조건으로 하벨(Harbel)의 토지 40만㏊를 양도받아 2만5천명의 흑인을 고용하는 세계 최대의 고무농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차관 도입은 이 나라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1927년 찰스 킹은 역사상 가장 심한 부정선거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대선에서 60만표를 얻어 토마스 포크너(Thomas J.R. Faulkner)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인 명부에 등록된 유권자는 단 만5천명 뿐이었다. 토마스 포크너는 토착 원주민들을 모집해서 노예로 삼거나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는 혐의로 찰스 킹과 트루휘그당 정부를 국제연맹에 고발했다. 포크너의 고발에 따라 국제연맹은 영국의 법학자 쿠스버트 크리스티(Cuthbert Christy)를 위원장으로 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에 착수했다.

 

1930년 국제연맹은 라이베리아 정부가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이익을 탈취하는 등 조직적인 억압과 위협을 가해 왔다고 보고함으로써 포크너의 고발이 대부분 사실임이 밝혀졌다. 같은 해 라이베리아 국회는 국제연맹의 조사결과를 순순히 인정한 찰스 킹을 탄핵했다. 찰스 킹이 탄핵으로 물러나자 TWP 소속의 에드윈 제임스 바클리(Edwin James Barclay, 1882~1955)가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5대 대통령 아더 바클리의 조카였다. 1930년대 라이베리아는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폴란드 투자자들은 경제활동에 대한 양보협정을 체결했다. 이 무렵 라이베리아는 재정적으로 또 한번 파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천연고무가 중요해지자 미국은 1942년 라이베리아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수도 몬로비아에 국제공항과 자유항구, 도로 등을 건설해 주었다. 미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라이베리아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 대가로 라이베리아는 미국과 연합국에게 전략상품인 천연고무의 공급을 보증했다. 또, 라이베리아에 미군의 수송과 군수품 공급을 위한 미군기지를 설치하도록 허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내륙의 토착 원주민 수천명은 직업을 찾아 몬로비아 등 해안으로 이주했다.

 

1943년 5월 실시된 대선에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의 후손으로 TWP 소속 후보 윌리엄 V.S. 터브먼(William Vacanarat Shadrach Tubman, 1895~1971)이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터브먼은 1944년 1월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미국은 터브먼에게 연합국편에 서도록 압력을 가하는 한편 라이베리아에서 독일 시민과 사업가들을 추방하도록 압박했다. 독일 자본이 철수하자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1945년부터 터브먼이 경제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라이베리아의 천연자원을 외국의 자본에 개방하자 수백만 달러가 유입되었다.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정부 세입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달러화는 대부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권력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그 결과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에 대한 토착 원주민들의 적개심은 높아만 갔다.

 

터브먼은 토착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과 재산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원주민들도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국고수입의 50% 이상을 전국의 공교육 확립에 투자하는 등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속임수였다. 터브먼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으며,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터브먼 정권의 본질은 친미 독재정권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Soviet Union)을 두 축으로 한 동서 양진영의 냉전시대가 개막되자 미국은 라이베리아를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터브먼은 미국에 잘 협조했다. 그 대가로 라이베리아는 1946년 이후 25년간 주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10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받았다. 라이베리아는 UN에서 무조건 미국을 지지했다. 심지어 추악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Vietnam War)도 지지했다. 미국은 라이베리아군의 훈련을 위해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한편 장교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교육을 받게 했다. 유럽의 정치인들도 터브먼의 호의를 사기 위해 노력했다. 라이베리아의 권력자들은 소련과 동구권 강대국들과도 유대관계를 맺었다. 1948년부터 시작한 선박의 선적 등록사업은 라이베리아의 세입을 크게 증가시켰다.   

 

1960년대 들어서 미국은 외교와 정보수집을 위해 라이베리아에 정교한 방송통신기지를 세웠다. 미국은 이 기지에서 아프리카의 방송들을 감시했으며, 미국을 선전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아프리카 전대륙으로 내보냈다. 미국은 1962년 이후 18년 동안 라이베리아에 2억8천만 달러를 원조했다. 라이베리아는 그 반대급부로 미국 정부의 시설을 위해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했다. 말하자면 라이베리아는 미국을 위한 아프리카의 첨병이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첨병이 한국인 것처럼..... 1970년대 들어와 고무의 국제 시장가격이 떨어지자 라이베리아 국가경제가 악화되었다.

 

1971년 27년간 장기집권한 터브먼이 사망하자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의 후손으로 TWP 소속의 부통령 윌리엄 리차드 톨버트 주니어(William Richard Tolbert, Jr. 1913~1980)가 20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톨버트 주니어도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하여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과 토착 원주민들의 긴장과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1977년 찰스 테일러(Charles McArthur Ghankay Taylor, 1948~)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매사추세츠 주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찰스 테일러의 아버지는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아프로트리니다드인 설도 있음), 어머니는 골라족(Gola)이었다.

