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리온 지도
시에라리온 공화국(Republic of Sierra Leone)은 북쪽과 동쪽으로 기니, 남쪽으로 라이베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은 대서양에 면해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340km에 달한다. 면적은 71740㎢, 인구는 약 640만명이다. 수도 프리타운(Freetown)은 이 나라 최대의 도시로 세계 3대 천연 항구인 시에라리온 항에 붙어 있다. 시에라리온 항에는 엘리자베스 2세 부두 (Queen Elizabeth II Quay,QE II Quay,Deep Water Quay)가 있다. 프리타운의 남동쪽 16㎞ 지점의 헤이스팅스(Hastings)에는 국내선 공항, 시에라리온 강 건너 룽기(Lungi)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시에라리온은 크게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서부의 해안 늪지대는 고도가 낮고 평평한 평야지대이다. 프리타운이 있는 시에라리온 반도(Sierra Leone Peninsula)는 해발 888m의 피켓 구릉을 중심으로 삼림이 울창한 산간지대이다. 내륙 평원지대는 사바나 초원지대, 기복이 완만한 삼림지대, 바위가 많고 가파른 경사지와 구릉지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동부에는 고봉들이 산재한 광대한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 고원지대에는 로마(Loma) 산맥을 비롯해서 팅기 구릉지대(Tingi Hills) 등 여러 개의 산괴가 있다. 로마 산맥에는 이 나라 최고봉인 빈투마니 산(Mount Bintumani, Loma Mansa, 1948m)이 솟아 있다. 팅기 구릉지대에는 산칸비리와 봉(Sankan Biriwa Peak, 1853m)이 있다. 남부는 모아 강(Moa River) 상류 유역이다. 강들은 대체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시에라리온을 관류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포트로코 강(Port Loko Creek)과 로켈 강(Rokel River)이 합류해서 이루어진 시에라리온 강(Sierra Leone River)은 남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유입되는 폭 6~16㎞, 길이 40㎞의 삼각강이다. 강의 하구에는 시에라리온의 대표적 항구인 프리타운 항과 페펠(Pepel) 항이 있다. 해안에는 망그로브 늪지대가 펼쳐져 있다.
시에라리온의 기후는 고온다습하고 강우량이 매우 많은 열대성 기후다. 연평균기온은 26℃, 연간기온은 26∼36℃를 오르내린다. 밤에는 16℃까지 내려간다. 강수량은 내륙보다 해안지방이 훨씬 많다. 특히, 피닌슐라 산맥(Peninsula Mountains)은 연간 5080㎜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우기는 5~11월, 건기는 12∼4월이다. 7∼9월에는 집중호우와 폭우가 내린다. 12월~2월의 건기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하마탄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온다.
국토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삼림지대에서는 아프리카산 마호가니인 카야와 티크 같은 귀중한 목재가 많이 생산된다. 3000㎢의 삼림보호지대와 약 130㎢의 보호림이 있다. 야생동물은 리카온(African Wild Dog, Lycaon pictus), 원숭이, 침팬지, 살쾡이, 호저, 영양, 악어와 여러 가지 조류 등이 서식한다. 코끼리나 표범, 사자, 하이에나, 물소 등은 비교적 드물다. 가경지는 국토의 약 25%, 목초지는 약 30%다. 대표적인 광물자원은 다이아몬드다. 1930년부터 세와 강(Sewa River) 상류에서는 다이아몬드가 채굴되고 있다. 철광석, 보크사이트, 금홍석(이산화티타늄) 매장량도 풍부하다.
고고학적인 발견에 의하면 시에라리온 지역에는 최소한 2500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9세기경에는 철기가 도입되었다. 서기 1000년경 해안의 정착민들은 농업을 행하고 있었다. 빽빽한 밀림지대는 아프리카의 다른 문화와 이슬람의 전파로부터 이 나라를 고립시키는 역할을 했다.
1462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로 다 신트라(Pedro da Cintra)는 해안지역을 탐험하고 '사자 산(Lion Mountains)'을 뜻하는 '세라 드 레온(Serra de Leão)'이라고 명명했다. 이 무렵 셔브로 섬과 프리타운 만 사이의 해안 우림지대에는 불롬족(Bullom), 프리타운 만 북쪽에서 소 스카시스 강(Little Scarcies River)까지는 로코족(Loko), 소 스카시스 강 입구와 섬에는 템네족(Temne), 소 스카시스 강 상류에는 림바족(Limba)이 거주하고 있었다. 북부의 사바나 구릉지대에는 수수족(Susu)과 풀라족(Fula, Fulani)이 살고 있었다. 수수족은 정기적으로 풀라족이 짠 의복과 소금을 하곡 루트를 따라서 해안의 부족들에게 가져와 철기와 금으로 바꾸어 갔다. 로마롱족(Romarong)으로 알려진 멘데족(Mende)과 코노족(Kono)은 동부에 정착했다.
1495년 포르투갈인들은 시에라리온 반도의 프리타운에 요새를 세웠다. 이후 네덜란드인과 프랑스인도 이 지역에 들어왔다. 15세기말부터 유럽 상선이 정기적으로 드나들면서 공산품과 노예, 상아를 교역하기 시작했다. 시에라리온은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562년부터 이 지역에 들어온 영국인도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17세기에 영국은 분드 섬과 요르크 섬에 무역소를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시에라리온 전역에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1772년 영국의 노예금지법 제정에 따라 약 4만명의 노예들이 아프리카로 귀환하였다. 1787년 영국인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 1735~1813)는 시에라리온 강 하구의 남쪽 지역을 영국에서 해방되거나 도망친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정착지로 선정했다. 노예정착사업을 위해 샤프를 중심으로 영국인 노예제 폐지론자와 박애주의자들은 출자금을 모아 성조지베이사(St. George's Bay Company)를 설립하고 프리타운을 건설했다. 5월 15일 성조지베이사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편에서 싸웠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해방노예들을 프리타운의 노바스코티아(Nova Scotia)로 이주시켰다. 이들 중에는 영국에 있던 아프리카나 서인도 제도의 해방노예도 있었다. 첫 이주민들은 풍토병과 원주민의 공격으로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1792년 프리타운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토마스 피터스(Thomas Peters, Thomas Potters in the Book of Negroes, 1738~1792)의 중재로 시에라리온사(Sierra Leone Company, 이전의 St. George's Bay Company)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을 탈출하여 영국 편에서 싸웠던 캐나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 주에서 온 아프리카인 1200명의 정착을 지원했다. 자메이카에서 탈출한 노예들인 마룬(Maroons)과 영국 해군이 나포한 노예선에서 도망친 노예들도 이 회사의 도움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이들 해방노예 이주민들은 후에 크리올 또는 크리오인(Creole, Krio people)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18세기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어에 뿌리를 둔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국제혼성어)인 크리오어 또는 크리올어(Krio, Creole language)를 사용했다. 크리오어는 이 지역의 기독교 선교나 무역의 상용어가 되었다.
