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공화국 지도
서아프리카의 가나 공화국(Republic of Ghana)은 서쪽으로 코트디부아르, 북쪽으로 부르키나파소, 동쪽으로 토고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대서양의 기니 만(Gulf of Guinea)에 면한 연안 국가이다. 가나의 대서양 해안은 '황금해안(黃金海岸, Gold Coast)'으로 알려져 있다. 면적은 23만8533㎢, 인구는 약 2천3백만 명(2007년)이다. 수도는 아크라(Accra)이다.
가나 국기
가나의 10대 도시는 아크라, 쿠마시(Kumasi), 타말레(Tamale), 테마(Tema), 타코라디(Takoradi), 케이프코스트(Cape Coast), 코포리두아(Koforidua), 수니아니(Sunyani), 오부아시(Obuasi), 호(Ho)다. 제2의 도시 쿠마시는 아샨티 제국(Ashanti Empire)의 도읍지로서 같은 명칭을 가진 행정 지방의 수도이다.
가나의 국토는 동부와 서부에 산지가 있을 뿐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900m를 넘지 않는 낮은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에서 남동부로 길게 뻗어간 산지는 수도 아크라까지 이어진다. 중앙부의 볼타(Volta) 분지(盆地, basin)에는 볼타 강(Volta River)이 흐른다. 볼타 강 유역은 국토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볼타 분지의 북부는 사바나 지대이고, 그 북쪽과 서쪽은 사바나 대지(臺地, Terrain)다.
볼타 강(Volta River)과 아돔베교(Adombe Bridge)
볼타 강에는 아코솜보 댐(Akosombo Dam)이 건설되어 볼타 분지 남동부에 면적 8,500㎢에 이르는 볼타 호가 생겼다. 그 길이가 약 400km에 이르는 볼타 호는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로 내륙의 농업과 수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볼타 호의 남서부는 가나에서 가장 큰 보호구역인 쿠자니 동물보호구역(Kujani Game Reserve)과 디그야 국립공원(Digya National Park) 지대로 하마, 큰 영양, 악어, 해우 등으로 유명하다. 볼타 호 북서쪽은 가나에서 가장 유명한 국립공원인 몰레 동물보호구역(Mole Game Reserve)으로 사자, 표범, 영양, 야생 곰, 코끼리, 큰 고양이, 원숭이 등을 비롯해서 300 종 이상의 새들을 볼 수 있다
볼타호 동부는 남북으로 약 100km에 걸쳐 볼타 강 하류의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볼타 분지의 남쪽과 북쪽, 서쪽으로 분지의 끝부분이 융기되어 생겨난 300∼600m 높이의 좁은 고원지대의 절벽은 장관을 이룬다.
황금해안이라고도 부르는 남부의 해안평야는 내륙으로 50∼80km까지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 볼타 강 어귀의 연안을 따라 수많은 석호(潟湖)와 습지가 발달해 있다. 볼타 강 외에 프라 강, 안코브라 강, 타노 강도 북쪽에서 남쪽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가나의 기후는 열대기후로 북동쪽에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모래먼지와 함께 이동해오는 고온건조한 기단과 남서쪽에서 대서양 남부를 가로질러 이동해오는 열대해양성 기단 등 두 기단의 영향을 받는다. 가나의 남동해안은 온난건조하고, 남서해안은 고온다습한 전형적인 열대우림지대이다. 그러나 기니 만에 면한 해안평야는 비교적 습도가 낮아 동쪽 끝 해안지대 외에 식물이 무성한 습지대는 없다. 북부는 고온건조하다. 연평균기온은 대서양 연안이 26℃이고 내륙은 29℃이다. 북부지방을 제외하고 4∼6월, 9∼11월 등 2번에 걸쳐 우기가 있으며, 11~3월은 건기에 해당한다. 연평균강우량은 1,143∼1,270㎜이다. 1∼3월에는 사하라 사막의 먼지를 동반한 건조한 북동풍인 하마탄(Harmattan)이 불어온다.
가나의 국토는 약 1/3이 숲으로 덮여 있고, 농경에 적합한 땅은 1/8 정도이다. 식생은 남북으로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남동부 평야는 해안 사바나 지대로서 관목과 키가 큰 풀이 뒤섞여 자라고, 남부 삼림지대는 상록수와 열대반낙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 사바나 지대에는 키가 큰 기니아 수수가 주로 분포하는데 여러 종의 아카시아 같은 키 작은 나무들도 함께 자란다.
가나 공화국은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존재했던 가나 제국(Ghana Empire, Wagadou Empire)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지리학적으로 가나 제국은 현재의 가나보다 북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지금의 말리 공화국 서쪽 세네갈과 나이지리아 사이에 있었다. 따라서 가나 제국은 지금의 가나 공화국의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지금의 가나에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3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BC 5천년경에는 농경과 목축, BC 2000년경에는 소, 닭(Guinea Fowl) 등 가축을 사육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선주민들이 현재의 가나인들과 언떤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기록에 따르면 8세기경 가나 지역에 북아프리카 상인들의 왕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칸족(Akan)과 가족(Ga), 에웨족(Ewe) 등의 구전 전승에는 이들 부족들이 13세기경 가나로 이주했음을 시사한다. 주로 숲과 해안지대에 거주했던 아칸족은 13세기경 그들 최초의 왕국을 세웠다. 14세기에는 금을 쫓던 만딩고족(Mandingo, Mande, Mali) 상인들이 가나에 들어왔다. 15세기에 만딩고족은 남서쪽으로 이동해 가나 북부에 다곰바 왕국과 맘프루시 왕국을 세웠다.
15세기 이전 프랑스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가나의 황금을 노리고 내항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1470년 엔리케 왕자의 명을 받은 포르투갈 탐험대는 금을 찾아 가나의 남부 해안에 상륙한 뒤 카사만사(Casamansa) 추장의 부족과 교역을 시작했다. 아칸족의 아샨티 왕족들이 치장하고 있는 엄청난 양의 금을 앙코부라와 볼타 사이를 흐르는 강에서 찾아낸 포르투갈인들은 이곳에 골드 코스트(황금해안)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약탈한 금을 금괴로 만들어 유럽행 배에 실어보냈다.
