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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West Africa)-니제르(Niger)

林 山 2010. 2. 1. 11:59

 

니제르 지도

 

니제르 공화국(Republic of Niger)은 북쪽으로 알제리와 리비아, 서쪽으로 말리와 부르키나파소, 남쪽으로 베냉과 나이지리아, 동쪽으로 차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내륙국이다. 남동쪽은 차드 호에 면해 있다. 면적은 126만7천 km², 인구는 약 천4백만 명(2007)이다. 수도는 니제르 남서쪽 나이저 강 연안에 있는 니아메(Niamey)다. 니아메와 아가데즈(Agadez)에는 공항이 있다.

 

니제르의 북부는 건조한 산악지대로 그 한가운데에는 해발고도 1800m의 아이르(Aïr) 대산괴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 니제르의 최고봉은 아이르 대산괴의 북쪽에 솟아 있는 2022m 높이의 몽 이두칼은타게스(Mont Idoukal-n-Taghès) 또는 몽 바그잔(Mont Bagzane, Mont Bagzan)이다. 아이르 대산괴에는 몽 바그잔 외에도 그레분 산(Greboun mountain, 1944m) 등의 고봉들이 솟아 있다. 아이르 산지 양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있다. 사하라 사막은 몇몇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황량한 불모지다. 동북부의 자도 고원과 치가이 고원은 알제리의 아하가르(Ahaggar) 산맥과 차드의 티베스티(Tibesti) 산맥으로 이어진다. 남부는 나이지리아와의 국경선을 따라 낮은 고원지대를 이룬다. 남부의 토양은 소금기로 덮여 있어 황무지나 다름없다. 남동쪽 맨 끝에는 차드 호가 있다. 니제르의 최저지대는 해발 200m의 나이저 강 지대다. 서부 나이저 강 유역은 토양이 비옥한 농경지대다. 그러나 경작지는 국토의 3%에 불과하며, 약 7%는 가축 방목지이다.

 

니제르는 무덥고 건조한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평균기온은 30℃이며, 3~7월의 여름에는 50℃까지 올라간다. 국토의 2/3는 사막이며, 1/3은 반사막 또는 사헬 지대다. 자주 발생하는 가뭄으로 사막의 면적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북부와 중부 지역의 사막화는 심각하다. 12~2월의 건기에는 사막의 모래폭풍 하마탄(harmattan)이 불어온다. 바람에 날려오는 황사는 호흡기 질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뇌수막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북부 지역은 2/3가 불타는 듯한 사막이며 1/3은 사바나 지대로 강수량이 연중 20mm 미만이다. 사막의 오아시스에는 대추야자가 자라며 옥수수를 재배한다. 사바나 지대에는 마호가니, 케이푸, 바오밥 나무 등의 수목과 다양한 초본식물이 자란다. 남부는 열대 기후로 오후 평균기온이 30℃(1월)~38℃(5월)를 오르내리지만 경작에 필요한 충분한 비가 내린다. 그래서 인구의 90%는 북부의 사막을 피해 남부에 거주한다. 남부의 사막지역은 일교차가 심하여 1월의 밤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남부의 우기는 6~10월로 연평균강우량은 560㎜이다. 수도 니아메 부근에는 900㎜까지 내린다. 니제르에는 사자, 코끼리, 버팔로, 기린, 표범, 여러 종의 영양, 물소 등이 서식한다. 나이저 강에는 악어, 하마 등이 살고 있으며 가끔 바다소(manatee)가 대서양을 거슬러 올라오기도 한다.  
 