1807년 영국 의회가 노예무역을 불법화하자, 영국 정부는 프리타운에 노예상들을 소탕하기 위한 해군 작전본부를 세웠다. 1808년 영국 왕실은 프리타운을 직할 식민지로 삼았다. 1816년 미국의 폴 쿠페(Paul Cuffee, 1759~1817)는 의회 의원과 영국 관리의 지원을 받아 38명의 아프리카계-미국인 해방노예들을 프리타운에 정착시켰다. 1817년 쿠페가 죽자 미국 해방노예들의 이주정책은 중단되었다. 프리타운은 1821부터 영국령 서아프리카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영국령 황금해안과 감비아를 통치하던 영국 총독부도 이곳에 있었다. 1827년 어레올 산(Mount Aureol)에 서아프리카 최초의 서양식 대학교인 푸라베이대학(Fourah Bay College)이 설립되자 영어를 사용하는 서아프리카인들이 몰려들었다. 1850년경 프리타운의 해방노예는 7만5천명을 헤아렸다. 1893년 프리타운은 자치시가 되었다. 1896년에는 시에라리온 전역이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되었다.
원주민들은 영국의 식민통치와 크리오인들의 지배에 저항하여 여러 차례 무장투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영국이 원주민들에게 가옥세(Hut Tax)를 부과하자 1898년 4월 27일 템네족 부족장 바이 부레(Bai Bureh, 1840~1908)는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영국군과 일명 '가옥세 전쟁(Hut Tax war)'을 벌였다. 림바족과 로코족(Loko), 소소족(Soso), 키시족(Kissi), 만딩카족(Mandinka)도 템네족을 도와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그해 11월 11일 바이 부레가 체포되어 황금해안으로 추방되고, 그의 동료 96명이 교수형을 당하면서 저항투쟁은 끝났다. 이후 큰 규모의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지만 크고 작은 폭동과 파업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1935년 영국은 거대 다이아몬드 기업인 드비어스(De Beers)의 계열사인 시에라리온실렉션트러스트(Sierra Leone Selection Trust)에 98년간 시에라리온의 광물채굴 독점권을 주었다. 같은 해 크리오인(Krio people, Creole people) 출신 월리스 존슨(Isaac Theophilus Akunna Wallace-Johnson, I. T. A. Wallace-Johnson, 1895~1965)은 나이지리아의 민족주의 선구자로 초대 대통령을 지낸 벤자민 은남디 아지키웨(Benjamin Nnamdi Azikiwe, Nnamdi Azikiwe, Zik, 1904~1996)와 회동한 뒤 황금해안 주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서아프리카청년동맹(West African Youth League, WAYL)을 조직했다. 서아프리카청년동맹(WAYL)은 이후 시에라리온에서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1938년 월리스 존슨이 시에라리온으로 돌아오자 WAYL은 프리타운 시의회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1950년 영국령서아프리카민족회의(National Congress of British West Africa) 시에라리온 지부 회원이었던 월리스 존슨과 해방노예의 후손인 허버트 크리스찬 반콜레-브라이트(Herbert Christian Bankole-Bright, 1883~1958)는 크리오 민족주의자 정당인 시에라리온민족회의(National Council of Sierra Leone, SLNC)를 창설했다. 시에라리온민족회의(SLNC)는 프리타운의 특권층인 크리오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51년 4월 림바족 출신의 시아카 프로빈 스티븐스(Siaka Probyn Stevens, 1905~1988)와 멘데족 출신의 밀턴 마르가이(Milton Augustus Strieby Margai, Milton Margai, 1895~1964)는 인민당(Peoples Party, PP)과 보호령교육진보동맹(Protectorate Education Progressive Union, PEPU), 시에라리온단체협회(Sierra Leone Organisation Society, SOS) 등을 합병하여 보수주의 경향의 시에라리온인민당(Sierra Leone peoples Party, SLPP)을 창당했다. 같은 해 11월 식민지와 보호령 입법기관을 통합하고 독립의 틀을 마련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다. 신헌법하에 실시된 입법회의(Legislative Council) 선거에서 시에라리온민족회의(SLNC)는 7석 가운데 5석을 차지하여 승리했다. 그러나 시에라리온인민당(SLPP)은 2석에 그쳤지만 무소속 전원과 간선 부족장 의원 8명의 지지를 받아 다수당이 되었다. SLPP는 시에라리온 원주민 동포정당(countryman's party)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어서 부족장들의 지지를 받았다. 1953년 밀턴 마르가이는 보호령 수석장관(chief minister)에 임명되었다.
1955년 장인조합(artisan union)이 촉발한 민중봉기가 일어나 운수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민중봉기는 SLPP와 크리오인 정당, 특히 연합시에라리온진보당(United Sierra Leone Progressive Party, USLPP)과의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1957년 5월 실시된 입법회의 선거에서 밀턴 마르가이가 이끄는 SLPP는 39석 가운데 24석, 무소속 10석, 연합시에라리온진보당(USLPP)은 5석을 차지하였다. 간선 부족장 의원은 12명이었다. 6월 수석장관의 명칭이 수상(prime minister, 총리)으로 바뀌었다. 입법회의 선거 뒤 밀턴 마르가이의 이복동생인 앨버트 마르가이(Albert Margai, Albert Michael Margai, 1910~1980)는 SLPP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종족간의 갈등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다당제 민주주의를 폐지하려고 시도했던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1972)나 우간다의 밀턴 오보테(Milton Obote, 1925~2005)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도부 내 불협화음으로 SLPP와 결별한 시아카 스티븐스는 1958년 앨버트 마르가이와 함께 영국 식민지 정부에 참여한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겨냥한 인민국가당(People's National Party, PNP)을 결성하였다.
1961년 4월 27일 시에라리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바이 부레가 템네족을 이끌고 영국에 저항하는 가옥세 전쟁을 일으킨 날이었다. 프리타운을 수도로 정한 시에라리온은 영연방의 일원으로 의회민주제를 선택했다. 밀턴 마르가이는 독립 시에라리온 초대 수상에 임명되었다. 1962년 재정장관에 임명된 앨버트 마르가이는 통화를 영국 파운드에서 리온(leone)으로 바꾸고, 시에라리온 국립은행을 설립하였다. 시아카 스티븐스 광산노동장관은 인민국가당(PNP)과 결별하고 북부를 지지세력으로 한 사회주의 경향의 전인민회의(All People's Congress, APC)를 창당했다. 그는 동부와 북부에서 발생한 종족간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정치력을 인정받았다. 5월 실시된 총선에서 밀턴 마르가이의 집권 SLPP는 62석 가운데 28을 얻어 다수당이 되었다. 전인민의회(APC)는 16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었으며, 무소속은 14명이 당선되었다. 코노족(Kono) 대추장(Paramount Chief) 탐바 숭구 음브리와(Tamba Sungu Mbriwa)가 이끄는 시에라리온진보독립운동(Sierra Leone Progressive Independence Movement, SLPIM)은 4석을 얻었다. 간선 부족장 의원은 12명이 선출되었다.