케이프 코스트 성(Cape Coast castle)
엘미나 요새(Elmina slave castle)
1481~1482년 포르투갈인들은 황금해안에 케이프 코스트 성(Cape Coast castle), 엘미나 요새(Elmina castle), 샤마 요새(Shama castle), 액심 요새(Axim, castle), 세인트 조지 성(St. George castle) 등을 건설하고 금과 노예 무역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곧 금보다 더 많은 돈벌이가 되는 것이 노예무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세기경 콜라 너트(kola nut)를 찾아다니던 하우사족(Hausa) 상인들이 가나 북부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무역상들이 노예와 황금 무역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부는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무역상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598년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황금해안에 상륙했다. 이후 영국과 스웨덴, 덴마크 등의 선박도 황금해안을 찾아와 요새를 만들었다.
1637년 네덜란드인들은 코멘다와 코만티에 요새를 구축한 뒤 포르투갈로부터 엘미나 요새를 탈취했다. 17세기에 들어와 포르투갈인이 독점하고 있던 노예시장은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 등의 교역상들에게 넘어갔다. 노예 무역에 대한 이권을 놓고 유럽의 군주들과 아프리카의 추장들, 이슬람 상인들 사이에 첨예한 충돌이 벌어지곤 했다. 당시 연간 평균 노예 포획량은 1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
열대우림 북쪽의 내륙지방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던 많은 부족국가들은 요새를 통한 연안무역과 노예무역으로 점차 쇠퇴하였다.17세기에는 일찍부터 아칸 왕국에 거주했던 만데어를 쓰는 또 다른 부족이 더 북쪽으로 올라가 곤자 왕국(Gonja, Ghanjawiyyu kingdom)을 세웠다. 비슷한 시기 나이지리아에서 온 이주민들은 남동부에 가 왕국과 에웨 왕국을 수립했다. 17세기 말에는 아칸족의 아콰무(Akwamu) 왕국이 연안무역으로 강력해졌다.
아샨티족의 얌 축제(Ashanti yam ceremony)
가나 역사상 가장 강한 부족에 속하는 아칸족의 일족인 트위어계 아샨티족(Ashanti)은 중부 삼림지역에서 일어나 강력한 중앙집권왕국을 세웠다. 아칸족의 연합국인 아샨티 왕국은 아콰무 왕국을 누르고 점차 북쪽의 부족국가들을 정복해 갔다. 18∼19세기 아샨티 왕국의 전성기에는 영토가 동쪽의 토고 산맥에서 서쪽의 코모에 강(Komoé River, Comoé River)까지 이르렀다.
18세기 중엽에는 황금해안에 40여 채에 이르는 요새가 해안에 늘어서 있었다. 이 요새들을 근거지로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상인들은 교역시장을 주도했다. 18세기 후반 아샨티 왕국이 남쪽 해안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자 연안의 부족들은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1807년 이후 유럽 열강은 노예무역을 중단하고 다른 상품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 무렵 가나의 금 생산량은 감소되어 있었다. 1844년 영국 상인 G 매클린의 노력으로 아칸족에 대항하던 남서부 연안의 판티족(Fante, Mfantsefo) 연합왕국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은 아샨티 왕국과 판티족의 세력쟁탈전을 이용하여 골드 코스트를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1850년 영국이 덴마크의 요새를 사들이자 네덜란드는 1872년 황금해안에서 철수하였다. 당시 황금해안에는 76채의 요새가 해안가를 따라 약 6km 마다 점점이 세워져 있었다. 1874년 영국은 아샨티 왕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식민지 '골드 코스트(Gold Coast, 黃金海岸)'를 확립했다. 영국에 대한 아샨티족의 격렬한 저항은 1900년까지 계속되었다. 1897년 부족의 토지를 영국의 왕실소유지로 편입시키는 법안에 반대하는 원주민이익옹호협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협회는 추장 등 구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정치운동이었다.
영국은 아샨티 왕국과의 수십 년에 걸친 전쟁 끝에 1902년 1월 1일 아샨티 왕국을 비롯해서 북부의 부족 전체를 골드 코스트 직할식민지 및 보호령으로 공식 병합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동쪽의 독일 식민지였던 토골란드(Togoland)의 서부가 국제연맹에 의해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1919년부터 토골란드는 골드 코스트의 일부가 되어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영국은 골드 코스트를 전시용 식민지 국가로 만들기 위해 영국인들이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골드 코스트는 최고의 학교와 공공시설을 갖춘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창하는 식민지였다. 고등교육을 통해 현지인 변호사들이 배출되었고, 언론과 출판사도 계속 성장했다. 그러나 반영감정은 점점 커져 갔다.
1920년 아크라에서 서아프리카민족회의(West African National Congress, WANC)가 결성되면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조셉 단쿠아(Joseph Kwame Kyeretwi Boakye Danquah, 1895~1965)는 통일골드코스트회의(United Gold Coast Convention, UGCC)를 결성하고 자치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미국식 교육을 받은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1972)는 통일골드코스트회의(UGCC) 사무총장이 되었다.
영국 식민정부의 UGCC 지도자 구속 등 탄압이 지속되자 은크루마는 1949년 6월 청년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정당인 회의인민당(Convention People's Party, CPP)을 창당하고 '즉각적인 자치정부~!(self government now!)'를 슬로건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나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점증하자 영국은 가나에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은크루마 등 회의인민당(CPP) 지도자들은 이를 반대하여 전국적인 총파업을 일으켜 국가 기능을 정지시켰다. 은크루마는 영국 식민지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51년 자치정부 수반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은크루마는 옥중 출마로 당선되었다. 은크루마의 옥중 지휘로 CPP는 입법의회(Legislative Council) 선거에서 36석중 33석을 휩쓰는 압승을 거두었다. 식민지 당국은 은크루마를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방된 은크루마는 1952년 3월 골드 코스트 첫 흑인 총리에 취임했다. CPP가 1954년과 1956년의 선거에서 계속 승리하자 영국은 가나의 독립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1956년 골드 코스트는 주민투표를 거쳐 영국령 서부 토골란드를 통합했다.
골드 코스트는 1957년 3월 6일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독립했다. 독립 당시 가나는 은크루마를 수상으로 한 준연방제(Semi-Federal System) 국가였다. 은크루마는 서아프리카 최초의 강력한 왕조였던 가나 제국의 이름을 본따서 국명을 가나로 정했다.
