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 지도
코트디부아르 공화국(Republic of Côte d'lvoire, République de Côte d'Ivoire, 꼬뜨디봐르)은 상아해안국(象牙海岸國, Ivory Coas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쪽은 가나, 북쪽은 부르키나파소와 말리, 서쪽은 기니와 라이베리아의 국경과 접한다. 남쪽은 대서양의 기니 만에 면해 있다. 1986년까지 국호는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였다. 면적은 32만 2460㎢, 인구는 약 2000만 명(2007년)이다. 수도는 1983년부터 공식적으로 야무수크로(Yamoussoukro, 야무쑤끄로)이지만 실질적인 행정과 경제 수도는 아비장(Abidjan)이다. 아비장에는 각국 대사관 대부분이 주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개발은행의 본점이 개설되어 있어 정치경제와 외교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비장은 이 나라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국제공항이 있다. 화폐단위는 시에프에이프랑(CFA-franc)이다.
코트디부아르는 크게 남부의 좁은 해안지역, 적도의 삼림지대, 북부의 사바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해안지대는 대체로 굴곡이 완만한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적도 삼림지대의 열대우림(熱帶雨林, tropical rain forest)은 지난 1세기 동안 커피나 카카오, 야자 등의 재배를 위해 마구잡이로 남벌하여 그 면적이 크게 줄었다. 북부의 사바나 고원 지역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다. 북부 말리와의 국경 부근은 나이저 강 유역에 속한다. 주요 하천은 반다마 강(Bandama, 950km), 꼬모에 강(Comoe, 900km), 사산드라 강(Sassandra, 650km), 까발리 강(Cavally, 600km) 등이다. 까발리 강은 라이베리아와 국경선을 이룬다. 최고봉은 님파 산(Nimfa, 1,750m)이며, 그외 모미 산(Momi, 1,302m), 통꾸이 산(Tonkoui, 1,293m) 등이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북위 8°선을 경계로 남부 해안지대의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와 북부 내륙지대의 아열대성 사바나 기후대로 구분된다. 월평균기온의 변동폭이 적으며, 두 지역 모두 연평균기온은 26∼28℃이다. 11~3월까지는 따뜻하고 건조하며, 무덥고 습한 6~10월에는 기온이 40°C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북부는 건조한 편으로 연평균강우량이 1,400㎜이고, 12∼2월의 건기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남부는 연평균강우량이 1,500∼2,000㎜에 달한다. 남부 우림지대는 대체로 12~3월의 대건기(32℃), 4~7월의 대우기(22℃), 8~9월의 소건기(28℃), 10~11월의 소우기(30℃)로 구분된다.
열대우림에는 아프리카 마호가니(mahogany)와 아프리카 티크(teak)인 이로코(iroko) 등의 고급 수종(樹種)이 자라며, 거대한 숲돼지, 적갈색의 영양인 봉고, 해우(海牛)와 같은 희귀동물과 많은 야생동물이 발견된다. 북부의 사바나 지역에는 약 10종의 영양을 비롯해서 사자, 코끼리 등이 서식한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이 지역에는 전기 구석기시대인 BC 15000~10000부터 인간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고대의 선주민들은 현주민들의 조상들에게 추방되었거나 흡수된 것으로 추정한다. 16세기 이전에 이 나라로 이주한 부족들은 아보쏘(Aboisso) 지역의 아칸족(Akan people) 일족인 에호틸레족(Ehotilé), 프레스코(Fresco) 지역의 코트로우(Kotrowou)족, 그랜드 라후(Grand Lahou) 지역의 제히리족(Zéhiri), 디보(Divo) 지역의 에가족(Ega)과 디에스족(Diès) 등이다.
최초의 역사기록은 초기 로마 시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여 이 지역의 우림지대까지 오가며 소금과 황금, 노예 등의 대상무역에 종사했던 북아프리카 상인들의 연대기에 나온다. 당시 대상무역의 종착지였던 젠네(Djénné, Jenne, Dienné, 디엔네)와 가오(Gao), 통북투(Tombouctou, Timbuctu, 팀북투) 등 대수단 제국들(great Sudanic empires)은 주요 무역중심지로 성장했다. 이들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역로를 장악함으로써 주변국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수단 제국들은 또한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슬람은 아랍 상인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서부 수단(지금의 말리)으로 들여왔으며, 여러 주요 통치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수단 제국의 통치자들이 이슬람을 수용한 11세기부터 이슬람은 코트디부아르의 북부에서 남부로 퍼져 나갔다. 최초의 수단 제국인 가나 제국(Ghana empire)은 4~13세기까지 지금의 동부 모리타니에서 번성했다. 전성기였던 11세기경 가나 제국의 영토는 대서양에서 통북투까지 이르렀다. 가나 제국이 쇠퇴하자 말리 제국(Mali Empire)이 강력한 무슬림(Muslim) 왕국으로 성장하여 14세기초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말리 제국의 영토는 코트디부아르 북서부의 오디엔(Odienné, Odienn)까지 포함되었다.
말리 제국은 14세기말 내부의 권력투쟁과 봉신왕국들의 반란에 의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봉신왕국중 송가이(Songhai) 제국은 14~16세기까지 번성했다. 송가이도 또한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분은 주민들 대부분을 남부의 우림지대로 이주케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나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남부의 밀림지대는 북부의 강대한 정치세력들에 대한 방어벽 역할을 하였다. 남부 해안의 원주민 부락민들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멀리서 온 상인들을 통해서 외부세계와 접촉했다. 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했다.