 

1979년 쌀 가격이 인상되자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지배자들에 대한 토착 원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몬로비아에서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톨버트 주니어의 명령을 받은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70명이 사망하자 토착민들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80년 4월 12일 원주민 크란족(Krahn) 출신으로 미군 특수부대에서 훈련받은 사무엘 도우(Samuel Kanyon Doe, 1951~1990) 특무상사가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톨버트 주니어를 처형하고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의 TWP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때 톨버트의 지지자 26명도 살해당했다. 쿠데타 10일 뒤에는 톨버트 내각의 각료 13명도 공개적으로 처형됐다.

 

라이베리아로 돌아온 찰스 테일러는 쿠데타 직후 도우 정부에 들어가 일했다. 쿠데타 지도부가 인민구국평의회(People’s Redemption Council, PRC)를 구성함으로써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에서 133년 동안 지속된 원주민들에 대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의 정치적 지배도 종식되었다. 아케리카라이베리아인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토착 원주민들은 TWP 정권을 전복시킨 도우 정권을 환영하였다. 사무엘 도우는 최초의 비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 국가원수였다. 경제의 악화가 쿠데타의 주원인이었으나 인민구국평의회(PRC)도 경제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사무엘 도우는 크란족을 요직에 기용하는 등 자신의 출신부족에 권력의 기반을 두었으며, 크란족을 앞세워 다른 종족을 강압적으로 통치함으로써 종족간의 갈등을 야기시켰다. 도우 정권은 한국의 수구보수 이승만 독재정권의 자유당-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공화당-전두환과 노태우 군부독재정권의 민정당-김영삼 3당 야합정권의 신한국당-이명박의 한나라당이 해온 것처럼 비열하고도 교활하게 유력한 인기 야당들에 대해서는 좌파 또는 빨갱이로 몰아부쳐 무력화시킨 반면에 유명무실한 야당의 존재는 허용하였다.

 

1981년 8월 도우 정권은 토마스 웨 시엔(Thomas Weh Syen) 등 5명의 PRC 위원들을 쿠데타 음모혐의로 체포하여 처형했다. PRC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도우의 권위에 도전하는 PRC 위원들은 차례로 제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도우의 측근들만 임명되었다. 시엔의 쿠데타 음모사건 이후 1985년까지 7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일어났다. 도우는 쿠데타에 대한 피해망상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더욱 더 탄압했다. 도우 정권은 비판적인 신문을 폐간시키고 언론인들을 체포하였으며, 야당을 불법화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등 독재정치를 휘둘렀다. 처음에 도우 정권을 환영했던 원주민들은 점차 분노하기 시작했다. 경제도 가파른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악화되었다. 

 

1981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은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구실로 도우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동시에 매년 9천5백만 달러를 원조했다. 라이베리아는 다시 미국의 중요한 냉전 동맹국이 되었다. 도우 정권은 미국의 중요한 군사시설과 투자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한편 미국을 도와 소련의 영향력이 아프리카에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 앞장섰다. 5월 도우는 리비아와 단교하고 11월에는 소련대사에게 퇴거명령을 내렸다. 그는 미국의 신속대응군(U.S. Rapid Deployment Forces)이 라이베리아의 항구와 공항에서 24시간 감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상호방위조약 변경에 동의했다. 미국은 라이베리아군의 전력증강을 도왔다. 라이베리아 항구들이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유럽의 선박들에게 개방되자 외국 선박회사들의 투자가 대폭 증가하였으며, 라이베리아는 조세피난처라는 평판을 얻었다.   

 

1983년 정부기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찰스 테일러는 라이베리아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도주했다. 1984년 라이베리아 정부의 송환 요구로 미국 정부는 메사추세츠 주에서 테일러를 체포하여 감옥에 수삼했다. 같은 해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다당제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이 통과되었다. 1985년 감옥을 탈출한 테일러는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로 돌아왔다. 이 무렵 도우의 출신부족인 크란족과 정부군이 북동부의 님바 주(Nimba County)를 공격하여 기오족(Gio, 또는 단족과 야쿠바족, Dan, Yakuba)과 마노족(Mano)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크란족은 또 많은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도 학살했다. 기오족과 마노족은 국경을 넘어 코트디부아르로 피신했다. 테일러는 코트디부아르로 탈출한 북부의 기오족과 마노족을 중심으로 라이베리아국민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NPFL)을 결성하였다. 

 

1985년 7월 사무엘 도우는 소련과도 단교하였다. 10월 15일 도우는 50명 이상의 정적을 암살하여 도전자들을 미리 제거한 뒤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도우는 9개 정당 가운데 3개 정당만 자신의 라이베리아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 of Liberia, NDPL)에 도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대선과정을 지켜본 국제 참관단이 잭슨 도우(Jackson Doe)가 이끄는 라이베리아행동당(Liberia Action Party, LAP)의 승리를 인정하자 돌연 개표가 1주일 뒤로 연기되었다.