1959년 지방의회가 해산되고, 1960년 4월 실시된 국민투표로 가나는 공화국이 되었다. 은크루마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0년 7월 1일 국민투표로 국명이 가나에서 가나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1964년 2월 은크루마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CPP를 제외한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고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재판 없이도 정적들을 투옥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야당 인사들을 탄압했다. 은크루마는 대외적으로 범아프리카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한편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투쟁을 지원했다. 그는 이집트의 나세르, 유고의 티토 등과 함께 비동맹회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은크루마는 집권 후 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동구권을 제외한 서방국가들의 투자 감소로 경제불황에 직면했다. 그는 또 국가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외채를 도입했다. 가나의 외채는 당시 미화 100만 달러에 달했다. 그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볼타 강의 아코솜보 댐 건설도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기대만큼의 전력공급과 관개 목표량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은크루마의 난폭한 성격과 고위관리들의 만연한 부정부패는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1966년 2월 24일 베트남의 평화정착을 위해 중국과 미얀마, 북베트남을 방문하고 있던 은크루마는 엠마뉴엘 코토카(Emmanuel K. Kotoka, 1926~1967) 대령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다. CPP 정권을 전복시킨 군부는 헌법을 폐기하고 조셉 앵크라(Joseph Arthur Ankrah, 1915~1992) 중장을 위원장으로 한 민족해방평의회(National Liberation Council, NLC)를 결성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군부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쿠데타 세력은 은크루마 정권이 체포해서 구금했던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했다. 앵크라는 친서방정책을 표방하고 인근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그러나 1969년 2월 뇌물수수 사건이 터지자 앵크라는 아프리파(Afrifa) 소장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1969년 8월 아프리파 정권이 실시한 총선거에서 진보당(Progress Party, PP )의 코피 부시아(Kofi Abrefa Busia, 1913~1978)가 총리에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70년 대통령제의 부활로 전 최고재판소 장관 에드워드 아쿠포-아도(Edward Akufo-Addo, 1906~1979)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시아 정권 초기에는 앵크라 군사정권의 외교정책을 지속하였다.
부시아 정권은 1969년 12월 외국인준수주문법(Aliens Compliance Order)을 제정하여 나이지리아와 토고, 니제르인 등 외국인 노동자들을 추방하고, 이어 1970년에는 공무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므로써 국내외의 비난을 받았다. 외국인 추방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생산이 감소하고 대외신용도가 하락했으며, 외국인 투자가 끊김으로써 가나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71년 12월 세디화(Cedi)의 평가절하 조치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가나 경제는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다.
경제가 호전되지 않은 가운데 1972년 1월 총리 부시아가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 이그나티우스 아체암퐁(Ignatius Kutu Acheampong, 1931~1979) 대령이 이끄는 군부가 무혈 쿠데타을 일으켜 제2공화국을 전복시켰다. 아체암퐁 대령은 최고군사통치기구인 국가구제평의회(National Redemption Council, NRC)를 설치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아체암퐁 군사정권은 세디화의 재평가를 단행하는 한편 식량자급 정책을 추진했다. 1974년 아체암퐁은 채권국회의에서 누적된 대외채무의 장기상환협정을 맺었으며, 1975년 1월 경제건설 신5개년계획을 발표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인접국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했다. 1976년 9월 민정으로의 정권이양 방침을 발표한 아체암퐁은 1977년 1월 정권이양 준비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정치, 경제의 안정을 이루는 듯 했다.
그러나 1974년부터 불어닥친 국제 에너지 파동으로 경제가 난관에 봉착한데다가 민정이양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체암퐁 군사정권의 심각한 부정부패는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1978년 7월 마침내 아체암퐁은 국가구제평의회(NRC) 의장직을 사임하고 프레드 아쿠포(Fred Akuffo, 1937~1979) 중장이 그 자리에 올랐다. 아쿠포는 1979년 1월 민정이양을 위한 정당활동을 허용하고, 제헌의회가 채택한 행정상의 실권을 가지는 대통령 선거와 새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1979년 6월 18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식량난이 심각한 가운데 아쿠포 군사정권이 민정이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공군 청년장교들의 쿠데타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주모자인 제리 롤링스(Jerry Rawlings, 1947~) 공군 대위가 체포되었다. 1979년 6월 3일 밤 제리 롤링스를 지지하는 군부는 그를 구출한 그 이튿날인 4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국가구제평의회(NRC)를 축출한 뒤 사병을 포함한 10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된 군사혁명평의회(Armed Forces Revolutionary Council, AFRC)를 수립했다. 제리 롤링스는 군사혁명평의회(AFRC)를 의장에 취임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AFRC는 아체암퐁 군사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부패한 정부 고위관료와 군 장성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등 숙청을 단행했다. AFRC는 아쿠포 군사정권이 공약한 대로 6월 18일에 총선거, 7월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다. 1979년 9월 제리 롤링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인민국가당(People's National Party, PNP)의 힐라 리만(Hilla Limann, 1934~1998)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으로 복귀하였다.
1979년 9월 24일 힐라 리만 대통령의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리만 정권은 출범 후 정치안정과 경제회복, 민주적 질서확립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집권당의 분열과 연합세력의 이탈, 경제 침체 등으로 정치사회적 불안이 점차 증가했다. 리만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경제안정화 정책을 추진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집권당내의 반발세력을 무마하고, 군소정당을 규합하여 동조세력의 확장에도 노력했다. 군사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군부의 개편과 군 통수체계의 조정, 군인 처우개선 등의 정책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가져온 심각한 경제난으로 생활고에 찌들린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1981년 12월 31일 제리 롤링스는 약 5백명의 아크라 경비부대를 이끌고 2차 쿠데타를 일으켜 리만 대통령을 체포하고 제3공화국을 전복시켰다. 제리 롤링스는 임시 통치기구인 임시국가방위평의회(Provisional National Defense Council, PNDC)를 설치하고 의장에 취임했다. 임시국가방위평의회(PNDC)는 1979년의 입법과 행정, 사법 등 3권분립을 규정한 헌법을 중단시키고 포고령으로 통치했다. PNDC는 국가평의회(State Council)를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시켰으며, 모든 정당활동도 금지했다. 전국의 마을과 공장에는 PNDC의 하부조직인 인민방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국가원수 겸 PNDC 의장 제리 롤링스는 장기간에 걸친 군사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점증하는 불만과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민주화 바람, 원조국들의 민주화 압력에 직면했다. 제리 롤링스는 1991년 1월 신헌법 제정계획을 발표하고 헌정복귀를 시사했다. 8월에는 신헌법 제정을 위한 의회가 구성되었다. 1992년 1월 헌정복귀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뒤, 3월에는 헌정복귀와 민정이양 일정이 공표되었다. 4월 신헌법안이 국민투표로 채택되고, 5월에는 정당의 결성과 정치활동이 허용되었다.