니제르 북동부 아가데즈 주 빌마(Bilma)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전기 아슐 문화(Acheulean)의 석각물들과 신석기 시대 유물은 사하라 사막 지역에 일찍부터 투아레그족이 거주했음을 알려준다. 니제르 동부는 9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카넴보르누 제국(Kanem-Bornu Empire)의 영토였다. 투아레그족은 11세기경 아이르 산지에 정착했으며, 14세기부터는 북동쪽에서 이주해 온 하우사족이 고비르(Gobir) 등 여러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다. 15세기경 투아레그족은 아가데즈에 이슬람 왕국을 세웠다. 17세기에는 송가이어를 쓰는 제르마족(Zerma, Djerma, Dyerma, Zaberma)이 나이저 강 연안에 제국을 건설했다. 18세기경 하우사 제국 가운데 하나인 고비르 왕국은 투아레그족을 몰아냈다. 18세기부터 독일의 프리드리히 호르네만(Friedrich Conrad Hornemann, 1772~1801), 스코틀랜드의 뭉고 파크(Mungo Park, 1771~1806) 등의 유럽인들이 니제르 지역을 탐험했다. 1804년 풀라니족의 이슬람 지도자 셰이흐 우스만 단 포디오(Shaihu Usman dan Fodio, Usman dan Fodio, 1754~1817)는 지하드(Jihad)를 선포하여 하우사족의 영토를 정복하고 소코토(Sokoto) 제국을 세웠다.

 

가장 먼저 발견된 제국은 10-13세기의 카넴-보누(Kanem-bornu) 제국으로 16세기에 일시적으로 재등장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하우사족이 나이제리아에서 니제르로 이동하던 시기와 일치하며 이어서 제르마족과 송하이족의 후손들이 이주해 왔다. 각 종족들의 술탄은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고 유리한 무역로와 금과 노예무역을 위한 무한정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살인을 자행했다. 니제르는 1898년까지 술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프랑스의 타격을 받고 식민지가 된다. 이상한 경제적인 분기점인 19세기 말엽의 가뭄은 소금 시장을 강하게 만들어 조미료가 금과 맞먹는 가치를 갖게됐다.

 

1891년부터 프랑스군이 진주하면서 니제르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1904년 니제르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영토의 일부가 되었으며, 1958년 프랑스 공동체 안에서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 8월 니제르는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 공동체를 탈퇴한 뒤 국제연합에 가입했다. 초대 대통령에는 제르마족의 하마니 디오리(Hamani Diori, 1916~1989)가 선출되었다. 1973년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사헬 지대가 거의 황폐화되자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디오리의 저택에서 식량저장소가 발견되면서 국민감정이 악화되었다. 

 

1974년 제르마족 출신의 세이니 쿤체(Seyni Kountché, 1931~1987) 육군중령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디오리 정권을 축출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쿤체 정권은 쿠데타 직후 체포했던 하마니 디오리를 1980년에 석방했다. 군사최고회의 의장인 쿤체는 입법권과 행정권을 독점하고 일인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종전의 입법 국민의회는 폐지되고 자문기관인 국가개발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쿤체 정권은 풍부한 매장량의 우라늄 발견으로 호시절을 맞이했다. 1980년대초 우라늄 가격의 폭락은 니제르 경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우라늄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독점한 권력층과 기업가들은 거액의 불법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국내에 은닉했다. 반면에 대부분의 니제르 국민들은 경제불황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파산한 사람들은 걸인으로 전락했다. 

 