15세기부터 상아와 노예를 약탈하기 위해 유럽 열강들이 이 지역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15세기 후반부터 상아가 이 지역의 주요 산출품이 되면서 유럽인들은 이곳의 해안을 상아해안(象牙海岸)이라고 불렀다. 1470년 포르투갈의 상선이 케이프 팔마스(Cape Palmas, Teeth Coast)에 들어와 노예와 황금, 상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1637년 지금의 가나 황금해안 부근의 아시니(Assinie)에 프랑스 선교회가 설립되었다. 17세기말 프랑스는 원주민 추장들과 결탁하여 아시니(Assinie)와 그랑바상(Grand Bassam)에 교역소를 설치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코트디부아르에 5개의 중요한 왕국이 번영했다. 17세기 지금의 가나에 있던 아샨티 제국(Ashanti Empire, Asanteman, Asante Empire, Ashanti Confederacy, 아샨티 연맹, 1701~1896)으로부터 추방된 아칸족의 일족인 아브론족(브롱족)이 아브론 왕국(Abron Kingdom, Gyaaman, Gyaman, Jamang, 1450~1895)을 세웠다. 봉두쿠(Bondoukou, Bonduku, Bontuku) 남부에 정착한 이후 아브론 왕국은 점차 디울라족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였다. 봉두쿠는 이슬람과 상업의 주요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왕국의 꾸란(Qur'an, Koran, Quran, 쿠란, 코란) 학자들은 서아프리카 전역에서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18세기초 세쿠 와타라(Sekou Ouattara)는 디울라족(Dyula, Dioula, Juula)을 이끌고 말리 제국의 이슬람화 정책에서 자유로왔던 세누포족(Sénoufo, Senufo)의 거주지인 중북부 지역에 무슬림 콩 제국(Kong Empire, Wattara Empire, Ouattara Empire, 1710~1895)을 세웠다. 대상들의 상권을 보호한 콩 제국은 무역으로 번영했지만 종족적 다양성과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점차 약화되었다. 콩 제국은 1895년 사모리 투레(Samori Ture, Samory Touré, Samori ibn Lafiya Ture, 1830~1900)에 의해 멸망하였다. 18세기 중반 아샨티 제국에서 추방된 또 다른 아칸족은 코트디부아르 중동부 지역에 바울레족(Baoulé) 왕국, 아그니족(Agni, Anyi)의 두 왕국인 인데니족(Indénié) 왕국과 산위족(Sanwi) 왕국을 세웠다.
바울레 왕국은 3명의 통치자를 거치면서 아샨티 제국처럼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정치, 행정 구조를 갖췄으나 마침내 3개의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왕국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바울레 왕국은 프랑스의 정복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아그니 왕국의 후예들은 코트디부아르가 독립한 이후에도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산위족은 끊임없이 코트디부아르와 분리된 독립왕국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영국은 18세기 후반 왕실아프리카회사(Royal African Company)를 설립하여 이 지역에 대한 무역진출의 기반을 잡았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에 요새를 구축하고 영국을 견제하면서 노예무역에 주력하였다. 1842∼1843년 프랑스는 현지 추장들로부터 토지의 일부를 양도받았다. 1870년 프랑스·독일전쟁의 발발로 철수한 프랑스군 대신 무역업자들은 마르셀 트레슈 라플렌(Marcel Treich-Laplène, 1860~1890)을 중심으로 기지를 유지하면서 황금해안(黃金海岸, Gold Coast)의 영국세력에 저항하였다.
1885년 베를린회의 이후 프랑스는 점차 세력권을 확장하였으며, 트레슈 라플렌은 현지 추장들과 조약을 맺어 1892년경에는 코트디부아르 내륙지방까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편입시켰다. 1892년 12월 프랑스-라이베리아 협정으로 코트디부아르 국경이 확정되고,1893년 3월에는 프랑스의 자치령이 되었다. 1893년 코트디부아르는 세네갈에서 완전히 분리된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1894년 루이 구스타브 뱅제르(Louis Gustave Binger, 1856~1936)가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였다.
1894년 알마니 사모리(Almamy Samory=Samori Ture)가 비싼두구(Bissandugu)에 세운 와술루 제국(Wassoulou Empire)은 프랑스의 침략으로 수도를 다바카라(Dabakala)로 옮겼다. 와술루 제국은은 근대화된 무기를 갖춘 군대로 봉두쿠의 아브론 왕국과 코로고(Korhogo) 이슬람 왕국 등 소왕국들을 정복하고, 1897년 5월 콩 제국을 통합함으로써 지금의 코트디부아르 전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9월 사모리 투레가 프랑스에 체포됨으로써 와술루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와술루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프랑스가 세금 부과와 문명화 계획을 시행하자 토착민들의 저항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1903년 프랑스는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하였다. 1908년 새로 부임한 프랑스의 2대 총독 가브리엘 앙굴방(Gabriel Louis Angoulvant, 1872~1932)은 강압통치를 실시했다. 1909년 앙굴방은 디다(Dida) 왕국의 쿠아씨 딜루예(Kouassi Diluye) 왕을 가봉으로 축출하였다. 1912년에는 부아케(Bouaké, Bouake, Bwake)까지 315km의 철도를 부설하였으나 토착민들은 무장투쟁으로 저항했다. 1908년 이후 프랑스는 11만5천정의 소총을 회수하였으나 1914년까지 원주민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계속되었다. 1915~1916년 프랑스는 아그니족을 황금해안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열대우림지대의 황열병(黃熱病)도 프랑스인들을 괴롭혔다. 1918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는 무력으로 코트디부아르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33년 오트볼타(Haute Volta, 현재의 부르키나파소)의 일부가 코트디부아르에 합병되었다. 1934년 프랑스는 아비장을 식민지 수도로 정하였다. 1935년 남부 해안지역에서 오트볼타의 보보디울라소(Bobo Dioulasso)를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1950∼1954년에는 아비장 항(港)이 건설되었다. 프랑스는 아비장-부르키나파소간 철도와 항만을 건설하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가혹한 조세를 부담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0∼1942년까지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 비시 정권(Vichy France)의 통치령이었다. 1944년 지주 출신 의사이자 아프리카인 커피생산자 대표였던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는 아프리카농업연맹(African Agricultural Union)을 조직했다. 1945년에는 우푸에 부아니가 이끄는 아프리카 블록(African Blog)은 수도 아비장 시의원 선거에 승리했다. 두 달 뒤 부아니는 코트디부아르 대표로 프랑스 의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부터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연합(French Union)을 구성하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한 식민지가 되었다.