군복을 벗은 제리 롤링스는 민족민주회의(National Democratic Congress, NDC)을 창당했다. 1992년 11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민주회의(NDC) 후보 제리 롤링스는 유효투표의 58.3%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2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NDC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1993년 1월 9일 제리 롤링스 대통령의 제4공화국 정부가 출범했다.
1994~1995년 북부에서의 인종 분규로 1000여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이후 인종 분규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토지문제나 부족장의 권한과 관련해 북부의 타말레 등지에서 소규모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96년 12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선에서는 유효투표의 57.2%를 얻은 NDC의 제리 롤링스 후보가 39.8%를 얻은 신애국당(New Patriotic Party, NPP)의 존 쿠푸오르(John Kofi Agyekum Kufuor, 1938~) 후보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총선에서는 200개 선거구 중 NDC가 133석, 신애국당(NPP)이 60석을 차지했다. 1997년 1월 제리 롤링스는 제4공화국 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부통령에는 제리 롤링스의 러닝 메이트인 존 아타 밀스(John Atta Mills, 1944~)가 취임했다.
2000년 12월 19년에 걸쳐 장기집권한 제리 롤링스가 3선 출마를 금지한 헌법규정에 따라 불출마한 가운데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신애국당(NPP)의 존 쿠푸오르 후보가 2차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여당후보인 NDC의 존 아타 밀스 부통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다. 가나는 독립 이래 최초로 민선정부에서 민선정부로 정권이 이양되었다. 대선과 동시에 실시된 총선에서도 여당인 NPP는 총 200개 선거구중 100석을 차지하면서 승리했다. NDC는 92석, 인민의국민회의(People's National Convention, PNC)는 3석, CPP는 1석, 무소속은 4석을 각각 얻었다.
쿠푸오르 정부는 과중한 외채와 물가의 상승 등 경제현안의 해결이 시급했다. 과도한 외채부담과 대외수지 악화를 민간경제의 활성화와 외국인 투자유치를 통해서 경제를 회복시키려 했던 쿠푸오르 정부는 2001년 최빈개도국외채면제프로그램(HIPC)에 참가했다. 가나는 IMF와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경제성장과 빈곤퇴치 전략을 추진했다.
2002년 9월부터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민화해위원회(National Reconciliation Commission, NRC)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인권침해사례에 대한 증언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일부 증인들은 제리 롤링스 전 대통령이 인권탄압에 직접 가담했다고 증언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제리 롤링스는 국민화해위원회(NRC)의 소환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과거 PNDC 정권 때인 1984년에 발생한 판사 납치 및 살해범으로 사형된 PNDC 간부의 증언 테이프가 존재하지만 소재는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2003년 2월 쿠푸오르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의장에 당선된 뒤 코트디브아르 내전과 라이베리아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섰다. 경제안정과 자유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한 가나는 2004년 7월 HIPC을 졸업했다. 이에 따라 주요 채권국들은 가나에 대한 채무면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외채 60억 달러 가운데 35억 달러를 단계적으로 면제받게 되었다.
2003년 10월에는 아샨티족의 왕인 아산테헤네(Asantehene)가 가나대학교(University of Ghana) 건물 증축 기공식을 주관하자 아크라 지역의 가족(Ga)이 반발하는 등 종족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2월 새로 발효된 가나 이민법(section 16 of Immigration Act 2000)에 따라 가나인과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는 정기적으로 체류증을 갱신할 필요 없이 영구히 가나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쿠푸오르는 ECOWAS 의장직 취임 이후 2003년 12월 19일 ECOWAS 정상회담에서 2004년도 ECOWAS 의장으로 재선되었다.
2004년 12월 7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NPP 후보 존 쿠푸오르는 52.45%를 얻어 44.64%를 얻은 NDC 후보 존 아타 밀스를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알하지 마하마(Alhaji Aliu Mahama, 1946~)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인민의국민회의(PNC)와 대통합민중당(Great Consolidated Popular Party, GCPP), 모든곳의모든가나인들(Every Ghanaian Living Everywhere, EGLE) 등 세 연합정당(Grand Coalition, GC)의 후보로 나선 에드워드 마하마(Edward Mahama, 1945~) 후보는 1.92%, CPP의 조지 아구데이(George Aggudey, 1945~) 후보는 1%를 얻었다.
쿠푸오르는 개인적인 인기, 안정적인 경제정책, 선진국들의 원조에 의한 꾸준한 경제성장, 민주화와 언론자유화에 대한 가나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가나는 1992년의 민주화 헌법과 2000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아샨티 지역과 그레이트 아크라(Great Accra, 수도 아크라와 Tema시) 지역은 여당(NPP)을 지지하고, 볼타와 북부 지역은 야당(NDC)을 지지함으로써 지역 감정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북부 타말레 인근에서는 총격으로 인해 2명이 사망하는 등 소규모 소요도 있었다.
총선에서는 230석 가운데 NPP가 128석, NDC는 94석을 차지했다. 그외 PNC는 4석, CPP는 3석, 무소속은 1석을 얻는데 그쳤다. 여당인 NPP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야당인 NDC와 전 대통령 제리 롤링스측에서는 선거관리위원회(Electoral Commission, EC)가 편파적이었다고 비난했다. 아파리 가이언(Kwadwo Afari-Gyan, Afari gyan) 선거관리위원장은 NDC 지지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누락되었다는 NDC와 제리 롤링스의 주장에 대해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정성을 강조했다.
2004년 12월 10일~12일까지 아크라의 TV 3 부설 가마영화관(GAMA Film Theatre)에서 한국영화제가 개최되었다. 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 'JSA', '취화선', '집으로', '가문의 영광' 등 4편의 영화와 한국을 소개하는 기록영화가 상영되었다. 이후 한국 대사관은 한국 영화제를 매년 개최해 오고 있다.