1964년 4월 밀턴 마르가이의 사망으로 앨버트 마르가이가 후임 수상이 되었다. 시에라리온을 일당독재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그는 부정부패와 노골적인 친멘데족 경향으로 비난을 받았다. 정부 관료나 고위 군장성은 멘데족이 독차지했으며, 멘데족의 본거지인 남부-동부 출신자들은 각종 인사에서 특혜를 받았다. 1967년 3월 실시된 총선에서 APC는 66석 가운데 32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었다. 지지율이 추락한 SLPP는 28석, 기타 6석을 차지했고, 간선 부족장 의원은 12명이었다. APC는 템네족과 수수족(Susu), 로코족(Loko), 만딩카족(Mandinka), 크리올인(Creole)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멘데족과 셰르보족, 풀라니족은 SLPP를 지지했다. 1967년의 선거 당시만 해도 시에라리온은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앨버트 마르가이는 시에라리온의 민주정치를 영원히 변화시키려고 하였으며, 자신의 독선과 부패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앨버트 마르가이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헨리 보스톤(Henry Josiah Lightfoot Boston, 1898~1969) 영국 총독이 시아카 스티븐스를 새로운 총리와 프리타운 시장에 임명하자 시에라리온군 사령관 데이비드 란사나(David Lansana, 1922~1975) 준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티븐스 총리를 가택연금에 처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데이비드 란사나는 앨버트 마르가이의 친구로 같은 멘데족 출신이었다. 그는 총선결과를 무효로 한 뒤 스스로 임시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3월 23일에는 시에라리온군 고위장교들이 또 다른 쿠데타를 일으켜 란사나를 체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이들은 국가개혁평의회(National Reformation Council, NRC)를 출범시키고 앤드류 스미스(Andrew Terence Juxon-Smith, 1933~1996) 준장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1968년 4월 존 아마두 방구라(John Amadu Bangura) 준장을 중심으로 한 하사관들이 일명 사젠트 쿠데타(Sargents Coup), 자칭 반부패혁명운동(Anti-Corruption Revolutionary Movement, ACRM)를 일으켜 국가개혁평의회(NRC)를 전복했다. ACRM은 NRC 위원들을 체포하였고, 쿠데타에 연루된 군장교와 경찰간부들을 파면했다. 민정을 회복시킨 ACRM은 시아카 스티븐스를 총리에 복귀시켰다. 1968년 11월 스티븐스는 지방의 소요사태를 빌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971년 4월 의회가 시에라리온 공화국을 선포하자 스티븐스의 칭호는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변경되었다. 기니는 스티븐스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시에라리온에 군대를 파견했다. 스티븐스는 권력을 점차 강화하면서 폭력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트븐스는 림바족과 동맹관계에 있던 템네족에 대한 노골적인 우대정책을 폈다. 템네족은 림바족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부족이 되었다. 1973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SLPP는 광범위한 협박과 노골적인 방해로 인해 선거를 보이코트했다. APC는 84석 중 83석을 휩쓸었다. 무소속은 1석을 건졌으며, 12석의 부족장 의원은 간선으로 선출됐다.
1976년 3월 실시된 대선에서 스티븐스는 단독후보로 출마하여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월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APC는 74석, 제1야당 SLPP는 15석을 얻었다. SLPP는 APC가 유권자들을 위협하고 표를 도둑질하는 등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1978년 7월 스티븐스 정권은 국민투표로 시에라리온을 APC 일당 통치 국가로 만드는 조항을 헌법에 명문화하였다. SLPP가 우세한 지역에서도 일당제 독재국가에 찬성하는 표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부정선거가 심하게 자행되었다는 증거였다. 7년 임기의 대통령 후보는 유일합법정당인 APC 전국 대표자회의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의회는 5년 임기의 국회의원 127명으로 구성되었다. 127명 가운데 105명은 APC가 지명한 후보 중에서 선출되었으며, 10명은 대통령이 지명하였다. 12명은 대추장 가운데 간선으로 선출하였다. APC가 승인한 후보만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으므로 야당 국회의원들은 의석을 유지하려면 APC에 입당해야만 했다. 대통령은 언제든지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다.
1980년 7월 스티븐스는 아프리카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OAU) 의장이 되었으나 그의 정권은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패정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또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가장 잔인한 독재자로 악명이 높았다. 스티븐스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모든 신문으로 하여금 상당한 금액의 등록비를 내고 정보통신부에 등록을 강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1985년 11월 국가경제를 파탄시킨 독재자 스티븐스는 마지막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다. 그러나 APC 의장직은 유지했다. 같은 달 실시된 대선에서 스티븐스의 간택을 받은 림바족 출신의 조셉 사이두 모모(Joseph Saidu Momoh, 1937~2003) 소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6년 5월에는 APC 후보들만 출마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템네족 아버지와 만데어를 사용하는 로코족(Loko) 어머니를 둔 포데이 산코(Foday Sankoh, 1937~2003)는 아부 아메드 카누(Abu Ahmed Kanu)와 라쉬드 만사레이(Rashid Mansaray) 등과 함께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모 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세력을 결성하였다. 모모 정권은 저항운동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주로 무직 청년과 학생들로 구성된 포데이 산코 그룹은 가나로 추방된 뒤 리비아로 가서 카다피의 첩보대(secret service military) 훈련소에 들어갔다. 산코는 여기서 나중에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되는 찰스 테일러(Charles McArthur Ghankay Taylor, 1948~)를 만났다. 혁명을 꿈꾸던 산코 그룹은 리비아에서 돌아온 뒤 라이베리아를 거점으로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 RUF)을 결성하고 반정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동부의 다이아몬드 산지인 코노(Kono District) 지역으로 들어가 광부들에게 혁명이념을 전파하였다.
모모는 국정에 태만하고 우유부단했으며, 참모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그 결과 막대한 다이아몬드 수입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시에라리온 경제는 붕괴하였고, 통화가치도 떨어졌다. 재정의 고갈로 석유를 사오지 못해 수개월 동안 전기공급도 중단되었다. 1990년 일당제를 폐지하고 다당제 국가를 골자로 한 모모 정권의 개헌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모모의 개헌안은 시에라리온을 가난과 혼란의 질곡에서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군부의 빈번한 쿠데타, 독재정권에 의한 인종차별 정책, 경제실패에 따른 실업률 증가 등은 심각한 정치적 불안을 야기시켰다. 1990년 라이베리아민족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NPFL) 지도자 찰스 테일러가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을 일으켰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는 나이지리아 주도의 평화유지군(ECOMOG)의 후방기지를 시에라리온에 설치하였다.