 

사무엘 도우는 기존의 개표요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자신이 구성한 특별선거관리위원회(Special Election Committee, SECOM)를 투입하였다. 특별선거관리위원회(SECOM)는 개표 부정과 조작으로 사무엘 도우의 라이베리아민족민주당(NDPL)이 50.9%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야당후보 당선자 대부분은 이에 반발하여 의원직을 사퇴했다. 미국의 아프리카담당국무차관보(U.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Africa) 체스터 크로커(Chester Arthur Crocker, 1941~)는 미 의회 증언에서 라이베리아 대선이 문제가 있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첫 걸음이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라이베리아 대선 뿐만 아니라 당시 아프리카에서 실시된 선거들은 거의 모두 부정과 조작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1985년 11월 12일 님바지역의 기오족 출신 토마스 퀴원크파(Thomas Quiwonkpa) 라이베리아군 사령관은 반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관저와 국영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였다. 퀴원크파의 반쿠데타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3일 후 반쿠데타는 진압되고 가담자 500~600명이 처형되었다. 1986년 1월 6일 도우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쿠데타 가담자들의 출신지역인 북부의 기오족(또는 단족)과 마노족 같은 부족들을 혹독하게 탄압하였다. 도우 정권의 탄압은 더욱 강화되어 그의 군대는 2천명 이상의 시민을 학살하고, 잭슨 도우와 엘렌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 Sirleaf, 1938~), BBC의 이삭 반투(Isaac Bantu) 기자 등 100명 이상의 야당 정치인을 투옥했다.   

 

1980년대 후반 냉전의 종식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지자 미국은 효용가치가 사라진 도우 정권에 대한 원조를 끊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의 민심이 이반되고 미국마저 원조를 중단하자 도우 정권은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1989년 12월 리비아의 지원하에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라이베리아국민애국전선(NPFL) 반군이 도우의 전횡과 크란족의 강압통치에 항거하여 님바 주를 공격하면서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First Liberian Civil War)이 발발하였다. 도우 독재정권의 학대를 받던 기오족과 마노족 수천명은 NPFL 반군에 가담하였다. 라이베리아 정부군(Armed Forces of Liberia, AFL)은 님바 주를 역습하여 지역민들에게 보복하였다. 1990년 6월 크란족의 억압을 받던 부족들을 규합한 NPFL 반군은 도우 독재정권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의 호응으로 곧 라이베리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공략했다. 7월 NPFL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프린스 요르미에 존슨(Prince Yormie Johnson, 1959~)은 동맹을 맺었던 찰스 테일러와 결별했다. 프린스 존슨은 기오족의 광법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라이베리아독립민족애국전선(Independent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INPFL)을 결성하였다. NPFL과 INPFL은 지속적으로 몬로비아를 공격했다.  

 

1990년 8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는 내전의 중재와 질서의 회복을 위해 주로 나이지리아군과 기니군, 가나군으로 구성된 4천명의 ECOWAS 휴전감시단(ECOMOG)을 파견했다. 도우와 라이베리아독립민족애국전선(INPFL)의 프린스 존슨은 ECOWAS의 중재에 동의했으나 찰스 테일러는 동의하지 않았다. 9월 9일 기오족은 몬로비아 자유항에 설치된 ECOMOG 사령부를 방문하고 돌아가던 도우를 납치하여 프린스 존슨에게 넘겼다. 프린스 존슨은 INPFL의 콜드웰(Caldwell) 기지 사령부에서 도우를 고문 끝에 살해하였다.

 

사무엘 도우가 죽자 찰스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최대의 군벌로 등장했다. 영어권 나이지리아와 가나는 테일러를 반대했다. 11월 ECOWAS는 찰스 테일러를 제외한 채 몇몇의 주요한 라이베리아 지도자들과 아모스 소여(Amos Claudius Sawyer, 1945~)를 대통령으로 한 임시정부(Interim Government, IGNU) 수립에 합의했다. 그러나 소여의 통치권은 브라우니 사무카이(Brownie Samukai)가 지휘하는 준군사조직인 경찰군 '검은 베레(Black Berets)'의 도움으로 겨우 수도 몬로비아에만 미쳤다. 몬로비아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다양한 반군단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1991년 6월 소여를 지지하는 구정부군(AFL)으로 구성된 라이베리아민주통일해방전선(United Liberation Movement of Liberia for Democracy, ULIMO)군은 NPFL로부터 라이베리아 서부지역을 탈취했다.

 

1992년 5월 미국 조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1924~) 정권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세네갈군은 테일러를 축출하기 위해 라이베리아를 침공했으나 로파지역(Lofa County) 바훈(Vahun)에서 NPFL 반군과의 대규모 충돌로 6명이 전사하자 철수하고 말았다. 1993년 7월 제네바에서 정부군과 ULIMO, NPFL 등 3대 교전세력들은 잠정 국가평의회(Council of State)와 입법회의의 설치, 잠정 국민정부 발족과 각료 배분, 대선과 총선의 실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포괄적인 평화협정에 합의하였다. 같은 해 ECOWAS는 베냉(Benin)의 코토누(Cotonou)에서 내전 당사자간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9월 UN은 코토누협정을 이행하는 ECOMOG를 지원하기 위해 평화유지군(UNOMIL)을 구성했다.