1946년 10월 우푸에 부아니는 코트디부아르민주당-아프리카민주연합(Democratic Party of Côte d'Ivoire-African Democratic Rally, PDCI-RDA)을 창당하여 프랑스 의회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이때 자신의 이름에 바울레어(Baoul, Baoule)로 '불굴의 힘'이란 뜻을 가진 부아니(Boigny)를 추가했다. 부아니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그가 이끈 아프리카민주연합(RDA)은 1940년대말 프랑스 공산당과 연합하여 활동하면서 각종 시위와 파업을 주동하였다.
1947년 북동부의 주민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오트볼타를 분리하였다. 1956년 부아니는 구역법(Loi Cadre, 1956 Overseas Reform Act) 제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에 힘입어 코트디부아르는 1957년 자치정부 수립권을 획득했다. 같은 해 북동부의 오트볼타도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1958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해체되자 오트볼타와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59년 5월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령 베냉,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와 함께 화합협의(Conseil de l'Entente, Council of Accord, Council of Understanding)를 체결했다.
1960년 8월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독립했다. 10월 의회는 대통령제 헙법을 제정하여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5년 임기의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으로 각료 임명권을 가졌으며,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1월 초대 대통령에 부아니가 선출되었다. 국회의원 선거도 실시되었는데 코트디부아르민주당(Democratic Party of Côte d'Ivoire, PDCI)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은 모두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5년 임기의 국회의원 선거는 경선제였지만 유일 합법정당인 코트디부아르민주당(PDCI) 소속이 아니면 후보가 될 수 없었다.
1964년 4월 어니스트 보카(Ernest Boka) 전대법원장이 부아니에 대한 암살음모를 고백한 뒤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69년에는 아비장에서 부아니의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여 이듬해까지 지속되었다. 1973년에는 시오 쿨라후(Sio Koulahou) 대위 등 12명의 위관급 장교들이 정부전복 음모혐의로 체포되었다.
1980년 5월 로마 카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기간중 육군 장교가 부아니 암살을 기도했다. 부아니는 로마 카톨릭 신자였다. 6월 부아니는 34개의 국영기업중 18개 기업을 폐쇄했다. 9월 열린 제7차 코트디부아르민주당-아프리카민주연합(PDCI-RDA) 총회는 대통령직 집단후계제를 채택하고, 필로페 예이스(Philoppe Yace) 사무총장을 해임시켰다. 10월 실시된 대선에서 부아니는 99.99%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2년 2월 대학생들의 시위로 아비장 대학이 폐쇄되었다가 3월 다시 문을 열었으나 부아니 정권은 대학생들의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1985년 10월 열린 제 8차 PDCI-RDA 총회는 부통령제를 폐지했다. 같은 달 실시된 대선에서 부아니는 6선에 성공했다. 1990년 2월 개혁을 요구하는 반 부아니 소요와 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10월 실시된 대선에서 부아니는 7선 대통령이 되었다. 같은 해 부아니는 고향인 야무수크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1993년 12월 7일 무려 34년 동안 권좌를 지킨 부아니는 마침내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1993년 12월 헌법에 의거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 국회의장이 대통령직 잔여임기를 물려받았다. 권력투쟁에서 패한 알라사네 와타라(Alassane Dramane Ouattara, 1942~) 총리는 사임했다. 1994년 4월 베디에는 PDCI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베디에는 정치적 억압과 부정부패로 비난을 받았다.
1995년 10월 다당제하에서 최초로 실시된 대선에서 베디에가 와타라의 입후보 자격을 박탈하자 두 주요 야당인 공화주의자연합(Rally of the Republicans, RDR)과 아이보리인민전선(Ivorian Popular Front, FPI)은 선거 보이코트를 선언했다. 베디에는 96%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1월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집권 PDCI는 172석중 147석을 휩쓸었다. 1996년 10월 열린 제10차 PDCI-RDA 정기총회는 베디에 대통령을 총재로 재선출하고 당내 친정체제를 강화하면서 베디에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1999년 12월 24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로버트 구에이(Robert Guéï, 1941~2002) 육군참모총장을 수반으로 한 구국위원회(CNSP, junta)가 정권을 장악했다. 베디에는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2000년 10월 22일 군사 과도정부의 민정이양 계획에 따라 대선이 실시되었다. 대선은 PDCI의 로버트 구에이 후보와 아이보리인민전선(FPI)의 로랑 그바그보(Laurent Koudou Gbagbo, 1945~) 후보 2파전 양상이었다. 알라사네 와타라는 대법원이 그의 국적을 부르키나파소로 판정하면서 후보자격을 박탈당했다.
선거 결과 로랑 그바그보가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PDCI의 40년에 걸친 통치가 막을 내렸다. PDCI는 하루아침에 야당신세로 전락했다. 구에이가 승리를 주장하자 시민들은 아비장에서 그바그보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10월 25일에는 수도 야무수크로에서 정부군과 북부의 와타라 공화주의자연합(RDR) 총재 지지세력간 충돌로 유혈사태가 발생(Yopougon 사태)했다. 10월 26일 그바그보는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구에이는 라이베리아 국경지대로 추방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바그보 정권이 와타라 총재의 입후보 자격을 박탈하자 RDR은 총선 불참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RDR 지지자들과 정부군이 충돌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서방국가들은 그바그보 정부에 대해 원조제공을 유보하고 민주적 선거 절차를 따르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총선 결과 225석 가운데 FPI가 96석, PDCI가 94석, 아이보리노동자당(Ivorian Party of Workers, Parti ivoirien des travailleurs, PIT)이 4석, 코트디부아르민주동맹(Union of Democrats of Côte d'Ivoire, Union des Démocrates de Côte d'Ivoire, UDCI)이 1석, 미래세력운동(Movement of the Forces of the Future, Mouvement des Forces de l'Avenir, MFA)이 1석을 차지했다. RDR은 총선 보이코트에도 불구하고 5석을 얻었다. 2001년 11~12월에는 국민화합을 위한 포럼이 개최되었다. 2002년 1월에는 정치안정을 논의하기 위해 4대 정치지도자들이 회동했다.