권력자들과 군벌들의 계속되는 부정부패와 다이아몬드 수입의 착복으로 시에라리온에서는 내전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인접국 라이베리아에서의 내전 발발은 도화선이 되었다. 1991년 3월 23일 군벌 포데이 산코가 이끄는 혁명연합전선(RUF)이 라이베리아로부터 동부의 카일라훈(Kailahun District) 지역을 공격하면서 시에라리온 내전(Sierra Leone Civil War)이 발발했다. RUF는 '노예도 주인도 없다. 부와 권력은 인민에게!(No More Slaves, No More Masters. Power and Wealth to the People!)'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RUF는 한달만에 다이아몬드가 풍부한 이스턴 주(Eastern Province)를 장악했다. 찰스 테일러는 RUF에 용병과 무기를 지원하고 그 댓가로 다이아몬드를 받았다.
초기에 RUF는 부패한 APC 정권의 타도, 다당제 민주주의 회복, 다이아몬드 수입의 공평한 분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억압과 착취의 철폐를 약속함으로써 경제의 붕괴와 부패한 프리타운의 지배층에 분노하고 있던 시에라리온인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아사에 직면한 주민들은 산코의 약속을 믿고 RUF 반정부군(반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산코는 약속을 저버리고 다이아몬드를 찰스 테일러로부터의 무기구입 대금과 자신의 축재에 이용했다. RUF 반군은 소년병의 강제징집, 식량과 마약 등의 재화 약탈, 지방정부 요인의 살해,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레바논인과 세네갈인의 처형 등을 자행함으로써 주민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다가왔다.
당시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 15위국 가운데 9개국이 아프리카에 있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주이거나 채광회사의 대주주들은 정부군의 고위 장성들이나 반군 지도자들이었다. 정부군이나 반군 군벌들은 다이아몬드를 판매해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키기 위한 무기구입이나 외국인 용병고용에 사용해왔다. 연간 생산액이 7천만 달러로 추정되는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는 전량 RUF 반군지역에서 생산되었다. RUF 반군이 장기간의 내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부를 안겨주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에라리온 정부군과 반군 군벌들은 코네(Kone)와 통고(Tongo)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이것이 이 나라에서 발생한 5번의 쿠데타와 10년 이상 지속된 내전의 원인이었다. 이처럼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의 전쟁이나 반란의 이면에는 '피묻은 다이아몬드(Blood Diamond)'가 있었다.
RUF 반군은 다이아몬드 생산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수만명의 주민들에 대한 살인, 납치, 집단강간, 신체절단, 방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산코는 부하들에게 전리품의 개인적 소유를 허용함으로써 비인도적인 전쟁범죄를 부추겼다. RUF는 수천명에 이르는 7~12세 사이의 어린이들을 납치했다. 소년들은 반군에 편입되었으며, 소녀들은 강간을 당한 뒤 성노예가 되었다. 특히 RUF는 소름 끼치는 방법을 이용하여 2만3천명 이상의 소년병들에게 잔인무도한 만행을 저지르게 했다. 소년병을 이용한 RUF 반군의 잔혹한 만행은 국제적인 비난과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산코는 자신의 전략에 이의를 제기한 동지 아메드 카누와 라쉬드 만사레이를 즉결처형했다.
에드워드 즈윅(Edward Zwick, 1952~)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Wilhelm Dicaprio, 1974~)와 제니퍼 코널리(Jennifer Lynn Connelly, 1970~), 디몬 하운수(Djimon Gaston Hounsou, 1964~) 주연의 '피의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2006년)'는 바로 시에라리온 내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converted diamond, conflict diamond, hot diamond, war diamond'라고도 부르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앙골라, 라이베리아, 콩고 등 내전지역에서 채굴되어 반란자금으로 조달되거나 군벌의 활동자금, 침략군의 전비로 이용되는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이 영화는 그레그 켐벨(Greg Campbell)의 '다이아몬드 잔혹사(Blood Diamonds)'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촬영은 대부분 과거 내전으로 황폐화되었던 모잠비크에서 이루어졌다.
아프리카 반군들의 무기자금 공급원인 다이아몬드 밀거래의 실상을 파헤치는 기사를 쓰기 위해 내전 중인 시에라리온에 온 미국의 여기자 매디 보웬(제니퍼 코널리)은 믿을 만한 취재원을 찾다가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한 남아프리카 출신의 용병이자 다이아몬드 밀거래업자인 대니 아처(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만나게 된다. 대니 아처는 다이아몬드 밀매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서 대니 아처는 가족과 떨어져 RUF 반군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솔로몬 반디(디몬 하운스)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대니 아처는 솔로몬에게서 그가 감옥에 오기 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한 자리에 다시 모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엄청난 크기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은밀하게 숨겨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감옥을 빠져나온 뒤 세 사람은 숨겨놓은 다이아몬드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막대한 이권이 걸린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는 RUF 반군과 정부군에 의한 끔찍한 인권유린과 잔인한 전쟁범죄의 실상이 드러난다. 또, 다이아몬드의 불법채굴 과정에서 아동학대, 강간, 사지절단 등의 만행을 저지르는 군벌과 민병대의 배후에는 탐욕스런 서구의 다이아몬드 거대기업이 도사리고 있음도 폭로된다.
국제사면위원회 또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 글로벌 위트니스(Global Witness) 등 국제적 인권운동단체들은 다이아몬드와 관련 아프리카에서 약 4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드비어스(De Beers, DTC) 같은 각국의 다이아몬드 기업들이 이런 실상을 알면서도 '피묻은 다이아몬드'를 유통시켜 왔다고 비판했다. 그레그 켐벨은 자신의 저서에서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57~)이 이끄는 이슬람 원리주의 국제무장세력으로 반미와 반이스라엘의 기치를 든 알 카에다(القاعده, Al Queda)도 다이아몬드의 밀매로 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다이아몬드 업계에서는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끔찍한 만행이 사라졌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엄청난 광고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러나 국제인권기구들은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다이아몬드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이 사치를 위해 다이아몬드를 구매하는 동안 아프리카에서는 잔인하고 탐욕스런 군벌들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극도로 고통받고 있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비정한 기회주의자를 연기한 디카프리오는 영화개봉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다이아몬드를 구매할 때 분쟁지역에서 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생산지 서류를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아프리카의 비극을 줄이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아프리카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국제사회에 환기시켜온 아일랜드의 록 밴드 U2의 리드 싱어 보노(Bono, Paul David Hewson KBE, 1960~)를 그의 영웅이라고 밝혔다.