쿤체는 자신의 임기를 5년 더 연장했다. 1987년 11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쿤체가 병사하자 제르마족 출신의 참모총장 알리 사이부(Ali Saibou, 1940~) 대령이 군사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알리 사이부는 민주주주의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이 거세게 일어났다. 북부의 아가데즈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투아레그족 반군은 사이부 정권을 더욱 약화시켰다. 가뭄과 사막화로 투아레그족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위협받고 있었다. 투아레그족과 정부는 오랜 협상을 통해 전통문화의 보전과 재정적 지원에 합의했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1990년 사이부 정권의 약속 불이행과 식량부족에 불만을 품은 투아레그족 반군이 정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학생과 노동자, 투아레그족 반군의 반정부 투쟁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1991년 여론에 밀린 사이부 정권은 특별회의를 소집하였다. 특별회의는 사이부 정권을 임시정부에 이양할 것을 결정했다. 임시정부는 1992년 12월 다당제 아래 대선과 총선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1993년 3월 실시된 대선에서 사회민주당(Democratic and Social Convention-Rahama, CDS-Rahama, CDS) 당수이자 9개 야당이 연합한 변화세력연합(Alliance of the Forces of Change, AFC)의 후보인 마하마네 우스마네(Mahamane Ousmane, 1950~)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우스마네의 대통령 당선으로 투아레그족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으나 1996년 1월 27일 하우사족 출신의 이브라힘 바레 마이나사라(Ibahim Baré Mainassara, 1949~1999) 대령이 쿠데타로 우스마네 정권을 축출함으로써 6년에 걸친 다당제 민주주의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니제르에는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으며, 투아레그족 반군의 활동도 재개되었다. 

 

1996년 1월 30일 이브라힘 마이나사라는 국가구제위원회(CSN)를 설치하고 내각에 부카리 아지(Boukary Adji, 1939~) 총리를 임명하는 등 전원 민간인으로 구성된 내각을 출범시켰다. 5월에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7월 7∼8일 실시된 대선에서 마이나사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9년 4월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마이나사라가 피살되고 하우사족 출신의 대통령 경호실장 다우다 말람 완케(Daouda Malam Wanké, 1946 또는 1954~2004) 소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4월 11일 다우다 말람 완케는 과도정부를 이끌 대통령과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4월 18일 완케 군사정부는 11월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2000년 1월1일까지 현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할 것임을 공표하였다. 쿠데타 이후 막대한 액수의 대외채무가 누적된 데다가 서방국가들의 대외원조마저 중단되어 국가재정이 바닥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1999년 7월 니제르는 1992년에 채택했던 이원집정부제의 회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 10월 17일 주요 4개 정당의 후보를 포함한 7명의 후보가 출마한 대통령선거 1차전에서 사회발전국민운동당(National Movement of the Development Society, MNSD)의 마마두 탄자(Mamadou Tandja, 1938~)가 1위를 차지했다. 이어 11월 27일 실시된 결선에서는 사회발전국민운동당(MNSD)과 사회민주당(CDS)의 연합후보로 출마한 마마두 탄자가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풀라니족과 카누리족(Kanuri)의 후손으로 알려진 마마두 탄자는 쿤체 군사정권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마마두 탄자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집권당인 MNSD의 하마 아마두(Hama Amadou, 1950~) 사무총장을 총리에 지명하였다. 민정이양과 헌정복귀로 1999년 4월 군사쿠데타 이후 중단되었던 서방국가들의 대외원조가 재개되었다. 2000년 12월 IMF는 니제르에게 특별최빈국(HIPC) 자격을 주었다. 

 

마마두 탄자는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고 긴축재정을 추진하면서 정부의 지출을 축소하였다. 2001년 니아메 소재 대학교 학생들이 정부의 지원금 삭감에 반발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MNSD 총재직에서 탄자가 물러나자 그해 12월 하마 아마두가 총재로 선출되었다. 2002년 7월 31일에는 디파(Diffa)에서 일단의 군인들이 생존권의 보장과 임금의 지급을 요구하면서 일으킨 폭동이 며칠 후에는 수도인 니아메와 응구이그미(Nguigmi) 등지로 확산되어 8월 9일이 되어서야 진압되었다.