그바그보가 이탈리아를 방문중이던 2002년 9월 19일 약 7백명의 강제퇴출 대상 군인들이 아비장에서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내무장관과 특수군(Gendarme) 지휘관 등 정부의 고위인사들을 살해하였고, 정부군은 반란주동 혐의로 구에이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 그바그보 정부는 구웨이 전 대통령을 반란주동자로 발표하고, 국영 TV를 통해 거리에서 죽은 구웨이의 시신을 방영했다. 반군측은 구웨이와 그의 가족, 측근 등 15명이 자택에서 살해된 뒤 그에게 반란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시신을 거리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와타라 RDR 총재는 독일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프랑스 대사관으로 옮겨 2달간 머문 뒤 가봉으로 피신했다. 그의 집은 방화로 전소되었다. 와타라를 반란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한 그바그보 지지자들은 RDR과 반군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프랑스 대사관을 규탄하고 반프랑스운동을 전개했다.
아비장의 반란은 정부군에 의해 하루만에 진압되었으나 반란군의 잔여 병력은 이 나라 제2의 도시인 중부의 부아케, 중북부의 코로고(Korhogo)를 점령했다. 단순 불만 군인들의 폭동으로 시작된 반란은 곧 남부를 장악한 정부군과 북부를 장악한 반군간의 내전양상으로 발전했다. 반군이 다시 아비장을 위협하자 프랑스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탈리아 방문을 중단하고 귀국한 그바그보는 텔레비젼 성명을 통해 반군들의 잔여세력이 외국 이민 노동자들의 거주지인 판자촌에 숨어 있다고 발표하였다. 헌병과 민병대는 주민들을 공격하면서 수천 채의 집을 파괴하고 불질렀다. 북부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반군과의 초기 휴전은 최고의 코코아 산지를 두고 벌어진 전투로 단기간에 끝나고 말았다. 프랑스는 휴전지역의 평화유지를 위해 4천명의 군대를 보냈다.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으로부터 온 군벌과 용병으로 구성된 민병대들은 그들이 점령한 서부에서 이권을 챙겼다.
2002년 11월 6일 그나싱베 에야데마(Gnassingbe Eyadema, 1937~2005) 토고 대통령을 단장으로 한 ECOWAS 평화협상 중재단은 정부군과 반군의 협상 중재를 시도했으나 양측의 비타협적 자세로 결렬되고 말았다. 반군은 그바그보 대통령의 퇴진과 헌법 개정, 반군에 대한 사면 등을 요구한 반면에 정부는 반군의 무장해제와 헌법 질서 인정 등을 요구했다. 에야데마의 협상 중재 노력이 실패하자 ECOWAS는 프랑스가 새로운 협상 중재를 주도할 것을 촉구하였다.
2003년 1월 15일 프랑스는 파리 근교 마르쿠시스(Marcoussis)에서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평화협상을 개최하였다. 1월 24일에는 자크 시라크 (Jacques Rene Chirac, 1932~) 프랑스 대통령, AU 의장 타보 음베키(Thabo Mvuyelwa Mbeki, 1942~) 남아공 대통령, 코피 아난(Kofi Atta Annan, 1938~) UN 사무총장, ECOWAS 국가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코트디부아르의 평화정착을 위한 파리 정상회담이 열렸다.
마르쿠시스 평화협정은 반군의 무장해재와 사면, 중앙정부의 통치력 인정, 헌법질서와 국가제도 인정, 공정한 선거 실시를 위한 선거관련 규정의 개선과 행정 조치, 토지소유제도 개혁, 새로운 국민화합정부의 구성, 신임 총리에 대한 국정운영 실권 부여, 반군과 반정부 인사에 대한 신변안전 조치, 정치인의 신변보호, 언론의 자유 등을 규정하였다. 또 합의문 이행을 감독할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아비장에 설치하기로 한 위원회는 UN, ECOWAS, AU, EU, IMF, 세계은행, 프랑스, 미국 등 G-8 국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바그보는 파리 정상회담에서 마르쿠시스 합의안을 수락하기로 하고 국민화합정부의 신임 총리에 전 총리와 국민화합포럼 의장을 역임한 세이두 디아라(Seydou Diarra, 1933~)를 지명했다. 파리 정상회담에서 그바그보가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직을 반군측에 할애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친 그바그보 청년단체들은 프랑스인의 재산이나 시설에 대한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는 등 격렬한 반 프랑스 폭력시위를 일으켰다. 시민단체들도 연일 반 마르쿠시스 평화협정 시위를 벌였다. 그바그보는 대 국민담화를 통해 마르쿠시스 합의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책적 '제안(proposal)'으로서 헌법과 충돌할 경우 자국의 헌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일단 이 합의안을 시행해 보자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2003년 2월 그바그보는 행정부 수반으로서 자신이 갖는 권한을 총리에게 이양하였다. 3월 디아라는 집권 FPI 10명, 반군인 코트디부아르애국운동(Patriotic Movement of Côte d'Ivoire, Mouvement patriotique de Côte d'Ivoire, MPCI)과 대서부아이보리인민운동(Ivorian Popular Movement of the Great West, Mouvement populaire ivoirien du Grand Ouest, MPIGO) 그리고 정의평화운동(Movement for Justice and Peace, Mouvement pour la justice et la paix, MJP) 9명, 제1야당 PDCI 7명, RDR 7명, PIT 2명, UDPCI 2명, MFA 1명, UDCY 1명 등 반군과 야권이 대거 참여하는 신내각을 구성함으로써 국민화합정부가 출범하였다. 정부군과 반군간 휴전이 성립되고, 야간통행금지령이 폐지되었다. 외형적 권력구조 측면에서는 마르쿠시스 평화합의가 이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친 그바그보 세력은 마르쿠시스 평화합의는 프랑스가 반군과 RDR에 영합하여 정부에 강요한 것으로 헌법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이들이 디아라의 신내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국민통합정부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2003년 5월 3일 정부군과 반군간 포괄적인 전투중지 합의에 따라 UN 코트디부아르 미션(MINUCI)이 출범하고, 7월 정부군과 반군은 전쟁종결 선언서에 서명했다.