 

1994년 3월 6인 국가평의회와 입법회의가 설치되었다. NPFL 반군쪽으로 전세가 기울자 임시정부 대통령 소여는 데이비드 크포르마크포르(David D. Kpormakpor, 1944~)가 이끄는 국가평의회에 정권을 이양하고 사임했다. 그러나 5월부터 다시 무장세력간 전투가 재개되었다. 라이베리아민주통일해방전선(ULIMO) 민병대는 루즈벨트 존슨(Roosevelt Johnson)이 이끄는 크란족의 ULIMO-J와 알하지 크로마(Alhaji G.V. Kromah)가 이끄는 만딩고족(Mandigo)의 ULIMO-K로 분열되었다. 9월 반군 지도자들은 가나(Ghana)의 아코솜보(Akosombo)에서 평화회담을 열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10월 UN은 내전 당사자들이 평화협정을 준수하지 않자 UNOMIL 감시단의 수를 90명으로 축소시켰다. 12월 ECOWAS의 중재로 7개 내전 파벌들은 가나의 아크라(Accra)에서 회담을 열고 선거의 실시와 새 정부 출범을 골자로 한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1995년 8월 찰스 테일러를 포함한 내전 당사자 6인은 가나 대통령 제리 롤링스(Jerry John Rawlings, Jeremiah Rawlings John, 1947~)의 중재로 6인 과도통치기구인 국가평의회 구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9월 1일 과도통치기구인 국가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의장에는 정치인 윌튼 상카울로(Wilton G. S. Sankawulo, 1943~), 위원에는 반군지도자 찰스 테일러, 알하지 크로마, 라이베리아평화평의회(Liberia Peace Council, LPC) 반군을 이끄는 크란족의 조지 볼리(George Boley) 등이 선임되었다.    

 

1996년 4월 6일 테일러가 주도하는 라이베리아 국가평의회의 경찰부대가 군벌 루즈벨트 존슨을 살인혐의로 체포하기 위해 몬로비아의 ULIMO-J 사령부를 공격했다. 그러나 도우를 지지하는 크란족의 ULIMO-J 민병대가 반격하면서 내전이 재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ULIMO-J는 외국인을 포함 600명의 인질을 억류했다. 미국은 60명의 특수부대를 급파하여 인질을 구출했다. 4월 10일 이후 3차에 걸쳐 내전 당사자간 정전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8월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서 내전 당사자간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병력의 철수, 무장해제, 대통령선거 실시를 골자로 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9월 상카울로의 뒤를 이어 루스 페리(Ruth Sando Fahnbulleh Perry, 1939~)가 국가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찰스 테일러와 알하지 크로마, 조지 볼리는 계속해서 국가평의회 위원직을 유지했다. 11월 22일부터 반군단체 전투원들의 무장해제가 시작됨으로써 7년 동안 지속된 내전은 마침내 끝났다. 이 내전으로 당시의 인구 250만명 중 15만명이 사망하고, 20만명이 부상했으며, 1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1997년 2월 UN은 총 2만3천명의 무장단체 전투원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부르키나파소는 230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4월 8일 잠정정부는 6개의 신문사를 폐쇄시켰다. 7월 19일 12년만에 실시된 대선에서 내전을 주도해온 찰스 테일러는 국민애국당(National Patriotic Party, NPP) 후보로 출마하여 75%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8월 대통령에 취임한 테일러는 야당에 대한 탄압과 인권유린을 자행하였으며, 정부 관리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도우와 마찬가지로 테일러도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치안의 불안과 경제난도 계속되었다. 한편 테일러의 정적들이 이끄는 무장단체들은 끊임없이 정부군을 공격했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반군에게 다이아몬드를 받고 무기를 공급했다.

 

1998년 1월 1,300명의 나이지리아 평화유지군이 철수했다. 2월 테일러는 도우의 출신 종족인 크란족의 고위장교 13명 퇴임시켰다. 5월 2천명의 국방부 경비대 퇴역군인들이 복지혜택을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야당들은 테일러 정권의 비밀경찰이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6월 테일러는 안전상의 문제를 이유로 아프리카단결기구(OAU) 정상회담에 불참한다고 발표했다. 6월 5일 640명의 니제르 평화유지군이 철수했다. 6월 26일부터 UN은 나이지리아로 탈출한 1279명의 라이베리아 난민을 귀환시키기 시작했다. 7월 21일 테일러는 국가재건국민회의를 설치했다. 테일러의 요구에 따라 ECOMOG는 비공인 무기의 철저한 조사를 개시했다. 