1992년 4월 동부의 카일라훈 지역에서 RUF 반군과 전투를 수행하면서도 모모 정부로부터 임금 미지급은 물론 전투장비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불만을 품고 있던 정부군의 발렌틴 스트라서(Valentine Strasser, Valentine Esegragbo Melvine Strasser, 1967~) 대위는 줄리우스 마다 비오(Julius Maada Bio, 1964~) 준장, 야햐 카누(Yahya Kanu) 대령 등 6명의 소장파 장교들과 함께 프리타운으로 진격하여 쿠데타로 모모의 APC 정권을 축출하고 국가임시통치평의회(National Provisional Ruling Council, NPRC)를 설치했다. 모모는 추방되어 기니의 코나크리로 망명했다. 5월 25세의 스트라서는 국가임시통치평의회(NPRC) 의장과 국가원수에 취임했다. 스트라서는 크리오인 출신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시에라리온의 국가원수가 된 사람이었다. 또, 그는 세계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원수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23년에 걸친 APC 독재정권이 전복되자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NPRC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NPRC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1991년의 헌법을 정지시키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군 장교와 경찰 간부들에게는 재판이 없이도 사람들을 구속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이 주어졌다. NPRC 고위직 위원들의 부정부패도 APC 정권 못지 않았다. NPRC도 APC와 마찬가지로 RUF의 진압에는 무능했다. NPRC 정부군과 RUF 반군 사이의 내전이 격화되면서 RUF 반군은 주민들의 손과 발, 입술, 귀, 코 등 신체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12만명의 난민이 기니로 피신하였다. 스트라서는 정권은 헌정복귀와 신헌법의 제정을 위해 군부가 설치한 국가자문회의(National Advisory Council) 의장에 만딩고족(Mandingo, Mandinka) 출신의 아마드 테잔 카바(Ahmad Tejan Kabbah, 1932~)를 추대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멘데족이었다.
1994년 이스턴 주를 평정한 RUF 반군이 남부 푸제훈(Pujehun) 지역의 다이아몬드와 보크사이트, 티타늄 광산을 장악하고 수도 프리타운까지 넘보면서 시에라리온 경제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내전으로 인해 5만명의 사망자와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 되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1995년 5월 NPRC는 당시 시에라리온 국방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천5백만 달러를 주고 남아공의 전쟁기업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스(Executive Outcomes, EO) 소속 용병부대를 RUF 반군 진압에 투입하였다. 6월 EO 용병부대는 한달만에 5백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RUF 반군을 수도 프리타운과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으로부터 국경의 근거지까지 몰아냈다. RUF 반군은 막강한 화력을 갖춘 EO 용병부대의 상대도 되지 않았다. 가공할 무기를 탑재한 EO 용병부대의 장갑 헬기는 RUF 반군을 쓸어버리듯 무차별 사살했다. 이들의 반군 진압은 거의 학살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투력을 상실한 RUF 반군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무력하게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995년 7월 스트라서는 죽마고우인 솔로몬 무사(Solomon Anthony James Musa, SAJ Musa, 1966~1999)를 NPRC 부의장직에서 해임하고 남부의 멘데족 출신 줄리우스 비오 준장을 임명했다. 1996년 1월 RUF 반군과의 휴전협상 진행과정에 불만을 품은 줄리우스 비오 준장이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나 스트라서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줄리우스 비오가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는 RUF 반군 멤버였던 그의 누이동생 아그네스 딘 잘로(Agnes Deen Jalloh)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오의 '선거 이전에 평화' 주장을 거부한 시민사회단체들은 즉시 헌정을 회복하고 대선과 총선의 실시를 요구했다. 비오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RUF 반군은 대선을 연기할 것을 주장했다.
1996년 2~3월 RUF 반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23년만에 처음으로 다당제 대선과 총선이 실시되었다. 대선에서는 SLPP의 아마드 카바가 연합국가인민당(United National People's Party, UNPP)의 존 카레파-스마트(John Karefa-Smart, 1915~)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오는 카바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총선에서도 SLPP는 남부와 동부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다. 대선 연기를 주장했던 RUF 반군은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1996년 8월 쿠데타 모의 혐의로 북부의 림바족 출신 조니 코로마(Johnny Paul Koroma, 1960~2003) 소장이 체포되었다. 카바 정권은 조니 코로마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1월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에서 아마드 카바와 RUF의 산코는 평화협정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RUF 반군이 협정을 어기고 전투를 재개함으로써 잔인한 내전이 다시 벌어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1997년 3월 나이지리아로 도주한 산코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진 뒤 투옥되었다. 산코가 석방될 때까지 RUF는 샘 보카리(Sam Bockarie, 1964~2003)가 이끌었다.
1997년 5월 조니 코로마의 체포에 불만을 품은 고위 군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카바 정권을 축출하고 무장혁명군평의회(Armed Forces Revolutionary Council, AFRC)을 설치했다. 쿠데타군 주동자들은 RUF 반군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던 정부군 중급 지휘관들이었다. 석방된 코로마는 무장혁명군평의회(AFRC) 의장과 국가원수에 취임했다. 헌정을 중단시킨 코로마는 모든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하고 시위를 금지했다. 그는 자신의 군사정권에 RUF 반군의 참여를 요청하는 한편, 체포된 산코의 석방을 요구했다. 6월 RUF 반군은 살인과 신체절단, 강간, 약탈, 방화 등 잔혹행위를 저지르면서 수도 프리타운으로 진격하여 혁명평의회무장군(AFRC)에 합류하였다. 산코는 AFRC 부의장에 추대되었으며, 다른 RUF 지휘관들도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AFRC와 RUF는 가정집과 상점을 약탈하면서 조직적으로 학살, 고문, 강간 등의 만행을 자행하여 수도 프리타운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와 영연방, UN 등 국제사회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 RUF 반군을 규탄하였다. 기니로 망명한 아마드 카바에게 아프리카의 사업에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던 인도계 태국인 은행가 삭세나(Saxena)가 접근했다. 삭세나는 카바에게 역쿠데타에 필요한 자금 1천만 달러를 지원해주는 댓가로 독점적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보장받았다. 1천만 달러에 계약을 맺은 영국의 용병기업 샌드라인 인터내셔널(Sandline International, SI)은 AFRC-RUF 군사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300t의 무기를 현지로 공수하는 한편, 멘데족 출신 사무엘 힝가 노먼(Samuel Hinga Norman, 1940~2007)이 창설한 카마조스(Kamajors) 민병대에 전투장비와 훈련을 제공했다. 멘데족의 전통 사냥꾼인 카마조스는 밀림지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2만명에 이르는 카마조스 민병대는 시민방위군(Civil Defence Forces, CDF)으로 명명되었다.