2006년 6월 18일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아프리카 7개국 순방중 1964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방문이래 42년만에 처음으로 가나를 공식 방문했다. 쿠푸오르 대통령과 원자바오 총리는 18일 양국간 정상회담을 갖고 3천만 위안 규모의 무상지원 경제기술협력 협정, 정보통신 프로젝트를 위한 2억5천만 위안 양허성 차관 제공협정, 농촌 초등학교 지원 협정,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 전시센터 건설 협정, 2백만 위안 상당의 말라리아 치료제 제공 협정, FM 라디오 방송국 및 CCTV 방송의 무선 서비스 조사 협정을 체결했다. 원 총리는 이튿날 중국 정부의 무상원조로 건설된 오판코-엔사왐 구간 도로 개통식 참석했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원유, 구리, 목재 등 천연자원과 시장의 확보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쿠푸오르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가나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국제사회로부터 투자안정 지역으로 평가받았다. 2008년 12월 7일 실시된 대선에서는 빈곤추방과 민생안정 공약을 내세운 NDC의 존 아타 밀스 후보가 NPP의 나나 아쿠포-아도(Nana Akufo-Addo, 1944~) 전 외교장관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3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존 아타 밀스는 '가나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될 것임을 약속한다'면서 '앞으로 어떤 차별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총선에서는 230석 가운데 NDC가 114석, NPP는 107석을 각각 차지했다. CPP 1석(NPP 성향), PNC는 2석(NDC 성향) 군소정당은 9석을 얻는데 그쳤다.
아타 밀스 전 대통령
2012년 12월 7 대선 및 총선에서는 마하마(Mahama)가 대통령이 재선되었고, NDC가 집권 여당을 유지했다. 의석수는 NDC 148석, NPP 122석, 기타 정당 또는 무소속이 5석을 차지했다. 마하마 정권 하에서 2015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는 상황이 초래됐다. 금과 카카오, 원유 가격이 하락하고, 집권 이후 방만한 재정 운영 등으로 2013년 말부터 세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재정적자가 GDP의 67.1%에 달했으며 전력난 악화로 단전도 자주 발생했다. IMF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가나에 총 6억6,420만 SDR 규모(9억1,800만 달러)의 구제금융을 해줬다.
2016년 12월 7일 실시된 대선 및 총선에서는 제1야당(NPP)의 아쿠포아도(Akufo-Addo)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NPP는 국회 275개 의석 중 160석을 차지하여 안정적 정치 기반을 마련했다. 2017년 1월 아쿠포아도는 대통령 취임 이후 1지역 1공장(One District one Factory) 정책, IMF 구제금융 조기 졸업 추진, 적극적 외국투자유치 등을 통해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차기 대선 및 총선은 2020년 12월에 실시된다.
1992년 4월 28일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가나의 정체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으로 대통령이 국가원수 겸 행정부 수반이다. 임기 4년의 정부통령은 보통선거로 선출된다. 입법부는 단원제로 4년 임기의 국회의원 230명으로 구성된다. 전시에는 임기가 12개월간 연장될 수 있다. 총선은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실시된다. 주요 정당은 NPP와 NDC다. 사법권을 행사하는 대법원은 재판을 관할하고, 행정과 입법의 위헌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
가나는 주로 농업과 광업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이다. 경제는 어렵고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한다. 1인당 GNP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한때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공업화되고 생활수준도 높은 나라였으나 산업 국유화와 1966년 이래 지속된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경제적 기반이 인접국들에 비하여 약화되었다. 1995~1997년에 IMF와 공동으로 실시한 경제구조조정으로 임금인상과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고 그로 인해 화폐가치도 떨어졌다.
1999년 가나의 경제성장률은 4.2%였으나 2000년에는 1%로 떨어지는 등 경제여건이 매우 악화되었다. 2007년 현재 가나의 경제성장률은 6.2%이다. GDP의 산업별 구성은 2006년 현재 농업 37.3%, 광공업 25.3%, 서비스업 37.5%이다.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대단히 높아 노동력의 산업별 구성 비율이 2005년 현재 농업 56%, 광공업 15%, 서비스업 29%이다. 주요 수출품은 금과 카카오다.
농업에서 카카오는 매우 중요한 수출 작물이다. 카카오 수출은 총수출액의 40% 이상을 차지하는데, 정부가 카카오 생산자에게 지불하는 가격이 세계시장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 그래서 카카오 재배농민들은 정부에 판매하지 않고 밀수출을 선호한다. 그외 커피, 야자, 코프라, 바나나도 소량 수출된다. 주산물은 북쪽의 카사바멜론, 마, 타로토란과 남쪽의 기장, 옥수수, 수수, 쌀 등이다. 가축은 염소와 양을 주로 기른다. 소는 북부지역과 아크라 평원에서만 사육이 가능하다.
목재는 가나의 중요한 수출품이며, 어업은 내수시장에서 중요하다. 지하자원은 세계 2위의 망간 매장량을 비롯하여 금, 보크사이트 등이 풍부하다. 금, 다이아몬드, 망간, 보크사이트 등의 광물수출은 국가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석유는 솔트 폰드(Salt Pond)와 케이프 코스트(Cape Coast) 사이의 연안에서 소량 생산된다.
공업과 광업, 건설업은 1970년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1980년대에는 원자재와 기계의 수입부족으로 답보상태에 있다. 제조업은 식료품, 음료, 담배, 직물, 목재, 정유, 자동차, 화학약품, 의약품, 금속 등 수입대체산업이 주류를 이룬다. 거의 수력발전에 의존하는 전력은 볼타 강의 아코솜보 댐이 공급한다. 1998년에는 전력 부족으로 경제성장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무역, 운수, 금융, 일반행정, 서비스 등은 GNP의 50%를 차지한다. 도로와 철도는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2006년 현재 총연장 953km인 가나의 철도는 전부 협궤로 아크라와 쿠마시, 타코라디 간을 연결한다. 침대차는 미리 예약해야 한다. 가나 철도항만청은 철도와 함께 타코라디와 테마 두 항만시설을 경영한다.
테마 항에서는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카메론, 남아공 등지의 항구로 선박이 운항된다. 외국과의 해운은 국영 블랙스타라인이 담당하고 있다. 항공사업은 가나항공(Ghana Airways)이 국제선과 국내선을 운항한다. 아크라에는 코토카 국제공항(Kotoka Airport)이 있다. 코토카 공항에서는 거의 모든 서아프리카 국가로 운항하는 항공편이 있다. 런던과 뉴욕 항공편도 있다. 쿠마시, 타말레, 타코라디 등 12개소에는 국내공항이 있다.