1998년 8월 10일 주 인도 대사로 임명된 루즈벨트 존슨은 정부에 사전 통고 없이 갑자기 귀국했다. 8월 28일 존슨의 자택 근처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반군 800명이 자신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기니에서 훈련중이라고 주장하면서 ECOWAS PKO의 축소와 기니군의 참여 중지를 요구했다. 9월 1일 테일러는 미국에 망명중인 크로마와 나이지리아에 머물고 있던 존슨 등 2명의 군벌이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고 발표했다. 9월 19일 테일러 정부군이 ULIMO-J 사령부를 공격하여 100여명을 사살하자 루즈벨트 존슨은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라이베리아 정부는 존슨과 그의 추종자 21명을 기소했다. 그해 테일러 정권의 소년병 훈련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한 어린이 인권운동가 키미 윅스(Kimmie Weeks, 1981~)는 수차례 암살위기를 모면하고 이웃나라 코트디부아르로 탈출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1999년 테일러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와 강압정치, 인권유린은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Second Liberian Civil War)을 초래했다. ULIMO는 기니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화해와민주주의를위한라이베리아연합(Liberians United for Reconciliation and Democracy, LURD)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1월 테일러 정부가 난민캠프의 폐쇄를 발표하자 35개의 캠프에 수용되었던 15만명의 난민가운데 수천명이 몬로비아 인근지역에 위치한 캠프를 떠났다. 2월 20일 라이베리아 정부는 1998년 9월의 미 대사관 인근에서 발생한 전투와 관련 루즈벨트 존슨 등 9명을 반정부 폭동죄로 재판에 회부했다. 3월 17일 라이베리아 법원은 반역죄로 기소된 루즈벨트 존슨 등 14명 가운데 13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8월 13일 테일러는 기니 정부가 라이베리아 반군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라이베리아 국경부근의 혼란상태를 더욱 가중시켰다.

 

1999년 8월 19일 반군들은 북부에서 난민들을 살해하고 약탈했다. 8월 20일 난민들은 시에라리온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 RUF) 반군이 북부지역의 전투에 개입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 RUF는 라이베리아통합군(Joint Forces for the Liberian of Liberia, JFLL)군과 연합해서 작전을 펼쳤다. 1990년대 라이베리아 내전에서 활동하던 ULIMO군으로 구성된 JFLL은 만딩고족의 변절자로 알려졌다. 북부에는 5만명의 시에라리온 난민 수용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8월 25일 ULIMO-K와 ULIMO-J 반군은 연합하여 북서부에서 테일러 정부군을 공격했다. 이 전투로 2만5천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5천명의 시에라리온 난민은 다른 지역으로 탈출했다. 9월 14일 3만5천명의 시에라리온 난민이 북서부로 유입되었다.

 

1999년 9월 23일 정부군은 반군들이 일시 점령했던 북서부지역을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슈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9월 29일 테일러는 시에라레온의 RUF 지도자 산코(Sankoh), 혁명평의회무장군(Armed Forces Revolutionary Council, AFRC) 지도자 코로마(Koroma)와 회동을 갖고 양국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방안을 찾았다. 테일러가 시에라리온의 AFRC를 지원해왔다는 이유로 외국의 원조기관들은 라이베리아에 대한 지원을 축소시켰다. 10월 11일 라이베리아는 시에라리온과의 국경지역에 대한 봉쇄를 해제하고 시에라리온 반군에 대한 지원의 중단에 동의했다. 10월 19일 라이베리아 정부는 반군들로부터 회수한 1만5천개의 무기를 폐기했다. 10월 23일 나이지리아 평화유지군이 라이베리아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11월 14일 내전은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정부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사회적 큰 문제로 떠올랐다. 
 

2000년 4월 LURD 반군은 최북부의 로파 주(Lofa County)에서 테일러 정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 LURD 반군은 테일러 정권의 가장 큰 위협으로 떠올랐다. 라이베리아는 시에라리온과 기니, LURD 반군 등 세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2001년 3월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테일러의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에 대해 '라이베리아산 다이아몬드의 거래 금지, 라이베리아에 대한 무기판매 금지, 라이베리아 정부 고위관료들의 UN 회원국으로의 여행 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 결의안(1343호)을 통과시켰다.  

 

2002년 초 내전은 기니와 시에라리온 정부이 LURD 반군을 지원하고, 기니와 시에라리온 반군이 테일러 정권을 지원하는 양상이 되었다. 시에라리온 반군의 지원으로 테일러 정권은 영국과 미국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ULIMO의 다른 한 분파는 라이베리아민주운동(Movement for Democracy in Liberia, MODEL)이라는 새로운 반군단체를 조직했다. 2003년 3월 코트디부아르 정부의 지원을 받는 라이베리아민주운동(MODEL) 반군은 남부에서 테일러 정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시에라리온특별재판소(Special Court for Sierra Leone, SCSL)는 찰스 테일러를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하였으나 6월까지 비밀에 붙였다. 5월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라이베리아산 원목과 목재의 수출입을 금지하는 결의안(1478호)을 냈다.  