 

2004년 11월 대통령 선거 1차전에서 1위를 차지한 마마두 탄자는 12월 실시된 2차전에서 니제르민주사회당(Nigerien Party for Democracy and Socialism-Tarayya, PNDS-Tarayya)의 마하마두 이수푸(Mahamadou Issoufou, 1952~) 후보를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총리에는 하마 아마두가 재지명되었다. 12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MNSD가 113석 가운데 47석, CDS는 22석을 차지했다. 니제르민주사회당(PNDS-Tarayya)은 17석을 얻는데 그쳤다. PNDS와 연합한 아프리카민주연합-니제르진보당(Nigerien Progressive Party-African Democratic Rally, PPN-RDA)과  니제르자영당(Nigerien Self-Management Party, PNA-Aloumat), 독립니제르연합(Union of Independent Nigeriens, UIN), 민주공화국연합(Union for Democracy and Republic, UDR)은 모두 합해서 겨우 8석을 건졌다. CDS를 이끄는 마하마네 우스마네 전 대통령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니제르를 강타한 극심한 가뭄으로 다수의 기아가 발생했다. 유엔의 식량원조 제의에 대해 하마 아마두 총리는 니제르의 위신이 깎인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2007년 2월부터 북부 말리와 니제르의 사하라 사막지역에 거주하는 투아레그족의 무장단체인 니제르정의운동(Niger Movement for Justice, MNJ)이 우라늄 광산의 개발로 방목지가 점점 축소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니제르정의운동(MNJ)은 무장투쟁을 통해서 우라늄의 판매수입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MNJ에는 유목민인 투부족(Toubou, Tebu, Tubu, Tebou, Umbararo)과 풀라니족도 참여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북부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MNJ 반란 진압에 나섰다.

 

2007년 5월 니제르 국회는 교육기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받은 하마 아마두 총리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후임 총리에는 세이니 우마루(Seyni Oumarou, 1950~)가 지명되었다. 아마두는 2009년 11월로 예정된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 유력시되던 인물이었다. 탄자는 아마두의 불신임안 통과를 암묵적으로 방관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후 집권당인 MNSD는 아마두 지지세력과 탄자 지지세력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탄자는 3선을 금지하는 헌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2009년으로 예정된 대선을 연기함으로써 집권 연장을 모색하고 있다. 2009년 중 니제르는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부의 사하라 사막과 아이르 산악지대에서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투아레그족 반군 문제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니제르 정부는 투아레그 반군세력과의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북부지역에 대한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집권당의 분열과 대립의 격화, 투아레그족의 무장투쟁은 니제르의 미래에 불안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니제르는 주로 농업과 우라늄 광업에 기반을 둔 혼합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1인당 GNP가 세계 최하위국 수준이다. 1980년대초 우라늄의 가격이 폭락하면서 니제르의 경제성장이 둔해졌다. 경제불황이 악화되면서 약 50만명의 니제르인들이 이웃 나라인 가나와 토고, 카메룬, 나이지리아, 차드 등지로 살길을 찾아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력도 부족하여 나이지리아로부터 부족분을 공급받는다.  

농업은 노동인구의 80%가량이 종사한다. 주요 작물은 기장과 수수, 땅콩, 목화이다. 그외 카사바, 초록깍지강낭콩, 쌀도 생산된다. 가뭄이 든 해를 빼고는 대체로 식량생산이 인구증가와 보조를 맞추고 있으며, 식량은 거의 자급한다. 사헬 지대에서 생산되는 축산물은 주요 외화소득원 가운데 하나다. 광공업은 우라늄 광업이 주종을 이룬다. 니제르의 우라늄 수출액은 총수출액의  30%(2005)였다. 매장량은 약 5만톤에 이르며, 전세계 생산량의 8.7%(2004)를 차지하여 세계 제4위의 우라늄 생산국이 되었다. 1969년 아를리트(Arlit) 우라늄 광산이 프랑스 정부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SOMAIR(프랑스 63.4%, 니제르 36.6%)라는 합작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1970년대말에 채굴을 시작한 제2의 우라늄 광산인 아쿠타(Akouta) 광구는 COMINAK(프랑스 34%, 니제르 31%, 일본 25%, 스페인 10%)이라는 합작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1980년대초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아를리트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가동을 시작했다. 1987년에 개장한 제3광산은 프랑스 회사가 관리한다.