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프랑스군 4천명, ECOWAS군 천3백명이 투입되었다. 연락장교단 위주로 구성된 MINUCI는 정부군과 반군간 군사적 연락업무를 담당했다. 8월 6일에는 사면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정부군과 반군, RDR간 상호불신으로 적대관계가 지속되고 있어 마르쿠시스 합의 이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2003년 9월 13일 그바그보 대통령은 국민화합정부 출범이래 공석으로 있던 국방장관에 르네 아마니(Rene Amani), 내무장관에 마틴 블레우(Martin Bleou)을 임명했다. 반군측은 두 장관의 임명이 그바그보측의 일방적 조치이며, 그바그보가 국민화합정부에 대해 실권을 부여하지 않는 등 마르쿠시스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반군측은 국민화합정부에서 철수하는 동시에 무장해제의 이행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2004년 3월 아비장에서 마르쿠시스 평화협정의 이행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군의 치안병력간 충돌로 최소 120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폭력사태가 악화되자 외국인들의 철수가 이어졌다. 아비장의 대량학살극은 계획적이었음이 드러났다. 4월 군병력 6,240명, 민간경찰요원 350명으로 구성된 UN 코트디부아르 평화유지군(ONUCI, UNOCI)이 출범하였다. 프랑스 주둔군(Licorne) 4천명까지 포함하면 평화유지 다국적군은 1만명이 넘는 규모였다. UNOCI가 중립지대(Zone of Confidence)에 배치된 후에도 그바그보와 반군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2004년 7월 UN과 AU, ECOWAS의 주선으로 가나의 수도 아크라(Accra)에서 코트디부아르 각 정파 대표와 아프리카 13개국 정상, UN 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평화정착을 위한 정상회의가 열렸다. 내전 당사자들은 대통령 후보자격과 관련한 헌법의 9월말 이전 개정 완료, 반군과 비정규 무장조직의 무장해제 및 무기회수의 10월 15일 이전 개시 등을 핵심내용으로 한 아크라 합의(Accra III Agreement)에 서명했다. 그러나 아크라 합의 조치 시한이 별다른 성과도 없이 지나갔다.
2004년 11월초 반군이 무장해제를 거부하면서 휴전협정은 폐기되었다. 그바그보는 부아케를 점령하고 있던 반군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이는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었다. 정부군 전투기가 부아케의 프랑스군 기지를 오폭하여 프랑스군 9명과 미국인 1명이 사망했다.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정부군의 Su-25기 두 대와 5대의 헬리콥터를 파괴했다. 아비장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보복성 폭력 소요가 일어났다. 대규모 유혈사태로 프랑스인 8천명을 포함한 1만명의 외국인들이 국외로 철수하자 극심한 경기불황이 닥쳤다.
2004년 11월 15일 UN 안보리는 정전협정을 위반한 코트디부아르에 대한 제재결의안 제1572호를 채택하고 무기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평화과정 방해자에 대한 해외자산을 동결하고 여행을 금지하는 등의 추가제재를 추진했다. 12월 16일 UN 안보리는 코트디부아르 평화합의 불이행을 개탄하고 AU의 중재노력을 지지한다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2005년 2월 1일 UN 안보리는 코트디부아르에 무기금수 조치를 강화하는 제1584호 결의안을 채택했다. ONUCI와 프랑스군은 무기금수 이행을 감독하고 유입무기를 수거, 폐기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결의안 채택 45일이내 정부군과 반군은 보유무기의 목록을 접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4월 3일 정부와 반군, 야당 대표들은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의 주선으로 프리토리아(Pretoria)에서 평화회의를 열었다. 내전 당사자들은 상호 적대행위 중단, 무력사용 포기, 반군 및 친정부 비정규 무장조직에 대한 무장해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프레토리아 합의(Pretoria Agreement)에 서명했다.
2005년 4월 26일 그바그보는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의 중재안을 수용하여 와타라 RDR 총재를 비롯한 모든 후보들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5월 14일 정부군과 반군은 야무수크로(Yamoussoukro)에서 무장해제 프로그램을 시행할 구역을 지정하고 대상자를 확인하는 등의 준비과정을 거쳐 6월 27일~8월 10일까지 완료하기로 합의했다. 6월 1일 서부 모엥카바리(Moyen-Cavally) 지역의 두에쿠에(Duékoué, Duekoue)에서 종족간의 갈등에 따른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최소 70명이 사망하고 10만여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6월 4일 UN 안보리는 onUCI와 프랑스군의 임무기한을 7개월 연장하고, 코트디부아르 선거 감시를 전담할 UN 사무총장 고위대표(High Representative)를 임명토록 하는 내용의 결의안 제1603호를 채택했다. 같은 달 내전 당사자들은 제2차 프리토리아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7월 그바그보는 헌법 48조에 의거해 평화정착을 위한 개혁입법 조치를 완료했다.
2005년 6월~8월 기간중 코트디부아르의 인권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반군지역이나 정부군 통제지역, 군사대치지대(zone of confidence) 등 전국적으로 즉결처형, 정치적 동기에 따른 체포와 고문, 강간 등 비인도적인 인권침해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부녀자와 아동에 대한 참수나 할복 등 잔인한 인권침해 사례도 증가했다. 정부 보안군의 절도범에 대한 즉결처형이 증가하는 등 아비장에서도 인권침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국제인권기구들도 양측에 포로로 잡힌 비전투원들에 대한 학대와 코코아 생산 노동자들 사이에 어린이 노예가 존재한다고 발표했다. 6월 29일자로 발간된 미국 'Foreign Policy'지가 발표한 실패국가지수(Failed States Index)에서 코트디부아르는 전세계에서 국가위험도가 가장 높은 국가로 선정되었다.