 

2003년 중반 LURD 반군은 북부의 1/3을 장악하고 수도를 위협했고, MODEL 반군은 남부를 장악했다. 테일러 정부는 수도 몬로비아와 중부 1/3만 장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6월 ECOWAS는 가나의 아크라에서 라이베리아 정부, 시민사회단체, LURD와 MODEL 반군이 참여하는 평화회담을 중재했다. 테일러도 참석한 개회식에서 SCSL 대표는 테일러가 전범으로 기소되어 국제적인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음을 공표하였다. SCSL은 1996년 11월 이래 시에라리온에서 자행된 잔혹한 전쟁범죄에 테일러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고발했다. 가나 정부는 평화회담에 초청한 일국의 대통령을 체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날 테일러는 라이베리아로 돌아갔다.

 

2003년 6월 LURD는 수도 몬로비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몬로비아를 두고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미국은 FAST로 알려진 해군 정예 신속대응군을 몬로비아의 미 대사관에 배치했다. 미 해군은 수송기를 이용하여 미국민과 비전투원을 세네갈의 다카르로 철수시켰다. 7월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테일러에게 안전한 망명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미 대통령 부시도 테일러에게 라이베리아를 떠나라고 압박했다. 이에 테일러는 미국 평화유지군이 라이베리아에 배치되면 사임하겠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UN 안보리는 평화유지군 임무를 수행할 다국적군을 파견한다는 결의안(1497호)을 통과시켰다. 8월 11일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테일러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망명지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테일러의 뒤를 이어 부통령 모지스 블라(Moses Zeh Blah, 1947~)가 임시대통령이 되었다. 

 

2003년 8월 15일 미국의 압력으로 ECOWAS는 천 명의 나이지리아군으로 급조한 ECOWAS 평화유지군(ECOMIL)을 라이베리아로 공수했다. 반군들이 수도 몬로비아를 파괴하고 보복성 전쟁범죄를 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병참지원을 담당했다. 라이베리아 앞바다에는 2300명의 미 해병특수전대(Marine Expeditionary Unit, MEU)를 태운 이오지마호(USS Iwo Jima, LHD-7)가 배치되었다. 100명의 미 해병 태스크 포스(Joint Task force Liberia)는 ECOMIL과 협력하기 위해 몬로비아에 상륙했다. 8월 18일 라이베리아 구정부와 LURD 반군, 정당,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2년 기한의 국민과도정부(National Transitional Government of Liberia, NTGL) 수립에 합의했다. 평화협정의 체결로 14년 동안 지속되었던 내전은 2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채 마침내 끝났다.

 

2003년 10월 1일 ECOWAS-ECOMIL의 임무가 UNMIL로 이관되었다. 나이지리아, 베냉, 감비아, 가나, 기니비사우, 말리, 세네갈, 토고 군대로 구성된 3500명의 ECOMIL은 UNMIL로 소속이 바뀌었다. 10월 14일 NTGL 의장에 찰스 규드 브라이언트(Charles Gyude Bryant, 1949~)가 선출되었다. 임시대통령 블라는 권력을 브라이언트에게 이양했다. 2004년 6월부터 UNMIL은 반군들의 무장해제(DDR)를 시작했다. 그해 연말까지 10만명 이상의 반군이 무기를 반납하였다. 무장해제가 완료되자 대통령 브라이언트는 UN 안보리에 라이베리아산 목재와 다이아몬드에 대한 수출 금제(禁制, embargo)를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2005년 10월 11일 UNMIL의 평화유지 활동에 힘입어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가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실시되었다. 23명의 대선후보 가운데 그 누구도 과반수를 차지한 사람이 없었다. 1위는 민주변화회의(Congress for Democratic Change, CDC) 후보로 28%를 얻은 크루족(Kru) 출신의 유명한 축구선수이자 UNICEF 친선대사를 역임한 조지 웨아(George Tawlon Manneh Oppong Ousman Weah, 1966~), 2위는 하버드 출신 경제학자로 재무장관과 세계은행 경제전문가를 지낸 통일당(Unity Party, UP)의 엘렌 존슨 설리프가 차지했다. 설리프는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과 원주민의 혼혈(부계 골라족 50%, 모계 크루족 25%+독일인 25%)이었다. 11월 8일의 결선투표에서는 설리프가 59%를 얻어 조지 웨아에게 승리했다. 같은 달 국제노동권리기금(International Labor Rights Fund, ILRF)은 하벨 소재 고무농장에서 현대판 노예노동을 시킨 혐의로 파이어스톤사의 모회사인 브리지스톤사(Bridgestone)를 외국인불법행위배상청구법(Alien Tort Claims Act, ATCA)에 의거 고발했다.