 

2006년 이후 니제르 정부는 프랑스로 수출되는 우라늄의 가격을 인상하는 한편 니제르가 자체적으로 국제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우라늄 물량을 증가시켰다. 양국은 재협상을 통해 합작기업(프랑스 66.65%, 니제르 33.35%)을 설립하고 니제르 최대의 이무라렌(Imouraren) 광구를 개발하기로 하였다. 한편, 니제르 정부는 우라늄에 대한 프랑스의 독점 상태를 다변화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의 투자유치에 나섰다. 그 결과 중국과 캐나다, 인도 회사들이 새로운 광구를 개발하거나 탐사하고 있다. 중국은 2010년부터 아젤리크(Azelik) 광구의 테귀다(Teguida) 광산에서 연간 7백톤의 우라늄을 생산할 계획이다. 

 

우라늄 다음으로 중요한 광물은 금과 석유다. 금의 매장량은 약 100톤, 연간 생산량은 약 1톤이다. 테라(Tera)지역에서 발견된 금광은 1987년 캐나다의 지원으로 채굴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12개 외국광업회사가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액손(Exxon)과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Petronas)는 1995부터 2000년까지 챠드 인접 국경지역을 시추하여 약 3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중국 국립석유회사는 2004년 12월 니제르 중부 빌마(Bilma) 지역에 대한 석유 개발권을 확보했다. 니제르에서는 주석, 석탄, 동, 리튬, 은, 철 등도 생산되고 있다.

 

제조업은 농산물과 수입 대체상품의 가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비스업과 운송업은 GDP의 약 40%를 차지한다. 도로는 토고 공화국의 로메(Lome) 항 및 다른 항구들과 연결된다. 니제르는 주로 프랑스로부터 많은 개발원조를 받고 있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 일본, 나이지리아 등이다. 니제르는 코트디부아르와 부르키나파소, 베냉과 함께 사헬-베냉 협상회의의 가맹국이다. 

 

니제르 국민 대다수는 남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주요 부족은 하우사족(56%)과 송가이제르마족(22%), 풀라니족(8.5%), 투아레그족(8%), 베리베리족(Beri Beri) 또는 카누리족(4.3%)이다. 하우사족은 남부지방의 중심부, 송가이제르마족은 나이저 강 연안의 남서쪽, 카누리족은 망가족(Manga, Mangari)과 함께 니제르 동남쪽의 차드 호 주변에 거주한다. 풀라니족은 이들 지역에 모두 흩어져 살고 있다. 투아레그족은 니제르의 북부 지역, 테다족(Teda, Toda, Todaga, Todga, Tuda, Tudaga)과 투부족은 북동쪽의 티베스티 산맥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한다. 최근에는 정착생활을 하는 유목민이 증가하고 있다. 그외 유럽인과 아랍인도 소수 있다.

 

니제르에는 야만적인 성폭행과 구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노예들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에클란족(éklan, Ikelan)은 타마셰크족(Tamasheq, Tamajaq, Tamahaq), 부주족(Bouzou)은 하우사족, 벨라족(Bella)은 송가이족의 노예였다. 니제르 정부는 2003년 법적으로 노예의 소유를 금지했다. 그러나 니제르에는 아직도 약 4만명의 노예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인구의 8%가 노예라는 주장도 있다.    

 

니제르의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그외 5개의 토착어가 통용된다. 니제르인 대다수는 하우사어를 사용하며, 문학작품도 이 언어로 쓰여진 것이 많다. 제르마송가이어는 두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다. 그외 풀라니어(풀풀데어)와 투아레그어인 타마셰크어(Tamasheq, Tamajaq, Tamahaq), 아랍어 등도 쓰인다. 니제르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니제르의 종교는 주민의 95%가 이슬람이다. 토착종교인 애니미즘과 기독교는 소수다. 이슬람은 95%가 수니파, 5%는 시아파다.  