수로 교통로는 볼타 강, 앙코브라 강, 타노 강(Tano River)을 따라 열려 있으며, 볼타 호 상류에도 개설되어 있다. 야페이 퀸(Yapei Queen) 호는 아코솜보를 출발하여 24시간 볼타 호를 가로질러 200km 이상 떨어진 북서쪽의 예지(Yeji)까지 정기적으로 운항한다. 예지에서는 페리가 100km 더 북서쪽의 부이페( Buipe)와 그 동쪽 15km 지점의 마콩고(Makongo)까지 운항한다.
가나의 무역수지는 세계시장의 코코아 가격에 따라 변동이 심하다. 1999년 주요 수출품인 카카오와 금의 가격 하락, 주요 수입품인 원유의 가격 급등으로 경제가 악화하여 국제수지와 재정수지가 나빠졌다. 증가하는 예산적자는 금융기관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 2007년 누적 무역적자와 재정부담으로 13억 1600만 달러의 해외 원조와 차관을 받았다.
2006년 현재 주요 무역상대국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 스페인, 벨기에, 프랑스, 나이지리아, 중국, 남아공 등이다. 주요 수출품은 금, 코코아, 목재, 참치, 보크사이트, 망간광, 다이아몬드 등이다. 과거에는 카카오 수출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1996년부터 금의 비중이 높아졌다. 주요 수입품은 석유화학제품, 기계류, 운송설비, 화학제품, 식료품 등이다
가나에는 약 75개의 부족이 있지만, 총인구의 1%가 넘는 부족은 10개 정도에 불과하다. 주요 부족은 아칸족(44%), 몰레-다그바니족(Mole-Dagbani, 15.9%), 에웨족(13%), 가-아단베족(8.3%), 구안족(Guan, 3.7%), 구르마족(Gurma, Gourma, Gourmantche, 3%), 요루바족(Yoruba, 1%) 등이다. 그외 아당메족(Adangme), 판티족, 다고아족, 후아리족도 있다. 아칸족의 아샨티 왕조는 서아프리카에서 얼마 안되는 모계사회이다. 200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코피 아난(Kofi Atta Annan, 1938~) 전 UN 사무총장은 판티족 출신이다. 약 1.5%를 차지하는 영국인 등 유럽인과 러시아인, 시리아인, 레바논인들은 경제적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가나의 공용어는 영어이다. 가어, 판티어, 트위어, 하우사어, 다그바위어, 은지마어 등 7개 부족어도 사용된다. 국영방송과 관보에는 8개의 부족어가 사용된다. 가나 정부는 그중에서 3개 부족어를 인위적으로 통합한 아칸어를 국어로 권장하고 있다. 가나는 대부분 프랑스어 사용국인 서부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지역통합에 발맞추어 프랑스어 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가나의 프랑스어 교육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아부리여자중등학교(Aburi Girl's Secondary School)의 프랑스어 교육센터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종교는 기독교 45%, 토착신앙 42%, 이슬람교 13% 순이다. 가나는 서아프리카에서 기독교 인구율이 가장 높지만, 전통적인 정령신앙도 여전히 흔하다. 각 종족들은 자신들만의 신앙 체계를 갖고 있지만 대형 사원이나 성문화된 경전은 없다. 신앙과 전통은 모두 구전으로 내려온다. 에웨족이 믿는 신은 600 가지가 넘는다.
가나의 인구증가율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2008년 현재 인구증가율은 1.928%로 식량생산을 앞지른다. 출생률과 사망률도 세계 평균치보다 높다. 그것은 영양실조가 일반화되어 있어 국민들의 건강상태가 대체로 불량하기 때문이다. 3.1%에 이르는 높은 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의 비율로 인해 유아사망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가나에서는 원숭이나 주머니쥐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의 매개로 전염되는 말라리아, 황열병, 수막염 등 풍토병에 감염될 위험이 높다. 많은 사람들이 홍역이나 말라리아, 간염, 백일해 등의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정부는 의료시설이 없는 시골지역의 보건소 증설과 도시에 널리 퍼진 전염병 퇴치를 위해 상하수도시설 개량사업을 펼치고 있다. 1960년부터 가나 국민의 평균수명은 55세로 서부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가나의 교육제도는 열대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가장 발달해 있다. 가나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학교가 있으며, 교육 수준이 높고 교육 환경도 좋은 편이다. 따라서 가나인들의 문맹률은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낮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은 무상 의무교육이다. 아동은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6년간 다닌다. 중등학교 진학률도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 중고등학교는 3년 단일제로 한국과는 달리 구분이 없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대학으로 가는 수능고사라고 할 수 있는 기초학력인증시험(Basic Education Certificate Examination, BECE)을 치른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종합대학인 아크라 교외 레곤(Legon)에 있는 가나대학교를 비롯해서 과학기술대학교, 쿠마시공업대학교, 케이프코스트대학교 등 27여개 국공립 또는 준국공립 대학교가 있다. 그외 교원양성학교와 직업학교도 있다. 모든 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가나의 문화는 전통적 토속문화에 유럽풍과 지중해풍, 동양적인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다. 가나인들의 전통적인 문화예술에는 우주론, 철학, 종교, 정치사회적 사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가나인들은 BC 4000년 전부터 도자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매년 50만개 이상의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볼타 지역의 크관드, 부메, 쿨이, 아샨티 지역의 판코노, 북쪽의 바빌레, 옌디, 타메레, 서쪽의 라루라 등의 도시는 도자기 제조로 유명하다.
약 2000년 전부터 가나의 제련공과 대장장이는 전통적인 기술로 농기구, 사냥도구, 무기, 장신구 등을 만들었다. 최근에도 북부의 제련공들은 재래식 방법으로 철과 탄소 함유 강철을 만든다. 아칸족은 금 채굴에 전통적인 방법과 도구를 사용하여 1500~1800년 사이에 150만kg 이상의 금을 채굴하였다. 아산티족의 황금 마스크, 샌들, 칼, 장신구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아샨티족의 켄트천
수제 의자와 전통 직물인 아딘크라(Adinkra), 아칸족과 에웨족의 화려한 색의 수직포인 켄트천(kente cloth)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목각 제품인 수제 의자의 문양과 장식은 종족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가부장의 존재를 암시한다. 아칸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딘크라 상징은 여러 기원들을 상징하고 의사소통의 도구로도 사용된다. 켄트는 가나 추장의 상징물로 주로 가나 남쪽에서 입으며 밝은색의 여러 추상적인 문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나의 각 부족은 가족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결혼이나 장례식 등 가족 행사를 매우 중요시한다. 가나인은 추수나 결혼, 출생, 성년, 장례 등과 관련하여 추장과 부족을 중심으로 축제의식을 벌인다. 은크루마 시대의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에서도 각 부족의 전통을 일소할 수는 없었다.