 

2006년 1월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취임한 설리프는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국가원수가 되었다. 3월 설리프는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찰스 테일러의 송환을 나이지리아에 요구했다. 3월 26일 테일러는 나이지리아에서 시에라리온으로 송환되었다. 테일러는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에서 내전을 주도한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에 대한 재판은 보안상의 이유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진행되고 있다. 설리프는 UN 안보리에 라이베리아산 목재, 철광석, 다이아몬드, 금, 고무 등 천연자원을 국가발전의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수출 금제(엠바고)를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6월 UN은 라이베리아산 목재에 대한 엠바고(embargo)를 해제했으나 다이아몬드는 원산지증명제가 확립될 때까지 엠바고를 유지했다. 설리프는 오랜 내전기간 자행된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설치하였다. 

 

2007년 3월 설리프 정부는 정부기금을 횡령한 혐의로 과도정부 대통령 브라이언트를 체포하여 기소했다. 7월 17일 브라이언트 과도정부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조지 쿠쿠(George Koukou, 1945~)와 도우 정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찰스 줄루(Charles Julue)를 중심으로 한 전직 장교들의 쿠데타 기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적발되어 실패했다. 줄루는 1994년에도 쿠데타를 시도하였다가 ECOMOG에 의해 진압된 바 있다. 

 

라이베리아는 자체적인 치안능력이 부족하여 UNMIL이 치안을 맡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UNMIL은 무력충돌이나 소요 등 정치적 불안 사태에만 개입할 수 있고, UN 경찰의 역할은 라이베리아 경찰에 대한 자문으로 한정되어 있어 치안유지에 한계가 많다. 빈민가를 중심으로 생계형 범죄가 증가하고 있으며, 강도나 강간 등 강력범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아직도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과 원주민, 원주민 종족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종종 집단간의 충돌로 나타나 폭동과 인민재판, 관공서 습격 등이 발생하고 있다. 높은 청년층 실업률, 라이베리아의 주수입원인 고무농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소요, 국가 행정력의 부재를 틈탄 불법적인 자원 밀반출, 마약거래의 증가 등도 사회불안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약 7,200명에 이르는 전직 정부군의 군인과 무장단체 전투원의 사회복귀도 어려운 문제다. 전직 군인과 전투원, 실업 청년층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없으면 이들은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전대통령 찰스 테일러의 추종세력들에 의해 반군단체로 재규합될 가능성도 있다.

 

UNMIL은 라이베리아의 정세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11,691명의 병력을 2010년 12월까지 8,131명으로 감축할 계획이다. UNMIL의 점진적 철수 이후 자체적으로 국방과 치안을 유지할 군대와 경찰을 육성하는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군대는 우선 2천명 규모를 목표로 1,631명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중 45명은 장교 후보로 선발되었다. 경찰은 현재 명부상 3,600여명이 있지만 부패하고 기강이 해이할 뿐만 아니라 임무 수행능력도 떨어져 자주 발생하는 폭동에는 전혀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경찰 장비나 설비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500명의 우수 경찰인력으로 2009년 7월까지 긴급대응반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90여명을 선발하여 훈련중에 있다. 라이베리아 군경의 훈련은 UNMIL과 다인코프 인터내셔널(DynCorp International, DynCorp)이라는 미국의 사설용병회사가 담당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재원은 미국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정이지만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부통령제도 존재한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며 군의 총사령관이다. 국회는 양원제로 상원의원 26명, 하원의원 64명으로 구성된다. 라이베리아의 정당은 NPP, CDC, UP 외에 라이베리아전국연합당(All Liberia Coalition Party, ALCOP), 자유당(Liberty Party, LP), 라이베리아변화연합(Coalition for the Transformation of Liberia, PDPL, TWP), 평화민주연합(Alliance for Peace and Democracy, LPP, UPP), 뉴딜운동(New Deal Movement, NDM), 라이베리아민족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 of Liberia, NDPL), 국민개혁당(National Reformation Party, NRP), 연합민주동맹(United Democratic Alliance, LNU, LEDP, RAP) 등이 있다. 최고사법기관은 인민최고법원으로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를 얻어 법관들을 임명한다. 

 

라이베리아의 1인당 GNP는 서아프리카 평균치보다는 높지만 세계 최저수준이다. 경제는 농업과 철광석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3을 차지한다. 주요 환금작물은 고무, 커피, 카카오다. 고무산업은 정부와 대규모 외국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고무 수출은 GNP의 10%를 차지한다. 1950~1960년대 고무는 수출액의 80%에 달했다. 주요 농작물은 쌀과 카사바다. 삼림자원은 매우 풍부하여 대규모 제재소와 합판공장이 1970년대부터 빠르게 성장했다. 내전 이후 고무와 목재는 이 나라의 주력 수출상품이다. 