1998년 3월 시민방위군(CDF)이 지휘하는 나이지리아군 주력의 ECOMOG는 시에라리온에 군사개입을 감행하여 코로마의 AFRC 군사정권과 RUF 반군을 몰아내고 아마드 카바 정권을 복귀시켰다. 샌드라인 인터내셔널(SI)의 군사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부유한 자본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AFRC-RUF 반군은 퇴각하면서 전국적으로 약탈과 살인, 방화를 자행하였다. CDF도 내전기간 살인과 약탈, 협박 등 전쟁범죄를 자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내전이 끝나자 사무엘 노먼을 비롯한 CDF 지도자들은 UN 시에라리온특별법원에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는 ECOMOG군의 주축인 나이지리아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반면에 RUF 반군을 지원한 혐의를 받은 라이베리아, 부르키나파소와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7월 UN 안보리는 UN감시단(UNOMSIL)을 설치하였다. AFRC-RUF 반군과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ECOMOG의 주력 나이지리아 병사 약 1000명이 전사하였다. 10월부터 시에라리온 정부는 정규군을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1999년 1월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AFRC-RUF 반군은 한때 수도 프리타운을 일부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2주일 동안 반군은 6천명을 살해하고 약탈과 강간, 신체절단 등의 만행을 저지르면서 프리타운을 초토화시켰다. 이때 2천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토고 등 주변 국가들의 중재로 1999년 7월 토고의 수도 로메(Lome, Lomé)에서 아마드 카바 대통령과 RUF 반군지도자 포데이 산코는 거국정부 구성을 골자로 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0월 로메협정에 따라 UN은 RUF 반군의 무장해제를 감시하기 위해 UNOMSIL을 해체하고, 13000명의 UN평화유지군(UNAMSIL)을 파견하였다. 2000년 4월 시에라리온의 평화유지 임무가 ECOMOG로부터 UNAMSIL로 이관되었다. 2000년 5월 나이지리아군이 철수하고 난 뒤 UNAMSIL에 의해 다이아몬드 산지 출입을 금지당한 RUF 반군은 UNAMSIL을 공격하여 500여명의 대원을 포로로 잡고 억류하였다. 이에 UN은 UNAMSIL의 병력을 증강하였고, 영국군은 공수부대를 파견하였다. RUF 반군은 UNAMSIL 포로를 앞세우고 프리타운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급박한 상황에서 영국은 공수부대를 보내 시위대를 피해 도망치던 산코를 체포했다. 산코가 체포되자 시에라리온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의 체포는 곧 처참한 내전의 종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2000년 7월 UN은 시에라리온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다이아몬드 원광석의 수출을 금지했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은 찰스 테일러가 RUF 반군에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 11월 정부와 RUF 반군간의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12월 UN 총회는 다이아몬드 갈등과 인권침해가 연계된 지역에서의 불법 다이아몬드 거래를 규제하는 국제기구의 창설을 요구하는 결의안(resolution 55/56)을 채택했다. 유럽의 시민단체와 종교단체의 압력에 굴복한 거대 다이아몬드 기업들은 이들을 세계다아이몬드안트웨르펜(Antwerpen, 영-Antwerp, 앤트워프, 프-Anvers)회의에 초청하였으며, 이 모임은 후에 불법 다이아몬드 거래를 감시하는 세계다이아몬드평의회로 발전했다.
2001년부터 UNAMSIL에 의한 반군단체의의 무장해제가 시작되었다. 1월 17일 시에라리온 정부는 라이베리아, 세네갈, 말리, 기니, 나이지리아 등 주변국 국가원수들을 초청한 가운데 RUF 반군으로부터 1차 회수한 무기폐기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카바는 시에라리온 내전이 종식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3월 내전기간 RUF 반군을 지원한 라이베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라이베리아 정부가 시에라리온 대사를 추방하자 시에라리온 정부도 자국 주재 라이베리아 대리대사를 맞추방하였다. 5월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서 시에라리온 정부와 내전 당사자인 4개 반군 대표들은 무기반환협정에 서명했다. 11월 스위스에서 다이아몬드의 원산지 표시를 의무화하는 킴벌리프로세스보증협약(Kimberley Process Certification Scheme, KPCS)이 체결되었다.
2002년 1월 4개 반군 7만2천5백명이 무장해제를 종료하면서 내전은 완전히 끝났다. 내전기간 동안 20만명(일설에는 40만명)이 사망하고 50만명(일설에는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Human Rights, PHR)'는 20만명 이상의 여성들이 윤간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손, 발이 잘린 사람은 4천명이 넘었다. 같은 달 UN과 시에라리온 정부는 내전기간 1996년 11월 30일 이후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한 시에라리온특별법원(Special Court for Sierra Leone, SCSL)을 프리타운에 설치하는 협정에 서명하였다. 내전이 끝나자 22만4천명의 난민이 고향으로 귀환하여 정착했다. 2월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Rabat)에서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기니 등 3개국이 마노강연합(Mano River Union) 정상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주변국간의 긴장완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002년 5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평화적으로 실시되었다. 대선에서는 아마드 카바가 70.1%의 지지를 받아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APC의 어니스트 바이 코로마(Ernest Bai Koroma, 1953~) 후보는 22.3%로 2위,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던 평화자유당(Peace and Liberation Party, PLP)의 조니 코로마는 3%로 3위를 차지하였다. 총선에서는 집권 SLPP가 112석 가운데 83석을 휩쓸면서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APC는 27석, 평화자유당(PLP)는 2석을 얻었다.
2002년 7월 프리타운의 시에라리온특별법원(SCSL)에 재판관들이 도착했다. SCSL은 2003년 3월부터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비인도적인 전쟁범죄를 저지른 총 13명의 전범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일명 카마조스로 또는 시민방위군(CDF)의 창설자이자 지도자인 사무엘 힝가 노먼 전 내무장관, CDF 민병대장 알리에우 콘데와(Allieu Kondewa), CDF의 지휘관 모이니나 포파나(Moinina Fofana, 1950~) 전 시에라리온 군사령관은 살인, 폭행, 약탈, 정신적 고문, 집단징벌(Collective punishment) 등의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특히 노먼과 콘데와는 전쟁범죄에 소년병을 이용한 혐의도 받았다. 2003년 3월 체포된 노먼은 재판도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포파나와 콘데와에 대한 선고공판은 2007년 10월로 예정되어 있다.
RUF에서는 포데이 산코와 샘 보카리, 이사하산 세세이(Issa Hassan Sesay, 1970~), 모리스 칼론(Morris Kallon, 1964~), 어거스틴 그바오(Augustine Gbao, 1948~) 등 5명이 집단학살, 살인, 납치, 강간, 약탈, 집단징벌, 폭행, 협박, 소년병 이용, 강제노동, 방화 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되었다. 2003년 3월 전범으로 기소될 당시 샘 보카리는 찰스 테일러의 부탁을 받고 코트디부아르의 반군 지도자 펠릭스 도(Félix Doh)를 암살하고 라이베리아에 피신해 있었다. 당시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던 찰스 테일러는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 1945~)와의 거래를 늘리려면 이 나라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펠릭스 도의 제거가 필요했다. UN은 테일러에게 보카리를 체포해서 SCSL에 넘기라고 압력을 가했다. 5월 5일 보카리는 테일러의 사살명령을 받고 출동한 라이베리아군과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무려 17가지의 반인류적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수감된 산코는 재판을 기다리다가 2003년 7월 뇌출혈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2005년 12월 유엔평화유지군은 시에라리온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했다.