2005년 9월 28일 임기만료 1달여를 앞두고 그바그보는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야당과 반군이 주장하고 있는 10월 30일 이후 과도체제 수립 방안은 위헌이며, 헌법 제38조 규정에 따라 신임 대통령이 선출되어 대통령직을 인계하기 전까지 자신이 대통령직을 유지할 것임을 밝혔다. 반군의 무장해제 거부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10월 6일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에서 열린 제40차 아프리카연합(AU) 평화안보이사회는 그바그보의 임기를 최대 1년 연장할 것과 임기말 이전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10월 21일 UN 안보리는 AU 권고사항을 승인하는 1633호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그바그보의 임기는 최대 1년 연장되었다. 12월 28일 정부의 운영과 내각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찰스 배니(Charles Konan Banny, 1942~) 총리의 과도정부가 출범했다.
2006년 1월 아비장에서 대규모 시위와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2월 28일 배니 총리의 주선으로 야무수크로에서 그바그보 대통령, 기욤 소로(Guillaume Soro, Guillaume Kigbafori Soro, 1972~) 반군지도자, 베디에 PDCI 총재, 와타라 RDR 총재 등 내전 당사자 대표들이 참석한 영수회담이 열고 제 정파간 대화의 재개, 모든 형태의 폭력 비난, 공공안전 증진 모색, 예정된 기간내에 대통령 선거의 실시 등 평화정착을 위한 기본원칙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10월말로 예정된 대통령 임기만료 시한 전에 대선의 실시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2006년 4월 7일 드니 사수 응게소(Denis Sassou Nguesso, 1943년 ~ ) 콩고 대통령은 코트디부아르를 방문하여 내전 당사자들을 차례로 면담하고 평화이행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어온 무장해제와 신분확인 작업의 즉각적 동시 추진 원칙을 이끌어 냈다. 그동안 친 그바그보 세력은 무장해제의 우선적 실시를, 반군은 신분확인 작업의 우선적 추진을 주장해왔다. 4월 20일 국제실무그룹(GTI) 제6차 회의는 평화정착에 대한 고의적 지연이나 방해를 통해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그바그보에게 10월말 이후 대통령으로서의 권한 연장을 부여하지 않을 것을 시사함으로써 국제사회의 평화회복 노력에 동참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2006년 8월 17일 중서부 다우크로(Daoukro)에서 야당연합인 G-7은 PDCI의 베디에, RDR의 와타라, 반군지도자 소로 등이 참석한 가운데 그바그보의 임기 연장 움직임에 반대하는 요지의 성명문을 채택하였다. 그바그보는 담화문을 통해 10월 31일 이전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지 않는 경우 자신의 대통령의 지위는 자동 연장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대선 실시가 불가능해지자 11월 1일 UN 안보리는 제1721호 결의안을 채택하고 이날부터 대통령 선거를 최대 1년간 연기하고, 이 기간중 그바그보의 대통령직과 배니의 총리직 유지를 승인했다. 결의안에 의해 찰스 배니 총리의 국정운영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군과 경찰 통수권도 부여받았다. 그바그보는 UN 안보리 결의안이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12월말 그바그보는 새로운 평화회복 방안으로 반군과의 직접대화, 중립지대(Confidence zone)의 해체, 평화유지군 및 프랑스군 철수, 찰스 배니 총리의 교체 등을 제안했다.
2007년 1월 12일 반군 무장세력이 가나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노에(Noe) 검문소를 습격하여 쌍방간에 6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10명이 체포되었다. 10명중에는 공군 장교 출신으로 구에이 전 참모총장의 경호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 언론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 총참모장인 두에(Doue) 장군이 연루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2007년 3월 4일 부르키나파소의 수도 와가두구(Ouagadougou)에서 그바그보 대통령과 반군단체연합인 코트디부아르신체제(Forces Nouvelles de Côte d'Ivoire, New Forces, FNCI, FN) 지도자 기욤 소로는 평화합의문에 서명하였다. 신체제(FNCI, FN)는 기욤 소로가 이끄는 코트디부아르애국운동(MPCI), 단족(Dan, Gio, Yakuba, 기오족, 야쿠바족)이 주축을 이룬 대서부아이보리인민운동(MPIGO), 가스파르 델리(Gaspard Déli)가 이끄는 정의평화운동(MJP)으로 구성되었다.
합의문의 주요 내용은 4주이내 새로운 통치구조 마련 및 5주이내 과도정부의 구성, 과도정부 구성후 2주이내 신분확인 작업(audiences foraines)과 보충적 출생증명서 발급, 합의문 서명후 2주이내 남북 양측의 군통합을 위해 통합사령부의 설치와 남북 참모총장의 공동지휘, 국민화합과 평화 확보를 위한 중립지대의 해체와 중립지대에 새로 설치한 녹색선(ligne verte)에 관측소의 설치, 와가두구 평화합의문 이행을 위해 그바그보 대통령, 소로 반군지도자, 와타라 RDR 총재, 베디에 PDCI 총재, 블레이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e, 1951~)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으로 구성되는 영구협력체(CPC)의 구성 등이다.