 

니제르의 모든 방송국과 언론매체는 그동안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해왔다. 1990년대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다양한 대중매체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주요 신문은 프랑스어판 일간지 르 사헬(Le Sahel)과 주간지 르 레퓌블리캥(Le Republicain)이다. 르 사헬은 니제르 정부가 발행한다. 민간인이 발행하는 프랑스어판 주간지와 월간지는 12개가 있다. TV는 국영 ORTN(Office of Radio and Television of Niger)의 텔레-사헬(Tele-Sahel)과 민영 테네레 TV(Tenere TV), 유료인 텔레스타(Telestar)가 있다. 라디오 방송국은 국영 ORTN의 라 부아 두 사헬(La Voix du Sahel)을 비롯해서 4개의 민영 라디오 네트워크가 있다. 민영 라디오 FM 네트워크는 안파니 FM(Anfani FM), 라디오 사루니아(Radio Sarounia), 라디오 테네레(Radio Tenere), R&M(Radio et Musique), 라디오 탐바라(Radio Tambara) 등이 있다.

 

니제르는 언론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을 받는 나라다.  CPRP는 7개 주의 약 80개의 공동체 라디오 방송 네트워크를 통제한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은 체포되거나 처벌을 받는다. 2002년 8월 마마두 탄자 정부는 라디오 사루니아의 뉴스 감독이자 라디오 프랑스 국제방송(Radio France International) 특파원인 무싸 카카(Moussa Kaka)를 디파에서 발생한 군인폭동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구속한 바 있다. 2007년초에도 그는 북부 아가데즈 지역에서 투어레그족의 니제르정의운동(MNJ)이 일으킨 반란을 보도한 혐의로 또 다시 체포되었다.  

 

니제르는 고용인의 노령이나 신체장애, 질병, 출산, 산업재해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는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다. 가족수당법은 14세 이하의 자녀를 둔 노동자에게 아동수당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니제르의 보건위생은 열악한 편이다. 니아메와 진데르(Zinder), 도소(Dosso) 등지에 크고 작은 병원이 있지만 시골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는 매우 부족하다. 예방접종의 실시로 천연두와 홍역으로 인한 사망률은 크게 감소하였지만 말라리아와 트라코마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유아사망률은 매우 높고 평균수명은 43세 이하로 매우 낮다. 

 

니제르는 서아프리카에서 문맹률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초등학교에 취학하는 아동은 50% 미만이며, 중등학교 진학률은10%도 되지 않는다. 프랑스와 유네스코의 지원은 교육시설의 확대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1973년에 세워진 니아메대학교는 니제르의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이다. 1987년에는 니아메에 니제르 이슬람교대학교가 세워졌다. 니제르의 문화는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 이전의 전통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니아메의 국립박물관이나 지역문화 센터에는 구전되어 온 문헌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매년 12월에는 전국청소년주간이라는 문화제가 열린다. 

 

니제르는 비동맹중립 외교노선을 걷고 있으며, 경제개발을 위하여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한국은 1960년 8월 니제르를 정식 승인하였다. 양국은 1961년 7월 수교하고, 1968년 의료기술협력협정, 1969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1972년에는 니제르에 도자기공장의 건설을 지원하고, 차량과 의약품 등을 원조하였다. 한국의 의료지원단과 태권도사범을 파견하고, 니제르의 기술연수생을 초청한 바 있다.1984년까지는 주코트디부아르 대사가 주니제르 대사를 겸임하다가 1985년 1월에 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1988년에는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1989년 5월 30일 상주공관을 폐쇄하였다. 한국 교민은 14명(2003년)이다. 니제르에는 현재 상주공관이 없으며 주코트디부아르 대사관에서 겸임한다.

 

조선과 니제르는 1974년 9월에 수교하였다. 수교 직후 니제르는 조선 지지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 이후부터 니제르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982년 3월 조선은 니제르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다가 1991년 3월 폐쇄하였다.