가나의 관광 명소는 우선 아크라 중심부의 마콜라 마켓(Makola Market)과 서쪽의 카네시에 마켓(Kaneshie Market), 남서부의 작은 반도 위에 있는 제임스 타운(James Town)이 있다. 또 바다를 배경으로 자리잡은 군대 퍼레이드 장소로 수용인원 3만명을 자랑하는 독립광장(Independence Square), 아크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인 오수 성(Osu Castle), 아트센터(Arts Centre), 눙구아(Nungua)의 코코 비치(Coco Beach)도 좋다.
아샨티 왕국의 고대 수도 쿠마시는 지금도 아샨티 지방의 중앙이자 서아프리카에서 최대 문화중심지다. 쿠마시에는 아샨티 왕의 궁전과 활기 넘치는 거대한 중앙시장이 있다. 아샨티 역사박물관과 도서관, 크래프트 샵, 전시회장 컴플렉스인 국립문화센터(National Cultural Centre), 아산테헤네의 궁전(Asantehene's Palace)으로 더 잘 알려진 마냐이아 궁전( Manhyia Palace)에는 그 유명한 황금 의자(Golden Stool)가 보관되어 있다. 쿠마시 주변 마을 본와이어(Bonwire)는 켄트천, 판크로노(Pankrono)는 도자기, 아휘아(Ahwiaa)는 목공예, 엔톤소(Ntonso)는 아딘크라천으로 유명하다.
노예무역 장소였던 해안 요새와 마을(Coastal Forts & Villages)도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해변이 멋진 세냐 베라쿠(Senya Beraku) 마을에는 포트 굳 호프(Fort Good Hope)가 있으며, 페이트(Fete) 해변은 서핑으로 유명하다. 작은 어촌 아팜(Apam)의 주요 관광지는 포트 패이션스(Fort Patience)이고, 가장 중요한 유적지는 케이프 코스트(Cape Coast) 마을 중심에 있는 케이프 코스트 성(Cape Coast Castle)이다. 모리(Mori)에는 골드 코스트에 세워진 최초의 네덜란드 요새인 포트 나쏘(Fort Nassau)가 있다. 비리와(Biriwa)에는 가장 좋은 해변과 맛있고 값싼 해물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아누마부(Anumabu)에는 멋진 요새 중 하나인 포트 윌리엄(Fort William)과 아름답게 채색된 토속 아사포 사원(asafo shrine)이 있다. 카쿰 자연공원(Kakum Nature Park)과 엘미나 요새도 볼 만하다.
아부리 식물원(Aburi Botanical Gardens)에는 전세계의 다양하고도 이국적인 식물이 많이 있다. 아크라 서쪽 코크로바이트(Kokrobite)마을의 아프리카음악예술아카데미(Academy of African Music & Arts)에서는 주말에 무료공연을 보거나 북의 리듬을 배울 수도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항구와 새로 단장한 요새를 볼 수는 딕스코브와 보수아 (Dixcove & Bosua) 마을, 노예 수용 창고를 새로 단장한 요새인 포트 메탈 크로스(Fort Metal Cross)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볼타 호수와 아코솜보 댐도 추천 관광지다. 카쿰 자연공원(Kakum Nature Park), 오와비 야생동물 보호구역(Owabi Wildlife Sanctuary), 비아 국립공원(Bia National Park), 부이 국립공원(Bui National Park), 몰레 동물보호구역(Mole Game Reserve)에서는 사바나와 열대우림을 탐험하면서 야생동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가나의 주요 축제는 황금의 도시 쿠마시의 마냐이아 궁전(Manhyia Palace)에서 42일마다 두 번 주요 족장들과 수도사들이 참석하는 공식행사인 아콰시디 페스티벌(Akwasidee Festival), 5월에 윈네바(Winnebah)에서 열리는 사슴사냥 페스티벌(Deer Hunt Festival)인 아보아카이어(Aboakyer), 어업 시즌의 시작을 축하하는 축제로 7월 첫 번째 목요일 날 열리는 엘미나의 바카투에 페스티벌(Bakatue Festival) 등이 있다. 축제가 열리면 현지 족장들이 화려한 복장으로 마을에서 퍼레이드를 하며 그 뒤를 가수, 무용수, 죽마를 탄 사람들이 이어서 행진을 한다.
9월 첫째 토요일 케이프 코스트(Cape Coast)에서 페투 페스티벌(Fetu Festival)이 열리면 하루 종일 현지 족장들의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범아프리카 역사연극축제(Pan-African Historical Theatre Festival, Panafest)는 서로 다른 문화간의 연극축제로 짝수 해의 12월에 전국적으로 열린다.
가나인들에게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와 권투다. 그외 하키도 인기 있는 종목이다. 농구나 테니스, 크리켓 등도 가나인이 즐기는 스포츠다.
가나 축구팀은 'Black Star'라는 별칭으로 사랑받고 있다. 가나 축구대표팀은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2회 우승했으며, 아프리카컵 대회에서 4회나 우승할 정도로 아프리카 최정상 팀이다. 2006년 가나는 독일이 주최한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16강에 오르기도 했다. 같은 해 한국은 가나와 가진 두 번의 친선경기에서 모두 3:1로 패배한 바 있다.
가나가 배출한 국제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로는 아베디 펠레 (Abedi Ayew Pele), 앤서니 '토니' 예보아 (Anthony 'Tony' Yeboah), 새뮤얼 쿠포어(Samuel Osei Kuffour), 마이클 에시엔(Michael Essien), 설리 알리 문타리 (Sulley Ali Muntari), 아사모아 기안 (Asamoah Gyan), 존 멘사(John Mensah), 한스 사르페이(Hans Sarpei), 하미누 드라마니(Haminu Dramani) 등이 있다. 첼시 미드필더로 활약중인 에시엔은 아프리카 최고 몸값의 선수다.
권투선수로는 3차례나 세계 챔피언을 지낸 아주마 넬슨(Azumah Nelson)이 유명하다. 그의 전적은 39승 28KO 2무6패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복서로 알려져 있다.