2007년 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내전 당시 RUF 반군에게 무기와 군수품을 제공하고 다이아몬드를 취득한 혐의로 2003년에 기소된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에 대한 전범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 관할권은 시에라리온에 있다. 시에라리온에서 테일러의 재판이 열릴 경우 그의 지지세력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우려가 있어 재판 자체만 헤이그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AFRC에서는 코모라와 코노족(Kono) 출신의 알렉스 탐바 브리마(Alex Tamba Brima, 일명 Gullit, 1971~), 브리마 바지 카마라(Brima Bazzy Kamara, 1968~), 산티기 보어보어 카누(Santigie Borbor Kanu, 일명 Five-Five, 1965~) 등 4명이 살인, 강간, 강제노동, 소년병 이용, 소년병을 이용한 국제적 범죄를 자행한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2007년 7월 열린 공판에서 브리마와 카누는 징역 50년형, 카마라는 45년형이 선고되었다. 1997년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AFRC 의장 코모라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2003년 6월에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경제의 악화, 높은 실업률, 부정부패 등으로 비판을 받아온 아마드 카바는 2007년 8월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월 11일 대선과 총선이 실시되었다. 총선에서는 종전의 비례대표제보다 단순다수 소선구제(plurality voting system, first-past-the-post)가 강화된 총선에서는 총 124석 중 지역구에서 112석을 선출했다. 나머지 12석은 SLPP와 연합세력으로 간주되는 전통적인 부족장들을 뽑았다. 집권 SLPP와 카바 정권의 저조한 경제실적, 높은 실업률, 만연한 부정부패 등을 주요 이슈로 내건 APC는 32석이 증가한 59석을 차지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집권 SLPP는 40석이 줄어든 43석, SLPP에서 분리된 민주변화인민운동(People's 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 PMDC)이 10석을 얻었다.
대선에서는 총 7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어떤 후보도 당선에 필요한 55%를 얻지 못했다. 템네족 출신의 어니스트 코로마 APC 후보는 44.3%를 얻어 1위, 집권 SLPP의 솔로몬 베레와(Solomon Ekuma Dominic Berewa, Solomon Berewa, 1938~) 현 부통령은 38.3%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두 후보간 결선투표는 9월 8일 실시될 예정이다. 어니스트 코로마 APC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예상된다.
시에라리온은 입헌공화국(constitutional republic)이다. 직선제로 선출되는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두 번까지 연임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와 행정부 수반이며, 군과 경찰의 총사령관이다. 행정부 권력 2인자인 부통령은 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선출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후보가 되려면 영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최고 입법권은 124석 정원의 단원제 국회에 있다. 112석은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직선으로 선출한다. 12석은 간선으로 각 지역의 대부족장(paramount chief)을 선출한다. 1961년 독립 이래 시에라리온 정치는 SLPP와 APC가 좌지우지해왔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다. 그외 고등법원, 항소법원, 지방법원, 전통법원 등이 있다. 대법원과 고등법원, 항소법원의 판사들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의 인준을 받는다.
시에라리온은 오랜 내전과 잦은 쿠데타로 경제가 거덜난 정치후진국이다. 다이아몬드가 풍부함에도 독재자나 군벌의 독점으로 주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높은 실업률은 사회불안의 주요 원인이다. 부족을 지지기반으로 한 정당구조는 언제든지 지역감정과 부족감정을 촉발할 수 있다. 라이베리아나 기니 등 주변국의 반군세력도 시에라리온의 정치적 안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근 시에라리온을 유럽으로 마약을 밀반입하기 위한 중간 기지로 이용하는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권력자들의 부정부패와 범죄조직간의 폭력을 야기할 것이다. 시에라리온이 콜롬비아의 마약기지가 된다면 결국 기니비사우처럼 마약천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해방노예들의 나라였던 시에라리온은 아이러니칼하게도 독재와 차별, 전쟁과 폭력, 착취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은 멀고도 멀어 보인다.
시에라리온은 농업과 광업에 기반을 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형태이다. 1인당 GNP는 세계 최저수준이며, 인간개발지수도 최하위다. 인간빈곤지수는 꼴찌에서 7번째 국가이다. 경제성장이 저조한 이유는 비효율적 행정, 부정부패, 수입비용의 증가, 수출 부진, 국제원자재 가격의 하락, 광업의 쇠퇴 등이다. 농업은 자급수준으로 주요 작물은 쌀, 카사바, 기장, 땅콩이다. 주요 수출농산물은 커피, 코코아, 야자, 생강이다.
주요 광물은 다이아몬드, 보크사이트, 금홍석(金紅石, rutile)이다. 시에라리온의 경제는 특히 다이아몬드에 의존해왔다. 다이아몬드의 연간 생산액은 3억 달러로 추정된다. 2001년도 다이아몬드의 수출액이 총수출액의 80~90%를 차지할 정도였다. 많은 양의 다이아몬드가 밀수출된다. 밀수출 다이아몬드는 돈세탁이나 불법활동 자금으로 사용된다. 내전이 종식되자 외국의 기업들이 다이아몬드 개발을 위해 시에라리온으로 다시 몰려들고 있다. 금홍석은 미국과 유럽의 투자자들의 합작회사가 1979년초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때 총수출액의 50%, 세계 생산량의 25%를 차지했으나, 내전 당시 생산시설이 거의 파괴되었다. 2005년부터 금홍석 수출이 다시 증가했다. 정유업도 중요한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연안에서의 유전탐사와 시추가 진행 중에 있다. 제조업은 주로 양조, 담배생산, 제분업 등 수입대체산업에 한정되어 있다. 전력은 주로 화력발전소에 의존하며, 몇 개의 작은 수력발전소도 있다. 프리타운에서 라이베리아의 몬로비아(Monrovia)까지 도로망이 연결된다.
시에라리온 국민은 약 18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종족은 멘데족과 템네족이다. 동부-남부의 다수부족인 멘데족은 인구의 약 30%(180만명)를 차지한다. 코노족(Kono), 쿠란코족( Kuranko), 수수족(Susu), 얄룬카족(Yalunka)은 멘데족의 일족이다. 북부와 중부의 다수부족인 템네족은 인구의 30%(180만명)를 차지한다. 시에라리온의 정치는 사실상 멘데족과 템네족이 좌우한다. 템네족은 APC, 멘데족은 SLPP를 압도적으로 지지한다. 두 종족의 경쟁은 종족간의 긴장을 야기하기도 한다. 3위는 주로 북부에 거주하는 림바족으로 인구의 8.5%를 차지한다. 림바족은 템네족과 동맹관계에 있다. 4위는 주로 동부에 분포하는 코노족으로 인구의 8%를 차지한다.