 

광공업은 GDP의 20%를 차지한다. 1989년 내전 발생 이전에는 철광석의 수출은 총수출액의 60%를 차지했다. 2004년 라이베리아 철광회사가 광산시설의 재건에 착수했으나 철광석 부존량은 고갈된 상태다. 금과 다이아몬드도 중요한 광물자원이다. 1988년 다이아몬드 수출액은 8천4백만 달러, 금 생산량은 1980년대 중반 월 평균 40~45kg이었으나 내전 발생 이후 군벌들에 의한 다이아몬드와 금의 불법채굴이 성행했다. 다이아몬드 불법 거래 자금이 시에라리온 반군에게 유입되자 UN 안보리는 2001년 라이베리아 다이아몬드의 생산과 수출을 제재하는 조치를 취했다. 2005년 6월 UN 조사단은 현지 실사를 통해 불법 다이아몬드 생산액이 연간 6백만 달러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제조업은 수입대체상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기업이 주류를 이룬다.

 

라이베리아는 주요 수입국인 한국(39.2%)과 일본(16.2%), 싱가포르(12.4%), 독일(9.9%) 등으로부터 연료, 식품, 가축, 기계류, 수송장비 등을 수입한다. 주요 수출국인 독일(43.2%)과 폴란드(10.9%), 노르웨이(9.1%), 미국(6.0%) 등지에는 자연산 고무, 철광석, 다이아몬드, 코코아, 목재, 커피 등을 수출한다. 라이베리아 정부는 조세제도 개편 등 투자환경을 개선하여 자원개발을 위한 민간차원의 해외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상당한 원조와 차관을 제공하고 있다.  

 

라이베리아를 건국한 사람들은 1820~1865년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흑인 해방노예, 즉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이다. 그러나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국민의 2.5%에 불과하고, 95%가 아프리카계 선주민이다. 선주민들은 언어학상 크게 만데인(Mande, Mali, Mandingo), 크루인(Kru), 서대서양인(West Atlantic, Mel) 등 3개 종족이 있다. 이들 3개 종족은 다시 16개 부족으로 나뉘어진다. 

 

만데족(52%)은 크펠레족(Kpelle, Guerze)과 마노족(Mano), 로마족(Loma), 기오족(Gio, Yakuba), 바이(Bai), 반디족(Bandi), 만딩고족(Mandingo)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라이베리아 북부와 북서부, 중부 지역 뿐만 아니라 주변국에도 살고 있다. 크루인(35%)은 주로 해안지방에 거주하는 바싸족(Bassa), 그레보족(Grebo), 데족(De), 크루족, 주로 내륙지방과 남부지방에 거주하는 크란족(Krahn), 사포족(Sapo) 등이 있다. 서대서양인(8%)의 일족인 멜족(Mel)에는 주로 북부지방에 분포하는 골라족(Gola), 키시족(Kissi, Kisi)이 있다. 그외 콩고로 귀환한 콩고인의 후손과 아프로-카리브인, 러시아인이 2.5%를 차지한다. 소수의 백인과 레바논인, 인도인, 서아프리카인도 있다.  

 

공용어는 영어다. 16종의 토착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토착신앙 40%, 기독교 40%, 이슬람 20% 순이다. 인구의 40% 이상이 15세 이하다. 출생률과 사망률, 인구증가율은 높은 편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한다. 교육은 1939년 이래 7~16세 아동을 대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학령기 아동의 절반 정도만이 학교에 다닌다. 1862년 단과대학으로 설립된 몬로비아의 라이베리아대학교는 195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라이베리아의 외교노선은 비동맹중립이지만 친서방적이다. 2007년 2월 중국 주석 후진타오(胡錦濤, 1942~)는 라이베리아를 방문하여 설리프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과학, 기술 협력 등 7개 협정을 맺었다. 후진타오는 라이베리아의 대 중국 부채 천만 달러를 탕감해주고, 라이베리아대학교 펜델(Fendell) 캠퍼스 강의동을 지어주었다. 또, 라이베리아산 상품의 대 중국 수출시 특혜관세를 적용하기로 했으며, 라이베리아 내전으로 인한 피해의 재건과 복구 사업 비용으로 2년간 2천5백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한국과 라이베리아는 수교 이전인 1970년 7월 의료협정을 체결한데 이어 1973년 7월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양국은 1978년 9월 항공협정, 1980년 12월 무역협정, 1981년 5월 문화협정을 체결했다. 1982년 5월 라이베리아의 독재자 도우가 방한한 바 있다. 이후 도우는 각종 국제회의에서 광주민중항쟁을 유혈진압하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을 지지하였다. 1982년 9월 양국은 경제기술협력협정과 비자면제협정을 체결했다. 1983년 11월 라이베리아의 주한 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1991년 4월 라이베리아가 한국에서 상주공관을 철수하자 한국도 1992년 3월 라이베리아에서 상주공관을 철수했다. 한국 교민은 23세대가 있으며, 교민회가 결성되어 있다.

 

조선과 라이베리아는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1987년 11월 KAL기 폭파사건 이후 인적, 물적 교류가 중단됐다. 1988년 라이베리아는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