2007년 4월 7일 반군지도자 기욤 소로를 총리로 한 과도정부가 출범하였다. 4월 16일 중립지대가 해체됨으로써 내전 발발이후 분열되었던 국토의 통합과 평화의 정착이 진행되었다. 7월에는 북부의 반군 지역에 대한 행정과 사법기관이 복구되었다. 7월 30일 반군 거점지역인 부아케에서 그바그보 대통령과 소로 총리,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 아마두 투마니 투레(Amadou Toumani Toure, 1948~) 말리 대통령, 파우레 그나싱베(Faure Essozimna Gnassingbe, 1966~) 토고 대통령, 토마스 야이 보니(Thomas Yayi Boni, 1952~) 베냉 대통령,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Joao Bernardo Vieira, 1939~) 기니비사우 대통령 등 아프리카 6개국 국가원수들과 각국 외교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평화행사(Flame of Peace)가 개최되었다. 이들은 무장 및 동원해제와 사회재복귀(Disarmament Demobilization Reintegration, DDR) 과정에서 회수한 무기를 소각하면서 남북의 분단상황 및 전쟁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와가두구 평화합의안이 국제사회에 의해 강요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으며, 자국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의 주선하에 내부적으로 평화안을 도출한 것이라 설명하면서 조기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반면에 소로 총리는 와가두구 평화합의안 이행과정이 되돌릴 수 없는 대세라고 하면서 영구적인 평화정착 위한 대통령의 노력과 책무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주요 야당인 PDCI의 베디에 총재와 RDR의 와타라 총재는 와가두구 평화합의안과 부아케 평화행사를 겉으로는 환영하면서도 당일 행사에는 불참함으로써 앞으로 대통령 선거 준비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두 야당은 대통령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7월초 종전의 UN 고위선거관리 대표직을 폐지한 안보리 결의안을 재고해 줄 것을 UN에 요청했다.
부아케 평화행사는 내전의 종식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코트디부아르의 통합과 평화를 향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2007년 6월 29일 소로 총리가 탑승한 비행기에 대한 로케트탄 발사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세는 여전히 불안하다. 내전의 공식적인 종료 선언에도 불구하고 코트디부아르인들은 여전히 내전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국토는 남북으로 분열된 채 남부는 정부군, 북부는 신체제(FN) 반군, 서부는 1만명 병력의 친정부 민병대가 장악하고 있다. 와가두구 평화안은 반군의 통제하에 있는 북부에 대한 정부 행정력의 부재, 반군의 정부군 통합시 계급 정리 문제 해결의 어려움, 무장해제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위한 재원 부족 등으로 구체적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1999년의 쿠테타와 2002년의 내전 발발이래 코트디부아르에는 아직도 약300만정 이상의 무기가 민간인들의 수중에 있다. 따라서 종족 또는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면 언제든지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물가의 폭등으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무장지역 뿐만 아니라 아비장 등 대도시까지 유입된 무기로 살인, 강도, 상해 사건 등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경찰력의 부족은 치안의 부재를 초래하여 범죄 예방은 물론 범인 검거율도 매우 저조하다.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아프리카의 작은 파리로 불리어졌던 아비장은 정치 경제적 불안으로 저녁 8시 이후부터는 인적이 드물고 상점들도 일찍 문을 닫아 어둠의 도시로 변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가 정치적 안정은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되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가 출범할 때만 비로소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현재 와가두구 평화협정에서 합의한 2008년초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한다는 조항이 제대로 지켜질 지조차 불투명하다. 신분확인을 통한 국적부여, 정부군과 반군의 완전한 통합, 민병대 같은 무장단체의 해체와 무장해재 등 난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코트디부아르는 명목상 대통령 중심제 민주공화국이다. 국회는 단원제로 의석은 225석이다. 이 나라는 1995년 5월 최초로 다당제가 허용되었으며, 현재 11개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정당은 인민전선(FPI), 코트디부아르신체제(New Forces, FNCI, FN), 코트디부아르애국운동(MPCI), 민주당(PDCI), 공화주의자연합(RDR), 아이보리노동자당(PIT) 등이다.
코트디부아르는 열대농업을 기반으로 한 개발도상국이다. 독립 이래 꾸준히 경제개발을 추진한 결과 아프리카 국가들중 국민소득수준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세계표준에 비해 1인당 GNP는 비교적 낮다. 1960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농업기술이 발달되었으며 일찍부터 대외투자가 이루어져 왔다. 독립이후 20여년간 코트디부아르는 연평균 경제성장률 7%를 기록하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영하고 있는 나라중 하나였다. 그러나 주요 수출품인 코코아와 커피의 국제가격 폭락,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무리한 개발계획으로 막대한 외채를 지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경제적 위기에 빠진 코트디부아르는 1989년 9월부터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과 IBRD(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국제부흥개발은행 또는 세계은행) 관리체제에 들어감으로써 예속경제에 편입되었다. 1999년초 IMF가 요구한 경제개선 노력이 불충분하다는 판정을 받아 IMF 융자가 정지되었다. 같은 해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 이후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의 원조도 중단되었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물가도 상승했다. 또한 인플레의 증가와 함께 실업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 6월 코트디부아르 정부의 부채 미상환에 따라 세계은행은 경제와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고정 전화망 독점 사업자인 CI-텔레콤은 1997년 프랑스 텔레콤사(Fracnce Telecom)의 자회사인 FCR에 매각되었다. 최대의 인터넷서비스업체는 미국 프로디지사의 자회사인 아프리카온라인이다. 이 나라의 전화망과 인터넷서비스는 프랑스와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업과 임업은 GNP의 약 33%, 수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코코아는 세계 제1위, 커피는 세계 제4~5위 생산국이다. 코코아는 전세계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코코아와 커피, 목재의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60%를 차지한다. 최근에는 고무, 바나나, 면화, 야자 등의 생산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주요 식량작물은 마, 플랜틴, 카사바, 쌀, 옥수수, 기장 등이다. 이 나라에는 아프리카 최대의 참치항이 있다. 참치 어획고는 연간 9만 톤에 달한다.
광업, 제조업, 공공사업은 GNP의 17%를 차지한다. 광업에서는 다이아몬드와 석유, 금, 니켈, 망간, 철, 보크사이트 등이 생산된다. 가장 중요한 광물자원은 다이아몬드와 석유다. 1970년대 아비장 남쪽 40km 떨어진 해저에서 유전 2개소가 발견되었다. 2004년 추정 석유 총 매장량은 1억 배럴, 천연가스 총 매장량은 1조 5백억 큐빅피트(cu.ft.)다. 금은 연간 1,300㎏ 정도 생산된다. 제조업은 1980년대까지 농수산물가공업을 중심으로 빠른 성장률을 보였으나 최근에는 광업, 화학, 건설 분야가 활발하다. 전력은 주로 천연가스와 수력발전으로 연간 4,867gwa를 생산하여 인근 부루키나파소, 가나, 베넹, 토고 등에 수출도 하고 있다.