5위는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는 만딩고족(7%), 6위는 주로 서부와 프리타운에 거주하는 크리오인(크리올인, 5%), 7위는 북부와 남동부에 거주하는 풀라족(Fula, 풀라니족)은 4.7%를 각각 점유한다. 19세기에 해안을 식민지화한 해방노예의 후손인 크리오인은 정치, 행정 각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쿠란코족(22만명), 로코족(17만명), 수수족(16만5천명), 얄룬카족(7만5천명)은 주로 북부에 분포한다. 키시족(Kissi, 16만명)과 소수부족인 바이족(Vai, 2만5천명)은 주로 동부에 거주한다. 남부 해안지대에는 셔브로족(20만명)이 살고 있다. 서부와 남동부 다이아몬드 산지에는 인구의 1%를 차지하는 레바논계 시에라리온인( Sierra Leonean-Lebanese)이 거주한다. 2007년 2만명의 라이베리아 난민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아직 미귀환 라이베리아 난민 8700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용어는 영어다. 학교에서는 영어로 가르친다. 행정과 대중매체도 영어를 사용한다. 크리오어나 템네어, 만데어도 사용된다. 영어와 다양한 아프리카 언어에서 파생된 크리올인들의 혼성국제어(lingua franca)인 크리오어는 인구의 98%가 사용한다. 종교는 이슬람(60%), 애니미즘(정령신앙, 30%), 기독교(10%) 순이다. 애니미즘 신봉자 중 상당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 등 특정종교의 선교활동은 극도의 반감이나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방에서는 아직도 부족장의 권위와 명령, 부족의 관습 등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현지 부족의 관습에 어긋나거나 부적절한 행동은 큰 위험을 부를 수도 있다.
시에라리온은 AIDS가 만연한 나라다. 1999년 당시 AIDS로 8200명이 사망했다. AIDS 환자는 17만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위생은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유아사망률은 세계적으로 여전히 높은 편이다. 평균기대수명은 41세로 매우 낮다.
초등교육은 공립학교가 무료, 사립학교는 적은 수업료를 받는다. 그럼에도 학령기 아동 중 약 60%만이 취학하며, 이들 중 중등학교 진학률은 35% 이하다. 학교와 교사의 태부족으로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내전기간에 1270개의 초등학교가 파괴되었다. 2001년에는 학령기 아동의 67%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결과 성인의 65%가 문맹이다. 중등학교에는 공립중등학교, 이슬람계 및 기독교계 중등학교가 있다. 1964년에는 남부에 있는 시에라리온 제2의 도시 보(Bo)에 은잘라대학교(Njala University)가 설립되었다. 1967년 푸라베이대학과 은잘라대학을 합병하여 시에라리온대학교(University of Sierra Leone)가 설립되었다. 그외 고드리치(Goderich)에 있는 밀턴마르가이사범대학, 프리타운교육대학, 공과대학 등이 있다.
시에라리온은 많은 신문의 창간과 함께 강한 저널리즘의 전통을 갖고 있다. 라디오는 1934년 국영 시에라리온방송국(Sierra Leone Broadcasting Service, SLBS)이 설립되어 영어로 방송을 내보냈다. FM은 국영 SLBS 외에 BBC(BBC World Service), 국제라디오프랑스(Radio France Internationale), 미국의소리(Voice of America)도 방송된다. 라디오는 주민의 75%가 매일 청취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TV 방송은 1963년부터 시작했다. TV 방송국은 국영 SLBS와 ABCTV-아프리카(ABC Television-Africa, ABC)가 있다. 2007년부터 유료방송인 GTV도 방송을 시작했다. 높은 문맹률로 신문, 잡지 등 인쇄매체는 보급률이 낮은 편이다. 일간지는 15개, 주간지는 15개 정도가 발행된다. 일간지 '프리타운(Freetown)'은 정부 기관지이다. 대부분의 신문은 민간인이 발행한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사문화된 지 오래다. 정부는 의무등록제와 면허제를 통해서 언론을 매우 강력하게 통제한다. 민감한 문제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금기시된다. 1965년에 제정된 비방선동법(Seditious Libel Law)을 포함한 명예훼손법(Criminal Libel Law)은 언론의 통제에 이용되고 있다. 시에라리온은 전세계에서 언론인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내전기간에만 10명의 언론인이 사망하였다. 언론인들은 일상적으로 암살, 테러, 납치, 협박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2000년 2일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언론인보호위원회(CPJ)는 '언론자유 10적(敵)'에 시에라리온의 RUF 반군 지도자 포데이 산코를 포함시킨 바 있다. 2006년 아마드 카바가 언론의 자유를 좀더 보장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2007년 이 나라 언론의 자유는 세계에서 121등이었다.
'언론자유 10적'에는 산코 외에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Ayatollah Ali Khamenei, 1939~), 전 유고연방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2006), 전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 1926~), 전 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Alberto Ken'ya Fujimori, 1938~), 전 말레이시아 수상 마하티르 모하메드(Mahathir bin Mohamad, 1925~), 1976년부터 장기집권하고 있는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 1987년부터 장기집권하고 있는 튀니지 대통령 진 엘 아비딘 벤 알리(Zine El Abidine Ben Ali, 1936~), 1990년부터 장기집권하고 있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 1940~), 1979년부터 장기집권하고 있는 앙골라 대통령 호세 에두아르도 도스 산토스(Jose Eduardo dos Santos, 1942~) 등이 선정됐다. 이 중 장쩌민은 4년 연속, 카스트로는 6년 연속 '언론자유 10적'에 올랐다.
시에라이온의 전통예술은 15세기 이래 고급목재나 상아, 활석으로 조각한 두상과 입상, 부조가 유명하다. 종족의 종교의식과 관련된 음악과 춤이 상당히 발달해 있으며, 시에라리온 무용단의 공연을 통해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멘데족과 코노족이 천연물감으로 염색한 전통적인 옷인 가라(Gara)를 비롯하여 가죽제품, 바구니, 도자기, 양탄자 등도 유명하다. 옛 코튼트리(Cottontree) 역에 세워진 국립박물관에는 역사적인 문서와 전통 목조 또는 석조 조각품 등이 소장되어 있다. 타워 힐(Tower Hill)에는 1796년에 세워진 대통령 관저 손턴 요새(Fort Thornton)가 있다. 1852년에 세워진 영국 성공회의 성 조지 대성당(Saint George Cathedral)도 유명한 건물이다.
비동맹중립노선을 걷고 있는 시에라리온은 중국과 리비아, 이란, 쿠바 등과 외교관계를 갖는 한편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 영연방 국가로서 영국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과도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회원국들과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은 라이베리아, 기니와 지역적 또는 경제적 통합을 위해 마노강연합(Mano River Union, MRU)을 결성하였다. 유럽연합을 모델로 한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AU)과 이슬람회의기구(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 OIC),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NAM) 회원국이다. 미국과 해외주둔 미군의 보호를 위한 불처벌쌍무협정(Bilateral Immunity Agreement, BIA)을 맺었다.
한국은 1962년 6월 시에라리온과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69년에는 의료협정을 맺었으며, 1974년 11월에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이어 1979년 문화협정, 1981년 경제기술협정, 1991년 방송협력 협정(KBS-SLBS간)을 체결했다. 1992년 3월에는 상주공관을 폐쇄하고, 1999년부터 주 나이지리아 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한국교민 50명(2002년 5월 현재)이 있으며, 한인회가 결성되어 있다. 2002년 문을 연 코리아 게스트하우스는 한국에서 출장을 온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조선은 1971년 10월 시에라리온과 수교하고, 1974년 8월에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1991년 2월 조선은 상주공관을 폐쇄하고, 주 기니 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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