가나의 일간지는 '데일리 그래픽(Daily Graphic, 10만부)', '가나이안 타임스(Ghanaian Times, 5만부)', 가나이안 크로니클(Ghanaian Chronicle, 5만부) 등이 있다. 그외 데일리 가이드(Daily Guide), 비지니스 & 파이낸셜 타임즈(Business & Financial Times)도 있다. 주간지는 '위클리 미러(Weekly Mirror, 7만부)', '위클리 스펙테이터(Weekly Spectator, 십2만부)', 비지니스 위크(Business Week) 등이 있다.
방송은 1995년 규제완화가 이루어져 민간 TV와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면허가 36개 발급되었다. 텔레비전은 팔시스템B(PAL-System B)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자체 방송국 4개를 소유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인 국영 가나 브로드캐스팅(GBC-TV)은 영어와 주요 부족어로 방송을 보내고 있다. 그외 가나 최초의 민간 TV 방송국인 TV3, 상업방송인 Metro TV, Net2, Crystal TV, Viasat1, 위성방송인 DSTV 등이 있다. 라디오는 GBC, Joy FM, Choic FM, Vibe FM, Citi FM, BBC World 등이 있다. 인터넷 호스트수는 2,899개(2007년), 이용자는 609,800명(2006년)이다. 가나 정보부는 방송에 관련된 법과 업무를 장악하고 통제한다.
TV3에서는 '겨울연가', '불새', '호텔 리어', '풀하우스', '대장금', '겨울 소나타', '궁' 등 다수의 한국 드라마들을 인기리에 방영하는 등 가나인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 추세에 있다. 특히 '대장금'은 저녁 9시 프라임 타임에 방영될 만큼 인기 있는 드라마였다.
가나는 1957년 독립 당시부터 30여년간 반식민지, 범아프리카주의, 비동맹 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지역내 단결 차원에서 아프리카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 및 ECOWAS 등을 통한 남남협력 강화를 제창해 왔다. UN에도 가입했다. 제리 롤링스 정권초기에는 사회주의 정책으로 친리비아 및 친쿠바, 반미 정책으로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소원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정책으로 전환하여 경제발전에 필요한 원조와 투자촉진을 위한 서방 선진제국과의 실리적인 협력증진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가나는 OAU의 다음 단계로 등장한 아프리카연합(AU) 출범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영연방의 회원국이기도 한 가나는 2006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11차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에서 준회원국이 되었다. 은크루마 정권 때에는 신흥 아프리카 국가들 중 선진국으로서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중국은 가나의 주요 원조국이다. 1961년이후 중국은 1억3천5백6십만 달러의 차관 및 무상원조 자금을 공여해 왔는데, 이중 5천3백십만 달러의 채권을 포기하였다. 중국 정부의 원조 자금으로 가나는 국립극장, 군경 숙소, 병원 등을 건설했다. 프랑스는 천2백7십만 유로의 채권을 포기하고, 가나의 빈곤 퇴치를 위한 지원을 약속하였다. 독일은 코피 아난 국제평화유지활동 훈련센터와 아크라-쿠마시(Kumasi) 간의 도로 건설을 지원했다. 이탈리아는 가나와 이중과세 방지 협정을 체결했다.
가나는 한국과 수교하기 훨씬 이전인 1964년 12월 2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 상주공관은 1978년 개설하였으나 1998년 2월 철수하였다. 현재는 상주공관을 두고 있지 않고 주나이지리아 북한대사가 가나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가나는 주중국 대사가 북한대사를 겸임한다.
한국은 가나와 1977년 11월 14일에 수교했다. 한국은 1978년 5월 4일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1981년 6월에는 양국간 문화경제협력협회가 결성되었고, 한국 교민이 건립한 한·가나새마을농장이 양국 정부의 지원하에 운영되고 있다. 같은 달 한-가나 친선협회도 창립되었다. 이후 1987년 문화협정, 1990년 경제 기술 및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1992년에는 양국간 투자보장협정, 1993년 의료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가나는 냉전시대에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노선을 유지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인 경제개발 협력을 위해 한국과의 보다 긴밀한 실질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40차 IAEA 총회와 제 51차 유엔 총회 이래 가나는 북한 핵문제에 대한 결의안 채택을 지지하였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도 한국의 입후보 및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한국은 1978년부터 2001년까지 272만 달러를 무상원조하였으며, 다수의 태권도 사범과 의료단원, 국제협력의사를 파견했다.
1997년 7월 쿠푸오르 대통령 후보가 개인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2000년 기준 대한 수입은 5390만 달러, 대한 수출은 360만 달러였다. 가나의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보일러, 기계류, 전기기기, 특수사 로프, 플라스틱 등이다. 수출품은 코코아, 원목, 알루미늄, 공업용 다이아몬드 등이다. 가나는 2001년 8월 31일에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가나에 진출한 기업은 SK건설, 대우건설, 삼성(주), SK(주) 등이다. AFKO(수산), AFKO IMEX(무역), GLOTEC(건설), WORCON(건설) 등은 현지 교포들의 기업이다. 2004년 9월 현재 교민은 선원 200여 명을 포함 총 560 명이었다. 교민들 대부분은 수산업과 무역업, 건축업 종사자들이다. 테마에는 AFKO 그룹의 지원으로 1981년 9월에 설립된 한글학교가 있다. 초중등 과정 7개 학급에 총 39명이 재학(2008년 현재)하고 있는 한글학교에서는 토요일 9~12시에 국어, 수학, 국사, 한문 등을 가르친다.
입국비자는 주한 가나대사관이나 다른 나라 주재 가나대사관에서 취득할 수 있다. 입국시에는 황열병 예방접종 카드를 소지하여야 한다. 가나 입국 2주일전에 말라리아약을 복용하고 황열병 예방접종을 받는다. 입국 후에는 파상풍 접종을 총 3회에 걸쳐 받는다. 가나인들은 매우 친절하고 자긍심이 높다. 가나의 치안상태는 비교적 안전하지만 간혹 총기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 외출하는 것을 자제하고, 혼자서 택시를 탈 때도 조심해야 한다.
가나에서 가장 환영받는 통화는 미국 달러, 프랑스 프랑, 독일 마르크, 영국 파운드이다. 캐나다 달러나 일본 엔화 등 다른 통화를 환전할 때는 환율이 매우 불리하다. 주요 도시에는 외국환 환전소(Forex)가 있지만 아크라를 벗어나면 여행자수표는 받지 않는다. 몇 곳의 은행에서는 비자와 마스터 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 그러나 수수료와 거래승인을 받기 위한 텔렉스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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