주요 수출상대국은 프랑스(14.5%), 미국(7.6%), 네덜란드 (12.9%), 독일(5.2%), 말리(4.6%) 등이다. 주요 수입상대국은 프랑스(23.1%), 나이지리아(16.9%), 이탈리아(4.2%), 독일(3.1%), 중국(8.0%) 등이다. 이 나라의 외채는 2002년 현재 118억 달러다.
코트디브와르도 시에라리온의 경우처럼 다이아몬드 분쟁지역이다. 다이아몬드는 북부의 FN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만 생산된다. 무기와 군수품 구입을 위해 불법적으로 거래되는 일명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래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제시장으로 밀반출되고 있다. 피묻은 다이아몬드 밀매로 북부 반군이 거둬들이는 돈은 연간 최고 2천3백만 달러로 추정된다. 북부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는 일단 말리나 가나의 공식 다이아몬드 시장에서 세탁한 뒤 최종적으로 벨기에의 다이아몬드 무역도시 안트베르펜(Antwerpen)과 아랍에미리트 등 국제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코트디부아르에는 60개 이상의 독립부족이 있다. 이중 7개의 대부족이 있다. 아칸(Akan) 그룹으로 콰어파의 트위어(Twi)를 쓰는 바울레족(Baoule, Baoul, 11.9%)과 아니이족(Anyi, Agni, 아그니족, 10.7%), 크루어(Kru, Kroo) 그룹인 베테족(Bete, Beti, 19.7%)은 주로 남부에 거주한다. 볼타어(Volta, Gur, 구르어) 그룹인 세누포족(Senufo, Senoufo, 14.7%)과 로비족(Lobi, 5.4%), 보보족(Bobo)은 주로 북부에 거주한다. 만데어(Mande) 그룹인 말링케족(Malinke, Maninka, Mandingo, Manding, 마닝카족, 6.5%), 단족(Dan, Gio, 기오족, 5.6%)은 주로 중서부에 거주한다. 그외 에브리족(Ebrie, Ebri), 구로족(Gouro), 야쿠바족(Yacouba), 디울라족(Dyula, Diula, Dioula, Jula)도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외국인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약 5백만명의 외국인중 약 350만 명은 정치와 경제 사정이 나쁜 라이베리아, 부르키나파소, 기니 등 주변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다. 이들중 2/3는 무슬림이다. 외국인의 70%를 차지하는 부르키나파소인은 대부분 카카오 농업에 종사한다. 비(非)아프리카인은 약 4%를 차지한다. 최대 인구집단은 레바논인(13만 명)과 프랑스인(2만 명)이다. 그외 베트남인, 스페인인, 아랍인,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도 소수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2000년 7월 23일 헌법 29조 5항은 '공용어는 프랑스어다.'라고 규정했다.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프랑스어 외에 약 65개의 언어가 쓰이고 있다. 디울라어는 무역과 상업에서 통용될 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쓰는 언어이다.
종교는 이슬람 39%, 기독교 33%, 토착신앙 12%, 무종교 16% 순이다. 북부 주민과 아프리카 이민자 대부분은 이슬람이다. 기독교 신자 가운데 아프리카 대주교구 소속 로마 가톨릭교 신자들이 20%를 차지하며, 개신교는 감리교도가 가장 많다.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갈등의식이 잠재해 있다.
코트디부아르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실과 코트디부아르인 교사의 부족이다. 초등학교는 의무제이지만 학령기 아동의 75% 정도만이 학교에 다닌다. 중등학교 교육은 프랑스 국적을 가진 교사들이 많이 맡고 있다. 15세 이상의 문맹률은 51.5%로 매우 높은 편이다. 아비장에는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이 있다.
코트디부아르의 국민보건과 위생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다. 평균수명은 50세이고, 전체인구의 절반 정도가 15세 미만이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세계평균보다 훨씬 높으며, 연평균인구증가율은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말라리아, 이질, 결핵, 성병 등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다.
신문은 Fraternite Matin등 11개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다. TV는 국영 RTI1과 RTI2, 유료 텔레비전사인 커널 호리즌 코트디부아르 등 14국이 있고, 라디오는 국영 Radio National과 Frequence Ⅱ 등 10국이 있다.
서아프리카제국경제공동체(ECOWAS)의 일원인 코트디부아르는 비동맹 중립을 표방하고 있으나 친서방 온건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독립 이후에도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프랑스와 특수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도모해왔다. 2004년 11월 정부군의 반군 지역 폭격시 프랑스군 부대 폭격으로 프랑스와의 관계가 한때 악화되기도 했다. 과거 일부 동구권 국가들에 대해서는 수교원칙을 정한 바 있다. 공산주의 정치활동 및 선동을 이유로 1969년 주코트디부아르 구 소련대사관을 철수시켜 소련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한때 백인들이 아파르트헤이트로 정권을 유지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대화를 주장했던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통일기구(OAU)로부터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한국은 코트디부아르의 독립 즉시 승인하고 1961년 7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66년 2월에는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주한 코트디부아르 대사관은 1997년 개설되었다. 한국은 우호협력 차원에서 차량, 의약품, 농기구 등을 무상 원조해왔다. 또한 의료지원단, 잠업기술자, 태권도 사범등을 파견하였다. 아비장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지사가 진출해 있다. 양국간 1968년 의료기술협정, 1980년 문화협정, 1986년 경제기술협력협정 및 무역협정, 1999년 EDCF 기본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한국 교민은 170여명 정도가 있다.
조선과 코트디부아르는 1985년 1월 수교했다. 이후 현지 공관이 폐쇄되면서 현재는 주가나 조선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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